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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파라다이스를 찾아서

2023.08.27 14:2108.27

한 때 강철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들이 자리잡고 있던 땅은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척박한 황야가 된 지 오래다.

살아숨쉬는 것이 움직이는 것은 보기 조차 싫다는 듯, 황야는 그 위를 거니는 투박한 부츠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처럼 거친 숨결을 내뱉는다.

부츠와 다 떨어진 청바지는 살을 에는 모래바람으로부터 착용자를 겨우 보호해 줄 뿐이었고, 너덜너덜한 티셔츠와 그 위에 걸친 검은 가죽 자켓 정도가 그나마 이 황야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차림새로 보인다.

작은 가방 하나를 들쳐매고서 붉은 황야를 가로지르는 여자.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는 끊임없이 땀이 쏟아져 내렸고, 그것은 이마를 타고내려 코와 빰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여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붉은 황야의 지평선 뿐.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것은 이미 수시간 전에 잊어버렸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전방에 있는 높다란 바위 아래 길게 펼쳐진 그늘 아래로 향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탈진해 쓰러져 이 황야를 뒹구는 백골 중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금방 여자의 발을 스치고 지나간 앙상한 해골처럼 말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서 여자는 겨우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이마의 땀을 닦아낸 뒤 왼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해본다.

며칠 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부서진 곳 없는 매끈한 조개껍질 다섯개, 머리끈 하나와 바꾼 오토매틱 시계는 흠집이 많이 나 있었지만 작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나마 그 마을 사람들이 시계를 읽는 법도 몰라서 이 작은 기계덩어리가 무슨 기능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 정도 잡동사니를 주고서 바꿀 수가 있었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였다면 아마도 1년치 식수와 음식 정도는 내놔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뿌연 유리 너머로 시계바늘은 1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서 울퉁불퉁한 스테인레스 물병을 꺼낸다. 마개를 열고 목을 축이려 했으나 거기서 나오는 것은 지금까지 흘린 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젠장...'

여자는 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입 밖으로 내뱉을 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럴 힘을 사용하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다시 가방 안에서 누렇게 변색된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녀가 종이뭉치를 땅바닥에 놓고서 조심스럽게 펼칠 때마다 붉은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지도였다.

오래 전 지도가 만들어졌을 시기에는 분명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총천연색으로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었으나, 지금은 전체적으로 변색되고 닳아 찢어져 최소한의 기능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이 황야에 커다란 바위 같은 쓸모없는 자연 구조물도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여자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지도에서 찾아낸다. 자신의 목적지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확인해 본다. 그리고 그는 깨닫게 된다. 원래 자신이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경로에서 자신이 수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는 눈을 찌푸리고 최대한 주변에 보이는 랜드마크를 확인한다. 크고 작은 바위, 특이하게 생긴 지형. 지도와 그것들을 대조해 본 여자의 동공은 순식간에 확대된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게 된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식스암즈의 구역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가 쉬고 있는 바위 그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러 그림자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여자는 자신에게 유령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상대방은 모두 넷이었다 - 넷 모두 구리빛으로 빛나는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헐벗은 상체를 가리고 있는 것은 튼튼한 쇠사슬 벨트였다. 그 벨트는 그들이 등에 메고 있는 어떤 구조물에 연결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네개의 팔이었다. 잔뜩 화가 난 사마귀처럼, 그들의 등에서 뻗어나온 네 금속 팔은 상대방을 위협하는 듯 앞쪽으로 뻗어나와 있었다. 이 사나이들의 진짜 팔은 이들이 여자를 향해 달려오는 동안 쉴새 없이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쥐고 있는 방망이도 함께 말이다.

여자는 가방에 물병과 지도를 쑤셔넣은 뒤 잽싸게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당할 고통을 몇초라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마을에서 흰 수염이 길게 난 노인에게 껌종이 하나를 주고서 얻은 조언이 생각났다.

- 절대로 식스암즈의 구역에는 발을 들이지 마시오. 그들은 여섯개의 팔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보이는 모든 생물을 찢어 발기기 때문이오. 붉은 사막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물이 부족하오. 그렇기 때문에 물 대신 피를 마시지. 지나가는 운 없는 행인을 붙잡아다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한 방울씩 뽑아낸다오.

하지만 바위 그늘까지 그래왔듯 황야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고, 얼마 달리지도 못해 여자는 상대방에게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주먹과 방망이로 여자가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팼다. 여자가 정신을 잃자 그들은 여자의 다리를 붙잡고서 황야 어디론가로 끌고 갔다. 여자가 있었던 자리에는 붉은 흙먼지만 날릴 뿐이었다.


