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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길앞잡이 팬데믹

2022.03.04 21:0703.04

길앞잡이는 딱정벌레목 길앞잡이과의 곤충이며 영어로는 타이거 비틀(Tiger beetle)이라고 불린다. 산길을 따라 앞으로 날아다니는 행태를 반복하는 특유의 습성이 마치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여 길앞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아무래도 좋은 정보고 이 곤충한테는 정말로 치명적이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길앞잡이의 특성 중에 이 점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들었습니다.”

, 맞습니다. 딱정벌레도 물론이지만 이 길앞잡이가 굉장히 성욕이 왕성한 곤충이거든요. 짝짓기 시기가 되면 그야말로 폭군이라 해도 무방하죠.”

지금 TV에서는 길앞잡이의 생태에 관한 교양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평소에 이런 프로그램은 거들떠도 안 보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때로는 성욕이 너무 지나쳐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다고.”

그렇죠. 이들은 워낙 움직임이 빨라 시신경이 미처 따라가지 못해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암수를 구분하지 못 하고 수컷끼리 교미하는 경우가 있어...”

수컷끼리 교미.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길앞잡이 사이의 이야기고 인간인 내가 염려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을 터였다.

지금 현재 유행하고 있는 길앞잡이 증후군도 이 곤충의 이름에서 따왔죠.”

그러네요,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성욕에 휩싸여 이성을 상실하는 팬데믹,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지금 전 세계는 성욕에 집어 삼켜진 대혼란 시대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 길앞잡이 증후군이라는 병에 의해. 혹시나 흑사병, 스페인 독감, 코로나19와 같은 목숨에 지장이 생기는 전염병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한테 먼저 밝혀둔다. 이 병에 걸린다고 치명적인 합병증이 생기거나 죽는 건 아니다, 아직까지는. 단지 성욕이 평소보다 지나치게 올라가는 것뿐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이 길앞잡이처럼 이성조차 망각한 극단적인 성욕을 갖게 되는 것이 이 병의 주요 증상이다.

물론 처음에 나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병을 남일처럼 생각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못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오였으며 그 심각성은 모두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끔찍한 것이었다.

이 병에 걸린 남성이 길가다가 지나가던 여성을 성욕에 휩싸여 강간한다, 정도는 예상 범위였다. 오히려 그 정도로 끝났으면 흔해 빠진 성범죄라고 여겨 아무도 이 증후군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 했을 것이다.

뉴스 등에서 들리는 바에 따르면 해당 증후군을 발병된 사람은 자신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눈앞에 보이는 생명이라면 사람, 동물 가릴 것 없이 범하려고 한다. 옆에서 누가 말려도, 보호 관찰 시설에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 성욕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전국에 생중계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사정하는 모습이 포착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감염자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다수 목격되어 이 병의 실체가 공공연히 드러났다.

만약 자신도 이 병에 감염된다면 수치심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성욕에 집어삼켜진 사람은 수치심조차 잊어버린 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먹잇감을 찾는 것만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어버린다고 한다.

최초의 발병자(아마)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관리 시설에서 성욕 억제제를 주입 받아 상태가 호전됐을지, 아니면 여전히 성욕에 미쳐 날뛰고 있을지.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주위 반경 10m 이내에 있지만 않으면 죽었든 간에 발정기 상태든 간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안위뿐이니까.

나는 지금부터 무얼 하면 좋은가에 대해서 궁리해보았다. 일반적인 경우, 이런 범유행 전염병 상태에서는 늘 하던 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외출자제 시키며 집에서 동영상이라도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게 정석이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고 마찬가지로 지금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 민주공화국에 살아가고 있는 이상, 나 같은 전역한지 얼마 안 된 자취중인 백수 청년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선 사람과의 접촉이 불가피하다.

