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수행자들

2023.10.30 20:3510.30

 

1

 

숲속에서 그는 눈을 떴다. 해가 떠 있었지만 빽빽이 늘어선 시커먼 나무들 때문에 사위가 어두웠다. 두개골 안쪽에 덜렁대는 뾰족한 쇳덩이라도 있는 듯 머리가 아팠다.

상체를 일으킨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흙바닥에는 과도처럼 길쭉한 누런 밤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밤송이가 속을 까 보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권총은 낙엽 속에 묻혀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부드러운 실크로 짠 푸른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핀이 겉보기에도 꽤 고급이었다. 권총집은 따로 없었는데, 오른쪽 엉덩이가 공연히 허전한 걸 보면 그쪽 벨트에다가 끼고 다녔던 듯싶었다.

피가 난 데는 없었고 욱신거리는 데도 없었다. 뒷목이 다소 뻐근한 감이 있었으나 거동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그는 날래게 몸을 움직여 비정상적으로 커다랗고 시커먼 밤나무에 등을 대고 주변을 훑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새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헤집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코를 벌름거렸는데 흙냄새와 풀 냄새밖에는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느새 등허리에 땀이 배었다. 긴장 속에서 십여 분을 보냈다.

근처에 위협적인 대상이 아무도 없다고 확신한 그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익숙한 자세로 전방에 총을 겨눈 채.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십여 미터 넘게 자란 밤나무들뿐이었다. 땅바닥에는 머리통만 한 밤송이가 불발된 폭탄처럼 떨어져 있었다. 밤송이 역시 나무처럼 시커멓기만 했다.

길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오로지 시커먼 밤나무들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어난 자리로 다시 되돌아갔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그가 여기서 어떤 일을 당한 건지 알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바지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담배도 없었다. 담배가 생각나는 걸 보니 담배를 피웠나 보군. 자신이 흡연자였으리라 짐작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손끝을 긁히고 말았다. 그는 조심스레 물건을 빼내었다. 물건은 깨진 거울 조각이었다. 이등변삼각형 꼴로 깨진 거울 조각.

무슨 생각에선지 그는 재킷부터 와이셔츠, 바지까지 홀딱 벗었다. 구두도 벗었고 양말도 벗었다. 팬티까지 벗었다. 그러고 나서 몸 곳곳을 훑었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이윽고 그는 찾을 수 있었다. 왼쪽 엉덩이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허리를 틀어도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 도로 넣어 둔 거울 조각을 꺼내었다. 거울 조각으로 왼쪽 엉덩이를 비추었다.

 

1. 동쪽으로 가라.

2. 동굴로 들어가라.

3.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하라.

4. 임무를 마쳤을 시 신호를 보내라.

 

그는 다시 옷을 입었다. 거울 조각은 원래 자리인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권총을 두 손으로 꼭 쥔 채로 발걸음을 뗐다.

해가 지고 있었다.

 

2

 

삼십 분가량 걸었다. 해가 졌다. 보름달이 떴고 달무리가 끼었다. 밤은 빠르게 숲을 적셨다. 코앞에 뭐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무와 부딪히는 걸 조심해야 했다. 발아래 밤송이 또한 조심해야 했다. 가시가 철사처럼 단단해 구두 굽도 능히 뚫을 수 있을 성싶었다. 그는 느리게 걸으며 시야가 어둠에 익기를 기다렸다.

해가 졌지만 그는 분명하게 동쪽으로 향했다. 몸속 나침판은 정확하게 방향을 가리켰다. 방향을 잃더라도 별자리를 읽을 수 있었기에 동쪽으로 향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인기척을 느꼈다. 오십여 미터쯤 떨어져 있을까. 누군가가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별 도움 되지 않는 달빛에 의지에 느리게, 아주 느리게 동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조금 힘을 주며 걸음을 조금씩 좌측으로 옮겼다. 누군가도 그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조금씩 그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그는 자신이 훈련받은 대로 소리 죽여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이제 십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누군가도 역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았고, 그처럼 굉장히 세심하게 소리를 죽이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함께 자각했다. 그도 누군가도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인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오륙 미터쯤 떨어져 있을 때, 그는 조용히 밤나무 뒤에 숨었다. 아마 누군가 역시 밤나무 뒤에 숨었을 것이다.