***


온 몸이 저릿했다.

팔과 다리에 힘을 줘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손은 가죽끈에 묶여 등 뒤로 포박당해 있었고, 다리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숨을 들이키자 매케한 냄새와 함께 먼지가 콧 속으로 훅 들어왔다.

여자는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뜨자 짙은 청색으로 물든 황야의 모습이 부옇게 시야에 들어왔다. 해가 지고 새벽녘이 되자 찌는 듯한 더위는 온데간데 없었고 한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몸을 비틀어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불이 거의 꺼진 작은 모닥불이 있었고, 그 앞에 땅바닥에 몸을 누인채 코를 골고 있는 덩치들이 보였다. 여자는 소리가 나지 않게 몸을 뒤집어서 손으로 땅바닥을 훑었다. 손을 묶고 있는 가죽끈을 자를 만한 날카로운 돌멩이를 찾기를 바라면서. 몇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정말로 그런 길쭉하고 얇은 돌멩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돌멩이를 거꾸로 들고서 조금씩 가죽끈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관둬."

묵직한 저음이 옆에서 들려왔다. 여자는 깜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시선을 마주쳤다. 여자를 때려잡은 녀석들 중 하나가 작은 바위에 기대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여자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한쪽 손에는 여자의 가방에 들어있던 산악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여자의 머릿속에 노인의 조언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 식스암즈 그들은 희생자를 물통이라고 부르오. 놈들의 아지트에는 거꾸로 매달려 조금씩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엄청나다지. 그 피를 모아서 목을 축인단 말이오. 거꾸로 매단 뒤 늘어진 팔에 상처를 내고, 거기서 조금씩 피를 흘리게 하는 거지.

"오... 오지마!"

여자는 발버둥을 치며 몸을 굴렸다. 그러자 상대방은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깨우고 싶나, 내 친구들?"

어눌한 말투지만 확실한 협박에 여자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내 피는 방사능 투성이야. 독도 들어있다고. 마셔봤자 너희들만 손해일 거야."

의도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인 것을 상대방이 모를 리가 없었다. 상대방은 그런 것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와 그의 가방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도를 꺼내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뭐냐."

짧은 질문이었지만 상대방의 목소리에는 피를 향한 갈망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여자는 상대방과 지도를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도다."

"뭐냐, 지도가."

여자는 금세 깨달았다. 마지막에 들린 마을 사람들 보다 이 식스암즈 녀석들은 훨씬 더 교육이 되지 않은 무식한 부류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는 그걸 이용해 겁을 줄까 하다가 금방 생각을 접었다. 이런 폭력적인 녀석들을 어설프게 자극했다가 무슨 반응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차라리 그 호기심을 이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말이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적혀있는 거지."

상대방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짧은 질문을 던졌다.

"적혀 있나? 파라다이스?"

여자는 절로 입을 벌렸다. 상대방에게 듣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잡혀서 죽을 때까지 피를 뽑힐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여자는 상대방에게 되물었다.

"파라다이스를 아나?"

"들어봤다, 어떤 물통이 얘기해줬다. 황야 없다고 했다, 거기는. 거기는 피 말고 물 있고 맛있는 음식 있고 좋은 옷, 좋은 집 있다고 했다, 이 거지같은 황야 말고."

"맞아. 이 황야 어디엔가 숨어있다는 곳. 너도 가고 싶은 거지?"

"가고 싶다, 나는. 관심없다고 했다, 친구들은. 팔 여섯개 있고 피 마시면 좋은 거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 안한다, 나는. 황야 거지 같다."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상대방의 말에서 진정성마저 느껴졌다. 여자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도 파라다이스를 찾아가고 있는 길이었어. 거기로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너네들 땅에 들어서게 된 거야.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은 내가 알아. 난 글도 읽고 쓸 수도 있어. 날 풀어주면 너도 같이 데리고 갈게."

상대방은 산악 나이프의 끝을 청년의 코 끝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싫어한다, 거짓말, 나는. 너는 물통이 된다, 파라다이스 못 가면."

"거짓말 아냐. 난 여기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왔어. 거기는 옛날 전쟁의 잔해가 발굴되는 곳이었지. 나는 고장난 로봇을 발굴했고, 거기서 파라다이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냈어. 그 정보를 바탕으로 여기저기 헤메면서 여기 황야까지 오게 된 거라고, 파라다이스를 찾으려고."

"뭐가 있는지 아나, 거기?"

