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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루틴

2023.05.21 00:5105.21

 

세수를 다 하고 나왔다. 수건도 반듯하게 걸어 놓았고 욕실화도 신기 편하도록 돌려놓았다. 엄마는 돌아보지 않고 칼질만 하고 있다. 촵촵타닥타닥 촵탁촤압탁탁, 도마소리가 요란하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신호와 반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스튜피드 제이슨의 오른발처럼 박자가 안 맞다. 엄마는 멍청이가 아닌데도 촵촵촵탁탁탁 촵촵촵탁탁탁 맞추지를 못한다. 오늘은 볶음밥을 먹는 날이 아니다! 그러니까 엄마의 칼도 제멋대로 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덩달아 헷갈리기 시작하는 친구들처럼 프라이팬의 기름도 오른발 왼발 마구 튀어 오른다. 손에 기름이 튀었는지 엄마가 볶음용 숟가락을 놓친다. 숟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야채 조각도 흩어진다. 엄마가 욕을 하며 바닥을 닦는다. 마루가 번들거리고 프라이팬에서는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 엄마는 바닥을 닦다 말고 다시 야채를 볶는다. 야채 익는 냄새가 난다. 나는 끝까지 틀리지 않는다. 내가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가 울렸다.

 

 

오빠는 아직도 소파에 누워 있다. 나는 오빠에게 다가간다. 오빠의 귀에 대고 바나나송을 부른다. 바바바 바바나나 바바바 바바나나 바바바 바바나나. 오빠가 얼굴을 찌푸린다. 나는 노래를 계속 한다. 토가리노포카토리 카니말로마니카노치. 오빠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난다.

“이송하! 하지 말랬지.”

사각볼에 밥을 담던 엄마가 뒤를 돌아본다.

“이도하! 왜 그래?”

나를 쥐어박으려던 오빠가 멈칫한다.

“송하가, 하지 말랬는데도 자꾸…”

“자꾸 뭐? 넌 왜 엄마 말 안 들어? 일어나자마자 씻으라고 했어? 안 했어?”

엄마가 숟가락으로 프라이팬 가장자리를 내려치며 오빠를 무섭게 노려본다. 화장이 번져 엄마의 얼굴도 마룻바닥처럼 번들거린다.

“지금 씻으려고 했어요.”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숙인다.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막는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숟가락이 오빠의 머리통으로 날아올 것이다. 입을 닫고 욕실로 튀어야 한다. 그 정도 눈치라면 오빠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 아침 메뉴가 햄에그 샌드위치가 아니라 야채 볶음밥인 이유를 알 정도는 아니다.

오늘도 달걀 이불은 없다. 달걀 몽그리가 야채와 함께 밥 속에 박혀 있다. 엄마는 아침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고 했다. 한꺼번에 볶거나 끓여서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오빠가 당근을 골라내고 있다. 엄마 몰래 내 밥 위에 올린다. 가만히 있으니까 밥까지 덜어 놓는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안다.

식기세척기에 설거짓거리를 정리해 넣은 엄마가 볶음밥이 담긴 그릇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맛있어요, 엄마.”

나는 엄마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한다. 엄마는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려다가 비워져 가는 오빠의 그릇을 보고는 한입 가득 밥을 떠 넣는다. 계속 먹고 있는데도 줄지 않는 내 밥이 엄마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엄마의 한쪽 볼이 터질 것 같다. 그런데도 또 한 숟가락을 떠 넣는다. 한입에 한꺼번에를 시범 보이려는 것 같다. 엄마는 밥을 씹으면서 오빠와 나를 살핀다. 미리 꺼내놓은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하는 거다. 목요일은 체육복을 입는 날이다. 런앤잉글리시 프로그램이 있다.

엄마는 나를 보며 말한다.

“대니얼 선생님이 우리 송하한테 뭐라고 했다고?”

“어메이징잡! 유네일딧!”

나 대신 오빠가 대답한다. 빈정거리는 투다. 그 말은 저렇게 하면 안 된다. 대니얼 선생님이 어떻게 말하는지 들려주고 싶다. 엄마는 듣지도 않고 벽시계를 쳐다본다. 7시 42분이다.

“도하는 돌봄교실 끝나면 태권도랑 피아노 갔다가 수학 열 장 푸는 거 알지? 송하야,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가지 않을 거야. 혼자 올 수 있지?”

