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고스트 워커

2020.07.20 15:4307.20

"신들은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을 한탄했다. 특히 운하를 준설하는 작업은 뼈가 휘어질 듯 힘든 것이었다.

여신 남무는 아들인 지혜와 물의 신 엔키에게 이러한 신들의 한탄을 전하고 신들을 위해 일할 인간을 만들도록 권고했다."

수메르어로 전해지는 <엔키와 닌마> 중에서  

 

 

1

 

윌리엄에게 사건이 배당된 것은 지독한 우연이었다. 파일은 정상적인 과정과 절차를 거쳐 그의 책상 위에 올라왔다. 레이첼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 페이지를 넘기다 사진을 본 순간, 윌리엄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출신지도 거주지도 이름도 모두 가짜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진 속의 여자가 레이첼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윌리엄은 달에 근거지를 둔 로펌 J&K에 속한 법률 조사관이다. 로펌의 고객들은 주로 달이 아니라 라그랑주 포인트에 군집한 스테이션에 있었다. 법률 조사관은 대부분 소유권 분쟁 같은 민사사건을 다루지만 아주 드물게 형사사건을 다루기도 했다. 윌리엄은 사무실에서 나와 지하 무빙워크에 올랐다. 우주정 도크로 연결되는 지하통로였다. 작은 알루미늄 케이스를 오른 손에 들고 있었다.

 

사건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은 사건에 얽힌 이해관계의 복잡성과 밀도에 따라 결정된다. 형사사건의 경우 현장조사를 생략하는 게 관행이다. 돈이 안 되는 사건인데 출장비를 들여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달랐다. 적어도 윌리엄에게는. 매우 어렵게 회사 우주정 사용 승인을 받았다. 파일럿은 배정받지 못했다. 다행이 화물선 레쿱을 개조한 RKB-115형 우주정은 조종이 수월한 기종이다.

 

마그네틱 레일 작동 T-30, T-20,

10, 9, 8, 7, 6, 5, 4, 3, 2, 1

 

자기부상 레일 방식의 사출 시스템이 작동했다. 우주정은 미끄러지듯 지하 터널 레일 위에서 속도를 높이다 지상으로 솟구쳤다. 달의 중력장을 벗어났다.

 

메인엔진 점화

 

엔진은 달의 궤도를 떠나면서 켜졌다. 클러스터링된 3개의 메인 엔진에서 푸른 불꽃이 이글거렸다.

 

스테이션 13 건설현장은 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른 스테이션들과 마찬가지로 자전거 바퀴 모양의 설계였다. 안쪽 코어 도크와 일부 서비스 시설만 완성되어 있었다. 객실들이 들어설 원의 바깥쪽과 코어 도크를 티타늄 재질의 스트링 보완재로 연결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사건은 스트링 보완재 연결 작업 과정에서 발생했다.

 

“아이디를 확인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 WW315443217”

“확인했습니다.”

 

싱크가 시작되자 우주정 동체가 코어 도크의 회전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움직였다. 전면 창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회전하는 동체를 따라 춤추듯 너울거렸다. 약한 중력이 발생했다. 스테이션과 우주정의 회전이 같은 속도가 되자 관측창 전면으로 보이는 코어 도크는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싱크가 완료되었습니다. 진입하셔도 좋습니다.”

 

메인 엔진을 끈 상태에서 위치수정 분사장치가 우주정을 앞으로 밀었다. 자기 유도 레일이 도킹 위치로 끌고 갔다. 윌리엄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띵띵 부어오른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스테이션13 건설현장 총 책임자는 오른손 주먹을 내밀어 환영의 뜻을 표했다. 표정은 따로 놀았다. 매우 확실하게, 반갑지 않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었잖아요?"

"그런가요?"

"그렇잖아요. 이런 형사 사건 따위."

"그러게요."

 

시행사 스카이워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사체를 확인하겠다고 한 것이 이례적이긴 했다. 스테이션 연합 규정집에 따르면 지구 밖에서 발생한 사망사건의 경우, 사체를 C/T 장치로 스캔해 디지털기록을 남긴 뒤 곧바로 우주 공간으로 폐기하도록 되어있다. 그게 일반적인 처리방식이었다. 밀폐된 좁은 공간의 오염,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협회의 요구도 아니죠?”

