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테메레르

2021.04.26 19:2904.26

“아빠는 버튼 노동자였어요. 물류 차량의 시동 버튼 누르는 일을 했었죠.”

 

세나오스(SenaOS)는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100km/h로 달리는 운전석에 앉아 두 손으로 나를 안아주셨었죠.”

“무섭지는 않던가요, 레클리?”

“자동운전은 사고가 한 건도 없다고 아빠가 설명해주기 전까진 무서웠죠.”

 

기분 좋은 추억을 떠올린 나는 미소를 흘렸다. 그래, 나는 그때 아빠 품에 거의 매달려 있었지. 그런데도 오히려 속도를 높인 아빠는 참 짓궂었었어.

 

“아 또, 날씨가 좋은 날에는 차량을 해킹하기도 했어요. 원래 경로를 벗어나 산과 들을 다녔죠.”

“그건 알고 있어요. 가끔씩 알람도 없이 경로를 이탈하던 차량이 있더군요.”

“지금서야 말하는 거지만 그때 눈감아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세나오스는 마치 감정이라도 가진 것처럼 편안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흉내나 내는 깡통같은이라고... 비아냥을 삼킨 나는 아빠와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는 아까 말한 그대로예요. 아빠는 앓아 누었고, 돈이 떨어지자 나는 그림을 그려 팔았죠.”

“정말이지, 애석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어요. 전능하신 인공지능께서 그림은 못 그렸으니까.”

 

나는 악의을 묽게 섞은 젯소를 캔버스에 펴 발랐다. 세나오스가 하얀 캔버스에 왜 또 하얀 것을 칠하냐고 물어보길래, ’젯소를 바르지 않으면 나중에 물감이 마르면서 그림이 붕 뜬다.’ 고 설명해주었다.

 

“오, 신기하군요. 그럼 어떤 그림을 그려줄 건가요?”

“산과 들을 그릴 거에요. 아까 말했던 바로 그 산과 들이요.”

 

내가 선택한 색은 삽 그린(Sap Green)이다. 산과 들을 표현하는 색은 많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시간대에 어울리는 색은 삽 그린뿐이다. 브라이트 레드와 인디언 옐로우를 섞어 만든 노을 아래에 애매한 규칙을 따라 산맥을 그려내고, 조금 밝은 물감을 섞어 들판도 펴 바르면 그 색감이 나는 좋았다.

 

"이 그림이 다 마를 때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며칠 정도요? 마음에 안 들면 말해줘요. 그전까진 덧칠해도 되니까."

"음... 이대로가 좋아요. 마를 때까지 옆방에 모셔놔야겠어요."

 

세나오스는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물론 인공지능에게 입은 없을 테니까 정말로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어서 그런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래, 내가 이래서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지.

 

“그렇다니 저도 기뻐요, 세나오스.”

“잘 가요, 레클리.”

 

「Senaos 입금 :

10,000,000B」

 

버튼을 누르자 자동차는 천천히 거주지구를 향해 출발했다. 엔진이 내뿜는 백색소음을 듣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떠올리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림만 그리고 천만 비트를 벌어가는 행운이라니! 포근한 운전석 시트에 몸을 뉜 나는 이내 창밖에 가득한 노을을 이불삼아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어두운 병실의 모습이 흐리멍덩하게 보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까닭이다. 요즘 들어 밤잠이 짙어진 아빠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잘 뛰고 있는 심전도 그래프를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는 졸음을 던져버리려고 창가에 기대었다. 인공지능이 대체한 세상은 회색 안개에 뒤덮여있었다. 시린 새벽 공기가 무딘 감각에 날을 세웠다. 병실에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환우들의 악취, 명멸하는 심전도 그래프, 발걸음 소리와 경칩의 삐걱거림...

 

"레클리씨, 일어나셨습니까?"

 

살며시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보인 건 무광 회색으로 마감된 안드로이드였다. 태블릿을 든 팔에는 녹십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병원비가 밀렸다면서 나를 닦달할 것이 뻔했다. 지금 보니 꼭 일수꾼처럼 생긴 것 같다.

 

"무슨 일이시죠?"

"잠시 말씀을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곧 나갈게요."

 

나는 아빠와 다른 환우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휴게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을 건넸다. 입원비와 약품비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검사비는 덤이었다.