"전쟁 전의 풍요로운 삶이 있다고 하더군. 원하는 만큼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언제든 신선한 물을 마실 수도 있고, 낮이나 밤에도 칼을 든 무법자들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곳이라고 말이야. 정말로 찾아낸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 그렇게 말했다, 다른 물통들도."

상대방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한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잡고 그를 뒤집어 눕혔다. 그리고 나이프로 손목을 묶고 있던 가죽끈을 잘라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대방은 그녀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크롤이다, 내 이름. 파라다이스로 데리고 간다, 네가, 크롤을."

"내 피를 마시지 않는 거지?"

여자의 물음에 크롤은 방망이를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이름 얘기했다. 이름 얘기한다, 너도. 방망이 맞는다다, 예의 없으면."

"유투스야. 내 피를 마시면 너도 파라다이스 못가는 거야."

"앞서 간다, 너는. 따라간다, 나는. 피 안 마신다."

크롤의 약속에 유투스는 안심했다.

그 둘은 동이 틀때까지 달렸다.

식스암즈는 겨우 잡은 물통과 자신의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단순히 물통이 친구를 죽이고서 도망쳤다고 생각할 것이었고, 더한 고통을 물통에게 주기로 다짐하며 뒤를 쫓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대충 방향을 잡고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


유투스와 크롤은 운이 좋았다.

식스암즈의 나머지 패거리는 그들을 따라잡을만한 속도와 체력, 그리고 집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그 둘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들이 물통을 잃어버렸다는 분노를 서로에게 뿜어내고 있을 그 무렵, 유투스와 크롤은 황야의 끝자락에서 떠오르는 태양빛에 지도를 놓고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붉은빛 황야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크고 작은 바위가 점점 더 많이 보였는데, 그것들이 황야에 흩어져 있는 모양새는 자연적이기 보다는 인위적이었다.

유투스의 눈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외부인들의 진입을 막는 동시에 모종의 경고를 하는 의도로 바위가 배치된 것 같았다. 크롤의 반응도 유투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의 근육과 방망이는 단숨에라도 바위 같은 것은 깨부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음에도, 그는 가까이 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크롤은 마뜩찮은 톤으로 유투스에게 물었다.

"꼭 가야하나, 이리로?"

"다른 곳은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 방호복이 없으니 여기가 최선이지."

크롤은 방사능이 뭔지 되물어봤고, 유투스는 나름의 지식을 동원해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지만 최소한 이 땅을 지나야한다는 뜻은 전달된 것처럼 보였다. 크롤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바위 사이로 유투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빛이 황야를 달구었지만 촘촘히 놓인 바위 사이 길은 적당한 온도를 내주는 그늘이 있어 움직이기 힘들지 않았다.

"여기 뭔가 있어? 지도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데."

유투스의 질문에 크롤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 전이었다, 친구들이 발견한 건. 멘탈이 살고 있다, 여기에."

"멘탈이 뭔데?"

"미치광이들."

유투스는 속으로 픽 코웃음을 쳤다. 금속 팔을 매달고서 팔이 여섯개라고 위협하는 무지랭이 집단에 소속된 놈이 누굴 미치광이라고 정의하는가? 하지만 크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힘 없다, 멘탈은. 때려잡을 수 있다, 너 정도 힘으로도. 그런데 머릿속에 들어온다, 멘탈은. 머릿속에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끔찍한 일?"

"노려본다, 그놈들은. 눈 마주치면 홀린다. 들어온다, 네 머릿속으로. 그리고 방망이질 한다, 머릿속에서."

그 말을 듣자 뭔가 유투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위 사이킥 사용자라고 불리는 자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기억 말이다.

아직까지 문명의 불씨가 남아 있어서 성냥 대신 전기로 밤에 불을 밝힐 수 있는 도시에는 그런 자들을 필요로 한다고 했었다. 존경과 존중의 의미로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만으로 물건을 움직이거나 몸에서 전기를 뿜어낸다거나 하는 사이킥이라고 불리는 초능력을 가진 자들을 붙잡은 뒤 전기를 생산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수장 또한 사이킥 사용자였다. 그들을 정신적으로 포박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사이킥을 가진 자.

그런 자들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바위 틈을 헤매며 크롤은 찡그린 얼굴로 속삭였다.

"마주치지 마라, 눈을. 피할 방법이다, 유일한."

유투스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해는 지평선에 걸친 채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바위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 채 황야 위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냈다. 유투스와 크롤은 그 문양 사이를 거닐며 이 무시무시한 사이킥 사용자들의 영역을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다음 목적지까지 1 킬로미터도 남지 않았으나 바위 때문에 두어시간을 더 해메야 했다.

