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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조개교

2024.02.01 00:0002.01

조개교(敎)

pilza2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편지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고향 옛집은 별장처럼 쓰이며 보존해 왔지만, 초등학생 때 이후로는 가본 적이 없고 관리가 되지 않아 반쯤 폐가가 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당신에게야 나고 자라 추억이 깃든 소중한 집이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도 지키려는 사람도 없어졌다. 남은 우리 가족은 이 집을 허물고 땅도 처분하기로 합의했다.

나는 동생 부부와 함께 시골 옛집에 내려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의 마을은 교통도 불편하고 살기에 적합한 환경도 아니었다. 마을은 이미 활력을 잃고 대부분 주민이 사라진 이후였다. 비록 경치는 좋았지만, 자주 찾지도 못할 텐데 굳이 관리하며 별장으로 쓸 돈과 시간이 없었다. 과연 팔릴지 걱정이었다.

3층 단독주택은 마치 서양식 2층 주택 위에 기와지붕 딸린 옥탑방을 얹은 것처럼 생겼다. 지붕뿐만 아니라 담장 위의 작은 기와지붕도 한국식 건물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낸 옛집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정원에 들어설 때부터 벽돌과 기왓장으로 주위가 엉망이고 내부에는 천장과 벽에 금이 가 있었다. 그 사이로 잔뜩 쳐진 거미줄은 임자 없는 집에서 위세를 떨치는 세입자들의 자취를 보여줬다.

동생은 도자기, 레코드판, 외국산 모형 범선 같은 소장품을 탐내는 모양이지만 나는 오래지않아 서재에 틀어박혔다. 먼지 쌓인 답답한 공기와 꿉꿉한 냄새 속에서도 반가운 책 냄새가 나를 반겼다. 책장에 잔뜩 꽂힌 세로쓰기 된 오래된 책이 흥미로웠다.

서재의 책을 읽을 것, 헌책방에 팔 것, 너무 낡거나 가치가 없어 보여 폐기할 것으로 분류하던 중 책장 밑에 있던 상자를 발견했다. 가죽 슈트케이스는 빈티지라는 말이 사치일 정도로 낡아빠진 상태였다. 끈 두 개가 케이스를 감싸고 옛날 허리띠 같은 버클로 채워져 있었다. 버클을 풀고 상자를 열었더니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종이 뭉치가 나왔다.

지우개, 트럼프 카드, 부루마불 보드게임, 전역증, 스위스 아미 나이프, 껌 안에 든 작은 만화책, 〈더 클래식〉 1집 카세트테이프, 피처폰 시대 유행한 열쇠고리, 작은 시계가 달린 반지, 천에 감싼 암모나이트 화석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나름 아버지에겐 추억의 물품이겠지.

그 밑에 깔려 있는, 노란 고무줄로 묶인 편지와 엽서 뭉치를 집어 들었더니 삭아버린 고무줄이 힘없이 끊어져 미세한 가루가 되며 떨어졌다. 화려한 외국 우표와 커다랗게 찍힌 소인, 그리고 영어로 적힌 겉봉의 주소를 보니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지에서 보낸 편지였다.

편지지에 손으로 쓴 편지라니 정말 오랜만에 본 물건이었다. 평생 살면서 메일, 메신저, 문자로 모든 연락을 해결하다 보니 내 앞으로 오는 우편물이라고는 카드 명세서, 공과금 고지서, 건강검진 통지서 같은 것들뿐이다. 그러니 신기해 보일 수밖에. 노랗게 얼룩진 편지지는 감촉이 퍼석하고 그 위에 볼펜으로 쓴 글씨는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편지와 엽서는 대부분 삼촌이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었다.

내가 삼촌을 만난 건 정말 어릴 때 잠깐뿐이고 함께 살아본 적은 없다. 삼촌에 대한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렸고 이제는 작은 사진 속에 비친 흐릿한 모습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아버지와 닮았지만 키가 좀 더 크고 양복 차림에 짧은 콧수염을 기른 외국 신사 같은 풍모. 성인이 된 후로 늘 외국을 돌아다녔다는 말은 들었다. 할아버지가 창업한 무역회사는 아버지가 물려받았고 삼촌은 허울뿐인 부장 직함을 받아 출장을 빙자하여 해외로 놀러 다녔다고 한다. 아직 해외여행에 제한이 심했던 1980년대에는 출국하려면 관광이 아닌 다른 목적이 필요했기에, 삼촌은 무역업무를 핑계 대고 집안의 돈으로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그래도 형제관계는 돈독했던지, 아버지는 가끔 삼촌 욕을 하면서도 돈을 보내주곤 했다. 이렇게 편지를 잔뜩 주고받은 것만 봐도 그렇고. 휴대전화가 없던 때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하지만 서신으로 소통하는 로맨틱함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이후 집으로 돌아와 삼촌의 엽서와 편지를 정리했다. 단순히 안부를 전하는 내용은 제외하고, 내 흥미를 끄는 것만 뽑아서 시간순으로 늘어놓았다.

