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사라지는 것들

2023.08.22 10:0008.22

사라지는 것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 우리 주변에선 온갖 사소한 것들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침대 너머로 떨어뜨린 동전, 어딘가에 놓고 온 우산, 새해에는 연락해보리라고 생각했던 친구. 마치 피부에서 각질이 떨어져 나가듯이 그것들은 하나 둘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간다. 그것들이 사라진다 한들 눈 앞의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일상 뒤에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 이런 종류의 회한이 늘 그렇듯이, 그것을 깨달을 즈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다.

이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심하기 바란다. 이것은 미치광이의 넋두리이며, 동시에 악의에 가득 찬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자라면 이따위 헛것을 진지하게 읽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경고한다. 당신이 이 글에서 무언가 진지한 것을 느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그것에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하라. 언제나 가장 단순한 곳에 가장 악랄한 함정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당신의 일상에 균열을 내고, 이윽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히 밝혀 두겠다. 나는 나와 같은 희생자가 더 발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글은 오로지 삶의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만 이해하고, 그 이상은 접근하지 말라. 이점을 반드시 유념하기 바란다.

 

***

 

그 일의 시작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악몽조차 길을 헤맬 정도로 깊은 새벽, 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불빛 하나 비치지 않는 집은 두꺼운 장막에 쌓인 채 고요함을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이 내 마음을 좀먹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변덕스럽게 불어온 작은 바람이 낡은 책장 위에 쌓인 먼지를 쓸고 지나갔을 때 났을 법한, 그런 소리. 그러나 불온한 나의 감각에 맞닿자마자 그 소리는 인식이 가능할 정도로 커져 불쌍한 내 귓가에 맴돌았다.

사각사각. 지잉지잉.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고요를 걷어내고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얼어붙었다. 알 수 없는 소리.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소리에 사로잡혔다. 즉시 불길한 망상이 머릿속에서 뛰어올랐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딘가에서 쥐들이 모여 발톱이라도 갈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더럽고 축축한 곳에 벌레들이 모여 과자 부스러기라도 갉아대고 있단 말인가? 도무지 정체를 알아낼 수 없는 소리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아늑하고 안전한, 그리고 내 몸의 손상을 막아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에서 빠져나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것이 이 집의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약해져 있었고, 가장 악독한 악마만이 기뻐할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어째선지 발작적인 기침이 나기 시작했으며, 마치 열이라도 나는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분명 건강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이 병약함은 마치 나의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각사각. 지지직.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병약함에서 힘을 얻는다는 듯이 한층 커진 소리가.

나는 끔찍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켜고,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금 이곳에는 그 무엇도 아닌 빛이 필요했다. 그러나 귓가에서 맴도는 소리가 경고했다. 지금 장막을 들추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아래에서 튀어나온 괴물을 직시할 용기가 있는가? 비몽사몽 흔들리는 시야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방의 풍경은 머나먼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끈적이는 악몽의 행방 속에서 나는 기어코 목적지에 손을 뻗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버튼이 내려갔고 방에 불이 들어왔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내가 잠들기 전 그대로. 비현실적은 망상은 어둠과 함께 달아났고, 밝은 현실만이 눈 앞에 보였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벽에 기댔다. 그때, 멀리서 아직도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사각사각.

지잉지잉.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거실이었다. 나는 방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거실로 향해 나갔다. 시커먼 어둠이 그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눈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평온한 밤의 장막을 찢고 튀어나온, 뒤틀리고, 사악하며, 악몽의 산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어둠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바로 그 순간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렸다. 눈 앞에서 번쩍거리는 빛과 어둠이 봐선 안 될 광경을 본 나를 제거하려는 듯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 고통스러운 파도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보호할 수 없었다. 그저 끔찍한 파괴에 몸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어둠에 물들었다. 파멸로 추락하는 듯한 불쾌한 감각을 나를 덮쳤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꿈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우리에게 미래를 예지해주곤 한다. 나는 지난 밤의 악몽이 어떤 끔찍한 일이 닥칠 것을 경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그러나 늘 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 이 나를 다시 지루한 사회로 밀어 넣었고, 모든 불안은 그대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넣어 둔 채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집은 늘 그랬듯이 고요한 공기로 돌아온 나를 맞이하였다. 내 불안을 비웃듯이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은 전혀 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함과 편안함뿐. 그 앞에서 억지로 불안감을 안고 있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뒤집어쓰고 있던 사회의 껍질을 벗고 알맹이로 돌아가 집이 주는 아늑함을 만끽했다. 그렇다. 그까짓 악몽이 뭐 대수란 말인가? 내 집에서 내가 편히 쉴 수조차 없단 말인가? 나는 그런 불합리를 단호히 거부하고자 마음먹었고,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불안을 힘써 몰아내었다.