 

답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례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절차 위반도 아니었다. 윌리엄은 답을 하는 대신 총 책임자를 빤히 쳐다봤다. 흰 피부에 회색 눈동자, 사자 갈기 같이 아무렇게나 불쑥 솟아오른 갈색 머리털. 가슴이 두꺼운 체형에 키는 190이 넘어보였다. 오른쪽 광대뼈에서 뺨으로 굵은 흉터가 나 있었다. 건설 현장의 로봇을 관리하는 사람치고는 사나운 인상이다.

 

윌리엄이 답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총 책임자는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할 말 없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윌리엄이 안내된 곳은 ‘조리실’이라는 글씨가 붙은 방이었다. 스테이션이 완공되면 식당으로 쓰일 공간 같았다.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시신을 냉각시켜야 했으니 아직 공사 중인 소규모 시설 스테이션13에서는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윌리엄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로봇이 건설한다고 광고하지 않았나요?”

“지금도 로봇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사람이 죽었을까요?”

 

윌리엄은 손톱으로 개인 단말 화면을 두드려 톡톡 소리를 냈다. 사고 당시 시신의 위치를 표시한 화면이었다.

 

“그걸 밝혀내신다고 출장 오신 거 아닌가요?”

 

알아낼테면 알아보라는 식이었다.

 

“건설 과정은 녹화가 되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키지 않으셨더군요.”

 

예상 질문이라는 듯 총 책임자가 씩 웃었다.

 

“규정을 잘 보시죠. 전 과정을 녹화하라고 되어있진 않아요.”

“아, 예. 그렇죠. 그럼요. 그리 말씀하실 줄도 알았어요.”

 

국가가 사라졌다 해도 질서는 필요하다. 지구의 돔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주 공간의 섬들인 스테이션도 최소한의 '사회계약'을 만들수 밖에 없었다. 헌법에 해당하는 '스테이션 연합 선언문'과 법률 역할을 하는 '스테이션 연합 규정집'이 그것이었다. 과거 국가의 탄생이 그러했듯, 선언문과 규정집을 만든 목적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었다.

 

“사체를 좀 볼까요?”

 

총 책임자가 눈짓을 하자 시행사 사람들이 움직였다. 불투명 비닐 백을 짐짝처럼 끌고 나왔다.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지퍼를 내리자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 죽은 몸이 드러났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야윈 몸. 쇄골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미라처럼 흉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가슴에서 목을 가로지르는 자상(刺傷)이었다. 상처는 오른쪽 가슴에서 얕은 흔적으로 시작돼 점점 깊어졌다. 목 왼쪽 경동맥에 이르러서는 손가락보다 더 굵게 패인 흔적을 남겼다. 이런 정도라면 온 몸의 혈액이 목의 상처를 통해 남김없이 흘러나갔을 것이다. 1기압의 몸에서 진공의 우주로 단시간 내에 뿜어져 나갔을 것이다.

 

“다른 사망 원인이 있을 수가 없어요.”

“알고 있어요. 보고서 읽었습니다.”

 

윌리엄은 가방에서 조그만 플래시 같은 도구를 꺼냈다. 레이첼의 가슴에 비췄다. 그리고 면봉같이 생긴 키트를 꺼내 피부 위를 문지르고 밀폐용기에 담았다. 같은 동작을 넓적다리와 하복부 등에서 반복했다. 윌리엄은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고꾸라질 것 같았다. 레이첼이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왜 간지럼을 태우느냐’며 웃음보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뭘 하고 있는 거죠?”

“글쎄요. 지도를 그려보는 거랄까? 힘의 지도 말이죠. 가장 아래 놓이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비슷한 일을 당해요. 남자든 여자든 뉴트럴이든. 그 흔적을 찾으려는 거예요."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티를 낼 수 없었다. 선글라스 아래 윌리엄의 눈엔 핏발이 서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윌리엄이 수행하고 있는 일의 객관성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아무런 사정없이 이렇게 느닷없이 시신으로 발견될 사람이 아니었다. 레이첼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었다. 치기어린 말이라 생각했던 일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것일 수도 있었다.

