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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퀴블리오쿠스의 구(球)

2024.03.28 00:3703.28

1. 2052년 한 저택의 서재에서

 

 

 

지난해 4월 나는 당의 초청을 받아 톈궁 우주정거장에서 “뇌성보화 프로젝트”의 실연을 보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당은 동아시아의 광대한 하늘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구 상공의 거대한 유리창을 통해 화성에서 채취한 얼음이 거대한 구름으로 변해 하늘을 덮는 모습을 직접 구경할 수 있었다.

 

정거장에는 전세계에서 온 각계 명사들이 백주를 하나씩 손에 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인 목적에 걸맞게 앞으로의 기술 발전과 과학적 쟁점에 관한 자신들의 생각을 열심히 말했지만, 유일하게 이제현 기자만은 사이비 종교와 유사과학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는 전세계의 기인들을 즐겨 취재했으며 특히 집중한 분야가 바로 위의 둘이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그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집단을 취재하게 되었는데, 이미 남한에서는 이들에 대한 기사가 제법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고, 매우 흥미 있게 들은바, 이제현 기자가 내게 말해준 이야기를 여기에 간단히 기록한다.

 

 

 

지구평면론 여성주의의 존재를 알게 된 이제현 기자는 곧바로 그들의 웹사이트를 찾아 취재를 요청하는 연락을 보냈다. 기자로서 거부할 수 없는 소재였을 것이다.

 

사이트는 사교들의 전형적인 미학-강렬한 색과 이미지의 무분별한 사용, 인터넷 매체에 다듬어지지 않은 전통 시대의 감성과 문체, 말끔하지 못한 인터페이스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단체의 이름은 “숄로틀의 아이들”이었다. 숄로틀은 아즈텍의 신으로 해가 질 때마다 태양을 안내하여 지하세계를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는 역할을 맡는다고 한다. 태양이 땅 “밑”으로 진다는 걸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지구평면론을, 백인들에 의해 없어진 비서구 문명의 신이라는 점에서는 여성주의를 훌륭히 대표하는 이름이라 하겠다.

 

이 단체는 이름과 간단한 사상만을 들어도 기괴하고 자신들의 사이트에서도 제대로 된 설명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제현 기자는 그렇게 많은 당혹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는 기인들에게 노련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기인들은 언제나 각자의 환경과 천성에서는 합리적인 일반인들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언젠가 그는 괴기 영상을 올리는 유튜브 채널의 일인 제작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이 채널의 영상들은 다양한 내용을 가지지만, 대개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먼저 낮을 배경으로 그다지 이상해보일 것 없는 행동들을 하는 제작자의 모습이 담긴다. 다만 얼굴 부분에 사각형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 모자이크에서 온갖 기괴한 이미지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영상의 제 2막이라 할 수 있는 밤중에는 온갖 기괴한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낮 영상에서 배경처럼 지나갔던 소품이나 행인 등이 징그러운 형태로 합성되어 움직인다. 화면의 가운데에는 여전히 얼굴이 모자이크된 여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춤을 춘다. 이때 낮과는 달리 주인공은 교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낮과 밤 모두 제작자가 직접 작곡한 난해한 음악이 흐른다.

 

제작자는 이것이 자기 나라의 고전극인 노의 현대적 계승이라고 설명했다. 이 극은 대개 원념을 품은 유령이나 요괴를 주인공으로 하고 이들을 안식으로 이끄는 고승이 그와 짝을 이룬다. 극의 전반부에는 원령이 정체를 숨긴 채 나타나 고승과 대화를 나눈다. 밤이 되면 원령은 정체를 밝히고는, 자신의 원념과 과거사를 모두 풀어낸 후 성불하여 사라진다. 그런데 현대에는 유령을 상대해 줄 고승따윈 없다.

 

유튜브를 무대로 전개되는 고승 없는 노에서 원령은 더욱 혼란스럽고 광기에 찬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노의 원령들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가면을 쓰는데, 유튜브의 원령은 그런 안정된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얼굴을 자신의 가면으로 삼는다. 그런 한편 배우의 얼굴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턱과 옆얼굴의 움직임 등이 그대로 보이는 노의 가면을 계승해 영상 속 모자이크 역시 이목구비만을 겨우 가린다.

 

밤에는 원념을 풀지 못하는 영혼의 번뇌가 극심해진다. 낮에 평범한 일상으로 위장해 있던 원념들은 변장을 풀고 본모습을 드러내 끔찍한 과거를 계속 되풀이한다. 모든 소품과 배경, 행인들은 주인공의 과거 트라우마와 관련된 모습으로 변형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을 풀 길 없는 영혼은, 단지 홀로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 칠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그렇게 극이 끝난다. 영상 내내 노의 음악을 제작자가 기괴하게 편곡시킨 음악이 흐른다.

