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뱀파이어와 피 주머니

2023.04.05 20:0604.05

이번 회의가 소집된 계기는 정상민 군 때문이었다. 계보에 따르면 핸더슨 경의 9대 후손이자 정 씨 가문의 둘째 아들로 알려진 정상민 군이 요즘 부쩍 외로움을 느꼈는데, 그 결과 자신에게도 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정씨 가문의 수장인 정인환 씨가 설득도 해보고 야단도 쳐보았으나, 기어코 정상민 군이 지부에 자신의 혼인에 관한 회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동아시아 협회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축에 속하는 지부가 대한민국 지부였다. 이 지부의 구성은 정 씨 가문 넷과 김 씨 가문 셋, 그리고 최 씨 가문 여섯으로 꽤 단출했다. 열두 가문과 백팔십여 명이 소속되어 있는 중국 지부나 다섯 가문과 육십여 명이 소속되어 있는 일본 지부에 비해서는 확실히 작았다. 온갖 암투와 가문 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빈번한 중국 지부나(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근래 들어 중국 지부의 위상이 달라졌다. 동아시아 협회를 넘어 세계 뱀파이어 총회에서의 발언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나중에 가서는 중국 지부가 종족의 발원지인 영국 지부를 뛰어 넘으리라는 게 정설이었다) 일본 지부에(여기도 마찬가지인 게, 뱀파이어를 위한 온갖 테크놀로지와 그에 따른 이권을 점하고 있는 데가 바로 일본 지부였다) 비하면 꽤나 가족적인 분위기의 지부였다. 서로 간의 왕래가 잦았고 작은 다툼과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이 없지는 않으나 가문 간에 척을 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회의는 오랜만에 소집된 공식 회의였지만 어제 보았던 옆집 이웃을 오늘 또 보는 격이어서 공식 회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최 씨 가문의 수장이자 대한민국 지부의 지부장인 최현봉 씨가 소유한 제약 회사의 대회의실에서 주최된 이번 공식 회의는 처음부터 소란스럽고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자. 제 사십육 회 정식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길쭉한 미음자 모양의 테이블에서 짧은 획에 속하는 자리 한가운데에 앉은 최현봉 씨가 엄숙하게 선언하였으나 젊은 뱀파이어는 서로 웃고 떠들며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었고 중년 뱀파이어는 사업 얘기 주식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음자 모양의 테이블을 일정한 간격으로 채운 열세 명의 뱀파이어는 모두 젊디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어 누가 젊은 뱀파이어인지 또 누가 나이 먹은 뱀파이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하얀 피부와 숯처럼 검은 머리칼……. 모두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엄연히 제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의 부모였고, 또한 제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의 자식이었다. 지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현봉 씨도 그저 보이는 대로만 보자면 스무 살 적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본다면-그럴 일이 있다면- 주름 한 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한 저 얼굴의 이면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현봉 씨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최현봉 씨가 생각하기에 오늘 다뤄질 안건은 꽤 중요한 안건이었다. 정상민 군의 혼인 건이 중요한 게 아니었고-비록 정상민 군으로부터 시작된 공식 회의였지만, 혼인 건 다음에 다뤄질 안건이었는데 해당 안건만큼은 대단히 진지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최현봉 씨는 회의가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이 안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동아시아 협회의 작은 지부, 작지만 결코 약하다고 볼 수 없는 대한민국 지부의 운명이 정해졌다. 오늘 아침 적십자로부터 제공받은 혈액팩을 뜯어 마시면서 최현봉 씨는 다짐했다. 더 이상 미뤄두기만 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시작이라고 시작!”

최현봉 씨가 벌컥 화를 내자 일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혈기왕성한 젊은 뱀파이어와 여전히 혈기를 잃지 않은 중년 뱀파이어가 입을 꾹 다물고 가운데 자리에 앉은 그를 쳐다보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최현봉 씨가 입을 열었다.

“우선 첫 번째로 다뤄야 할 안건부터 처리합시다. 정상민이, 발언해라.”

최현봉의 맞은편 자리, 마찬가지로 짧은 획에 속하는 자리이지만 맨 끝자리에 속하는 자리에 앉은 정상민 군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저 외로워요.”

“그게 끝이야?” 김 씨 가문의 수장인 김순매 여사가 흥흥 특유의 비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좀 더 그럴 듯하게 말해봐, 상민아.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잖니.”

“음……. 몸도 다 자랐잖아요. 이제 저도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짝을 찾고 싶어요.”

