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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잃어버린 말의 세계

2022.02.17 13:0202.17

내 말이 들리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 일까.

"오늘 뭐 먹을까?"  하경이 말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하경은 매운거? 담백한거? 고소한거? 단짠단짠? 뭐가 좋지? 역시 치킨? 오늘은 치킨이 땡기는 것 같네. 하경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혼잣말도 아닌 질문도 아닌 말을 나에게 끊임없이 내뱉었다. 하경의 말에 답하자면 나는 전날 치킨을 먹었었고 그래서 딱히 치킨이 땡기지는 않았다. 매콤한 쭈꾸미볶음 같은 한식이 먹고싶었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반대로 내 입은 "나도 오늘은 치킨이 먹고 싶네. 가자 치킨먹으러"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하고싶은 말을 삼켰다.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어릴 때의 나는 그래도 원하는게 있으면 말을 하는 아이였다.
"은우는 커서 뭐가 되고싶어?" 부모님은 어린 나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은우는 그림 그리는게 좋으니까 커서 화가가 되고싶어요."  나는 내가 커서 되고 싶은걸 얘기했다. 그러자 부모님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은우야 화가는 돈 많이 못벌어. 우리 은우 초콜릿 좋아하지. 초콜릿도 마음껏 못사먹어. 직업은 안정적인게 제일 좋아. 선생님이나 공무원처럼.그림그리는건 취미로도 할 수 있어" 나는 궁금했다. "내가 선생님하면 좋아요?" "그럼 선생님이 최고지" 그렇게 말하면 부모님은 웃었다. 나는 하고싶은 말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웃는 얼굴이 좋아 그렇다면 나중에 커서 선생님이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장래희망은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 부모님은 나에게 뭘 배우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검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부모님은 "얘는 여자애가 무슨 검도야. 피아노 어때? 은우야  봐봐. 악기연주하는거 멋있어 보이지 않아? 들어봐.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니." 부모님은 피아노씨디를 들려주며 말했다. 나는 검도를 배우고 싶었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했다.

하고싶은걸 말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이전에도 몇몇의 질문과 몇몇의 대답이 있었고 내가 부모님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않으면 그들의 표정은 좋지않게 바뀌었다. 옷 취향이나 먹는 메뉴같은 사소한 것부터 진학같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날 설득했다. 난 설득당할수밖에 없었다. 안돼라는 말을 듣는데 지쳤으며 부모님의 웃는 표정이 좋았고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부모님은 자주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은우는 어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 다른 애들처럼 떼 한번 안쓰고 어쩜 이렇게 어른스럽니. 우리는 은우 부모님인게 너무 좋다."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으며 지금와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최악의 칭찬이었다. 나는 착한아이가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점점 속마음을 말하지 않게 되었고 나보다 그들이 원하는 답을 말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처음에는 부모님 앞에서만 이었다. 하지만 점점 나는 누구앞에서건 그들이 원하는 답을 했다. 나를 억눌렀고 나는 그게 배려인 줄 알았다. 아니 배려는 맞았을거다. 단지 나는 나를 뺀 나머지를 배려했다. 정작 제일 중요한 나 자신은 무시했다. 나는 그 곳에 있었지만 없었다.

괜찮았다. 괜찮은 줄 알았다. 변화가 생긴 건 어느날이었다. 그날은 몸이좋지 않았고 집에가서 쉬고싶었다. 강의가 끝난 후 으레 우리는 같이 놀았기에 하경에게 오늘은 미안하지만 집에 가서 쉬고싶다고 했다. 나는 순간 내 몸이 아픈게 미안해야 할 일인가 싶었지만 하경이 서운할 수 있기에 습관적으로 그 말을 붙였다. 나는 하경이 어떤반응을 할 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하경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은우. 몸 많이 안 좋아? 나 오늘 노래방가고 싶었는데. 같이 가면 안돼? 나 진짜 부르고 싶은 노래 있는데~" 역시나 하경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절에 약해고 포기가 빨랐다. 그 날 나는 결국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노래방에 가 하경의 노래를 멍하니 들었다.

생각해보면 신기했다. 내가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하경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건지 아니면 그런사람들이 나같은 사람을 잘 찾는건지 어디를 가든 내 주변에는 하경같은 사람이 항상 존재했다.