 

 

2

 

<리커버리>가 발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구에서 스테이션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정기 화물선이다. 21세기 1,2단 회수 방식에서 크게 발전된 것 없는 설계였다. <리커버리>는 지구의 돔과 대기 밖의 스테이션을 연결하는 유일한 항로이자 공공연한 불법 노동 송출 루트였다. 한낮이지만 태양은 모래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이 탄 컨테이너는 <리커버리> 꼭대기에 올려 있었다. 당국의 형식적 감시를 피해 물류창고에서 사람을 태운 뒤 다른 컨테이너와 함께 로켓에 장착됐다. 레이첼의 호흡은 불안정했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액체연료와 산화제의 냉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먹은 게 없어서 입을 앙다물 힘도 없었다.

 

컨테이너는 도무지 사람을 태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꼭지를 자른 원뿔처럼 생긴 공간에 짐을 쌓듯 차곡차곡 세 겹으로 사람을 깔았다.

 

“스파게티, 피자, 불고기, 초밥, 그리고... 음...”

“야! 그런 음식들 먹어본 적이나 있나?”

“부탁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마! 더 배고프다고”

 

도합 12명, 12명이 컨테이너에 구겨넣어졌다. 깔려 죽지 않도록 층과 층 사이에 알루미늄 프레임을 놓아두긴 했지만 과연 충격을 버텨낼 힘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손으로 힘을 주면 당장이라도 이음새가 뽑힐 것 같았다. 컨테이너 안으로 숨을 쉴 산소도 공급되지 않았다. 대신 컨테이너에 탈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숨을 쉴 수 있는 장비를 준비해야 했다.

 

컨테이너에 타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스테이션에 도착할 때까지 호흡할 수 있는 장비, 여압복, 일하는 동안 먹을 일주일치 냉동건조 식량, 1.5리터의 물을 포함해서 한 사람이 50kg을 초과할 수 없었다. 자기 몸무게를 포함해 50kg을 넘을 수 없었다. 그게 스테이션 ‘유령 노동자’로 일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었다. 이걸 맞추려고 지원자들은 계체량을 앞둔 권투선수처럼 죽기 직전까지 굶었다.

 

“공기 공급 차단한다. 자 모두 호흡장치 작동시키고.”

 

오디오채널로 존 킴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력 송출 조직 하급간부였다. 인간이 육체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인 시대에 인력송출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범죄였지만 공공연한 범죄이기도 했다. 그 규정은 ‘인권' 따위를 생각해 만들어진 게 아니고 돔이나 스테이션에 바바리안(barbarian)이 들어와 바이러스를 옮기는 걸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테이션 거주자, 엘로아(אלוה)들과의 접촉이 이뤄질 까닭이 없는 스테이션 건설 현장은 ‘불법 노동’이 가능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다. 컨테이너에 탄다는 것은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고, 그의 목숨은 온전히 존 킴버의 손에 맡겨지게 되는 거였다.

 

기체의 진동이 컨테이너까지 고스란히 전달됐다. 발사 시퀀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컨테이너는 환기구가 차단되면 보온병처럼 외부와 완전히 절연됐다. 그렇다고 일시에 내부 공기를 빼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갇혀있는 컨테이너가 워낙 좁아 호흡장치 없이는 곧 숨을 쉬기 어려워지게 되어있었다.

 

"아, 잠깐만요.”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뭐지? 공기 탱크가 왜 비어있지? 아니, 잠깐...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였다. 12명 가운데 한 명의 호흡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즉 그는 이제 곧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컨테이너에 태울 때 사전 조치로 탑승자들의 손과 발을 프레임에 결박하는 게 관례였다. 한 명 죽을 일은 한 명에서 끝내자는 이유였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죽음을 현실로 마주한 사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발사 시퀀스는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조종석에 앉은 존 킴버는 들을 수도 없는 소리였다. 30분쯤 지나 헛소리가 시작됐다. 이산화탄소 중독이었다. 그리고 곧 조용해졌다. 무심하게도 그와 동시에 로켓이 불을 뿜었다.

 

‘제발 나는 아니길.’ 죽은 1명을 빼고 11명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화물선에 사출좌석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리커버리>가 안정성이 높은 로켓이라 해도 성공률은 95% 정도. 로켓이 폭발하면, 발사가 실패하면 그대로 모두 불꽃 속에 사라지는 거였다. 불법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로켓이 상승하자 알루미늄 합금 구조물이 '드드드'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레이첼은 짧게 호흡을 끊어 쉬었다. 그러나 그의 척추와 폐, 심장에 가해지는 힘이 너무 강했다. 사람이 탈 것을 고려하지 않은 화물선이라 중력이 5G까지 순식간에 높아졌다.