휴식. 내 마음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비록 몸을 씻고 입었던 옷을 세탁하는 등의 잡무가 여전히 나를 기다렸지만, 내게는 귀찮다기보다는 오히려 상쾌한 일이었다. 가벼운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나면 온전한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늑한 나의 집에서 보내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 오늘도 나는 그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잠자리에 들어 숙면을 취할 터였다.

그러나 불길한 그림자는 나를 놓치지 않았다. 악몽의 경고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꿈에서 보았던 끔찍한 비명소리가 스멀스멀 어깨를 타고 기어올랐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나는 심히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혼란한 기억을 더듬었다. 내 기준으로 이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거실에 놓여 있는 빨래 건조대. 그곳에는 내가 어제 세탁하여 널어 둔 옷들이 걸려 있었다. 하얀 셔츠 한 장. 정장 바지 한 개. 티셔츠와 맨투맨이 각각 하나씩. 그리고 아래쪽에는 속옷과 양말을 가지런히 걸어 두었다. 양말은 두 켤레, 즉 총 네 개가 걸려 있었다.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양말은 아무리 세어봐도 세 개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양말이 하나 없어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래,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양말은 크기가 작아 세탁물을 옮기는 중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다른 세탁물에 잘 섞이기도 한다는 것을. 그래서 양말이 하나씩 없어져 짝이 안 맞게 되는 일도 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양말만큼은 반드시 확인하여 정리하고 있다. 일종의 강박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집에서 편안하게 보내는 시간만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신경에 거슬리는 것들을 철저하게 처리하고 있다. 자주 세탁기 아래 틈새로 떨어지거나 멋대로 집안 구석에서 굴러다니곤 하는 양말이 바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세탁기와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사라진 양말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살펴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양말 두 켤레를 확인하고 짝을 맞추어 널어놓은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제까지 있었던 양말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웬일로 먼저 전화를 했어?”

밝은 그녀의 목소리에 개의치 않고 나는 용건만 전했다.

“혹시 우리 집에 왔다 갔어?”

“응? 오늘?”

“그래. 어제 밤 이후로.”

“어제는 간 적 없고, 오늘은 방금 막 퇴근했으니까 갈 수가 없지.”

“……알았어.”

“뭐야.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 지금이라도 갈까?”

“아니야, 괜찮아. 우리 내일 만나기로 했잖아.”

“오늘 좀 쌀쌀맞네. 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었어?”

그녀는 눈치가 빠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니 이런 까탈스러운 성격을 지닌 나와 별 탈 없이 만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 이 일에 대해 그녀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이제 막 쉬려던 참이야.”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응.”

전화를 끊자 오늘의 평온한 밤은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실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아니라면 내 집에 들어왔을 사람이 없다. 누구도 왔다 가지 않았다면 대체 양말은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짝을 잃은 양말 하나가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

 

결국 그 날은 사라진 양말을 찾아내지도 못하고, 사라진 원인에 대해 이렇다 할 해명도 하지 못한 채로 불편한 잠에 들었다.

안정적으로 나아가고 있던 삶에 갑자기 균열이 생긴 기분을 알고 있는가? 비록 사소하다 하더라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균열. 앞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을 예고하는 듯한 균열. 한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내 삶에 뚜렷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조는 확실했지만 나는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 일상은 늘 그렇듯이 똑같은 형태로 흘러갔다. 사라진 양말 하나만 지난 시간 너머에 둔 채로.

“양말 하나?”

“그래.”

“어디 떨어뜨렸겠지 뭐.”

다음 날, 집에 찾아온 여자친구는 내 진지한 설명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네가 깜빡했거나, 아니면 착각한 거 아니야?”

물론 인간의 기억은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나 역시 그런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양말이 사라진 것은 객관적인 현실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두 켤레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봤었던 내 기억은 이제 와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 그런 건 신경 쓸수록 괜히 불안해지는 법이야. 적당히 넘기고 잊는 게 좋아.”

