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화요일 _ 인화(人火)

 

   

“자기 담배 피우니?”

 

회사 동기가 물었다. 나에게서 탄 냄새가 난다고.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내가 들어갔던 방이나 화장실을 나중에 다시 들어가면 묘하게 연기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아니, 나 담배 끊은 지 백 년은 더 됐어.”

 

향수인가. 그 향수, 잔향이 스모크 향이었나?

 

다음 날은 향수를 바꾸었다.

 

“오늘도 탄내 나?” 아침인사 대신 물었다. 동기는 내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끄덕끄덕. 바디 클렌저일 리는 없는데… 샴푸인가?

 

다음 날은 향수도 쓰지 않고 바디 클렌저 없이 샤워했다.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도 다 바꾸었다. 그런데도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동기는 이제 내 목덜미까지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화장품 탓일 수도 있어서 친구가 추천해준 유기농 수제 화장품을 세트로 구비했다. 원래 나는 아무거나 싼 걸 사서 썼다. 향도 브랜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될 수 있는 한 가향하지 않은 걸로 골랐다.

 

이상하다. 동기가 오늘 인사도 없이 내 눈을 피했다. 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체온이 점점 올라갔다. 처음에는 가벼운 감기처럼 미열이라 괜찮았는데, 날이 갈수록 몸이 뜨거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 원인은 내 안에 있었던 걸지도 몰라. 무슨 병에라도 걸렸나?

 

병원에서는 명확한 원인을 몰랐다. 각종 검사에도 체온이 너무 높다는 것 외에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질환은 발견되지 않았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지었나?

 

“왜 그런 거 있잖아. 악마는 유황 냄새 난다는 거.”

“에이~ 유황이랑 탄내는 다르지. 유황은 온천 가면 나는 냄새잖아. 걔 냄새는 그보다는 뭐랄까, 음… 고기 타는 냄새에 가까워.”

“그래? 난 온천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

“온천 좋아. 난 찜질방 파이긴 한데 가끔 부모님이랑 가면 좋더라구.”

“그래? 나도 요번 연휴에 한번 가볼까?”

“그래그래, 가까운 데도 좋고 해외도 좋은 데 많더라.”

 

회사 화장실은 환기가 잘 됐다. 제일 끝 칸에 들어갔더니 동료들은 내가 있는 줄 몰랐다. 그 길로 병가를 냈다. 진단서는 어떻게 되겠지.

 

반신욕 욕조를 샀다. 집에 있을 때는 냉탕을 만들어 들어갔는데 얼마 전부터는 얼음물로 바꿔야 했다. 내 몸은 명백히 익어가고 있었다. 타는 냄새는 피부 밑에서부터 땀구멍을 통해 온몸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 건 며칠 전부터였더라? 최근에는 얼음 녹는 속도가 빨라졌다. 욕조 밖에서는 도저히 숨도 못 쉴 정도였다. 내가 내딛는 발밑이 녹는 것 같았다. 걸어 다니는 용암덩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자주 몽롱해졌다. 기억이 파편화되어 남을 뿐 서사적으로 뇌에 남지 않았다. 나는 매일 일상생활 몇 가지를 겨우 하고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기록으로 남겨보려 했지만 아주 느리게 조금씩 쓸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바로 이 글이다. 당신은 이 글을 내가 한두 시간 만에 썼을 것으로 생각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순간까지 삼 개월이 걸렸다. 다시 읽을 수 없을 테니까 최대한 오탈자가 없도록 혼신의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글은 아마도 제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완성이라도 그게 완성이라고 생각하자. 죽음이

 

 

 

수요일 _ 수영장에서

   

 

세상에는 기억력 좋은 사람들이 많다. 별로 꺼림칙한 게 없어도 정체를 들키기 싫을 때도 있는 법이다.

 

수영장에서 나를 보던 여자의 눈빛이 그랬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몇 번 마주치다가 어느 날인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둔감한 내가 눈치챌 정도면 한참 보고 있었다는 얘긴데, 살짝 불쾌했다. 뭐지, 아는 사람인가. 내 기억엔 없다. 하지만 다음 주에 만났을 때 알게 되었다. 여자의 기억에 내가 있다는 걸.