부엉이가 두어 번 울었고 날갯짓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나무 위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져 턱 하고 흙바닥에 박혔다. 떨어지는 밤송이에 맞으면 즉사도 가능하겠지 싶었다. 그가 속으로 생각하고 소리 없이 실소했다.

그들은 십 분 넘게 대치했다. 숨을 쉬는 듯 마는 듯했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숨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자네도 권총 한 자루뿐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굵었다. 발음이 아주 또렷했다.

“내가 그쪽이랑 같은 훈련을 받았을까 싶은데, 동의하는가?”

그가 말했다. 숲 속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보는 것이었다.

“그럴 것 같군. 근데 훈련? 그래. 그렇겠군. 훈련을 받았겠지.”

남자의 말을 통해서 그는 자신만이 기억을 잃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방금 전 그가 한 말을 통해 남자 역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저 남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상대라는 걸 알았다. 물론 위협적이지 않은 상대는 아니었다. 그처럼 권총 한 자루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오륙 미터 앞의 저 남자는 누구보다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못 당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가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패를 꺼내보였다.

“안주머니에 거울 조각이 있었나?”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왼쪽 엉덩이.”

“첫 번째는?”

“동쪽. 두 번째는?”

“동굴. 세 번째는?”

“예수그리스도. 네 번째는 함께 말해 볼까?”

남자의 제안에 그는 셋을 세고 입을 열었다.

“신호.”

“신호.”

그와 남자는 동시에 말했다.

두 사람은 나무 뒤에서 나왔다.

경계를 풀었지만 총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남자의 미간에 총구를 겨눴고 남자 역시 그에게 총을 겨눴다. 그는 남자에게, 남자는 그에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이제 총을 내리지.”

남자가 먼저 제안했다.

“그러지. 셋을 세자고.”

그가 수락했다.

그가 오른쪽 엉덩이 부근 벨트에 권총을 끼웠다. 남자는 왼쪽 옆구리 부근 벨트에다가 권총을 끼웠다.

어두워 자세히 뜯어볼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생김새는 살필 수 있었다. 남자는 이 미터 가까이 되는 거구였고 피부가 아주 새까맸다. 피부에 비해 치아와 두 눈의 흰자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하얬다. 남자는 그처럼 검은 정장 차림을 한 채였고 붉은색 실크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반갑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기억나는 건 없나?”

그가 물었다.

“프랑스 대통령이 누구고 영국 총리가 누군지는 안다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어. 훈련을 받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다네. 보스턴의 투수가 누구인지까지도 기억하네만, 나 자신에 대해선 기억이 안 나.”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뭘까?”

남자가 혼잣말하듯 물었다.

“억양으로 봐선 프랑스 쪽 같은데. 불어를 할 줄 아나?”

“그래. 난 불어가 모국어인 거 같군. 근데 우리 지금 영어로 말하고 있나? 그러고 보니 자네는 억양으로 보나 보스턴의 투수가 누구니 하는 걸 보나 미국 쪽인데.”

남자의 말에 그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같은 의문을 품은 채, 동쪽으로.

 

3

 

그들은 또 다른 일행을 맞이했다. 키가 백팔십으로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이 미터 거구의 남자와 그런 남자와 얼추 비슷한 키의 그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했다. 새로운 일행도 역시 검은 정장 차림에 권총을 지니고 있었고 왼쪽 엉덩이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넥타이는 보라색이었다.

새로운 일행은 동양인이었는데 생김새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일행은 자신이 한국인 같다고 밝혔다.

“이렇게 셋이 되니, 이름이 필요할 것 같은데.”

프랑스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내 생각도 그래.”

그가 동의했다.

“근데 기억할 이름이 없잖나.”

한국인 새 동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강 짓지. 어쩔 수 있나.”

“뭐라고 지을 생각인가. 필? 존?”

세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이름 짓기에 골몰했다.