 

제작자는 자신이 결코 풀어낼 수 없는, 풀어서는 안 될 한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영상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학창시절 자신이 따돌림을 시켰던 학생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모든 면에서 제작자보다 우월했던 그 학생은 자살한 이후에조차도 여전히 사랑을 받았으며, 이를 깨달은 순간 죽어 유령이 된 것은 그 학생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제작자는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에 공감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건 부당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제작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밀도의 감정은 그 자체로 어떤 물질처럼 무게를 갖게” 되며, “이 무거운 물건을 길에서 어떤 식으로든 치워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문자 그대로 멸해지기를 원했다. 노에서 원령들은 평화적으로만 성불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고승들은 강력한 주문을 빌어 강제적으로 원령을 소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는 그것조차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유령의 존재는, 혹은 제작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밀도의 감정 그 자체가 아무런 정당 근거 없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로 인정받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현 기자의 인터뷰에 즈음하여 그의 예술세계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제작자는 자신의 원념을 게속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비록 원념이 멸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원령의 얼굴을 드러내는 모자이크는 단지 검은 사각형이 되었다. 밤의 시간에 그를 둘러싼 과거의 비극들도 좀 더 현실적이고, 직설적으로 바뀌어갔다.

 

제작자의 본업은 가정주부였다. 영상은 남편이 출근하고 자식들이 등교를 했을 때 틈틈이 만들었다고 한다.

 

 

 

“숄로틀의 아이들”은 이제현 기자를 시골의 전원주택으로 초대했다. 작은 이 층짜리 집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마당에는 해바라기가 잔뜩 자라나 이제현 기자는 정글을 지나듯 걸어가야만 했다. 그를 맞아들인 것은 연륜이 느껴지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작고 동그란 안경 너머 두 눈은 언제나 웃는 듯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최윤나래라고 소개하며 그는 이제현 기자를 서재로 안내했다.

 

장엄할 정도의 서책들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이제현 기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곳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눕고 뒹굴고 뛰면서 책장 사이를 노닐고 있었다. 나이도 인종도 다양해보였지만 그들 모두 최윤나래를 엄마라고 불렀다. 물론 생물학적인 엄마를 의미하는 게 아닌 것이 분명했다.

 

최윤나래는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을 전공한 교수였으나 스스로는 교수의 호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갈수록 그의 연구 지향은 고대의 신비주의와 오컬트를 여성주의와 연결짓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결국 아카데미컬한 지성과 그를 결별하게 만들었다. 그 후 최윤나래는 “직접 대중들과 소통”하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그들과 일종의 대안가족을 꾸린 것이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숄로틀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을 고안해낸)중남미 전공 역사학자나 천문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성들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다른 여성주의 진영들은 숄로틀의 아이들에 대해 무시와 조소로 일관했다. 최윤나래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수천년 동안이나 우리의 의식에 강력히 자리잡아 온 남성중심적 과학세계관을 단박에 깨뜨리는 것은 여성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제현 기자는 역시 그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남성중심적 과학세계관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지구평면론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사과학을 주장하는 이들 중 고학력자가 많다는 것이야 놀랍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든 근거가 일반적인 “과학적” 근거가 아니었다는 점은 이제현 기자를 제법 놀랍게 만들었다. 그들이 이제현 기자에게 가장 먼저 들려준 것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로도스의 자연철학자 퀴블리오쿠스에 대해서였다.

 

퀴블리오쿠스는 서구 역사에서 최초로 지구구형설을 제기한 학자이다. 흔히들 에라토스테네스를 떠올리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지구가 구형이라는 전제 아래 둘레를 계산한 것이고 지구구형설은 퀴블리오쿠스가 최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시대를 살았던 학자니만큼 그의 인생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로도스 섬 태생이 아니라 소아시아에서 이주해 왔을 수도 있고, 확실히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인들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배를 보고 지구구형설의 근거로 삼았다. 평면의 공간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물체를 보면 계속해서 작아지기만 할 뿐이다. 반대로 구형 공간에서 물체가 멀어져가면 기울기의 차이로 인해 물체가 땅 아래로 점점 더 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배를 보면 수평선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듯이 사라진다. 따라서 지구는 구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에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는 물체의 기하학적 형태를 추론하는 데 있어서, 시각 정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전제다. 발과 손을 통해 매일 느껴지는 촉각적인 감각에 비해, 시각이 알려주는 감각이 더 우위의 증거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구를 우리가 촉각적으로 평평하다고 느낌에도 시각이 둥금의 징후를 본다는 이유로 그 감각을 기각할 수 있다.

