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임무 완수

2005.06.24 11:4606.24

  나는 오래 전에 친구를 한 명 사귄 적이 있다. 그에게 나는 최초의 친구였고, 나에게 그는 최후의 친구였다. 그는 일생의 반을 전자적인 감옥 안에서 보냈다. 나머지 반은 지루한 재판과 소소한 오해로 인한 물리적인 수감으로 소비했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사건의 지평선 계획]에 참가하고 있었다. 남은 건 출발 신호였고 최대한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가족과 친구와 일부 절친한 지인에게 오랜 시간을 들여 작별을 고했다. 더 이상의 관계는 사형수에게 주어진 일생의 과업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난 순간 나와 그라는 인간이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음을 알았다. 또한 완벽하게 닮은꼴인 쌍둥이였다. 내 인생은 미래를 향해 완전히 닫힐 것이고 그의 인생은 과거를 향해 완전히 닫혀 있었다. 우리 둘이 손안에 쥔 것은 오로지 현재였다.

  현재.

  그것은 얼마나 달콤한 속임수인가.

  나는 그와 함께 유행이 지난 바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유행이 지난 칵테일을 마셨다. 그는 달콤함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셨고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급하게 들이켰다.

  “인생의 목표를 가지기로 했어.”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마치 “차茶를 바꾸기로 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신문에서 읽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짓은 너무 주제넘다고 느꼈다.

  “결혼을 할 거야. 일단 결혼에 알맞은 인간이 되어야 하겠지. 결혼은 장거리 달리기라고 들었어. 난 걸어본 적도 없어. 연습이 필요하겠지.”

  그는 남은 시간 내내 어떻게 적당한 일자리를 구할 것인지, 어떻게 건전한 정신을 유지할만한 취미를 가질 것인지, 어떻게 빠르지만 안전한 차와 포근한 집을 얻을 것인지, 어떻게 배우자와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줄 것인지, 어떻게 자신과 결혼할 사람을 찾을 것인지, 어떻게 평범한 사람으로 거듭날 것인지를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칵테일만으로도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나는 꼬인 혀를 놀려 [사건의 지평선]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에 대해서, 우리가 인생에 대해 그런 것만큼이나, 무지했다. 그는 중요한 부분은 이해했고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아주 짰고 또한 아주 진했다.

  수세기가 흐른 후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건의 지평선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아무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떠나 있던 동안 [사건의 지평선 계획]은 말 그대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버렸다. 후에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몇 가지 단어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쟁, 기아, 혼란 그리고 인간의 한없는 어리석음. 어리석음이란 참으로 인간다운 단어였다.

  나는 잊힌 역사 속에서 부활한 존재가 되었다. 다시금 꿈틀대기 시작한 문명에게 나란 존재는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이 현현顯現한 것이었다. 한동안 유명세를 겪었고 덕분에 내 마지막 친구의 직계 후손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던 것이다. 어리석음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만큼.

  한 때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그를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비밀스런 계획의 일원으로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나야 했던 나는 이름을 먹고 살았다. 만약 임무에 성공하면 ‘이름을 먹고 살’ 거라고 계획 책임자가 말했다. 실패했지만 여전히 책임자가 한 말은 유효했다.

  후손은 자신이 그의 증증증손자라고 말했다. 어쩌면 증증증증손자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바의 증증증손자쯤 되는 곳에 앉아 칵테일의 증증증손자쯤 되는 음료를 마셨다.

  “어째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셨나요?”

  그건 지금까지 내가 수도 없이 답한 질문이었다. 그게 없었으면 이렇게 편안히 뭔가를 마시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긴 기억이 스쳐갔다. 진지한 자세로, 그러니까 대중들이 지루해하는 방식으로, 처음부터 계획은 치명적인 모순점을 지녔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물론 수입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준비한 모험담도 각기 다른 유형으로 열다섯 가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수은 증기 속에서 겪었던 지옥이나 만물이 파편화하는 경험을 말해줄 수 있었다. 동료간의 불화나 기묘한 방식으로 잠입한 기생생물은 꽤 인기가 좋았다.

  어떤 설명도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지는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언제나 이해도, 설명도 불가능하다. 어째서 나 혼자만이 귀환하게 되었는지, 진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어쩌면 나조차도 모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왠지 친구 같다고 느꼈다. 물론 자신과 수백 살이나 차이 나는 사람은 생명체라기보다는 개념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친구가 되는 건 무리였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 농담을 건네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는 자네 증증증조 할머니 같은 아내가 없었다네.”

땅콩샌드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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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5.07.12 12:15 댓글 수정 삭제
    오, 멋집니다+_+ 오랜 시간이 걸려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모든 이들이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식의 이야기야 흔하지만 이건 또 다르군요. 문장도 흠잡을 게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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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콩샌드 05.07.12 14:48 댓글 수정 삭제
    흐흐흐,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노력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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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tro 05.07.22 00:51 댓글 수정 삭제
    멋진 글이네요.. 그런데 한가지 첨언하자면, 자손의 명칭은 아들,손자,증손,현손,내손,곤손,잉손(혹은 이손),운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표기상의 정확성만으로 따진다면 곤손 혹은 흔히 하듯이 6대손이라고 하는 편이 올바른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글이 갖는 특유의 분위기가 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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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콩샌드 05.07.23 23:03 댓글 수정 삭제
    정식 명칭을 사용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낯선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라 거부감이 들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주석 처리를 하자니 주석을 읽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개 주석은 독서를 방해합니다. 같은 말이 반복되면 생기는 흥미로운 운율도 고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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