“모두 다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하러 가는 길인데, 이거 어떤가? 나는 마태오, 자네는 베드로, 자네는 시몬.”

그렇게 그들은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는 베드로, 프랑스 남자는 마태오, 한국인 새 동료는 시몬. 그들은 만족했다. 이 어둡고 우울한 밤나무 숲에서 그런 농담은 그들을 썩 유쾌하게 했다.

밤이 깊어갔다. 이따금 그들은 기억하는 것들을 주고받으며 오솔길 하나 없는 숲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들이 기억하는 거라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 중국과 관련된 황당한 소문 따위였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일까?”

불현듯 시몬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글쎄. 자기를 예수그리스도라고 칭하는 테러리스트이지 않을까 싶은데.”

마태오가 확신은 없는 말투로 말했다.

“혹은 우리가 테러리스트이든가.”

그가 덧붙였다.

그의 말에 마태오가 킬킬거렸다.

“일단 지령이 있으니 가는 건데, 어쩐지 옳은 일을 하러 가는 건가 의심스럽군.”

시몬은 웃음기 하나 없었다.

“어쨌든 우린 오랫동안 훈련을 받았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이 일 때문에 그렇게 오래도록 훈련을 받은 건지도 모르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 있었을 거야. 뭐 그러면 옳은 일이지 않겠나.”

그가 두서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자네 말은, 그러니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이건가?”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어쨌든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지.”

마태오가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하나 더 있지.”

그가 오른쪽 엉덩이 부근, 권총을 툭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4

 

밤이 깊어갈수록 일행이 늘었다. 마태오가 새로운 일행을 맞을 때마다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녹색 넥타이를 맨 브라질인에게는 야고보, 그와 같은 미국인―이 남자는 황갈색 넥타이를 맸다―에게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엄청난 근육질 덩어리의 러시아인에게는 유다. 새 일행들은 새로 주어진 이름을 짓궂고 익살스러운 농담이라고 여기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요한을 만났다.

“정말 자네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요한은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 근데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는 모르겠네.”

요한이 바지 주머니에서 사각형의 주먹만 한 물건을 꺼냈다. 버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돌리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끈매끈한 검은색 물건은 아주 단단해 보여서 돌로 내리찍어도 깨지지 않을 성싶었다.

“뭐,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하면 갑자기 빛이 난다든가 하지 않을까?”

유다가 팔짱을 끼며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건을 쏘아보았다.

“자네 이름은 요한이야. 요한은 예언자잖아.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지.”

뜬금없이 마태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선 유난히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의 작명 감각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요한은 요한이 되었다.

“그럴듯하군. 근데 왜 나에게만 이 물건이 있었을까?”

요한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누구 하나에게는 그게 있어야 하니까? 글쎄, 아무튼 예수그리스도인가 하는 놈을 처단하면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을까? 우리 기억도 다 돌아온다면 좋을 테고 말이야.”

안드레아가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셋, 넷, 다섯…… 일곱이나 되는 장정을 투입한 거지?”

그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글쎄. 근데 진짜 예수그리스도면 어쩔 셈인가?”

시몬이 한쪽 볼에 바람을 넣으며 되물었다.

“우리가 아는 그 예수라면, 이 말인가?”

“그래. 이천 년 전 그 예수 말일세.”

“자네 말은 그럼, 우리가 진짜 예수를 암살하기 위해 이천 년 전으로 돌려보내진 거라는 건가? 그…… 시간 여행을 해서?”

마태오가 뜨악한 표정으로 시몬을 향해 물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지. 그래서 기억도 다 잃고 말이야.”

요한이 저 혼자 말하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너무 영화를 많이 봤구만. 최근에 무슨 영화 봤나?”

유다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글쎄? 자네는 일주일 전 무슨 영화 봤는지 기억이나 나나?”

야고보가 길게 자란 손톱으로 콧등을 긁으며 되물었다.

“매트릭스 시리즈 정도는 보지 않았을까? 뭐 암튼, 일단은 동쪽으로 계속 가 봐야지 않겠나. 동굴로 들어가서 예수그리스도를 때려잡고, 그 다음엔 뭐…… 우리의 예언자께서 무슨 계시라도 받아서 저 물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게 되겠지.”

