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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몸빼바지와 노란머리띠

2023.09.28 01:1709.28

용준 주무관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매끈한 로봇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저 몸빼바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엉덩이에 이상한 걸 끼고 앉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할머니, 거기에서 뭐 하세요?”

누군들 돌아볼 만한 제법 큰 목소리로 소리친 후 다가가도 할머니는 미동조차 없다.

“거기서 뭐 하시냐니까요?”

제법 거리가 가까워졌는데도 할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다. 도리어 용준이 방해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긴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 아닌가?

“할머니, 저 ...”

돌연 할머니가 들고 있던 도구를 땅에 쿡 꽂더니 쓱 뒤돌아본다. 매서운 눈빛이다. 절대 자신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만일 방해할 경우 그에 따른 응당한 보복을 받을 것이리라 경고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눈빛이다. 용준은 말을 잇지 못한다. 할머니의 표정과 눈빛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사실 용준은 다가가면서 할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해도 되나 하는 갈등이 점점 불거지고 있었다. 옛날처럼 백발을 휘날리거나 뽀글파마를 해서 나, 할머니요 하며 세대 간 소속감을 증명하듯 보여주는 시대가 아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노란색 머리띠까지. 할머니라고 부른 건 순전히 몸빼바지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행히 얼굴을 보자 할머니라는 호칭을 쓰는 게 미안하지는 않을 정도의 연배로 보여 안심되었다. 안심 덕인지 막혔던 입이 다시 열렸다.

“할머니, 저 ...”

“누구세요. 여기 관리인이세요? 꽃 심고 있었는데, 안 보이세요?”

걸걸한 목소리에 맞지 않는 꼬박꼬박 존칭이 영 거슬리게 들렸지만, 용준에게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는 통제구역이에요. 공공 구역이라고요. 함부로 여기에 꽃 같은 거 심으시면 안 돼요.”

용준 주무관은 할머니가 말한 꽃과 그 주변에 있는 도구들을 돌아보았다. 작고 노란 꽃이 폭이 두 뼘 정도의 길을 내가며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아직 심지 않은 꽃 무더기와 호미 대신 썼던 것으로 보이는 도구가 하나 있었다.

“어차피 지금 꽃을 심던 중 아니었나요? 얘들도 꽃을 심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얘들도 심는데 나는 안되나요?”

때는 마침 봄이었고 타워 바깥쪽에 있는 정원을 가꾸는 사업이 한창이었다. 참사랑 어머니회가 지원해서 사들인 꽃을 로봇들이 심는 중이었다. 다행히 로봇들은 할머니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인간형 로봇이 아니라 원예 전용 로봇이었다. 걸어 다니는 주전자같이 생긴 것들이 할머니와 의사소통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마찰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 된다는 게 아니라요. 안되긴 안 되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쟤들이 곧 이 자리에 작업하면 할머니가 심은 꽃은 다시 다 뽑힐 거라고요. 그러니 괜히 힘만 쓰시는 거죠.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얘들이 들락 달락 하길래 따라 들어왔지요.”

기본적으로 타워 밖에 속하는 정원 구역은 일반인 통제구역에 속했다. 아마 로봇들이 물건을 옮기는 동안 문이 열려있어 그 사이로 들어왔나 보다. 그나저나 오늘 작업을 통제하는 관리인은 어디 있나? 주변을 죽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내 이 사람을! 자기 담당은 아니지만, 직무를 방기해서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 이상 그냥 지나쳐갈 수 없는 상황이다.

“할머니, 당장 나가세요.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이라고요.”

“아니, 언제 봤다고 할머니, 할머니 하세요? 제가 할머니로 보이나요?”

용준은 불의의 일격을 맞은 탓에 주워담으려던 남은 꽃 무더기와 도구를 엉거주춤 들고는 할머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단발머리에 노란색 머리띠, 가슴에 ‘JAEP UP’이 쓰인 하얀 티 위에 훌렁한 잠바.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끄는 알록달록한 몸빼바지. 분명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입가의 주름들과 저 목소리. 그리고 눈빛. 뭐 하나 일관된 느낌이 없는 저 자태. 그런데 도대체 아직도 몸빼바지를 파는 곳이 있나?

“저기, 저... 그러니까, 할머니 아니세요?”

“호호호, 할머니 맞아요. 쫄긴.”