 

<리커버리>가 지구의 중력에서 살짝 벗어나 미소중력 공간으로 진입했다. 고요하고 완전한 어둠. 컨테이너 안은 슬픈 정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그리고 무기력하게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원망하지 않을 거야. 죽은 그 녀석도. 도울 수 없다는 걸 알아.”

“...”

“처음이라 놀랐겠지. 흔히 있는 일이야. 괜찮아.”

 

옆자리 동승자는 나이가 꽤 많아보였다. 커다란 검은 눈 밑에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레이첼을 위로하고 있었다. 누군가 더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저 n/12의 손실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대로 검은 바다, 우주에 던지면 그만이었다. 악명 높은 중간항로에서 행해 중에 죽은 노예를 바다에 던져 버렸듯이.

 

 

3

 

스테인 글라스로 장식된 도서관 전면 유리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냉동수소 보유량 1, 2위를 다투는 압도적인 재력 없이는 갖출 수 없는, <돔315>가 자랑하는 시설이었다. 20세기 종이책까지 보유하고 있는 지구상의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도서관 서가는 가운데 복도를 사이에 두고 형형색색의 책들이 거대한 벽을 이루게 꾸며져 있었다. 모든 책들은 한 권도 빠짐없이 해체했다가 다시 제본된 것들이었다. 바이러스가 묻어있을 것을 우려해 종이 한 장 한 장 분리해 멸균작업을 거친 뒤 다시 책의 형태로 묶었다.

 

서가가 끝나는 지점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진 4인용 테이블에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 로스쿨 제복을 입은 윌리엄 윌버포스는 씩씩거렸다.

 

“위장취업? 너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는 하는 거야?”

“미쳤어? 도서관이라고. 목소리 낮춰.”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레이첼은 윌리엄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놔"

 

윌리엄은 레이첼의 손을 뿌리쳤다. 윌리엄은 결국 밖으로 끌려 나갔다. 돔 천장이 가림막을 개방한 채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투명한 강화 플라스틱 재질 돔 위로 뿌연 하늘이 어른어른하게 보였다.

 

"제발 나를 바보취급 하지 마!"

 

이번에는 레이첼도 큰 소리를 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네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야. 제발 정신좀 차리라고!"

 

사랑했지만 윌리엄은 언제나 레이첼의 대책 없음에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느꼈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는 그녀의 태도는 가상했지만 쓸데없는 헛소리였다. 스스로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 어떻게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큰 돈을 들여 신분을 사기 전, 윌리엄은 돔 밖에서 바바리안으로 살았다. 거기서 마취 없이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낸 일이 있다. 상처를 제대로 소독하지 못해 왼손 약지가 끝에서부터 썩어들어갔던 것이다. 6살 밖에 안 된 아이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너는, 고통이라는 게 뭔지 몰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온 뒤였다. 흥분 때문에 상기됐던 레이첼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 말, 내 앞에서 다시 하지 말라고 했지?"

 

레이첼의 표정이 불길했다.

 

"기억해.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잖아. 지금 상황이."

"알았어."

 

레이첼은 차갑게 돌아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불러도 멈추지 않았다. 윌리엄은 쫓아갔다. 그리고 뒤에서 팔을 잡았다. 레이첼은 윌리엄의 손길을 쳐냈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주 잠깐, 레이첼은 윌리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윌리엄의 얼굴로 레이첼의 손이 빠르게 올라왔다. 찰싹 소리가 났다. 윌리엄은 멍하게 레이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제 널 볼 일이 없어."

 

레이첼은 다시 돌아서 윌리엄에게서 멀어졌다. 윌리엄은 알고 있었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어차피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는 건 돔드(Domed)가 아니라는 증명과 다를 바 없었다. 돔드가 아니라면 그건 신분을 돈으로 거래한 얼치기일 수밖에. 윌리엄은 돔을 떠났다. 그리고 달을 선택했다.

 

후회 같은 건 없었다.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사랑도 기억도 슬픔도. 아예 처음부터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4

 

수송선 <리커버리>가 목적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스테이션 13 건설현장에서 환영 메시지가 자동으로 반복해서 송신됐다. <리커버리> 컨테이너에 손발이 묶인 채 갇힌 사람들이 들을 내용은 아니었다.

