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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23.12.19 15:0012.19

25세, 카페 사장 안시연은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카페를 세우기 위해 빌린 돈 1억 2,000만 원을 겨우 2년 만에 갚았다. 그녀의 카페는 대학가에 있었던 데다가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이 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물론 그녀에게도 불운은 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시도했던 연애에 실패했고 왼쪽 아랫잇몸에 매복 사랑니가 하나 있었다. 시연은 갑자기 아팠다. 그게 사랑니라는 탓이라는 걸 아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카페에서 사람이 없는 시간대,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렸고 자기 왼쪽 잇몸 안에 크게 부푼 걸 보았다. 시연은 갈색 종이로 만든 손바닥 크기만 한 일기장을 꺼냈다. 그녀는 중성펜으로 글을 썼다. 한국어에서는 마지막 어금니를 사랑니라고 부른다. 이성과의 사랑에 눈을 뜰 때, 또는 첫사랑을 앓는 것처럼 아프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영어나 한자에서는 ‘지혜의 이’라고 불리고 일본어에서는 부모님을 여읠 나이에 난다고 하여 ‘부모를 모르는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녀는 일기장을 덮고 자기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4시 반이었다. 6시에 계산대를 대신할 아르바이트생이 온다. 치과는 6시 반에 문을 닫는데, 시연은 자기의 사랑니 발치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시연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기, 은현아, 혹시 한 시간만 빨리 와줄 수 있어? 내가 치과에 가야 해서.”

“네, 근처니까 지금 갈게요.”

“고마워, 내가 3만 원 줄게.”

은현은 정말로 몇 분 만에 왔다. 그는 카페 구석에 있는 앞치마를 입었다. 계산대 앞에 서더니 말했다. 은현은 대학생으로 수업이 끝날 때마다 아르바이트했었다. 수요일은 저녁 강의가 없었으니, 일하러 왔다고 했다. 시연은 웃으며 이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가게, 잘 부탁해.”

“네, 근데 치과는 왜 가시는 건가요?”

“사랑니.”

“저도 사랑니 뺐는데.”

“아팠니?”

“아팠어요. 엄청.”

시연은 잠시 그가 자기를 놀리려고 거짓말하나 의심했다. 사랑니가 아프다는 건 자주 들었으니 딱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치과는 흰색 바닥이었다. 벽은 고동색 각목이 차곡차곡 세워진 디자인이었다. 건너편에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은 위생사 한 명이 있었다. 시연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사랑니 쪽이 아프다고 했다. 위생사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시연은 계산대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 앞에는 여성지와 일간지, 어린이용 만화책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일간지 신문 말고는 최근에 나온 것들 같지 않았다. 시연은 그 가운데 의료 전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결핵의 위험성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의 어떤 수필가는 결핵균이 암이나 백혈병, 에이즈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앞에 둘은 일리가 있지만 결핵과 에이즈는 전혀 상관없는 병이다. 또한 과거 사람들은 결핵이 천재가 걸리는 병이라고 믿었고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까 차라리 결핵으로 죽고 싶다고 한 화가나 소설가도 꽤 되었다고 한다. 결핵은 면역력이 떨어지면 잘 걸리니까 실제로 결핵으로 죽은 화가나 소설가가 많았다고 한다. 시연은 잡지를 덮었고 생각에 잠겼다. 시연의 아버지는 결핵을 앓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장결핵, 다행히 얼마 전에 몸의 결핵균이 사라졌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이미 장의 대부분이 괴사해 따로 수술받아야 하는 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좋아해 시연을 걱정시켰다. 양손 끝으로 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곧 치과 진료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연은 생각을 멈추고 치과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시연의 얼굴에 녹색 천을 덮고 입을 벌리라고 했다. 거울과 기구로 이리저리 이를 살펴본 의사는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했고 사랑니라고 말했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니까 위생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곧 어떤 방으로 들어간 시연은 한 관을 입에 물고 방 한가운데에서 사진을 찍었다. 다시 진료실 의자에 앉은 시연,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말했다.