짝. 어깨와 등판이 연결된 부위를 정통으로 맞았다. 이 할머니 손이 맵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저절로 손이 가 맞은 부위를 쓸고 있다.

“알긴 다 아는데, 그래도 좀 하면 안 될까? 노란 꽃이 너무 예뻐서 말이지. 내가 집에서 키우던 건데, 봄이 됐다고 막 꽃이 올라오지 뭐야. 나 혼자 보기 아까워서. 사람들이 같이 보면 좋지 않겠어?”

어느새 짧아진 말이 신경도 안 쓰였다. 이 할머니를 내보내야 한다.

“물론 예쁘긴 예쁘겠죠.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여긴 공공 구역이라고요. 출입 금지 구역이요.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용준이 사람을 부른다 하는 말에 할머니는 잠시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 덜 심어진 꽃나무를 마침 자기 자식들 보는 것처럼 쳐다봤다. 그러더니 용준이 말리건 말건 꽃나무와 도구를 들더니 계속 꽃을 심기 시작했다. 용준은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할머니가 하는 일에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오늘 안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언제까지 여기에 매달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급하게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 경비실과 탕비실을 차례로 둘러본 후 돌아서는데 경비옷 입은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디가 있었던 거에요? 지금 정원에 웬 할머니가 와서 꽃을 심고 있어요. 그 할머니 도대체 말도 안 통하고 막무가내라고요. 여긴 아저씨 담당이니까 가서 좀 해결해 보세요. 그리고 업무시간에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되죠.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줄 테니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용준은 아저씨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혹여 아저씨가 같이 가달라고 할까봐 재빨리 달아났다. 할머니와의 일이 종일 신경을 자극했지만, 퇴근 시간이 되니 잊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은 좋은 꿈자리를 가졌다. 꽃밭에 노란 꽃이 잔뜩 피어있는 꿈이었다.

 

용준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잊었던 걱정을 다시 떠올렸다. 점심 먹고 잠시 시간을 내어 정원에 다시 가봐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주민 센터를 들어서는데 갑자기 만수 사무관이 자신을 불러 세웠다.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제요? 무슨 일이...”

“정원 구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 정원 구역 말씀이신가요? 정원 구역은 제 담당이 아니라...”

“종민 주무관이 그러던데 어제 마침 그 자리에 용준 주무관이 있었다고. 무슨 할머니 얘기를 하던데...”

“아, 그 할머니요. 그게 그, 그러니까 어떤 할머니가 정원 구역 한구석에 꽃을 심고 있더라고요. 거기가 출입 통제 구역이잖아요. 로봇들이 장비를 나르다 문이 열렸나 봐요. 제가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죠. 그런데 무슨 일이 더 있었나요?”

“어제 퇴근 전에 어떤 할머니가 민원을 하나 넣었는데 글쎄 그게 용준 주무관을 상대로 민원을 넣었다지 뭔가요. 그 할머니가 용준 주무관을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자신의 권리를 방해했다고 항의했다지.”

“항의를 했다고요? 저를 향해서요?”

“그래요. 저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용준 주무관이 직접 알아서 처리해줬으면 해요.”

“제가요? 저는 정원 담당이 아닌데…”

“종민 주무관에게도 말해 두었어요. 그 구역만 특별히 용준 주무관에게 맡기라고요. 용준 주무관이 알아서 이 사태를 잘 해결해 주세요. 저는 그럼 믿고 가 볼게요, 어험!”

“저, 저는 다른 해야 할 일이…”

용준은 황망히 서서 만수 사무관에게 하소연해 보았지만, 사무관은 벌써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용준은 일단 민원을 확인하기로 했다. 마침 종민 주무관 자리에 있었다. 용준은 종민에게 민원을 접수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종민 주무관은 자신이 직접 받았다고 했다. 용준은 종민에게 할머니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종민은 바로 그 할머니라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용준은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물어보았다.

“할머니가 물어보던데요. 키 크고 퉁퉁하고 인상 좋은 사람 있느냐고. 딱 용준 주무관이잖아요.”

종민은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하는 듯 실실거리면서 대답했다. 용준은 종민을 강하게 째려봐 주고 민원 내용을 읽어갔다.

