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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름갈트의 자살

2005.08.08 10:0308.08

이성도 죽음 앞에서는 우리를 배신하며, 죽음을 경멸하기는커녕
죽음이야말로 진정으로 무섭고 떨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F. 라로슈푸코(1613~1680)


모닌Monin이 죽었을 때, 나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낭만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침에는 해가 떠오르고 저녁에는 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나는 함께 있어야 하므로, 그가 명부冥府로 가면 나도 명부로 가야 한다. 그렇게 여기니 심지어 슬프지도 않았다.
동료들은 그런 내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나이든 마법사 아쉬Ashe만은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아르바체Arbarcha의 글자와 바깥 세상의 도덕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쉬는 열 다섯 살이 다 되어서야 숲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들 중에서 가장 숲 밖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쉬에게 동료 마법사들이 요청했다. 아쉬, 제발 이름갈트Irmgald 좀 설득해 주세요. 자살 하려고 하잖아요! 동료들은 내가 그를 유난히 잘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의 걱정을 견디다 못한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름갈트, 내 귀여운 요정아. 자살은 안돼. 우리들을 두고 떠나지 마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모닌도 떠났어요. 먼저 길을 나선 거죠. 나도 가야 해요. 아쉬는 한숨을 쉬었다. 난 네가 필요한데, 그래도 떠나겠니?

아쉬의 잿빛 눈동자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오, 아쉬. 저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나는 그의 노쇠한 양 팔을 잡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사방에서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매미 울음처럼 집요하게 들려왔다. 바람이 차다. 풀잎 같은 로브 자락을 더 꽉 여몄다.

내일 아침이에요, 내가 말했다. 내일 모두들 저를 배웅하기로 했어요. 아쉬도 올 거죠? 아쉬가 대답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돌아서 집으로 왔다.


유서를 적으려는데 종이가 보이질 않았다. 마법사의 집에 종이가 없다는 것은 구둣방에 가죽이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나는 한참이나 집을 뒤졌으나 양피지는커녕 얇은 닥나무 종이 한 장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깃펜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깃펜은 얌전히 유리 잉크 병에 꽂혀 있었다. 결국 종이 대신 마법 레시피 뒷장에다 유서를 남기기로 했다.
막상 펜을 들고 자리에 앉으니,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까? 나는 생각 나는 대로 썼다. 일단 집은 가장 어린 마법사인 엘가Ella에게 주기로 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고아 출신이기 때문에 숲으로 왔을 때는 가장 헐벗고 굶주린 어린 짐승 같기 마련이다. 엘가는 지금 집이 없어서 다른 마법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라면, 자신의 실험 기구와 서적과 레시피로 가득 찬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아직 여섯 살이지만 곧 가장 큰 솥을 다룰 수 있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럼, 내 솥과 약초들은? 고민 끝에 나는 그것들을 숲에서 가장 뛰어난 약사이자 마법사인 한스Hans에게 주기로 했다. 그는 기꺼이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나누고 나니, 나는 가진 것이 없었다. 로브와 속옷과 신발, 그리고 스탭staff정도는 가지고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벌의 신발이 있긴 했지만 너무 작아서 아무도 신지 못할 것이다. 아, 엘가는 신을 수 있겠군. 나는 엘가의 이름 옆에 신발을 추가했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집 안에는 음식이 없었다. 달걀이 몇 알 있었지만 이미 썩어 있었다. 모닌의 집에 너무 오래 머문 탓이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 대용으로 쓰는 짚 더미 위에 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왼쪽 팔로 목을 괴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해가 뜨자마자 들이닥친 한스는 나를 묶으려고 했다. 한스에게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하게 설명하고 이 집의 솥과 약초들은 모두 네가 가져가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나와 한스는 집 바닥에서 뒹굴었다. 나는 그의 완력을 이길 수 없었으므로 곧 떡갈나무 의자에 칭칭 묶이게 되었다.
잠시 후 한스가 집 문을 열자, 나는 이것이 한스만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집 밖에는 열 명도 넘는 마법사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동요했다. 이런 일은 옳지 않아요. 어떤 마법사도 동료를 감금할 수 없어요. 아직도 숨이 찬지 연신 씩씩거리며 한스가 대꾸했다. 틀려, 이름갈트! 미친 동료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나는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나는 지쳐서 말했다. 제발, 누가 아쉬 좀 불러다 줘요.
잠시 후 아쉬가 왔다. 나는 애원했다. 아쉬, 이 사람들 좀 말리세요. 다들 미친 것 같아요.

다행히 일은 잘 풀렸다. 아쉬는 동료들을 모아 놓고 뭔가를 한참 수군거린 뒤, 결국 그들이 자신에게 동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가 가는 길을 배웅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바라던 바였다.