그 날, 안 좋은 몸을 이끌고 노래방을 갔던 그 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무수히 많은 작은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에는 각 각 풍선이 매여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풍선안에는 종이쪽지가 들어있었는데 그 쪽지는 접혀 있어 뭐가 적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풍선을 멍하니 보고있는데 갑자기 풍선 위에 사람이 나타났다. 그사람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 풍선위에 떠 있었다. 신기해서 바라보니 그 사람은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풍선위를 이리저리 밟으며 돌아다녔다. '서커스  공연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사람의 옷이 펑소리와 연기를 내며 삐에로복장으로 바꼈다. 깜짝놀라 소리를 지르니 그사람은 그제서야 나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온 그 사람의 얼굴이 이상했다. 달걀귀신처럼 눈코입이 없었다. 나는 무서워 도망쳤지만 도망치는 나보다 그 것의 발걸음이 더 빨라 금방 따라잡혔다. 맨들한 얼굴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 것의 입은 어디있는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어서오세요. 여기는 잃어버린 말의 세계. 이 곳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무서웠지만 무서움보다 호기심이 컸던 나는 그 것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말의 세계요?"

어리벙벙한 내 질문에도 그 것은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

"네, 이 곳은 잃어버린 말의 세계. 이은우님. 당신이 잃어버렸달까 묻어버렸달까 그런 말들이 여기 잠들어 있습니다. 저기 풍선안에 종이쪽지가 보이시나요? 그 쪽지에는 이은우님이 잃어버린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없어 그것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제가 잃어버린 말이라는게 뭔가요?"

그러자 그 것은 바보같은 질문도 다 있다는 듯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 입니다. 이은우님이 잃어버린 말. 그것은 이은우님이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고 마음속에 삼켰던 말이며 했지만 다른 이들이 들어주지 않아 허공에 흩날렸던 말들입니다."

나는 그 말에도 여전히 모를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저 무덤과 풍선들은 뭔가요?"

그 것은 아주 좋은 질문이라는 듯 흥분해서 커진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무덤과 풍선말인가요. 그 것들은 말무덤과 말풍선입니다. 이은우님이  잃어버린 말들이 하나하나 여기에 묻혀 무덤이 되었고 거기서 풍선이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자라난 풍선들은 속에 잃어버린 말들을 하나씩 품고 떠있게 되었죠. 그게 이 잃어버린 말의 세계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말들........저게 다.......?"

나는 다시 무덤과 풍선들을 봤다. 아까는 별 의미 없이 무서움만 줬던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무수히 많은 무덤의 갯수에 어쩐지 슬퍼졌다.

그렇게 무덤과 풍선들을 바라보다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면 꿈이 기억나지 않기 마련인데 그 꿈은 깨고 나서도 기억속에 선명했다. 나는 꿈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으로 그렸다. 오랜만에 잡아본 오일파스텔은 잃어버린 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아련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중 부모님이 예고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우야, 일어났어? 교회가야지." 나는 딱히 종교를 믿지않지만 부모님이 다니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은우 어릴 때 화가 되고싶어한거 기억하냐며 얘가 그렇게 순진했다며 자신들만의 미화 된 추억에 빠졌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리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많은 무덤들. 무덤들을 보던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무덤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아빠 저 교회 안 갈래요." 그런 나를 부모님은 표정을 찡그린 채 쳐다봤다. "은우 아직 아프니? 어제 몸 안 좋다더니 계속 안 좋아?" 나는 솔직하게 말 할까 아니면 아프다고 할까 고민하다 무덤을 떠올리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니요, 몸은 이제 안 아파요. 그냥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 내 말에 부모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우야, 갑자기 왜?" 무덤을 늘리고 싶지않아. 나는 그 생각 뿐 이었다. "예전부터 가고싶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가기에 따라간 것 뿐이고요. 더 이상은 가고싶지 않아요." 그런 내 말에 부모님을 슬픈 것 같기도 화가 난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은은. 갑자기 이러는거 보니 뭐 스트레스 받는 일 있구나. 우선 시간없으니까 교회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자. 얼른 옷입고  나와." "그게 아니라....." "이은우" 부모님은 다른 말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갈아입고 나가겠다고 했다. 내 말은 그들을 미끄럽게 지나갔다. 잃어버린 말의 세계에 무덤이 하나 더 생겼겠구나. 나는 익숙한 무력감을 느꼈다.