 

Y 오빠는 바람둥이였다. 7년을 동거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도 주기적으로 딴 여자를 사귀었다. 그렇다고 한 번에 여러 명을 만나는 건 아니었고, 양심적으로(?) 한 명씩 사귀는 눈치였다. 애정이 몇 사발 들어있는지는 몰라도 내 눈엔 진짜 사랑해서 만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나랑 사귀었다는 건 아니고.

 

나도 잠깐은 그 빤질한 외모에 혹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산 사실상의 부인이 있다는 얘기에 눈길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사생활을 아주 깔끔하게 관리했다. 하지만 남의 사생활은 개의치 않았다. 남이야 바람을 피우든 말든.

 

오빠와는 친하게 지냈다. 뭐랄까, 의남매 같은? 스무 살이었지만 난 상당히 어려 보여서 그 오빠는 내게 성적 매력 따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사귄 여자들은 하나같이 글래머러스하고 성숙미와 건강미를 동시에 갖춘, 그런 타입이었다. 여자 친구처럼.

 

여자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사귀었다고 들었다. 얘기만 듣다가 실물을 봤을 때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세운 적도 없었지만. 첫눈에 통감했다. 나에게는 그녀가 살 부비며 살고 있는 남자를 꾀어낼 능력도 용기도 없음을. 그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을 내 친구가 했다. M은 지방에 살았다. M은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와 오빠와 만났다. 나는 M을 통해 그 지방 여자 특유의 매력이 뭔지 알게 되었다. 애교가 아주 사람 애간장을 녹였다. 여자인 내가 봐도 그랬다. M이 그때 무슨 일을 했는지, 일을 하긴 했는지, 아니면 학교라도 다니긴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긴 했지만 그땐 옷깃 스쳐 통성명하고 술 한 잔 같이 마시면 다 친구였다. M은 술값을 잘 냈다. 집안이 뭐 그렇고 그런 일을 한다고 했다. 여자들이 밤마다 번 돈 일부가 내 입에도 술로, 안주로, 담배로 들어왔다. 그땐 정말 남의 사생활 따위 관심도 없었다.

 

“저기, ㅇㅇ 씨 아니에요?”

 

수영장의 여자는 내 닉네임 중 하나를 입에 올렸다.

 

“네, 맞아요.”

 

나는 거리낄 게 없는 사람답게 대답했다. 우리는 다음 날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빠는 여자 친구에게 나를 뭐라고 얘기했던 걸까. 아무튼 그 의심 많은 여자 친구도 내가 오빠의 바람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만은 인정했던 것 같다. 집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꺼야 하고, 밖에 누굴 만나러 나가면 전화로 그 누구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할 정도로 여자 친구는 오빠의 자유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오빠의 바람기를 잘 알았을 테니. 뒤통수도 여러 번 맞았겠지.

 

“ㅇㅇ 씨는 믿었어요. 되게 순둥순둥하게 생겨서 거짓말 안 하게 생겼는데. 내가 관상을 너무 신빙했나보다.”

 

여자는 웨이브 진 머리를 출렁이며 웃었다. 사과 따위 허락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 이 허스키한 목소리는 기억한다. 나는 사람 얼굴보다 목소리를 더 잘 기억하는 편이다.

 

“오빠는 잘 지내요?”

“죽었어요.”

 

오빠는 참 알뜰했다.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돈을 쓰지 않아도 여자는 얼마든지 릴레이로 붙었다. 지금 생각하면 연예인 급으로 잘생겼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했는데, 건달기 약간과 미묘한 성실함의 조화가 그 틈을 메웠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누구 술 한 잔 사주는 법 없는 오빠가 밖으로 나를 불러 선물도 사주고 냉면 맛집도 데려갈 땐 꿍꿍이가 있었다. 나는 목소리 알리바이용이었다. 당시에도 핸드폰에 카메라가 있었으면 사진도 찍었겠지. 나는 이 여자를 언니라고 편하게 부르며 자연스럽게 대본을 읽었던 것이다. 오빠가 원하는 대로.