여자친구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불안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해결 방안도 딱히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잊고자 했다. 현실에 집중해서 살다 보면 사소한 불안쯤은 어느새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부디 무심히 흐르는 시간이 악몽의 기억을 가져가 주기를. 삶의 불안한 요소를 기꺼이 떠맡아 과거로 옮겨 주기를. 그리하여 내 평범한 일상에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평온한 집과 휴식을 되찾을 수 있기를. 나는 그렇게 간절히 바랬다.

그 어리석었던 희망이란! 미묘한 전조만으로 후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때, 내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비할 수만 있었다면 모든 것이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작은 안심을 위안 삼고, 모든 불안과 위협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주 주말, 약속이 있어 외출했던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빨래 건조대부터 확인했다. 외출해 있는 동안 나의 빨래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라며 불안한 마음을 죽이고 있느라 고생한 나로서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모습은 걸어 두었던 양말 세 켤레가 모두 무사한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 두 개나 벌레먹은 것처럼 사라진 모습이 아니라.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안정적이고 평온한 나의 삶이 다시 한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우연이나 착각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고 있어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잊어버려도 좋을 테니까. 그러나 반복해서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확실하게 존재하는 불안, 위협인 것이다. 더 이상 별것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나는 온 집을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옷장 구석부터 세탁기 뒤, 가구 아래, 침대 밑, 베란다 구석까지. 그러나 어디에도 사라진 양말 세 개는 없었다. 어떤 흔적도 없었다. 빨래 건조대에 널어 놓았던 양말은 그렇게 귀신이 감춘 것처럼 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무언가 대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집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 들어왔다고 한들 대체 어떤 도둑이 양말을 단 세 개만 훔쳐 간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친구는 오늘 나와 함께 밖에서 있었으니 그녀도 이 일과는 상관없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내 양말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누군가가 한 일이 아니라면 양말이 그들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단 말인가?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나의 평온을 해칠 악의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 불온한 움직임은 아직 양말이 사라지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지만, 이후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대책을 생각해야 했다.

 

***

 

“그래서?”

“잘 들어 봐. 지난 2주 사이에 사라진 양말의 개수가 벌써 다섯 개야.”

여자친구는 흐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커피를 마셨다. 진지한 내 태도에도 그녀는 도무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냥 어디 떨어뜨린 거겠지.”

“아니야. 집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어.”

“세탁기 뒤쪽도 들여다봤어?”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봤다니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그녀는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라진 것이 양말이라는 사소한 물건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나 모든 불길한 사건은 이런 사소한 사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여자친구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불안은 양말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수록 더욱 커져갔다. 여자친구처럼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하게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모든 일이 내 삶과 상관없이 그저 지나가는 일이었다면! 그러나 나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어도 악의를 깨닫는 것은 가능했다. 나는 처음 양말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던 그 시점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일을 확실히 해결하지 못하면 나의 평온한 시간을 다시 되찾을 수 없으리란 것을. 나는 이제 매일같이 강박적으로 양말의 개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불안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후, 나는 거실에서 준비를 시작했다. 여자친구와 대책에 대해 상의하고 싶었지만 결국 소득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만 했다. 나는 빨래 건조대 바로 앞에 침실에서 가져온 이불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또 다시 양말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난다면 최소한 그 현장을 봐 두고자 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확인을 해야 모든 해결의 시작이 될 터였으니까. 물론 하루의 모든 시간을 내가 이곳에서 감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보조적인 수단도 마련했다.

나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디지털 카메라를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 삼각대와 함께 집 안에 설치했다. 카메라는 빨래 건조대가 잘 찍히도록 방향을 맞추었고, 내가 없는 동안은 녹화되도록 세팅도 해 두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양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당신은 운명을 믿고 있는가? 나는 늘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내 삶을 되돌아 보건대 대체로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악의 앞에 노출되고 말았을 때, 나는 나의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의 선택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사건으로 이어질 경우에는.

이렇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사실 운명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악몽, 기묘한 예감, 알 수 없는 불안, 여자친구의 조언, 그리고 나의 행동까지. 모든 것이 사실 운명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사실을 소름 끼치도록 절실하게 깨달았다.

밤은 늘 그렇듯 시커먼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나는 신경질적인 잠에 들었다 깨어남을 반복하며 양말을 지키고 있었다. 달은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별빛은 너무 멀어 내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 불안한 밤 속에서 나는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양말 앞을 지키고 있었다.

