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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항정신병제

2023.12.19 14:5312.19

*이 소설은 2023년 2월 게시했던 「환각」의 개작임을 밝힙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항정신병제를 삼켰다. 정신질환이 있음을 밝히고 약을 보여주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첫째,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는 미치지 않았다. 둘째,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미쳤구나. 여기서 중요한 점. 내가 미쳤다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다. 정신과 의사가 나보고 안 미쳤다고 한다면, 미친 게 아니다. 다만 의사는 나에게 정신질환을 진단했다. 정신질환은 객관적 사실이다. 이제 내가 미쳤다는 근거를 찾아보자. 우선 나는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매일 쓰고 있다. 검은색 노트북을 붙잡고 자취방에서 잠까지 줄여가며 편지를 쓴다. 받는 사람은 어머니, 누나, 직장 동료였다. 한 번도 편지를 부치거나 당사자의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 편지를 다 작성하고 집에 있는 낡은 프린터로 출력한다. 그걸 파일철에 넣어 카펫 아래에 둔다. 그게 끝이다.

집에서 사무실은 걸어서 15분 거리. 오피스텔 월세 30만 원으로 사무실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노트북을 서류 가방에 넣고 출퇴근한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아라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이때 아라가 나에게 욕을 한다. 단순한 비속어부터 부모님을 욕하고 나를 찢어 죽인다는 욕. 이내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이것들은 모두 환각이다.

환각 때문에 병원을 찾았었다. 의사를 만나기 전 설문조사를 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정상이다. 누군가가 내 음식에 독을 탔다. 이런 문항이 빼곡했다. 최대한 솔직하게 작성했고 겨우 의사와 만났다.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한 중년 남자였다. 양손으로 흰 가운의 옷깃을 팍 펴더니 나에게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평소에 무슨 일을 하나요.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세수하러 욕실로 들어가면, 욕조에는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생긴 귀신 하나가 물을 가득 채우고 누워 있다. 흰옷을 입은 채 시뻘건 눈을 가지고.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들과 귀신은 똑같이 생겼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고 내 할 일을 하게 되었다. 양치하고 세수하고 가끔 면도하고. 시간이 지나면 귀신도 지쳐서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21살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일부러 헛것이 보이는 척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겠지만 이미 당뇨로 군 면제를 받았다. 굳이 조현병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잡지사에서 글을 실을 기고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연락했을 때, 전화를 받은 아라는 군대를 다녀왔냐고 물었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면제되었다고 말했다. 당뇨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라는 주제를 줄 테니 칼럼을 써보라고 했다. 2000년대 이전에 유행했던 만화·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태권브이와 마징가Z의 유사성을 주제로 글을 써서 보냈다. 얼마 뒤 출퇴근하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어찌어찌 서울에 자리를 잡아서 일하기 시작했다.

놀랍네요.

나를 접한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과 디자인, 글쓰기에 모두 소질이 있다고 했다. 나는 예술고등학교 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일을 찾다가 회사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동료들은 업계에서 보기 힘든 고급 인력이라고 칭찬했다. 입에 발린 소리 같아서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대학교도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남자의 일은 고달팠다. 잡지업계는 많이 일하고 적게 버는 직종이었다. 불만족스러운 환경에서도 나는 군말 없이 일했다. 팀장이자 나의 상사였던 아라는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반복했다. 언제는 내가 쓴 글이 문장구조가 지리멸렬하고 주제가 명확하지 않으며 비슷한 내용을 문장만 바꿔서 반복하고 있다고 꾸짖었으나, 언제는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며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는 글을 썼다며 칭찬했다. 대체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건가, 싫어하는 건가. 아라를 제외한 동료와 대화한 적은 별로 없지만, 내 평판은 비슷비슷했다.

아라의 본명은 박아라. 잡지에 글을 실을 때는 ‘ara’ 또는 ‘아라’라고만 적었다. 이름 자체는 예뻤지만, 박아라라고 하면 뭔가 어감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박아라. 뭐를 박아라. 이렇게 들린다고 했었나. 남성 잡지에 여성 에디터라서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이름을 쓰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이름이나 성별이 무슨 상관이죠.