 

“안녕하세요, 언니. 오빠가 전부터 여기 냉면 맛있다고 사준다고 해서 같이 먹고 있어요. 언니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뭐 그런 식. ‘언니’는 내 목소리에 안심했다. 안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화는 반드시 나를 역에 내려주기 직전에 했다. 그 후 오빠가 어디로 갔는지 나야 모른다. 타인의 사생활이니까. 나는 거짓말을 한 게 없었다. 오빠가 M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언니’에게 내가 말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좀 오지랖 아닌가. ‘언니’보다 저쪽이 더 친하기도 하고. 나는 오빠 애인이 아니라 알리바이일 뿐이니까. 그러니 나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땐 정말 궁금했어요. 왜 안 헤어지신 건지.”

“난 리셋 버튼을 눌렀어요. 좀 여러 번 눌렀지.”

 

나는 정확히 여자가 리셋 버튼을 몇 번 눌렀는지 모른다. 내가 오빠를 알기 전에도 이미 여러 번 눌렀던 것 같고, 그 후에도 몇 번은 더 누르지 않았을까.

 

“오빠는 어쩌다 그렇게 되신 거예요?”

“모텔에 불이 나서 못 빠져나왔어요. 그런 데 있잖아요, 비상계단 앞에 이것저것 쌓아 놓는 그런 데.”

 

그 오빠는 참…

 

“그래도 혼인 신고 안 해서 다행이었어요. 애가 생겼는데도 혼인 신고하기엔 미덥지가 못해서 미루고 그랬는데. 이젠 뭐 나도 초기화했고.”

“아이요?” “아들이었어요. 지금은 같이 살지 않지만.”

 

내가 선을 넘었던 걸까. 내 눈치를 살피더니 여자는 엉뚱한 말을 했다.

“근데 ㅇㅇ 씨 독특한 향수 쓰네.”

“네? 그래요?”

 

오늘은 향수를 안 썼다. 나는 원목 테이블의 나이테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어색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할까. 수영장을 바꿀까.

 

 

 

목요일 _ 우리의 나무

   

 

“너가 사는 게 내가 사는 거야.”

나는 망각의 약을 동생에게 건네며 말했다.

“쌍둥이니까.”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게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웃으며 마셨다. 나는 약 기운이 돌기 전에 동생의 짐을 쌌다. 서둘러야 했다. 먹을 게 별로 없어서 빵 한 덩이를 가방에 넣고 동생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문 밖으로 그를 밀면서 소리쳤다.

 

“도망가! 끝까지 살아남아!”

 

동생이 산 밑으로 내려간 후 나는 약병을 하나 들고 산 위로 달렸다. 어둠의 숲은 산에 사는 우리조차도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다. 이 숲에는 빛이 드는 시간이 짧고 길다운 길도 없다. 멈춰서 뒤돌아보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는다. 숲이 끝나 강이 나올 때까지 앞만 보고 가야 한다.

 

“어둠의 숲에 들어갔어! 낮에 나오면 붙잡아. 밤에는 아무도 들어가선 안 돼!”

 

뒤쫓는 사람들을 피해 나는 ‘우리의 나무’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무를 휘감고 있는 덩굴을 조금 치우니 움푹 파인 구멍이 드러났다. 우리가 어릴 적 아버지가 만들어준 은신처다. 아버지는 나무꾼이었다. 우리 둘이 들어가도 넉넉했던 구멍은 이제 내 몸 하나 삼키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 안은 자궁처럼 아늑했고, 나는 졸음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의사이자 약제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녀라고 불렀다. 마을에 하나뿐인 존재였기에 늘 바빴다. 멀리하면서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산에 데리고 다녔다. 동생과 나는 ‘우리의 나무’에서 놀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허리에 긴 끈을 묶어 나무에 맸다. 열 살이 넘어서는 나무에서 해방되었다. 대신 둘 중 하나가 길을 잃더라도 함께 있도록 손목을 연결했다.

우리가 열다섯이 되던 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어머니도 병에 걸렸고, 어머니를 간병하던 아버지도 같은 병으로 쓰러졌다.

