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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상상력이 저무는 곳에

2022.02.28 21:4902.28

 

상상력이 저무는 곳에

 

사람들은 자꾸만 과거의 것을 찾았다. 텔레비전 속엔 추억의 연예인이 즐비했고, 상영관에는 20년 전의 영화가 넘실거렸으며, 길거리에는 90년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현재의 것은 과거의 것을 교묘하게 베끼거나 잘 따라 한 것들뿐이었다. 왜 예전 드라마, 영화가 더 재밌을까? 왜 어릴 때 읽은 책만큼 재밌는 책이 없을까? 왜 요즘은 이런 게 안 나올까?

많은 사람이 지금 상황에 대한 여러 의문을 가졌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A는 그 의문에 부족한 상상력을 인류가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상상력이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실물로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A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묻느냐면 상상력의 실수일 수도 있고, 상상력의 장난일 수도 있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A의 의견에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A는 그런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함께 상상력을 찾을 원정대를 모집하기 위해 신문에 공고를 내거나 구인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A는 부유한 백인의 얼굴을 닮은 이이거나 개발도상국에 살면서 유니세프 영상에 종종 나오는 아이의 얼굴을 닮은 이였다. 어찌 되었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부자와 거지 중 하나를 대표하는 이였다.

 

몇 안 되는 지원자와 면접, 시험 등등 이런저런 시간을 거쳐서, 결과적으로 A는 ㄱ과 ( )과 함께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ㄱ은 이름처럼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한국인인지는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한국의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젊은 여성이거나 넷플릭스에서 신작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게 취미인 중년의 전업주부였다. 어찌 되었건 좋아하는 것, 보고 들은 것은 많으나 자신의 업적을 이뤄본 적은 없는 이였다.

( )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를 모두 가 본 성인을 닮은 이였다. 예를 들면 예수를 닮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예수보다는 석가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공자나 무함마드일 수도. A는 ( )을 처음 보고 소크라테스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렸다. 목숨보다 신념을 우선해서 지키는 사람의 얼굴을.

둘은 A처럼 어디엔가 상상력이 석유처럼 하나의 자원으로 존재할 거라고 믿었다.

 

오래된 문헌들과 최신 문서들을 뒤지고, 정보를 아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찾고, 길에서 만난 이에게 물어보면서 상상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달했다.

원정에 떠난 지 000일 만이었다.

그곳은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였지만 결코 메마르지 않은 땅 한 가운데였다. 상상력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는 바위 사이 스며들어있는 액체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나의 공기 같기도 하였다. 그것은 한 번도 인간의 눈으로는 본 적 없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원정을 이끈 A는 자신만만하게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저 멀리 빛이 달아나버렸다.

 

원정대는 다시 000일을 달려 상상력을 찾아냈다.

이번에는 ㄱ이 나섰다. ㄱ은 상상력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야 한다고 했다. ㄱ이 몇 번 ‘우쭈쭈’라고 소리를 내자 환한 빛이 뭉쳐서 아기가 되었다.

아기는 걸걸한 목소리로 여러 언어를 한 번에 사용하여 경고하였다.

 

“돌아가라.”

“왜요?”

“너희 인간들에게는 내가 더는 필요하지 않아.”

 

그러자 ( )이 상상을 하였다. 상상력을 자신의 손에 넣고 주무르는 상상을. 아기였던 상상력은 작은 찰흙으로 변하여 ( )의 손으로 들어왔다. ( )은 크게 웃으면서 A와 ㄱ에게 찰흙을 자랑하였다.

그 순간 상상력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귀엽고 작은 동물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짐승으로 변하였다. 그리고는 ( )을 한입에 꿀떡 삼켜버렸다. ㄱ은 커다란 짐승에게서 ( )을 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였고, A는 멀리서 공포에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이내 커다란 짐승은 ( )을 토해냈다. ( )의 몸은 짐승의 침에 절어있기만 할 뿐, 다친 흔적은 없었다. A에게는 그 침이 아주 살짝 튀었으나, ㄱ은 ( )을 꺼내다가 그 침을 완전히 뒤집어썼다.

 

“어디 가서 나를 보았다고 하지 마라. 그게 내가 너희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선의이다.”

 

그리고 짐승은 작은 동물로 변했다가 찰흙으로 변했다가 아기로 변했다가 알 수 없는 빛이 되어 사라졌다.

 

A, ㄱ, ( )은 그 후 인사도 나누지 않고 곧바로 각자의 길로 떠났다.

 

A는 고국에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문체의 글이었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도 아주 희한하였다. 도저히 기존의 인간들은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그 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단한 글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글을 해석하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일제히 A에게서 돌아섰다. 글이 어려운 것은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쓴 작가의 잘못이라면서 A의 삶을 흠집 내기 시작했다.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이런 나이브한 글을 쓴 것이다. 혹은 그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른다는 식으로 말했다. 결국 A는 혹평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사람들은 A가 죽고 나서야 A의 글을 칭찬하였다. A의 글은 A가 죽은 다음 날 가장 많이 팔렸고, 이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되었다.

 

ㄱ은 인터넷에 자작곡을 올렸다. 자작곡 영상은 올리자마자 수많은 나라에서 인기 동영상 1위를 장악했다. ㄱ은 그다음 날 바로 데뷔하였다. ㄱ은 그해 빌보드 차트와 그래미 시상식을 휩쓸면서 대중과 평단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은 가수가 되었다. 그다음 해에 ㄱ은 자신이 주연 배우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는 개봉 날에 관객 수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어느새 영화관에는 ㄱ이 나오지 않은 영화가 없었고, 길거리에는 ㄱ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노래가 없었다. ㄱ은 그 외에도 그림을 그리고 행위예술을 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ㄱ이 어떤 걸 하든 사랑해주었다. ㄱ은 온 세상의 사랑 속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다.

 

( )은 직접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로 떠났다. 장기간 우주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방송에 출연하여 외계인의 실체를 알렸다. 어떤 외계인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성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상세하게 말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분석하였다. 하지만 분석을 하면 할수록 그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지구가 둥그렇다는 보편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이들과 프리메이슨, 렙틸리언 따위를 믿는 이들부터 그를 하나의 종교처럼 모시기 시작하였다. 어린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의 얼굴을 문신하는 게 유행처럼 번져갔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교육적이지 않은 방송을 보여줬다며 그가 출연한 방송사를 없애려고 들었다. 그러나 방송사는 사라지지 않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통해 ( )에 대한 추후 보도를 하였다. ( )에 대한 관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자 NASA 측에서 ( )의 말을 반박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NASA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NASA의 입장을 들으니 ( )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 )가 전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며 폭동을 일으켰다. 어떤 나라의 폭동은 전쟁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결국 ( )은 다시 방송에 나와서 이처럼 해명을 해야 했다.

 

“이 모든 건 제 과도한 상상력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후 ( )은 자취를 감추었다.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싶어서 감춘 것은 아니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 )은 우주로 납치당했다.

 

“너 상상력을 만났지?”

 

외계인들은 무기로 추정되는 끔찍하고 기다란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 그들은 모두 상상력을 찾기 위해 잔뜩 혈안이 되어있었다. ( )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몸은 잘게 토막 나서 온 우주를 떠돌고 있다.

만약 ( )이 상상력을 만났다고 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swimming_in_trust (트위터,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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