요새는 배달 앱이 발달되어서 사람과 마주칠 필요가 없다고? 그런 무른 생각이 자신의 목을 조여 파멸을 초래하는 거다. 이건 나의 친척 친구의 사촌동생의 사돈의 팔촌이 겪은 일종의 괴담이지만, 그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던 날, 비대면 배달이라고 방심했던 것이 그의 인생을 종치게 만든 것이다. 그가 문밖의 음식을 픽업하려던 그 순간, 감염자였던 택배 배달원이 그를 덮친 뒤에...상세한 이야기는 수위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괴담 수준의 루머지만 저런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걸 보면 아주 신빙성이 없지는 않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람과 완전히 접촉하지 않는 장소에서나 나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달의 위험성이 증명된 이상, 결국 식사도 자급자족으로 해결할 수단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인도에 가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거지만, 생활력이라고는 컵라면을 끓여먹는 재주밖에 없는 나한테는 너무나도 허들이 높은 선택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천만다행으로 작은 개인 섬을 소유하고 있는 친척이 있다. 무인도 재테크라고 해서 옛날에 구매했다고 들었는데, 원래는 리조트를 지을 생각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금은 거의 방치되어버린 섬이다. 주민도 몇 명인가 거주하고 있지만 80, 90대 정도의 고령의 노인들뿐이라서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다.

적당히 생활력 있고, 인축무해한 노인네들이 사는 섬, 타협안으로써 나쁘진 않다. 듣자하니 길앞잡이 증후군은 혈기왕성한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정도의 청년들의 발병 사례만 보고되었다고 하니 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이만한 선택지가 없다.

인터넷은 온라인 게임이 불가능할 정도로 통신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지만, 그런 것쯤은 패키지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할애하면 그만이니까 적당한 타협안이다. 애초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다. 뉴스 정도를 볼 정도의 통신은 가능하니까 정보 수집은 크게 지장은 없다. 의식주는 옷은 일주일 단위로 세탁하면 그만이고, 음식은 섬의 작은 무인 구멍가게에서 해결하면 만사 OK. 어차피 사람이 없어서 보급은 넘쳐나니까 나 한 명 추가된다고 식량난에 시달릴 걱정은 없을 거다.

그런고로 긴 서론을 요약하자면 난 길앞잡이 증후군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친척의 개인 소유 섬으로 출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했다. 나는 가슴을 활짝 폈다.

나는 결코 성욕에 지지 않는다. 설령 길앞잡이 증후군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나의 안위를 해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아, 이 상쾌한 공기, 신선한 바다, 그리고 펼쳐지는...”

내가 섬의 광경에 감탄할 무렵, 누군가가 나의 말문을 막았다.

와 정말 아름다운 섬이네요!”

노인이라기엔 세련되고 노파치고는 굵은 위화감 넘치는 목소리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나보다 약간 어린 나이로 추정되는 보헤미안스러운 복장의 청년이 캐리어를 들고 서 있었다.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인싸력을 지닌 이 청년이 대체, 왜 이런 외딴 섬에 있는 것인지. 분명 더위를 먹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인구가 북적거리는 도시를 벗어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섬에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오 신이시여.

헤에, 혹시 여기 사시는 주민이신가요?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 별로 없어서 걱정했는데 만나서 반가워요!”

“...혹시 관광객이신가요?”

나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 낯선 청년에게 신상을 캐물었다. 이 시국에 여행가는 사람도 그렇지만 굳이 유명무실한 섬에 온 이유도 조금은 신경 쓰였다.

대학 논문을 쓰려고 해양 생물을 연구하려는데 이 시국이다 보니까 아무데나 무작정 가는 건 꺼려지잖아요? 근데 운 좋게 지인분한테 이 섬을 소개받아서 얼씨구나하고 오게 되었죠. 앞으로 한 달 동안 숙박하게 되었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무엇하나 납득되지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길앞잡이 증후군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또래 남성이 없는 이 섬을 선택해서 왔건만, 시작부터 삐걱거리다니. 아니, 진정해라. 애초에 저 청년이 우연히 길앞잡이 증후군 바이러스의 보균자라서 우연히 내가 감염된다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거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능성일 뿐이다. 아직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아마도.