언제는 내가 아라에게 말했다. “남성 잡지, 여성 잡지. 그건 서점에서 분류할 때만 그렇게 하는 거고. 실제로 사람들이 그런 거 따지면서 잡지를 사 읽나요. 저도 엘르나 여성동아 같은 거 자주 읽어요.” 아라는 웃으며 “그래, 내가 괜히 걱정했다.” 이런 식으로 대꾸했다.

아라는 나보다 8살 많았다. 독신이었고 만나는 남자도 없었다. 회사에서 나와 아라가 연인으로 잘 어울리라는 농담이 돌았다. 정말 연인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라는 나보다 돈도 훨씬 많이 벌고, 8살이나 어린 정신병자와 사귈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했다, 무려 9시간을 일했으나 월급은 겨우 150만 원. 월세와 세금까지 따지면 한 달에 110만 원 정도밖에 벌지 못했다, 처음에는 서울 방값이 워낙 아까워 그냥 사무실 건물 지하에서 노숙할까 생각했다. 아라도 처음에는 동의하는 눈치였지만, 예전에 그랬다가 병이 나서 퇴직한 직원이 있었다면서 말렸다. 사실 노숙 생활 따위는 괴롭지 않았다. 환촉 때문에 추위와 더위도 복불복이었다. 밖이나 안이나 그게 그거였다. 돈이 나가는 일이 별로 없었으니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으로도 살 만했다. 정신건강의학과와 내분비내과 치료비가 나갔지만, 국가에서 주는 정신과 치료 지원비와 의료 보험 덕분에 그리 부담되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치료비가 적게 나가는, 소규모 의원에서 치료했다. 정신과와 내분비내과는 다른 의원이었지만, 같은 상가에 있어서 다니기 번거롭지는 않았고 예약 날짜도 가능하면 같은 날로 했다.

의원 건물까지는 자동차가 없어서 보통 버스를 타고 갔다. 열에 한두 번꼴로 아라가 태워다주기도 했다. 고맙다고 했지만, 동료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의원까지 같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정신건강의학과에 들어가는 걸 볼 테고 그러면 내가 정신병이 있다는 걸 간파할 것이다.

다른 사무실에 직원들이 더 있었으나 이 사무실에는 직원이 나 빼고 세 명밖에 없었다. 남자 하나 여자 둘이었다. 그 가운데 소미라는 여자는 항상 쿠키나 커피 같은 걸 사 들고 왔었다. 나는 당뇨가 있어서 단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지만, 일단 거절하지 못해, 먹는 시늉은 했다. 어느 날부터 나는 망상에 시달렸고 현실과 망상을 오고 갔다. 소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이 섰다. 소미가 나에게 쿠키나 커피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나를 좋아해서다. 우리는 연인 사이다.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미를 오래 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면 소미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까,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나는 미술용품을 전문으로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이젤과 캔버스를 주문했다. 이때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천을 캔버스, 그것을 바치는 받침대를 이젤이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예술고등학교에 있을 때 몇 번 들었겠지만, 나는 일단 태블릿과 노트북으로만 공부했다. 도화지 같은 순수미술을 하는 학생들의 물건에는 관심이 없어서 잊어버렸다. 처음 넓은 상자에 캔버스와 이젤이 배달왔을 때,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집 안에 그것들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소미를 그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스마트폰 앨범이나 SNS에서 소미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서 받은 잡지들을 뒤져가며 여자 모델들의 사진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모델 가운데에서는 예쁘고 관능적인 여자들이 차고 넘쳤으나, 소미를 따라잡을 여자는 없었다. 몇십 분 뒤, 그나마 소미와 인상이 비슷한 모델 사진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와 태블릿은 차이가 있어서 형편없는 그림이 나올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솜씨가 있었다. 내 작품을 내가 평가할 수는 없지만, 원근감과 명암이 뚜렷했고 인체 비례를 현실적으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뭉크의 <마돈나>,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떠올리게 하는 멋들어진 인물화가 완성되었다. 그림의 사진을 찍고 인터넷에 온라인 화랑을 검색했다. 이메일로 그림 사진과 연락처를 보냈다. 사흘 뒤, 화랑에서 연락이 왔다. 그림을 15만 원에 사겠다고 했다. 15만 원은 너무 적은데. 이렇게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리자. 신인 작가한테 15만 원이면 무지 비싼 것이라며, 온갖 설득을 해대었다. 결국 배송료까지 16만 원을 입금받고 우체국에 가서 그림을 보냈다. 우체국에서 말한 배송료는 만 원이 아니라 만 이천 원이었지만 그냥 내고 보냈다.