 

이제현 기자는 지구구형설이 평면적 촉각을 설명할 수 있는 데 반해 지구평면설은 구형적 시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이에 반론하고자 했다. 지구구형설은 인간이 지구에 비해 너무 작기에 촉각으로 곡률을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평면적 촉각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지구평면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장 이 반론은 막혔다. 구가 너무 크다면 촉각은 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제현 기자는 서재에 있던 지구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세웠다. 그러자마자, 그는 이것이 손가락에는 평면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구형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는" 구형의 형상이 더 실재적임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순전한 촉각만을 가지고 이를 다시 증명하기 위해 이제현 기자는 손바닥을 펼쳐 지구본에 댔지만, 작은 표면적의 촉각과 큰 표면적의 촉각 중 어느 것이 더 실재에 가까운 촉각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다시금 시각을 절대적 기준으로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전제는 기하학적 동일성과 시각적 동일성이 동일하다는 전제이다. 하나의 구와 그것에게서 얻은 시각적 정보는 완전히 분리불가능하다. 그래야만 어떤 도형에게서 보았던 시각 정보가 다른 도형에서도 관찰된다면 이는 반드시 같은 도형임을 의미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다지 당연한 전제가 아니어 "보인다". 이제현 기자가 "보였듯이" 다른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하나의 도형을 감각하는 촉각도 자신의 감각 기관의 상황에 따라 도형에 대한 동일하지 않은 정보를 얻었다. 그렇다면 시각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시각 역시 경험적 신체를 통한 감각인 이상 기하학적 동일성만큼의 일관된 동일성을 가지리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같은 감각인 촉각처럼 시각이 불안정하다면 그것이 같은 도형에 무조건 같은 정보를 얻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들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전제들은 사실, 퀴블리오쿠스가 헬리오스의 강력한 권능을 증명하기 위해 행한 신학적 논변을 통해 처음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는 자연학과 기하학을 그러한 신학의 일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후의 학문들에서 그러한 헬리오스주의적인 전제들이 무비판적으로 남아 있게 됐다는 것이다. 2037년 출토된 그의 저술들은 이 태양신 숭배 사상이 지구구형설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퀴블리오쿠스는 헬리오스가 그 어떤 신들보다도 위대한 신들의 왕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태양이 아르케, 즉 모든 것들의 원형질이라는 주장으로 표현되었다. 아르케로서의 태양이 가지는 장점을 퀴블리오쿠스는 아낙시메데스의 공기 아르케론을 비판하면서 전개한다.

 

그가 보기에 아낙시메데스는 그의 스승이 제기했던 무한자 아르케론의 문제, 즉 대립적인 세계를 만들기에 무한자는 너무 단일하다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공기는 무한한 동시에 변화한다는 점에서 더 나은 대답일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변화를 보이는 일 없이 균일하다는 문제가 남아 있다. 공기가 극적인 온도나 부피, 밀도의 변화를 보일 때는 이미 굳어진 사물이 영향을 줄 때뿐이고 공기 스스로의 변화는 기껏해야 바람 정도인데, 이는 단지 위치 변화만을 보이기에 만물생성의 가능성을 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들은 규칙성이 옅어서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

 

반면에 태양은 무한정적이고, 변화하며, 또 그 변화가 규칙적이고 자체적이기까지하다. 공기와 달리 태양은 땅위에 있는 그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형태가 침범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움직이며 이 움직임은 매우 규칙적이다. 태양에 가깝고 먼 데서 밝음과 어두움이 나뉘어지고(불이나 번개는 어디까지나 매우 국지적으로만 이런 대립을 나눈다), 음지에서는 축축함, 차가움 등이, 양지에서는 건조함, 따뜻함 등이 생성된다. 그리고 태양의 위치가 지속적으로 바뀜으로서 이런 성질들이 상호교차하며 복잡한 사물들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태양이 아르케이므로 태양을 지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인 시각이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된다. 또 태양은 규칙적 운동의 근원이자 완전한 원으로서 기하학적 개념들과도 연관지어졌다. 신전에 있는 헬리오스의 신상이 실제 신의 신성을 받아 성스러워지듯 눈도 태양의 빛을 받아 앞을 밝힌다. 지상의 모든 둥근 눈들은 헬리오스의 신상이다.