 

“스테이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스테이션13은 인공중력이 제공되는 호텔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스테이션은 항법사, 관제사, 콘트롤러, 의사 등 전문직은 물론 요리사 같은 서비스업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드릴 것입니다. 당신이 꾸었던 '직업의 꿈', 그 꿈을 실현시켜드릴 것입니다. 지금 바로 지원하세요.”

 

<리커버리>가 스테이션 13에 도착했다. 스테이션 13은 겨우 코어 도크만 완성된 상태였다. 마치 직사각형으로 구멍을 낸 도넛 같은 모양이었다. 코어 도크는 방앗개비 다리처럼 보이는 로봇팔로 <리커버리>를 붙들고 주름진 연통처럼 생긴 에어록을 동체에 연결했다. 존 킴버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거 뭐야! 죽었어?”

 

재빠르게 12명의 상태를 관찰하더니 한 명이 숨진 사실을 순식간에 간파해냈다. 오랜 경험으로부터 습득한, 기술이라면 기술이었다.

 

“에이 X팔. 재수 없게”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이번 회차에 활용해야 할 노동력의 1/12이 상실된 것 그게 문제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존 킴버가 스위치를 누르자 손목과 발목에 채워졌던 잠금장치가 일시에 해제됐다.

 

“자기 몫 챙기려면 빨리 움직여! 5분 뒤에 바로 투입이다.”

 

손실이 있었으니 주어진 과제를 마무리하려면 더 빨리, 더 많이 일을 해야 했다. 투입과 산출의 아주 간단한 계산이었다. 존 킴버는 헬멧을 들어 사람들의 어깨며 팔, 엉덩이 등을 툭툭 쳤다. 레이첼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휘청하며 몸이 기울었다.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별이 보였다. 이주일 넘게 물만 마신 걸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야, 거기! 거기 그냥 가면 어떻게. 치우고 가야 할 거 아냐!”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사망자였다. 두 사람이 시신의 팔과 다리를 잡았다. 배고픔에 시달린 산 사람들의 눈은 퀭했다. 헬멧을 쓰고 여압복을 입은 사망자가 오히려 멀쩡해 보였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레이첼은 그 모습을 보며 자책했다. 애도의 마음은커녕,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야! 넌 뭐야? 뭐하고 있어?”

 

레이첼은 경기를 일으키듯 움찔했다. 다른 사람은 벌써 저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따라가려고 팔 다리를 움직이다가 뒤집어진 풍뎅이 꼴이 되어있었다.

 

“이런 X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존 킴버가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첼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팔뚝을 잡았다. 그 상태에서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다. 독사의 혀가 팔을 휘감는 것 같았다.

 

“걸음을 떼는 방법부터 가르쳐줘? 그래, 그러지 뭐. 물지 않을게.”

 

맹수가 먹잇감을 입에 물고 옮기듯 존 킴버는 레이첼을 질질 끌고 갔다. 레이첼은 당황했지만 어떻게 할지 알지 못했다.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저항해야 되는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심각한 탈수에서 오는 증상이었다. 레이첼은 정신을 잃었다.

 

 

5

 

레이첼이 직접 만들어 가지고 다녔던 수첩이었다. 증거의 오염을 막기 위해 장갑을 끼우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에 덴 것처럼 손가락이 뜨거워졌다.

 

“소지품 중에 좀 특이한 게 있네요.”

“...”

 

2040년대까지는 존재했다는 물건. 별도의 배터리나 태양 에너지 공급이 없이도 문자 데이터를 생성하고 저장할 수 있는 물건.

 

“용도가?”

“죽은 사람에게 물어보던가.”

 

레이첼은 과거를 동경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도서관 서가에서 보냈다. 윌리엄이 ‘과거의 악’, ‘과거의 고통’을 보았다면 레이첼은 ‘과거의 빛’을 보았다. 처음으로 '위장취업'이란 말을 한 것도 도서관에서였다. 레이첼은 그 단어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책에서 처음 발견했다며 들떠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말, 믿을 수 있어?”

