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유서

2005.08.16 22:3208.16



무대는 준비되었다.

무대는 옥상, 관객은 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는 나의 달.

떨림은 없다. 하이라이트는 단 한번.

짧은 연무를 준비하는 나의 가슴에 떨림은 없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틀린 것인지.
떨리는 손으로 글을 적는다. 이것도 옳은 일일까?

알 수는 없다. 정답이 없으니까, 언제나... 단지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걷는 방향을 확신할 뿐이다. 그리고 걷는 것을 멈추는 사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걷기를 멈추는 일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제로 멈춰지는 것과 스스로 멈추는 것에는 용기라는 약간 고무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저녁 옥상의 공기가 춥기 때문에 손이 떨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에는 내가 죽어야 했던 이유라던가, 내가 죽은 뒤에 부탁할 복수 같은 것 따위는 적혀져 있지 않다. 단지 언제부턴가 준비해야 했던 차분한 긴장만이 이 글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진부한 고사는 필요 없다. 내가 적는 것은 세 가지 이야기이다.


내가 다섯 살 때 일이었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 때가 언제였지, 하고 어머니께 이야기를 했을 때마다 조금 신경질적인 호통을 들을 수가 있었으니까. 열두 살 이후부터는 여쭤볼 수도 없었고.

가을이었다.
세상은 온통 붉고 하늘은 깊고 푸르렀다. 어렸을 적을 보냈던 조그만 도시--- 나의 작은 세상은 단풍이 우거졌었다. 큰 하늘과 작은 세상... 그것만은 다섯 살의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어간대도 기억할 수 있다.
다섯 살 기억 속의 나는 인파의 사이를 걷고 있었다. 차가운 온도, 들뜬 공기와 시장 특유의 시끌벅적한 소리... 역시 확신은 없지만 그런 곳이었던듯 싶다.

그 흐릿흐릿하고 대충 칠해놓은 유화같은 기억 속 인파 사이로, 유일히 뚜렷한 실루엣을 가진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부랑자였다. 여기저기가 구멍이 송송 뚫린 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충혈된 눈이 희번뜩하게 뜨여 있었고, 무엇 때문인지 호흡이 거칠었다.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일 만큼.
나는 갑자기 내 앞에 마주선 그 남자를 보며 놀랐지만,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그만의 특이성에 놀란 것이었다.

그 남자는 한 쪽 팔이 없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그 더러운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나의 손을 맞잡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의 손을 잡고 이끌리는대로 걸어갔었고.
그는 품 속에서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나에게 던져준 다음에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시시콜콜한 자기 한탄이었다. 나는 과자를 뜯어보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옛날에 그는 단지 성실한 학생일뿐인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여자 때문에 타락하게 되어 이 모양이 되었다고 말했다. 돈과 팔, 그리고 모든 것을 훔쳐가 버린 그 여자를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말하며 그는 남은 한 손으로 권총을 꺼내 보였다.

"어, 어때? 이이이것은 지,진짜 권총이야."

그는 퀭한 눈으로 물어왔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이거라면 저,정말로 그 년을 죽일 수 이,있지."

그는 덧붙였다. "그렇게 할까?"

왜 그랬을까, 그가 왜 나 같은 다섯 살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왜 나에게 질문을 한 걸까?

그것은 다섯 살이라는 내 나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권총이라는 위험한 장난감을 손에 넣은 부랑자는 가장 순수한 대답이란 것을 원했을지도...

나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인데도?" 그렇게 반문해오는 그의 말은 더듬지 않았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다섯 살짜리 나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혼란해 하면서 단지 사람을 죽이면 안 되요, 사람을 죽이면 안 되요 라고 반복했던 것 같다. 바보 같은 말이었지만 그 때의 나는 절충안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을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그 부랑자는 내 바보 같은 대답에도 쓸쓸한 웃음으로 마지막 말을 끝맺었다.

"꼬마야, 아,악의라는 것은. 아무런 이유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이유 따위는 나중에, 붙인 거야. 그러니 너는 악의 따위는 갖지 말거라."

그리고 그는 내 눈앞에서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쐈다.

따뜻한 피가 튀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지 붉었다. 남자는 쓰러졌지만 나는 여전히 남자의 얼굴이 서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 갑자기 더 소란스러워지고 인파가 밀려나듯 물러섰다.
경찰이 달려오고 어머니가 인파 사이에서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멍하니 그 남자의 상반신이 가리고 있던 하늘만을 쳐다보는 나를 황급히 안고서, 부랑자를 보며 외쳤다.