 

또 시각을 가진 인간의 눈에 태양의 규칙성이 들어와 기하학적 사고를 가능케 한다. 태양을 잠시나마 보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둥근 잔상이 바로 그 실례로, 이 잔상이 기하학에서 다루는 원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이 원은 직선들의 시초이기도 한데, 퀴블리오쿠스는 이에 대한 기술에서 미분의 개념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남긴다.

 

이렇듯 다분히 고대의 자연철학적 맥락 속에서 시각의 우월성과 시각의 기하학과의 긴밀한 관계가 정당화된다. 퀴블리오쿠스가 이런 논변들을 근거로 오직 시각에서부터 얻어진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고 선언하는 내용에 바로 뒤이어, 유명한 지구구형설과 수평선에 대한 관찰이 이어지게 된다.

 

이때 지구구형설은 당시 로도스의 어느 밀교적 제의에 대한 퀴블리오쿠스의 비판과 관련이 있다. 퀴블리오쿠스가 지극히 경멸하여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던 이 제의는 태양을 안내하는 대지의 여신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태양이 땅 아래로 졌을 때, 지하세계에서 태양을 인도하는 여신을 위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퀴블리오쿠스는 태양이 여신의 인도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헬리오스의 권위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이러한 신화를 반박하기 위해서 퀴블리오쿠스는 태양이 땅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밤이 곧 태양이 지하세계로 가는 시간이라는 사고의 근간인 태양의 땅 밑으로 지는 현상을 해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요컨대 태양의 지평선 하강을 다르게 설명하기 위해 배의 수평선 하강이 관찰되었던 것이고, 끝내 지구구형설이 도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우주론에서 지구는 다만 태양의 그림자로 전락한다. 태양이 원형의 궤도를 도므로 궤도 가운데 지점은 태양이 어디에 있든 어느 정도의 어둠을 유지한다. 이 "고여 있는" 어둠이, 차츰 굳어져 땅을 이루는 것이며, 태양의 빛이 원궤도를 따라 미치니만큼 궤도 중심의 대지는 마땅히 원형이다.

 

여기서 여성주의적 맥락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퀴블리오쿠스는 대지의 여성적 힘에 비해 그의 남성 신을 한없이 위대한 자로 찬양하며 여신을 헬리오스의 한갓 잔여물로 깎아내린다. 그는 헬리오스가 여신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그녀의 천한 영역에 발을 들어놓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퀴블리오쿠스의 또 다른 저술은 가정 질서를 주제로 한 잠언집인데, 여기서 퀴블리오쿠스는 정당한 결혼의 유일한 방식은 오직 약탈혼과 매매혼뿐이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주(主)가 세워지지 않으면 결혼은 결합이 아닌 다만 혼란과 불안한 협정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쪽이 다른 한쪽의 그림자가 되어야하며 그러려면 다른 쪽이 “마치 태양이 그렇듯이” 광채를 발해야 한다. 전사로서의 힘이든 물질적 부이든 말이다.

 

거의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플라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러한 사유는 서구의 지성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현대 과학에까지 이 가부장적 사고가 전승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구구형설이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제현 기자가 말했다.

 

제가 아는 한 지구구형설의 꽤 많은 증거가 시각적 관찰에 기반하기는 합니다. 여러분들은 우주선을 타고 나가 직접 지구를 보는 방법도 단지 시각일 뿐이므로 인정하지 않겠군요. 하지만 시각적이지 않은 증거도 많습니다. 바로 실증성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구의 곡률을 고려하여 고안된 도로나 인공위성, 우주선 등은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시각적으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정말로 곡률을 계산해서 만들어진 걸까요?

 

정부의 음모다, 이건가요.

 

태양과 땅은 우리 민중들이 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설계되는 과정은 아니니, 의심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설령 사실이라 해도 실증성, 실용성 같은 것들은 그 기준이 유동적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다른 대안적 지구 모델에서는 훨씬 더 성공적으로 그것들이 작동할 수 있는 지도 모르죠.

 