마침내 해가 지자 불그스럼 하던 바위는 짙은 청색으로 변했다가 금새 음침한 잿빛으로 변한다. 유투스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지나다가 뭔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쓸모있는 것을 발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순간, 유투스에게 커다란 공포가 몰려왔다. 본능적으로 유투스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곳에 있으면 안되며, 그것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 안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유투스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크롤을 본 순간,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크롤은 제자리에 선 채로 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그의 등에 달린 금속 팔도 덜덜 떨리며 찰캉찰캉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위 틈을 향한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말이다.

"크롤, 정신차려!"

유투스는 크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하지만 크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멘탈이라고 불리는 사이킥 사용자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젠..."

그 사실을 깨달은 유투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도 바위틈 사이에서 빛나는 시선와 마주쳤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너는 물통을 찾아다니는 부류와는 다르군. 나의 흥미를 끌었다. 왜 우리의 땅에 들어왔는가?

"나는 파라다이스를 찾고 있다."

-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하지만 너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의 생각 한번이면 너의 정신은 뒤틀려 왜 이 곳에 왔는지 기억조차 못하게 되어버리겠지.

"제발. 파라다이스를 찾으려고 지금까지 황를 전전하고 식인종에 로봇에 쫓기는 생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 나는 그저 이 땅을 지나가고 싶을 뿐이야. 너희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

-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남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들이야. 너와 같은 인간들도 우리 사이킥 사용자들을 이용해 문명을 이루고 살지. 네 뒤를 쫓는 저 근육질 육팔이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을 체액을 보충할 물통으로 밖에 보지 않아.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 크롤도 나와 같이 파라다이스를 찾고 있어."

- 근육질 놈팽이들 치고는 특이한 생각을 가졌군. 우리 마을에 힘을 쓸 노예 하나가 필요하긴 한데...

"제발."

- 좋아. 어차피 너희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파라다이스를 찾는 자들은 어차피 뭔가를 희생해야 하지. 그걸 감당할 놈들에게서까지 뭔가를 빼앗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어. 그건 너무 가혹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 그건 스스로 알게 될 거다. 이 땅을 지난 뒤 다른 위험에 목숨을 잃거나, 다시 이 땅으로 되돌아오거나. 만약 다시 이 땅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면, 그 때는 제발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거다.

유투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크롤과 함께 바위가 하나 없는 황야에 쓰러져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달빛만이 쓸쓸하게 둘을 비추고 있을 뿐, 주변에는 멘탈의 모습은 커녕 어떤 인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이봐, 크롤!"

유투스는 크롤을 불러 깨우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크롤은 크게 코를 골며 깊게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투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잠을 보충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 목적지까지 갈 힘이 생길테니.


***


유투스는 지도를 펼쳤다.

지도는 황야가 끝나는 곳에서는 폐허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도처럼 둘 앞에는 붉은 모래가 주는 황량한 풍경이 아니라, 무너져내린 도시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한때 수많은 자동차가 질주하였을 어마어마한 높이의 다층 고가도로는 바닥에 허물어져 황야를 지난 이들의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장애물이 되었고, 사람들이 거주하고 일하였을 빌딩은 거대한 거친 바위가 되어 장애물로 막힌 길을 우회하지 못하도록 수직, 수평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산이 된 전쟁 전 문명의 모습을 보며 크롤은 유투스에게 투덜거렸다.

"어떻게 넘어가나, 이 산을."

"넘어가지 않아도 돼."

유투스는 손가락으로 폐허의 어느 한 곳으 가리켰다. 거기에는 겨우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계단과 캐노피가 보였다. 바로 전쟁 전에 운영 중이던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좋지 않다, 느낌이."

"송장만 피하면 돼."

"뭐냐, 그게?"

"지도에 그렇게 써 있어."

지도에도 지하철역 입구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누군가 휘갈겨 쓴 글자가 있었는데, 볼펜의 잉크가 부족했던 모양인지 처음 몇 글자 말고는 제대로 쓰여있지 않았다.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이런 것 뿐이었다.

- 눈 먼 송장이 돌아다님. 느리기 때문에 피할 수 있음.

"움직임이 느리니까 피할 수 있다는데."

"왜 있나, 송장이, 지하에?"

"몰라. 저 지하를 통해 건너편으로 나가기만 하면 파라다이스에 다 온거나 마찬가지야."

"으으음..."

