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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새벽 네 시, 달이 추락합니다

 

Prologue. 김 할머니

 김 할머니는 오늘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먼저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상당히 따뜻 해서, 어제와 똑같이 내복 위에 기모로 된 골덴 바지를 입고 등산용 양말까지 신자 겉옷 잠바 를 벗어두고 장사를 해도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새벽 여섯 시에 해가 미처 뜨기도 전에 할머 니는 철제 구루마에 나물 몇 바구니를 담은 박스를 동여매고 산속에 있는 집에서 나왔다. 그럴 일도 자주 없지만, 이걸 싸그리 팔아치우면 하루에 오만 원도 안 되는 수입이 된다. 딸내미가 다달이 부쳐주는 용돈과 기초연금만으로도 쌀을 사고 난방비를 내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집에만 들앉아 있으면 아주 쓸모없는 노인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할머니는 매일 아침 집 뒤편 자그마한 다섯 평짜리 텃밭에서 딴 것들이나, 산에서 몰래 뜯은 고사리 말린 것 따위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둘째로는 손주 때문이었다. 작년부터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할머니의 손주는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버스 정류장 근처 길목에 자리를 잡고 좌판을 차리면 낯익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얼굴도장을 찍었다. 출근길이거나, 아침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심심해서 마실 나온 노인들이었다. 처음에 할머니가 그들을 붙잡고 대 학원에 간 손주 이야기를 하면 꼭 심사가 뒤틀린 사람 한 명이, 빨리 졸업해서 취직이나 하지, 젊은것들이 돈 까먹을 궁리만 한다며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할머니는 소리를 빽 지르며, “그거 졸업하면 우리 새끼가 박사님이야, 이 무식한 할배야, 뭣도 모르는 노인네가 아주 말만 많아!” 하고 타향에 있는 손주를 열띠게 변호했다. 그런 건 자존심을 건 싸움처럼 보였지만, 사실 노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싸움이 일어나도 누군가 뽑아 온 자판기 커피 몇 잔이나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웃으며 건네는 요구르트 서너병에 쉽게 사그라들었다. 그러고 나면 “저 할망구는 성질이 더러워.” “누가 할 소리,”하며 뒤끝 있는 말을 두어번 주고받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그 ‘무식한 할배’는 이천 원을 주고 ‘성질 더러운 할망구’의 열무 한 단을 사 가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 손주에게서 좌판을 정리할 때쯤 전화가 걸려온 것이 할머니 를 들뜨게 만든 두번째 이유였다. 한참을 아무 말이 없길래 돈 문제인가 싶어 얼마를 부쳐주면 되겠느냐고 물으려던 찰나 손주는 “오늘 뉴스 보셨어요?” 하고 느닷없이 물었다. 할머니는 뉴스를 잘 보지 않았다. 몇년 전에 잘 쓰던 핸드폰을 딸내미가 스마트폰으로 바꿔줬지만, 밖에서 뭘 했다가는 추가 요금을 폭탄으로 맞는다는 주변 할머니들의 으름장을 듣고 전화 기능만 간신히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답했더니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내 강아지, 무슨 일 있나,” 할머니는 물었고, 아무 일 아니라는 말만 돌아왔다.

 “할머니, 내가 계좌로 오만 원 부칠 테니까 들어가는 길에 소고기 사서 들어가요. 뉴스는…. 별일 아니고, 내일 날이 춥다길래. 따뜻하게 해 먹고 있으라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할머니는 직감적으로 손주가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알았다, 내 새끼야. 할매는 알아서 잘 한께, 우리 강아지 맛있는 거 사무라. 저녁 뜨시게 챙겨묵고. 힘이 있어야 공부도 한디.” 알았다고 전화를 끊는 손주의 목소리에는 묘한 물기가 어려 있는 것처럼 들렸다. 시간 되면 한 번 찾아오겠다고, 손주가 습관처럼 하는 마지막 인사가 오늘은 없었던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1. 천문학과 대학원생 강 씨

 간밤에 미국 K 천문대에서 긴급 협조 요청이 도착했다. 아무래도 전 세계에 있는 크고 작은 천문대에 모두 뿌려진 것 같은 공문 메일에는, 우주 공간의 힘을 계산하는 데 쓰이는 몇 개의 수치가 이상하게 측정되니 교차검증을 부탁한다는 이야기가 간결하게 적혀있었고, 첨부된 파일에 조금 더 상세한 값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여 메일을 확인한 강은 교수의 지시로 진행하던 개인 연구는 하루 미루고 이 수치를 재측정하는 담당이 되었다. 파일의 내용을 훑어본 강은 이게 하나의 큰 몰래카메라 장난이 아닐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저 심각한 계산 실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관측소에 올라가 컴퓨터와 여러 장치를 켜서 설정을 해두고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오후 한 시, 잘 정리되어 화면에 떠오른 수치들을 읽고 강은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 되어 교수의 연구실로 달려 내려갔다.