“저기…….” 정 씨 가문의 수장이자 정상민 군의 아버지인 정인환 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저 녀석을 말려봤습니다만, 영 고집을 안 꺾네요. 어쨌든 저 놈의 발언이 정 씨 가문을 대표하는 발언은 아닙니다요.”

“야 너, 뱀파이어 된 지 몇 년 됐어?”

김순매 여사의 남편이자 대형병원 몇 채를 소유한 김흥만 씨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정상민 군으로 쏘아보았다.

“팔십삼 년 됐어요.”

“우리가 몇 년째에 아이를 갖은 지 알아? 결혼하고 백오십 년이 지나서야 아이를 가졌어.”

김홍만 씨가 자기 옆자리에 앉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김영희 양을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게 뭐요. 제가 아이를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그저…… 제 짝을 찾고 싶다구요. 제가 알기로는, 여사님은 뱀파이어 된 지 이십 년 만에 아저씨랑 결혼했다면서요. 몸도 다 안 자랐는데.”

정상민 군이 반항아처럼 김홍만 씨를 꼬나보았다.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으니까 그랬던 거고. 그리고 그때는 성인이 되기 전이더라도 혼인이 가능했단다. 혼인에 대한 규칙이 정해지기 전이었거든.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하잖니.” 김순매 여사가 말했다. “우리 부부는 말이야.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원했어. 근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알지? 전에 아줌마가 얘기해줬잖아. 세계대전 때문이야. 인간들이 쉬지 않고 서로를 죽이고 그러는데, 쉽게 식구를 늘릴 수가 있겠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다 시기라는 게 있는 법이야.”

“요즘만큼 좋은 시대가 어디 있어요. 아저씨나 아줌마나, 우리 아빠나 엄마도 마찬가지고요, 아무튼 어른들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우리 세대한테만 왜 이렇게 많은 제약을 두는 거냐구요. 진짜 억울해요. 안 그래 종수야?”

정상민 군이 자기 또래인 최종수 군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최종수 군은 자기 아버지인 최현봉 씨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애매하게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자. 이쯤에서 이 뱀파이어 종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뱀파이어에게 혼인이란 무엇이고 아이를 갖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생이라는 축복을 누리는 대신 감내해야 할 불행일까. 창백한 피부 안쪽에 위치해 있을 몇몇 장기들은 감염으로 인해 그 작동이 멈추게 된다. 대표적으로 심장이 작동하지 않았고 생식 기능도 더 이상 쓸모없는 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심장과 생식기가 죽어버린 건 아닌데, 애초에 죽음을 초월한 종족인 까닭이다. 다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창백한 피부 안쪽에서 창백한 피부만큼이나 창백해져버려서는 탐스러운 분홍빛깔로 존재하기만 했다. 어쨌든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불임의 육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그 우수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최초의 뱀파이어인 핸더슨 경은 태초의 박쥐에게 물린 이후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의 가족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그래서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더 이상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게 되어 그러니까 늙지를 않아 인간 세계에 정 붙이고 오래 머무르기도 어려우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그대로 좌절하여 몸종조차 죄다 도망가서 휑한 성을 홀로 지키던 핸더슨 백작은-그때는 백작이었다- 문득 어떻게든 가족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인과 자녀를 두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구강 안에 득시글거리는 세균을 이용하여-목을 물어뜯고 상처 난 부위에 침을 바르는 원초적인 방식으로 하여금 피 주머니에 불과한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핸더슨 경은 아름다운 첫 번째 부인을 얻었고 첫 번째 부인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부인보다 더 아름다운 두 번째 부인까지 얻었으며, 어린 아이 셋을 납치하여 그 아이들의 목을 차례대로 물어뜯고는 두 아이는 첫 번째 부인 사이의 자녀로 삼고 남은 한 아이는 두 번째 부인 사이의 자녀로 삼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새로이 발견되었는데,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뱀파이어인 만큼 이 아이들도 영원히 꼬마 뱀파이어일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꼬마가 어른이 될 때까지 세포는 느리지만 꾸준히 분열하였고 그리하여 인간보다 여섯 배에서 열 배 정도 느린 속도로 천천히 아이들이 자라났다. 그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핸더슨 경이 몇 년에 걸쳐 엉엉 울었다는 풍문이 있었다. 핸더슨 경이 그렸던 이상적인 가족상에서 몇십 년 간 지속되는 사춘기는 없었던 것이다.

