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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거짓말쟁이 여자

2023.06.19 23:3506.19

 책가방을 둘러메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멀리 가을의 달이 떠 있었다. 옆을 지나다니는 인력거와 자동차. 다리 아래에는 푸르고 검은 강물이 보였다. 난간은 낮게 깔려있을 뿐이라 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달려가는 차 소리를 들으면서 바닥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처음 그 애를 봤다. 낮은 난간 위를 무섭지도 않은지 다리를 벌리며 걸어갔다. 펄럭이는 교복 치마.

 그 애의 이름은 윤하진河眞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미츠키美月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 편이 어울린다고.

 ㅡ곧 겨울이 되겠다.

 미츠키는 난간 위에 서서 내게 말했다. 지나다니는 차들도 아래의 검은 강물도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고 미츠키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 날부터 그 애는 유치한 만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내게 이런저런 장난을 쳤는데, 심할 때가 많았다.

 밥 안에 몰래 바늘을 넣어놓고 먹으라거나 내 교과서를 몰래 가져가 남의 자리에 넣어두곤 했다.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여자애한테까지 당해야 하는건가 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막상 뺨을 책상에 기댄 채로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을 보면 화를 내기 힘들었다.

 내 옆자리에 있었지만 미츠키는 나와는 반대. 다른 누구에게 미움받은 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씩은 그 애의 자리 위에 하얀 꽃이 놓여있기도 했다. 그래서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넘어진 자리에서는 가끔씩 그 꽃들이 올려다보였다.

 남겨진 자리, 노을이 지는 교실. 미츠키는 그런 책상 위로 천진한 얼굴을 내밀고서 내게 물어보곤 했다.

 

 "왜 그렇게 맞는 거야? 항상."

 "……그럴만 하니까."

 "바보네. 뭐, 나도 똑같이 바보지만."

 

 나는 피가 나는 입술을 닦으며 일어났다. 미츠키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곤 했다.

 비어있는 교실 너머에 노을이 지는 운동장, 쓸쓸한 기분.

 미츠키와 얘기하면서 좀 더 알게 된 건 그 애가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점이었다.

 먹을 걸 사줘도 그 애는 내 옆에 앉아있을 뿐 먹지는 않았다.

 

 "왜 안 먹어?"

 "어릴 적에 학대당했으니까. 고기가 든 음식은 안 먹어."

 정말이야? 하고 묻자, 미츠키는 고개를 기울이고서 웃었다.

 "피난 때 아빠가 억지로 죽은 동생의 고기를 먹였어."

 가만히 바라보자 미츠키는 고개를 돌리고 발을 까딱이며 얘기했다. "오빠로서 지켜줘야 했는데."

 "……뭐?"

 "나 사실 남자거든. 지금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 애는 금세 웃으며 말했다. "킥킥 거짓말이야. 왜, 남자 같아?"

 "……아니."

 "제대로 여자야. 확인해 볼래?" 까만 치마를 가까이 잡고서 말했다.

 "……아니."

 

 친구들의 괴롭힘은 거세져 갔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 학기는 특히 심했다. 아이들은 학교 건물 위 옥상까지 따라와 내 몸을 구타했다.

 그 애와 친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걸까, 하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실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배를 쓰러질 정도로 맞고, 입술에는 피가 터져서 언제나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보통학교의 오래된 건물에는 제대로 된 펜스가 없었다. 잠시 그 앞에서 운동장을 내려다 보는데,

 "왁!!" 하고 미츠키는 내 몸을 밀쳤다가 잡아챘다. 나는 돌아보고서 힘없이 웃었다.

 그 애는 내 터진 입술을 보며 고요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같이 죽을래?" 하고, 갑자기 수줍은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를 묻자,

 

 "널 보고 있으면 자꾸 안 좋은 걸 떠올리게 돼."

 "뭐?"

 

뒤쪽을 보자 그녀는 손목을 잔뜩 그은 채 숨기고 있었다. 이런 애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가는 손목을 잠시 쥐고있다가 조금 후에 물었다. "…왜 이랬어."

 미츠키는 웃을 따름이었다.

 대답 대신, 그 애가 말했다. "너. 사람의 살을 잘라본 적 있어? 있잖아. 피는 진득하게 흘러."

 

 "……너는 있어?"

 "있어."

 "누구를?"

 "남자인 날 강간한 아버지를." 미츠키는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 몸을."