 공문에서 말한 대로 힘 A의 크기를 측정한 결과 문헌값과 아주 큰 오차를 보였고, 이 값으로부터 새로운 상수를 뽑아내서 기존에 알려진 공식에 대입하면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고 덜덜 떠는 강의 설명을 듣고 교수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일단 그 결과를 답신으로 전송하라는 지시를 했다. 낯빛이 어두워진 교수를 뒤로하고 강은 자신의 측정 결과를 첨부하여 K 천문대에 답신을 보냈고 오후 세 시에 비슷한 양식의 공문을 다시 받았다. 세계 각국의 측정 결과를 받아보니 불행히도 우리의 가설이 옳은 것 같다는 문장이었다. 이제 정부에 해당 사항을 전달할 예정이며 고맙다는 인사로 마무리된 문서를, 강은 열 번을 다시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시각으로 새벽 네 시에 달이 지구로 추락할 예정이라는 말이었다. 연구실 사람들과 긴급하게 미팅을 했고 천문학 학위 소지자들의 질문이 난무했지만 결국 이게 실제 상황이라는 비통한 결론으로 치닫고 말았다. 강은 여섯 시에 학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속보를 보면서도 이상한 소설 속에 빠져버린 것 같은 위화감만 들었다. 적어도 내일은 출근이 없겠네,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나 하면서 강은 제육볶음을 해치웠다. 최후의 만찬은 조금 더 멋들어진 것일 줄로 알았는데, 고작 삼천 원짜리 단체급식 제육볶음이라니. 하지만 종말이 이렇게 빠르게 찾아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며 강은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서로 옆에 붙어있는 자연과학대학 건물과 공학관 건물 중에서 완전히 불이 꺼진 건 천문학 연구실들뿐이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세상이 조각나서 사라질텐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키우던 배지에 밥을 주는 일이나, 새로 합성한 물질을 크로마토그래피로 분리하는 일을 마무리 하는 게 훨씬 중요한 모양이었다. 우주의 각종 상수가 달라져 버려서 진행하던 연구 주제가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강은 퇴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밤새워 레이저로 금속판을 지지거나 컴파일 에러를 수정하고 있을 이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했다.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원초적인 탐구심은 몇 시간 후 그 세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아직 유효했다.

 강은 낯익은 기숙사 방 앞을 서성이다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했을 때에는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이게 다 농담이라는 듯이. 그들은 울고 있었지만, 강은 침착했다. 사랑한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다음으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하지만, 강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부모에게 아이의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끝내 사랑한다는 말도, 다음에 찾아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강은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 리고 은행 앱을 켜 할머니의 농협 통장으로 오만 원을 이체했다.

 

2. 마케팅부 이 대리

 방해금지 모드로 돌려둔 휴대폰에 카톡과 전화가 쏟아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 대리는 야근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 온갖 방해 요소를 근방에서 치운 채로 잔업을 하는 중이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오천 원짜리 호화 도시락의 플라스틱 껍데기가 책상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늘의 세 번째 믹스커피를 타 마시면서 휴대폰을 켠 이 대리는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메시지, 카톡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그래서 인터넷 뉴스를 켜던 참에 친한 후배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고, 로딩이 끝난 화면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말이야?” 후배는 여유롭게 말했다. “이제 확인했나 봐, 저녁때부터 난리였는데.”

 “저녁을 사무실에서 혼자 먹었으니까…. 강 박사, 진짜야, 이거?”

 “선배, 저 아직 석사거든요? 진짜죠, 그럼. 그런 거로 대국민 몰카라도 하겠어? 오늘 우리 랩에서 내가 측정했는데 진짜 맞아요.”

 “말이 돼? 달이 떨어진다니 과학적으로….”