“내가 정책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 삭막한 타워에 꽃 한 그루, 나무 한 그루 더 있으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 아니, 용준 주무관이라는 사람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와서 저를 강제로 끌고 나오고 제가 만든 꽃밭을 망쳐 놓았어요. 저는 참고 참았지만, 너무 분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제 꽃밭을 돌려줄 것과 그 사람 아니, 용준 주무관이 사과할 것을 시당국에 요구합니다.”

아니, 이 할머니.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내가 언제 사람을 끌고 가 꽃밭을 망치고 할머니를 끌고 나왔던 말인가. 용준 주무관은 머리에 열이 오르고 눈에 불꽃이 뛰는 것을 느꼈다. 서류에 적혀져 있는 할머니 주소를 보았다. 정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대로 할머니 집에 쳐들어가서 단판을 내 볼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공무원이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냉정해져야 했다. 용준은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뭔가 할머니 농간에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선 계획 필요했다. 일단은 먼저 어제 그 정원 구역에 가보기로 했다.

 

용준이 정원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이었다. 이런저런 서류를 먼저 처리하고 이곳저곳을 둘러 자기 일을 정리하고 나서야 겨우 정원에 오게 되었다. 서둘러 간다고 간 것이 한 시간이나 지나 용준의 마음은 애가 닳았다. 거의 뛰다시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또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제 그 할머니가 정원 관리 로봇을 두들겨 패는 것 아닌가? 아, 두들겨 팬다는 표현은 좀 그렇다. 할머니니까. 할머니가 두들겨 패봐야 그냥 때리는 정도다. 그리고 로봇은 아픔이란 걸 모른다. 그래도 이 할머니, 손이 맵다. 손으로 때리고 또 때린다. 로봇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할머니, 할머니!”

다급한 마음에 출입구 유리창을 쾅쾅 치며 할머니를 외쳐보았다. 한 손으론 출입구 손잡이를 돌리지만 꼼짝도 않는다. 출입구는 안으로 잠겨 있었다. 다시 할머니를 외치며 출입구를 두들겼다. 할머니는 들리지 않는지 하던 일을 멈추지도 않는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어제 그 아저씨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 정말! 쌍욕이 나오려는 순간에 저기서 아저씨가 뛰어 온다. 아저씨도 할머니를 본 모양이다. 출입구에 서 있는 용준을 아는 체도 않고 출입구를 열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뜯어말린다. 용준이 따라 들어가는 동안 할머니와 아저씨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아저씨는 로봇을 막아서고 할머니는 아저씨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로봇을 차려고 하는 광경이 마치 격투기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러다 아저씨 국부라도 차이면 이거 난감함이 두 배로 더하겠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이러지 마시고 말로 해요. 말로...”

용준이 아저씨와 할머니를 뜯어말리자 할머니는 어떻게든 로봇을 냅다 갈겨버리고 씩씩대며 물러선다. 아저씨도 할머니의 손목을 놓고 양팔을 벌려 방어자세를 취하며 숨을 가누고 있다.

“아니, 여기서 이렇게 싸운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닌데. 그렇게 싸우면 어떻게 해요.”

“이 할머니, 어제도 내가 분명 다시 나타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했건만.”

“가만 안 두면 어쩔건데. 나 때리려고? 그럼, 때려봐. 때려봐!”

“때리라면 누가 못 때릴 줄 알고?”

용준은 재빨리 아저씨와 할머니 사이에 끼어들어 가 섰다.

“할머니, 왜 이러세요. 어제도 제가 말했잖아요. 여긴 공공 재산이라 개인이 함부로 출입하거나 훼손 해서는 안 된다고요. 이렇게 계속 생떼를 쓰시면...”

“생떼를 쓰면 어쩔건데. 뭐, 이제는 잡아 가두려고? 흥, 어제 그럴 것 같아서 내가 주민 센터에 진정서 하나 넣어놨지. 네놈들 우르르 몰려온다고 내가 순순히 당할 줄 알고? 어디 해 봐라. 어디...”

“할머니, 우리가 언제 몰려와서 그랬다고 그러세요. 어제도 전 먼저 가고 아저씨만 있었다고요. 제가 언제 할머니를 정원에서 몰아내고 꽃밭을 망쳤어요. 꽃밭도 이렇게 멀쩡하게 있잖아요.”

“꽃밭이 왜 멀쩡해. 오늘 아침에 보니 이놈이 와서 내 꽃밭을 갈아엎고 있잖아. 내가 꽃밭에 미리 들어와 있지만 않았어도 큰일 날 뻔했잖아.”