크롤은 긴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하지만 곧 유투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한때 도시의 지하에는 거미줄처럼 엮인 통로가 있었고 기차가 그 통로를 통해 다니며 도시 곳곳으로 사람들을 옮겼다고 했다. 아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운송수단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는데, 유투스나 크롤 둘 다 그런 사실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냥 다니면 안되나, 땅 위를? 햇볕도 있는데."

"글쎄. 예전에도 땅 위에는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서 그랬던 것 아닐까?"

"알아보고 싶다, 파라다이스로 가서. 지하철이 뭔지."

"나도."

유투스와 크롤의 대화는 커다란 지하 통로에 메아리쳤다. 그들은 녹슨 철로를 따라 다음 지하철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런 냄새 따위가 신경쓰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정말로 신경쓰이고 불쾌한 것은 산 송장들이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지하철 터널 안에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기에 그들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거어어..."

가끔씩 내는 소리로 그들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어떤 놈들은 어떤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기도 했고, 다른 어떤 놈들은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에 끼여 빠져 나오려 천천히 버둥거리고 있었고, 또다른 놈들은 팔과 다리를 기이한 모양과 방향으로 뻗고 있었다.

너무나 행동이 느렸기 때문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메스껍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서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면 특히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들의 머리통의 위쪽 반은 깨끗하게 잘려나가서 없었고, 그 안으로 그들의 머리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었다.

더 기이한 것은 그들의 머리통 속은 텅 비어있었다. 뇌가 있었어야 할 곳에는 그 찌꺼기와 같은 어떤 유기물이 엉겨 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지독하군, 이건..."

크롤이 중얼거리자 유투스의 등골이 섬찟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거꾸로 걸어놓고 피를 뽑는 놈들이 지독하다고 하는 놈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거어어..."

움직이는 송장들이 내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동시에 유투스와 크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한 두 개체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둘이 마주보고 있는 터널의 어둠 속에서 생기없는 움직임이 꾸물거리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이 내는 괴기스러운 소리는 점점 커졌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송장은 하나, 둘, 셋... 유투스의 동공은 그들이 보게 되는 송장의 숫자가 늘어날 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터널을 가득 매우고 있는 송장 무리의 모습은 마치 끈적한 액체가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사방으로 손을 흐느적거리며, 허리를 앞뒤좌우로 흔들며,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크롤은 방망이를 꼬나잡으며 물었다.

"없나, 다른 길은?"

"없어."

유투스의 대답에 크롤은 큰 결심을 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곧이어 대학살극이 펼쳐졌다.

자신들의 머리를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는 크롤이 적이라는 사실을 그 얼마남지 않은 뇌 쪼가리로 인지한 송장들의 움직임은 조금 민첩해지긴 했지만, 부풀어올라 터질 것만 같은 근육을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크롤에게는 달팽이만도 못한 반응속도였다.

퍽퍽퍽!

방망이질에 송장들의 머리와 사지가 터져나갔다. 하지만 몰려드는 송장의 물결은 끊임이 없었고, 고군분투하는 크롤의 모습은 이내 그 물결 속에서 조금씩 사라져 버렸다.

"크롤!"

조금 뒤에서 그를 따르던 유투스는 울부짖으며 외쳤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듯, 송장 무리는 천천히 방향을 바꿔 유투스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송장 무리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무리의 중간에서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크롤의 찡그린 얼굴과 그의 등에서 솟은 금속 팔이 보이는 듯 하더니, 곧 방망이질과 함께 송장 무리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따라와라, 얼른!"

크롤의 고함소리와 함께 느릿하고 끈적하게 흘러오던 송장 무리의 흐름에 작은 길이 생겨났다. 유투스는 죽어라 크롤의 뒤를 따라 달렸다.

퍽퍽퍽!

무언가가 얻어맞고 튀어오르고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얼마나 뛰었을까, 곧 둔탁한 소리가 멈추었다. 유투스가 슬며시 눈을 떠보자 어둑한 지하철 터널의 광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고, 회색빛 콘크리트 폐허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반대편 지하철 역으로 빠져나온 것이었다.

살점 범벅이 된 크롤은 바닥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유투스와 시선을 마주치자 별일도 없었다는 듯 나직한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파라다이스가 있는 편이 좋을 거다, 이 앞에, 이 난리를 쳤는데..."

유투스도 그 옆에 주저 앉으며 크롤의 어깨를 몇번 톡톡 쳤다. 수고했다는 듯 말이다.


***


콘크리트 폐허를 지나 이틀을 걸어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에 다다랐다.