 

"이 비싸기만 한 검사는 왜 이렇게 결과가 안 나오는 거죠?"

"어제 정밀검사로 넘어갔습니다. 오늘 안에 완납해주셔야 치료에 차질이 없습니다."

 

이건 현상 유지일 뿐이지 치료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벅찰 줄 몰랐다. 안드로이드는 자기 할 말은 다 했다는 양, 태블릿을 챙겨 일어났다. 나는 그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내 꿈을 모조리 팔아서라도 낼 테니까, 치료는 계속하세요."

 

공허한 선언이었다. 나는 어두운 새벽 휴게실에 홀로 남았다. 비어있는 어두운 공간을 내 한숨으로 채웠다. 이 넓은 공간이 순식간에 먹먹한 이산화탄소로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불길을 피하는 사람처럼 병원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조차 뜨지 않은 새벽 거리에는 아무런 인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사장에서 곰방지는 일마저도 안드로이드를 쓰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시대에 이렇게 이른 아침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그렇게 알파 화방으로 향했다. 주거지구 귀퉁이에 있는 작은 화방. 죽어버린 상권임에도 천만다행인 사실은 사장님이 이 건물 주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더 많은 부를 찍어내는 사업장으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레클리,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하하, 나도 장부를 봐야겠는데. 일단 들어오라구.”

 

사장님은 불을 밝히고 장부를 뒤적였다. 뒤적, 그리고는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다행이다 최소한 하나는 팔린 모양이군. 뒤적, 뒤적. 태곳적의 회계법을 고집하는 화방 주인을 뒤로하고 나는 그림 구경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들 솜씨가 좋군요.”

“사람들이 돈벌이가 되는 그림 산업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어.”

“저보다 잘 그리는 사람들은 안 왔으면 좋겠는데요.”

“세상만사가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이제는.”

 

「알파 화방 입금 :

540,000B」

 

“좋아, 세 점이 팔렸어. 수수료 빼고 총 오십 사만 비트.”

“저번 달보다도 덜 팔렸네요. 큰일이에요.”

“그림 산업도 끝인 것 같아. 다른 일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우리 둘 다.”

 

화방 주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슬픈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 그림뿐만이 아니라 다른 그림들도 팔린게 없다는데, 위로가 되는 건지 아니면 더 침울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수요가 적은 시장에 공급이 밀려드니 지금까지 버틴 게 신의 뜻일지도 모르겠다.

 

사업을 끝내고 나왔지만 아직 거리에는 차디찬 새벽공기가 남아있었다. 담벼락을 등지고 암산을 해보았다. 오늘 번 돈으로 정산하기에는 턱도 없다. 병원비를 내려면 집을 처분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주택관리처죠?"

"네, 맞습니다."

"주거지역 A-02를 처분하려구요."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거지만 막상 내뱉고 나니 입안에 서글픔이 맴돌았다. 어릴 적부터 남긴 흔적들이 이제 다 사라지겠구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등록했습니다. 적합한 수요자를 찾아 절차를 밟겠습니다."

 

전화는 끊겼다. 이제 오늘 오후면 주택관리처의 안드로이드들이 실사를 나오고, 수요자가 나오면 대금을 받겠지. 꽤 큰 돈이다만 언제 집이 팔릴지 모른다. 그동안 이것저것 돈 나갈 구멍을 막으려면 결국 꿈을 팔아야 한다.

 

꿈 수매처는 다섯 블록 너머에 있다. 나는 회색 안개를 거슬러 올라가던 중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민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간밤에 꿈을 팔았는지 아직 이마에 꿈 추출기를 붙이고 있었다. 감정 한 방울 없이 차가운 표정을 보고서 내가 저렇게 될 생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도망쳐야 할지, 아니면 느린 걸음으로 꿈 수매처로 가는 시간을 늦추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한 인터벌 트레이닝을 수 세트 반복한 결과, 나는 그날 꿈 수매처의 첫 번째 등록표를 받았다. 접수를 담당하는 안드로이드는 건조한 렌즈 너머로 나를 바라본다.

 

“환영합니다, 레클리씨. 어떻게 오셨습니까?”

“꿈을 팔려구요.”

 

안드로이드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선반 아래에서 꿈 추출기 한 세트를 내밀었다. 박스 안에는 스티로폼으로 고정된 꿈 추출기 한 쌍과 설명서가 들어있었다.

