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사연

2023.06.04 02:5306.04

동명력(同明曆) 11년 여름, 괴이한 소문이 저잣거리에 넘실거렸다. 먹잇감을 찾은 뱀이 제 몸을 숨겼던 수풀에서 나오는 듯, 여러 사람의 혀를 타고 놀며 생명을 얻은 말은 어느새 경무청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저잣거리의 낭설이 관원의 판단을 어지럽힐 리는 없지만, 그것이 하필 그가 맡고 있던 사건이었던 게 문제였다. 순검은 종복이 전해준 소문을 하나씩 정리해놓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강씨 덕천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가 뱀으로 변해 그 집안 가솔을 다 해쳤다더라.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의 상여가 강씨 문중 대문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것을 보았다. 그 원혼 때문에 다 죽었을 거다.

 

―강덕천의 영정을 뱀이 칭칭 감고 있다고 하더라.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건을 수사하는 데에 있어 기본적인 탐색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강덕천은 목을 매달아 자결했고, 그 식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자상이 있던 흔적은 없었고 은비녀의 끝은 깨끗했다. 혹시나 하여 목에 난 끈 자국과 서까래의 올가미를 살펴보아도 자액自縊의 정황이 뚜렷했다. 당연히 장례에 영정을 칭칭 감고 있는 뱀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이 사건을 놓아 보내지 못한 까닭은 왜 강덕천과 그 식솔들이 갑작스레 한날한시에 죽음을 택하였냐는 의문 하나뿐이었다. 나랏일이 바쁜데 이만하면 놔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순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런 소문이 도는 건 필시 연유가 있을 터.’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날 리 없다. 그는 경무청을 나섰다. 사건 당시 죽은 처녀의 아비는 향리인지라 작청作廳에 있었기에, 따로 찾아가 탐문을 하진 않았으나 한 번쯤은 가서 확인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월 씨였던가. 미리 연통을 보내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순검은 종복이 안내하는 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순검이 월씨 집에 이르자, 향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순검 나리를 뵙습니다.”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을 걸세. 사건을 마무리하기 전, 그저 몇 가지를 확인하고자 함이야.”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 때문입니까……?”

 

“나야 증좌를 쥐고 있으니 자네가 이 사건에 결부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네만, 그래도 한번은 탐문해야 하지 않겠는가.”

 

금세 향리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서 간 것도 크나큰 불효일진데, 그 여식이 뱀이 되어서 사람을 해쳤다는 허황한 소문까지 돌고 있다면 속이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순검이 의례적인 질문을 꺼냈다.

 

“자네 여식 연이가 죽은 건 언제쯤인가?”

 

“작년 겨울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학질이었습니다.”

 

“그럼 장례는 어떻게 치렀는가?”

 

“병이 옮을까 봐 혼자 간소하게 했고, 저쪽 산 아래에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혹시 자네 여식과 강덕천은 어떤 관계였는가?”

 

“신분의 격차가 명확하니 특별한 관계라는 걸 맺을 일이 없었습니다. 동네가 같으니 지나가다 마주쳤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여식이 죽기 전에 남긴 것은 없던가?”

 

“각낭角囊이 있는데, 그건 매장할 때 관에 넣어두고 그 외 다른 것들은 태워버렸습니다.”

 

순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학질에 걸렸다는 얘기는 지금 처음 듣는구나. 병에 걸렸다면 마땅히 의원을 불렀을 터, 의원은 누구를 불렀느냐?”

 

“의, 의원을 부를 새도 없이 절명했습니다. 오밤중에 발작하더니 피를 토하고는…….”

 

“그렇구나.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던 순검이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향리의 낯이 잿빛으로 변했다. 오금을 저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향리에게 순검이 외쳤다.

 

“본디 학질은 여름철에 더위에 원기가 상해 생기는 병이다. 더위로 상한 뒤에 찬바람을 맞아 정기와 사기가 투쟁하여 오한과 열증이 반복되는 병인데, 겨울에 죽었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발작이 일어났다고 하여, 바로 죽는 병도 아니며 피를 토하지도 않는다. 네 거짓을 이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아, 아이고, 나리. 사, 살려만 주십시오. 제,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를…….”

 

“마지막으로 묻겠다. 형부로 보내기 전에 사실대로 고하거라!”

 

순검이 검을 옆으로 거두자, 향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식인 연은 상사로 오한과 열증에 시달렸다. 이것까지는 소문에서도 알려진 바였다. 그런데 어느 밤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짐을 따로 싸 들고 간 것도 없고 방은 아주 가지런했다. 오직 못 보던 각낭만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종복을 통해 수소문해보았지만, 돌아오는 소식은 없으니 향리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진 향리의 뺨 위로 흘렀다.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절절했다.

 

“정말로, 눈을 떠 보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부 소인의 부덕함 때문에 생긴 일이오니 제발 용서를……그리 심하게 앓던 아이가 노자도 한 푼 없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는데, 과연 지금까지 살아 있겠습니까.”

 

향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자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낸 것 같군. 순검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를 소문 내지 않는 조건으로, 그는 향리의 안내를 청했다. 어떻게 해서든 증좌를 찾아보겠다고 무덤으로 걸어가면서도 기분은 묘했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향리와 강덕천 사건 사이의 뚜렷한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월연이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강덕천과 그 식솔이 자결할 이유는 없었으니.

 

‘하나…….’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감을 그저 넘기지 않는 게 순검의 일이었다.

 

적잖이 습기를 머금고 있는 땅인데도 장정 둘이 한참을 파고 나서야 오동나무관의 끝자락이 보였다. 관을 열어보니 향리의 말대로 안은 주인 잃은 각낭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손길을 타지 않아 조금은 바랜 꽃무릇색 비단 위로 소박하지만 해사한 연분홍 꽃 수가 놓여 있었다. 모란도, 연꽃도, 석류도, 매화도, 국화도 아닌 상사화相思花다. 설사 이 꽃을 괸다고 할지언정 남의 눈에 띄는 각낭에 수놓는다? 순검은 눈을 찌푸렸다.

 

아픈 여식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고작 빈 각낭이라……. 가지를 흔들고 가는 바람에 그림자도 밀렸을까, 각낭 위로 길게 기울어진 어둠이 꽃을 가렸다. 그제야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은 도포 속에 넣어두었던 지초롱을 꺼낼 필요까지는 없지만, 해가 서쪽으로 꼬박 넘어가니 제법 어둑했다.

 

각낭을 취한 순검은 다시 도성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도 파자교把子橋 근방에 도착하니 인정人定의 첫소리가 들렸다. 파루罷漏가 들리기 전까지는 경무청에 있는 게 좋으리라. 어차피 내일 저녁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못할 터이니, 선택의 여지도 없군.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래도 경무청 생활을 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꽤 익숙해졌고 날씨 또한 온화하니 그리 한탄할 만한 일도 아니다. 순검은 등잔불 가까이에 각낭을 비춰보았다. 분명 이상한 점은 있지만, 생긴 건 평범하다. 그의 입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왜 빈 주머니를 놓고 사라졌을꼬…….”

 

곱씹어볼수록 더욱 미궁에 빠져드니 묘했다. 무언가 연결점이 있을까 싶어서 파보았는데 막다른 길인가. 순검은 각낭을 꽉 쥐었다.