“보면 아시겠지만, 사랑니 하나가 매복 상태에요. 나머지는 문제없는데, 매복이면 뽑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의사는 그냥 이 자리에서 뽑아버리는 게 낫겠다고 했다. 위생사가 수술동의서라는 걸 가져왔다. 이름을 쓰고 서명하라고 했다. 시연은 최대한 반듯하게 이름을 썼고 서명은 최대한 갈겨서 썼다. 위생사는 그것을 어디론가 가져갔고 의사는 수술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시연의 얼굴에 다시 천을 덮었다. 시연의 잇몸에 주삿바늘을 꽂았고 시연은 둔탁한 아픔을 느꼈다. 곧 마취제가 잇몸으로 퍼졌다. 의사는 메스로 시연의 잇몸을 째고 뼈를 가른 뒤, 사랑니를 반으로 갈랐다. 그러고는 사랑니를 한 조각씩 두 번 뽑아냈다. 얼마 뒤, 그 부분을 실로 묶었고 천을 치우며 시연에게 다 끝났다고 말했다. 거즈를 물린 뒤, 두세 시간 동안 빼지 말라 했다. 의사는 뽑은 이를 손가락으로 집은 뒤, 두 조각을 하나로 맞추어 보여주었다.

“이 이가 사진으로 봐서 긴 줄 알았는데, 실제로 길었네요. 사실 수술이 잘 될지 걱정했는데, 계획대로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 접수처로 가시면 주의 사항 알려주실 거예요.”

접수처로 가자, 위생사는 처방전을 하나 뽑으면서 1층에 있는 약국으로 가라고 했다. 주의 사항이 적힌 종이도 같이 주었다. 양치는 최대한 하지 말고 꼭 하고 싶다면 수술 부위는 피하면서 해라, 빨대를 사용하지 말라, 술과 담배는 절대 안 된다, 맵거나 뜨거운 음식은 안 된다. 부드럽거나 많이 안 씹어도 되는 음식이 좋다. 이런 내용이었다. 시연은 고맙다고 말하고 체크카드로 진료비를 낸 뒤, 약국으로 갔다. 곧 약사가 약을 내주었고 혹시 진통제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시연은 망설였지만, 혹시 마취가 풀리면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서 그냥 달라고 했다. 타이레놀로 사려고 했지만, 게보린이 더 효과가 좋다고 아버지가 노래를 불렀던 게 생각나서 게보린을 두 통을 달라고 했다. 약사가 말했다.

“역시 두통엔 게보린, 게보린 두 통이죠.”

시연은 그 말장난이 웃겼지만, 이가 잘못될까 두려워 웃지 못했다. 시연은 약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취가 풀리며 곧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고 입가가 점점 붓는 게 느껴졌다. 시연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꺼내서 보았다. 사랑니가 사랑니라고 불리는 이유는 첫사랑을 앓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아픈 건, 역시 첫사랑 같다. 시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시연은 중학생 때 한 남학생에게 반해버렸다. 그 남학생은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으며 안경을 썼고 공부를 잘했다. 남자답지 않게 피부가 좋았고 뭔가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시연은 그 남학생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한 적이 없다는 걸 주워들었다. 시연은 자신이 고백하면 반드시 연애가 이루어지라고 믿었다. 시연이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남학생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10초 정도 뜸을 들이더니 책을 내려놓고 제 머리를 양손으로 뒤쪽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말했다.

“미안해,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나는 연애에 관심 없어.”

시연은 어이가 없었고 슬펐지만, 남학생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으니 반박하거나 따지지 못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친구들에게 차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날 시연은 방에 틀어박혀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시연의 사랑니 통증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절반으로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과거 생각이 나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시연은 흰색 블라우스와 짙은 청바지를 입고 카페로 들어갔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대학교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한 어르신이 들어왔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다. 원래 무인주문기가 따로 있었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잘 쓰지 못한다는 걸 시연을 알았었다. 시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시럽이나 다른 건 필요 없으세요?”

“네.”

“드시고 가실 건가요?”

“아가씨, 아가씨 입에 피!”

시연은 그제야, 자기 입에 묵직한 피가 새어 나온다는 걸 알았다. 시연은 먼저 그 어르신에게 사과했다. 휴지로 입을 닦은 뒤, 사랑니 때문이라고 말했다. 놀라지 말라고 덧붙였다. 어르신은 차고 있던 넥타이를 약간 풀며 말했다.

“아, 사랑니 때문이었군, 깜짝 놀랐네.”