유치원을 나와 한가람 빌라를 돌면 노란색 커피 가게가 보인다. 아빠가 데리러 오는 목요일에는 퐁크러쉬를 먹을 수 있다. 나는 딸기 퐁크러쉬를 제일 좋아한다. 퐁과자가 녹을까봐 딸기맛 나는 우유를 땅만 보며 빨다 보면 집에 도착해 있다. 바삭한 퐁과자를 마저 먹으려고 현관에 서서 신발도 벗지 않는다. 과자까지 다 먹고 나면 조금 어질어질하다. 퐁크러쉬가 너무 달콤해서인지 땅만 보며 걸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엄마가 자주 말하듯, 어리다고 뭘 모르진, 않는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다. 아빠가 왜 일주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 미국으로 출장을 간 게 아니라는 것도. 그럴 땐 퐁크러쉬를 다 먹었을 때처럼 어지럽다. 나는 묻지 않는다. 아빠가 왜 데리러 오지 않는지.

밤늦게까지 오빠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 수학은 내가 풀어야 하고 오빠에게 발차기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빠는 2학년인데도 세자릿수 뺄셈을 못 한다. 나는 구구단도 다 외웠고 중학생들이 하는 방정식도 풀 수 있다. 구구단은 외울 필요도 없다. 같은 수만큼 더해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법칙이 보인다. 3단의 끝자리가 369 258 147이 되풀이 되고, 7단의 끝자리는 741 852 963이 되풀이 되는 것처럼, 일정하게 작아지거나 커진다. 법칙이 있는 건 쉽다. 오빠의 발차기에는 법칙이 없다. 기분대로다. 기분이라는 것에도 법칙이 없을 리 없겠지만 구구단처럼 단순하지 않다. 오빠는 발차기를 가르쳐 준다며 베개를 들고 있으라고 한다.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해도 소용없다. 피할수록 더 아프다. 수학 실력이 늘지 않는 만큼 힘이 세졌는지 한 대만 맞아도 배가 터질 것 같다. 발길질은 울어야 끝난다. 운다고 바로 멈추는 건 아니지만 엄마에게 말하는 것보다는 빠르다. 말해 봤자 엄마는 애들 장난 정도로만 생각한다. 엄마는 곤란한 문제는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린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식도 세우지 못했다. 오빠의 기분을 미지수로 두어도 식이 세워지지 않는다. 엄마가 문자를 보며 중얼거린다. 너무 하시네, 팀장님. 이걸 어떻게 내일까지 하라는 거야… 엄마는 항상 바쁘다.

오빠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한다.

“볶음밥 싫어. 샌드위치 먹고 싶어.”

엄마의 얼굴이 굳어진다. 오빠가 숟가락으로 밥을 뒤적이고 있다.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엄마는 한 숟가락 가득 떠 오빠에게 먹인다. 오빠는 밥을 물고 씹지 않는다. 엄마는 밥그릇을 치워버린다.

“먹지 마!”

먹던 밥이 씽크대로 부어진다.

“하는 짓이, 지 아빠랑 똑같아.”

수돗물을 세게 틀었는데도 엄마의 말이 정확히 들린다. 하리보 젤리를 먹을 때처럼 꼭꼭 씹힌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안방에서 아빠와 통화하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아빠에게 화를 냈다. 한참 자다 깼는데도 소리가 났다. 엄마가 혼자서 욕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하는지 알 수 없어 무서워졌다.

“잘못했어요.”

겁을 먹은 목소리다. 오빠가 나에게 발차기를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저렇게 자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살 수는 없을 테니까.

오빠는, 오늘은 밥투정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젯밤 늦게 식빵을 사러간 엄마가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 이유까지도.

엄마는 8시 5분에 오는 통근버스를 타야 하고 오빠와 나는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서야 한다. 아침 식단은 요리하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계산해 통근버스 시간에 맞춰져 있다. 월요일은 오븐에 구운 고구마, 화요일은 토마토 스크램블에그, 수요일은 유부초밥과 과일 주스, 목요일은 햄에그 샌드위치다. 엄마는 샌드위치 자리에 볶음밥을 넣어 보았지만, 당근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엄마가 시계를 본다. 지금쯤은 양치질을 끝냈어야 한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욕실로 밀어 넣는다. 식탁 위의 밥그릇을 치우다 말고 치약을 짜준다. 어서, 어서. 꾸물거리지 말고. 엄마는 스피드 퀴즈를 내는 사람처럼 빠르게 말한다.