두 번째 질문이 그 대안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단체는 분명 지구평면설을 주창하고 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들은 것은 지구구형설에 내재된 이념적 전제들뿐입니다. 지구평면설은 어떻게 증명됩니까? 그리고 그것은 지구구형설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실증성 혹은 실용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의 지구평면설은 과대평가된 태양의 체제에서부터 대지가 가진 본래의 가치를 되돌려주고자 하는 저항적 언어입니다. 우리는 아르케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비록 근대 과학은 그러한 것을 명시적으로 상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앞서 증명했듯이 아르케론의 자장 아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르케는 퀴블리오쿠스가 그랬듯이 일상 세계에서 발견되는 사물 한 가지를, 다소의 근거와 비약을 통해서 그것이 기반하는 일상 세계 이상의 것으로 신화화해야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근대 과학이 자랑하는 일상을 넘어선 객관적 기준이라는 것도 이런 비약이 없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평면설에 대한 우리의 근거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감각, 단지 그뿐입니다. 우리에게 땅은 모든 존재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무한한 평면으로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고 교류하는 것들은 땅의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땅은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없는 듯 있는 “지반”으로 있습니다. 텅 빈 우주공간에서는 땅 위에 서 있을 때보다 사물들과의 교류가 훨씬 더 혼란스럽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반은 하나의 감각으로부터만 일상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로 촉각입니다. 감각 대상과 신체 간의 물리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이 감각은 사물을 자신의 지반으로부터 붕 뜬 추상적 존재자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는 다른 감각들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촉각을 통해서 언제나 땅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이 주의 기울지 않는 무(無)야말로 모든 인간 활동의 근원이 됩니다. 여기서 아르케는 기껏해야 임의적인 도구입니다.

 

요컨대 퀴블리오쿠스의 이론을 뒤집어, 땅을 신들의 왕으로 찬양하고 촉각을 그것을 알 수 있는 특권적인 감각으로 부르겠다는 것이군요. 거기서 지구평면설이 도출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제현 기자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제현 기자는 이 장황한 사변을 충분히 들었다고 판단하고 그만 자리를 떠나고자 하였다. 그러기 전에 최윤나래는 마지막으로 이제현 기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를 서재의 한 계단으로 안내했다. 계단은 아래로 깊이 내려가 굳게 닫힌 철문으로 이어졌다. 이제현 기자는 아까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다른 여인들이 어느새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최윤나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지하실은 어두웠다. 최윤나래는 이제현 기자에게 손전등을 건네주고 자신이 길을 찾을 동안 앞을 비춰주길 부탁했다. 책장을 이루는 짙은 색의 목재가 나타나 주름처럼 패인 흰 먼지를 조금씩 허공으로 흩뿌렸다. 미약한 빛 속에는 커다란 책장의 모습이 다 담기지 않아 이제현 기자에게는 어둠에 매달려 있는 종유석 기둥처럼 보이기도 했다.

 

책장을 가득 메운 것은 얼마나 장구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곳에 도착했을지 모를 고대의 두루마리와 책들이었다. 깎아질 대로 깎아진 해변의 바위처럼 문서들은 단단히 굳어 더 이상 인간에게 자신을 펼쳐 보여줄 열기는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라면 산 자의 손이 그것들에 닿자마자 바스라져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이제현 기자는 축축한 굴속에서 주시하는 유령 무리 사이를 걷는 듯했다.

 

최윤나래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따르는 무리들의 발걸음은 이곳뿐만 아니라 거대한 지하의 전당 전체를 가득 메운 영혼들의 걸음처럼 들렸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철문으로, 굵은 쇠사슬이 똬리 튼 뱀처럼 문고리를 감싸고 자물쇠에 입이 물려 있었다. 최윤나래는 기다란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사슬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처음 이제현 기자는 바닥에 널찍하고 새카만 무언가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을 열면서 일어난 바람에 먼지 한 톨이 날렸다가 서서히 그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거대한 구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구멍은 대체 뭡니까?

 

지하세계로 가는 입구이지요.

 

설마 그 숄로틀 신화를 진지하게 입증하려는 겁니까? 땅을 직접 파서요?

 

최윤나래는 씁쓸하게 웃었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있어요.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핵을 태양이라고 우기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것을 꼭 우기는 것이라고만 할 수 있나요?

 

이제현 기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배제되고 잊혀진 이 대지의 종교 전통을 다시 주목해야만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도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 대지에게 직접 다가가는 운동이에요. 대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지며 교류하는 지반으로서 알아보는 것, 그걸 위해서 우리는 계속 땅을 파고, 그 안에서 땅의 속살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당신이 기사를 쓸 거라면 이곳을 꼭 보여줘야 했어요.

 

이제현 기자는 구멍의 사진을 찍었다. 바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뒤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지하실을 나오고는 숄로틀의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 기이한 집을 떠났다.

 

 

 

이제현 기자가 내게 들려준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우리 앞에는 거대한 은빛의 우주선들이 등에 맨 붉은 기를 태양으로 빛내며, 완벽하게 둥근 우리의 푸른 행성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곧 그 배들은 지구 상공까지 날아가 수억 톤의 물을 흩뿌릴 것이었다.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가 내게 물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저 푸른 별은 다만 환상이고 이 우주선의 철제 바닥이 진정한 대지가 되겠군요. 지금 우리 일상의 지반은 이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럼 땅을 파는 것은 또 무슨 의미죠?