“아니, 믿지 않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권위 있는 역사서나 철학서가 아니었다. 20세기에 발생했던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이야기들을 흥밋거리로 읽을 수 있게 기담 형식으로 묶은 책이었다. 윌리엄은 믿지 않았다. ‘고귀한 희생’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희생'으로 포장되는 것 그 이면에는 ‘감춰진 욕망’, 혹은 ‘특이한 종류의 욕망’이 있을 뿐이다.

 

레이첼은 진지하게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 이후 ‘대창궐’ 이전, 그러니까 이른바 ‘황금시대'로 불리는 시대의 이야기를 파고들었다. 윌리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버려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같은 시대에 대한 같은 자료들을 읽었지만 해석하는 방향은 너무 달랐다.

 

“‘기록이 남은 경우’라는 방법론적인 한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나중에 그들의 욕망이 드러나더군. 한마디로 나중에 잘 먹고 잘 살아.”

“그래?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 제발 윌리엄. 인간은 원래 아름다운 존재라고.”

 

레이첼은 특이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도서관에 있는 책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책에는 처음부터 글씨가 있는데 반해 그 물건은 비어있는 종이묶음이었다. 레이첼은 단말이 아니라 그 종이묶음을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 책을 읽을 때 그 물건도 함께 펼쳐놓았다.

 

레이첼은 신기하게 바라보는 윌리엄의 눈길을 보고 시범을 보여주겠다는 듯 길쭉한 탄소 막대기까지 꺼내들었다. 그걸 종이묶음 위에 쓱쓱 문질렀다.

 

“이게 뭐니?”

“이거 다이어리라고 부르는 거야. 저널이라는 말을 쓴다고 나온 곳도 있고. 내가 연습을 좀 했지. '글씨를 쓴다'고 표현해. 아마 너도 도서관에서 읽어봤을 거야.”

“글씨를 쓴다?”

“그래, 이미 컴퓨터가 나와 있던 20세기의 마지막 날 까지도 이렇게 종이에 손으로 글씨를 쓰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해. 믿어지니?”

“말도 안 돼 이렇게 느리게 문자를 정착시킨단 말이야?” .

“응.”

“꼭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내 생각에도. 그런데 이렇게 종이 위에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글씨라는 걸 쓴다는 건 아주 매력적인 일 같아. 아주 작은 그림, 내 마음을 표현하는 그림을 정성스럽게 그리는 거니까.”

 

떨리는 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윌리엄은 수첩을 증거보전 포켓에 얼른 담았다. 그 표지를 넘겨본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랬다 해도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이 위에 쓰인 것이 문자라는 사실 자체를 눈치 챌 사람이 스테이션에 있을 가능성이 낮았다. 인간이든 AI든 인식은 범주를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시각적으로 포착한 사실이 문자라는 범주에 포함된다는 걸 알아야 그 문자의 해독이 시작될 수 있다.

 

윌리엄과 레이첼, 두 사람 모두 머리가 좋았다.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1,800개의 그림문자를 외웠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암호로 쓰기 위해서였다. 레이첼은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종이라는 물건을 암시장에서 용케도 구했다. 돔에서 제일가는 권력자의 딸다운 행동이었다.

 

“이 사람이 여기에 어떻게 왔다고 했죠?”

 

현장책임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기세등등하던 처음과는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레이첼의 가슴과 하복부 등에서 샘플을 채취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윌리엄에게 넘겨진 사건 파일에 따르면 캐런이란 이름의 사망자는 시공 현장을 감독하다 사고를 당한 것이어야 했다. 시료 증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다. 스테이션 13에 누군가 더 있었음을, 그 사고가 있기 전 다른 범죄가 있었음을 증명해줄 참이었다.

 

 

6

 

발밑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흉측한 다지류였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독사처럼 대가리를 바짝 세우고 레이첼을 응시했다. 앵무새의 부리를 가로로 겹쳐놓은 것 같은 입이 쩝쩝 소리를 내며 우물거렸다. 불투명하게 끈적이는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레이첼은 손발이 묶여 달아날 수 없었다.

 

레이첼은 모든 힘을 짜내 묶인 상태에서 버둥거렸다. 피부가 금속에 부딪치고 긁히면서 피가 철철 흘렀다. 다지류가 레이첼의 다리를 휘감고 기어올랐다. 선혈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더듬으며 꿈틀댔다. 쉭쉭 소리를 내며 잠시 틈을 보더니 레이첼의 몸속으로 와락 밀려들었다.