아라는 술을 마시면 밤이든 새벽이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도 새벽이었다. 생각 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그림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무심코 했다. 아라는 호들갑을 떨며 무슨 그림인지 메신저로 보내달라고 했다. 나체화라서 보내주기 어렵다고 했으나, 예술에 야한 게 어딨냐고 따져서 결국 보내주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아라는 온갖 칭찬을 해대었다. 그림이 화면에서 튀어나올 거 같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화가로 데뷔할까 두렵다고 했다. 나는 어찌 대답할지 몰라서 그냥 네네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은 물웅덩이에 잉크가 퍼지듯이 퍼져나갔다. 점심시간에 소미는 디자인할 때 쓰는 태블릿을 내밀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무엇을 그릴지 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 그림을 그렸다. 소미는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다음에도 부탁한다고 덧붙였고 나는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핑계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크림빵을 먹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아라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라는 당뇨 있는데 단 거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가끔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에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어젯밤에 술 드셨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아라가 버릇없게 말한다고 따질까 봐서다. 아라는 항상 나에게 다정했으나, 몇몇 말투에는 무례하다고 혼을 냈다. 예를 들어 ‘합시다’, ‘봅시다’ 같은 표현은 어른에게 쓰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미안합니다’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라는 등. 뭔 차이인지도 모를 말들을 교정했다. 나는 처음에는 귀찮았으나, 나중에는 알겠다고 하고 점점 고쳐나갔다. 식사하면서 아라가 하는 말들은 수첩에 옮겨 적었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마다 흰색 백지 노트에 빼곡하게 대화 내용을 메모했다. 동료들은 ‘재미있는 사람이다’라고 웃어넘겼다.

아무튼 글을 쓰는 시간, 일하는 시간 빼고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늘었다. 회사 사람들은 그림 그리면, 일에 쓰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못마땅해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나의 미술 활동을 응원했다. 소미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렸다. 결국 부탁하지는 못했다. 눈앞에 소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환각과 섞여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다. 곁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라와 소미를 조금씩 닮았다. 이때까지 봤었던 여자들, 특히 잡지에서 모델을 맡았던 여자들을 조금씩 닮았었다. 그녀를 뭐라고 부를지 몰라서 일단 ‘지아’라고 이름을 붙였다. 올해 인기 있던 여자 신생아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지아는 내가 딸이었다면 어머니가 붙이려고 했던 이름이기도 했다. 지아는 여러 모습으로 등장했다. 정장, 드레스, 블라우스, 멜빵, 원피스, 다양한 옷을 입었다. 지아가 처음 나타났을 때, 나는 환각증이나 신경쇠약이 심해진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내 지아의 등장이 축복임을 깨달았다. 내 그림 실력, 글쓰기 실력은 나날이 좋아졌다. 인터넷 화랑에 가져다 파는 그림 값도 15만 원 정도에서 30만 원으로 훌쩍 뛰었고 평소에 글쓰기가 발전했다고 칭찬하는 적이 없던 아라도 요새 글이 섬세하고 독자를 배려하는 쉬운 문체가 마음에 든다고 칭찬했다.

글쓰기가 나아지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지아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편지를 부칠 방법은 없었다. 지아가 나타나면 그녀에게 직접 말하면 되었다. 굳이 편지를 쓴 이유는 그녀와 대화하기 싫어서다. 환영과 대화하면 내가 미쳤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내가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는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주제도 구상도 없이 무작정 펜이 가는 대로 글을 썼다. 노트북으로 글을 써서 프린터로 인쇄하기도 했다.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나조차 몰랐다. 몇 가지 기억나는 건 있었다. 원래 To.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로 영미권에서 편지를 쓸 때는 Dear.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다고 해서 고쳐 썼었다. Dear.가 더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A4용지에 직접 펜으로 쓰던, 프린터로 인쇄하던, 그 편지는 파일철에 끼워 넣어 방의 카펫 아래에 슬그머니 넣어두었다.