다 자란 아이들은 아버지 핸더슨 경의 품을 떠나 자기만의 가족을 이루고자 했다. 어른이 된 세 명의 뱀파이어는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자기만의 가문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뱀파이어의 개체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개체수가 많아지니 언제나 어둠 속에 묻혀 있어야 할 이 종족의 정체가 탄로 날 위기가 여러 차례 생기게 되었다. 인간 세계에서는 다행히도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통해서 그저 허구의 존재로서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 세계로 뻗어나간 모든 뱀파이어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개체수가 많아지니 원활한 혈액 수급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본디 모든 인간이 그들의 피 주머니지만 모든 자원을 쉽사리 소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쉽사리 잡아먹었다가는 정체가 탄로 날 위기가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한 바, 이에 따라 세계 뱀파이어 총회가 창설되었고 각 대륙마다 협회가 창설되었고 각 나라마다 지부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정상민 군이 제 짝을 찾고 싶다는 말은 곧 뱀파이어 하나를 더 늘리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성체 뱀파이어에게는 응당 주어져야 할 권리였지만 작금의 시대에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야 인마, 내가 설명해줄게…….”

김흥만 씨가 줄줄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상민 군의 입장에서는 이미 아버지 정인환 씨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었다. 비록 대한민국이 오천만 인구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 오천만 인구가 전부 그들의 피 주머니가 아니라는 점, 물론 전부 다 예비 피 주머니인 건 변함이 없지만 세계 혈액 시장이라는 게 단순히 인구수로만 측정할 수 없다는 점,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 종족에 대해 고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적십자로부터 제공받는 혈액팩의 수량이 일시적으로 제한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김흥만 씨가 말해주었다. 잠시 혀로 입술을 할짝이고는 김흥만 씨가 이어서 설명했다. 게다가 여전히 중국 지부와 미국 지부로부터 원조 받은 혈액을 갚아야 하는 채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 동아시아 협회에서의 대한민국 지부의 영향력을 늘려야 하는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혈액 빈곤 지부에 대한 혈액 기부를 늘려야 할 수도 있는 점 등등.

뭐 다들 알고 있는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자니 모두들 지루해하는 눈치이기도 하고, 정상민 군의 혼인 안건보다 더 중요한 안건을 자연스럽게 꺼내기에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최현봉 씨가 김흥만 씨의 말을 정중하게 끊고는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식구를 늘리기에 앞서 대한민국의 인간 출산율 저하와 곧 도래할 인구 절벽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거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니?”

이 말에 정상민 군이 결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여유롭잖아요. 피 주머니가 오천만이라구요 오천만!”

결국엔 지부장 최현봉 씨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탕 하고 쳤다.

“이 안건은 그냥 빨리 넘깁시다. 다음 안건,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인간 출산율 저하 문제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논의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자. 거수로 진행할게요. 정상민 군의 혼인에 찬성하시는 분, 손 들어요.”

번쩍 손을 든 정상민 군 외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한 표. 그럼 반대하시는 분, 손 들어요.” 회의실을 채운 열한 명의 뱀파이어가 손을 들었다. “종수, 넌 뭐야?” 최현봉 씨가 찬성에도 반대에도 손을 들지 않은 자신의 막내아들을 매서운 눈으로 보았다.

“기권이요.”

최종수 군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음……. 찬성 한 표 반대 열한 표, 그…… 기권 한 표, 이렇게 해서 정상민 군의 혼인 안건은 정상민 군이 혼인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앞으로 정상민 군은 지부의 규칙에 따라 향후 오십 년 간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되며…….”

“에이 씨!”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정상민 군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회의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최현봉 씨가 엎어진 의자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저기…….” 정인환 씨가 입을 열었다. “제 아들을 대신해서 모두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명색이 공식 회의인데, 이건 뭐 참……. 버릇이 없네. 가정교육하고는…….”

김흥만 씨가 투덜거렸다.

“자자. 감정 상할 말은 하지 마시고, 어쨌든 첫 번째 안건은 이렇게 넘기기로 하고요. 빨리 다음 안건을 다룹시다. 앞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의 인간 출산율 저하 문제로 넘어갑시다.”

최현봉 씨가 가문 간의 시비로 이어지기 전에 재빨리 다음 안건을 꺼냈다. 꽤나 난감한 문제였다. 인간들이 번식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혈액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당장이야 문제가 없겠지마는, 생각해보건대 아주 나중의 일도 아닌 게 백 년 뒤에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아예 인구 소멸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통계도 있었더랬다. 인간들 입장에서야 백 년이라 함은 한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시간이지만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뱀파이어에게는 한평생의 시간이 아니었다. 백 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인간의 출산율 저하는 비단 인간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뱀파이어에게 더 큰 문제였다. 백 년이야 어찌어찌 먹고 살겠지만 그 이후는 어찌해야 할까.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후 최현봉 씨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한 개의 창백한 얼굴들.

