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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퍼스트 컨택트

2022.03.13 07:3003.13

22세기 중반. 마침내 미국의 한 연구팀이 타임머신을 개발했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지름길’을 이용하는 게 타임머신의 원리였다. 과거에 간섭하지 않고 관측만 하기 위한 나노머신의 개발도 완료되었다.
연구진은 세계사의 중요한 현장들을 관측하고 싶었지만 각 나라의 정부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것은 미국 정부의 입장도 똑같았다. 특히 1963년만은 절대 안 된다고.
“리 하비 오즈월드! 윌리엄 걸!”
연구진 중 한 명이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하는 수 없이 연구진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를 관측한다’는 비교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임무를 위해 30만 년 전으로 나노머신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나노머신에는 연구진이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광경이 찍혀 있었다. 30만 년 전에는 원시시대가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괄태충의 문명이 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 더 30만 년 전으로 나노머신을 보내봤지만 과거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더 최근으로 나노머신을 보내본 결과, BC28만 년부터는 괄태충 문명이 갑자기 소멸하기라도 한 듯 원시시대가 펼쳐진 것을 관측할 수 있었다.
연구진은 이 사실이 발표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자수했다. 진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미국보다 50년 먼저 러시아가 타임머신을 개발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자랑할 생각에 득의양양했으나 개발 직후 사고가 발생했다. ‘인간을 죽이는 게 진정한 친환경’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입에 달고 살던 한 에코파시스트 연구원이 타임머신을 타고 30만 년 전으로 가서 태동기의 호모 사피엔스를 전부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멸종한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괄태충이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잠깐, 타임 패러독스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인류가 멸종했다면 저희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겁니까?”
반 년 마다 백투더퓨처 시리즈를 정주행하는 미국 연구진이 물었다. 러시아 연구진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 누구도 몰랐던 물리법칙이 에코파시스트를 도왔습니다. 아니, ‘누구도 몰랐던’이란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오히려 너무도 유명한 물리법칙이라 해야 옳을까요?”
그 물리법칙은 이것이다. ‘정보를 가진 물체나 정보 그 자체는 진공 속의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체감할 수 없어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지구는 항상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범우주적 계산에서 큰 의미가 없었기에 제외하고서도,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는 은하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데 이 공전 속도가 70만km/h이다. 태양계가 속해있는 은하단이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속도는 그보다 더 빠른 210만km/h.
둘을 합치면 지구는 하루에만 6720만km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속도로 30만 년 동안 움직이면 그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현재 지구의 위치는 30만 년 전의 지구가 30만 년 동안 움직여야 도달할 수 있는 위치다.
정보를 가진 물체나 정보 그 자체는 진공 속의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그 법칙은 ‘과거개변’이라는 정보 덩어리에도 작용했다.
여러 차례의 관측 결과 과거개변은 광속과 같은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km. 약 385일 전의 과거를 바꾸면 그 개변이 현재에 적용되기까지 하루가 걸린다.
그 계산식을 얻었을 때 인류는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한 에코파시스트가 30만 년 전에 굴린 눈덩이가 현재에 도달하기까지 730년이 남았다는 것을.
그리고 인류는 두 가지 선택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한 번 더 과거를 바꾸느냐 마느냐.
다시 30만 년 전으로 가서 호모 사피엔스를 지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괄태충 문명이 사라진다. 역사상 단 한 명만이 저지른 수준의 제노사이드가 또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두 갈림길 앞에서, 인류는 고귀한 길을 선택했다.
인류는 종말을 받아들였다.
언제 멸망할지를 알게 되자 그때부터 인류는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인류는 타임머신을 이용해 괄태충 문명과 정식으로 교류했다.  괄태충은 인류가 처음으로 만난 지성생명체였고, 독자적인 문명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인류로서는 새로운 기술을 전달하면 1년 만에 385년 치의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인류는 730년 간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오늘이구나.”
지구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멸망은 빠르게 찾아왔다. 단어 그대로 빛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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