요새 그 병 때문에 여러 가지로 난리죠?”

복잡한 심경의 나는 안중에도 없듯이 청년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 .”

냉정히 생각하는 거다. 한 달 동안 숙박한다 해도 반경 10m내로 접근하지 않으면 아무 탈 없을 거다. 식료품은 대부분 보존식으로 방에서 전자레인지만 돌려도 먹을 수 있고 밖에 나갈 일은 좀처럼 없을 거다. 한 달 동안은 조용히 방 안에서 보존식만으로 버티고 이 녀석이 섬 밖으로 나가는 걸 기다린다. 나가지 않으면 내가 떠날 수밖에 없지만 애초에 왕래하는 배도 한 달에 한 번 꼴이라서 유예 기간은 최소 한 달로 봐도 되겠지. 빌어먹을.

나는 별 소득 없는 잡담을 끝내고 냉큼 개인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짐을 풀어 필요한 생활용품만 꺼내고 그 동안 밀린 패키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모든 유형의 사물은 공허한 것이고 공허한 것은 유형의 사물이다. 있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다. 정확한 의미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뜻만 통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리고 시간은 흘러 3일 아니면 일주일, 정도가 지났으려나. 보존식이 바닥나버렸다. 추측하건데, 도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스트레스 폭식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걸지도 모른다. 불찰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재빨리 구멍가게로 가서 식료품을 구입한 뒤에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한 달 만에 접하는 바깥 공기는 답답했던 분위기를 환기시킬 만큼 머릿속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최근엔 뉴스도 거의 안 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체감상 한 달 이상은 거주한 느낌이지만 사람하고 교류를 하지 않으니 시간 감각도 예전 같지가 않다.

이런저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는 와중 무인 구멍가게에 도착했다. 그건 그렇고 지나가면서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다. 혹시 이 섬의 주민은 지금 나 한 명뿐인가. 그건 그거대로 이상적이지만 어쩌면...

, 또 만났네요, 반가워요!”

.”

그 청년이다. 왜 하필 가장 마주치기 싫은 녀석을 이렇게 쉽게 만나는 걸까. 이게 말로만 듣던 겁퍼슨의 법칙이란 건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일부터 우선적으로 일어난다. 세상의 불합리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군.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었나요?”

“.....”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그 녀석. 난 본능적인 위험을 느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문워크를 추세요?”

아니 그냥, 기분전환으로...”

3자가 보면 지금의 내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겠지. 내가 뒤로 도망칠수록 앞으로 다가오는 그 녀석. 마치 눈앞에는 맹수가, 뒤에는 절벽 끄트머리에 매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진 것 같았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괜찮으신가요?”

청년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끈질긴 녀석. 볼일 끝났으면 당장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좋을 텐데.

혹시 욕구불만 상태인가요? 예를 들면 성욕이라든가.”

“...!?”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성욕이란 단어가 나의 역린을 건드렸다. 나는 예기치 못한 단어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재빨리 그 자리를 뛰쳐나가 방으로 돌아갔다.

성욕이라든가...그 단어는 금기라고 지금 상황에선.”

그 녀석은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내뱉은 걸까. 아니면 내가 평소보다 민감해진 것뿐일 수도 있다. 분명 환청이라도 들은 거다. 요새 수면 부족에 시달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왠지 하반신 쪽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이 느낌. 부정맥의 증상일수도 있지만 이건 그거다. 체내의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현상. 쉽게 말해 발기했다는 거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하지만 인간도 종족 번식을 목표로 삼는 동물인 이상 DNA에 새겨진 본능에는 거스르지 못 한다. 그 청년이 말한 대로 이 섬에 온 이후로는 성욕을 해소하지 못 해 많이 쌓여있으니까. 이럴 때는 USB에 들어있는 포르노 영상이라도 보면서 가라앉히는 수밖에.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

나는 예기치 못한 낯선 목소리에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펼쳐진 건 인기척 하나 없는 살풍경한 공간뿐이었다. 왜 이렇게 자주 환청을 듣는 걸까. 그 감미롭고 아름다운 청량한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쪽이에요.”

