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거울 너머로

2005.06.16 01:0706.16



강 한가운데쯤으로 나올 때까지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대느라 다리가 뻐근했다. 강둑이 멀어지고 강 한가운데로 나오자 살짝 긴장이 된다. 벌써 등에는 땀이 찼다. 페달을 돌리던 발을 떼고 다리를 쭈욱 뻗으려 했다. 좁은 배 안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가만히 멈추어 땀을 식히고 있으려니 배를 흔드는 물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물결에 따라 머리를 갸웃거리는 오리의 뒤통수가 우스꽝스럽다. 아까 아저씨가 고래 모양 배를 타라고 했지만 나는 오리가 더 귀여워서 오리배를 달라고 했다. 오빤 무슨 배를 탔었을까. 저쪽에서 멀리 나가지 말라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보이곤 강물에 손을 적셨다. 몇 번 더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다 내가 계속 딴청을 피우며 물장난을 하자 잠잠해졌다. 뱃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가만히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물결이 넘실거리며 뱃전을 쓰다듬고 있었고 오빠의 얼굴도 넘실거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물 위에서 흔들리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그건 오빠의 얼굴이었다.


*      *      *


어렸을 적에 오빠와 나는 항상 함께였다. 함께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5살일 때에 아버지는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애써 기억 속을 파내려가 보면 내 볼을 감싸는 거칠고 커다란 손만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빚과 우리들 때문에 힘들게 일을 하셔야 했다. 새벽에 어시장에 나가시고 한밤중이 되어야 들어오시곤 했다. 잠결에 좁은 방안에 들어오셔서 부스럭거리며 비린내를 풍기는 어머니의 냄새를 맡으며 잠들곤 했다. 아직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생선 냄새가 나고 생선 냄새를 맡으면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그 동안 텅 빈 집안에는 항상 우리 남매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 둘이서 밥을 챙겨 먹고 둘이 학교 가고 둘이 놀러다녔다. 우리 마을은 집 몇 채가 손에 꼽을 정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라고 부르기가 조금 민망한 작은 어촌이었다. 마을에는 우리 또래가 없고 학교에 가려면 거의 한 시간이나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항상 우리 둘만 놀았다. 바다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해수욕하기에는 좋은 백사장이 아니고 온통 거친 바위뿐이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놀았다. 우리 발의 상처는 아물 날이 없었지만 마냥 즐거웠다. 파도를 헤치며 헤엄을 치고 불가사리와 조개를 주웠다. 낚시를 한다고 직접 핀을 구부려 낚싯바늘을 만들고 찌와 낚싯대를 만들어 정말로 보리멸 따위의 작은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는 우리만의 보물을 발견했다. 우린 해안가 절벽 아래에서 예전처럼 게를 잡고 있었다. 평소보다 너무 게가 눈에 띄질 않아서 우린 좀 더 멀리 나갔다. 그런데 내 눈에 띄는 이상한 물체가 있었다.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다른 검은 바위들과는 다르게 희끄무레한 바위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오빠! 저기 좀 봐봐! 저게 뭐지?”

내가 소리치자 오빠는 이내 그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거 밴데? 근데 왜 여기 엎어져 있을까?”

작은 배가 흰 배를 드러내고 엎어져 있었다.

“우와, 우리 바다에 띄워서 타보자.”

나는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매우 작고 엉성한 쪽배였지만 어린 아이 둘이 뒤집기에는 힘겨웠다. 며칠동안 둘이 달라붙어 안간힘을 써 보다가 포기하려고 했다. 한동안 나는 배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며칠 뒤 오빠가 배 있는 데로 가자고 했다. 오빠의 손에는 어디선가 구해온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또 배 뒤집어 보려고? 계속 해봐도 안됐잖아. 우리 둘이선 안돼. 어른들한테 말해서 뒤집어 달라고 하자.”

내가 불평했다.

“안돼! 어른들이 보면 뺏기게 된단 말야. 너 우리 배 뺏기고 싶어? 오늘은 꼭 뒤집을 수 있어. 오빠가 방법을 알아.”