 

그렇네요.

 

아르케를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일상만큼이나 완고하고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르케가 없지요. 그것의 직접성에 기대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은 사상적으로 고루합니다. 그 고루한 이념을 실천하는 방식은 굉장히 새롭지만요.

 

그래도 제가 만나본 유사과학의 신봉자들 중 가장 정합적인 이들이긴 했습니다. 또 현시대의 한 경향을 엿볼 수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떤 경향 말씀이십니까?

 

사실과 가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말입니다.

 

아, 확실히 그렇군요.

 

그때 정거장 내에서 웅장한 노래가 울려퍼지며 곧 있으면 펼쳐질 장엄한 광경에 대한 예고가 시작되었다. 유리창에 보이던 우주선들이 새하얀 불을 내뿜으며 지구를 향해 나아갔다.

 

기사가 나간 뒤 그 단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숄로틀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신상을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취재를 동의했었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가보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모두 실패했지요. 결국 누군가가 최윤나래의 신상을 기반으로 그 해바라기밭을 찾아냈지만, 이미 사람이 떠난 지 한참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사이트도 언젠가부터 닫혀 있었어요. 지금은 저도 그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음,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감각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각들이 모두 이 한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진화되어 온 이상 하나의 감각을 배제하고 다른 감각으로 새로운 세계 인식을 써내려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그들은 촉각만을 우위로 두는 자신들의 자연 탐구를 계속 이어나가다, 결국 자신들의 이성이 기존의 과학과 다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겁니다. 목표를 잃은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겠지요.

 

그럴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이 흘러가는 꼴은 워낙 이상하니까요. 기자 일을 하면서 사라진 줄 알았던 무언가가 완전히 뜬금없는 장소에서 낯선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일을 많이 봤습니다. 단지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요즘은 땅에 묻혀 있던 것들이 폭발해 솟아나오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음악이 절정에 이르고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우주선에서 흰 구름이 터져나오더니 순식간에 몸을 부풀려 광활한 땅을 뒤덮었다. 유리창 옆에 달린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지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가뭄에 시달렸던 청해의 땅에 물이 겹겹의 장벽을 이루어 쏟아지고 있었다. 산을 쓸어내려 새 호수를 만들 듯, 환호하는 농민들의 해진 옷을 찢어놓을 듯, 땅을 두드려 지옥의 시왕들을 전율케 하려는 듯......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과 노동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2052년 5월 11일 씀.

 

 

 

2. 4971년, 여신들의 전당에서

 

 

 

매우 지혜로운 이조차도 두 발만으로는 길을 헤맬 만큼 빼곡하게, 몸집이 아주 큰 자라도 산의 도움 없이는 경계를 볼 수 없을 만큼 광활하게, 해바라기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우인이나 소인이래도 그 밭 가운데에 솟아 있는 원형의 검은 탑은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잊혀진 시간 동안 산파들이 대지의 흙을 퍼내올렸다.

 

늙은 스승은 제자를 인도하여 탑의 중심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동방에 알려진 거의 모든 여신들의 우상이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눈이 먼 산파들은 그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진정한 태양을 보기 위해 태어난 아이의 두 눈을 반드시 뽑았다.

 

스승은 탑의 위로 고개를 들었다. 비록 그곳에는 눈 뜬 자에게나 맹인에게나 별 다를 바 없을 검은 천장이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보다 위에 있는 먹구름의 하늘을 향한 게 분명했다.

 

그 다음 그는 몸을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구멍은 이제 음파를 쓰지 않고도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에게는 구태여 직접 만지고픈 마음이 들었다. 구멍의 바로 앞 바닥에 스승의 손바닥이 올려지며 엄지손가락이 모서리를 감싸고, 네 손가락이 끝읕 알 수 없는 지하로 늘어졌다. 언제나 우렁찬 드릴 소리가 그곳과 함께 했지만 이제 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스승은 지금도 자신의 머리맡에서 둥둥 뜬 채 지하로 내려갈 준비를 할 옛 산파들의 위대한 탐사선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얘야, 나는 가끔 이 구멍이 세상의 기원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해 왔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단다.

 

제자는 뜻을 몰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 모두가, 오직 이 구멍만을 존재해왔다는 게 놀랍지 않으냐? 그러나 너 덕분에 그런 시대도 이제 끝을 맞이하겠구나.

 

저는 아직도 제가 적합한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와 그런 겸손을 떨어 무엇하겠느냐. 너가 아니면 우리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인데.