어느 날, 나는 아침을 먹고 오지 않아, 휴게실에서 빵을 먹고 정수기에 물을 따라 약과 함께 삼켰다. 당뇨약과 항정신병제를 한 손에 모아서 삼켰다. 마침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라는 무슨 약을 먹냐고 물었다. 당뇨약이라고 말했다. 당뇨약이랑 먹었던 약은 뭐냐고 물었다. 지방간 약이라고 말할까 생각했지만, 그냥 정신과 약이라고 말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 정확히 말하면 환각을 줄이는 항정신병제였지만, 안에 항우울제도 섞여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라는 무리하지 말라고 말했다.

조심해야지. 요새 밤도 새고 병원도 자주 다녔잖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게도 아라는 정신질환이 감기나 배탈처럼 평범한 병이라고 생각했었다. 요새 정신병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 옛날에는 정신병원 다닌다고 하면 미친 사람, 나쁜 사람, 의지가 없는 사람 그랬었는데, 다만 아라는 여느 꼰대가 그렇듯이 일침과 연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으면서도 일단 들어놓으면 나중에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물잔을 홀짝이며 듣는 체를 했다.

그때 아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힐끔 화면을 보니 잡지사에서 가장 표지를 자주 맡았던 모델에게 온 전화였다. 아라는 급했는지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며 휴게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그걸 보고 안심했다.

아라가 일이 생겼다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라가 없는 동안,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소미는 표정 없이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회사에 컴퓨터가 부족해서 개인 노트북으로 일해야 하는 내가 처량해 보이기도 했고 오히려 이게 편해서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소미가 한 치의 이상도 없이 오로지 컴퓨터 화면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오히려 걱정하게 했다. 소미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미가 내 여자친구라는 망상은 일고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결국 아라가 돌아오지 않은 채, 퇴근 시간이 되었고 소미는 말 한마디 없이 가방을 챙겨서 나갔다.

다음 날은 추위와 허기 때문에, 잠에서 깼다. 어제 아침에 인슐린 주사 맞기를 깜빡해서 밤에 맞고 이때까지 잠을 잔 게 이유였다. 혈당을 재보니 68이 나왔다. 서둘러 무언가 먹어야 했지만, 평소에 단 음식을 멀리하다 보니 콜라 같은 건 없었고 비상용으로 사둔 사탕도 다 떨어진 참이었다. 결국 설탕이 든 커피믹스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유를 부리다 보니 혹시 지각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하늘을 보니 해가 뜨다가 말았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출근까지 세 시간이 남았다. 오랜만에 편지를 쓰기 위해 자취방 구석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 지아가 나타나서 뭐 하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환영이 나와 대화하려고 한 건 거의 처음이었다. 무시하고 노트북과 키보드에 집중했다. 지아는 계속 말을 걸었다. 양팔과 가슴으로 내 머리를 안기도 했고 얼굴과 입술을 내 뺨에 가까이 대기도 했다. 나는 끝끝내 무시했다.

사무실에 출근하고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쓸 때까지, 지아는 곁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의식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빼놓는 것처럼, 지아의 말을 무시했다. 지아는 내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걸 확신했는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내가 보여?’, ‘너는 누구야?’ 이런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뭐 해?’, ‘나랑 놀아줘.’라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참지 못하고 ‘그만하라고.’라며 작지 않은 소리로 외쳤다. 내 앞에 있었던 아라와 옆에 있었던 소미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 직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라는 “방금 뭐라고 했어?”라고 질문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얼버무렸다. 다행히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지아는 사라지지 않고 옆에 계속 있었다.