 과학이 뭐고 이론이 뭐에요,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데. 이 대리의 깜찍한 천문학과 후배는 이 대리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죽어라고 사랑하던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웃었다. 무슨 뜻인 지도 모르는 말을 잘도 한다며 핀잔을 주고 이 대리와 강은 고마웠다는 인사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전화를 끊고, 이 대리는 파일을 저장하지도 않은 채로 컴퓨터 전원을 끄고 짐을 챙겨 사무실을 달려 나와 버스로 십분 거리인 투룸 집으로 돌아갔다. 여덟 시간 후에 지구가 끝장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에 퇴근했을 것이라는 후회와 함께.

 집에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라는 이름의 새카만 고양이였는데, 지인이 임시 보호를 하던 아이를 데려와서 키우게 된 지 오 년째였다. 인간보다 수명이 짧으니 더 좋은 것을 먹이고 더 편한 집을 만들어 주려고 여태 열심히 살았는데, 같은 날 같은 시 간에 떠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대리가 집에 들어가며 커피야, 하며 부르자 커피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캣타워 꼭대기 층에서 울음소리를 내며 화답했다. “이 게으른 고양이야. 잘 있었어?” 이 대리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대리는 입사 삼 년 차에 대리 직위와 함께 마케팅부의 플랜맨이라는 별명을 달게 되었는 데, 그 별명대로 그는 십 분 동안의 퇴근길에 그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지 타임라인을 짰다. 짧게 샤워를 하고 깨끗한 잠옷을 갈아입은 후에 친구들 몇 명에게 간단한 전화를 하고 휴 대폰을 꺼버릴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묵혀 둔 철학책을 꺼내 읽다가 지치면 커피를 품에 안고 (아마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는 오로지 좋아하는 것들로만 마지막 순간을 채울 것이다. 청결과 우정, 철학, 그리고 고양이.

 그는 책장에서 먼지만 먹던 책을 끄집어내서 아주 느리게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근길에 24시간 동물병원에 들러서 사 온 비싸고 좋기로 유명한 간식을 커피에게 조금씩 먹였다. 커피는 여느 때와 달리 이 대리의 오른편에 얌전하게 앉아 그걸 받아먹었다. 어쩌면 이 애도 오늘 후로는 간식도, 밥도, 쥐돌이 장난감으로 하는 사냥놀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 후에 이 대리는 책을 덮고 불을 끄고 커피를 품에 안 고 이불에 파묻혀 이내 잠이 들었다.

 

3. 하늘 동물병원 전 원장

 하늘 동물병원은 시에서 유일하게 24시간 문을 열어두고 응급진료를 보는 곳이었다. 오늘 밤의 당직은 전이었고 그는 주로 고양이를 진찰했다. 오늘 밤엔 까다로운 환자가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조금 이른 저녁을 해치우는 중에 그는 내일 새벽에 달이 추락한다는 뉴스를 봤다. 식당 주인에게 부탁해 채널을 여러 번 바꾸면서 그게 코미디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정말 정식 뉴스 채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전은 돼지국밥을 먹던 숟가락을 정신없이 내려놓고 값을 치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연락이 올 곳이나, 연락할 곳이 있지는 않았지만, 진동이 계속해서 울렸기 때문이다. 간호사 한 명이 전을 급하게 찾는 카톡이 눈에 띄었다. ‘빨리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잰걸음으로 병원으로 돌아갔더니 접수대 앞과 대기실이 보호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쁜 원무과 직원들에게 굳이 찾아가 묻지 않아도 상황은 뻔했다. 세상이 곧 끝난다는데 입원시켜 둔 가족 같은 동물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원장 허가 없이는 퇴원을 시킬 수 없어서 전을 부른 것이라고 했다. 간호사에게 알겠다고 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접수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들어오는 모든 퇴원 처리를 일괄 승인하는 것으로 하겠으니 물어볼 필요없이 처리하라고 전달했다. 그 와중에도 응급진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있었기 때문에 전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린 사람 음식을 먹고 토하기 시작한 강아지들과 이상하게 힘없이 사육장 구석에 엎드려서 꼼짝도 안 하는 햄스터 몇 마리를 진찰하고 처방을 내렸다. 관습처럼 3일치 약을 끊어주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내일 다 같이 죽을 테니 약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서 주무십시오,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진료를 보던 도중에 조금 숨을 돌리려고 병원 로비로 나왔을 때 익숙한 사람이 간식 몇 개를 계산하고 있었다. 커피라는 이름의 새카만 고양이를 기르는 이 씨였다. 며칠 전 정기 검진에서 봤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전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커피는 잘 있죠?” “잘 있을거예요. 이제 퇴근해요. 선생님은요?” 이 씨의 답에 전은 오늘 당직이라는 말로 답했다. 이 씨는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몸짓을 하며 간식을 가방에 챙겨 넣고 인사와 함께 자동문을 나섰다. 자정이 지나자 새로 찾아오는 환자들은 거의 없었기에, 전은 함께 당직을 서는 간호사와 직원 몇 명과 입원실을 확인했다. 웬만해서는 다 퇴원을 했지만, 나비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백구 한 마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피칠갑이 된 채로 길을 떠돌던 것을 보호자도 아닌 행인이 데리고 온 경우들이라, 기록을 뒤져도 그들에겐 보호자가 없었다. 전은 다른 직원을 모두 퇴원시키고 그 고양이와 강아지를 데리고 당직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생애 내내 외롭더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다른 존재와 연결된 감각을 느끼고 싶었고 그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 그들을 괴롭혔을 바깥세상은 오늘만큼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새벽 세 시였다. 창문도 없이 오롯이 고립된 당직실 안에서 나비는 이불을 파고들고 백구는 전의 무릎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전은 눈을 감고, 제 손을 거쳐 간 수많은 동물의 새카만 눈동자를 생각했다. 어떤 깊고 진한 우주와도 같은 것을.