“아니, 언제부터 정원에 들어와 있던 거에요? 분명 정원 출입구는 잠겨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에요?”

“문이 잠겨 있다니. 네 시간 전에 왔더니 열려있었는걸.”

“아니, 새벽부터 여기에 계셨던 거에요?”

“그럼, 저놈들이 내 꽃밭을 망칠까 봐 지켜보러 나왔지. 그런데 조금 전에 이놈이 와서는 꽃밭을 갈아엎지 뭐야.”

할머니는 다시 정원 관리 로봇을 때리려고 했다. 용준과 아저씨는 오른쪽 왼쪽으로 스텝을 밟아가며 할머니의 진입을 막았다.

“할머니, 이러지 마시고.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 테니. 우리 나가서 얘기해요. 나가서.”

“저놈이 꽃밭을 갈아엎을 텐데 어떻게 나가? 난 여기서 한 발도 더 못 물러나, 절대.”

“알았어요. 제가 오늘부터 이 구역을 맡게 되었으니까 제가 작업 중단을 요청할게요. 아저씨, 가서 정원 설계사에게 전화해서 일단 여기만 설계 변경 부탁한다고 말해 주실래요? 다음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저씨가 가니 할머니는 씩씩대는 게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조금 있으니 지시가 내려왔는지 로봇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꽃밭에는 용준과 할머니 둘만 남았다. 할머니는 안심했는지 쭈그리고 앉아 자신이 심어놓은 꽃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용준은 할머니와 꽃들에 조금 미안했다.

“할머니, 새벽부터 나오셔서 배고프실 텐데.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할머니는 그래도 한참 동안 갈아엎어진 부분을 손으로 고르더니 일어나 손을 툭툭 털고 정원 밖으로 나갔다. 용준은 재빨리 할머니를 따라나가며 뒷일을 부탁한다는 뜻으로 아저씨에게 손 인사를 하고 어떤 걸 사드려야 좋을지 생각해보았다.

 

할머니가 고른 메뉴는 짜장면이었다. 용준은 주민 센터 근처에 있는 평소 잘 가던 식당에 가려 했는데 할머니는 무슨 그런 곳에 가느냐는 듯 꽤 삐까번쩍한 중식당으로 들어갔다. 용준이 따라 들어가니 실내장식도 고급스럽고 의자와 식탁도 기품 있어 보이는 중식당이었다.

“자장면은 이 집이 맛있지.”

할머니의 말에 새삼 이렇게 고급스러운 집에서 고작 짜장면이나 먹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할머니...”

“나, 미진에요. 미진 할머니. 그런데 지금 보니까 우리 아들뻘이네. 몇 살이에요?”

미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니는 용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용준은 그저 마음속으로만 할머니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하고 비슷한 연배로 보이네. 근데 처음엔 학생인 줄 알았어. 무슨 비결이라도 있어?”

비결은요. 그저 잘 먹지요.

“지금 보니까 참 잘 생겼다. 눈도 부리부리하고 코도 듬직하고. 엄마가 어렸을 때 많이 예뻐해서 이것저것 많이 먹였겠어.”

그러게요 너무 먹였나 봐요.

“우리 아들은 순둥이야. 키만 멀대같이 컸지. 비실비실 해서는. 그래도 이건 자랑인 것 같아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야. 영국에서 회사를 하나 운영해. 새로 개발되는 의료용 로봇이라고 하던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고 꽤 잘하고 있나 봐. 저번엔 주식이 올랐다고 자랑을 하더라고.”

자랑 맞네요.

”삼 년 전에 결혼해서 손주 놈을 낳았는데 아니 날 똑 닮았지 뭐야. 할머니하고 손주하고 그렇게 닮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야. 손주 놈하고 영국에서 헤어질 때 할머니하고 헤어지기 싫다고 펑펑 우는데 아주 죽겠더라고. 비행기 타고 오면서 내내 손주 놈 얼굴만 떠오르더라고. 결혼했어?”

아니요.

“아이고, 그 나이면 벌써 혼기를 놓쳤는데 빨리해야지. 부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시겠어.”

네 그저 제 걱정에 잔소리만 느셨죠.

“그래도 공무원이면 한 때는 꿈의 직장 아니었던가?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애인은 있고?”

호구조사는 그만하시고요. 할머니, 어제...