 

놀랍게도 천은 제법 빳빳해서 형태가 잘 뭉그러지지 않았다. 의복을 만들다가 남은 천이었으니 풀을 먹지도 않았을 텐데, 왜 이리 천이 빳빳한 건가. 설마 활석을 먹였다고 하여도 도침을 한 종이처럼 고드르지는 않을 것이다. 각낭을 내려놓은 그는 겉을 찬찬히 쓸어보았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결이 매끈하고 부드럽다. 그런데 속을 뒤집어보니 안감은 되려 낡고 허름했다. 심지어 조청이라도 묻은 듯 끈적한 자국도 남아 있었으니. 어지간해서는 죽은 이의 물건을 건들고 싶지 않건만. 순검은 속으로 끙끙 앓다가 결단을 내렸다. 소매에서 나온 우각 장도가 시퍼런 빛을 발했다.

 

입을 모으던 끈이 끊기고 접힌 천은 제 모습대로 돌아갔다. 고작 안감과 겉감만을 덧댄 것치고는 제법 두껍다. 그는 조심스럽게 겉감과 안감이 마주 붙은 곳을 갈라냈다. 속살을 확인한 순검의 눈이 뜨였다. 안을 헤집고 들어간 손가락 끝에는 몇 번을 접어 두껍게 뭉친 종이가 있었다. 본래의 흰 공간보다는 검게 물든 먹이 더 많은 서찰이었다. 펼쳐놓으니 서안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앓던 자가 썼다고 믿기 어려운 정갈하고도 작은 필체를 훑던 순검은 첫머리를 찾아 읽었다. 순간 그의 속이 서늘했다.

 

 

- 이 서찰을 읽고 계신다면, 저는 필시 죽었을 겁니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제 죽음을 이야기하는 어조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장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아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자가 되는 죄를 지었으나, 이 길을 택한 것이 그리 후회스럽고 원통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시왕께서 저를 치죄할 때 이것이 제가 지은 가장 큰 죄는 아니겠지요. 제가 지은 죄업은 그보다 크고 깊으며, 어둡고 더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업을 지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이 서찰을 남기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죄업을 고백하여 혹시나 물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없애기 위함이며, 제게 남아 있을 부정父情을 끊기 위함입니다. 죄인을 버리고 지우시어 명예를 보존하시고 저를 잊어주십시오.

 

그다음 문장을 읽은 순검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그러나 다른 것에 비해 다소 거칠게 휘갈겨진 필체가 그가 고하는 것이 사실임을 알렸다.

 

- 제가 강덕천과 그 가족을 죽였습니다.

 

분명히 강덕천과 그 식솔은 목을 매달아서 자진했다. 설령 자액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많은 이를 혼자 소리 소문 없이 교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월연이 사라진 건 지난겨울이었고, 강씨 일가의 죽음은 올해 초여름의 일이었다. 당연히 그가 서찰을 쓰고 있었을 때쯤에 강덕천은 두 눈 새파랗게 뜨고 살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하는가? 그런 순검의 마음을 희롱하는 듯 이어진 글은 유려했다.

 

- 죽은 이가 산 사람을 죽였다니 의아하실 겁니다. 우선 한 가지를 먼저 밝혀두어야겠습니다. 저는 동명력 10년, 동짓날에 죽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때 죽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살아 있는 몸으로 이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수소문해봤자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이미 제 살점은 물고기가 해치우고, 뼈는 거친 물결과 바위에 쓸려 바스러졌을 테니 말입니다.

 

참혹한 최후를 서술하면서도 전서에는 으레 있을 법한 붓끝의 흔들림도 없었다. 향리의 하나뿐인 딸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랐을 텐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밝히는 모습이 기괴했다. 하지만 순검은 그의 이야기에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 전에 제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밝혀야겠지요. 이유를 궁구하면 다른 의문도 저절로 풀릴 테니까요. 할 얘기는 동짓날 밤 허리처럼 길지만, 사정이 허락지 않으니 짧게 줄이지요.

 

- 아시다시피, 이 모든 건 연정戀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밤이 늦어서일까, 등잔불이 피워내는 연기 때문일까. 서찰의 흐름을 쫓는 순검의 눈은 붉었다.

 

 

 

***

 

 

 

보이면 안 된다. 눈에 띄면 안 된다. 연은 장독대가 놓인 흙담 모퉁이에 숨었다. 이곳에 숨어서 엿듣고 있다는 걸 들키면 보통 경을 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쪼그린 채로 거들치마의 끝자락이 흙투성이가 되지 않도록 온몸을 끌어안았다. 얼마 안 있으면 곧 올 것이다. 다리가 저린 정도는 이따 다듬이로 두들기면 금방 나아질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벼락 너머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같이 유 대감댁에서 공부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들의 목소리였다.

 

“덕천 자네,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던가? 경전을 줄줄 외니 꼬투리 하나 잡을까, 벼르던 유 대감도 입을 떡 다물지 않던가?”

 

“간밤에 외고 잔 덕택이지. 거기서 이렇게 말하지 않나, 책을 읽어, 성정의 간사하고 바름과 선악을 칭찬하고…….”

 

경문을 외는 낭랑한 목소리가 담벼락을 넘고 들어왔다. 이 시간쯤에 귀가하는 양반댁 도련님들은 꼭 그날 배운 경전의 문구를 갖고 입씨름을 벌였다. 연은 그게 좋았다. 배우지 못할지언정 경전 속 성현의 말을 들음이 좋았고, 이를 곱씹어보며 입안에서 당과처럼 굴리는 것도 좋았다. 연은 속으로 소년이 읊은 말을 중얼거리며 외웠다.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인지, 그만 다리 힘이 빠져버렸다. 연은 뒤로 휘청이다가 그대로 흙담에 머리를 박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연히 소년들의 눈도 한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꾸지람이 떨어졌다.

 

“거기 누구기에, 이야기를 훔쳐 듣는 게냐?”

 

여긴 우리 집 담벼락이고 집 안에서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오. 퉁명스러운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감히 귀한 양반집 도련님들에게 그리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망했다. 연은 뒤로 자빠진 채로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 새된 소리로 외쳤다.

 

“아, 아, 아니. 소인은 그저 장을 퍼가려고 했지 훔쳐 들으려고 있던 건…….”

 

“그런 것치고는 참으로 오랫동안 머물더구나. 그간 지나가면서 네 머리를 보지 못했을 성싶으냐?”

 

숨는다고 푹 숙였는데 머리끝이 담 위로 슬쩍 비쳤나 보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때 덕천이라고 불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학志學을 지나 좀 더 깊어지고 낮아지긴 했지만, 아직 청년이라기에는 낭랑한 소리였다.

 

“그만두게. 뭐, 우리가 못 들을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어디 여인네가 사대부가 나누는 말을 엿듣나…….”

 

“경복, 그만하면 되었네. 이야기를 들은 건 그렇다고 쳐도,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터, 자신이 누군지 밝히는 게 좋을 것이야.”

 

뒷말은 엄연히 연을 향한 질책이었다. 연은 흙투성이가 된 제비부리댕기를 털었다. 외간 남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예는 아니지만, 어차피 본인부터 그 예를 어긴 마당에 뭐라 입씨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후 소년들을 향해 홱 돌았다.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오얏꽃빛 뺨 위로 붉은색이 물들었다. 눈을 꽉 감은 채 연이 외쳤다.