“너희가 사는 게 우리가 사는 거야.” 두 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똑같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나를 마녀라고 불렀다. 나는 내가 마녀라는 걸 늘 의심했다. 그러나 아니라고 명징하게 증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산에서 약초를 캐 약을 만들어 파는 나를 자주 찾아왔다. 나를 필요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북스러워했다. 약 중에는 독이 되는 게 많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죽인 적이 없는데도 나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이 독이 될 수 있음을 모른다. 독은 적당히 쓰면 약이 된다. 지나쳐 독이 되는 것이다. 물도 지나치게 마시면 독이 되고, 사랑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찾으면 불태워버려!”

 

그들의 소리가 숲에 울렸다. 분명 숲에서 길을 잃고서도 계속 우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사냥개들의 날 선 울부짖음에 숲의 생명들이 일제히 떨었다. 동생이 무사히 빠져나갔기를.

 

나는 가져온 약을 마셨다. 자연 발화한 인간의 재와 순금, 몇 가지 약재를 섞은 깨지 않는 약이다. 금기의 약이지만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곳도 언제까지나 안전할 수 없다. 영원히 잠드는 수밖에. 나는 곧 잠에 빠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영원의 잠은 아주 깊고 길었다. 내가 잠든 사이 산 밑 세상은 뱀이 허물을 벗듯 수시로 바뀌고 커졌다. 변화의 손길은 점점 산 위로 올라왔고, 내가 잠든 ‘우리의 나무’까지 뻗쳐왔다.

 

의식의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권의 노트였다.

내 몸을 연 사람이 펜을 들어 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너가 사는 게 내가 사는 거야.”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다.

 

 

 

금요일 _ 사로잡히다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광부들은 황급히 강에 뛰어들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무기와의 몸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이무기가 너무 어렸다. 인간 한 명도 아직은 어쩌지 못할 만큼 연약했다. 광부들은 이무기를 폐광으로 끌고 가 가장 깊은 굴에 묶어 두었다.

 

“오늘부터 다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전처럼 금을 캐는 게 아니야. 흙을 파서 부드럽게 만들어 놈에게 먹이는 거다. 그러면 저 놈이 금을 뱉어낼 거야. 우린 그걸 주워 담기만 하면 돼.”

 

광부들의 노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때 금광 덕에 부유했지만 금이 바닥나자 순식간에 쇠락한 마을은 활력을 되찾는다는 흥분에 젖었다. 이제 하루 종일 산길을 걸어다니며 버섯을 캐거나 나무를 해 숯을 만들어 팔지 않아도 되었다. 광산에서 삽질만 하면 되는 것이다. 광부들은 순번을 정해 효율적으로 노동하고 이무기를 지켰다. 가장 큰 이익을 차지하는 것은 광부들과 그 가족이었지만, 금은 돌고 돌아 마을 전체를 윤택하게 해주었다.

 

그동안 어린 이무기는 빠르게 자랐다. 매일 필요 이상으로 먹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무기가 너무 자라 이제 한두 명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많은 쇠사슬로 묶어도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광부들은 쩔쩔맸다. 광산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진정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광부들 모두가 동원되어 쇠사슬과 목줄을 붙들어 당겨야 했다. 사람들은 점점 지쳐 나가떨어졌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노래를 들려주면 어떨까요?”

젊은 광부가 말했다.

“제가 전에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니까 좀 잠잠해지는 것 같더라구요. 혹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해보죠. 노래 잘하는 친구가 있어요. 산에 사는데 직접 노래도 만들죠.”

 