"어, 어떻게 이 남자가 여기에...?!"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상은 온통 붉고 하늘은 깊고 푸르렀다. 따뜻한 피, 차가운 공기. 다섯 살 가을...

나는 경찰서에서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자살 이전에 유괴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몰아가던 경찰은 신경질적으로 내가 쉬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어머니의 다급한 손길에 어린 목격자를 빼앗기고는 부랑자의 비관자살로 사건을 일단락했다.
어머니는 그 다음 날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두 살 뒤에는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래, 바로 어머니가 사라졌던 열두 살 이야기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여러 번을 호되게 얻어맞고 드디어 부랑자에 대한 화제를 꺼내지 않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

내게는 아주 친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그 녀석은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 실력은...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것이었다. 미술학원 같은 것은 다니지도 않는 녀석이 사람들과 똑 닮은 크로키를 몇 분만에 그려낸다거나, 비누로 용을 쓱싹 조각해 내던 것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 녀석과는 학교가 아니라 교회에서 만났었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이후로 나를 교회에 보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교회 안에서 만난 열두 살 동갑의 아이 둘은 금새 친해졌다.

나는 그 녀석이 분명히 유명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엄청난 재능을 봤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그 녀석에게 농담이라도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히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될 것이었다. 색맹만 아니었다면.

그 친구는 쑥쓰러운듯이 웃었다. 그림 그리는 걸 더 좋아하지만, 난 지독한 색맹이니까. 조각가나 해볼까 라고 말이다. 나는 항상 걔의 부모님이 녀석을 11시간동안 가둬두는 수학학원 대신에 미술학원에 보내주길 마음 속으로 빌었었다.

소심한 녀석답게도 그 친구는 자주 얻어맞고 다녔다. 내가 보는 눈앞에서는 그 누구도 녀석을 험담할 수는 없었지만 어디 드러내놓고 몰매를 때리는 녀석들이 있겠는가. 아이는 영악하다, 그리고 잔인하다...

당신은 초등학생의 악의를 믿는가? 그 악의가 어느 정도라고 믿는가?

이제부터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열두 살 짜리 아이들은 내 친구를 때려 죽여버렸으니까.

그 녀석이 강변에서 발견되었을 때, 심한 구타로 인해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이 얼굴이 변형되어 있었다. 둔기로 가격이라도 했는지 광대뼈가 내려앉고, 코뼈가 부러졌다. 이것은 얼굴만의 이야기이다. 온 몸에 입은 골절은 그 이상이었다. 전신골절에 어른도 견디지 못했을 타박상.

악의. 그것은 아이라서 더 지독한 것일지도 모른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나쁜 눈을 가진 까닭에 조각가를 바라던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의 꿈은 그 몸과 함께 박살나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나보고 장례식에 가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집을 뛰쳐나가 녀석의 장례식에 도착했다.
장례식은 우울하고, 슬프고, 그리고.....

신의 이름을 울부짖는 녀석의 부모가 보였다. 녀석과는 교회에서 만났었다, 녀석과 그 가족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나는 그 때 이후로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뭐가 신이야, 어디에 있어... 왜 녀석을 도와주지 않았어. 녀석은 너의 이름을 몇 번이나 외쳤어? 알고는 있어?
하늘에 가서 평안하리라는 소리는 집어쳐. 녀석은 분명 괴로워했어. 괴로워했단 말야...

나는... 어머니 말대로 이런 곳에는 오는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마지막은 처량하고 슬펐다. 신문기자들이 그 천박한 사진을 사방에서 찍어대고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가해자인 다섯 명의 아이들. 그 아이들은 어떤 벌을 받았을까?

그들에게는 아무런 처벌도 가해지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이라서 법적 처벌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퇴학 처리를 받았지만, 오히려 자랑스레 사람을 죽인 일을 떠벌리고 다녔다.

"아무도 우리를 깔볼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사람을 죽였거든."

매스컴을 타서 기쁜가, 돼지?

그 부모의 반응이라는 것도 웃겼다.

"왜 우리 애보고 그래요? 우리 아들 말 들어보니까 평소에 그 녀석, 이름이 뭐야? 어쨌거나 그 애가 시비를 걸었다는구만. 당신들도 아들 있을 것 아닙니까? 예? 금지옥엽같은 자식을 학교에서 어떻게 쫓아낼 수가 있는 거에요? 웃겨서, 원."