 

4. 우주택배 김 기사

 김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실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 집에서 뒤늦은 저녁을 먹으며 흘끗 봤던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달이 추락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와도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극사실주의 현실이지만, 관객에게는 허구와 분간이 가지 않는 서사. 그래서 그는 그 뉴스에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딸을 재우고, 퇴근이 늦어지는 배우자에게 전화를 걸어 여느 때와 같은 인사를 남긴 뒤에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심야 시간대 택배 배송을 위해 열한 시에 집을 나섰다. 열한 시 반까지 물류창고에 가서 오늘의 물량을 배정받고 정해진 구역을 돈 다음 일당을 받아서 집으로 가면 되는 부업이었다. 김은 낮에는 다른 택배사의 기사 일을 했지만 심야 시간대, 그리고 가끔 새벽에는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용돈 벌이를 했다(여기서 용돈이란 물론 딸의 용돈을 뜻했다). 큰돈이 손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이 몸을 놀리느니 하루 삼만 원이라도 더 버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 벌써 오 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그가 심야 시간대에 배정받는 구역은 시내 부근이어서 원래대로라면 밤에도 떠들썩하고,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헤매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오늘따라 길거리가 눈에 띄게 한산하고 고요했다. 달이 진짜 추락하기는 하는가 보지, 하며 김은 택배 상자를 내려 현관문 앞에, 또는 경비실에, 또는 공동 택배 보관실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거의 마지막 즈음에 그는 버스 정류장과 큰 지하철역 사이에 있는 24시 동물병원에 커다란 박스 하나를 배송하기 위해 차를 세웠다. 근방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어서 평소보다 유난히 건물이 커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김은 자신이 여태 다녔던 사람 병원 중에도 이렇게 휘황찬란 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접수대 앞에는 퇴근을 준비하는 직원이 몇명 있었는데 김은 조용히 꾸벅, 고개만 숙이고 박스를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오늘도 배송을 하시나 봐요,” 하고 한 명이 말을 넌지시 걸었고, 김은 잠시 남은 상자의 수를 가늠하다 조금은 이야기를 해도 시간에 쫓기지는 않겠다 싶어 말을 받았다. “예, 뭐 그렇네요.” “어서 끝내고 들어가셔야죠.” 김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자동문을 열고 병원을 나섰다. 김은 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일 세상이 끝나고 우리 모두 죽어버리더라도 그는 시내 좋은 자리에 있는 비싼 사무실들에 심야 배송으로 사무용품을 배달하고 삐까뻔쩍한 동물병원에 물자를 조달한다. 그리고 딸과 배우자와 어머니가 잠든 집으로 돌아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지친 몸을 이불로 휘감는다. 그에게 유의미한 현실은 그게 전부였고 그 외의 것들은 진실이거나 거짓이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차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뉴스에 등장한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라는 정부의 공식 발표와 서울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시내에서는 마지막 밤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는 속보가 온통 뒤엉켜 쏟아졌지만, 그는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차 앞을 가로막은 고양이를 내쫓기 위해 울린 경적이 이 동네에 울려 퍼진 유일한 소음이었기 때문에, 김에게 그런 유난스러운 소식들은 꼭 다른 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발이 하얀 고양이는 재빠르게 인도 옆 수풀로 숨어들었고 김은 그대로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5. 