“커피는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곧 그 어르신은 커피잔을 들고 카페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스마트폰을 켜고 끊임없이 유튜브 쇼츠 영상을 봤다. 자세히 보니 귀에는 무선 이어폰이 있었다. 시연은 그가 무인주문기를 쓰지 않았던 이유가 기계에 능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맞은편에 있는 무인주문기를 보지 못해서가 아닐까 궁금해졌다. 시연은 가게에 들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약과 하나를 접시에 담아서 어르신에게 서비스로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어르신에게 말했다,

“학교에서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분 맞죠?”

“그래요, 정확히는 기숙사.”

“오늘은 양복 입으셨네요? 경비복이 아니라.”

“아, 친구네 형님이 돌아가셔서 잠깐 입었어요, 이따가 상갓집 들려야 해서.”

“어머, 그러셨구나.”

시연은 괜한 것을 물어봤나 싶어서 덤으로 드리는 거라 말하고 뒤돌아갔다. 어르신은 뒤돈 시연에게 말했다, “아가씨도 조심해요, 부모님 건강검진 자주 시키고.” 시연은 “감사합니다.”라고 답해두었다. 시연은 그날도 은현을 일찍 부르고 자기는 치과로 향했다. 봉합한 사랑니를 확인하고 소독한다는 게 이유였다. 치과 의사는 입 안을 보더니 피도 멎고 생각보다 많이 붓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는 이만 가보라고 했다. 접수처에서 한 양치액을 주었다. 실밥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칫솔 대신에 이 양치액으로 입을 헹구는 게 좋다고 했다. 다음 날, 입가는 더더욱 부어있었다. 결국 그날은 마스크를 쓰고 카페로 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대에는 사람 주먹만 한 선물상자가 하나 있었다. 위에는 쪽지가 하나 있었는데, 은현이 주는 밸런타인데이 선물이라고 했다. 시연은 은현에게 전화했다. 은현에게 밸런타인데이 선물은 여자가 남자한테 선물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은현은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라고 했다. 시연은 고맙다고 답하기만 했다. 시연은 반지를 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20대 남자에게 줄 만한 선물을 검색했고 예전에 그의 신발 치수가 265라고 했던 걸 기억했다. 시연은 브레이크타임인 3시부터 4시에 카페를 잠그고 나갔다. 가장 가까운 마트로 가서 적당히 멋진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샀다. 카페로 돌아온 시연은 그것을 카페 구석에 숨겨놓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6시가 되었을 때, 은현은 계산대를 교대하러 왔고 시연은 그 신발을 건넸다. 은현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반지에 대한 답례라고 했더니 그는 이런 선물을 줄지 몰랐다고 했다. 그날 퇴근했을 때, 시연은 이가 여전히 아팠다. 바늘로 어금니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시연은 차라리 잇몸에 있는 신경을 모조리 뽑아버렸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뇌에 고통을 일시 차단하는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깐이나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들이 부러워졌다. 그날 텔레비전에 그런 환자들이 나왔었다. 아픔을 못 느끼는 사람들, 그 병은 절대 부러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복막염이나 충수염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시연은 그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사랑니를 뽑을 때도 고통을 못 느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을 때도 고통을 못 느낀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아마 못 느낄 것이다.

월요일, 카페가 쉬는 날이었다. 시연은 입원한 아버지를 찾아뵈기로 했다. 아버지는 현재 장이 일부 잘라냈고 결핵균이 언제 다시 번식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시연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결핵 진단을 받았을 때, 엉엉 울었지만, 지금은 딱히 슬퍼하지 않는 눈치였다. 병원은 정말 깨끗했다. 얼마나 깨끗했냐면 바닥이 온통 흰색이었고 한 걸음만 걸어서 얼룩이 나도 금방 파란색 대걸레를 든 환경관리인이 와서 깨끗하게 닦았다. 병원 한가운데는 영화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시연은 그곳에 발을 딛었고 곧 2층으로 올라갔다. 건물 하나를 다리를 통해 지나갔고 입원실이 나왔다. 아버지는 305호에 입원했으니 한 층 더 올라가야 했다. 병실의 문을 열자, 아버지가 초췌한 얼굴로 시연을 맞았다. 비록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지만, 활짝 웃는 표정이었다. 시연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빠?” “그래 난 괜찮다.” 시연의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기 애매했다. 결핵균이 나았나 싶었지만 다시 온몸으로 퍼진 상태였다. 폐결핵이 아니었으니 딸에게 전염될 가능성은 적었으나 그는 딸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한 발짝 정도 딸에게 떨어지라고 했다. 시연은 그것이 서운했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오지 못했다. 시연은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일을 방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딸을 봐서 정말 좋았다고 했다. 얼굴을 양손으로 매만졌다. 시연은 그 상황이 싫지 않았는지 그저 웃기만 했다. 시연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혹시 퇴원하면 갖고 싶은 거 있어?”