“자. 논의해봅시다.”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최현봉 씨가 정 씨 가문의 수장 정인환 씨와 김 씨 가문의 수장 김순매 여사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한참 김순매 여사와 눈길을 주고받던 정인환 씨가 한숨을 길게 뱉고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보였다.

“제가 발언하겠습니다. 일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 정부에다가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좀 압박을 주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얘기 안 해도 그쪽에서는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답니다.” 최현봉 씨가 한심하다는 듯 정인환 씨를 보았다. “육아 휴직이며 출산 휴가며, 이제는 하다하다 애 낳으면 매달 돈까지 준답니다. 아동 수당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이미 하고 있는데 안 먹힌대요.”

이번에는 김순매 여사가 손을 들었다.

“아니 근데 이게,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논의해야 할 사항인가요. 이 좋은 땅에 한국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누가 안 들어와 살까요. 다른 나라 인간들이 들어와 살겠죠. 안 그래요?”

“김 여사, 그 부분은 지부 간의 국제 분쟁으로 이어지곤 한다는 점 잊으셨나요? 이민자에 대한 혈액 우선권 주장이 화두가 되었던 게 아직 이십 년 전이에요. 뭐, 아직 재판 중인 건이지만 만약에 법정에서 우선권 주장에 손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최현봉 씨의 말에 김순매 여사가 입 모양을 새침하게 모으더니 흥흥 소리를 내었다.

“잊지는 않았고요. 설마 우선권 주장이 먹힐까요?”

“모르는 거죠. 반반으로 해야 한다, 최소한 삼분의 일 정도의 권리는 인정해야 한다는 게 요즘 여론이랍디다. 원래 혈액 시장이란 데가 보수적인 데잖아요.”

“그쵸. 흥. 알겠어요. 좀 더 생각해볼게요.”

김순매 여사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저 혼자서 나지막하게 궁시렁거렸다. 최현봉 씨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번에는 김 씨 가문의 독녀 김영희 양이 손을 번쩍 들었다.

“결국엔 이 문제는 인간 사회의 문제잖아요. 인간 사회를 보다 음, 출산하기 좋은 사회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요?”

뱀파이어가 된 지 아직 삼십육 년밖에 되지 않아서일까. 간단명료하지만 예리한 질문이었다. 또한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최현봉 씨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중세 시대에야 작위와 황금을 모두 던져버리고 새로이 삶을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어차피 인간 세계에서 얻은 작위와 황금인 만큼 인간들에게나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따위 작위와 황금은 다시 얻고 다시 모으면 그만이었다. 최초의 뱀파이어 핸더슨 경도 백작이며 공작이며 기사 따위 신분에 쉽게 싫증이 나 던져버리기 일쑤였고 드넓은 장원과 커다란 성을 남겨두고 떠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인간 세계가 고도로 진보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 작위와 황금이란 게 혈액팩만큼 중요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쉽사리 다시 쌓아올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참고로 궁금해 하실 혹시 모를 독자를 위해 핸더슨 경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하자면, 여전히 아니 당연히 생존해 계셨다. 다른 게 있다면 이제는 은퇴했다. 세계 뱀파이어 총회에서 핸더슨 경을 위한 혈액팩과 여타 귀찮은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니, 이제 그는 최초의 뱀파이어라는 상징으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는 핸더슨 경의 의사가 적극 반영된 것인데, 이제는 늙은 건지 아니 뱀파이어가 늙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어쨌든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 현대 사회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고충이 있었다. 그리하여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피부와 버터처럼 부드러운 노란 머리칼을 여전히 잃지 않은 핸더슨 경은 고딕풍의 정장을 입은 채 영국의 어느 외딴 마을, 시골 농부들에게 외로운 집이라고 불리는 저택에서 영원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외로운 집에서 핸더슨 경은 주로 흔들의자에 앉아 까무룩 졸거나, 최근에 깔끔하게 정리하여 금테 두른 고급 양장본으로 출간된 종족의 족보를 정독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이 계보가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고 그걸 총망라한 족보를 졸면서 읽고 있자니, 문득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우리가 지금껏 이뤄온 모든 걸 저들에게 내어준다고 해보자. 적십자로부터 혈액팩을 제공받을 수 있겠니. 인간 정부로부터 신분을 보호받을 수 있겠니. 그래서 우리가 저지르는 그 모든 범죄를-우리에게는 범죄가 아니지만 저들 눈에는 그저 범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않니. 어쨌든 그걸 눈감아주겠니. 그런 식으로 해서 출산율이 늘어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결국엔 그렇게 일군 피 주머니가 우리 소유가 아니게 되는 셈인걸.”