나도 ‘우리’ 배를 뺏기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새삼스레 무슨 방법을 알아왔을까? 오빠가 쇠파이프를 배 밑에 쑤셔 넣더니 중간에 돌을 끼워 넣고 쇠파이프를 내리누르자 배가 조금 움직였다!

“이야! 너무 대단하다! 우리 오빠 천재야!”

“뭘 이런걸 가지고 천재라고 그러냐. 천재는 이런 데에 쓰는 말이 아냐. 그리고 이건 학년이 올라가면 다 배우는 거야.”

둘이 달라붙어서도 못 움직였던 배를 움직인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말하는 것이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오빠가 배워온 지렛대의 원리라는 녀석을 사용해서 배를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어도 역시 완전히 뒤집기는 힘들었다. 간신히 뒤집어서 바다에 띄워놓고 보니 하도 오래되어 여기저기 땜질을 해 놓은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성치 않아서 물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우리는 그 배를 바위 틈새에 교묘히 숨겨놓고서 우리끼리만 몰래 꺼내 탔다.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다. 혹시 누구에라도 말하면 빼앗길까 소중히 우리만의 비밀을 간직했다. 우리 남매는 어머니에게도 이 사실을 꼭꼭 숨겼다.

배를 탈 때에는 커다란 바가지 하나를 들고 타는 것이 필수였다. 한 사람은 노를 젓고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바가지로 물을 퍼냈다. 우리는 이 배로 바닷가 가까이에 있는 작은 바위섬에 가서 놀았다. 멀리 떠 있는 이 섬은 주먹만하게 보였다. 섬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어른들이 헤엄쳐 가면 숨 가쁘게 도착할 수 있는 그런 거리였지만 아무 어른도 그 작은 섬에 힘겹게 헤엄쳐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빠는 어른이 되면 꼭 그 섬에 가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우리의 소중한 쪽배 덕분에 어른이 되기 전에 바위섬에 가볼 수 있게 된 것이다! 30분 정도 노를 저어 가면 그 섬에 갈 수 있었다. 내가 물을 열심히 퍼내고 있으면 오빠는 노를 저었다. 한참 노를 젓다가 힘이 빠지면 교대를 했다. 나는 조금만 저어도 금방 힘이 빠져서 다시 오빠랑 바꾸곤 했다. 그렇게 다섯 번 바꾸면 바위섬에 도착했다.



바위섬은 우리 둘만의 낙원이 되었다. 그곳에는 육지에서보다 훨씬 큰 게들이 우글우글했고 홍합도 잔뜩 널려 있었다. 게를 잔뜩 잡아다 어머니한테 가져다 드렸다. 놀라시면서 어디서 이렇게 많이 잡아왔냐고 물으시면 우린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며 킬킬대기만 했다. 우린 바위섬에다 작은 집도 지었다. 널빤지를 주워다가 하나씩 배에 실어 날랐다. 바람만 불면 금세라도 훅 날아갈 것만 같은 허술한 집이었지만 우린 너무 행복했다. 짚단으로 지은 아기돼지의 집은 늑대가 부는 바람에 날아갔다지만 우리 섬에 늑대 따위는 없었다. 학교가 마치면 가방을 집에 던져두고 나가서 배를 저어 섬으로 갔다. 섬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육지로 돌아와서 어두침침한 형광등 밑에 삐걱거리는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하며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다. 우리 배, 우리 섬, 우리 비밀은 외로운 바닷가 마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낙이었다. 아름다운 비밀은 우리를 하루 종일 행복하게 했다. 난 아직도 행복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작은 쪽배와 바위섬이 생각난다.



어느 흐린 날이었다. 역시 그때도 우린 섬으로 나갔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높아 배를 저어 가기가 힘들었지만 우리가 기르는 병아리가 바위섬의 작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루도 빼먹을 수는 없었다. 섬에서 놀고 있는 동안에 하늘에 까만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이제 돌아가자. 하늘 새까매진 것 좀 봐. 비 내리기 전에 어서 가야지.”

오빠의 재촉에 나는 마지못해 병아리와 헤어져야 했다.