 

“그, 그, 글공부하는 내용이 너무 재미있게 들려서, 훔쳐 듣게 되었습니다…….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예상은 했지만 어리구나. 되었고, 눈을 뜨거라. 너를 부른 건 혼을 내려고 함이 아니다.”

 

예상보다 부드러운 어조에 연은 한쪽 눈을 슬쩍 떠보았다. 어리다고 해놓고서는 본인도 그렇게 나이 든 모습은 아니었다. 옆에 있는 소년들도 꽤 앳되어 보였다. 이래 봬도 올해로 열넷인데 그리 어려 보이나 싶었다. 그 후에 눈치를 보며 살그머니 눈을 다 뜨자, 들어온 건 햇볕을 쬐지 않아 옥처럼 희고 앳된 얼굴이었다. 초생달을 닮은 눈썹도, 옅게 꺼풀이 진 경계가 분명한 눈도 남자의 것 같지 않게 곱다. 얼굴이 괜스레 홧홧했다. 연은 고개를 숙였다.

 

“소녀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잘못을 알았으니 되었다. 그런데 글공부하는 내용이 재미있게 들렸다니 신기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연, 월자 성을 쓰는 연이라 하옵니다.”

 

“이름이 연이라, 옥빛 연못의 연꽃을 닮았구나.”

 

그믐에 달이 뜨듯 덕천의 얼굴에 미소가 흐릿하게 그려졌다. 연은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그가 뱉은 한 마디에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소년들의 소리만 귓가를 때렸다. 학처럼 고고하던 덕천이 여인을 희롱하네, 시 한번 잘 읊네, 여러 말이 왔다 갔다.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으리라, 연이 몇 번이고 속으로 다짐하던 때였다.

 

“제아무리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배움을 추구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앞으로는 숨어 듣지 말고 모습을 보이거라.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나 성현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같지 않더냐?”

 

갑자기 떨어진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연은 고개를 쳐들었다.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연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덕천을 위시한 무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게 월연과 강덕천과의 첫 만남이었다. 수묵화 속 난초처럼 고운 도련님이 그더러 연꽃 같다고 한 내용은 기억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기억에 남은 건 순수한 환희였다. 글월 읽는 걸 엿듣게 허락해주셨어. 무지하기에 묻어두었던 질문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흥분해서 달음박질치던 연은 그날 증조할머니 대부터 물려받은 간장독을 깰 뻔했다.

 

 

 

다음 날부터 연은 대놓고 고개를 내민 채 소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매번 장독대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 대문을 훤히 열어놓고 평상에 앉아 자수 거리를 설렁설렁 만졌다. 소년이 왔나 싶으면,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간혹가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슬쩍 우렁차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문밖에 있는 덕천이 아닌 척 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있다가 바늘귀에 찔린 적도 꽤 여러 번이었다. 자수를 잘 놓기로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거늘 바늘 찔린 자국이 손가락에 선명하니, 몇 번이나 아비가 물어보기도 하였다. 연은 괜히 멋쩍어 애꿎은 노리갯감만 푹푹 찔렀다.

 

그러나 귀동냥에는 한계가 있었다. 걸음을 멈추어 얘기하는 건 어디까지나 잠시뿐이다. 애초에 끝까지 묻어두었으면 몰랐을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는 작물이 잘못되었다고 훈계할 수 없듯 욕망이 자라났다. 아비가 쥐여준 돈을 쪼개고 쪼개 미투리 대신 종이를, 향낭을 채울 침향과 단향을 사는 대신 붓과 벼루를 샀다. 혹시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 서찰을 쓰기 전에는 마당에 나가 미리 모래 위에 글씨를 썼다가, 지웠다가 여러 번 반복하면서 글을 다듬었다. 아비가 나가면 새벽같이 글을 써서 평상에 먹물 먹은 종이를 말렸다. 종이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릴 때까지 놔두었다가, 괜히 장독대에서 나는 잡내가 날까 두려워 모란꽃을 따다가 서찰 위에 올리곤 했다. 그래놓고 그렇게 고이 접은 서찰은 정작 문밖으로 던져서 내동댕이쳐졌다. 하도 종이를 던져대니, 나중에는 덕천이 느지막이 다시 찾아와 담 너머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건 좋지만, 매번 종이를 땅으로 던져내는 건 좀 그렇구나.”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예 서찰을 주고받는 비밀 장소까지 생겼다. 장독대 쪽 담에서 오른쪽 세 번째 되는 기와 밑 공간. 그 안에 서찰을 밀어 넣으면 덕천이 가져가 답을 했다. 답장이 오면 연은 서찰을 몰래 귀주머니에 쑤셔 박고 집으로 달려가 글을 읽고 또 읽고는 했다. 사사로이 양반 집 도령과 서찰을 나눈다는 걸 알릴 수는 없기에, 글은 다 앉은 자리에서 꼬박 외우고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덕천은 책거리를 맞았다. 연은 축하한다는 선물로 서찰과 함께 명주에 싼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을 넣었다. 조청이 꽤 비쌌지만, 지금껏 성심성의껏 글을 가르쳐 준 스승에게는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인가 달랐다. 평소에는 연이 던지던 질문에 간단히 답변하던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답문 옆에 짧게 세필로 쓴 시구가 있었다.

 

 

 

- 꽃을 찾고 물과 놀며 앉아 있노라면

 

하루 내내 마음은 기쁘고 화락하도다.

 

하나라도 참으로 마음에 맞으면

 

모든 인연을 잊어버림과 같으니.

 

 

 

한문에 그리 밝진 않았지만, 연은 구절을 읽고는 바로 서찰을 덮어버렸다. 꿈이 아니라 이걸 정말 받은 거지? 도련님이 나를 마음에 맞는 벗이라고 생각해주시는 걸까? 불은 때지도 않았는데 몸이 뜨끈했다. 생각해보니 덕천은 그를 처음 만날 때부터 옥빛 연못 속 연꽃을 닮았다고 했다. 연은 구석 자리에 있던 경대를 끌어다 앞에 놓았다. 자주 갈아주지 않아 맺힌 상이 흐릿하긴 했지만, 눈썹도 제법 길고 미간도 적당히 넓다. 콧방울은 작고 이마는 평평하게 넓은데 꺼풀은 졌지만, 눈의 흑백도 뚜렷했다. 교만을 덜고 보더라도, 이 정도면 꽤 볼만한 쪽이 아닐까. 그렇게 자신에게 말을 걸던 순간, 서슬 퍼런 칼이 떨어진 듯 속이 시렸다.

 

정신 차려. 무슨 생각이야.