최현봉 씨의 말에 김영희 양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끝내 하지 않았다. 최현봉 씨가 다정한 눈길로 인간으로 십 년을 그리고 뱀파이어로 삼십육 년을 산 사십육 세의 어린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해요. 뾰족한 수가 없는걸요?”

김흥만 씨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모인 거 아닙니까. 좀 더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보자구요.”

최현봉 씨가 말했다.

“아니 그럼 형님은 별 수가 있어요?”

“형님이 아니라 지부장님이라고 부르세요. 오늘 이 자리는 공식적인 자리입니다.”

최현봉 씨가 엄격한 표정을 짓고 김흥만 씨를 보았다. 그러자 김흥만 씨가 짧게 투덜거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지부장님은 뭔 수가 있습니까?”

“음…….” 사실 최현봉 씨가 이 회의에서 획기적인 무언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정 씨 가문의 뱀파이어에게도 김 씨 가문의 뱀파이어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이 일군 최 씨 가문의 뱀파이어에게조차도 별 기대가 없었다.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가끔씩 보면 자기 형제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훌륭한 아이디어가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이 회의를 주최했다. 괜한 희망을 품었군. 최현봉 씨가 속으로 탄식했다. “몇 년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방법이 있긴 한데, 이게 좀 전위적인 방법입니다. 사실 이미 실험을 해보았고 시약에도 성공했지요.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방법일까, 나중에 가서 도리어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런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에이 뭐야. 진작 말씀하시지 참.”

정인환 씨가 웃음 지었다.

“그 방법이란 게 뭐예요?”

김순매 여사가 물었다.

“그 방법이라 함은…….” 최현봉 씨가 잠시 뜸을 들였다. “한 번 뽑을 때 많이 뽑는 겁니다.”

 

*

 

몇 년 후, 대한민국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몇 년 전만 해도 통계에 따르면 쌍둥이를 낳을 확률이 1% 세쌍둥이를 낳을 확률이 0.01%였었는데, 이제는 33%의 확률로 쌍둥이를 낳았고 19%의 확률로 세쌍둥이를 낳았으며 심지어는 6%의 확률로 네쌍둥이를 낳았다.

하나만 낳아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운 게 출산이란 것인데, 연달아 두세 번씩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 여자들의 비명이 전국을 가득 메웠다. 그녀들은 모두 작년 혹은 재작년에, 혹은 이러한 기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인 몇 년 전에 독감예방주사를 맞은 이력이 있었다. HB제약회사가 개발하고 제조한 백신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00 단편 천마총 요휘 2023.05.16 0
2099 단편 루브 골드버그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달리 2023.05.15 1
2098 단편 해피 버스데이 투 마이 민하 지야 2023.05.15 0
2097 단편 해피 버스데이 프롬 유어 마리아 지야 2023.05.15 0
2096 단편 최종 악마의 한탄 니그라토 2023.05.15 0
2095 단편 우주폭력배론 : 신앙 니그라토 2023.05.13 0
2094 단편 위험한 가계, 2086 유원 2023.05.11 0
2093 단편 나오미 김성호 2023.04.29 0
2092 단편 육식동물들 박낙타 2023.04.27 0
2091 단편 우리 단톡방에 소비왕과 거지왕이 있다 지야 2023.04.27 0
2090 단편 감옥의 죄수들 바젤 2023.04.21 0
2089 단편 생명 조금 식마지언 2023.04.20 0
2088 단편 하얀색 리소나 2023.04.20 0
2087 단편 박쥐 페리도트 2023.04.18 0
2086 단편 여 교사의 공중부양 김성호 2023.04.09 0
단편 뱀파이어와 피 주머니 박낙타 2023.04.05 0
2084 단편 필연적 작가 라미 2023.04.01 0
2083 단편 아주 조금 특별한, 나의 언니2 박낙타 2023.03.31 0
2082 단편 사탄실직 지야 2023.03.30 2
2081 단편 어느 영화감독의 매너리즘 탈출기 킥더드림 2023.03.27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