“어제는 참 미안했어. 내가 화가 엄청 나서 착각했지 뭐야. 내가 사과할게. 주민 센터에 가서 막 설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저씨밖에 생각이 안 나지 뭐야. 늙어서 그래, 늙어서. 이해해줘.”

네 알겠어요. 이해할게요. 하지만 정원에 꽃을 심는 건...

“정원이 공공 재산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타워 주인은 타워에 사는 주민 아니에요? 타워의 재산은 곧 주민 재산 아니냐고요.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맘대로 사용 못 하면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대답해봐요. 타워의 주인이 누군지. 그리고 그 주인이 왜 자신의 재산을 맘대로 사용 못 하는지.”

그래도 법이...

“법은 우리 모두가 바꿀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주인이 모두 합의하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세상 태어나자마자 처음부터 법이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다 같이 잘 살자고 만든 규칙일 뿐인데, 잘 살기 위해서 더 낳은 대안이 있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용준은 이 할머니를 언젠가 본 듯했다. 작년인가, 제 작년인가 ‘주민이 타워를 되찾자’는 대대적인 시위에서 웬 할머니가 발언한 영상이 기억났다. 지금 용준 앞에 있는 할머니가 바로 그 할머니였나 보다. 노란 머리띠에 몸빼바지만 빼면 그런대로 배운 티도 나는 할머니 같았다. 용준은 할머니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왜 이렇게 무안하게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그래? 아 참, 내 정신 좀 봐. 문화센터에 서예 배우러 가는 시간인데 잊고 있었네. 어머, 어머. 미안해요. 먼저 일어설게요. 잘 먹었어요. 담에 봐요. 아, 그리고 항의서는 이따가 주민 센터에 들려 취소할게요. 그럼, 안녕!”

후다닥 일어서는 할머니를 엉거주춤 배웅하고는 용준은 그제야 배고픔을 느꼈다. 중식당 메뉴를 보니 하나같이 용준의 월급으로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용준은 할머니의 빈 그릇을 보고 그냥 짜장면을 주문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용준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이 할머니, 국물도 안 남기고 싹싹 비워 먹었다. 단무지 하나 남기지 않았다. 역시, 지독한 할머니 맞다.

 

며칠간은 그저 일상적인 날이었다. 할머니는 민원을 취소했고 사무관은 하루 만에 민원을 취소시킨 용준의 능력을 높이 샀다. 사무관은 우리 주민 센터에서 가장 모범적인 고문관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주무관을 고문관이라고 잘못 말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용준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아 그날 분위기는 그런대로 화기 애매한 분위기에서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

정원 담당이 종민 주무관으로 다시 바뀌었어도 용준은 점심 먹고 매일 정원 꽃밭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할머니를 만날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쩐 일인지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보이지 않았다. 반쯤 뭉개진 꽃밭에 노란 꽃들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도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용준은 할머니 대신 자신이 꽃밭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밭을 보다 보면 할머니의 질문이 생각났다.

“타워의 주인이 타워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정원 사업은 우리 타워만의 자랑이었다. 다른 타워와 달리 우리 타워는 외부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다른 타워는 박스형의 매끈한 모양인데 반해 우리 타워는 마야 피라미드처럼 층이 높아질수록 좁게 되어있다. 층과 층 사이에 자연 공간을 만들기 위한 설계자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다른 타워에는 없는 외부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성과가 정원이었다. 예전에는 정원에 나가 꽃도 가꾸고 산책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로봇이 정원을 가꾸게 되면서 정원은 출입금지 공간이 되었다. 면목 상 로봇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민으로부터 로봇을 보호하려는 조치가 아닐까 싶다.

주민 센터는 주민의 요구를 들어 일하는 곳이다. 하지만 더는 아무도 정원에 나가 꽃을 가꾸거나 산책을 요구하지 않는다. 타워 내부의 삶에 너무 익숙해졌다. 외부에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 바람을 쐬고 비를 맞고 뜨거운 햇볕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없어졌다. 주민 센터가 사업의 편의를 위해 정원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해도 지금까지 항의 하나 없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일은 그대로 굳어지게 마련이다. 이제는 실내에서라도 정원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 학생들만 견학하러 와서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지 않을까? 용준은 확신할 수 없었다.