효과가 있었다. 광부들은 청년이 이무기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이무기가 있는 동굴에서 떨어진 곳에 노래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청년이 위험할까봐 염려한 게 아니다. 몰래 금을 훔쳐갈까 걱정한 것이다. 광부들은 모래 먼지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장비를 쓰고 일했고, 노래하는 청년은 모래 먼지를 삼키며 이무기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청년의 노래 덕에 이무기는 얌전해졌다. 광부들은 이제 편하게 일할 수 있었고, 이무기를 지킬 당번도 한 명이면 충분했다. 청년은 자신의 노랫소리 사이로 들리는 평화로운 숨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무기는 광부들만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뿐 청년은 수염 한 올도 보지 못했다. 청년은 자정마다 이무기를 지키기 위해 교대하는 친구에게 이무기를 만나게 해달라고 몰래 부탁했다. 친구는 청년이 고생하는 게 자기 때문이라 생각해 순순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무기가 잠든 모습은 황홀했다. 빛 하나 없는 동굴에서 이무기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고양이 같았고, 주위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향기가 감돌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이무기의 피부는 오팔 같았다. 청년은 손을 뻗어 이무기를 쓰다듬었다. 청년이 매끄러운 그 감촉에 넋이 나갔을 때 이무기가 눈을 떴다. 청년과 이무기의 눈이 마주쳤다. 청년은 속삭이듯 노래했다. 이무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청년과 이무기는 곧 사랑에 빠졌다. 청년은 친구가 당번일 때마다 이무기를 만났다. 낮에는 노래를 부르고, 밤마다 이무기를 만나는 행복한 일상은 길지 않았다. 이무기의 뿔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뿔이 완전히 자라 용이 되면 이무기는 더 이상 흙을 먹지 않는다. 그러니 금을 뱉을 일도 없다. 용은 바람과 비만 먹고 산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것뿐 아니라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완전한 용이 되면 지금 묶어 두고 있는 쇠사슬은 간단히 끊고 나갈 것이다. 용이 되어 탈출하면 마을에 어떤 복수를 할지 광부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이무기를 없애야 했다.

청년은 광부들이 내일까지만 나오면 된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친구도 미리 귀띔을 해주었다. 청년은 몰래 이무기를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청년은 약제사인 누나에게 부탁했다. 누나는 빠르게 잠드는 약을 차에 타서 주었다. 청년은 광산 입구 문지기부터 내부에 있는 모든 광부들에게 차를 한 잔씩 나눠주었다. 밤이라 몇 명 없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줄 마지막 잔은 반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는 곧 잠들었고 청년은 쇠사슬을 풀었다. 쇠사슬을 다 푸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이무기는 얌전히 기다렸다. 무사히 이무기를 데리고 미로 같은 광산을 빠져나올 때였다.

“안 돼!”

친구가 횃불을 들고 따라왔다.

“그 녀석을 없애지 않으면 우리 마을에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친구는 횃불을 던지려 했다.

“이무기가 그러길 원한다면 우린 감수해야 해.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야. 우리는 그렇다 쳐도 우리 아이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당하게 될 거야.”

“그럼 용서를 빌어. 이무기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어?”

친구는 부들부들 떨다 고개를 떨구었다.

 

청년은 이무기를 계곡으로 안내했다. 이무기는 계곡물에 들어가 한동안 몸을 씻었다. 그리고 하류를 따라 내려갔다. 청년도 산을 달려 내려갔다. 강으로 바다로 이무기는 거침없이 헤엄쳤다.

청년은 바닷가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는 더 따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무기는 바다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모습은 더 이상 이무기가 아니었다. 뿔이 온전히 다 솟은 용이었다. 청년은 용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 청년의 운명이 비쳐보였다. 한순간인 듯도 하고 영겁인 듯도 했다. 청년은 일순 몸이 휘청했다. 회전 운동하던 몸이 갑자기 멈추어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용은 이미 바다 멀리 사라진 후였다. 청년은 바다에서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솟구쳐 새벽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을 응시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토요일 _ 마지막 아이

 

   

함매는 마흔 명이 넘는 아이를 길러냈다. 그중 몇 명이 함매 친자식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 모두를 함매를 똑같이 키웠고, 나는 함매가 마지막으로 키운 아이였다.

함매는 여자아이는 키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함께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함매는 우리가 스무 살이 되어 집에서 내보낼 때 늘 같은 말을 했다.

 

“좆같은 좆 간수만 잘해도 좆같은 일은 훨씬 주니께 명심혀어.”

 

함매는 마흔 명이 넘는 아이를 길러냈으나 그 아이들의 남은 인생은 관여하지 않았다. 돕지도 않고 쳐다도 안 봤다. 아이들이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돈을 많이 벌든 노숙자가 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공한 놈한테 손을 벌리지도, 실패한 놈한테 한 푼 보태주지도 않았다. 가끔 아이가 아이를 낳아 맡기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길렀는데 뭐가 다를까 싶었지만, 함매가 키운 아이가 낳은 아이는 절대 안아주지 않았다.