첫 번째 편지는 1987년 7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보냈다.


형!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여기 푸른 하늘이 보이는 이태리의 까페테라스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이역만리의 하늘도 어릴 적 고향에서 봤던 하늘과 다름없이 생겼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주고 있어.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이어진 거야.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고 할까?

지금은 비록 바빠서 힘들겠지만, 형도 나처럼 해외로 나와봤으면 좋겠어. 견문도 넓히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질 거야.

안타깝게도 여기 사람들은 동방의 작은 나라 꼬레아를 아직 잘 몰라. 어디를 가도 처음엔 나를 일본 사람인 줄 알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관광객으로 늘 북적이는 삐렌체에서 보이는 동양인은 일본인밖에 없는 것 같아. 어서 빨리 우리나라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으면 좋겠어. 내년에 서울 올림픽대회가 개최되면 정부에서 허용해주겠지?

형은 희선이라는 아가씨와 아직 만나고 있어? 결혼할 생각이야? 내 형수님이 될 줄 알았으면 접때 좀 더 잘해줄 걸 그랬어.

여기는 이태리의 삐렌체야. 르네상스 예술이 태어나 꽃을 피운 문화와 예술의 도시! 나는 어제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했어. 르네상스 미술의 본산지라고 불려서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야. 크고 화려한 입구를 지날 때는 고대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인데 막상 내부는 오래된 건물다운 정취가 물씬 풍겨. 어쨌든 바닥과 높은 복도 천장에 있는 장식부터 무심코 지나가는 회랑에 놓인 조각품에 이르기까지 전부 세계적인 미술품이야. 그야말로 인류 예술의 정점이 모인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나 할까?

나는 여기서 마침내 〈비너스의 탄생〉을 목도했어. 이태리 화가 산드로 보띠첼리의 역작이야.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대표 화가라 그런지 그의 작품을 모은 갤러리가 따로 있고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아서 한참 기다려야 겨우 갤러리에 들어갈 수 있었어.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 교과서에 조그맣게 실렸던 그림을 실제로 눈앞에 보니 엄청난 충격이더라.

첫째로 그 크기 말인데, 가로가 3미터 세로가 2미터쯤 될 거야. 나는 그 그림이 실제로 그렇게 클 줄 상상도 못했어. 교과서에서는 조그맣게 실렸잖아? 그러니 우리는 외국의 명화가 얼마나 크고 선명한지 직접 보지 않고는 느끼지 못하는 거지. 너무 안타까워.

내가 얼마나 놀라고 감동했을지 상상이 가? 붓으로 칠한 흔적, 물감이 덧입혀진 입체감, 세월의 흔적으로 낡아진 흔적까지 고스란히 보인단 말이야.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그림의 주인공 비너스 그 자체야. 화폭의 크기가 그 정도니까 가운데에 서 있는 비너스는 실제 사람 크기랑 거의 똑같단 말이지. 나는 미의 여신이 실제로 내 눈앞에 나타난 듯한 느낌을 받았어. 마주보기가 부끄럽고 떨릴 정도야. 나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턱까지 흘러내리지 뭐야.

이런 창피한 얘기는 형에게 밖에는 못 하겠다. 근데 이런 내 모습을 남에게 들키고 말았어. 내가 겪은 놀라운 체험담은 여기서부터 시작돼.

조금 떨어진 옆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한 신사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더라고. 나는 처음에 그 사람이 거기 있는 줄도 몰랐어. 그만큼 그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뭐라 뭐라 그러는데, 아마 이태리어였을 거야. 나는 이태리어를 전혀 모르니까 처음엔 당황했지. 이태리어는 불란서어나 서반아어와 많이 비슷하긴 해. 난 영어를 할 줄 알고 불란서어를 조금 알지만, 이태리어는 영어로 된 관광객용 회화책에 적힌 걸 떠듬떠듬 읽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지.