 

강덕천은 그의 스승이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몰라준다고 하여도 마음속으로라도 절을 아홉 번이나 올린 사람이었다. 순수하게 글을 가르쳐주는 상대를 보고 방종한 생각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덕천은 양반이었고 연은 중인이었다. 근래에 곤궁한 양반 가문이 울며 겨자 먹기로 부유한 중인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들, 위계는 지엄했다. 이 몸이 백골이 되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은혜를 어찌 배반하려 드는가. 연은 떨리는 손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아궁이에 서찰을 던져버리자, 불씨가 타닥거리며 흰 종이를 날름날름 삼켰다. 그 모습이 뱀의 혓바닥 같아서 싫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은 답장을 보내러 종이를 폈다. 그런데 붓을 들고 있는데 할 말이 사라진 건 처음이었다. 별일이 아니리라고 치부하려고 해봐도 머리는 멍했다. 떨어진 먹물이 종이 위로 번졌다. 연은 그날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다음 날 연은 대문을 열어놓지 않았다. 글을 배운답시고 미뤄두었던 집안일을 하고 방 안에서 길쌈을 했다. 혹시나 덕천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으면 솜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가 지나가는 때쯤이면 몸종에게 심부름을 시켜 내보내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내훈』을 읽었다. 피곤하였다. 연은 눈을 감았다. 그랬더니 덕천이 가르쳐주었던 시구가 떠올라 도로 생각을 지웠다. 모래를 계속 쓸어내리면 먼지 바람이 일듯 한숨이 늘었다. 며칠 사이 연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여지자, 그 아비가 물었다.

 

“무슨 근심이 있는 게냐?”

 

“슬슬 찬 바람이 부니 음기가 스며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다니거라. 적적하면 동무라도 불러서 말 상대라도 하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낡은 이불보를 꿰맸다. 연이 집 밖으로 나간 건 얼마 후의 일이었다. 한동안 눈에서 멀리하니 마음도 멀어진 듯했다. 글을 읽고 싶은 욕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용솟음쳐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단오철 그네 뛰는 치마처럼 부풀어 올랐던 감정이 쪼그라들어가는 건 사실이었기에, 연은 괜찮겠지 싶어서 다시 기와 밑을 찾았다. 그런데 시커먼 속을 드러내며 비어 있을 기왓장 밑에는 쪽지가 있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걸 알면서도 연은 매듭을 풀어보았다. 이백의 시문이 쓰여 있었다.

 

 

 

- 이제 손 흔들며 가려는가. 떠나는 말도 쓸쓸해 운다.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이었다. 문장을 쓴 시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우아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서 애달팠다. 도리에 따르면, 그 자신이 끊어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이 글을 향한 사모인지, 덕천에 대한 연정인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느 쪽이든 연에게는 같았다. 연은 소매 끝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접어야 할 풋내 나는 마음이 서글펐기에 그가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그는 도로 바늘을 잡았다. 분명 화근이 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연은 아껴놓았던 조각 비단을 꺼내어 그 위로 조심스럽게 바늘을 꽂았다. 바늘귀에는 연분홍색 실이 꿰여 있었다. 꽃을 다 수놓고 나면 그 옆에는 마지막 답도 같이 보낼 생각이었다. 시인이 노래하는 문자 하나에 걸린 시간을 헤아리는 사람은 많지만, 한 땀의 자수 속 새겨진 여인의 시간을 아는 이는 누가 있으랴.

 

연은 새벽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서산으로 저물 때까지 바느질감을 놓지 않았다. 이파리 하나, 서체 하나도 신경 쓰며 만들었기에 결과는 그의 눈에도 만족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넓적한 잎을 완성하고 연은 실을 끊어냈다. 이제 천을 접어내 각낭으로 만들기만 하면 끝이다.

 

‘안에는 새벽에 따서 말린 감국을 넣어야지.’

 

잎은 소금물에 살짝 씻어 서늘한 그늘에서 바싹 말렸다. 바람이 차가워졌으니 감국으로 몸을 보하는 게 좋으리라. 연은 주머니를 묶은 끈 아래로 매듭을 지었다. 서로 서신을 나누지 않은 지 꽤 지났으니, 바로 덕천이 각낭을 가져가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번에는 조금 위험하더라도 직접 전해주는 것이 좋다. 벌레 꼬인 걸 선물로 줄 수 없지 않은가.

 

연은 두루마기를 걸친 채 소매 안에 새로 만든 각낭을 넣고 길을 나섰다. 유 대감댁에서 강론이 끝날 때까지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마당쇠에게 엿가락 하나를 쥐여준 다음에, 덕천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일 테니, 따로 동네에 소문이 돈다고 한들 크게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행랑채 옆쪽에 난 쪽문으로 슬쩍 전해주는 게 좋겠지.

 

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으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도착한 담 너머로 유대감 댁은 시끌벅적했다. 소년들의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리는 걸 보니 운이 좋게도 지금이 딱 쉬는 시간인 듯했다. 그들이 다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가, 강론이 시작되면 그때 마당쇠를 부르면 된다. 보이지 않게 벽 쪽에 달싹 붙은 연의 귓가로 소리가 들어왔다.

 

“자네, 덕천! 결과는 뻔히 나온 거 아닌가? 송연묵은 이제 내 걸세.”

 

“그렇게 확신하지 말게, 아직 승부수를 걸 곳은 있어. 그러니 그 족제비털붓에 손대지 말고 얌전히 두게. 자네, 내가 이런 거로 지는 걸 본 적 있는가?”

 

“뭐, 확실히 자네가 나보다 여인네 마음을 더 잘 아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벌이 모든 꽃을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나?”

 

“원래 여인은 거문고와 같은 법이라서, 연주를 위해서라면 줄을 꽉 죄어줘야 할 때도 있지만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줄을 풀어놓기도 한다네. 쯧, 소리만 엿듣고 타본 적 없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구먼.”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내기라니. 연은 숨소리가 들킬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담은 그의 모습을 가려줄 만큼 높았고 그 주위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혀를 끌끌 차는 덕천을 보고는 소년이 외쳤다. 표정이 어떨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도 없이 감정이 그대로 실린 소리였다.

 

“여인을 더 잘 안다고 으스대는 덕천이 자네보다는 내가 더 군자에 가까울 걸세. 아녀자를 희롱하진…….”

 

“자네가 먼저 그 계집이 괘씸하다고 내기를 제안했지 않은가? 나는 그저 장단을 맞춰줬을 뿐이네.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그러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아, 그렇다고 내가 신경을 쓴다는 건 아니네만.”

 

“신경을 아니 쓴다니, 그래도 마을에 있는 계집 중 제법 아리따운 편 아닌가?”

 

“그래봤자 피는 어디 가지 않지. 자기 딴에는 조신한 규수인 척하지만, 외간 남자와 남몰래 서신을 나누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법도가 괜히 있는 게 아닐세, 천한 건 천한 대로, 귀한 건 귀한 대로 구분하는 게 당연한 거지. 제 딴에는 글을 배우고 싶다고 청했지만,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사실 선명하게 보이지 않나. 뭐, 그래도 첩실로 삼아달라고 하면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거참. 말하는 자네 흑심이 더 잘 보이네, 이 사람아!”

 

“어쨌든 간 내기는 내가 이길 걸세. 그 계집은 이미 넘어온 거 같거든. 쪽지까지 가져간 걸 보니 이제 차려진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네.”

 

“굿도 보고, 떡도 먹고 아주 그냥 욕심이 가득하구먼?”