‘주민이 타워를 되찾자’라는 구호를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용준과 비슷한 문제를 느꼈나 보다. 별것 아니었던 운동이 점차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커갔다. 사람들이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게 질렸나 보다. 뭔가 삶의 환경을 자신이 스스로 가꾸며 살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바다 오염과 기후 위기에 몰려 타워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쉬기만을 원했던 사람들이 일어서려 하고 있다. 용준은 타워에 새롭게 부는 바람이 좋은 쪽으로 가는 건지, 나쁜 쪽으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용준 자신도 주어진 일과에 따라 사는 삶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는 건 알았다.

정원에 핀 노란 꽃은 햇살을 받아 그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희망이 있다면 저 노란 꽃과 같을 거라고 용준은 생각했다. 어느 누군가에 의해 심어졌지만 이제 스스로 피어나는 꽃. 바람과 비를 맞고 오히려 더 강해지는 꽃. 사람들이 저 꽃을 보고, 꽃에서 배우다 보면 지금보다 더 자신을 위해 애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더 강해지고, 더 예뻐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용준이 담당하는 업무는 주민 센터 공용 로봇을 대여하고 수거 하는 일이다. 단말기에 뜨는 로봇을 배달한다. 사용법을 알려 주고 다 쓰면 수거해 온다. 생각보다 일이 많아 힘들지만, 용준 주무관은 싫은 소리 하나 안 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타입이다. 주민 센터에서는 가사 도우미 로봇뿐만 아니라 요리도우미 로봇 그리고 기초적인 의료 로봇을 대여해주고 있다. 지금 가야 할 곳은 13구역 23호로 의료도우미 로봇을 신청받았다. 의료도우미 로봇은 휠체어를 업그레이드시킨 것으로 정확하게는 로봇이라고 부르기엔 어렵지만, 다리나 허리가 불편한 환자를 돕기 위해 개발되었다. 허리가 아픈 노인이라 해도 그 위에 누워 벨트를 잠그고 잘 조이면 간단한 일상은 할 수 있게 하였다. 용준 주무관은 로봇을 챙겨 13구역 23호를 방문했다.

용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나왔는데 그 집은 할머니의 집이었다. 할머니의 집은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온통 각종 식물과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있다니!’

집안에는 식물을 키우기 위한 작은 인공 태양과 배수시설, 각종 장비로 빼곡히 차 있었다.

“아니, 할머니 어디 아프세요?”

“별것 아니야. 화분을 들다가 글쎄 허리를 삐끗했지 뭐야. 저놈의 화분! 항상 저게 문제라고.”

“아니, 그러면요 며칠 동안 아파서 누워 계셨던 거예요?”

“처음에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어. 그런데 왔다갔다하다 보니 영 결리고 뻐근한 게 점점 더 심해지지 뭐야.”

“이렇게 무거운 화분을. 이런 거 옮길 땐 로봇을 사용하셔야죠.”

“로봇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앞에서 로봇 얘기 꺼내지도 마. 로봇 보고 화분 옮기게 하면 어떻게 하는 줄 알아? 꽝하고 내려놓아. 꽝하고 내려놓아서 깨진 화분이 한두 개만 줄 알아? 몇 개 깨 먹고 나서는 다시는 로봇에게 화분 안 맡긴다고 다짐했어.”

“그렇다고 이렇게 무거운 화분을 혼자 드세요? 젊은 사람도 힘깨나 쓰는 사람 아니면 들기 힘들 텐데. 그러니 허리가 아프죠.”

“그걸 어떻게 들어. 옛날 같았으면 번쩍번쩍 들었겠지. 내가 늙어서 못 들어. 좀 살살 끌어다 놓으려고 했는데. 그런데도 이 사태가 났지 뭐야.”

“제가 도움이 로봇 하나 가져왔어요. 순전히 기초적인 도움이 로봇이라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하기 전까지만 사용하는 거에요. 이걸 사용하면 당장에 기본적인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 이거 가지고 절대 화분을 옮기면 안 돼요. 로봇이 보기보다 힘을 못 받아서 쉽게 고장 나요. 그냥 눕고 일어서기 편하게 하려고 만든 거거든요. 이렇게 허리와 가슴 허벅지에 벨트를 적당히 조이시고요 명령만 내리면 얘가 알아서 해 천천히 안 아프도록 동작을 도와줘요.”

용준 주무관은 할머니 신체 사이즈의 맞게 로봇에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사용법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식물이 많아요? 저는 무슨 식물원에라도 잘못 들어온 줄 알았어요.”