아이뿐 아니라 돈도 받지 않았다. 아이 중에 키워준 은혜 갚겠다며 용돈이고 선물이고 들고 와도 일절 받지 않았다. 함매는 들고 나는 것에 항상 깔끔했다. 야멸차다 싶을 정도로.

 

함매에게 갔을 때 나는 세 살이었다고 한다. 기억나지 않지만 형들이 두 명 있었다. 두 명 다 내가 네 살 때 독립해 떠났다. 그 후에는 나만 있었다. 함매는 이미 너무 많이 늙어 있었다. 이제 아이를 키우지 않으려 했는데 어떤 여자가 나를 데리고 와서 사정사정하다가 한눈판 사이에 나만 두고 가버렸다 한다. 함매는 그 여자를 잘 몰랐다. 물어물어 왔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었던가 보다. 함매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키웠다.

 

나는 고분고분하고 밥도 잘 먹었다. 크면서 큰 말썽은 피우지 않았고 공부도 나쁘지 않게 했다. 나 같은 아이들에게 종종 있는 애정결핍증도 보이지 않았고, 눈치도 빨라서 누구에게 미움을 사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을 잘 따라 하며 중간이라도 가는 법을 알았다. 그러나 함매는 나를 뭔가 별종 취급했다. 처음에는 티를 내지 않았는데, 쫑이가 죽고 난 다음부터는 표정과 말투에 확연히 드러났다. 쫑이는 내가 오기 전부터 함매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함매는 쫑이를 나보다 더 애지중지했다. 함매는 그게 배알리 꼴렸던 내가 쫑이를 죽였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나도 함매 못지않게 쫑이를 좋아했다. 밤낮없이 짖어서 좀 시끄러웠지만 나에겐 함매보다 더 가족 같은 녀석이었다. 억울해서 몇 번이고 얘기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렇게 생각하시든 말든 관심 끊기로 했다. 나는 내 앞가림이 문제였다. 스무 살은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돈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형들이 함매와 살 때는 형제들이 많아서 서로가 서로를 도왔다. 그들끼리는 부대낀 정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형제 비슷한 것도 없었다. 나이가 스무 살이 다 되어 가는데 모은 돈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서 뻔뻔스럽게 커도 나갈 때는 훨훨 날아가는데 나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날개는커녕 깃털 하나도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땅을 파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물에 빠뜨릴 걸 그랬다. 그래도 키워준 함매인데 매장은 해드리고 싶었다. 밤새도록 파도 혼자라서 깊이 파지도 못했다. 그나마 함매 키가 작아서 동트기 전에 일을 끝냈다. 흙을 메우기 전에 함매가 아침마다 기도하던 십자가를 함께 넣어드렸다. 함매, 천국 가세요. 삽으로 축축한 흙을 다독인 후 고개를 들자 해가 뜨고 있었다.

 

“함매, 좆 간수 잘할 테니까 걱정 말고 편히 쉬세요.”

 

 

 

일요일 _ 밤에 갇힌 남자

 

   

“원체 씨 무협 소설 쓴다고 했지?”

“네. 아직 인기는 없지만요.”

 

평소 말수가 적은 옥씨 형님이 별안간 내 얘기를 물어서 의아했다. 무협 소설 좋아하셨나? 읽는 건 못 봤는데.

 

“무협 소설만큼 박진감 넘치진 않지만 내 얘기 들어볼래? 소설거리는 될지도 몰라.”

 

무료한 야간 경비 아르바이트. 들어서 손해날 게 뭐 있을까 싶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믿든 안 믿든 원체 씨 마음인데 일단 끊지 말고 들어줘. 사실 미친 소리로 들릴 게 빤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했으니까. 믿으라고 강요는 안 할게. 헛소리로 생각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만 줘.