그날은 화보 촬영이 있어서 촬영장에 갔다. 카메라를 써본 적은 없었다. 견학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같이 가야 했다. 아라도 잡지 총담당자였으니 당연히 갔다. 사진 보정과 디자인을 맡는 직원과 함께 꽤 낡아 보이는 밴을 타고 촬영장으로 갔다. 화보의 주인공은 SNS에서 꽤 유명한 모델이었다. 그녀는 흰색과 검은색이 얼룩덜룩 섞인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자 독자는 표지를 보고 잡지를 사겠지만, 촬영이나 관리를 맡은 직원들은 반라의 모델을 촬영하는 동안 어떤 성욕도 일지 않는다. 모델을 처음 보는 나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무감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모델이 소미를 닮아서 시선과 심장이 흔들렸다. 이목구비만 조금 다르고 인상, 키, 몸매, 가슴 크기까지 모든 게 닮았었다.

나는 촬영장 구석에서 둥그런 탁자와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촬영장 상황과 분위기를 기록한다는 적당한 핑계로 가만히 글만 썼다. 한 1시간 정도 촬영하다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스태프들은 잠깐 쉬자고 했다. 모델은 등걸처럼 가만히 있던 내가 신기했는지, 다가와서 나에게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을 걸었다. 비키니만 입은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불타는 나무토막이 다가오는 것처럼, 화끈거림을 느꼈다. 팀장님께 가보겠다는 핑계로 말을 끊고 촬영장에서 나가 1층 밖으로 내려갔다. 아라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담배를 한 개비만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순순히 내놓았다. 불을 붙이고 입에 갖다 대자, 아라가 입을 열었다.

얼굴이 빨갛다.

더워서요.

여자한테 설렌 게 아니고?

내 얼굴이 그렇게 빨갛지는 않았다. 아라는 직감만으로 내 심장이 빨리 뛴다는 걸 읽어낸 게 분명했다. 상사만 아니라면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전력을 다해 부정하고 싶었다. 아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성욕이 일었던 이유는 모델이 외설스러운 옷을 입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소미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걸 말했다가는 오해가 커질 테니 입을 다물었다. 아라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라가 말했다.

나는 네가 여자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어.

여자한테 관심 없는 남자도 있나요?

없진 않겠지.

아라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회사는 여자 모델을 많이 접하는 곳이다 보니까, 여자를 꾈 목적으로 접근하는 남자가 많았다. 그런데 너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여자는커녕 다른 사람들 자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글쓰기와 잡지에만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회사에 좋은 인재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서운해졌다. 그런 이야기였다.

뭐가 서운했다는 거죠?

아니, 그냥 사람이 좀 다정하면 좋을 거 같아서.

아라는 그렇게 말해놓고 내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가로채고 바닥에 버렸다. “담배 좀 끊어라. 당뇨랑 우울증도 있다면서.”라고 중얼거렸다. 담배를 빼앗을 거면 대체 왜 준 건지 모르겠다. 아라는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촬영이 끝나고 모델은 30만 원인가 50만 원인가를 받았다. 내가 열흘 동안 출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단 하루 만에 버니 억울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인 다른 사무실에서 그 사진들을 수정해서 화보로 사용했다. 잡지가 나오면 나도 한 권 받는다. 도저히 보거나 읽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볼 때마다 소미가 생각날 테니. 나 말고는 아무도 그 모델이 소미를 닮았다는 걸 몰랐다.