“그런 거 없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요, 나 돈은 몇천만 원은 있어.”

“그럼 혹시 아우디도 되니?”

“아우디 뭐? 아우디가 한두 개야?”

“A7이면 좋겠는데.”

아버지는 시연에게 꼭 아우디를 중고로 사라고 당부했다. 그는 자동차, 특히 수입차는 중고로 사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철칙이 있었다. 병원에서 나온 시연은 중고차 센터를 검색했고 근처에 평판이 나쁘지 않은 업체를 찾았다. 전화해서 미리 아우디 A7에 관심이 있다고 말해두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그것을 준비하겠다고 했고 시연은 수요일 저녁에 그곳에 가겠다고 했다. 마침 그 업체는 밤 10시까지 영업했으니까, 카페가 끝나고 가도 시간이 넉넉했다. 화요일, 카페 문을 열자, 한 대학생이 아우디를 끌고 카페 앞에 주차했다. 시연은 카페 앞에 주차하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어차피 포장이어서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아우디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대학생이라고 시연이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얼굴이 젊었고 학과에서 맞추는 잠바를 입고 있어서였다. 남학생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고 시연은 금방 만들었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아우디를 몰며 사라졌다. 은현이 찾아왔을 때, 시연은 입이 땡땡 부어있을 정도였다. 은현은 아프지 않냐고 물었고 시연은 아프다고 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아팠다. 시연은 의사가 통증이 멎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고 했던 걸 기억했다. 아, 정말 사랑니는 왜 나는 걸까, 속으로 시연은 생각했다. 요즘 싱숭생숭한데 차라리 안 났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수요일, 은현에게 같이 중고차 업체에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은현은 단번에 좋다고 했다. 중고차 업체는 사기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아서 여럿이서 가는 게 좋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그는 어디선가 나타났다. 시연은 은현의 옆으로 다가왔고 둘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중고차 업체에 도착했을 때, 파란색 조끼를 입은 한 딜러가 말씀드린 차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시연을 어떤 차 앞으로 데려갔다.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성능 점검표라고 했다. 은현은 그것을 가로채더니 마치 자기가 사는 자동차처럼 이리저리 확인했다. 은현은 차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 차를 산 시연은 자동차에 탔다. 은현은 조수석에 탔다. 은현은 역시 아우디 A7은 뭔가 다르다고 했다. 시연은 별거 아니라고 했다. 시연은 자동차를 잘 몰랐고 어린 나이에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좋은 자동차와 아닌 자동차를 구분하지 못했다. 도로에 들어서고서야 시연은 자기가 초보 운전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전하는 내내 등골이 서늘했고 신호등의 불빛이 변할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은현이 말했다.

“운전한 적 별로 없어요? 저랑 바꿀까요?”

“아냐, 괜찮아.”

그날은 한 맥줏집에서 무언가를 먹기로 한 날이었다. 맥줏집 바깥은 주황빛이 새어 나왔다. 시연은 건물 옆에 있는 주차장에 아우디 A7을 놔두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생맥주를 시켰고 은현은 그것을 먹었다. 두 사람은 마치 새 자동차를 산 게 축하할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물론 그것은 시연의 자동차가 아니라, 시연의 아버지에게 주는 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이 남으면 시연이 타고 다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시연은 기분이 좋았다. 맥줏집에 퍼지는 튀김 냄새, 마치 원래 살던 다른 세상, 낙원에 잠깐 들린 기분이었다. 치과에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서 시연은 튀김만 먹었다. 이가 아팠지만, 튀김을 먹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없었기에 그냥 먹었다. 술을 마신 건 은현뿐이었지만, 괜찮았다. 은현은 술을 멈추지 않고 마셨다. 마치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처럼. 은현은 세 번째 잔을 비우고 고개를 완전히 들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아아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말했다.

“누나.”

“응?”

“저 누나 남자친구 하면 안 돼요?”

“……”

“저 진짜 누나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데.”

“좋아.”

“정말요?”

“일단 알았어, 술 깨고 다시 이야기하자.”