과연 내 양말을 훔쳐가는 파렴치한 도둑은 이렇게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 있어야 할 곳에서 있어야 할 물건이 사라지는 그 불길한 일이 내 눈 앞에서 마찬가지로 벌어질 것인가? 이 대처는 과연 나의 운명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인가? 모든 의문이 소용돌이처럼 섞여 잠에 취한 내 뇌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의문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는 냉혹한 운명에 의해 그 일이 다시 일어났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빨래 건조대를 중심으로 공간의 균열, 혹은 어긋남 같은 것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변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눈의 피로 때문에, 혹은 잠에 취해 흐려진 시야가 무언가를 잘못 본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눈을 비비고 잠을 떨쳐내도 사라지지 않고 눈 앞의 공간에 확실히 존재했다.

기묘한 빛이었다. 공간이 갈라진 틈새에서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빛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나는 갑작스레 심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저것은 내가 봐도 될 빛이 아니다. 봐선 안 된다. 그런 경고가 머릿속에서 비명처럼 울렸다. 하지만 내 몸은 이런 이성과는 다르게 이미 손 끝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모든 공간이 그 균열을 중심으로 고정된 것처럼 일그러졌다. 빛이 넘어왔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빛이 나의 공간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되돌아갈 수 없다.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머리가 울렸다.

그 순간, 갈라진 균열 사이로 나는 똑똑히 보았다. 끔찍한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괴이, 세상 모든 징그러운 벌레와 부패한 시체를 조각조각 모아 붙여 창조해낸 듯한 그것이 내 공간으로, 나의 눈 앞으로, 서서히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 소름 돋는 빛이 그것의 앞을 인도하며 모든 것을 물들였다.

비명.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공포로 굳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가 없었다. 벗어나야 했다.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어디로? 빛은 이미 내 앞까지 흘러나왔고 공간의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구원의 여지가 없었다. 곧 넘어올 저것이 이 고정된 공간에서 이윽고 모든 것을 차지하리라. 그리고 일어날 일들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적을 수도 없는 끔찍한 운명이었다. 차라리 수백억의 벌레떼에 몸이 서서히 갉아 먹히는 것이 행복한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악랄하고 저주받은 운명이 마치 예언처럼 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 공포의 끝에서 모든 것이 파열했다. 공간이 깨지며 길항하던 힘은 이윽고 어긋나버렸고, 힘과 힘이 서로를 스치며 내는 괴성이 울렸다. 언젠가 악몽에서 들었던 그 불온한 소리가 귀를 찢을 것처럼 크게 폭발했다. 나는 건조대를 향해 굳어 있던 몸을 가까스로 내던졌다. 그 균열, 그 공간의 고정점, 공포스러운 그것이 건너오는 바로 그 위치를 나는 파괴해야 했다. 그들이 나의 공간을 집어삼키기 전에 막아야 했다.

빨래 건조대는 소음과 함께 맥없이 쓰러졌다. 나는 그 앞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밤은 고요했고 눈 앞에 놓인 풍경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간의 균열도, 기묘한 빛도,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공포는 썰물처럼 물러가고 모든 것이 정상적인 나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더 큰 불안에 시달렸다. 마치 불행한 운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듯이, 앞으로 그 모든 끔찍한 결과가 나를 찾아오리는 것을 예지하듯이, 악몽 같은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양말이 보이지 않았다. 빨래 건조대에 걸어 놓았던 모든 것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확신할 수 있는 공포의 전조라는 것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어떤 증거조차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집은 쓰러진 빨래 건조대 이외에 모든 것이 똑같았으며, 녹화를 켜 둔 카메라에는 빛이 산란된 듯한 식별 불가능한 화면 이외에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이곳에, 나의 공간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 사실과 내 마음을 잠식한 공포 이외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예를 들어 어떤 장막이 있다고 하자. 이 장막이 당신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이 장막은 매우 얇고, 또 투명해서 당신은 눈치채지 못한다. 손에 닿아도 감촉조차 없어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장막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존재하며, 세상 모든 곳에 있고, 우리들은 이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을 알겠는가? 그 끔찍한 사건 이후로 나는 이 개념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아마 내 뇌에서 그날 일어났던 끔찍한 일을 그나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선의 개념이리라. 스스로가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듯한 지리멸렬한 묘사와 그날의 기억을 더듬기만 해도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그럼에도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 불길한 빛은 분명 저편에서 넘어온 것이었다. 앞서 말했던 장막의 저편. 현실과 괴리된 그 모든 사악함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며,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방어막. 그것의 존재를, 인간은 인식할 수 없어야 할 그 개념을 어째선지 나는 그 날 이후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막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의 존재 또한 알게 되었다.