엄마가 옷을 갈아입으러 옷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조용히 욕실 문을 닫는다.

나는 안쪽 이까지 닦는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혓바닥도 빼놓지 않는다. 오빠는 몇 번 칫솔질을 하더니 물을 받아 거울로 튕긴다. 내 쪽으로도 물을 튕긴다. 엄마한테는 못 하고 나한테 화풀이다. 기분은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다. 기분이라는 녀석은 마음속에 갇혀있질 못한다. 만만한 사람을 만나면 폭죽처럼 터진다. 오빠도. 엄마도!

나는 치약을 뱉고 한입 가득 물을 문다. 우물우물한 다음 세면대에 뱉는다. 한 번 더 우물우물, 고개를 젖혀 목 안까지 헹군다. 어지럽다. 사레가 든다. 기침과 함께 물이 뿜어진다. 나는 고개를 오빠 쪽으로 돌린다. 오빠의 회색 티셔츠에 물이 튀어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오빠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

컵의 물이 나에게 뿌려진다. 체육복이 축축하게 젖는다. 나는 준비해둔 울음을 터트린다. 옷방까지 들리도록 운다.

엄마가 욕실 문을 연다. 내 옷을 보자마자 오빠를 끌어낸다. 티셔츠가 딸려 올라간다.

“왜 이랬어?”

“송하가 먼저…”

한 벌밖에 없는 체육복을 적셔놓으면 어떡해?”

엄마가 오빠를 잡고 흔든다. 튀어나온 오빠의 뱃살이 출렁인다.

나도 젖었

시끄러워. 엄마가 모를 줄 알아. 가만히 있는 송하는 왜 건드려? 왜 때리냐고!”

엄마가 오빠를 발로 찬다. 오빠가 쓰러지자 마구 밟는다. 한 갈래로 묶어놓은 엄마의 머리카락이 풀어진다. 오빠가 배를 잡고 몸을 웅크린다. 검은색 스타킹이 터진다. 엄마는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시작한다. 점점 더 힘이 들어간다. 왜들 날 가만히 두지 않냐고. , , . 엄마는 같은 말을 계속한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오빠로 보이지 않는 게 분명하다. 오빠는 울지 못한다. 숨을 쉬지 않는 것도 같다. 발길질을 멈추는 방법을 오빠가 알 리 없다.

엄마는 물건을 집어 오빠에게 던진다. 내 유치원 가방 안에서 수저통이 달그락거린다. 수저통에 그려진 미니언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를 낸다. 캐빈이 말한다. 엄마는 악당이다.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해. 외눈박이 스튜어트가 배가 고프다고 투덜댄다. 정신을 차리라고 캐빈이 소리친다. 겁쟁이 밥이 울상을 짓는다. 오빠 실내화 주머니에서 모래가 쏟아진다. 엄마가 식탁 위의 사각볼을 집어 든다. 용감한 캐빈이 엄마의 허리를 안고 매달린다. 스튜어트가 사각볼을 잡아 챈다. 밥이 울음을 터트린다. 엄마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른다. 잠시 뒤 오빠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아주 질긴 하리보를 씹을 때처럼 꼭꼭.

한 번만 더 송하 때려 봐.”

오빠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가 돌아서자 꺽꺽 울기 시작한다. 나는 문제를 완벽하게 풀었다. 이 문제는 두 개의 미지수와 식이 필요했다. 엄마와 오빠의 기분.

85분이 지나고 있다.

 

 

세수를 다 하고 나왔다. 세수를 끝낸 오빠가 식탁에 앉아 있다. 엄마가 오빠 앞에 사각볼을 내려놓으며 나를 부른다. 우리 딸, 어서 앉아. 아들도 많이 먹어. 엄마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처럼 말한다. 이제 엄마는 아침에 요리를 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도시락이 배달된다. 오늘 메뉴는 크림소스 오므라이스다. 볶음밥이 달걀 이불을 덮고 있다. 하얀 크림소스에 파슬리 가루도 뿌려져 있다. 오빠가 나뭇잎 가루라고 들릴락말락 말한다. 엄마가 오빠를 힐끗 쳐다본다. 오빠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엄마가 미소를 짓는다. 원장 선생님처럼 참 잘 했어요를 할 것 같은 미소다. 아직 유치원복은 갈아입지 않았다.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한 다음 옷을 갈아입는다. 넷째 주 토요일에는 아빠 집에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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