 

친구가 꼬셔서 수도권에 집을 하나 샀어.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회사에 들어간 지 2년 만이었지. 들떴던 거야. 일도 좀 할 만해지고 연봉도 빵빵하니까 결혼 전에 내 집부터 장만해 놓으려고 했지. 아니, 사실 그 집에 계속 살 생각은 아니었고, 조만간 재개발한다고 하니까 몇 년 버티고 팔아서 서울에 입성하려고 했지. 지은 지 40년은 된 단독이었어. 화장실이 밖에 있는 그런 단층짜리. 이야~ 변두리라도 꼴에 역세권이라 매매가가 장난이 아니더라. 당연히 대출을 꼈지. 그러니까 은행과 공동소유지만 내 지분이 너무 작았던 거야.

 

그럭저럭 3년을 버텨서 드디어 재개발의 훈풍이 불었어. 대출금도 조금씩 줄여가고 있어서 머지않았구나 싶었지. 그런데 꼭 그런 사람 있잖아. 거기서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 뒷집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었어. 화딱지 나게 시끄러운 강아지 한 마리랑 인사도 안 하는 사내애 하나 키우는 노인네라 다른 갈 데도 없었겠지. 그런다고 재개발이 안 되나? 흐름 타면 끝나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그 개새끼가 너무 시끄러워서, 갈수록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내가 그때 한창 야근을 많이 했거든.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자야 살 텐데 이 새끼가 밤만 되면 짖어요. 내가 먹으려고 챙겨놨던 수면제를 고기에 끼워서 던져줬어. 나 좀 자게 너도 좀 자라고. 내가 전에 먹고 잤다가 아침에 지각해서 안 먹고 짱박아놓은 약이 있었거든. 난 그냥 좀 자라고 먹인 거였는데. 영원히 자버리더라고. 난 정말 조용히만 시키려던 거였는데.

 

다음 날부터였어. 내가 출근을 하려고 현관을 열면 밤이 되어버리던 게. 문을 닫고 창밖으로 내다보면 분명히 아침이거든? 그런데 현관을 열고 나가면 밤인 거야. 환장하지. 창밖으로 나가보려고 했어. 그런데 창밖으로 나가도 똑같네? 몸이 집밖으로 나가는 순간 싹~ 밤이 되어버려. 미친 소리 같지? 나도 내가 미친 줄 알았어. 수백 번을 해보다가 지쳐서 에라 모르겠다, 집에 들어가 다시 잤어. 꿈꾸는 거 같아서. 그러다 팀장한테 전화 와서 받고 나갔는데 또 그 모양이고. 어느 날은 작정을 하고 그 오밤중에 출근해서 아침이 되길 기다려봤거든? 그런데 꼭 시간을 늘린 것처럼 아침이 안 와. 회사에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잠까지 잤는데도 한밤중이야.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어. 내가 달리 어딜 가. 회사는 결국, 이 핑계 저 핑계 댔지만 짤렸지. 아니, 출근을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밤에 할 수 있는 일을 했지. 야간 경비가 제일 나았어. 집에서 너무 멀면 돌아가기 힘들기도 하고. 어쨌든 이상한 시공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라도 살려고 노력했지. 집이 문제야. 난 그 집의 밤에 갇혀버린 거야. 그러니까 재개발이 되어 집이 부서지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내일 철거하러 오는 날인데,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보기엔 멀쩡한데 망상장애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그런 걸 어설프게 들먹거리면 욱하고 공격 모드가 켜질지도 모르니 일단 장단을 맞춰주자.

 

“낮에 다닐 수 있게 되면 어딜 제일 가고 싶으세요?”

“월출산. 거기가 부모님 고향이라 매년 놀러갔거든. 부모님은 이미 다 돌아가셨고 친척 분들도 몇 분 안 남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어.”

 

다음 날부터 형님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집은 잘 부서졌을까? 그 양반의 밤은 아침으로 넘어갔을까. 아니면 지금도 어느 밤길을 헤매고 있을까.

 

 

 

월요일 _ 꿈, 꿈, 꿈

 

 

  그 밤이 그렇게 긴 밤이 될 줄은 잠자리에 들어갈 때까지도 몰랐다. 인간은 하룻밤에 세상 모든 경험을 할 수도 있나 보다.

 

상현달이 뜬 밤이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잠시 아파트 주차장을 내려다보다가 안방에 들어갔다. 익숙한 침대에서 잠은 빠르게 찾아왔다. 꿈은 언제쯤 시작되었을까.