“많긴, 뭐가 많아. 그냥 여기저기서 되는 대로 얻어 가지고 와서 키운 건데. 오래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이렇게 좋은 것도 가져다주었는데 뭐 맘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 봐. 내가 오늘 선물 하나 할 테니.”

“아니, 아니에요. 저 혼자 살아서 잘 못 키워요. 아마 키우다 보면 어느새 말라죽어 있을지도 몰라요. 식물이 보고 싶으면 이렇게 할머니 집에 와서 보면 되겠어요.”

“그러지 말고. 우리 집 식물을 정원에 심어놓으면 매일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지 않아?”

“할머니, 미안해요. 그건 제가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얘기해 드릴 수 없어요. 저도 좋은 건 알겠지만, 시당국에서 결정한 걸 어떻게 할 수 없는 몸이라...”

“알았어, 알았어. 뭐, 그렇게 낙담하지 마. 공무원 아저씨라도 우리 집에 와서 봐주면 얘들도 좋아할 거야. 그러지 말고 지금 실컷 봐. 저기 저 삐죽이 꽃망울이 올라온 것 보이지? 제 이름이 천사의 나팔인데...”

 

“갑자기 주민참여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니. 무슨 그런 것이 하라면 툭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용준 주무관님은 무슨 생각 있으세요?”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종민 주무관은 용준에게 사무관의 지시사항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용준은 벌써 머릿속에 짜르르 기획안이 돌아다녀 빨리 써버리고 싶은 생각에 종민의 불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그러게. 갑자기 뭘 하라면 다 되는 줄 알고 말이야.”

“그러게요. 정말 너무 해요. 그나저나 뭘 하죠? 저번에 할머니 일도 있고. 그냥 주민참여 꽃밭이나 만들어보자고 할까? 아이씨, 요즘 같이 로봇이 일을 다 하는 세상에서 누가 그런 일을 하겠다고. 괜히 욕 안 먹으면 다행이지, 안 그래요?”

“응, 응... 그렇지, 그렇지.”

용준은 뜨끔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용준에게는 그동안 해오던 고민을 풀어낼 좋은 기회가 왔다.

“그나저나, 저번에 그 할머니 말이에요. 그 왜 정원에 꽃 심다가 들킨 할머니요. 어디를 다쳤는지 영국 가서 수술한대요. 아들이 유명한 CEO잖아요. 영국에서 돈 많이 주고 스카우트해가서 뉴스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었는데, 기억나세요?”

“아, 그런 일이 있었어?”

“한국 기업 문화에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다나. 지탄도 많이 받았는데, 능력은 끝내주나 보더라고요. 하여튼 그 할머니, 자식이 그렇게 부자면 나 같으면 자식하고 같이 살 텐데. 왜 그런 곳에서 궁상맞게 살고 있는지. 이번에 영국 가면 자식 병수발 받으면서 잘 사시겠네요. 그러고 보니 그 아들이 의료 로봇 개발 업체 CEO라던데 자식이 아니라 로봇의 수발을 받으려나?”

용준은 바쁘다는 핑계로 일주일 넘게 할머니에게 가 보지 못한 걸 후회했다. 용준이 가져다준 의료 도우미 로봇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다른 고충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했었는데, 자신의 무심함을 자책했다.

일을 마치고 용준은 제일 먼저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문밖에서 벨을 눌러보고 문을 두르려 보아도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이를 어쩌나 싶어 한참을 문 앞에서 기다리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와서 메일을 확인해보니 이틀 전에 들어와 있던 음성 메시지가 있었다. 발신자가 민지라고만 되어 있어 무슨 스팸메일인 줄 알고 무시하던 메일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짜장면을 먹던 날,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민지라고 한 기억이 났다. 용준은 서둘러 음성 메시지를 클릭했다.