나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논 빠를로 이딸리아노’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가 영어로 말했어. 그제야 의사소통이 되었지.

“멋진 그림이죠, 안 그래요?”

양복 입은 신사가 영어로 묻더군. 나이는 마흔? 쉰? 백인 남자의 나이를 맞히기는 어려웠어.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곧은 자세를 보면 마흔 이하로 보였지만, 콧수염 때문에 꽤 나이 들어 보였어. 영화배우 챨리 차프린 같은 작은 콧수염이 유독 눈에 띄었지. 나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어.

“예, 정말 그렇읍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죄송합니다만, 이 그림에 많은 감동을 느끼신 것 같아서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읍니다.”

“예…….”

“선생은 일본에서 오셨읍니까?”

“아니오, 전 한국 사람입니다. 사우스 코리아.”

“오!”

남자는 약간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어. 아마도 남한에서 온 사람을 처음 본 것이겠지.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그림을 가리키며 또 묻더라고.

“이 그림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녔읍니다. 그래서 묻고 싶읍니다. 선생은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꼈읍니까?”

갑자기 질의응답을 하는 느낌이 들지 뭐야. 그래도 나는 이 감동을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어.

“비너스 여신을 직접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읍니다. 굉장히 마음에 충격을 받았고요. 그래서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네요.”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울었다는 사실을 내가 먼저 밝히면서 멋적게 웃었어. 그러자 남자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지.

“선생이 느낀 감정을 스땅달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스땅달이라고요?”

“그가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은근히 말속에 모른다고 단정하는 느낌이 담겨서 조금 욱하더라고. 동방의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닌지? 솔직히 스땅달의 글을 읽은 적은 없지만 누구인지는 형도 알잖아.

“이름은 압니다. 『적과 흑』을 쓴 유명한 소설가지요.”

그제야 남자는 아주 살짝 감탄하는 듯한 뉘앙스로 나를 보며 말했어.

“맞습니다. 알고 계시네요? 스땅달은 훌륭한 불란서 소설가입니다. 그는 바로 이곳, 예술의 도시 삐렌체를 방문하여 미술품을 감상하다가 심장이 거세게 뛰고 몸에 힘이 쭉 빠져 쓰러질 듯한 경험을 합니다. 이후 그가 남긴 여행기에서 이런 체험을 상세히 밝혀서 오늘날 스땅달 증후군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충격, 경이, 어지러움, 인간으로서의 무력함! 지금도 이 미술관에서 매일 수많은 관람객들이 겪고 있을 겁니다. 그중에 선생이 있지요.”

남자는 연극적으로 팔을 벌리며 설교하듯 말했어.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림에서 떨어져 걸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지.

“선생이 겪은 스땅달 증후군도 다르지 않습니다. 위대하고 초월적인 존재를 눈앞에 마주했을 때 느끼는 미력한 인간의 감정 말이지요. 이는 곧 종교적인 체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은 방금 우리의 위대한 세계와 접촉한 것입니다.”

그는 내 등 뒤로 손을 뻗으며 꽤 멀어진 비너스의 탄생 그림을 가리켰어. 돌아보니 다시 교과서에서 본 것처럼 작아 보였지. 하지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어. 고요해진 내 심장이 다시 뛰었고 잔잔한 바다에 해일이 몰아치는 듯이 마음에 설렜지.

“선생은 비너스를 보며 진짜 여신을 본 것 같다고 말씀했죠? 왜 그렇게 느꼈읍니까?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화로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저 그림의 모델이 된 여자는 보띠첼리를 후원한 메디치 가문 사람의 정부(情婦)였다고 합니다. 미녀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평범한 세속의 여자였죠. 그런데 선생은 그런 여자의 누드를 보고 종교적인 감동을 받은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대답하기가 어려웠어.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말하더라고.

“선생은 아마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고 여신이라 느꼈을 겁니다. 바다에서 해안으로 갓 도착한 모습, 양옆에 여신을 반기는 바람의 신과 계절의 여신. 하지만 잘 보십시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이 있읍니다. 바로 여신의 발밑에 있는 조가비 말이죠. 여신이 조개 속에서 탄생한 듯한 이 모습. 이게 굉장히 은유적이고 신비하면서 상징적이고 또한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다시 보니 비너스가 조개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그저 화려한 발판으로만 보았읍니다만, 이제는 저 조개껍데기가 있기에 비너스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내가 두서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남자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그런 나를 지켜보았어. 그는 한층 친숙하게 내 팔을 가볍게 잡더니 이끌더라고.

