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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을 만들었습니다."

 

그날 일은 학계에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연구원의 젊은 패기로 치부될만한 헤프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이라니! 바보 같은 언어 유희도 아니고 말이야. 싸구려 같은 유머에 제각기 커피 잔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이들은 혀를 찰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 아무 말 없이 자신에게 할당된 일로 주의를 돌렸다. 마침 그가 자신의 위대한 발명을 공개했을 때는 연구 실적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던 때로, 연구실에 있던 자들은 전부 초조하기에 그지없었다. 따라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 아름답고 위대한 발명이, 세간에 알려져 인정받기 전까진 그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동료들은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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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을 발명하신 도파랑 박사님 *아, 아직 석사라고요. 혼동이 있었나봅니다.* 을 모셔보겠습니다!

 

도파랑: 안녕하세요, 도파랑입니다.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패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는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것과 다름없는 일개 석사가 이렇게 위대한 발명을 했다니. 프로그램 진행에서 호응을 해줄 시청자 좌석에서도 잇따라 술렁거린다. 도파랑은 들리지 않는 건지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담백한 태도를 유지했다. 진행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진행자: 하하하, 간단하고 담백한 인사로군요.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 줄여서 '세파랑'을 발명한 도파랑 석사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석사님, 세파랑을 발명하신 계기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도파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마이크를 가져다 댄다. 곧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한다.

 

도파랑: 15년 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검정인 반타 블랙과 세상에서 가장 새하얀 하양인 울트라 화이트가 발명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 원색에 가장 가까운 파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검정의 경우 모든 빛을 흡수한다는 특성이 있고 하양의 경우 모든 빛을 반사한다는 특성, 그러니까 아주 명백한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파랗다는 것은 어떤 것이 기준인가요?

 

궁금증에 시달리던 패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 그의 동료들이 입 모아 혀를 차던 이유는 명백했다. 파랑이라는 색의 특성보다 더욱 명확한 이유로. 그건 그가 파랑이라고 정의한 기준이 너무나 모호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지개 빛의 스펙트럼 띠에서 정확히 가장 파란 파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가? 전세계적으로 세파랑의 유행이 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사건이었다. 얼토당토하지 않는,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기준이 없는, 혹은 과학적 가치가 전혀 없는 발명.

 

아마도 동료들은 그를 보면 과학자가 아니라 마케터를 하라고 할 게 틀림없다. 그의 발명이 세간의 관심을 받을 때부터 과학자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추문이 돌기 일수였으니까.

 

하지만 도파랑은 자신이 과학자라고 꿋꿋이 믿었다. 그건 지금 이곳에 앉아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도 변치 않는 마음이다. 그는 자신의 발명이 온갖 수식어구를 붙여가며 폄하받길 원하지 않는다.

 

도파랑: 파랑은 길이가 450nm에서 500nm 사이인 파장을 일컫는 말이죠. 그중 470nm의 파장이 제가 설정한 기준에 가장 부합하였습니다.

 

진행자: 그 기준이라는 게?

 

도파랑: 색을 봤을 때 인식하는 우울도입니다. 블루는 원체 우울을 상징하는 단어였죠.

 

 

좌중이 소란스럽다. 당혹스러운 것은 진행자와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도파랑은 아주 침착하게, 침착하다 못해 음울할 정도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도파랑: 우울도라고도 하고 안정도라고도 합니다. 아주 다른 단어지만 이곳에서는 같은 뉘앙스로 사용할 겁니다. 아주 푹 가라앉은 우울, 그것이야말로 안정감을 야기하죠.

 

심리학자가 보면 곡할 노릇의 발언이다. 하지만 이미 생방송을 통해 전세계로 번역되어 퍼져나가는 이 TV 프로그램을 다급하게 꺼버릴 수도 없는 모양이므로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도파랑에게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도파랑: 친근한 차분함과 우울, 그것이 세파랑이 가져올 수 있는 영향력입니다.

 

진행자: 세파랑을 응용할 수 있는 분야가 있나요?