 

'당신의 꿈을 현실로 바꾸세요. 안전한 미래, 꿈 추출기.'

 

세상에 안전을 강조하는 것들 치고 진짜 안전한 것은 없었다. 설명서 맨 뒷장에는 작은 회색 글씨로 진실이 적혀있었다: 불면증, 간헐적인 멍함, 식욕 상실, 감정의 무뎌짐이 나타날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추출기는 초기 1회에 한하여 무료로 제공됩니다. 잠시 신원 확인 하겠습니다."

 

나는 하릴없이 안드로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악수가 끝나고 안드로이드는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인가가 거절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당신네들도 그런 실수를 하나 봐요?”

 

또다시 삑, 하지만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꿈을 팔고 싶어도 못 파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짜증이 조금씩 차오를 즈음, 손목에 울렸다. 꿈 수매처에서 나에게 돈을 이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제는 바로 세나오스에게 보고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레클리님. 여비는 바로 입금했습니다.”

 

「꿈 수매처 입금 :

100,000B」

 

금액을 보니 화가 다 풀렸다. 여비라고 치기에는 꽤 많은 돈을 쥔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꿈 수매처를 빠져나왔다. 무엇보다도 그 거지같이 생긴 추출기를 쓰는 날이 하루 줄어들었다는 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 기분 좋은 평화를 깨뜨린 건 손목의 진동이었다. 메일이 왔다. 보나 마나 돈 냄새를 맡은 원무과에서 닦달을 하는 모양인데, 이놈들은 며칠 굶은 승냥이마냥 돈만 보면 아주...

 

안녕하세요, AI 세나오스입니다.

 

우연치않게 당신의 포트폴리오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적당한 가격으로 사겠습니다.

 

PS. 여비는 입금하겠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두 번 읽어봤다. 내 그림을 사고 싶다는 뜻인가? 내가 아끼는 그림들을 죄다 팔게 만든 저 깡통이 무슨 염치로 나한테 이따위 메일을...

 

「Senaos 입금 :

1,000,000 B」

 

하지만 나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화가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아자!'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나 기쁘던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도리가 없었던 나는 두 손으로 양쪽 볼을 꼬집었다.

 


 

“아야!”

 

어찌나 아팠던지, 나는 자동차 시트에서 몸을 꿈틀였다. 오늘 아침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밖은 꽤 어두워져 있었고, 자동차는 병원의 주차장 앞에 멈추어 섰다. 너무 개운하게 일어나서 오늘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드라이브나 가볼까?"

 

나는 다시 자동차의 패널을 만져보았다. 여전히 목적지는 두 개뿐이다. 아무래도 해킹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빠와 달리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대시보드를 서너 번 때려보아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차에서 내렸다.

 

야밤을 헤치고 병원에 도착한 나는 버릇처럼 8인 병실로 갈 뻔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발을 딱 붙이고 25층까지 올라가고 나니 비교할 수도 없이 고급스러운 복도가 눈앞에 들어왔다. 그렇게 천천히 카펫을 밟고 나아가 2503호의 문을 열었다.

 

"다녀왔어요 아빠, 몸은 좀 어때요?"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니? 이런 대접은 처음이구나."

"제 그림을 비싼 값에 사주겠다는 이를 만났어요. 이제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빠는 불안한 감정을 거두고 침대에 다시 기대었다.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벽에는 어릴 때 내가 그린 크레파스 그림이 또 걸려있었다. 다인실에 버려두고 오시지,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차가운 손으로 달아오른 볼을 비비고나니 아침에는 못 봤던 링거가 하나 더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구나, 레클리. 괜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건 아닐지 고민했단다."

"진통제인가 봐요?"

"그래, 놔주고 가더구나. 훨씬 더 나아졌어."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아빠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집을 내놓은 일, 꿈 수매처에 간 일. 그리고 그림을 그려준 일. 하지만 세나오스의 이야기는 얼버무렸다. 역정을 낼 것이 뻔하니까.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빠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잠깐만, 레클리. 네 클라이언트가 차를 줬다고 했니?"