 

레이첼이 정신을 차렸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슬리핑백에 담긴 자신을 확인했다. 꿈이었으나 꿈이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복부에 살을 아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직도 몸에 수분이 남아있었던 건지,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꿈틀거리는 희뿌연 환형동물로 채워진 웅덩이에 빠진 느낌이었다. 레이첼은 눈을 감았다.

 

“탈수로 죽을 뻔 했어. 내가 살렸어.”

 

곁눈질 하던 존 킴버가 깨어난 걸 보고 입을 열었다. 하이에나의 입에서 풍길 것 같은 악취가 진동했다. 레이첼은 슬리핑백의 지퍼를 내렸다. 벗은 몸 그대로 나왔다. 속옷은 어디에 두었냐고 묻지 않았다. 작업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레이첼은 킴버 앞을 지나쳐갔다.

 

"비겁한 새끼."

"뭐야 이년이? 겨우 살려놓으니까"

"살려? 지랄하지 마.”

 

작업복에서는 땀과 배설물이 섞여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지구에 살고 있는 곰팡이들이 이미 이 이주해온 것이다. 레이첼은 헛구역질을 했다. 당장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죽는 건 오히려 쉬운 선택이었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7

 

로봇을 대신해 일하는 노동자. 그들은 스스로를 ‘고스트 워커’라고 불렀다. 우주개발 초기 이름 없이 죽어간 ‘고스트 파일럿’에 빗댄 이름이었다. 원래 스테이션 건설은 100% 로봇이 하도록 규정되어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건설 로봇의 운용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사람을 부리는 게 훨씬 쌌다.

 

“고스트 워커라고 들어봤어요?”

“전혀.”

“진술이 기록되고 있는 거 알죠?”

 

지상에서 로보타들은 정밀 GPS와 라이다(LIDAR), 7G 통신 기지국 망 등으로 유도되기 때문에 오작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전무하다. 반면 지구 밖 우주공간에서는 별빛을 기준삼은 삼각 측량으로 위치를 인식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오류가 잦았다. 건설 과정의 조립 오류는 공사기간의 지연으로 이어졌다. 예정된 공기를 맞추기 위해 일부 사업장에서 규정을 무시하고 사람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수지가 맞는 일이었다.

 

“인간 노동자들 쓸 물도 식량도 숙박시설도 없어요.”

“아주 나를 바보로 아는 군요.”

“그럴 리가요.”

 

당황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걸 윌리엄도 알고 있었다. 현장 책임자는 매뉴얼대로 답한 것이었다. ‘고스트 워커'의 존재는 사실 이쪽 업계에서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뻔한 일이었다. 눈을 감아주는 대가로 법률 조사관 협회에는 거액의 돈이 매년 제공되고 있었다. 물론 스테이션 연합이 직접 건네지는 않았다.

 

 

8

 

상자처럼 생긴 로봇이 압축 질소 가스를 뿜으며 움직였다. 우주공간에서 집을 짓는 거미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상자 로봇은 코어 도크에서 와이어를 붙잡고 출발해 가장 바깥 골격까지 가져갔다. 거기에는 다른 형태의 로봇이 기다리고 있다가 와이어를 구조물에 고정시켰다. 인간처럼 머리와 팔다리가 달린 로보타 Ex3346이었다.

 

이 로봇은 꼭 스파이더맨 같았다.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레일 집개가 달려있었다. 스테이션 동체 레일에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로보타는 번쩍이는 금색과 백색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작동 중 직사광선에 과열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햇빛을 받아 표면이 번쩍거렸다.

 

“아무리 봐도 진짜 황금덩어리 같아.”

“답답하지 않냐? 속도가 우리 절반도 안 되잖아?”

“고맙지 뭐, 그러니까 우리가 돈을 벌지.”

 

한 분면 당 약 400개 정도의 와이어가 걸리니까 4분면 전체로 보면 8백 개 정도의 와이어가 연결되어야 했다. 고스트 워커들은 안전 고리를 레일에 건 채 에어록 안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5분이 지났다. 정확히 5분이 지나자 헬멧에 장착된 마이크로폰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쇼타임 끝났어. 다시 움직여!”

 

건설 과정은 분양권을 사들인 돔드에게 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계가 하루 종일일 필요는 없었다. 그게 이곳의 방식이었다. 5분의 쇼타임이 지나면 55분은 ‘고스트 워커’의 시간이었다.