유다가 씩 웃었다.

일곱의 훈련받은 장정은 다시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에는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사위를 훑어보았다. 밤나무가 이삼 미터쯤 더 컸다. 밤송이 역시 웬만한 바위보다 더 크고 단단해 보였다.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밤톨은 갈색을 띠지 않았다. 눈꺼풀 속 어둠처럼 새카맣기만 했다. 어쩐지 밤나무가 그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나무는 그들을 경멸했다. 증오했다. 이곳은 밤나무의 세계였다. 그들은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눈을 떴을 땐 이미 밤나무의 세계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그는 연방 손을 뒤쪽으로 뻗어 권총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꺼내어 한 발, 한 발 쏘아야 할 것 같았다. 비단 그만이 그런 건 아니었다. 마태오도 시몬도, 안드레아도 유다도 요한도 그처럼 이따금씩 권총을 잡았다 이삼 초 뒤에 힘없이 놓았다.

검은 밤나무가 음산하게 웃는 악령처럼 느껴져 별안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게 확실한지 헷갈렸다. 그러나 몸속 나침판은 정확하게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밤나무가 언제 어떻게 그들을 공격할지 몰랐다. 전신주마냥 길고 단단한 줄기를 휘둘러 그들의 허리를 끊을지 몰랐다. 세탁기만 한 밤송이를 그들의 정수리에다 떨어뜨릴지 몰랐다.

그렇게 쉽게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우리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찾아 동쪽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지만 숲은 우주만큼 넓고 새벽은 오지 않는다. 거미와 뱀에게 물리고 늑대에게 쫓기며 피투성이가 된 제자들은 다리를 전다. 굶주린 이들은 허겁지겁 밤톨을 까먹지만, 강한 독소에 온몸에 개구리 알 같은 모양새의 종창이 돋고 검은 피를 토한다. 살아남은 이들도 결국엔 끝없는 여정에 미쳐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쏜다. 그리하여 검고 사악한 밤나무 숲은 제자들의 육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잠시 쉬었다 가지.”

시몬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몬도 마태오도, 그 외 다른 이들도 의문과 불쾌한 상상에 시달린 듯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론 안도했다.

“불이라도 피울 수 있으며 좋겠는데.”

요한이 말했다.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싶군. 안 그런가?”

그가 짐짓 쾌활한 말투로 마태오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모닥불도 없었고 당연히 담배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어두운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음담패설이 다소간 오가다가 말았다. 삼십여 분이 흐르자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근데 정말로 우리가 이천 년 전으로 돌려보내진 거라면 어쩔 셈인가? 우리의 타깃이 실제 그 예수라면?”

침묵을 깨고 시몬이 말했다.

“아직도 그 얘긴가? 자네는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했나보군.”

안드레아가 핀잔을 주었다.

“실제 그 예수면 어때. 처단할 새끼면 처단해야지 않겠어?”

유다가 땅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지령이 있으니…… 그리해야겠지.”

“선택의 여지도 없어 보이고.”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을까?”

“그럼 서쪽으로 달아날까.”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

“가던 길로 가야지. 별수 없다고 보네, 난.”

 

5

 

그들은 세 명의 동료를 더 얻었다. 세 명의 동료는 일찌감치 저들끼리 뭉쳤다. 저들끼리 이름도 지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처럼 12사도의 이름을 땄다. 몸집이 작지만 그만큼 날렵해 보이는 인도인은 토마, 말총머리에 금색 넥타이를 맨 영국인은 필립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그리스인은 바르톨로메오. 열 명의 훈련받은 장정은 이름이 겹치지 않았고―각기 다른 색의 넥타이처럼 겹치지 않았고 그래서 다들 놀라워했다.

“어쩌면 우리의 진짜 이름이 마태오, 베드로, 바르톨로메오일지도 모르겠군.”

마태오가 분홍빛깔 두툼한 입술을 할짝이며 말했다.

“우연은 아닌 것 같아.”

요한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두 명의 제자만 더 찾으면 되는 건가?”