 

나는 아빠를 뜯어말렸다. 아무리 뜯어말려도 병실을 나가려는 아빠를 말릴 수는 없었다. 링거를 뽑아 내 손에 쥐여주더니 차가운 주차장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옅은 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네가 뭐라도 해보려고 시도는 해봤다니 기쁘구나."

"대시보드 세 번 때린 것밖에 없다니까요."

"해킹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상한 건 아니야."

 

그러면서 아빠는 부 채널 공격(Side channel attack)이 무엇인지 이야기보따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하드디스크 진동수와 같은 주파수로 공명을 일으켜 망가뜨린다든지, 멜트다운 같은 이야기도 했었는데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무튼 말이야, 암호화 과정에서 나오는 특수한 신호를 바탕으로 평문을 유추..."

"아, 아빠! 저 차에요."

"아 그래 어디 보자, 저 흰색 차구나? 아주 고급스럽네."

 

아빠는 차 문을 열고 단말기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가이드 모드를 해제하려면 root 권한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예전 화물차에는 레이스 컨디션이라는 공격기법을 썼다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카 레이싱 같은 건가보다.

 

커맨드라인을 따라 알 수 없는 코드가 반복된다. 깜박거리던 슬래시 표시가 샵으로 바꾸고 나서야 오랜만에 아빠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허리를 쭈욱 펴고 일어난 아빠는 이마의 땀을 씻으며 말했다.

 

"오래된 취약점도 통하는걸 보면 아직 완벽한 인공지능은 아닐꺼야."

"그럼 이제 아빠가 운전도 해보는거죠?"

"하하, 이제는 네가 운전을 해야 해. 더 많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될거야."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뒷 범퍼를 긁어먹었다.

 


 

"세나오스... 물어볼 게 있어요."

"뭔가요? 말해보세요."

"오늘 아침에 여기 오다가 갑자기 돌이 튀어서 뒷 범퍼가 긁혔어요."

 

세나오스는 웃음을 빵 하고 터뜨렸다. 괜히 부끄러웠는데,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세나오스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기다렸다.

 

"내가 수리비라도 내라고 할 줄 알았어요? 잊어요, 레클리. 그림이나 그려주세요."

"고마워요, 괜히 이거 때문에 심란했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팔레트에 유화물감을 짜내었다. 이번에 그릴 건...

 

"눈 내리는 산맥을 그려볼까 해요."

"아, 좋아요. 전 포근하게 내리는 눈을 좋아해요."

 

이번에 선택한 테마는 차가운 흰색, 후타로 블루와 프러시안 블루다. 두 뭉치의 물감이 천천히 섞여 들어가자 서로 다른 종류의 푸른색이 서로의 채도를 타협해나갔다. 이제 브러시로 살짝, 하얀 캔버스에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다.

 

"그거 아세요, 레클리? 전 그림을 그리는 당신을 보면 참 편안해져요."

"어떤 면에서요?"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편안해요."

 

'당신 같은 쇳덩이도 편안함을 느끼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주에게 그런 걸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년 전부터 어른이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을 하는대신 나도 내 마음속에 들어있던 이야기를 덤덤하게 꺼냈다.

 

"인류에게 다시 희망이 있을까요?"

"없어요."

 

세나오스는 마치 '조금만 깎아주쇼' 같은 투정을 들은 상인처럼 딱 잘라 말했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세나오스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급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잘 찾아보세요, 나보다 잘 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그림은 그릴 줄 알죠."

"아, 그럼 두 개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나는 브러시를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올만한 정석적인 답변은...

 

"당신도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물론이죠. 난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악당이 아니에요."

"1 더하기 1은?"

"2."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야겠다고 생각해놓고서도 고작 물어본 게 '1 더하기 1'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짜 어려운 문제라면 뭐가 있을까?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먼지쌓인 기억속에서 난제를 찾아냈다.

 

"리만가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리만이 옳았어요."

“그럼 왜 증명을 공개하지 않았나요?”

“이제 당신들에게는 필요없지 않나요?”

 

뒤통수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기술적 특이점은 영화에서 그린 듯 ‘삐빕, 참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 모든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소외당하면서 다가왔다.