 

레이첼은 아직도 수치심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거기 아가씨, 괜찮은 거야?”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대답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여기 온 목적에 충실해. 딴 생각 하지 말고.”

 

지구에서 출발할 때 옆 자리 동승자였다.

 

‘여기 온 목적…’

 

레이첼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이었다. 마실 물과 공기를 희생해 지구로부터 가져온 물건이었다. 위성들을 릴레이로 연결해 비인가 신호를 만들어주는 장치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나가는 ‘고스트 워커’들의 존재를 세상에 보여줄 유일한 수단이었다.

 

“자, 빨리 움직여!”

 

존 킴버의 목소리였다. 레이첼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바로 시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좀 더 기다렸다간 또 무슨 일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자살 충동을 얼마나 더 참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11명의 ‘고스트 워커’들이 공사현장에서 제 위치를 잡는 30초 뒤, 신호 전송 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여기 온 목적, ‘위장취업’의 목적을 달성하게 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봇 대신 스테이션을 조립하고 있는 인간 노동자들의 모습이 돔드에게, 스테이션 거주자들에게 방송될 것이다.

 

레이첼의 아버지는 권력자이자 돔 네트워크(Dome-Network)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은 노예상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레이첼은 큰 충격에 빠졌다. 죄를 용서받는 길은 노예상의 존재, 고스트 워커의 존재를 폭로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있는 장면은 스테이션13 건설 현장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로보타가 아니라 인간이 노동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이라 할 수도 없는 극한의 조건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예선을 타고 이송되는 과정에서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태는”

 

활에 걸린 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와이어 하나가 툭 끊어졌다. 그 날카로운 금속이 순식간에 레이첼의 가슴을 치고 목을 할퀴었다. 찢겨져 개방된 우주복 아래 레이첼의 몸에서 피와 공기가 솟구쳤다. 레이첼의 개인 방송이 겨우 몇 초 만에 중단됐다. 그러나 ‘고스트 워커’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진짜 로봇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할당된 일을 멈추지 않았다.

 

 

9

 

윌리엄이 수첩 겉장에 끼워진 다른 색깔의 종이를 가리켰다. 레이첼은 삐죽 고개를 내민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 넣었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됐다.

 

“뭐야?”

“편지야.”

“편지?”

“응. 내 마음을 담은 그림. 아, 내 마음을 담은 글씨. 언젠가, 너에게 줄 거야.”

 

죽은 레이첼의 소지품으로 남겨진 물건, 그 수첩의 겉장 바로 뒤에도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윌리엄은 단번에 그 종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끝내 받지 못했던 편지.

 

시료는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현장 책임자의 표정이 증명하고 있었다. 상황을 넘겨짚어 시료채취 키트를 챙겨온 게 유효했다. 그걸 분석해 결과가 나오면 레이첼을 대신해 복수를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한 달 내에 통보될 겁니다.”

“기다려 보겠습니다. 한 달까지 걸릴지...”

 

우주정은 스테이션13을 출발했다. 연료가 부족할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게이지가 풀(full)을 가리키고 있었다. 윌리엄이 뭔가 착각한 모양이었다.

 

‘레이첼은 나를 잊지 않았던 것일까?’

 

회색빛으로 빛나는 달의 지평선 위로 푸른색 지구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폴로 8호 승무원들이 찍은 사진과 정확히 같은 구도였다.

 

오토파일럿 모드로 전환합니다. 25분 뒤 달 기지에 착륙합니다.

 

수첩을 분석해 보면 레이첼이 왜 스테이션13까지 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더 소상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경우는 달랐다. 윌리엄은 고민했다. 레이첼이 끝내 전하지 않은 그 편지를 발신자의 허락 없이 펴보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정상 압력을 초과해 채워진 우주정의 연료와 산화제가 새고 있었다. 무언가 인위적으로 스파크를 일으켜 불을 당겼다. 불꽃이 야수처럼 맹렬하게 솟구쳤다. 우주정은 순식간에 흔적 없이 녹아내렸다. 윌리엄도, 레이첼의 수첩도, 그 안에 접혀있던 종이편지도. 처음부터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로써, 스테이션 13의 건설은 다시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고스트 워커의 노동력으로.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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