이토록 끔찍한 운명이 또 있을까! 나는 그토록 대책을 갈망하였음에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모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끔찍한 것을 직시하지 않았어야 했다.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보처리를 무슨 수를 써서든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렸다. 어떤 위기와 극복도 없었으며, 흔하디 흔한 클라이맥스조차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로지 끔찍한 비극으로 향하는 결말뿐.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자 했던 나는 바로 그 결의 덕분에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 똑똑히 들어두어라. 이 장막의 존재를 우리는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현실을 현실로서 보아야한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궁금히 여기지 말아라. 설령 그곳에서 입에 담기조차 혐오스러운 무언가가 넘어오려 한다고 해도 절대 신경을 기울이지 말라. 가장 좋은 것은 모든 것을 잊는 것이다. 어떤 악몽이 당신에게 찾아오던, 어떤 계시가 당신에게 경고를 보내던, 어떤 예감이 당신의 일상을 흔들어 놓았던 간에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했고, 그래서 이렇게 내가 받은 대가를 이곳에 기록하고 있다.

나는 장막과 저편, 그 불경한 개념에 사로잡혔다. 끔찍한 공포로 말미암아 잠시 미쳐 있었다고 해도 좋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몸을 벌벌 떨며 쓰러져 있었다. 말 그대로 나는 공포에 패배했다. 이 경험은 너무나 끔찍하여 한평생이 걸려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발 끝부터 썩어가는 것을 옴짝달싹 못한 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체와 같은 상태로 나는 집 안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조차 나는 가늠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연락이 왔던 것 같고, 누군가 열심히 문을 두드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사회적인 상호작용은 내게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집 안에 틀어박혔다. 상사도, 여자친구도, 경찰도, 그 무엇도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누군가 나를 불구로 만들어 강제로 끌어냈다면! 그럴 수 없었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와서는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누군가 그리 해주었다면, 내가 집에 있는 동안 행한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그것이 불러 일으킨 끔찍한 결말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고열에 시달리는 몸을 끌고 마치 광증에 빠진 사람처럼 집요하게 맹목적인 집착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공포에 대항하여, 그 모든 장막과 저편에 넘실거리는 망상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부엌에서 꺼낸 가장 큰 식칼이 나의 무기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그 무기 하나에 의지한 채, 어두운 집 안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사방에서 장막이 나타났다. 무엇 하나 장막에 감싸여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그 혐오스럽고 역겨운 개념이, 이제는 인식해버려서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그 사상을 눈 앞에서 지워버리고자 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언제라도 장막이 열리고, 현실에 균열이 일어나며 다시금 끔찍한 무언가가 넘어오리라는 예감이 나를 좀먹고 있었다.

나는 식칼을 움켜쥐고 그 장막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그건 모든 곳에 있었기에 나는 모든 곳에 칼을 휘둘렀다. 세탁기에도, 빨래에도, 휴대폰에도, 달력에도, 식탁에도, 시계에도, 이불에도, 침대에도, 책에도, 손에도, 발에도, 머리카락에도, 얼굴에도.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그것이 있었다. 어두운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징그러운 거미처럼 현실 곳곳에 그것이 공포스러운 눈을 번뜩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광증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집 안은 폐허처럼 황폐해졌고, 내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끝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맑아졌다. 뇌 속을 헤집던 안개가 어느덧 사라져 시야가 트였으며, 몽매한 망상과 광기에서 벗어나 현실이 내게 제대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나는 살아난 것이다.

놀라운 변화였다. 나는 아직도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어떤 국지적인 의미에서 나의 투쟁은 승리를 거두었음이 명확해 보였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으니까.

