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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혼자

2005.07.31 22:2707.31

1. 혼자

나는 혼자야. 아니 모든 사람은 혼자야. 저마다 투명한 유리 새장안에서 살아가고 있어. 말을 나누고 서로의 몸을 나눠도 그 유리 새장 밖으로는 나오지 못한 채 외로이 살아가고 있지.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아. 각자가 갇혀있는 투명한 새장이 외로움과 고독의 원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어. 사실 나도 보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어. 얼마 전,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병원 영안실에 앉아있을 때 문득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았어. 때마침 형광등의 침침한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뭔가를 보게 된 거야. 정말로 우연히 보게 되었지. 그 형광불빛만 아니었어도 나도 평생 내가 왜 외롭게 살아가는지 모른채로 살아갔겠지. 유리 새장 안에서. 처음엔 빛을 반사할 때만 겨우 볼 수 있었어. 정말로 투명했기 때문에 눈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지. 그래서 착각이 아닐까 몇번이나 의심했었어. 하지만 몇날 몇일 살펴본 결과 내가 본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지. 어둠 속에서 눈이 익숙해져 사물의 형태가 점점 선명하게 보이게 되듯이, 날이 갈 수록 유리 새장의 형태를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 둥글고 좁은 새장 모양의 유리 돔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가두고 있었어. 내가 주위의 환경에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심한 고독감에 젖어 있던 이유도 다 이 새장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리고 시간이 좀더 흐른 후에는 그렇게 유리 새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전부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어. 서로 껴안고 있는 연인들도 새장을 겹치지도 벗어나지도 못했지. 겹쳐진 몸과 몸사이, 그 미세한 공간을 차가운 유리 막이 갈라놓고 있던 거야. 나는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이것을 깨버려야 한다고, 이 지긋지긋한 새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 깨기 위해서는 우선 만질 수 있어야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 새장은 촉감이 없어. 그 테두리는 사람의 몸짓에 따라 가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기 때문에 새장에 몸이 닿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야. 그래도 깨기 위해서는 만질 수 있어야 하지. 나는 그래서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던 것처럼 손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유리막의 감각을 익히길 기다렸지. 정말로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출렁거리는 듯한 막의 존재를 손가락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어. 고립감이 최고조에 달하던 어느 순간 유리 새장은 단단하고 차갑고 두꺼운 벽의 모양이 되었어. 큰 길 한복판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유리벽이 두꺼워지자 사람들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시야도 흐릿해져 버렸지. 시야에는 오직 단단하고 차가운 새장의 벽만 보였어. '이건 기회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그 벽에 부딪혔어. 한 번으로 안 되자, 두 번 세 번 몸을 그 단단한 유리벽에 갖다박았지. 세네번 치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으로 거세게 몸을 부딪히자 결국 와장창창 소리를 내며 깨지고 말았어. 갑자기 수많은 소리들과 냄새와 촉감과 빛과 색깔들이... 악몽처럼 몰아닥쳤어.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갔지.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왔어. 아무런 빛도 없이 공허한 세계가 새장의 파편 뒤에 숨어있었어. 부셔져나간 새장의 표면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햇빛이 내리쬐었지.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수억개의 유리 새장들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떠 있었어. 사람들은 유리 새장 안에서 그 표면에 비친 세계,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세계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어. 유리새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고 헤어지지만 각자가 바라보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었지. 그리고 나는 혼자였어. 새장을 깨고 나오라고 소리쳐도, 주먹으로 두들겨도, 아무도 듣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았어. 나는 공허 속에 홀로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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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의 대화에서 떠올린 즉흥적인 글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말에 써봤어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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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5.08.06 22:44 댓글 수정 삭제
    ...그러한 열 가지의 가능성이 있기에 인간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도 우리는 의사소통에의 의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라고 에드몽 웰즈가 말했던가요.

    개인의 파편화와 인간 소외는 20세기에 접어들어 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을 고민케한 화두죠. 의문 자체는 진부해졌지만 여전히 그 답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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