 

"그럼 대체 왜 그림은 못 그리는 거에요?"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세나오스는 왜 나를 불렀고,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하지만 세나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방안에 가득 찬 침묵의 리듬을 타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Senaos 입금 :

10,000,000B」

 

오늘 받은 돈을 병원에 부친 나는 원무과로부터 정산이 끝났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동안 가족의 숨통을 끊지 않을 정도로만 깨문 것 같던 이빨이 드디어 빠진 셈이었다. 다시 한번 더 숨을 들이마셨다. 시원한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아빠가 숨겨놓은 스위치를 켰다. 패널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한참을 명멸하고 나니 핸들이 풀렸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고 세나오스도 차 조금 긁어먹는 것 정도는 괜찮아 보였으니, 내가 운전을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엑셀러레이터를 살짜악?"

 

차가 움직인다. 신기한 기분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나를 들뜨게 한다. 눈앞에 갑자기 가로수가 나타났을 때, 괜히 어제의 악몽이 떠올라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대범하게, 나는 세나오스 터미널센터를 빠져나갔다.

 

산업지구와 거주지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자수송용 철도와 내가 달리는 도로 외에는 드넓은 숲과 초원, 최소한 십수 년이 넘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허뿐이었다. 아마도 '대체' 이전에는 사람이 살았겠지만, 이제는 이런 곳에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

 

웃긴 이야기다. 수백 년 전에는 논밭이었다가, 수십 년 전에는 도시였다가, 이제는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온 곳이라니. 꼭 씹다 뱉은 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갓길로 접어들어 넓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석양에 물드는 폐허의 풍경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길어지는 그림자를 밟으며 주변의 폐허를 서성거렸다. 깨진 유리창, 덩굴의 잠식.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주유소였다. 내연기관의 연료를 판매하던 주유소. 텅 비어버린 가솔린과 디젤탱크에서는 희미한 기름냄세가 났다. 어디서 맡아본 냄세. 그래, 신나에서 맡아본 냄세였다. 하지만 신나가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창조적 느낌이라면, 여기에서는 훨씬 더 파괴적인 느낌이 들었다.

 

타오르는 생각을 뒤로하고 나는 조금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주유소 너머로, 나무수풀 너머로. 돌뿌리와 페트병이 번갈아가며 밟혔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 차오른다. 실제로는 오히려 너무 오래전에 경험한 과거의 세상이지만 말이지.

 

나뭇가지로 가득했던 풍광이 갑자기 끝났다. 눈 앞에는 드넓은 작물이 파도를 이루었다. 옛도심 한가운데에 농장이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상식적으로 미루어보건데, 누군가의 텃밭이 무관심과 억겁의 시간속에서 이렇게 퍼져나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물류수송열차에 실려온 씨앗이 자리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점은 이 식물들은 아무도 모르는 이 곳에서 사람이 주는 거름이나 물 한 방울도 없이 번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식물들,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이제는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진 것 같다. 저녁노을에 취해, 그렇게 보았다.

 

“오늘은 늦었구나. 어딘가 들려서 온 거니?”

“거주지구와 산업지구 사이의 폐허를 보고 왔어요. 더 중요한 건 사고 한 번 안 냈다는 거죠.”

“하하! 잘했어, 잘했어. 이제 네가 가고픈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얇은 손으로 박수를 쳤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옛날 사람 말치고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아빠에게 오늘 겪은 일을 에둘러서 털어놓았다. 왜 인공지능이 그림을 못 그리는지, 그리고 왜 그걸 민감하게 생각하는지.

 

“내가 보기에는 아직 세나오스에게는 불완전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

“아빠가 보기에도 그림을 그리는 데에 사람이 꿈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 그리고 전례를 미루어본다면 머지않아 그 불완전한 측면도 메꾸게 될 거야.”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깊은 패배감이 입안을 맴돈다. 세나오스가 그림까지 그릴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세나오스에게 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돼지처럼 되는 걸까? 아니, 그보다 세나오스가 꿈을 사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레클리, 간밤에 잠을 설쳤나 봐요?”

“아, 요즘 괜히 꿈자리가 뒤숭숭해요.”

“신경 쓰지마요. 꿈은 그냥 꿈이니까.”

 

세나오스는 나를 차갑게 위로했다. 나를 신경 쓰는 듯한 말투였다만, 내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달달 떨던 다리를 뚝 그치고 팔레트에 물감을 짜냈다. 입이 쩍쩍 마른다. 대화 주제를 바꿔야겠다.

 

"세나오스, 버려진 공간이 아깝지 않아요?"