시연은 그날 자동차로 은현을 태워다주었다. 내심 사랑니를 뽑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으며 맨정신으로 자동차도 운전하게 되었다. 시연은 은현이 산다는 원룸에 그를 내려놓았고 그는 비틀거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가 누나랑 드디어 사귀게 되었다.”라고 중얼거렸고 시연은 약간 창피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간 시연은 샤워를 마친 뒤, 티셔츠와 속옷만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시연은 자동차를 몰고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생각했지만, 병원에 입원한 사람에게 자동차를 줘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일단 자동차를 찍은 뒤 문자로 아버지에게 사진을 보냈다. 아버지는 멋지다며, 정말 자기가 가져도 되냐며 문자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버지는 퇴원한 뒤, 자동차를 받으러 가겠다고 했다. 언제 퇴원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시연은 문자에 그 문장을 적으려다가 말았다.

카페에서 만난 은현은 테이블에 있던 수능 교재를 보고 시연에게 말했다.

“이 교재는 뭐에요?”

“남자친구랑 같은 대학에 다니려고.”

“갑자기요?”

“안 되냐?”

“그러면 카페는 어떻게 하고요.”

“이 건물 1층은 내 거잖아, 나 없어도 잘 돌아가, 수틀리면 팔아도 되고.”

은현은 그녀의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수능을 잊은 지 꽤 되었다고 했다. 은현은 1학년이었지만, 그건 은현이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갔기 때문이었다. 사실 공부를 도와주기보다는 공부를 같이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저녁은 은현과 시연에게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시연은 갈색 일기장을 꺼내서 다시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특히 사회인으로서 돈을 버는 시연으로서는 더더욱, 그녀는 글을 써내려 가면서 자신이 언어학에 소질이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 시연이 갑자기 대학교에 가겠다고 한 것은 갑자기 어떤 계기가 생겨서가 아니다. 이것은 벼락을 맞는 것이나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갑작스레 찾아왔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든 것이다. 수능 공부는 괴롭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할 만했고 시간을 채우기에 적절했다. 시연은 가만히 책을 보기만 했다. 일할 때 보면 손님에게 민폐라고 생각해서 브레이크타임이나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있을 때 보곤 했다. 갑자기 이빨이 아팠다. 마치 이빨이 공부하지 말라고 방해하는 것처럼. 시연은 달력을 봤다. 사랑니의 실밥을 빼는 데는 아직 며칠이 남아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할까, 생각했지만, 시연은 그러지 않았다. 시간도 늦었고 아픈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시연은 아우디 A7을 끌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시연은 저녁 약을 먹었다. 항생제와 진통제였다. 이제 약을 먹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부기가 가라앉았지만, 의사의 말을 어겨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시연은 약을 삼켰다.

치과에 갔을 때, 의사는 실밥을 뽑아버리겠다고 했다. 시연은 입을 벌리고 누워있었다. 의사는 그것을 한 올 한 올 잘라내었다. 그것이 뜯겨 나갈 때마다 시연은 시원함과 동시에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비로소 이가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시연은 휴대전화 소리를 꺼놓은 참이었다. 그녀는 치과 진료 때 소리를 꺼놓는 습관이 있었다. 이를 치료하고 있는데 옆에서 소리가 나면 곤란하니까. 시연은 어째서인지 그 소리를 꺼놓는 10분 남짓한 시간이 무척이나 두렵게 느껴졌고 곧 어머니에게 부재중 전화 3통이 와있다는 걸 알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어머니는 화를 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치과 진료 때문에 그렇다고 하니까, 그래도 전화는 받아야지 하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시연은 그때까지만 해도 왜 어머니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다. 원래 시연의 가족들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화를 내는 특징이 있었지만, 그날은 유독 심했다. 시연은 말했다.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

“시연아,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에요?”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연은 휴대전화를 떨어트렸다. 절대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다. 시연은 체크카드로 비용을 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주차한 아우디 A7을 끌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시연이 아버지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아니 정확히는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때는 어머니의 곡소리로 방이 가득했다. 시연은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결핵성 복막염으로 인한 패혈증이 사인이라고 했다. 의사는 패혈증을 예측하지 못했고 수술에 들어갔지만 결국 사망했다. 시연은 그 병원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만 했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연은 울고 있었고 바깥에는 시동이 꺼지지 않은 아우디 A7의 전조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쩐지 사랑니가 나더라…”

 

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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