“으악! 바가지가 어딨지?”

배로 달려갔던 오빠가 외쳤다.

“바가지! 바가지 없어! 너 바가지 어디다 둔거야?”

“배에 없어? 나 배에 놔뒀는데…….”

아무리 근처를 뒤지고 작은 섬 안을 헤쳐 보아도 바가지는 나오지 않았다.

“오빠. 어떡해. 바가지가 바람에 날아갔나봐.”

나는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울먹였다. 콰쾅! 때마침 무섭게 내리치는 천둥 소리에 기어이 울음이 터져 버렸다.

“괜찮아. 오빠가 최대한 빨리 저어가면 돼. 배 가라앉기 전에 갈 수 있어.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린데 뭘…….”

오빠가 늠름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번쩍! 번개가 순간 사방을 환하게 했다. 한낮이었는데도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더 이상 늑장을 부릴 순 없었다. 오빠의 손에 이끌려 배에 탔다. 오빠는 배를 밀며 철벅거리며 달리다가 배에 뛰어올랐다. 배가 크게 휘청거려 하마터면 뒤집어질 뻔 했다. 난 겁에 질려 뱃전을 꽉 붙잡았다. 오빠는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힘을 쓰느라 얼굴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렇게 무서운 오빠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뭐해! 물 퍼내지 않고! 손으로라도 퍼내!”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이 어느새 바닥은 물로 찰박거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허둥대며 물을 퍼냈다. 그러나 물은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버리고 퍼내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빠가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높은 파도 때문에 배는 잘 나가지 않았다. 그때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느껴졌다.

“안돼! 제발. 하느님 도와주세요!”

나는 울부짖으며 물을 퍼냈다. 태풍이 몰고 온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사방은 어둠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파도는 바다가 집어삼키려는 악랄한 손아귀처럼 뱃전을 넘어왔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작은 배 속에서 우리는 겁에 질려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미친 듯이 노를 젓고 물을 퍼냈다.

번쩍! 다시 한번 번개가 세상을 비췄다. 검고 날카로운 파도 사이에 기울어 있는 작은 쪽배와 얼굴을 일그러뜨린 오빠의 표정이 순식간에 눈 안에 박히고 사라졌다. 콰과쾅! 잠시 뒤 배를 부셔버릴 것만 같은 커다란 천둥소리가 바다를 울렸다.

물은 배에 반 정도 찼다. 그러나 아직 육지까지는 반도 채 저어가지 못했다. 여기까지 저어 온 것만도 영원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얼마나 더 저어가야 할까. 정신이 아득해지며 주위의 사물이 내게서 멀어져갔다.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의 소리는 머나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쏟아지는 비는 천천히 낙하했고 오빠의 노 젓는 동작도 멈추는 듯 느려졌다. 뱃바닥에 부딪혀 여기저기 상처난 손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 눈 안에는 점점 차오르는 배 안의 물이 가득 차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고막을 찢을 듯 하던 폭풍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고 머릿속에는 내 심장의 고동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 뛰며 배 안에 물을 채워 올리는 듯 했다.