 

도파랑: 세파랑을 단순히 디자인과 예술 측면에서만 보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모두 감정이 지나치게 격정적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좀처럼 차분해지려고 해도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되죠. 하지만 세파랑은 감정 조절을 도와줍니다. 의학 분야로도,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발명입니다. 파랑은 아주 오래 전 로마에서 부르는 명칭도 없이 천대받던 색이었습니다. 악마의 색, 부정한 색.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선 순식간에 성스럽고 아름다운 색으로 사랑받게 되었고요. 성모 마리아의 색, 자유의 색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 세파랑에 매료되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도파랑의 발언은 당당하고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에 감명받았다. 심지어 그를 비난하던 동료 과학자마저! 도파랑은 그저 파랑의 역사에 관해 줄줄 나열할 뿐인데 사람들은 유사과학처럼 세파랑의 효능에 관해 구구절절 맞다고 믿게 되었다.

 

몇 차례 질문이 오간 뒤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듯,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에 흠뻑 빠진 사람들은 스튜디오를 떠나는 순간까지 몽롱하고 멜랑꼴리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세파랑에 집착하게 되었다.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우울함과 차분함. 이 광경을 보며 도파랑은 우울 또한 추앙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날 이후로 사람들은 온갖 곳에 세파랑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우울감으로 신뢰를 주는 세파랑으로 된 간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모든 벽면과 사물이 세파랑으로 된 학교. 온통 세상이 세파랑, 세파랑, 세파랑이었다.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거리 간판에 있는 세파랑을 보았다. 세파랑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멜랑꼴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뒤 세파랑을 이어 세분홍, 세노랑, 세빨강도 차례로 발명되었다. 기쁨. 슬픔, 놀람, 공포... 더욱 세분화되고 정교한 원색들이 줄지어 탄생했다.

 

그러나 색을 독점하고 싶은 자들은 언제나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확히는 색과 관련된 권력, 그리고 돈에 집착하는 거겠지만 둘 중 무엇이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똑같았다. 특허 등록된 원색들을 사용하고자 할 시 사람들은 저작권자에게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간 세상에서 가장 00한 00색에 감정을 의존하던 사람들은 서둘러 그 색들을 소유하길 희망했다.

 

사람들은 색깔에 너무나 의존한 나머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상실한 듯 싶었다. 그들은 있는 돈을 전부 바리바리 싸들고 색깔 사용권을 얻기 위해 내달렸다. 돈이 없는 자들은 색깔을 얻지 못했다.

 

"세파랑, 세파랑이 필요해!"

 

"나는 세분홍, 세상에서 가장 핑크색인 분홍을 가져야만 해. 아, 제발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세분홍을 보게 해주세요, 일 초만이라도 좋아요."

 

빈민가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다짜고짜 가지고 있는 색을 보여달라 애원하는 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반면 부자들의 경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복을 느끼기 위해 세분홍을 치사량까지 보고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복합적이고 아름다운 감각을 느끼게 하기 위해 전재산을 털거나 빚을 지더라도 색깔을 샀다. 그래서 온갖 색이 서로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테크닉을 익히는데 치중했다. 그림의 형태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세밀하고 매력적인 곡선과 직선의 스케치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그저 캔버스에 치덕치덕 발라대는 색,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원색의 적절한 배치가 예술 가치의 모든 것을 좌우했다.

 

세상에는 마약이 필요없어졌다. 대마와 LSD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마약으로부터 멀어져갔고 불법으로 마약이 거래되던 암시장은 정말 말 그대로 암암리로 사라졌다. 대신 우리에겐 아름다운 색들이 있었다. 있는 힘껏 바라보면 치사량까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의 마약.

 

색맹인 사람과 눈이 먼 사람들은 감정의 일부만을 이해할거라는 믿음이 생겨 그들은 은연중에, 어쩌면 대놓고 고용과 진학에서 차별을 받기 시작했지만 감정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색깔에 의존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감정 조절 능력은 무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어쩌겠는가?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그들에게는 온갖 곳이 색이고 보지 못하는 이들은 무채색인데. 정작 자신의 색깔을 빼앗겨 세상의 색깔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인데 모두들 색맹과 눈이 먼 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깨닫지 않을까? 도파랑은 완전한 색맹이었으므로, 색깔에 의존하지 않고도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게 나중엔 그를 돈방석에 앉게 만든다는 사실을. 색맹이 차별 받던 세상은 이제 완전히 뒤바꼈다.

 

볼 수 있기에 볼 수 없는, 그런 자들이 있었다. 도파랑은 짧게 웃고는 자신에게 입금된 거대한 자금을 들고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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