나는 생각했다.

당신을 정말로 웃겨주지.

나는 어머니가 나를 때릴 때 썼던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 새끼들은 내 친구를 죽인 뒤에 함께 몰려다녔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다섯 명의 아이를 알루미늄 배트로 쳐죽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어떤 벌을 받았을까?
나 또한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끔찍한 자기 혐오에 빠졌다.
어머니는 경찰서에 다녀간 다음 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의 일이다.

아이는 실로 많은 일을 거쳐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차례로 여윈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서 날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천둥이 내리쳤다. 어른이 되려던 아이는 자신의 날개가 이미 썩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는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할머니, 이 악취를 맡아봐요. 내 날개는 피어나기 전에 썩어있었어요! 이건 긴 사기극이에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하지만 그의 할머니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급히 할머니의 어깨를 다잡았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어머니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숨겨왔던 날개가 언뜻 보였다. 썩어있었다.

그는 할머니의 시체를 버리고 거리로 뛰었다. 그 곳에는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사람들만이 보였다. 그들은 형형색색의 날개를 가지고 거리를 날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날개를 저주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자신의 부모를 저주했다. 자신의 날개는 피어나면 날수록 그 추악한 자태를 드러내면서 썩은 악취를 풍겼다.

그는 날 수도 없고 단지 무거울 뿐인 날개를 부여잡고 울었다. 피를 토했다. 그는 추위를 느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경멸하듯 내려다 볼 뿐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시선들 속에서 울부짖듯이 자신의 모든 친구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가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누군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당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적지 않았을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아무것도 없다,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는 사람이 있고, 아무런 행복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결말과 이유 없는 악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 큰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음에도 그 벌이 가해지는 경우는 사실 적다는 것을.
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듯이, 인과율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의 인과를 내 어깨에 지우려고 한다.

내 결말은 어떻게 될까. 당신은 누구일까. 이 글은 누구에게 읽히고 있는 것일까.
두렵지는 않다, 두렵지는 않다.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떨리는 몸을 가누며 이제 아름다운 밤에 썩어 가는 추한 몸뚱이를 바치려 한다. 내 모든 죄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나는 내 죽음이 이유 없는 죽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죽음이 내가 저질러온 모든 죄의 부산물이 될 수 있기를.

말콤은 말했다. "자신이 죽을 때. 그 모든 공로는 신에게 바치며, ────단지 과오만이 나의 것"이라고.
나의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이 죄를 바친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무대는 옥상, 관객은 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는 나의 달.

머리 위로 스치는 바람, 심하게 흔들리는 나의 몸.

그러나 떨림은 없다. 하이라이트는 단 한번.

짧은 연무를 준비하는 나의 가슴에 떨림은 없다.

뒤집히는 하늘, 환호하는 별, 내달리는 땅바닥, 무참히 무너져내리는 나의 달.




-The End-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0 단편 이름 가명 2005.09.01 0
199 단편 진정한 美는 마음 안에. JINSUG 2005.08.30 0
198 단편 새장속의 새. JINSUG 2005.08.22 0
단편 유서 가명 2005.08.16 0
196 단편 [단편] 추억을 남기는 것은 JINSUG 2005.08.13 0
195 단편 이름갈트의 자살 chrimhilt 2005.08.08 0
194 단편 혼자1 夢影 2005.07.31 0
193 단편 일탈1 원광일 2005.07.24 0
192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소(수정)2 미소짓는독사 2005.07.20 0
191 단편 개.2 괴소년 2005.07.12 0
190 단편 검은 깃털, 하얀 날개1 pilza2 2005.07.12 0
189 단편 들개2 블루베리 2005.07.10 0
188 단편 잎글/ 순간5 amusa 2005.07.08 0
187 단편 다락방7 최인주 2005.07.05 0
186 단편 모든 꽃은 그저 꽃일 뿐이다.2 rubycrow 2005.07.02 0
185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그가 젊었던 시절1 미소짓는독사 2005.06.25 0
184 단편 임무 완수4 땅콩샌드 2005.06.24 0
183 단편 왕의 노력 다담 2005.06.23 0
182 단편 로드런너 - 꿈의 지팡이 아키 2005.06.20 0
181 단편 거울 너머로1 꼬마양 2005.06.1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