길고양이 치즈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에 깜짝 놀라 고요하고 어두운 나무 사이로 도망친 치 즈는 털을 핥아 올리며 잎 사이로 차도를 바라봤다. 이파리 사이로 빨갛고 파랗고 하얀 빛줄 기가 갈래지어서 스며들었다. 치즈는 털을 한참 동안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런히 정리하다가 꼬리부터 몸을 작게 말아 자리를 잡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하게, 아무 소리도 없이 확장된 동공으로 바깥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공기가 바닥에 착 달라붙은 것처럼 소리 없는 밤이었다. 치즈는 골똘히 생각하며 정면을 응시하다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고는 몸을 일으켜 사람들이 오가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치즈는 오늘 세 마리의 쥐를 잡았다. 근처에 있는 건물과 화단이 이어지는 빈틈 속에 보금자리를 잡고 낮을 잠으로 보낸 후에 기지개를 켜며 한 마리, 영역에 침범이 있었는지 순찰을 하며 또 한 마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옆 동네에서 웬일인지 치즈의 구역까지 싸움을 걸러 온 새카만 고양이와 싸움을 벌이다가 한 마리. 만약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한 마리가 눈에 더 띈다면 목덜미를 물어 죽여다가 밥그릇 앞에 놓음으로써 감사의 표시를 할 작정이었다. 치즈는 기브 앤 테이크라는 기본적인 예의를 잘 아는 고양이였기 때문이다. 매일 밤 치즈가 기다리는 그 사람은 치즈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이었다(물론 인간들 사이 에서는 노란 고양이를 관습적으로 치즈라고 부르는 만큼, 아주 성의가 넘치는 이름이라고는 하기 어렵겠다). 몇 달 전 새벽 늦은 시간 인도와 풀숲을 구분하는 돌무더기 뒤편에 물그릇과 밥그릇을 놓아준 뒤로 매일같이 물을 갈고 새 밥을 얹어주며 한참이나 주변을 서성이다 돌아가는 사람. 처음에는 잔뜩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풀게 되었다. 그러나 치즈는 오늘 그 사람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사람 발에 짓밟혀 휘어져 버린 꼬리 끝이 욱신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수염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들에는 이상한 일들이 생기곤 했다. 이년 반의 묘생 동안 치즈가 깨달은 것들이었다. 치즈는 항상 하늘에 있는 하얀 점들이 궁금했다. 그건 풀숲에 들어가서 밖을 바라볼 때, 나뭇잎 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들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치즈는 새카만 하늘 밖으로부터 새하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그 구멍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중 특히 매일 모양이 변하는, 가장 커다랗고 때때로 뾰족하기도 동그랗기도 한 구멍이 가장 궁금했 다. 치즈의 엄마였던 이름 없는 노란 고양이는(이제 소식도 알 수가 없다) 등 한가운데에 동그랗고 하얀 무늬가 있었다. 그래서 치즈는 엄마 고양이가 하늘 건너편에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는데, 오늘은 신기하게 그 동그란 구멍이 훨씬 크게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시린 꼬리와 찌릿한 수염은 그냥 틀린 신호이고, 단지 조금 엄마가 가까운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 항상 불이 꺼지지 않는 건물에서 그 사람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치즈는 인간을 부르기 위해 큰 소리로 야옹댔지만, 그는 치즈가 있는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건물 뒤편의 어두운 쪽으로 사라져갔다. 치즈는 그를 쫓아가 볼까, 잠시 생각을 했다가, 길 건너는 삼색 고양이의 구역이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다시 풀숲으로 되돌아갔다.

 왜 오늘은 오지 않았을까. 그가 남기고 간 물을 할짝대며 치즈는 생각했다. 치즈의 엄마를 닮은 새하얀 달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새벽 두 시 반에.