다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는 반투명한 흰색 섹시 슬립 란제리를 걸친 장발의 여성이 서있었다.

굉장히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으신가요?”

눈앞의 여성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하고 또 다시 현란한 문워크를 출 뻔했지만 등 뒤의 벽에 가로막혀 미수로 끝났다. 우왕좌왕하는 와중, 여성의 손이 나의 뺨을 스쳤다.

많이 쌓여있는 거 같아요, 도와줄까요?”

청초한 외모와는 대비되는 상스러운 대사를 끝낸 여성은 나의 뺨을 타고 오른손을 하반신 쪽으로 옮겼다. 매혹적이고 음탕한 손짓으로 바지의 지퍼를 열려는 그녀한테 나는 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요즘 같은 IT시대에 야릇한 영상이나 사진을 보는 건 유치원생도 할 수 있지만 역시 실물로 보는 건 체감이 다르다. 특히 대놓고 알몸이 아니라 중요 부위가 보일락말락한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속옷을 입고 있는 게 체내의 말초신경을 짜릿하게 자극시키는 포인트다. 나의 남자로서,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성적 유혹을 거부하는 걸 허락하지 않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방안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 지금까지 꿈이라도 꾼 걸까, 하지만 하반신 쪽에 내 것이 아닌 온기가 생생히 남아있다. 세간에선 이런 꿈을 흔히들 몽정이라고 하지만 몇 번인가 경험해본 난 알 수 있다, 이건 틀림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처음 보는 여성과 방안에서 성행위를 즐겼다는 현실자체가 말이 안 된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의해 꿈과 현실조차 구분이 되지 않게 되어버린 건가. 어쩌면 이 섬에 온 뒤로 나의 상식은 세계의 상식과 동떨어져 버린 걸 수도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였나요?”

갑작스러운 반야심경 낭독에 화들짝 놀란 나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는 나를 포함해 이 섬의 유이한 청년이 히죽거리며 서있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있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겁니다.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불법 침입자 주제에 그럴듯한 궤변으로 심문을 무마시킬 수작이겠지만 묘한 점이 한둘이 아니라서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나저나 충분히 즐기셨나요?”

...”

성욕 해소.”

왜 그런 일을 묻는 걸까. 역시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건가. 그렇다 쳐도 질문이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닌가? 아니면 내가 인간관계가 협소한 사회 부적응자라서 모르는 거지 인싸들은 모두 성적으로 개방적이라서 일상회화에서 성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상식인가.

부끄러워할 필요 없잖아요? 성욕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중 하나인데, 인간이라면 좀 더 자신의 몸에 솔직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참견이야. 내 사생활에 이러쿵저러쿵 말해질 이유는 없어.”

이 녀석은 대체 나한테 뭘 요구하려는 걸까. 설마 길앞잡이 증후군에 감염된 건가? 그래서 날 방심시킨 뒤에 덮칠 생각인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에 빠진 나는 다시 문워크를...라고 해도 밀실이라서 별 효과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나마 무기로 쓸 만할 거라 판단한 바닥에 놓여있던 양은 냄비를 집어 들었다. 드라마에선 사람도 기절시키던데 현실에서도 효과가 있을지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딱히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본능을 해방시켜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

본디 생물의 본능이란 종족 번식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아 성욕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교미 행위는 종에 따라 목숨도 잃는 경우도 있기에 성욕이라는 동기 부여가 되지 않으면 좀처럼 완수하기 힘들테니까요.”

이번에는 뜬금없이 생물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잠자코 경청했다.

그건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성욕이 없다면 체력 소모가 심한 성행위를 하진 않겠죠.”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에겐 성욕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콘돔이나 피임약 등을 사용해 무분별하게 성관계를 나누어도 자손을 남기지 않는 수단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인류는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냐? 애초에 무분별하게 관계를 갖다가 아이라도 생기면 처리가 곤란해지고 비용도 많이 드니까. 게다가 원하지 않은 임신은 대체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할 때가 많고.”