나는 눈 앞의 현실을 다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세상이 이토록 투명하고 맑았음을, 마치 새해 첫날 변덕스럽게 맺힌 새벽 이슬처럼 모든 것이 싱그러움을 품고 있음을 나는 처음 깨달았다. 그 어떤 거짓과 위선, 허식, 꾸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칼을 손에서 놓았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장막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나의 분투가 그 역겨운 것에서 현실을 해방한 것이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베란다로 달려가 창을 열고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해 소리질렀다.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토록 투명하고 싱그러운 세계가 있었다니! 세계가 숨겨왔던 가련한 본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 순수함을 나는 잊지 못하리라. 살면서 단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어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된 영광을 신께 감사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공포의 뒷모습이기도 했다. 우리를 속이고 기만해 온 장막이 이 사랑스러운 세계를 얼마나 오랫동안 가두어 놓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장막과 함께 그 혐오스러운 것들을 패퇴시켰음을, 그리하여 그것들이 다시는 이 세상에 간섭하지 못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순수한 세계에서 얻어낸 자유를 앞으로 영원히 누릴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나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고, 병적인 집착은 여전했으며, 고열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불길한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들이 그 고통의 상징을 내 눈 앞에 들이밀었을 때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장막은 돌아왔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도사리던 벌레가 먹이를 발견해 스멀스멀 기어나오듯이, 순수하고 투명했던 세상을 좀먹으며 다시 자라났다. 나는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은 말라버린지 오래였고, 피투성이가 된 손은 칼을 다시 집어 들기도 어려웠다. 그렇다. 이것이 결말이었다. 세상은 늘 그래왔듯이 다시 장막의 기만 뒤에 숨어버릴 것이며, 그 속에서 넘실거리는 혐오스러운 공포는 곳곳에서 우리 삶을 노리며 게걸스러운 입을 벌릴 것이다. 나와 같은 무력한 희생양은 이제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온 몸이 마비된 채 포식자가 입을 벌리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운명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그리하여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앞에 도사리는 끔찍한 공포를 경고해주기 위해서. 돌아온 장막은 나의 일상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다. 한층 어두워진 균열로 모든 곳에서 입을 벌리고 도사리며 시체 같은 역겨운 앞발을 내밀고 있다. 그건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책상에도, 종이에도, 연필에도, 의자에도, 가방에도, 수건에도, 매트에도, 전구의 불빛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장막이 현실을 덮고 나를 옥죄고 있다.

이 모든 공포가 당신에게 온전히 전달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광기의 편린은 온전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들이 내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비명을 질렀듯이, 피가 사방에 뿌려진 처참한 현장을 보고 졸도해버렸듯이. 그들은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고귀한 마음을 지닌 채 고독한 싸움을 이어왔는지, 어떻게 공포에 굴복하지 않으려 애쓰며 발버둥치고 있었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래도 나는 괜찮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이 내가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 사회에 걸맞은 형태로 요구하겠지.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겪게 될 끔찍한 운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테니.

아, 이럴 때 여자친구가 내 곁에 있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가 다정한 말, 상냥한 얼굴, 따스한 손으로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사무치는 사랑이 무엇보다 나를 괴롭게 했다. 신에게 단 한 번 마지막 기도를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녀와 다시 한번 만나 서로를 감싸 안는 것을 바라리라. 그녀의 존재가 내 삶에 얼마나 큰 희망이었는지, 그 따스한 숨결을 이제 다시 느끼지 못하는 일이 내게 얼마나 큰 절망을 주었는지, 다시 만난 그녀 앞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리라.

그러나 이제는 헛된 꿈을 뿐이다. 비록 나는 그녀를 지켜냈지만 그 대가로 영영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부디 바라건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지 않기를! 그러나 이 또한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맞이할 결말은 그녀가 맞이한 죽음처럼 평온한 것이 아니었으니.