“알패오의 두 아들이겠군. 야고보랑 타대오.”

“그리고 다 함께 손을 맞잡고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하러 가는 거지.”

유다가 잔인하게 웃으며 손날로 자신의 목을 슥 그었다.

열 명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원하리라 생각되던 밤이, 짙고 농밀한 어둠이 점차 걷혔다.

밤나무는 본연의 악의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더욱이 검게 보였다.

불빛이 보였다. 대략 백여 미터 앞이었다. 불빛이 있는 곳에 누군가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들을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둘 아니면 셋. 그들은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발을 내딛었다. 저마다 권총을 꺼내 들고 불빛을 향해 겨눈 채 앞으로 나아갔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검은 풀잎에 맺힌 이슬이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 잠을 설친 벌레들이 신경질적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그들의 귀를 간질였다. 무엇보다 횃불이 타는 소리가 그들의 귀를 자극했다.

쿵쿵 울리는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

난데없이 총성이 울렸다. 타앙. 그리고 한 번 더 울렸다. 타앙.

새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열 명의 장정이 각자 위치를 잡았다. 몇몇은 나무 뒤로 숨었고 몇몇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열 개의 총구가 총성이 울린 곳, 불빛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는 탄알 수를 헤아렸다. 다섯 발을 쏠 수 있었다. 일행들의 탄알 수도 그와 같다면, 총 오십 발. 그도 그렇고 일행들도 그렇고 탄알을 허투루 낭비할 사람은 아니었다.

십여 분이 흘렀다. 전방은 고요했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의 흐름은 일정했다.

“슬슬 저쪽으로 움직여 봐야 할 것 같은데.”

유다가 속삭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협적인 상황은 지나간 것도 같아. 일단 누구 하나가 먼저 저쪽을 정찰하고 오는 게 좋겠어.”

시몬이 의견을 냈다.

“내가 가지.”

그가 나섰다.

그가 세심하게 소리를 죽여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밤나무 뒤에서 밤나무 뒤로 옮겨 가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 냄새―어쩐지 익숙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이윽고 총성이 울린 곳, 횃불이 타고 있는 그곳에 도달했다. 바위 동굴이었다. 조그만 입구 오른쪽에 횃불 하나가 걸려 있었다. 입구 왼쪽에 걸려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횃불 하나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떨어진 횃불을 집어 들어 입구 왼쪽 거치대에 걸어두었다.

두 구의 시체는 모로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 다 백인이었다. 그들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연두색 넥타이를, 한 사람은 베이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자신의 관자놀이를 쏜 모양인지 한쪽 관자놀이가 새까맣게 탔다. 누인 머리에서 뇌수와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가 주변을 샅샅이 수색한 후 일행을 불렀다.

“이리로 넘어오게.”

아홉의 장정이 잔뜩 긴장한 채로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야고보와 타대오인가?”

마태오가 그에게 물었다. 물론 그에게 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야고보와 필립보, 토마와 바르톨로메오가 시커먼 동굴 안을 겨눴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작은 소리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나머지 일행은 현장을 조사했다.

“우리 동료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왜 자살했을까?”

요한이 시체를 면밀히 살피며 혼잣말했다.

“자살이 확실한가?”

유다는 시체를 향해 겨눈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누군가,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두 사람을 죽인 다음에 자살로 위장해 놓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네. 일단 몸싸움의 흔적이나 그런 게 없어. 보게나. 옷매무새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관자놀이가 까맣게 탄 게, 관자놀이에다 총구를 대고 쏜 게 분명하고 말이야.”

요한과 유다, 시몬이 시체를 관찰하는 동안 그와 안드레아는 발자국을 살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동굴에서 빠져나온 것 또한 손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보폭이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 때는 보폭이 좁았는데 동굴에서 빠져나올 때는 보폭이 넓었다. 뛰쳐나온 게 분명했다.

“동굴 안에 뭔가가 있군.”

“자살하고 싶을 만큼의 무언가가?”

“예수그리스도가 그런 존재였던가.”

“그러니까 십이 사도가 투입된 거 아니겠는가. 근데 이제 열 명밖에 남지 않았군.”