 

높낮이가 뒤섞인 웃음이 담벼락을 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끝난 듯 신발에 밟혀 모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시문을 외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그러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은 건 먼지와 말없이 담벼락 아래에 서 있는 연뿐이었다. 몸이 으슬으슬하니 입천장이 말랐고, 도꼬마리로 문지른 듯 얼굴이 따가웠다. 연은 떨리는 손으로 소매에 넣어두었던 각낭을 꺼내 들었다. 푸르스름한 기가 도는 비취색 주머니 위에는 분홍빛으로 물든 연꽃이 피어 있었다. 자그마한 이파리 하나하나 초록 색실로 놓은 수 옆에는 그가 전하려던 문구가 있었다. 용돈을 아끼지 않고 산 금사로 적은 답이었다.

 

 

 

- 맑은 바람이 주렴을 흔드는 밤

 

외로운 달이 창을 밝힐 때

 

그때는 즐거이 손을 맞잡아

 

술 따르며 새로 시를 지었으면.

 

 

 

색실이 젖어 짙은 빛을 내비쳤다. 벗으로 즐겁게 손을 마주 잡고, 술 따르며 서로 시를 짓다니. 얼마나 헛된 꿈을 꾸었단 말인가. 연은 힘이 빠진 채로 비틀거리며 담벼락을 벗어났다. 탈력감이 심하면 구역질이 올라오는 줄도 몰랐다. 봄이 지나간 지가 언제인데, 눈앞이 왜 이리 어지러웠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는 꿈을 꿨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중인의 딸이 아닌, 정말 귀한 연꽃이 된 것이라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달콤한 꿈의 끝에는 허망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이리라. 연은 도로 각낭을 소매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멀었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아 돌아온 그는 제일 먼저 아궁이 앞에 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걸 태워버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기억 빼고는 부여잡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연은 소매에서 각낭을 꺼내 던졌다. 겁화처럼 일어난 불이 연꽃을 집어삼켰다. 검은 눈 위로 붉고 흰 불길이 넘실거렸다.

 

이상하다, 왜 타는 건 주머니일진대 그 불에 흔들리는 건 나인가.

 

어지러워서 머리가 띵했다. 앞이 흐려지는 건 물이 번지고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상하게도 눈이 시렸다. 불 앞에 있으니 더운데 동시에 식은땀이 나서 몸이 추웠다. 몸이 허해진 듯하니 말린 대추라도 달여 먹는 게 좋을 듯했다. 대추는 광에 있었다. 연은 무릎을 짚은 채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을 몇 걸음 옮겼다. 유난히 문턱이 높아 보여 치마를 걷어 올리고는 발을 올렸다. 순식간에 흙바닥이 아랫목에 펴놓은 이부자리처럼 가까워졌다. 머리가 부딪쳐서 튀어 올랐지만, 아픔은 없었다. 그저 피곤할 뿐이다. 연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는 아비가 옆에 있었다. 언제 내가 안채로 들어왔던가. 기억이 흐릿했다. 그래도 쓰러진 지는 얼마 안 됐는지 밖은 밝았다. 목을 좀 축여야겠다. 연이 마른 입을 열자, 아비가 화들짝 놀라고 말했다. 훈계조였지만, 손은 조심스럽게 물그릇을 연의 입에 받치고 있었다.

 

“연아, 괜찮으냐?”

 

“무, 물이…….”

 

“이것아, 하루는 꼬박 누워 있었어! 안 그래도 요새 밤을 새워서 일하는 것 같더니, 의원이 그러더구나. 기가 허한데 충격을 받아서 쓰러졌다고!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정양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약도 지어왔으니 먹고 힘내거라.”

 

“그게 아녜요, 아버지. 그게…….”

 

“쭉 들이키고. 내가 머슴도 이번에 새로 들이기로 했어. 푹 쉬어라.”

 

달인 후 시간이 좀 지났는지 미지근한 탕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씁쓸하니 목 뒤로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연이 캑캑거리며 기침을 토해내자, 아비는 바삐 손수건을 덧대어 입가를 닦았다. 결국, 탕약은 다 먹지도 못하고 연은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깼을 때는 또 낮이었다. 연은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았다. 미음이 들어와도 식욕이 없으니 밥상을 도로 물렸다. 그러다가 돌연 몸이 추워져서 땔감을 넣어도 서늘하니 이불을 꼭 둘렀다. 그대로 벌벌 떨며 잠이 들면, 다음 날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는 듯이 열이 펄펄 끓었다. 한참 앓다가 정신이 들면 구역질이 나서 물 아닌 것은 넘기질 못했고, 먹은 게 없으니 힘이 빠져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연이 며칠째 죽을 듯이 앓고 있으니 애달픈 건 아비였다.

 

“그 빌어먹을 돌팔이, 기가 허하기는 뭐가 허해! 정작 사람이 아픈 건 고치지도 못하고…….”

 

딸이 멍하니 앉아만 있자, 아비는 욕을 지껄였다. 기이하게도 욕을 듣고 나니 들끓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연은 고개를 돌려 아비를 바라보았다. 초점은 여전히 흐렸지만, 그래도 며칠 사이에 가장 정신이 또렷한 모습이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입을 틀어막았을 때 연이 말했다. 심하게 앓던 병자가 지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할 해사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아버지, 그건 의원의 잘못이 아닙니다.”

 

“뭐, 뭐라고?”

 

“소녀의 부덕함 때문입니다. 소녀가 지은 죄 때문이며, 생각하지도 말아야 할 곳을 굳이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덕천 도령 때문이냐?”

 

“네?”

 

예상치도 못한 물음에 연의 눈이 커졌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아비의 입에서는 가정을 가장한 확신이 쏟아져나왔다. 하나하나 나오는 말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벼락같았다.

 

“이미 소문이 짜하다. 네가 강씨 문중 덕천을 사모하여 대문을 열어놓고, 도령이 지나가면 연서를 집어던지기까지 했다고. 그런데도 그쪽에서 답이 없어서 네가 병이 났다는 소리가 돌아.”

 

답이 없기는 무슨 답이 없다는 것인가. 그리고 언제부터 연이 연서를 일방적으로 보내는 사람이 되었던가. 그렇게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얘기가 있었으면 서찰을 보라고 밖으로 내던지지도 않았으리라. 숨이 턱 막혀 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를 확신으로 받아들인 듯 아비가 고개를 숙였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신분의 차는 지엄하다. 그리고 이런 소문이 널리 퍼지면 네 혼삿길도 턱 막히지 않을 테냐. 비록 잊기가 쉽지 않더라 하여도 잊어야 한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제가, 강덕천 도령에게 연서를 보냈다고요?”

 

“정신을 퍼뜩 차리는 게 좋겠구나. 영 힘들면 절에 가서 불공이라도 잠시 드리고 오너라.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좋다고 하더구나.”

 

정신이 맑지 않아 저런 것도 되묻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아비의 애틋한 눈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조차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연을 믿으랴? 그저 글을 배우고 싶었던 욕망이었다. 그러다가 스승이라고 할 만한 자에게 연모를 품었지만, 벗으로 남고 싶어 자라나는 마음을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스승이라고 삼았던 자는 알고 보니 겉은 번지르르하고 속은 허랑방탕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분명 발단은 연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오욕을 뒤집어쓴 사람도 연이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그가 말한다고 하더라도 쏟아진 소문을 주워 담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순간 연을 가장 괴롭히는 건 피어오른 작은 바람이었다.