망각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피부에서 떨어져 나간 각질처럼 우리의 세계를 떠나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장막이 한층 두껍게 내 삶을 덮으며 옥죄어올 때 나는 나의 운명을 보았다. 그건 두루뭉술한 예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미래를 내 머릿속에 강제로 새겨 넣은 것이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처럼 벗어날 수 없는 미래. 거기서 나는 장막 너머 혐오스러운 그것이 나를 덮치는 것을, 게걸스럽게 나의 영혼을 포식하는 것을,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떨어져나가 영원한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그것이 죽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죽음은 우리 세상에 속한 개념이다. 내가 앞으로 겪게 될 것은 우리 세상 밖에 속한 무언가였으며, 결국에는 뒤틀린 외우주 어딘가로 끌려가 영원히 잊힐 운명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이 따스한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이 주는 평온함을 얻을 수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그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나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이 끔찍한 운명을 알고 있을수록 그녀가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은 기필코 막아야만 했으니. 저주받은 운명이여! 그 날의 모든 것은 온통 사악한 의도가 우리를 농락한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날, 투명하고도 아름답던 세계를 목격한 그 시간, 나는 집에 찾아온 나의 여자친구를 맞이했다. 장막과 싸워 잠시나마 이겨낸 나는 비록 온 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정신만은 놀랍도록 또렷했고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보았을 때 여자친구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사랑과 연민의 표정이란!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아이처럼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소름끼치는 사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렇다. 그녀는 전혀 투명하지도 않았고 순수하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악랄한 운명이 그녀를 내 앞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 저주받아 마땅한 것들이, 역겹고 혐오스러운 수많은 장막들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시커먼 입을 널름거리며, 시체와 벌레같은 다리를 내밀어 그녀를 붙잡고 영혼을 뜯어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두었으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녀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 세상 밖으로 포식 당할 처지였다! 그 끔찍한 운명에서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내가 달리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다시 집어 들고,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장막이 찢어질 때 나는 괴상한 비명소리와 그녀의 처철한 외침이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장막은 그녀를 겹겹이 둘러싸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 주변의 모든 장막을 제거해야 했다. 단 하나라도 남겨둬선 안 됐다. 나는 알고 있었다. 광기가 휘몰아치는 그 상황 속에서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휘두른 칼이 그녀를 어떻게 상처 입히는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는지도. 그러나 죽음은 설령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있을지라도 최소한 이 세상에 속한 평온한 개념이었다. 장막 너머로 영혼이 사라지는 것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결말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그 공포로부터 지켜야했다.

이제 이해하겠는가? 그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는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사랑하는 여자친구 앞에 서서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영혼을 파괴했다. 나는 더 이상 칼을 들지도 못하고, 장막과 싸우지도 못한다. 이것이 결말이었다. 모든 것의 결말.

나는 이제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죽어서만큼은 영혼의 안식을 찾았기를 기도하면서. 그녀와 죽음 이후에, 천국 혹은 지옥에서, 혹은 윤회하여 새로 태어난 몸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네가 있어 행복했고 네가 있어 사랑스러웠던 이 세계에서, 나는 지워진다. 이곳을 나는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에 영원히 절망하리라.

지금도 장막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하나, 둘, 마치 시체더미에서 구더기가 살을 파먹는 소리처럼 역겨운 소리를 울리며 그것들이 내 앞으로 기어 나오고 있다. 징그러운 다리, 끔찍한 눈깔이 곳곳의 균열로부터 나를 넘본다. 이제 끝이 가깝다. 나는 이곳에서 사라지고, 혐오스러운 그것들에게 뜯어 먹히리라. 이제, 곧.

 

 

그녀가 보고 싶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39 단편 환상의 호수 감동란 2023.09.18 0
2138 단편 적그리스도 이스트 2023.09.18 0
2137 단편 버스정류장에서2 감동란 2023.09.06 1
2136 단편 당신의 눈을 바라볼 때 모두의유진 2023.09.05 0
2135 단편 예언을 따르지 않고2 박낙타 2023.09.03 1
2134 단편 끈벌레 달리 2023.08.31 0
2133 단편 수태고지 감동란 2023.08.30 2
2132 단편 파라다이스를 찾아서 이비스 2023.08.27 0
2131 단편 마술사 이야기 반신 2023.08.26 0
단편 사라지는 것들 리소나 2023.08.22 0
2129 단편 예언을 따라 박낙타 2023.08.21 0
2128 단편 덩굴3 감동란 2023.08.20 1
2127 단편 최종악마와 의인 니그라토 2023.08.15 0
2126 단편 채굴 라그린네 2023.08.13 1
2125 단편 스파라그모스 임윤재 2023.08.12 0
2124 단편 ㅈㅗㄱㅏㄱ난 기억: 호접몽 꿈꾸는작가 2023.08.07 0
2123 단편 릴리와 꽈리고추 담장 2023.08.03 1
2122 단편 혜령 hummchi 2023.08.03 0
2121 단편 스윙바이 온칼로 담장 2023.07.30 0
2120 단편 안녕, 디오라마! 담장 2023.07.30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