지도의 끄트머리에 표시된 있는 이곳이 바로 파라다이스였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풍경과는 달리 지금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평범하기 그지 없다. 달라진 것은 생명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키가 낮은 나무가 하나 둘 보였는데, 앙상한 가지에는 푸른잎이 드문드문 솟아나 있었다. 바닥에도 갈색으로 시들기는 했지만 풀이 자라나고 있었고, 바위 뒤에는 작은 이끼도 끼어있었다.

특이한 점은 작은 자갈이 흩어진 썰렁한 평지 위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문이 솟아나 있다는 점이었다. 전쟁 전 문명이 주는 풍요로움을 기대했던 크롤은 양 미간이 좁혀지는 정도로만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문이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둘은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보았다.

굳게 닫힌 문은 철제로 되어있었는데 중간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문 옆에는 작은 버튼이 하나 나 있었고, 그 버튼에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화살표가 음각되어 있었다.

버튼을 보며 크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뜻이냐, 이거."

"밑으로 간다는 뜻 같은데."

"무슨 말이냐, 누가 간다고, 밑으로?"

"눌러보면 알겠지?"

"안 좋다, 아래는. 전에도 송장이 나왔다, 아래에서는."

"넌 은근히 겁이 많네. 파라다이스를 찾으러 가고 싶어서 날 풀어줄 때는 언제고, 멘탈을 무서워하고 송장도 무서워하고. 이제는 저 문도 무서워하고."

유투스의 지적이 틀린 것은 없었기에 그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용맹한 식스암즈다, 크롤은. 무섭지 않다, 문 따위."

크롤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슉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반으로 갈라지며 양쪽으로 열렸다.

깜짝 놀란 유투스와 크롤은 두어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문 안쪽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시원하고 독특한 향에 그 둘은 긴장을 풀고서 문으로 다가갔다.

"봐, 아무 것도 없지? 괜찮잖아?"

문 안쪽에는 매끈한 철제로 되어있는 작은 방이 있는 것을 본 유투스의 말에 크롤은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나다, 누른 것은. 들어가라, 네가."

유투스는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는 예닐곱 사람이 함께 있을 정도의 방이 있었는데, 벽은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흠집이 없는 매끈한 철제로 되어 있었고, 바깥에서 본 것과 같은 버튼이 붙어 있었다.

유투스가 안으로 들어가 손짓을 하자 크롤도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크롤이 용맹을 다시 한번 증명이라도 하는 듯 문 안쪽의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혔다. 그리고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을 태운 방은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합성된 기계음이 노이즈와 함께 방 안에 울려퍼졌다.

- 선단번호 X1-12 모르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지직) 본 승강기는 17층의 파라다이스 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안내에 둘은 긴장했지만 '파라다이스'라는 말에 이내 그 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드디어 뜬소문으로만 전해지던 파라다이스에 도달한 것이다!

기계음은 계속 이어졌다.

- 파라다이스 룸은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원하는 어떤 것이든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과 평안함, 안락함을 제공합니다. (지지직) 녹음으로 가득한 숲속 통나무집에서 우유자적한 삶을 누리고 싶으신가요? 고층빌딩이 가득한 복잡한 도시를 바라보며 호텔의 고층 스위트룸에서 샴페인을 한잔 하고 싶으신가요? (지지직) 선택은 당신께 달려 있습니다.

크롤은 유투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뭐냐, 샴페인, 호텔이?"

"나도 몰라. 나쁜 건 아닌 거 같은데."

- 여러분들의 육체는 최신 사이크로닉스 기술을 통해 온전히 보존됩니다.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된 본 기술을 통해 선단이 ... (지지직)

기계음으로 나오던 안내는 노이즈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제대로 들렸더라도 엄청나게 어려워보이는 기술용어를 두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리라.

다시 한번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움직이던 방이 정지했다. 두 사람이 느끼고 있는 기쁨, 호기심, 그리고 일말의 긴장감이 반응과 태도로 나타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눈 앞에는 두 사람이 살면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의 평생을 붉은색으로 작열하는 태양과 그 아래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던 붉은 황야와는 달리, 차가운 공기 속에서 차분한 백색의 조명 아래 단정하게 정돈된 디자인의 은색빛 금속벽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공간이 두 사람 앞에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이상한 글자가 쓰여있는 버튼이 늘어져있는 기계장치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맞은편에는 무언가를 넣어두는 것 같은 거대한 서랍장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승강기 문 맞은편에는 커다란 유리문이 있었는데, 그 너머에는 푸른색 조명이 비추고 있는 갖가지 케이블과 기계팔이 보였다.