교회를 다녀와서 부모님은 나에게 대화하자고 했다. 설득과 수긍밖에 없는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속이 답답했다.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대화를 피해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그 세계의 꿈을 꾸길 바라며.

다시 왔다. 잃어버린 말의 세계. 그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풍선위에 떠 있었다.

"또 봽습니다. 이은우님. 저번에는 그냥 가셔서 어찌나 아쉬웠는지.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 것은 한 번 본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쩐지 그 친근함이 싫지 않았다.

"나도 다시 봐서 반가워요.어......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네요. 이름이 뭔가요?"

그런 내 말에 그 것은 이름같은 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이름이라. 저도 그런게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잊어버렸습니다. 중요한가요. 그냥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주세요."

나는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심했다. 그러나 고심하면 할수록 더더욱 만족할만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다 정했다. 그 것이라고. 내가 무언갈 정의내리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무것도 정의내리지 않는 이름으로. 내가 정한 이름을 들은 그 것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그럼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 신기했다. 혼자 속으로 그 것이라고 부를때와는 다른 친근함이 샘 솟았다. 물론 그것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꿈이긴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궁금한 걸 그 것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것씨, 그 것씨는 누구예요? 왜 여기 있어요? 여기 꿈 맞죠? 저는 어떻게 다시 이 꿈을 꿀 수 있게 됐을까요? 저 풍선들은 터지면 어떻게 되죠?"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 제일 궁금한 걸 물었다. "무덤이 또 늘어났나요?"

그 것은 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 왜 있는지 모른다. 이 곳은 꿈이지만 꿈과 환상의 나라 원더랜드라고 생각해달라. 이 꿈은 처음 꾸기는 힘들지만 꾸고나면 언제든 원할 때 이어서 꿀 수 있다. 저 풍선들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좀 있다 보여주겠다. 무덤은.....늘었다. 아직 풍선이 자라지 않았지만 곧 자랄 것이다.

진짜 늘었구나. 나는 어쩐지 씁쓸해졌다. 그 것은 씁쓸해하고 있는 내 손을 잡고 풍선앞으로 갔다. 아, 풍선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고 했지. 그것은 이내 날카로운 손톱으로 풍선을 터뜨렸다. 풍선이 터지자 눈 앞에 기억이 떠올랐다. 이건 어린 날의 내 기억이다. 그 날은 치마를 입고싶지 않았고 입고 싶지 않단 내 말에 부모님은 즉각적으로 안 돼를 외쳤다. 나는 더 말하지 못한 채 치마를 입었다. 그런데 눈 앞에 떠오른 기억은 달랐다. 치마를 입기 싫다는 말에 바지를 건네는 부모님의 기억으로. 이럴수가. 이게 뭐지. 나는 믿기지 않는단 표정을 지으며 그 것을 바라봤다. 그 것은 그런 나에게 설명해줬다.

"이 풍선들 속에는 이은우님이 잃어버린 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건 전에도 말해드린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풍선을 터뜨리면 잃어버렸던 말들을 찾게됩니다. 그리고 그 때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럼 설마 이게 다......"