 

‘그래도 그간 나누었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은 아니겠지.’

 

한번 뱉은 말은 돌릴 수 없다. 떨어진 평판도 마찬가지였다. 벼랑 끝에 선 듯 머리가 쭈뼛 일어섰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차분했다. 자신이 아픈 것이 ‘상사병’이라고 소문을 퍼뜨린 건 덕천이리라. 곁에 있었던 다른 도령은 자기가 넘어오지 않는 쪽에 걸었으니. 그의 마음이 송연묵이나 족제비털붓보다 못한 값으로 여겨졌다고 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덕천의 알량한 심보를 이용이라도 해보는 게 어떤가. 마음을 정한 연은 아비의 말에 소리를 질렀다.

 

“절로 가라니요, 그리하지는 못합니다! 소녀, 이곳을 떠나서 도련님을 잊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이를 꿰맨 끈이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잔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는다 한들 그곳에서 싹이 트겠습니까? 도련님과 천년을 헤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너, 너. 정녕 이 아비 말을 듣지 않을 것이냐!”

 

“아버지가 저를 낳고 기르신 은혜 각골난망인 것을 소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이 마음을 거스르는 건 죽음과 같습니다. 부질없다 하여도 살펴주소서.”

 

감정을 일부러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북받친 감정 위로 절로 눈물이 떨어졌고, 절규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연도 쏟아내는 말이 진정 연기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게 중요치 않다는 건 알았다.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했다.

 

다음 날부터 그는 곡기를 끊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먹이려고 들면, 안 보이는 사이에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토했다. 도통 들어가는 게 없으니 열병과 오한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연을 보고 아비는 눈물지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가니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하늘이 누런지도, 파란지도, 검은지도 구분 못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아비가 먼저 손발을 들고 나섰다.

 

“내, 오늘 대감 어르신을 뵙고 왔다.”

 

입술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벅차 연은 눈만 깜박였다. 만나서 무얼 어쨌다는 건가. 그래도 흐리멍덩했던 눈이 자신을 향하자 아비는 한탄했다.

 

“대감 어른이 약조하셨다. 내일 저녁쯤에는 강덕천 도령이 우리 집을 들르실 거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니 제발 부탁드린다고 사정을 했다. 그러니 살려준다고 약조하셨어. 그러니 정신 차려야 할 거 아니냐. 뭐라도 먹어라. 아가.”

 

내일 저녁에 덕천이 온다고. 그럼 기력을 차려야겠지. 연은 힘들게 손을 움직였다. 무엇이라도 먹겠다는 의사였다.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음식을 찾으니 아비의 낯이 확 밝아졌다. 혹시나 체할까, 미음도 후후 불어가며 조금씩 한 숟갈을 주었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토하던 연이 이번엔 잘도 넘기는 게 아닌가. 신이 나서 지어두었던 약도 내와 마시게 했다. 주린 배에 음식이 들어가니 속이 날뛰었지만, 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숨겼다.

 

말할 기력이 생기니 연은 부끄러운 척 끝을 흐리며 부탁했다.

 

“도령이 오면,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때는 방 앞에 사람을 물려주심이…….”

 

“내가 널 위하여 뭔들 못하겠느냐? 알겠다.”

 

아비의 세찬 끄덕임 뒤에 벌써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 날이 되자 덕천이 향리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잔칫상처럼 성대히 차려진 조반을 곁눈질하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웃었다. 덕천은 연이 머무는 방 앞 처마 밑에 서 있었다. 연은 아픈 척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창호지에 비취는 그림자를 보았다. 다시 보게 되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작 마음은 아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림자를 보니 모든 걸 잊은 듯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초경, 이경, 삼경이 지났고 오경이 되었다. 두 사람 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전, 덕천이 먼저 움직였다. 문이 살그머니 열리고 그가 머리맡에 꿇어앉았다. 처음 보았던 때처럼 여전히 희고 아름답다. 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로 영영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네가 아프다고 하는데, 그저 흘려듣겠느냐.”

 

“답을 아니 보냈으니 서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성현의 말씀을 같이 따르는 벗이거늘 서운해할 것이 어디 있겠나. 어서 기력을 찾도록 하게.”

 

“흐려진 머리로는 그간 외웠던 경전도 떠오르지 않고, 지친 몸으로는 붓도 잡기 힘듭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곤욕을 치르셨겠군요.”

 

“곤욕이랄 건 없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가 도련님을 사모해서 병을 얻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슬쩍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는 말에 덕천이 멈칫했다. 곧이어 답은 흘러나왔지만, 연은 망설임을 기억했다.

 

“소문은 개의치 않네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연정이 아닌 작별을 고하고자 하니까요.”

 

“작별이라니?”

 

“도련님과 제가 떳떳하더라도 세상은 그리 바라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제 처지에 화가 났습니다. 화가 쌓이면 병이 된다는 것도 이제 알았습니다. 이 화를 떨쳐버리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더군요.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이, 저도 그처럼 흘러가는 수밖에요. 그러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식으로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제 스승이라고 여겼습니다.”

 

“신분이 다르다고 한들, 벗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어디에 비할까.”

 

“언젠가 기약이 있다면 같이 손을 맞잡고 시를 짓고 싶군요.”

 

“같은 마음이네. 그나저나 밤이 늦었으니 쉬게.”

 

덕천의 말은 다정했다. 그런 말을 뱉은 적이 없던 듯. 그래서 그에게 속고 싶었다. 그래, 이대로 끝이 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연은 눈을 감았다.

 

그때 덕천이 소매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네모진 명주 손수건이 있었다. 그는 손수건을 오른손에 둘둘 감았다. 살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날까,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싸맨 채로 덕천은 연의 낯을 한 번 쓸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손수건은 이별의 정표로 주겠네.”

 

덕천의 손에서 떠나간 손수건이 팔랑, 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문을 열고 떠나자, 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떨어진 손수건을 집었다. 양반이 들고 다니는 물건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아무런 무늬도 수도 없다. 변두리에는 낡아서 조금은 헤진 흔적이 있다.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겉에 작은 얼룩이 있었다. 무엇인가 싶어서 연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눌어붙은 조청이었다. 그 위에는 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수건이 무엇인지 알아챈 연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다식을 전해줄 때 썼던 명주 천이었다.

 

이별의 정표 좋아하시네. 조청 자국도 남아 있는 천을,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릴 때 쓰고 그것마저도 그냥 바닥에 날렸다는 거지. 더러운 걸 아니까. 혹시나 남겨두었던 한 점 미련도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여인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나…….”

 

그게 그냥 던진 말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식으로 농락한 여성도 월연 하나만은 아니리라. 설사 연이 처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보장은 없다.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연은 손에서 힘을 뺐다. 침착해야 한다. 이렇게 혼자 삭여 보낼 문제가 아니다. 지금 바로 낫는다면 의심을 사겠지. 그는 천을 방 한구석에 던져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태워버리고 싶지만, 그러느니 마음을 가다듬는 지표로 삼는 게 낫다. 도로 누운 연은 서서히 계획을 짰다.

 

그가 자리를 완전히 털고 일어난 건 일주일 후였다.

 

“혼자 나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연이 아가씨?”