그나저나 난 왜 갑자기 이 녀석이랑 시사 토론을 하고 있는 거지. 대학시절 조별 토론이 생각나는군.

그 말이 맞습니다. 억지로 아이를 낳는 정책을 강요하면 모 루마니아 대통령 꼴이 날 테고 인간에게 있어서 피임을 제대로 하는 것이 건전한 성생활을 위해 필수적이겠죠. 하지만 저희들의 높으신 분들은 이런 상황이 탐탁지 않아서요.”

높으신 분들?”

저 하늘 높은 곳에 사시고 계세요. 그분들은 태초부터 인류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인구가 너무 늘어나면 천연두나 흑사병 같은 역병을 퍼뜨려 인구수를 조정할 때도 있었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녀석. 하늘 높은 곳? 인구수를 조정? 도무지 이야기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구수가 줄어들어 늘릴 필요가 생겼습니다. 병을 퍼뜨려 사람을 줄이는 건 간단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과연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 그분들도 여러모로 고심했어요. 새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를 쌍둥이로 한다든가, 임신 기간을 줄이든가 여러 방안이 떠올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애초에 피임이니까요. 성욕을 추구하면서도 어중간하게 이성이 존재해 저출산 시대를 도래한 거죠.”

“...그래서?”

그렇기에 피임 같은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이성을 죽일 정도의 성욕을 야기시키는 거죠. 이 병의 이름의 유래가 된 길앞잡이처럼요. 모든 사람들의 성욕이 이성을 누르면 결국 본능에 굴복해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미친 짓이야! 지금 전 세계에 퍼져버린 길앞잡이 증후군 때문에 얼마나 사회가 혼란스러운지 알아!? 게다가 이성이 없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남녀 구분도 못 하고 무분별하게 욕망을 배출하고 있어! 인구수가 늘어나기는커녕 인류 사회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메타인지 전략이라고 두 보 전진을 위한 한 보 후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인류는 문명이 너무나도 발전해서 조금은 퇴보해도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잠재된 본성을 잠깐 해방시키는 것뿐이라서 인류 사회가 멸망할 걱정은 시기상조입니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인류를 조정해온 저희들이니 허튼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당신도 아까까지 실컷 즐겼...”

시끄러워!!!”

나는 판단력을 상실한 채 손에 든 양은 냄비를 눈앞의 역병신한테 내던졌지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더 효과적인 무기를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놓여있던 각목을 들어 역병신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죽어 이 역병신!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나는 그의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두들겨 팼다. 이 녀석이 사라지면 끔찍한 악몽에서 해방된다. 길앞잡이 증후군도 박멸될 것이고 나는 더 이상 성욕이 이성을 집어삼키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질 거다.

서너 시간 정도 흘렀을까. 나는 각목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눈앞의 사람의 형체를 잃어버린 고깃덩어리를 응시했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 날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다. 전율하는 몸을 이끌고 나는 바깥으로 나와 피로 흥건한 각목을 바닷가에 버렸다. 이걸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질 터이다. 완벽한 계획이다.

다시 방안으로 돌아와 보니 피투성이 고깃덩어리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나 이외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원상태였다. 시체를 처리할 수고를 덜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다음날, 배를 타고 나는 다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길앞잡이 증후군도 발병할 일이 없을 테니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왕래하는 배인데 왜 다음날 바로 왔는지, 이제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중요한 건 모든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거다.

이젠 이런 일을 겪는 건 지긋지긋하다. 애초에 이런 섬에 오는 것보다 집에 가만히 있는 편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 기분 나쁜 역병신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하지만 딱 하나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면, 란제리 차림의 여자만큼은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 매혹전인 손짓으로 날 위로해주길 바랐다. 한 번 경험한 뒤에 도저히 그 감촉이 잊혀지질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마이 홈. 내가 살았던 방이라기엔 조금 위화감이 있는 모습이었지만 분명 차차 익숙해질 것이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적응하며 진화하는 동물이니까.