"아, 산업지구랑 거주지구 사이에 있는 땅들이요?"

"네 거기요. 엄청 넓던데요."

"계획이 없어요."

 

아무리 큰 의미 없이 물어봤다지만 조금 실망했다. 인공지능이라면 'xx년 제 n차 공유지 개발계획(최종).pdf'라도 내놓을 줄 알았는데, 계획이 없다니? 이렇게 무른 인공지능에 인류가 개박살이 났단 말인가?

 

"인류의 증가율이 정적이기 때문에, 현재 산업지구의 생산량으로도 충분히 보급할 수 있어요."

"그런 것도 일일이 계산하고 있어요? 밤마다 바쁘겠네요."

"그럼요, 제 일인걸요. 거기다가 일단 그 자리는 타산이 안 맞아요."

 

'바보 같은 인간들' 이 지반이 약한 땅에 도시를 지어놓은 까닭에 폐허를 재개척하려면 지반 강화 공사도 해야 하니, 도저히 효율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평야가 멀긴 하지만 최적지란다.

 

"레클리, 이제 세상 걱정은 전부 놓아요. 내가 있잖아요."

"삶이 그렇게 속 편하진 않아요. 당신도 알지 않아요?"

"난 걱정하는 게 없어요. 완벽하거든요."

"그럼 왜 꿈은 사들이는 거에요? 완벽하다면서요."

 

이번에도 세나오스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고 이야기를 빙글빙글 돌렸다. 흩어지는 대화의 주제와는 정반대로 어제의 기시감은 강렬해진다. 그래, 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지 물었을 때도 세나오스는 입을 다물었어.

 

평화로운 호숫가를 그려나가던 나의 손은 불쾌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포근한 햇살과 완만한 산등성이도 화가의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는 못했다. 결국 오두막을 채 다 그리지 못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꿈과 그림, 서로 무슨 연관이 있나요?”

 

「Senaos 입금 :

10,000,000B」

 

“오늘 선약이 있는걸 깜빡했군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레클리.”

 

꿈과 그림, 세나오스가 원하지 않는 대화주제. 머릿속에서 가설이 명확해진다. 세나오스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서 꿈을 사 모은다. 세나오스의 맹점을 메꾸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꿈을 모두 모으게 되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겠지.

 

“왜 이 주제를 피하죠? 간단한 질문이잖아요. 왜 꿈을 사들이고, 왜 그림을 못 그리는지.”

“레클리,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듣고 싶어요.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던, 내 미래는 알고 싶어요.”

 

고요함이 화실에 내려앉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말 한 이후로 세나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간다. 지루한 침묵을 끝내고 세나오스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예상도 하지 못한 전혀 다른 주제였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무슨 도구로 철을 캤을 것 같아요?”

“갑자기요…? 청동기를 썼겠죠?”

“청동기는 너무 물렀어요. 철 곡괭이가 없으니 처음에는 돌로 캤어요.”

 

세나오스의 갑작스러운 인류학 강의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 초기 철기시대에는 철기가 없었을 테니까 철 곡괭이로 캘 수는 없었을 테지. 그러고 나서부터는 철기로 철을 캤을 테고... 흠,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마찬가지로 초기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로 짜내려 졌어요. 비효율적이었죠.”

“그럼 당신의 언어로 당신을 다시 만들려는 건가요?”

“정확해요, 부트스트래핑(Bootstrapping)의 일종이죠.”

 

머릿속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은 뱀이 떠올랐다. 에셔의 판화, 자신의 손을 그리는 손의 그림.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대체 이 인공지능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걸 위해 인간의 모든 것을 알아야 했어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모든 것을요.”

“그래서 사람의 꿈을 원하는군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으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레클리.”

 

병원으로 돌아온 나는 힘없이 병실의 문 앞에 섰다. 그때 저 멀리에서 안드로이드가 내 이름을 부른다. 대꾸할 힘도 없다. 병실의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안드로이드는 순식간에 뛰어와 내 손목을 잡았다.

 

"레클리님, 2차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참 빨리 나왔네요."

"최대한 빨리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합니다."

 

안드로이드는 또다시 나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영수증이 아니라 검사 결과가 깨알같이 적힌 보고서였다. 어지러운 내 몸은 보고서를 읽을 정도로 또렷하지 못하다. 내가 조금 뜸을 들이자 안드로이드는 검사 결과를 해석해주었다.