시간은 거기서 멈추는 듯 했다. 모든 사물도 거기서 멈추는 듯 했다. 휘몰아치던 비바람도 높은 파도도 기울어진 배도 일그러진 오빠의 얼굴도 물에 담근 내 손바닥도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 안에 가득 들어온 것은 일렁이는 내 얼굴이었다. 내 얼굴? 지금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천천히 일렁이며 내게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얼굴 뒤로는 뿌연 하늘이 흔들리며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내 얼굴은 일렁이고 흔들려가며 천천히 오빠의 얼굴로 변했다. 가만히 그런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내가 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빠는 내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오빠의 자그맣지만 억센 손에 끌어올려 물 밖으로 나왔다. 적막은 깨지고 다시금 폭풍우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배는 뒤집어져 있었고 오빠는 한쪽 손으로는 물에 빠진 나를 붙잡고 다른 쪽 손으로는 필사적으로 뒤집어진 배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아득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우린 배를 잡고 얼마간 떠다녔고 폭풍우에 육지로 대피하던 어선에 구조되었다. 우린 다시는 그 섬에 가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작은 마을을 떠나 읍내로 이사를 갔다. 이제 한 시간이나 걸어서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중학교에 들어갔고 고등학교를 다녔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오빠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도시에 나가 일했다.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진 후로는 우리 둘 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나는 매달 조금씩 오빠가 보내주는 돈으로 어머니 간호를 하고 학교를 다녔다. 우리는 그렇게 조심스레 세월을 보냈다. 오빠는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돈과 함께 짧은 편지를 보내왔다. 아니, 단 한번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건 어머니의 장례식 때였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는 도시로 올라가 대학생이 되었다. 집도 없이 건설현장을 계속 따라다니며 이곳저곳에서 일해 왔던 오빠 덕분에 방 두칸짜리 작은 집에 들어갈 세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오빠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올라갈 즈음 일을 그만두고 무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빠는 방에 며칠씩 처박혀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밖에 나갈 때에도 오빠 방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오빠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은지야. 니가 들여다보고 있는 거울 안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그때 나는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빠, 무슨 말이야? 당연히 거울에는 내가 비치고 있지.”

“아냐. 그건 너 자신이 아니야. 너와 똑같은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이지. 그 존재는 너와는 다르단 말이야.”

“에이~ 그런게 어딨어. 그럼 오빠는 거울 보면서 다른 사람 쳐다보는거야?”

“응.”

“그래? 오빠 재밌어졌네.”

나는 계속 책을 들여다보며 피식 웃고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오빠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며칠간 나오지 않았다. 며칠 뒤에 초췌한 모습으로 방을 나온 오빠는 다시 이상한 소리를 했다.

“거울 안의 너는 니가 아니야!”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는 오빠한테 놀라서 톡 쏘아붙였다.

“깜짝이야! 도대체 무슨 이상한 소리야! 자꾸 왜 거울 타령이야!”

“우리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거울은 우리를 비추고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세상을 비추고 있는 거라고! 우리와 똑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거야.”

“도대체 오빠 왜 그래?”

“내 말 못 믿겠지? 그래도 조금만 생각해봐. 내가 증거를 보여 줄께. 너 오늘 이를 닦으면서 거울을 봤지? 너 어느쪽 손으로 이 닦어?”

오빠의 이상한 행동에 맞장구쳐주기는 싫었지만 이제는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나 오른손잡이니까 당연히 오른손이지.”

“그렇지? 그런데 거울 안의 너는 어느쪽 손으로 이를 닦았어?”

“당연히 그것도 오른손이지.”

“아니야! 그건 니가 볼때 오른손이지 사실은 왼손이란 말야! 자. 봐봐. 내가 지금 이 연필을 오른손으로 쥐었다. 그런데 니가 볼때는 왼쪽이지? 니가 거울을 마주보는 것처럼 보려면 내가 이 연필을 나의 왼손에 쥐어야 해. 그럼 니가 보기에는 오른쪽에 연필이 있지?”

오빠는 옆의 책상에서 연필을 쥐어들고 왼손, 오른손으로 열심히 옮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무슨 말 하려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거울에서 반대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하긴! 전혀 당연하지 않아. 모든 것이 반대로 보여야 한다면 왜 위, 아래는 거꾸로 비쳐지지 않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잠깐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그건 눈이 양 옆으로 달려 있어서 그래. 수평으로 달려 있는 눈이 서로 반대쪽 영상을 보니까 그런 걸꺼야.”

“답답하긴! 그럼 한쪽 눈만 감고 거울을 봐라. 그런다고 반대로 비친 게 제대로 돌아오냐? 아니면 고개를 90도로 기울여서 네 눈을 위, 아래 이렇게 수직으로 세워서 보던지. 그러면 좌우가 반대로 되는 게 아니라 상하가 반대로 보이기라도 해?”

“됐어. 이제 미친 소리 좀 그만 해!”