 

나는 숨이 찼다. 숲을 달려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뒤쫓아온다는 걸 알았다. 나는 숨이 멎도록 뛰었다. 팔로 다 막아내지 못한 가지들이 얼굴을 할퀴었다. 그러나 달려야 했다. 너가 사는 게… 달리라고 내 안의 내가 채찍질하며 다그쳤다. 내가 사는 거야… 얼마나 달렸을까. 작은 동굴이 하나 보였다. 나는 일단 몸을 겨우 숨기고 근처에 있는 죽은 나무나 덤불을 끌어 모아 입구를 대충 막았다. 숨을 고르기가 힘들 정도로 침이 끈적하게 목에 걸렸다. 대체 여긴 어딜까. 나는 그대로 졸도했다.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목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아프고 따가웠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내겐 물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낡은 가방을 하나 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엔 딱딱한 빵 한 덩이가 있었다. 빵 한 덩이, 이것은 분명 어떤 여인이 급하게 보자기에 싸서 주었던 것이다. 누구였을까, 그 여자는. 빵을 내 가방에 넣어주고는 나를 집밖으로 내보냈는데.

 

“도망가! 끝까지 살아남아!”

 

절박하게 외치던 목소리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누구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 덕분에 산 것 같다. 나는 빵을 도로 챙겨 넣고 동굴을 기어나왔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상한 숲이었다. 나는 발길 닿는 대로 숲을 내려왔다. 겨우 마을에 다다라서야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나는 그 후 천 년을 용병으로 살았다. 가끔 농부로, 가끔 걸인으로 살았다. 살아내는 게 힘든 건 아니었다. 가장 힘든 건 천 년 동안 매일 봐야 하는 상현달이었다. 변화 없는 달을 볼 때마다 내가 와 있는 이곳이 내 공간이 아님을 곱씹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당연해졌다. 나는 오디세우스보다 더 많은 땅을 밟았고, 사신보다 더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장에서 빈 공책을 한 권 사 생각나는 대로 기억을 써내려갔다. 소설 같은 일기였다. 일기장만은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세계는 나에게 좁았다. 사람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 죽어갔다. 모두가 너무 짧은 생을 살았다. 나만 두고. 나도 좀 죽어보고 싶었다. 죽으면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험한 일은 다 하며 살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그럭저럭 쓸 만한 몸으로 일어났다. 불 속에 뛰어들기도 했다. 아파서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났을 땐 상처 하나 없었다. 미칠 노릇이다. 누군가 이 꿈을 깨워주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건가.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것은 평범한 공중화장실에서 내가 지퍼를 내리고 물을 빼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내 오줌 줄기가 시원하게 흡입구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아니, 내 눈에는 뽀송한 허벅지가 보이는데 피부로는 젖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뇌신경 오류인가.

 

그래, 이건 꿈이었지. 언제부터인가 잊고 있었지만. 이제 깰 때가 되었구나. 나는 장비를 잘 털어 팬티에 수납한 후 지퍼를 올렸다. 벨트를 점검하고 바지가 엉덩이에 너무 끼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하필 마지막이 화장실이라니.

 

이제 이 문을 열면 드디어 꿈에서 깨는 거겠지. 오래 살았다, 징글징글하게. 내 일기장은 어떻게 될까. 사라지겠지. 나는 첫 페이지만 읽고 덮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문을 열고 현실로 탈출하자. 그러고 보니 현실의 내가 어땠더라. 괜찮겠지. 깨면 금방 기억이 날 테니. 하지만 여기서 쌓은 지혜가 한 움큼만이라도 남으면 좋을 텐데. 나는 하얀 문을 열었다. 일부러 눈을 감고.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두려웠다. 다 잊어버리면 허무할 것 같아서. 다 기억하면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하지만 후각세포는 이미 낯선 공기를 감지했다. 떠도는 희미한 냄새가 낯익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양말이다.

양손으로 바닥을 만져보았다. 미지근한 시트다.

왔구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배가 땡긴다. 배가 불룩했다. 지나치게.

 

“자기, 양수가 터진 것 같아.”

 

내 얼굴이 말했다. 꿈이 내 몸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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