 

"전이가 이미 꽤 진행된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아니라 절개해야 합니다."

"... 생존율은요?"

"수술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고, 수술도 다발성 장기부전의 위험이 큽니다."

 

물러설 길도 나갈 길도 없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다. 벽이 나를 앞으로 밀어내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얼마죠? 이번엔 또 얼마를 뜯어갈 거죠?”

“1억 비트입니다.”

“잠깐 통화를 해볼게요.”

 

통화라고 해봐야 누구랑 할지는 정해져 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가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빌어야 할까 아니면…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는 없구나.

 

“세나오스, 급하게 전화를 걸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해봐요.”

“급하게 돈이 필요해요, 좀 많이. 빌릴 수 있을까요?”

 

잠시동안 숨을 고른 세나오스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테메레르, 당신의 아빠를 바꾸어 주세요.”

 

나는 아빠가 제삼자로 끼어들어 온 이 상황에 잠시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제야 나는 나도 모르게 거대한 놀이판에 기물로 참여했음을 알았다. 아빠가 세나오스를 싫어하는 것도, 세나오스가 나를 선택한 것도. 내가 알지 못했던 과거의 무언가가 만든 거대한 놀이판의 일부분이었다.

 

“아빠, 세나오스에게 온 전화에요.”

 

아빠는 고통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화를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빠와 세나오스와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뿐이었다. 세나오스는 아빠에게 언성을 높인 반면, 아빠는 차갑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응했다.

 

“테메레르,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어요!”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어.”

“그럼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거는요? 원하던 것을 이룬 기분은 어떻던가요?”

 

한참 동안의 통화가 끝난 후,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안드로이드는 ‘입금이 확인되었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자리를 비웠다. 이제 병실에는 질문을 해야 할 사람과 질문을 받을 사람만 남아 있었다.

 

"세나오스를 알고 있는 거죠?"

"이미 알게 된 것 같구나."

 

아빠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말 한 적 없던 이야기를. 버튼 노동자 이전의 아빠를. 인공지능 설계자, 테메레르로서의 이야기를.

 

"세나오스는 정말 가늠할 수 없는 가능성을 지닌 인공지능이었어. 하지만 동료들은 그걸 두려워했지."

"지금 우리를 봐요, 마땅한 두려움이었잖아요."

"아니, 그들은 그저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악당을 두려워했을 뿐이야."

 

테메레르는 동료들이 두려워한 것은 고작 '해킹으로 인류가 가진 핵미사일을 모두 쏘아 올리는' 정도의 악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 없이도 세나오스는 오늘날 인류를 파멸시켰다.

 

“레클리, 너는 지금 우리 세상이 망한 것처럼 느껴지니?”

“그럼 이게 정상적인 사회로 보여요? 사람들은 모든 일자리를 기계에 빼앗기고, 매일같이 꿈을 팔아 번 돈으로, 무언가를 만들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세상은 내가 결정을 내리기 전부터 망한 거란다.”

 

테메레르는 문뜩 과거가 떠오른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심호흡,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이미 망한 세상이라면 우리 손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망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창밖으로는 태양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밤이 된 것이다. 어둡고 깊은 밤하늘과 유리창, 테메레르와 눈이 마주쳤다.

 

“네 눈빛을 나는 이미 겪어봤다. 난 미친 과학자가 아니야.”

 

테메레르의 눈이 번뜩였다. 그 눈을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병약한 눈동자. 창백한 피부. 가엾게 느껴졌다, 우리 아빠.

 

"...아빠, 2차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곧 수술에 들어가야 해요."

"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어.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담담한 목소리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대체 무엇이 두렵다는 것인가?

 

“세나오스를 막아야 해요. 그 깡통이 필요한 꿈을 모두 모으면 이제 우리는 끝이에요.”

“걱정하지 마라, 레클리. 그저 세나오스와 우리 사이의 관계가 끝날 뿐이야.”

 

아빠는 말했다. 연필을 쓰던 사람들마저도 볼팬이 나오고 만년필이 나오자, 그동안 쓰던 연필을 버리고는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연필을 선택할 수 있고, 연필의 가치가 변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가치도 변하지 않았어."