공간의 중앙에는 단색 모니터가 솟아나 있었다. 유투스와 크롤이 가까이 다가가자 모니터가 켜지며 텍스트를 표시했다.

- 파라다이스 룸 슬롯 통제기 v4.2
1. 상태 확인하기
2. 사용하기
3. 크%#u.^6!/ 하기

"적혀있나, 뭐라고?"

유심히 모니터를 살피는 유투스에게 크롤이 물어보았다.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사용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뭐냐, 상태라는 게."

유투스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크롤 등에 달린 팔을 보고서 힌트를 얻었다.

"네 팔이 제대로 달려있는지, 굽은 곳은 없는지, 떨어진 팔은 없는지 지금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상태라고 부르는 거야."

"알겠다. 무슨 상태를 확인한다는 거냐, 여기서는?"

"글쎄. 눌러보면 알겠지?"

유투스는 조심스럽게 모니터 아래쪽에 붙어 있는 숫자키를 눌렀다. 딸깍하는 느낌과 함께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었다.

- 파라다이스 룸 슬롯 통제기 v4.2
슬롯 번호를 입력하십시오.
(00을 누르면 이전 화면으로 돌아갑니다)

'슬롯이라는 것이 뭘까?'

유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 숫자나 눌렀다. 그러자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며 어떤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남자는 편안한 쇼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몸에 딱 맞는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는 너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몰랐다. 갑자기 남자 옆에 어떤 백발의 신사가 다가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갑자기 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내 허공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것처럼 돈다발을 붙잡았다.

"뭐냐, 이게."

"글쎄... 파라다이스 안의 모습인 것 같은데."

"좋아보이는군, 아주..."

크롤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투스는 다른 숫자키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모니터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포근해 보이는 집 안에 있었는데, 창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진수성찬을 놓고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은 두손 가득 선물을 들고서 식탁 주변에서 웃고 있었고, 남자와 여자들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투스는 다른 숫자키를 눌렀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눈으로 덮힌 설원에서 한 남자는 복면을 쓴 괴한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괴한들은 남자에게 기관단총을 난사했으나 남자는 기가막힌 스키 기술로 총알을 피했다. 낭떠러지에서 멋지게 점프를 한 뒤 권총으로 괴한들을 무찔렀다. 남자는 낭떠러지 아래 평지에 착지한 뒤, 스키복을 벗고서 멀끔한 턱시도 차림으로 검은색 스포츠카에 몸을 실었다.

그 장면을 본 크롤은 흥분한 듯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유투스를 재촉했다.

"됐다, 이 정도면. 파라다이스, 좋다. 들어가고 싶다, 내가 먼저. 알려달라, 어떻게 하는지!"

"네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크롤이. 보여주겠다, 시범을."

"괜찮겠어?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조심스러운 유투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크롤은 발을 구르며 유투스에게 대꾸했다.

"너도 봤다, 파라다이스의 상태를. 마음에 든다, 아주. 용맹하다, 크롤은. 내 시범을 먼저 봐라, 걱정하는 너는."

"네가 선택한 거다."

"크롤의 선택이었다, 널 살려주고 여기까지 온 것도."

대범한 크롤의 대답에 유투스는 알았다고 대답하고서 통제기를 조작했다. 처음 메뉴로 돌아간 뒤 "사용하기"에 해당하는 2번키를 눌렀다. 그러자 천장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 파라다이스 슬롯으로 입장하고자 하는 대상자는 유리문 안으로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크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유투스를 가리켰다.

"잘 봐라, 크롤을. 무섭지 않은 용맹함을, 식스암즈의."

크롤은 성큼성큼 다가가 유리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크롤이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다시 한번 기계음이 들렸다.

- 입장 확인. 분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푸른색 빛줄기가 유리문 안쪽의 천장에서 뻗어나와 크롤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유투스는 조심스럽게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처음 보는 장면을 관찰했다.

- 신체 기능 정상. 보존을 위한 준비를 시행합니다.

유리문 안쪽에 있는 벽에서 기계팔이 뻗어나와 크롤의 사지를 단단히 붙잡았다. 동시에 기계팔 하나가 절도있게 움직이더니 주사기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 궁금해할 겨를도 없이 기계팔은 그것을 크롤의 팔뚝에 꽂아넣었다.

당황한 크롤은 몸에 힘을 주어 결박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내 그의 눈은 스르르 감겨버렸고 몸의 힘도 빠져버렸다. 크롤은 기계팔에 붙잡힌 채 축 늘어져 버렸다.