 

저 멀리서 불길한 포성과 함성이 들렸다. 군대가 유리로 만든 해바라기를 깨뜨리며 탑을 향해 진격했다. 산맥을 넘어온 그들의 사나운 왕은 십일 년 동안 산파들의 지식을 탐내 왔다. 오늘은 그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었다.

 

시간이 많이 없구나. 얼른 시작하자.

 

제자가 스승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이 혀를 한 번 더 튕기자 바닥의 한 부분이 올라와 안에 있던 탐사복을 드러냈다. 그 옷은 지하로 내려갈 제자에게 최소 이십 년 동안의 숨과 식량과 수분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스승은 손수 옷의 부위 하나하나를 떼어내 젊은이에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의 얼굴을 만져보고는, 이목구비 하나 없이 매끄러운 가면을 그에게 씌워주어 준비를 끝마쳤다. 어느새 탑의 모든 산파들이 그들 주변에 모여 절하고 있었다. 군대의 함성은 더욱 짙어졌다.

 

스승이 또 혀를 튕기니 탐사선의 문이 열렸다. 제자는 천천히 탐사선을 오르고, 스승은 산파들에게 전승되는 서사시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절을 읊었다.

 

 

 

그리하여 아홉 여신들과의 내기에서 진 왕자는 깊고 어두운 대지 아래 영원히 갇히게 되었다. 그는 밤을 몰아내는 권능을 잃었고, 해바라기들의 고개를 돌리게 하지도 못했다. 금색의 속눈썹을 들어올려 보이는 맑은 두 눈도,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하얀 피부도 인간의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커다란 활을 고무줄 튕기듯 당기던 팔은 야위어 팔찌가 헐거워졌고, 매일 지치지 않고 하늘의 길을 가던 두꺼운 허벅지는 평생 두 발로 흙을 딛고 선 적 없는 규수의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분을 잃은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수백년이 지나도 푸른 빛 한 점 비치지 않았다.

 

여신들은 두려워하며 왕자를 즐겁게 해주려 노력했지만, 끝내 왕자의 생명이 다해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고 울음 짓는 시간이 잠깐 지나고, 여신들은 왕자를 둘러싸고 자신들의 온기로 품어주었다. 왕자의 몸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약해져서, 이내 아이의 형상으로 돌아가 대지의 배에 깃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구름에 남은 잔열로 간신히 몸을 데우고, 흙에서 자라나는 나무를 먹으며 연명한다. 언젠가 가장 지혜롭고 용감한 이가 지하로 내려가, 아직 잠들어 있는 어린 왕자를 세상 밖으로 데려올 때까지. 우리는 슬퍼하며 기다린다, 여신들의 태기가 충만하여 땅이 열리고 우리의 왕이 하늘에 다시 설 때까지.

 

왕이 구멍을 절대 발견할 수 없도록 산파들은 안에서 문을 영원히 잠가버렸다. 탐사선이 빠르게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은 모두 준비한 독을 마셨다.

 

 

 

앞으로 몇 년간 제자의 목숨을 유지시켜 줄 기계장치들은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원리가 완전히 잊혀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제자는 그 안에서 들리는 은은한 진동음 외에는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그에게 현실적으로 체감되지 않았다. 단지 그는 태양이 어둠에서 솟아나오듯 우리 역시 어둠을 견뎌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길 뿐이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는 일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자는 자신이 예언의 마무리를 이룰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늘 확신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듯이 그는 원체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산파들의 전통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만큼 그는 그 안의 모순과 석연치 않은 점도 많이 알았다.

 

오래전부터 그는 하늘의 모양에 대해 의심해왔다. 산파들은 땅은 광활한 평면이며 하늘은 둥글다고 가르쳤지만, 그렇다면 서로 모양이 맞지 않아 땅 없는 하늘이나 하늘 없는 땅의 부분이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하늘과 땅 모두 맞닿는 데 없는 평면이라면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태양이 지하로 내려간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처음 천문대에 들어가 별들이 내뿜는 방사선을 피부로 느꼈을 때 그는 태양이 만들고 떠난 세계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이 읽어준 옛 시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잃었던 빛 속의 세계를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불완전하게라도 봐서는 정녕 안 된다는 말인가, 제자에게는 원망의 마음 역시 조금 있었다.