“요즘 이렇게 음성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이래도 될까 모르겠네요. 늙은이가 할 줄 아는 게 오래전 방법밖에 몰라서. 혹시라도 나중에 이 메시지를 듣게 되면 용서해주세요. 허리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서 수술하려 했더니 아들이 극구 영국에서 수술하자고 하네요. 요번 기회에 아예 엄마를 영국에 앉히고 싶어 그러는 것 같아요. 서둘러 일정을 잡는 바람에 연락도 못 하고 떠납니다. 공무원 아저씨가 그동안 참 잘 해주셨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네요. 이렇게 음성 메시지로나마 인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자식 같은 꽃들을 두고 갑니다. 가끔 와서 잘 자라는지 확인해주세요. 자동으로 물도 주고 햇빛도 비출 테니 특별히 뭘 할 건 없겠지만, 얘들이 생각보다 누군가의 관심을 먹고 산답니다.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잘 자라요. 가져다준 의료 로봇은 생각보다 좋았어요. 로봇이라면 모두 깡통으로만 생각하던 고정관념을 많이 바꿔주었답니다. 미처 반납하지 못하고 떠나니 수거해주세요. 지금으로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으나 언제고 꼭 돌아올 거에요. 그때까지 제 자식들을 지켜봐 주세요.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주 옛날식으로 인사할게요. 아~안뇽!”

용준은 할머니 메시지를 다 듣고 벌떡 일어나 할머니 집으로 다시 갔다. 아까는 몰랐지만, 문은 열려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식물들이 가득 들어선 현관과 거실이 나오고 소파 한쪽에 의료 도우미 로봇이 가지런히 앉아있었다. 로봇 위엔 ‘감사합니다. 흙이 마를 때 물 조금만 주세요.’ 하는 메모와 조그마한 선인장 화분이 놓여있었다. 아마 작별 선물인가 보다.

“참, 할머니도. 난 식물을 길러본 적이 없다니까.”

소파에 앉아 메모와 로봇을 보았다. 로봇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체온이 깃든 듯 따듯한 기운이 흘렀다. 용준은 다시 한 번 더 집을 죽 훑어 본 다음 선인장과 로봇을 들고 나왔다.

 

“요번 공모전에서 뜻밖에 당선작이 나왔습니다. 종민 주무관 이리 오세요. 모두 박수!”

주민 센터 전 직원이 모인 자리 한 가운데로 종민이 주춤주춤 걸어나와 꾸벅 인사를 했다. 직원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종민의 입선을 축하해주었다.

“종민 주무관은 주민참여 프로그램 개발 사업을 위한 특별 공모전에서 당당히 금상에 입상했습니다. 타워 외곽 정원에 텃밭을 만들고 주민들이 직접 가꾸도록 하여 주민참여를 높이고, 환경에 대한 경각심도 심어주고, 동시에 건강도 증진시키자는 사업입니다. 센터장들은 회의를 거쳐 종민 주무관의 의견이 매우 현실적이고 능률적인 사업이 되리라고 판단해 금상을 수여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모두 축하해주시고, 다른 주민 센터 식구들도 종민 주무관처럼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항상 고민하는 직원이 되도록 노력해주세요.”

종민은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실실 웃고 있다. 좋긴 좋은가 보다. 종민이 무심코 한 말을 용준이 응원해주고 다듬어 주었다. 종민은 절대 안 될거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면서도 딱히 다른 대안이 생각나지 않아 결국 이 사업을 공모전에 제출하기로 했다. 의외로 큰 상을 받아 종민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용준도 처음에는 이 사업으로 제안서를 써볼까 했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공모전에 당선돼 보지 못한 종민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 용준은 공용 로봇의 대여와 수거에 좀 더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개선 방향과 함께 제안했다. 용준의 제안도 금상까지는 안 되었지만, 입선에 올랐다.

용준은 오늘도 퇴근과 함께 할머니 집에 간다. 할머니가 없는 사이 식물이 부쩍 자라서 집안이 거의 밀림에 가깝다. 할머니가 부탁한대로 식물을 돌아보며 인사하고 말도 걸어보지만 아직도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마음으로 사랑하면 알아주겠거니 하는 생각에 하나 하나 다가가 마음의 인사를 건넨다. 한 바퀴 돌고 소파에 앉아 할머니 생각을 했다. 수술은 잘 마쳤는지. 치료는 잘 받고 있으신지.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는지 궁금하지만 알아볼 길은 없다.

해는 어느덧 저물어가며 할머니 집 안에 붉은 장막을 수놓았다. 용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지는 해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그림자의 향연을 감상하고 있다. 할머니가 사랑하던 ‘천사의 나팔꽃’이 그 빛에 화답하는 장중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듯 했다.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오면 저녁 시간의 아름다움을 할머니와 나누고 싶었다.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오면 나팔꽃의 연주도 들려주고 싶었다.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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