촬영이 끝나고 주말이 찾아왔을 때, 나는 어김없이 편지를 썼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였다. 어머니. 저는 죽여도 시원찮을 불효자입니다. 경건하고 건전해야 할 직장에서, 나를 써주는 고마운 직장에서 한 여자 상사에게 애욕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만년필로 ‘색욕’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수정액으로 지우고 ‘애욕’이라는 단어로 고쳐 썼다. 이 감정을 ‘색욕’이라는 단어로 일축하는 건 경솔했다. 소미를 그린 그림은 나날이 늘어갔다. 이 가운데 몇 점을 또 화랑에 가져다 팔았고 아라에게도 보여준 적 있었다. 어째서인가 소미인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림 모델이 소미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그림은 지아를 따라서 그렸다. 지아는 항상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는 밝은 드레스, 최근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검은 카디건과 롱스커트를 입고 오기도 했었다. 구도를 잡거나 소묘를 그리기 위해서 알몸이 되어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었다. 비록 환영이지만 나체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아라가 잡지에 내 그림을 싣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급하게 태블릿을 받아서 적당히 그림을 그렸다. 7월호였으니 ‘해수욕’이라는 적당한 주제를 잡아서 비키니를 입은, 몸매 좋은 미녀 캐릭터들을 그려냈다. 비록 표지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맨 앞 장에 있었으니 아라는 사람들이 잡지를 사겠다며 좋아했다. 그림값은 줄 거냐고 물어볼까 했으나, 그냥 이 정도는 공짜로 해줘도 될 듯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아무튼 나는 점점 소미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왜인지 소미는 아무도 없을 때, 나와 단둘이 있을 때,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순간이 많았다. “무엇을 보고 있나요.”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나는 소미가 나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는 게 아닌가, 궁금했다. 아라는 항상 바쁘다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모델이나 거래처와 미팅이 있었다고 들었다. 정말 신이 내 바람을 들어준 건가. 소미와 둘이서만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사실 나는 소미에게 호감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다. 유리로 된 공예품을 보는 것과 같다. 깨지는 게 두려워서 만지지 못하는 것. 만약 조금이라도 나와 소미의 관계가 어긋나면 평생 되돌려놓지 못한다. 지아는 옆에서 ‘고백해, 고백해’ 부추겼다. 잠깐이지만,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뛰었다.

소미 선배.

네.

저랑 사귀어요.

네?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죄송해요. 그냥 친한 선후배로 지내요.

네, 실례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있었던 나는 걷다가 트럭에 치인 것처럼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자리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1mm라도 움직이면 온몸의 신경이 그곳을 향하는 것처럼 아팠다. 이후로는 별일 없었다. 나와 소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컴퓨터 앞에서 일했고 곧 아라와 다른 직원이 돌아왔고 점심 먹고 퇴근했다. 붕대 감은 사람처럼 굳어 있던 내 몸은 다시 움직였다. 집에 오자마자 A4용지를 꺼내서 만년필로 편지를 썼다. 소미 선배.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죄송합니다.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는 편지를 쓰고 찢어버리고 쓰고 찢어버리고를 반복했다. 다섯 번째로 쓴 편지는 갖고 손에 움켜쥐고 빤히 보고 있다가 펴고 반으로 접어서 늘 사용하던 파일철에 넣어 카펫 아래에 두었다. 나는 이전과 전혀 다름없는 직장생활을 했다. 소미는 입이 무거웠는지, 나의 사랑 고백을 거절했다는 소문을 퍼트리지 않았다. 소미가 나를 차갑게 대하거나 살갑게 대하거나 무시하는 일도 없었다. 정말 고백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이 돌아왔다. 지아는 미운 사람이 잘못되는 걸 보고 고소해하는 것처럼 싱글벙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욕을 내뱉거나 손찌검하고 싶었다. 내가 거절당할 걸 알고 일부러 고백을 부추긴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약을 먹으러 서랍을 열었을 때, 항정신병제가 거의 다 떨어졌음을 알았다. 달력을 보니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주중에는 회사에 다녀야 하니 항상 토요일 오전에 예약을 잡아놓았다. 병원에 가는 건 이제 일상이 되었으니 특별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의원까지 갔다. 안에서 기다리다가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의사는 컴퓨터를 바라보며 “왔습니까”라고 나를 맞이했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만나는 의사는 지겹지도 않을까. 의사는 어김없이 우울하거나 불안한 일이 없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하려다가 결국 소미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사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직장 동료였어요. 고백했는데, 차였네요. 의사는 생전 보여주지 않았던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컴퓨터 키보드로 무언가를 입력하더니, 조현병의 가장 위험한 순간이 왔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무슨 뜻인지 얼추 이해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약을 탔다. 3주분이었는데, 약 봉투는 한 손으로 쥐기 힘들 정도로 두꺼웠다. 약사는 그것을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누군가 내 약을 볼까 봐 온몸으로 숨기고 싶었다. 약의 힘은 대단했다. 물과 함께 삼키자마자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미래와 과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도 나는 여전히 글을 썼다. 잡지에 실을 글은 두 권을 채울 정도로 넉넉히 써놓았다. 이제 편지를 써야 했다. 아라, 소미, 지아, 어머니,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상사든 어른이든 누구든지 반말이었다. 어차피 보내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졸린 몸과 아직은 잘 수 없다는 정신이 팽팽하게 맞섰다. 글 쓰면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손가락이 굼뜨게 움직였다. 온몸의 신경에 피로가 쌓여 움직이기 힘들었다. 정신력이 억지로 글을 쓰게 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환청인가 생각했다. 전화벨이 세 번 울렸고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의자에서 나와서 드러누우며 바닥에 놓여있던 휴대전화를 집었다. 아라에게서 온 전화였다. 휴대전화 화면 오른쪽 위에는 12시 20분이라는 시간이 나타나 있었다. 왜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했지. 불만보다 의아함이 먼저 찾아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질문이 날아왔다.