 

충분히 굳건하지 못한 믿음이 막대한 고통 속에 서서히 부서져 가는 한편 완전한 공허에 놓인 감각이 제어를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기계의 진동음에 히스테릭한 증오를 느끼는 시기는 길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온갖 환상과 환청이 그의 정신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그의 뼈는 존재할 리 없는 아픔과 간지러움을 느꼈다. 불쾌한 소음이 어지러이 일어나다 갑작스러운 이명으로 변하기도 했다. 꿈꿀 때와 깨어 있을 때의 감각이 다르지 않아졌으므로 그는 자신이 자고 있는지 일어나 있는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환상 속에 그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각들, 그리고 그 감각들을 가지고 했던 상상들이 기괴하고 뒤틀린 형태로 그를 되찾아와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음울한 몽상, 역겨운 욕망, 파편처럼 스쳐 지나간 기괴한 발상, 과거에 안전히 묻어두었던 온갖 추악들이 역류하여 그를 침수시켰다. 그는 가끔 꿈에서 색채를 보았지만, 이 악몽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색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이들의 혼이 나타나 산 자를 고문하는 것, 이는 예언에 적힌 지옥을 여행하는 자의 필연적 시련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제자는 누구도 듣지 못할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일만을 알 뿐이었다. 인간으로부터의 완전한 유배지인 이곳에선 광대한 흙의 무게만이 현실적 개념인 듯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십 년을 보냈다.

 

 

 

놀랍게도 그는 초연해졌다. 환상의 강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끝에 그는 그것이 갖는 규칙과 유사성을 찬찬히 뜯어보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통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런 저주스러운 현상조차도 나름의 질서를 갖춘 이 세상의 일부란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예언이 말한 그의 지혜와 용기였을 것이다. 그는 무엇에 있어서든 파악할 능력이 있었으며, 그런 파악에 이르기까지 눈을 감아버리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실로 그의 환상은 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가 보지 않고자 하면 얼마든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혀를 물어 끊는 것 정도는 환상이 주는 고통에 비해선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는 끝까지 그러지 않았다. 믿음이라 할 만한 것은 이미 잠잠해져 있었는데도.

 

광활한 평야 아래 잠들어 있는 태양은 정말로 있을까? 저 하늘 위의 별들이 낮에 잠드는 땅은 바다 건너 어디일까? 만일 그가 산파의 혈통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좀 더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궁금했던 것들을 직접 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자신의 의문과 열망을 아득히 넘어서는, 태곳적부터 내려온 옛사람들의 의문과 열망이 짙은 무게로 그를 이곳까지 내려오게 했음을 그는 이해했다. 그들이 꿈꾸고 절망했던 것들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를 향한 의지만은 눈먼 채 굳건히 나아가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종착점으로 모든 죽을 자들을 끌고 갔다. 그곳이 그들에게도, 제자에게도 흡족한 곳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었다.

 

열 감지됨. 운행 종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탐사선이 안내음을 들려주었다. 지옥의 유령들은 어느덧 차분한 표정으로 조용히 제자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탐사선의 두꺼운 벽을 뚫고 아래에서부터 강력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람이 피운 불 외에는 그만한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손을 더듬어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큰 버튼 하나를 찾았다. 한 번의 들숨과 날숨을 마친 뒤에 제자는 버튼을 눌렀다. 이제 그는 더는 바랄 것 없이 편안했다.

 

탐사선에 부착되어 있던 옛 인간들의 강력한 폭탄이 일시에 폭발하여 땅 아래의 열기를 자극했다. 제자의 눈이 섬광으로 가득찼다.

 

 

 

십 년의 세월에 왕은 노쇠하여 바다를 항해해 온 또 다른 왕에게 왕좌를 내어주고 목숨을 버렸다. 그가 탑에서 일부나마 가져온 문헌들은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문명을 풍요롭게 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새로운 왕은 필요한 요새를 짓는 일에 쓸 비용이 부담스러워 고대 유적을 몇 개 골라 자재를 빼 온 적이 있었는데, 유독 이 탑만큼은 정교하고 단단해 못 하나조차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 사실이 그를 조금 언짢게 한 것을 제외하곤 그의 치세 내내 탑은 버려진 장소였다. 그저 철새들의 가을철 집이었다.

 

어느 날 그 철새들이 유독 일찍 떠나고 탑 위로 번쩍하고 섬광이 솟았다. 거기서 하루를 걸려 걸어갈 곳에까지 진동이 희미하게 전해지기도 했다. 섬광은 먹구름을 뚫고 높이 올라가 불의 비로 내려 하늘과 땅을 불태웠다. 난리를 급히 피하고 사람들은 이질감에 하늘을 올려보았는데, 거기에는 푸른 하늘과 함께 활활 타오르는, 눈부시고 빛나는 구(球)가 하나 있었다.

김병식

김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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