 

6.  빵 공장 직원 백 씨

 백 씨는 공장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동료들이 옥신각신하는 이야기를 한 테이블 건너에 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오십이 넘어가는 아저씨들부터 용돈 벌이를 하러 온 고등학생들까지 다양하게 끼어서는, 편을 갈라서 가짜 뉴스고 거짓말이라고 요란을 떨거나, 위대한 신의 형벌 이라느니 하며 두려움에 차서는 덜덜 떠는 중이었다. 백은 영문도 모른 채 한 사람을 툭 치고 이게 무슨 일이냐 물었고 상대는 휴대폰에 대문짝만하게 뜬 인터넷 뉴스를 보여줬다. ‘속보: 오전 4시경 달이 지구와 충돌’. 백 씨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려 하는 본능을 꾹 누르고 눈인사를 하며 난장판이 되어가는 구내식당을 빠져나왔다. 잔업을 끝내고 사물함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주변은 떠들썩했다. 사실 달이 아니라 어느 나라의 실패한 핵실험을 무마하려는 시도라느니, 김정은이 남침을 한 것을 숨기려는 빨갱이들의 음모라느니. 백 씨는 더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로부터는 귀를 닫고 가방을 챙겨 공장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랐다. 가방 안에서 빵 봉지 몇 개와 아침에 챙긴 고양이 사료 봉지들이 서로 바르작대며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속이 쓰렸다.

 시내버스 안에 큰 소리로 퍼지는 라디오는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 중심가에서 지난 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백 씨는 공장이 위치한 시 외곽에서 도심지를 지나 집이 있는 지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사람이 꽉 들어찬 호프집 과 치킨집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어쩌면 백 씨도 지금 당장 내려서 그 틈에 끼어 술잔을 주 고받으며 정신없이 종말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김 반장이 소리치던 것처럼 달이 충돌 한다는 뉴스부터가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쩌면 백 씨가 일상에서 벗어나서 무언가 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고 편의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 고,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한숨 잠을 자고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구의 종말을 다루는 소설이 있었더라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때우고 막노동판과 공장 일을 전전하는 자기 같은 사람보다는 더 멋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소설도 백 씨 같은 재미없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생업을 내팽개치고 미국 정부와 함께 세상을 구하려는, 할리우드 영화 속 톰 크루즈와 맷 데이먼 같은 사람도,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이제는 비유가 아니게 되었지만)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남녀노소도, 그리고 회개의 시간이라며 종말론을 퍼뜨리고 집단 자살을 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도 나타나겠지만, 그런 극적인 일화 없이 배경처럼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의 균형이 맞을 것이 아닌가. 백 씨는 그래서 인생에서라도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다고 아주 허무맹랑하고 서글픈 생각을 했다.

 그는 소분해 놓은 고양이 사료 한 봉지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에쎄 체인지 일 미리를 사서 편의점을 나왔다. 길 건너에서 항상 밥을 주는 치즈 고양이가 보이자 그제야 내일 아침에는 누구도 눈을 뜰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이나 울던 고양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백 씨는 골목길로 들어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캡슐을 찾아 깨물고, 꽁초를 버리고, 또 불을 붙이고……. 몰려오는 토기를 간신히 참아내면서, 선자리에서 담배 반 갑을 해치우던 백 씨는 계속 달이 커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왜 치즈의 밥을 챙겨주지 못했을까. 그건 백 씨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다.

 

7.  심야 편의점 알바 정 씨

 이제 다음 학기에는 꼼짝없이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휴학을 연장하다 보니 더는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몰려버린 상황이었다. 생활 패턴을 뒤집어서 낮에 자고 밤에 일 하는 짓도 이번 겨울이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정은 오늘 오후 다섯 시에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덟 시에 퇴근했으니 오후에 잠을 자는 건 좀 이해해 주시길 바랐지만 해가 중천에 떠서 져가도록 잠만 자는 휴학생 자식이 여간 한심해 보인 것이 아닌 모양이다. 정은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하고 내키지 않는 저녁을 먹었다.