더 이상 이런 멍청한 대화에 성질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오빠의 행동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주된 헛소리의 내용은 거울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기가 거울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고 하는 거였다. 우리와 똑같지만 반대의 성질을 가진 세상이 거울 너머에 있다고 했다. 모든 반사되는 표면은 각각 다른 세상을 비추고 있는 거라고 했다. 깨진 거울 조각, 숟가락, 심지어 대야에 담겨 있는 물까지도 각각 다른 수많은 세상들을 우리 세계에 비추어 주고 있다고 떠들었다.

나는 오빠의 이상한 행동을 신경 쓸 여유가 나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공부를 하느라 항상 바빴다. 쉽지는 않은 나날들이었지만 열심히 살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에 나는 다시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일들로 다시 찾아온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오빠가 사라졌다. 처음 며칠간은 평소처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퍼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 보아도 굳게 잠긴 문 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열쇠공을 불러 방문을 따고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방 안에는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방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두어번 눈을 껌벅이기만 하면서 상황 판단을 해보려고 했다. 한계가 보이지 않는 것에 더불어 수많은 내가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내가 사방으로 줄을 서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방안의 모든 벽은 거울로 도배되어 있었다. 심지어 바닥과 천장까지도 거울로 되어 있었다. 모든 거울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거울 안에 비친 ‘나’들이 아주 멀리까지 별로 흐려지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꽤 고급 거울들인 것 같았다. 이음새와 모서리를 얼마나 매끈하게 이어 붙였는지 자세히 손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사실은 별로 크지 않은 방이었지만 거울로 인해 한계가 없이 넓어 보였다.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한계가 보이질 않았고 내가 끝도 없이 하늘로 솟고 땅으로 뻗고 있었다. 천장의 거울에 붙어 있는 형광등 두개에서 나오는 빛은 이리저리 반사되고 반사되어 방 안은 아주 환했다. 그 어느 거울에도 오빠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인상착의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가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무언가를 찾는 것 같더니 경찰서로 나와 보라고 한다. 허둥지둥 나갈 준비를 하고 경찰서로 달려갔다. 담당 경찰관이 권하는 자리에 엉덩이 끝을 걸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게 하더니 구석의 캐비닛에서 바구니를 꺼내 온다. 바구니 안에는 가방이 들어 있었다. 오빠가 메고 다녔던 배낭이다.

“실종자가 평소에 하늘색 배낭을 메고 다녔다고 하셨죠. 이것 맞습니까?”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니 오빠가 항상 들고 다니던 책이 있다. ‘우주의 끄트머리’

“네, 맞아요. 이, 이거……, 어디서 발견하셨죠? 우리 오빠는 어디 있나요?”

다급한 마음에 더듬거려졌다. 경찰관은 후우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바로 말씀드리죠. 이 가방의 주인은 강에 투신했습니다. 6월 25일. 그러니까 일주일 약간 넘었네요. 그날 오후에 강에 투신했답니다. 놀이배를 혼자 타고 있다가 투신했다고 합니다. 메고 있던 배낭과 구명조끼를 벗어놓고 빠진 걸로 보아 자살로 봐야 맞겠죠. 이틀간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안타깝게도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      *      *



“시체가 나올 리 없지. 오빠는 왼손으로 이를 닦는 세계에 간 거니까.”

수면에 비친 오빠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뱃전 밖으로 몸을 기울여 흔들리는 수면을 더 휘저어 얼굴을 지워 버렸다. 얼굴은 금방 다시 나타나 나를 마주보며 흔들리고 있다.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니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검은 물 속으로는 강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물 위로 푸른 하늘만 비쳐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도 오빠의 방 천장처럼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햇빛과 강물이 눈부시게 반사하는 햇빛에 눈이 멀 지경이다.

다시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끼릭끼릭. 페달을 밟아 천천히 배를 강변 쪽으로 몰아갔다. 이 배는 물을 퍼내야 할 필요도, 오빠가 만든 조잡한 노로 힘들게 저을 필요도 없군. 그나저나 우리 섬에서 병아리는 잘 크고 있을까…….

꼬마양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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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5.07.13 14:01 댓글 수정 삭제
    이런 퀄리티 높은 글을 볼 때마다 애석합니다. 댓글이라도 여럿 달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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