 

“바람 좀 쐬면 정신이 깰 것 같아서, 괜찮으니 걱정은 덜게. 다만 아버지가 걱정하실 테니 이건 비밀로 해주게.”

 

엽전 몇 닢을 건네준 채 머슴을 내버려 두고 연은 밖으로 나섰다. 이목이 쏠릴 테니 읍내장터로 나갈 생각은 없다. 간만에 도성으로 가자.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발걸음을 바삐 옮기자, 그간 보지 못했던 방이 도성 벽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연은 찬찬히 놓친 소식을 훑었다. 그러던 도중 먹칠을 해놓은 데다가 찢긴 흔적이 역력한 방이 보였다. 언문으로 쓴 잡문이라고 할지언정, 어지간해서는 방에 함부로 손대는 예는 없을 터인데. 쓰개치마를 둘러쓴 그는 옆에 서 있던 장정에게 물었다.

 

“말씀 좀 묻겠소, 저 방은 어찌하여 수모를 당한 거요?”

 

“어휴, 말도 마쇼. 떼놈들이 우리네를 어떻게 보는지…….”

 

“도대체 무엇이 쓰여 있었기에 그런 거요?”

 

“뱃길에 필요한 처녀를 구한다고 쓰여 있었소.”

 

“무엇 때문에 뱃길에 여자가 필요합니까?”

 

“쯧쯧, 명목상으로는 뱃사람 수발을 들 여종이 필요하다는 거지만, 배에 여자가 오르기만 해도 부정 탄다는 얘기도 있는데 여종을 들이겠소? 해신에게 바칠 제물을 원하는 게지.”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니, 어찌 그리할 수 있답니까?”

 

“떼놈들이 그렇지. 참. 풍랑이 무서워서 아직도 출발을 못 했다나. 저런 놈들한테 벼락은 왜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구먼.”

 

“혹시나 마주칠까 무서우니 피해야겠군요.”

 

“그럼 저 서천로 쪽으로 가지 마시오. 거기에 진을 치고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있소.”

 

선선히 답변해준 장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연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충고를 듣고 길을 피했을 텐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천로로 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보통 방법으로는 덕천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도 법도와 상관없는 힘을 끌어오면 되지 않는가. 지금 당장 뾰족한 수로 생각나는 건 없지만, 한번 그쪽으로 가서 나쁠 건 없다.

 

길목에 들어서자, 연은 쓰개치마를 더욱 바짝 잡았다.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집중된 이목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

 

 

 

- 여기서부터는 길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저는 그들과 거래했습니다. 같은 나라 남자에게 여자 값은 족제비털붓보다 못했지만, 되려 남의 나라에서는 제법 비싸게 쳐주더랍니다. 그것이 우스웠습니다. 네, 그렇게 전 그들과 맺은 약속대로 동짓날 밤 몰래 길을 나설 겁니다. 그리고 해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뱀의 제물이 되어 바닷속에 가라앉을 겁니다.

 

- 하지만 이것으로 궁금증이 풀리시지는 않겠지요. 가장 중요한 대목이 빠져 있으니까요. 제가 어떻게 강덕천과 그 식솔들이 죽었다는 걸 확신했고, 죽은 채로 산 사람인 그들을 죽였는지를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애초에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이 각낭을 찾을 일도, 서찰을 발견할 일도 없었을 테고요. 그저 상사화가 수놓아져 있다는 것만 이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잘만 선택했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연이 남긴 서신은 이제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순검은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의도가 악하고 악했다. 그래놓고 서찰에는 죽은 자에 대한 조롱이 가득했다. 하지만 서찰에서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자신이 더 조롱받을 인간이었다. 이것이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이란 말인가. 진상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으니 물을 기회도 없다.

 

그는 눈을 찌푸린 채로 다음 문단을 읽었다.

 

 

 

-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는 법이 있을까요? 저는 두둑하게 받은 목숨값으로 내기를 한번 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내기를 그토록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제가 먼저 걸어보았습니다.

 

- 투전꾼에게 부탁하는 대가로 목숨값의 반을 주었습니다. 강덕천에게 내기를 걸라는 아주 간단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상인에게 도로 돌려주었습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지요. 투전꾼이 제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잡아 관아에 넘기겠다는 조건으로 한 약조였지요. 이제 그 후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저도 모릅니다.

 

-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강덕천은 저와 한 내기에서 졌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어 서찰에서 굳이 힘들여 투전꾼이나 상인을 찾지 말라고 말했다. 어차피 순검도 그들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강덕천이 죽자마자 자취를 숨기고 도망갔을 사람들이다. 특히 외국 상인이라면 벌써 이 땅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내용이 진실이라는 법도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진 순검은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천천히 읽은 것도 아니었는데 창이 점차 밝아졌다.

 

 

 

- 마지막으로 저승에서 덕천을 만나면,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노련한 투전꾼에게 지는 것과 내깃거리였던 비천한 계집애에게 지는 것 중, 어떤 게 더 자존심이 상하더냐고요.

 

 

 

만나본 적은 없건만,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여인의 비소誹笑가 울리는 듯했다. 철없는 소년이 어쩌다 장난친 정도였다. 그런데 그를 향한 악의는 지나치게 사악하고 극단적이었다. 서찰을 읽는 그도 목덜미가 섬뜩할 지경이다.

 

이를 어쩐다. 순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서찰을 증거로 내놓아 조사를 다시 한다고 한들, 이 내용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결국 고인과 그 문중의 수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이었다. 노름으로 양반이 자액에 이르게 된 걸 밝히는 일이 과연 좋은 것일까.

 

순검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관자놀이를 부여잡던 그는 한참 후에 서안 앞에 펼쳐둔 서찰을 접었다. 눈길이 등잔불로 향했다. 그는 접은 종이의 끝을 불에 가져다 댔다. 타오르는 촛불의 끝이 뱀처럼 일렁였다.

 

이런 요사스러운 걸 세상에 내놓을 순 없다.

 

연기와 함께 종이는 흰 재를 남겼다. 각낭 역시 종복에게 건네 처리하라 명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좋겠지만, 이런 물건을 받아 봤자 향리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왠지 부정 탄 기분이 들어 속이 떨떠름했다.

 

이제 서계를 올릴 시간이었다. 그는 그가 가장 아끼는 족제비털붓을 들었다.

 

 

 

- 동명력 11년 6월 23일, 강씨 덕천과 그 가솔의 죽음에 관하여 보고 올림. 이인吏人 전효원과 조경인을 동원한 초검을 통해 강씨 덕천 및 그 식솔들은 전부 시신이 푸르고 숨통 아래의 혈맥이 통하지 아니하여 깊이 남은 액흔이 검붉은 색을 띠었고 은비녀의 색이 흐려짐도 없었다. 식초와 술지게미를 시체 위에 씌워서 물로 닦아내도 다른 곳에서는 별다른 상흔이 없었기에 자액을 하였음이 밝혀졌고, 뱀이 그들을 해했다는 해괴한 소문이 돌긴 하였으나, 목격자를 비롯한 관련자들의 심문 역시 모두 현장이 조용했다는 진술로 일치하였다. 시친屍親이 초검의 결과에 승복했기에, 이로 결안(結案)을 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이름 석 자와 수결을 남기자, 순검의 마음이 편해졌다. 서찰을 읽느라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오늘은 오늘대로의 사건 처리가 있다. 지난 사건 때문에 무거운 마음은 버릴 필요가 있었다. 그는 먹 자국이 남지 않도록 종이를 말린 후 양식대로 곱게 접어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경무청에서 밤을 또 지새우지는 않으리라. 서안에 쌓인 재를 후- 불어냈다. 그렇게 강덕천과 그 식솔들의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덕천은 대들보에 건 동아줄을 노려보았다.