천장에서 다른 기계팔들이 내려와 크롤의 얼굴에 호스가 연결된 마스크를 씌웠다. 그리고 그의 몸에 목적을 알 수 없는 갖은 전선을 연결했다.

유투스는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면서도 크롤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곧 천장에서는 레이저 발사기가 달린 기계 팔이 천천히 내려와 크롤의 머리를 겨냥했기 때문이었다.

- 절개를 시행합니다.

가계음과 동시에 기계팔에서 초록색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기계팔이 크롤의 머리 주변을 한바퀴 회전하자 크롤의 머리통의 상반구는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고, 그 안에 있던 분홍빛 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충격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 유투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또다른 기계팔이 천장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크롤의 뇌를 집어 올렸고 액체가 들어있는 작은 통 속에 넣은 뒤 밀봉했다. 그 통은 천천히 천장에 있는 고리에 걸렸고, 그 통을 잡고 있는 고리는 천장을 따라 이동해서 유리문 밖으로 나왔다.

고리는 유투스 옆에 있는 거대한 서랍장 위에 멈춰섰다. 서랍장 하나가 저절로 열렸고, 거기서는 여러 회로가 엉켜있는 길쭉한 금속판이 뻗어져 나왔다. 금속판의 중간에는 홈이 나 있었는데, 천장에 달린 고리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크롤의 뇌를 담고 있는 통을 그 홈에 정확히 맞추어 끼웠다.

- 파라다이스 슬롯 13번 결속 완료. 슬롯의 작동을 시작합니다.

크롤의 뇌가 담긴 병을 가잔 금속판은 다시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투스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모니터 앞으로 달려가 13번 상태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크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붉은 바위로 만들어진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발 앞에는 많은 이들이 엎드려서 그를 경배하고 있었다. 다른 식스암즈들은 물론이고 멘탈과 송장들도 그의 앞에 엎드려 있었고, 아까 모니터에서 보았던 남자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옆에서 부채를 부치며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유투스였다. 크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씹으며 그를 숭배하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이런 걸 꿈꾸어 왔던 거야?'

불쾌한 감정이 유투스를 짓눌렀다. 파라다이스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뇌만 살린 후 뇌의 주인이 원하는 현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안 좋은 일도 아니지 않는가? 뇌에게는 그것이 현실일테니까. 붉은 황야에서 근근히 삶을 이어나가는 현실과, 가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현실 중 뭐가 더 낫겠는가?

자신이 정말로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곱씹어보기도 전에 기계음이 들려와 집중력을 흐트렸다.

- 육체 보존 시행. 사이크로닉스 기술을 적용합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육체 기능만 활성화 합니다. 완료. 사이클로닉스 캡슐로 육체를 옮깁니다. (지지직) 오류 발생. 사용 가능한 사이크로닉스 캡슐이 부족합니다.

유리문 안쪽에서 축 처진 크롤의 육신은 어쩔 줄 모르고 이리 저리 놨다갔다 하는 기계 팔의 움직임에 따라 흐느적거렸다.

- 오류 발생, 오류 발생.

기계음은 연신 문제가 생겼다고 되풀이 할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란 유투스는 모니터를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메뉴 따위는 없었다. 모니터에는 카운트다운이 시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 캡슐 수용 불가. 지상으로 자동 사출까지 남은 시간 : 10초... 9초... 8초...

자동 사출? 뭘 어디로 사출시킨다는 말인가? 유투스눈 다시 유리문 앞으로 달려갔다. 기계 팔은 천천히 크롤의 육체를 한쪽 벽면에 설치된 문 쪽으로 데려갔다. 그 문 옆에도 위쪽 화살표가 음각된 버튼이 달려있었다.

기계 팔의 의도를 깨달은 유투스는 고함을 질렀다.

"그만둬!"

유투스는 억지로 유리문을 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롤의 육체는 유투스의 고함소리를 인지한 모양인 듯, 천천히 몸을 비틀어 유투스 쪽을 향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거어어..."

크롤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자 유투스는 충격에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제야 지하철 터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산 송장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계 팔은 승강기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천천히 움직이는 크롤의 육체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문을 닫았다. 정확히 저 승강기가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천천히 움직이는 크롤의 육체가 결국에 어디에 도달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투스는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자신과 크롤이 타고 내려왔던 승강기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버튼도 달려있지 않았다. 위든 아래든 말이다. 튼튼한 철문은 발길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유투스는 승강기문을 기댄 채 주저 앉았다.

행복한 가상 현실과 아무 것도 못하고 굶는 두가지 선택 사이에서 유투스는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먼저 파라다이스로 들어간 크롤이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에 그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려내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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