살풍경한 공간, 새하얀 벽, 그리고 펼쳐지는...”

또 만났네요.”

마치 데자뷰를 연상시키는 패턴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전에 만났던 란제리를 걸친 여성이 서있었다.

이런 데서 또 만나다니, 이거 참 기묘한 인연이네.”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니까요.”

그 해석은 내가 멋대로 덧붙인 거지만 올바른 의미가 어떻든 지금 눈앞의 내 취향의 여성이 서있다는 것 외에 중요한 건 없다. 나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걸까. 그렇다면 이 세계는 그렇게까지 불합리한 세계는 아닌 모양이다.

또 많이 쌓인 모양이네요.”

이번엔 풀코스로 부탁할게.”

더 이상 성욕을 배출하는 걸 망설이지 않겠다. 이건 정당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니까. 아무것도 잘못된 건 없다. 본능에 충실한 건 자연의 섭리니까. 나는 더 이상 욕망에 삼켜지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그 무렵, 서울의 한 격리시설에서 남자 간호사 두 명이 새로운 입소자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발병자가 수용되었다며.”

듣자 하니 외딴 섬에서 각목을 들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난리를 친 모양이야. 방안에서 혼자 소리를 꽥꽥 지르며 각목으로 기물 파손을 한다든가 자위를 하는 등 워낙 소란스러워서 주민 신고를 받고 끌려갔는데, 란제리를 입은 여자가 눈앞에 보인다는 조현병 증세까지 보여서, 결국 검사 받고 양성 판정이 나와서 격리됐데.”

정말 끔찍한 병이야. 지금까지 다른 전염병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사회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니까, 생각만 해도 으스스해.”

길앞잡이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오로지 성욕만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없다고 판단한 주위의 모든 정보를 차단한다고 하니까. 저 사람도 격리 시설까지 끌려오는 와중에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채 횡성수설하며 끌려갔지.”

그 사람도 아직 젊은데 참 안 됐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두 간호사들은 낯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젊은 청년이 서있었다.

저기 누구세요?”

저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들의 욕망도 해방시키도록 하죠.”

시간은 흘러 가을이 되었으려나. 백수인 나한텐 일주일이 전부 일일일일일일일이기 때문에 평일과 휴일의 구분이 쉽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욕망을 주저하지 않고 탐락에 빠지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꽤 만족스러운 표정이네요.”

내가 저번에 죽인 청년이 싱글벙글하며 눈앞에 서 있었다. 아니지, 시체도 사라졌으니 실은 죽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섬에 가서 이 청년을 만난 뒤로 이미 길앞잡이 증후군이 발병된 상태였던 거다.

넌 나한테만 보이는 환상이야? 아니면 정말로 실재하는 거야?”

진실이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정해지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환상이라고 해도 당신이 실재한다고 믿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요?”

현실인지 환상인지 이제와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어버렸어. 지금 내가 추구하는 건 단 하나니까.”

원래의 생활이 그리우신가요?”

청년은 나의 마음을 떠보듯이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욕망에 몸을 맡기며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진작에 이런 삶을 살았어야 했어.”

그 말대로입니다. 처음에 거부감을 보여도 결국 본능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생물의 본연의 자세다. 인간은 문명 사회에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자신들도 동물의 한 종류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생물에게 있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종족 번식이야말로 최우선 목표고, 그를 위해 성욕에 몸을 맡겨 의무에 충실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나는 청년을 뒤따라 복도를 걸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리에는 쾌락과 향락에 몸을 맡겨 욕망을 배출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비가 와도, 태풍이 불어도, 폭설이 내려도 그들은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은 다시 머뭇거리더니 모습을 바꾸어 내가 아는 란제리 차림의 여성으로 변신했다.

자 같이 욕망을 해방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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