 

남들 다 하는 투전판이기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게다가 처음에는 분명히 그가 돈을 따고 있었다! 패가 착착 붙어 손맛도 좋았고 끗발도 좋았다. 어쩌다 꼽사리로 꼈는데 장원을 연달아서 해서 자신감이 붙었던 게 망조였다. 그렇게 투전에 알음알음 손을 대다가 눈떠 보니 낙장불입이었다.

 

본전만 찾고 끝내자, 개패가 나오면 죽자, 앞거리가 망했으니 이번에는 뒤거리를 해보자. 한 번만 이기면 장땡이다. 그러다가 어느샌가 선산 땅문서가 투전꾼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도 얻은 빚이 산더미였다. 이자까지 따지면 지금 입고 있는 잠방이를 벗어줘도 부족할 판이었다.

 

어차피 불법 투전에서 얻은 빚인데, 관아에 고하고 구명을 호소하면 되지 않겠나, 라고 누군가는 조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덕천의 구명은 아니었다.

 

노름에 미쳐 선산을 판 후레자식이라는 걸 동네방네 알리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지.

 

죽은 사람을 추심하지는 못할 터다. 그는 이미 일가식솔을 설득한 상황이었다. 사실 설득도 아니었다. 고고한 양반으로 죽을 테냐, 아니면 선산을 팔아먹었다는 치욕을 휘감은 채 개똥밭 같은 이승에서 머슴처럼 구를 것이냐. 그 둘 중 후자를 특별히 강조하니 설득은 쉬웠다. 이미 다른 이들은 목을 매었다. 남은 것은 덕천뿐이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서 대롱대롱 매달린 줄을 보자니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러한 시련을…….”

 

고작 투전꾼에게 휘둘려 목숨을 끊다니. 이 수치를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저승에서 조상님들이 곡할 노릇이다. 온통 죽상을 한 덕천은 줄을 잡아서 목에 매었다. 이제 힘을 빼고 아래에 둔 걸상을 걷어차기만 하면 된다. 목에 느껴지는 두툼한 줄이 서늘해서 등골이 시렸다.

 

이게 과연 최선일까.

 

그는 줄을 꼭 부여잡은 채로 생각했다. 정말로 목숨을 끊는다고 하여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것인가. 지킬 수 있다고 한들, 이 마음속 부끄러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가 너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떳떳하게 나서서 빚을 없애고는 투전꾼들을 혼쭐내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덕천의 머릿속은 철 맞은 팽이처럼 핑핑 돌아갔다. 사실, 그는 죽기가 싫었다.

 

‘잠깐, 생각해보면 그들이 겁박했다고 해도 되지 않은가.’

 

이미 식솔들은 죽었으니 말이 없다. 덕천 대신 그중 하나가 투전꾼에게 속아 선산을 넘겼고, 계속된 겁박으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면 된다. 수치스럽더라도 덕천은 집안의 대들보로서 이를 고발한다고 나서며, 죄과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되지 않는가? 그는 스스로 만든 논리에 취해 목에 두른 줄을 꽉 쥐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가 살아남아서 집안을 다시 우뚝 세워 위령제를 지내면, 죽은 가솔도 만족할 것이다. 정 안 되면 그는 죽은 척 빠져나갈 수도 있다. 불을 지르면 어차피 누가 죽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우니 순검의 검험도 피해 갈 수도 있다. 그래, 좋다. 굳이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다. 덕천은 줄을 끄르려고 했다.

 

그때, 그가 서 있던 걸상이 갑자기 쓰러졌다. 차지도 않았는데.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동아줄이 목에 휘감겼다. 눈이 불거져 나오고 신음이 터졌다.

 

“끄. 끄어억, 꺽, 흑, 히익. 꺽.”

 

줄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턱만 넘기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손에 힘줄이 우뚝 서고 이가 갈렸다.

 

그때 뒷덜미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스쳤다. 비단처럼 부드럽지만 자잘한 결이 있었다. 덕천은 놀라 고개를 꺾었다. 쉬이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 적도 없는 푸른 빛의 구렁이였다. 두 갈래로 갈린 붉은 혀가 뺨을 훑었다. 진저리를 치며 덕천은 필사적으로 뒤쪽으로 손을 보냈다. 뱀을 어떻게든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뱀은 그를 희롱하는 듯 목에서 떨어져 나가는 대신, 줄 위를 타고 놀며 몸을 죄었다. 덕천의 눈앞이 어둠으로 흐려졌다.

 

쉿쉿거리는 소리가 굿판의 방울처럼 끊임없이 울렸다. 피가 통하지 않아 팔과 손이 희게 질렸다.

 

덕천은 이제 뱀을 쫓는 대신 몸을 빼기로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올가미를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방해가 사라진 때를 놓치지 않고 타고 올라온 뱀이 그의 목을 감았다.

 

그제야 덕천은 처음으로 뱀과 눈을 마주쳤다. 눈은 충혈된 것처럼 붉었지만, 동공은 밤바다처럼 검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붉은색이 연꽃을 닮았다니.

 

그 순간 덕천의 목뼈가 꺾여서 부러졌다. 매달린 몸이 끄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렸다.

 

뱀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몸을 숨겼다. 바람이 주렴을 스치는 소리에, 대들보에 매단 줄의 움직임이 묻혔다. 달빛만이 어둑한 창을 외롭게 밝혔다. 술과 시가 없어도 즐거운 밤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19 단편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 담장 2023.07.30 0
2118 단편 사육제 성훈 2023.07.29 0
2117 단편 사라진 시간 리소나 2023.07.29 0
2116 단편 정원, 수영, 시체 강경선 2023.07.25 0
2115 단편 흰 뼈와 베어링 scholasty 2023.07.12 3
2114 단편 리사이클 프로젝트:연어 파란 2023.07.11 0
2113 단편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 박낙타 2023.07.09 2
2112 단편 아스라이 김휴일 2023.07.08 0
2111 단편 빈 심장 성훈 2023.06.30 2
2110 단편 우주폭력배론 : 반복 니그라토 2023.06.26 0
2109 단편 거짓말쟁이 여자 유이현 2023.06.19 0
2108 단편 뱃속의 거지2 박낙타 2023.06.08 2
단편 사연 윤이정 2023.06.04 0
2106 단편 종말 앞에서 인간은 천가연 2023.06.02 0
2105 단편 명과 암 기막준 2023.05.28 0
2104 단편 루틴 아르궅 2023.05.21 0
2103 단편 생산 2팀 황유석 대리의 퇴사 사유 박낙타 2023.05.19 1
2102 단편 로보 김성호 2023.05.19 0
2101 단편 기네스 펠트로 요휘 2023.05.18 0
2100 단편 천마총 요휘 2023.05.16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