그와 안드레아가 말을 주고받았다.

“다들 여기를 보게나. 특히 요한 자네는 꼭 와서 봐야 하네.”

마태오가 소리쳤다.

열 명의 제자들이 동굴 입구 앞에 모였다. 마태오가 입구 윗부분을 가리켰다. 입구 위에는 정사각형의 네모난 홈이 보였다. 깔끔하게 깎였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인위적으로 파 놓은 홈이었다.

“요한 자네가 갖고 있는 물건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질 것 같은데.”

마태오가 말했다.

“그렇겠군.”

요한이 바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하고 나서 여기에 그 물건을 끼워 맞추면 되는 거군. 신호를 보내는 법은 이제 알겠고, 그럼 동굴 안으로 들어갈 일만 남은 건가?”

유다가 동굴 입구 안을 노려보았다.

“무턱대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앞서 들어간 두 사람은 무슨 연유에선지 도망치듯 뛰쳐나왔네. 그리고 자살했지, 두 사람 모두. 동굴 안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그가 말했다.

“그냥 지금 신호를 보내는 건 어떨까?”

말총머리의 영국인 필립보가 의견을 제시했다.

“글쎄. 임무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신호를 보내면…… 썩 결과가 좋을 것 같진 않은데.”

마태오가 말했다.

“그럼 이 두 사람의 결과는 좋고?”

시몬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열 명의 제자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6

 

밤나무들 사이에서 하얀 바윗덩이는 이질적이다 못해 이단처럼 보였다. 바윗덩이는 오 층짜리 낡은 아파트를 눕혀 놓은 정도의 크기였다. 바윗덩이 위에는 간간이 검은 흙무더기가 있었고 흙무더기에서는 검은 풀이 자랐다.

동굴은 깊어 보였다. 입구로부터 아래로, 그러니까 지하로 내려가는 듯싶었다. 엄밀히 말해서 땅굴인 셈이었다. 어쩌면 동굴은 이 숲만큼 넓을지 몰랐다.

아침 해가 밝았다.

그들은 결국 임무를 수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단, 물건을 지닌 요한은 동굴 밖에 남기로 했다. 혹여나 요한이 죽으면 물건이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 때문이었다.

“난 유다야. 유다라고. 예수의 뒤통수를 제대로 갈긴 녀석이지. 그러니 내가 선두에 서겠어.”

유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동의했다.

“그럼 유다 자네의 뒤를 내가 따르지.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배신했어. 그러니 유다 다음 가는 녀석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나?”

그가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 중 으뜸이었다. 그렇기에 뒤로 빼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유다 다음으로 베드로인 그가 따르기로 했다.

그 뒤로는 아무렇게나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베드로 뒤로 안드레아, 야고보, 필립보, 마태오, 시몬, 토마, 바르톨로메오 순으로 따랐다. 두 개의 횃불 중 하나는 선두에 선 유다가 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맨 끝에 선 바르톨로메오가 들었다.

“그럼 들어가볼까?”

유다가 씩 웃었다. 그의 눈에 유다는 꽤 긴장되어 보였다.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하러.”

시몬이 말했다.

“혹여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물건을 집어넣게나. 괜히 따라 들어오지 말고.”

마태오가 요한에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달아나게나. 동쪽 말고 서쪽으로.”

그가 끼어들었다.

“알아서 하겠네.”

요한이 웃음 지었다.

요한을 제외한 아홉의 제자가 줄지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자신의 권총을 힘주어 쥔 채. 동굴은 점점 지하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그들은 긴장을 놓지 않으며 전방을 향해―동료의 어깨 너머로 총구를 겨눴다. 바위로 이루어진 동굴은 지하로 내려가면서 흙으로 이루어진 굴로 바뀌었다. 아이 팔뚝만 한 지네가 흙을 헤집고 파먹으며 돌아다녔다.

아홉의 제자가 지하를 헤맸다. 그들은 모두 이제 곧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으리란 예감―분명 불길한 예감이었다!―에 휩싸였다. 예수그리스도를 처단할 수 있을까? 그들 모두 똑같은 의문을 품었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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