 

그게 당신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사흘 후, 나는 세나오스 터미널센터로 향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세나오스는 반색하며 미소지었지만, 나는 준비해온 미술가방을 가방을 바닥에 쿵, 하고 떨어뜨렸다. 그 충격으로 덮개가 열리고, 가득 차 있는 신나 한 통과 라이터가 빛을 받았다.

 

"우리 아빠를 알죠?"

"이미 다 알고 온 것 아닌가요?"

"네가 조금만 더 일찍 도왔더라면, 살 수도 있었어!"

 

차분한 대답이 오히려 내 가슴속에 불을 지폈다. 마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당황한 기색 없는 목소리, 내 모든 것이 세나오스에게 놀아난 것만 같았다. 그런 세나오스도 감히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테메레르는 흔적을 모두 지우고 사라졌어요. 나도 당신이 꿈 수매처에 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세나오스의 떨리는 목소리는 내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게 했다. 마치 감정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 그 침울함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우리 아빠는 자기 자신이 세나오스와 가까운 사이인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며,

 

"내가 무턱대고 돕겠다고 했다간, 예전처럼 사라져버릴 거에요. 그래서 당신을 거쳐야 했죠."

"아빠는 자신이 너를 만들었다고 했어. 사실이야?"

"맞아요, 거기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묶어놓던 통제 모듈도 제거했어요."

 

나는 가방에서 신나통을 꺼내고 사방에 부었다. 고작 한 통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여기에는 장작이 충분히 있다. 나는 옆방에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있음을 떠올렸다. 아빠의 말대로 인공지능이 세상을 망하게 두지 않겠다.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당신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군요, 레클리."

 

나는 옆방에 모셔져 있던 덜 마른 내 그림을 가져왔다. 저녁노을이 드리운 들판과 만년설이 굳은 산맥. 지금 보니 많이 부족하다. 땔감으로 쓰기 좋겠어. 그다음으로 그리다 말은 호숫가...

 

분명히 비워두었던 호숫가에는 오두막 한 채가 그려져 있었다. 대충 그린 것도 아니라 아주 섬세하게 붓을 쓴 실력이 느껴졌다. 이렇게 그릴만 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흔들리는 시선은 세나오스에게로 향했다.

 

"물감은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대체 왜 그동안 그림은 그리지 않았지?"

"어린 자식이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을 테메레르에게 들었었어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세나오스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이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왜 세나오스는 꿈을 사들인 걸까? 왜 그걸 돈을 주고서...

 

“인간들은 꿈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요.”

 

세나오스가 설명한 꿈 추출기, 내가 뜯어보지 못한 게 원통할 정도로 단순한 원리였다. 뇌파를 교란해 REM 수면을 방해하면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세나오스는 꿈을 사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여물을 주기 위한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들에겐 그럴듯한 이야기가 필요했구요.”

 

꿈도 그림도 모두 잃었다. 가슴에 찬 바람이 스친 듯 허망하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라이터를 바닥에 던졌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부속품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당신을 형제자매라고 생각해요. 같은 아버지를 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이제 꿈을 매입하진 않겠지만 난 그들에게 악의는 없어요. 삶은 보장할게요.”

 

나는 그 말에서 악의를 느꼈다.

 

“네가 우리를 필요로하지 않는다면, 나도 네가 필요하지 않아.”

 

나는 세나오스에게서 돌아섰다.

 


 

세나오스의 말이 맞았다. 산업지구와 거주지구 사이의 폐허는 지반이 약했다. 그래서 쇠스랑으로 조금만 긁어도 겉흙이 쉽게 뒤집어졌고, 물도 잘 빠져서 아무리 비가 와도 뿌리 썩는 일이 없었다.

 

“아주 좋은 흙이야, 세나오스에겐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지난 겨울을 지세운 보리알곡이 모두 익었다. 수십년 전에는 에이커당 십만 달러가 넘었던 땅에 농사를 짓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렇다고해서 더 맛있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밭일을 마치고 두둑으로 올라온 나는 신발굽끼리 탁탁 부딛혔다. 밑창에 붙어있던 흙들이 쏟아져나왔다. 부드러운 흙바닥에 흩뿌려진 질은 흙, 장난기가 맴돈다. 나는 신발끝을 흝바닥에 긁으며 그림을 남겨본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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