나는 마법사 마을에서 30분쯤 떨어진 엘다르프Eldarf 계곡으로 갔다. 하얀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 계곡을 가득 채운 채 명랑하게 흐르고 있었다. 내 뒤를 따르던 동료들은 참꽃을 모으는 것을 도와주었다. 내가 죽기 전에,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닌을 만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곡물에 손과 얼굴을 씻었다. 아쉬는 손수 내 머리에 커다란 참꽃을 꽂아 주었다. 아릿한 향기가 났다. 품 속에서 밧줄을 꺼내 적당한 나뭇가지에 묶은 뒤 나는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쉬가 발을 받혔던 잡목을 치워주었다. 몸은 아래로 떨어졌고, 줄은 팽팽해졌다. 모닌에게서는 언제나 쟈스민 꽃 향기가 났다. 그렇다면 이제 곧 쟈스민 향기가 날 것이다. 내가 그에게 가고 있으니까. 향기를 맡으려고 숨을 들이켰다.

들이킬 수 없었다.

나는 밧줄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하지만 밧줄은 마치 쥐의 숨통을 끊는 쥐덫처럼 무서운 힘으로 목을 죄어 왔다. 나는 목이 잘려 덜렁거리는 쥐를 상상했다. 그 쥐는 발버둥치고 있었다. 목이 잘려가는 것도 모른 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머리가 뽑혀 나갈 듯 아팠고 목의 통증은 이미 상상 이상이었다. 안 돼!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모닌에게 갈 수 없어. 나는 억지로 밧줄에서 손을 놓았다. 부릅뜬 눈에서 그리 아름답던 계곡의 풍경이 음침한 빛깔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부패한 녹색, 죽어가는 흰색, 그리고 냉소하는 푸른 색. 색들은 시야를 채우고 한없이 일렁이다가 곧이어 빙글빙글 섞여 갔다. 귓가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곧 조용해졌다. 세상은, 이제 한 색깔이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영원히 죽어갈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통증. 그래. 통증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아직도 아팠다. 미친 듯 질주하던 마차가 급정차 하는 듯 무섭게 뻐근했던 심장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손발은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음처럼 차가운 입김 같은 것이 목을 관통하듯 지나갔다. 이제 주위는 오렌지 빛이었다. 붉은 섬광도 점점이 일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증이 없어졌다. 눈앞에 점멸하는 분홍빛 점들은 죽은 사람의 몸에 돋는 반점 같기도 하고 치명적인 곰팡이 같기도 했다. 아래로 떨어졌던 몸은 점점 공중으로 떠올랐다.

입김이 말했다.

『이제 고통은 끝났다.』

해골처럼 창백한 손이 내 가슴을 더듬었다.

『함께 가자.』

악취. 숨을 쉴 수 없는데도 악취가 났다. 죽음의 손은 가슴을 넘어 내 배, 그리고 그 아래까지 파고들었다. 둔탁하고 불쾌한 쾌락이 스멀스멀 전신으로 퍼졌다. 나는 생각했다. 모닌, 모닌, 모닌, 모닌.

부패가 시작된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나는 멈춰가는 심장이 처절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살려줘!”



“안 죽을 줄 알았다.”

아쉬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넌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할 앤데, 설마 목숨을 끊을까 싶었지.”

“……”

그렇다. 나는 살아났다. 동료가 머리에 흰 꽃을 꽂은 채 실실 웃으며 목을 매는 것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마법사들은 내가 고함을 지르자마자 밧줄을 끊어버렸다. 한스의 말에 의하면 나는 목을 맸고, 버둥거렸으며, 조용해지더니, 30초도 채 안 되어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봐줄 만 했어.”

그의 평이었다.

엉뚱한 소란이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드디어 내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닌이 죽은 뒤 놓쳤던 시간과 삶의 흐름을 허겁지겁 따라간 나는 드디어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걷는 모습, 그리고 생각하고 웃는 모습이 나에게 입체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들이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모닌이 있었을 때처럼 의미가 있었다.

나는 떠날 것이다. 사실 입버릇처럼 숲을 떠나겠다고 중얼거린 것은 모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없다. 나는 남겨졌고, 죽은 자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것이다.

아쉬가 물었다.

“어디로 갈 거냐?”

“……많은 곳으로.”

내가 말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 거에요.”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하겠구나.”

아쉬는 나에게 신발을 꺼내 주었다. 아쉬가 가장 좋아하던 신발이었지만, 정작 아까워서 신어보지는 못했던 새 신발이었다. 구두의 조임 쇠 위에는 작은 진주 두 개가 달랑거렸다. 나는 그 신발을 신고 산길을 갔다.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신선했다. 모든 것이 살아 있었고 죽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진주는 계속 달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모닌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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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면 번외편 비슷한 것이지만...
나름대로 완결성이 있어서 이곳에 올립니다.

이 글의 마법사에 대한 설정은 권교정 님의 만화 '헬무트'에 나오는 마법사와 흡사합니다.
몇가지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법사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
마법사가 될 아이는 마을에서 데려오는데 대부분 고아이다.
마법은 초능력보다는 약학, 과학, 물리학에 가깝다.

아, 그리고 이름갈트라는 이름도 '헬무트'에서 사용된 것이에요.
마법사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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