"네. 이은우님. 여기 있는 풍선들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터진 풍선 속 쪽지를 주워 펼쳤다. 치마입기 싫어요. 쪽지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쪽지를 손에 꼭 쥔 채 다른 풍선으로 향했다.그리고 그 풍선을 힘으로 찢어발겼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던 날의 일이다. 나는 방과 후에는 학원을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생일파티에 초대받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 날은 반에서 인기있던 친구가 반 전체를 초대했다. 나는 가고싶었지만 방과 후 학원수업이 있어 갈 수 없었다. 부모님께 가고싶다고 말해볼까 했지만 어릴 때 친구 다 소용없다, 친구는 나중에 대학가서 사귀면 된다는 말을 듣던터라 가고싶단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여기 기억 속에서 나는 그아이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신나게 축하노래도 부르고 케이크도 나눠먹으며 즐겁게 반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다. 주운 쪽지를 펼치자 친구 생일파티에 가고싶어요 라고 적혀있었다. 눈물이 났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그립고 아쉬워서 슬펐다. 그리고 기뻤다. 이렇게라도 놓친 기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계속해서 풍선을 터트리고 터트렸다. 기억은 자꾸자꾸나와 날 즐겁게했고 쪽지는 쌓여갔다. 그  것은 그런 날 그저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것의 눈은 없었으므로 나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즐겁던 와중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야. 이은우. 일어나보렴. 얘가 왜 이렇게 못 일어나. 나는 그 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깬 내 눈앞에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은우야 너 괜찮니 무슨 잠을 이렇게 오래 자. 너 12시간도 넘게 잤어. 걱정스레 말하는 그들의 말이 나는 귀찮았다.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 그렇게 두지않았다. 싫다는 내 말도 듣지 않았다. 날 깨웠고 옷을 갈아입게 했고 밥을 먹게 했고 강의를 들으러 보냈다. 그 과정에 많은 잃어버린 말들이 생겼지만 괜찮았다. 잠들수만 있으면 꿈에서 내가 원했던 기억을 볼 수 있었다. 강의를 듣는 중에도 듣고 나서도 그 생각 뿐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의 시간을 현경이 하자는 대로 해도 괜찮았다. 그 시간에도 잃어버린 말들은 생겼으니까. 빨리 이 시간이 지나고 잠들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그 시간이 찾아왔다. 잠잘 수 있는 시간. 밥도 먹지 않은 채 은우는 잠에 빠져들었다. 은우는 행복했다. 얼른 꿈을 꾸고싶었다. 그리고 꿨다.다시 잃어버린 말의 세계에 왔다. 은우는 그 것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풍선을 터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그 것의 얼굴에 윤곽이 희미하게 나타난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은우는 풍선을 터뜨리는게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터트리고 터트리고 또 터트렸다. 그렇게 터트려도 풍선은 아직 많았다.

나는 점점 잠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풍선 속 잃어버린 말을 되찾아 자신의 목소릴 낼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잃어버린 말의 풍선을 터뜨리는게 더 즐거웠으므로 나는 하고싶은 말을 계속 삼켰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잠자는 시간이 길어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보였다. 잠자는 시간이 길어져 하루에 18시간을 넘길무렵 부모님은 그때서야 이상함을 깨닫고 은우를 깨우려했다. 은우야.이은우. 나는 꿈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깨고싶지 않았다. 현실보다 꿈 속이 행복했다. 자꾸 부르는 자신의 이름도 귀찮았다. 할 수 있다면 이 이름도 버리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한 순간 그 것이 다가왔다. 그제서야 바로 본 그것의 얼굴은 매끈했던 처음과 비교해 꽤 윤곽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어쩐지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를 바라보며 그것은 말했다.

"이름이 귀찮으신가요? 그렇다면 이름을 버리는 건 어떤가요?"

이름을 버려? 기억에 취해 멍한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흩날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 내 반응을 고민하는 건 줄 안 그 것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름을 버리면 영원히 이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흩날리던 단어들이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영원히 여기에? 깰 필요 없이 계속 풍선을 터뜨릴 수 있어?"

그런 내 말에 그 것은 신뢰를 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결정에 쐐기를 박듯 평~~~생 이라고했다. 나는 깊게 생각 해 보지 않고 그럼 그렇게 하자고 했다. 이름을 버리겠다고. 그 이후의 결과나 그런 건 아무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그리고 나서 계속 풍선을 터뜨렸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내 몸에서 나 온 이은우라는 글자를 흡수하던 그 것의 모습을, 윤곽이 점점 선명해져 내 것과 똑같이 변해버린 그 것의 얼굴을. 그리고 터뜨린 풍선에서 모아온 무수한 쪽지뭉치를 줍던 그 손을. 희미해져 가던 그 것의 형체를. 나는 그저 풍선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 후 은우를 알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돌았다. 이은우가 변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친했던 친구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은우 성격이 이상해졌다고. 예전같으면 들어줬을 말들도 이제는 안 들어준다고. 이기적이게 변했다고. 은우는 그 말들을 들으며 슬며시 미소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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