뭐해?

글 써요.

대단하네.

아닙니다.

실속 없이, 이유 없이, 술을 마시고 전화하는 아라의 버릇. 전화라서 술 냄새가 나지는 않았지만, 말투와 억양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술 드셨어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열심히 하네. 보기 좋아.” 아라는 최대한, 본인이 낼 수 있는 자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술기가 강했으나 그것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

네.

나랑 사귀자.

죄송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당황하지는 않았으나, 바로 대답이 나왔다. 전화기 너머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은 연애하고 싶지 않아서요.” 고요뿐인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미안해.” 아라가 말했고 나는 “아닙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그 전화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지 않은 건 확실하다.

다음 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아라와 소미는 와 있었다.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했고 두 사람은 반갑게 맞았다. 마치 사랑 고백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저 오늘도 활기차게 일하는 평범한 회사의 평범한 직원들로 보였다. 몇 가지 변한 점은 있었다. 항상 무뚝뚝했던 소미는 조금 정겹게 변했다. 목소리에 귀여운 느낌을 넣었고 나를 보며 미소도 조금 넣어주었다. 아라는 변한 게 없었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볼 때 무표정은 여전하다. 그날은 어떻게 지나갔었나. 분명 어떤 일을 하기는 했는데, 마치 비디오 게임의 한 장면을 건너뛴 것처럼, 나는 집에 있었다. 마침 컴퓨터 옆에 있었던 프린터에서 편지글이 적힌 A4용지가 출력되었다. 편지는 두 장이었다. 소미에게 쓴 것. 아라에게 쓴 것. 소미 선배. 당신이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아서 너무 슬픕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싶지만, 당신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러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악한 감정도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만 있길 바랍니다. 내가 그 글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 편지글을 다 외어버릴 지경이었다. 다음 장은 아라에게 쓴 글. 우선, 당신의 고백을 받지 못해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얼굴을 마주하고 싶고 같은 방에서 같이 자고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요. 이중인격이 쓴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글에 짜증이 솟구쳐 그냥 종이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것을 다시 주워서 파일철에 넣어 늘 그랬듯이 카펫 아래에 넣어두려다가 그냥 컴퓨터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지아의 그림을 그렸다. 지아는 환영이었으니, 항정신병제가 잘 받으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미리 그림이라도 많이 그려놓자는 생각으로 급하게 캔버스를 준비해서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지아의 이목구비는 뚜렷했다.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소미도 아라도 닮지 않았다. 누구를 닮았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림을 거의 완성하고 붓 터치가 끝날쯤에 지아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결코 비유나 과장이 아니다. 정말, 지아는 온몸이 조각조각이 나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마치 온갖 쓰레기를 모아놓고 소각하는 모습 같다. 그림을 서둘러 치웠다. 잘 마르도록 방 벽에 기대어 놓았다. 화장실에서 물감이 사라지도록 손을 씻고 카펫 아래에 놓아놓았던 종이 뭉치를 꺼냈다. 파일철이 망가질 정도로 종이들은 두툼했다. 파일철을 손으로 집고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갔다. 공동현관 앞에 있는 쓰레기장에 파일철과 종이들을 모두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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