 "……."

 

 그리고 그 애는 내 표정을 빤히 보더니 팔을 빼고서 혀를 내밀고 놀렸다.

 "후후, 전부 다 거짓말이야. 그런 끔찍한 얘기를 믿는 거야?"

 

 그 애는 상처 난 손목을 허리 뒤에 두고서 혼자 춤을 추듯이 물러났다. 붉은 하늘, 옥상 난간의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나, 너무 진지한 얘기는 싫어." 미츠키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생각없이 칼을 휘두르는 잔인한 이야기가 좋아. 아무런 사연도 없이, 아무런 불행도 없이. 생각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거야. …너는 좋아해?"

 

 "좋아해." 나는 얘기했다.

 "흐응. 스스로를 던져버릴 정도로?"

 "응."

 

 미츠키는 어느새 동작을 멈추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고서 얘기했다.

 

 너를.

 내 삶을 던져버릴 정도로 좋아해.

 

 

 +++

 

 그 날 이후 미츠키는 아주 조용해졌다.

 비어있는 책상에 기댄 채, 그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더 꺼내놓았다. 하지만 그 애는 더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괜찮았다. 나는 웃으면서 그 애에게 많은 얘기들을 꺼냈다.

 반 애들의 폭력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어떤 선생님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더 거세져갔다.

 그럴만 했으니까. 나는 엎드린 채 발길질을 견딜 뿐이었다.

 

 그러고서 겨울방학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다. 반 아이들 몇 명이 교실 뒤에서 내 머리칼을 가위를 조금씩 잘라내고 있었다.

 조금씩 더 많이. 티가 날 정도로 뒷머리를 잘랐다. 양 손은 붙잡혀 있었다.

 나는 힘들었다. 더는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츠키가 의자를 안은 채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웃었다.

 그걸 보고서 앞에 있던 남자애가 내 얼굴을 때렸다. 고개가 심하게 돌아갔다.

 

 "……좀 웃지마 씨발년아." 남자애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허공을 보면서 실실 쪼개지 말라고."

 

 분명 나는 상관없었지만ㅡ

 드르륵 하고, 앞에 있던 의자가 저절로 밀려났다.

 고개를 들자 미츠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내 몸을 붙잡고 있던 애들이 모두 그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애들에겐 책상 위의 하얀 꽃송이 외에는 비어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더는 못 참아주겠어." 그렇게 말한 미츠키가 미소지었다. "여기까지야."

 

 그리고 그 애가 옆으로 손을 뻗어 빙그르르 식칼을 꺼내들었다.

 저벅저벅

 그리고 푹.

 나를 때린 남자애의 배에다 찔러넣었다.

 남자애는 의아한 얼굴로 미츠키가 있는 쪽을 올려다봤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남자애를 멍하니 내려다 보던 반 아이들을

 차례로 차례로.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아래에 흐르는, 비명소리.

 늦은 가을 하늘.

 미츠키는 아이처럼 뛰어다니며 사람의 살을 잘라버렸다.

 나는 피로 질척거리는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미츠키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분명 저 애의 영혼 만은 죽기 전에도 여자였던 거겠지.

 마침내 허무한 학살극이 끝나고 내 앞에 선 미츠키는 한 손에 든 식칼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내게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피맛이 섞인 입맞춤. 어지러울 정도로 떨렸다.

 

 "좋아?"

 "……좋아." 내가 말했다.

 "이 세계를 등질만큼?"

 "응."

 "…좋아."

 미츠키는 미소지었고 내 한 쪽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 애는 내 손을 쥔 채로 천진한 아이처럼 열린 창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 가는 손을 잡고서, 나는 창틀을 밟고서 가뿐히 겨울 하늘으로 뛰어올랐다.

 

 

 +++

 

 1937년, 모 월, 모 일.

 경성의 어느 조선인 학교 고등과高等科에서 심각한 상해 사건이 일어났다.

 배와 가슴 온 몸에 칼로 그은 자상을 입은 아이들이 수십 명.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실종자가 한 명.

 의식을 찾은 아이들은 모두 그 실종자가 창문을 넘어 연기처럼 흩어졌다고 증언했다.

 큰 충격으로 인한 집단적인 환각으로 추정.

 실종자는 아동 시절부터 귀신을 보는 아이로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사건과의 연관성을 파악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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