 처음에 휴학계를 낸 건 자퇴서를 내려다 제지당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몇 안 되는 친한 대학 동기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잠시 쉬다가 다시 돌아오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쉬면서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상담도 받으면 된다고. 정은 부모님 몰래 정신과에 정기적으로 다닐 자신이 도저히 없었지만 일단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마지막 순간에 새 서류를 프린트해서 서명하고 지도교수님의 도장을 받아서 학과에 제출했다. 그는 청소년기를 지나면서부터 계속 잔잔한 우울증에 시달려 왔는데 그게 놀랍게도, 대학에 온다고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 상담실도 다녀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온 세상이 눈부신 색채로 뒤덮인 한여름에도 그는 하늘이 무채색이라고 생각했다. 봄과 여름의 산들바람이 겨울의 칼바람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정은 그대로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정이 다니는 학교는 휴학을 연속으로 최대 3학기 할 수 있었다. 첫 학기에는 무언가 해보려고 했다. 병원도 처음으로 갔고, 약을 먹었더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서 운동도 다니고 영어 자격증 공부도 시작했다. 그러다 괜찮아진 것 같아서 병원에 가는 빈도가 줄었고 약을 덜 먹으니 병은 심해져서 두 번째 학기에는 그냥 원래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세 번째 학기가 되어서야 부모님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심야 시간대에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아서 억지로 일을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밖에 나가는 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렇게 큰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정은 여전히 죽고 싶었고 눈앞이 회색이었으며 몸이 축 늘어져 내일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정은 주로 피씨방에서 시간을 때웠다. 휴대폰이 계속 진동을 하길래 확인을 했더니 부모님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화를 받았고, 아버지는 횡설수설하며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정은 그때 인터넷 뉴스에서 달이 추락한다는 말을 봤다. 어그로성 신작 게임 광고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지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새벽 네 시에 달이 추락해서 우리 모두 한꺼번에 죽는다니. 이렇게 낭만적인 건 또 처음 들어본다고 생각했다. 계속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소리를 질러대는 아버지에게, 정은 좋은 밤 되시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그들은 정이 어디에서 일하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전 타임 알바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처음으로 받은 손님은 지친 기색으로 담배를 사러 온 젋은 청년이었다. 그에게 에쎄 체인지 일 미리를 한 갑 판 후로 세 시까지 단 한 명의 손님도 오지 않은 가게 안에서 정은 잠과 사투를 벌였다. 아침 여섯 시가 되면 항상 정류장 앞에 좌판을 차리시는 할머니가 있다. 그를 생각하자, 우울증에 빠진 이후로 처음 남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온장고에 들어있는 유자차 한 병을 사비로 결제해서 다시 데워지도록 돌려놓았고, 할머니가 오시면 꺼내다 드릴 생각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새벽 세 시 오십 오 분에 정은 유자차를 꺼내서 손에 쥐고 새하얗게 밝아져 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말이었다.

 

Epilogue. 김 할머니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집에 돌아가서 시계를 보니 아홉 시였다. 할머니가 사는 곳은 산 중턱 이라고는 하지만 버스가 다녔고 아주 벌레가 들끓거나 하는 오지는 아니었다. 가스가 들어오고 난방도 들어왔고 따뜻한 물도 잘 나왔다.

 손주가 보내 준 오만 원은 ATM 기계에서 뽑아서 잠바 안주머니에 고이 품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손주는 명절 때가 되거나 생일이면 종종 할머니에게 돈을 부쳐주고는 했는데, 할머니는 그걸 절대 쓰지 않고 모두 이부자리 머리맡의 흰 봉투에 잘 모아두었다. 밥 굶으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되는, 아직도 걸음마를 막 뗀 것 같은 손주가 보내는 돈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 돈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언젠가 필요할 때 손주에게 돌려줄 생각 이었다.

 내일은 오늘 팔다 남은 말린 고사리와 말린 취나물을 마저 들고 나갈 것이다. 할머니는 몸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방의 불을 껐다. 내일은 그 무식한 할배에게 커피를 한 잔 얻어내고 말 것이다.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바닥에 깔린 이불을 찾아서 누웠다. 내일은 딸내미에게 전화를 한 번 걸어볼 것이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몰려오는 잠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내일은 정류장 옆 구둣방 사람들과 점심을 먹을 것이다. 할머니는 눈을 질끈 감아도 유난스럽게 밝은 달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 집안을 온통 휘감는 것 같았다.

 내일은, 내일, 내일은…….

kongk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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