“혹시 지금 다른 일정이 있읍니까?”

“아뇨, 없습니다. 오늘은 그냥 미술관을 돌아볼 생각이었어요.”

“잘 되었군요. 보여드리고 싶은 그림이 더 있는데, 가실까요?”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갔어. 가면서도 계속 설명해주더라.

“비너스의 올바른 라틴어 이름은 웨누스. 그 기원인 그리스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라고 합니다. 흔히 미의 여신으로 평가절하되지만 그 본모습은 사랑과 가정의 신이며, 수메르의 이슈타르와 동일한 신입니다. 이슈타르는 풍요와 다산의 신. 인간의 문명이 기원(起源)할 때부터 모든 인간사를 관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신이 조개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한 가지 증거를 더 보여드리죠.”

조카를 위해 멋진 선물을 준비한 삼촌 같은 미소였어.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가 꽤 마음에 들었나 봐.

그가 안내하여 보여준 그림은 보띠첼리의 다른 그림 〈성 바르나바스 제단화〉이야. 약 3미터에 달하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그림인데 가운데에 푸른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주위에 여러 인물이 둘러싸듯이 서 있지. 솔직히 기독교 종교화에 대해 잘 몰라서 누군지 모르겠어.

“성모의 머리 위를 보십시오.”

남자가 말했어. 그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더니 과연, 성모 마리아 머리 위에 후광처럼 있는 건 바로 조개가 아니겠어? 마치 평범한 장식처럼, 숨은그림찾기처럼 몰래 숨겨놓은 조개껍데기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

남자는 이어서 나를 이끌고 보띠첼리 갤러리를 나와 다른 장소로 이동했어.

그가 보여준 그림은 이태리 화가 필리피노 리피의 〈성모와 네 성인〉이야.

솔직히 자세히 알지 못하는 화가였지. 어쨌든 좋은 그림이긴 한데 내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었어.

방금 본 그림과 거의 흡사한 구도였어. 똑같이 가운데 성모자가 있고 주위에 다른 인물들이 있어.

보띠첼리와 달리 한국에서 유명하지 않은 화가라서 형이 이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을 거야. 여기 미술관은 다행히 플래시만 켜지 않으면 촬영할 수 있어서 내 코닥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편지에 동봉할게.

어디가 눈에 띄는지 알아보겠어? 맞아. 여기도 마찬가지로 성모의 머리 뒤에 조개껍데기가 있었어. 뿐만 아니라 발아래 단상에도 조개껍데기 장식이 새겨져 있었지. 이게 과연 우연일까? 절대 그렇지 않아. 중세 종교화는 치밀한 계산 아래 많은 상징을 넣어놓았다고 들었어. 이것도 그중의 하나인 거지.

남자가 그림을 보며 해주는 설명을 들어보니 의미가 명확해지더라.

형도 알겠지만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원래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잖아.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은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야. 즉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생명의 근원을 가리켜.

비너스가 결혼, 다산, 풍요를 상징했기에 농경사회에서 비너스 숭배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이런 비너스 숭배신앙이 그대로 중세 구라파의 성모 마리아 숭배로 이어졌다고 해. 아프로디테가 아들 에로스를 안고 있는 회화, 조각의 구도를 그대로 모방해서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은 기독교 종교화로 이어져.

그런 비너스 신앙의 상징물이 바로 조개인 거야. 그래서 보띠첼리의 그림에서 비너스는 조개 속에서 탄생했고, 이를 이어받은 성모 마리아 역시 후광의 모습이 조개처럼 생긴 것이지.

남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을 그린 리피는 바로 보띠첼리의 제자였다는 거야. 그러니까 조개 상징을 넣은 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승되었다는 의미지.

그렇게 비너스 신앙이 성모 마리아 신앙으로 대체되어 중세시대를 거치게 되었어. 물론 태양신 신앙을 흡수한 기독교의 예수 신앙이 가장 큰 세력이지만,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신앙 역시 이에 지지 않을 정도로 크고 뿌리가 깊어.

이런 설명을 듣자 나는 흥미로운 역사의 이면을 엿본 듯한 느낌에 흥분이 되더라고.

“미스터 킴과의 대화는 매우 유익하고 뜻깊은 것 같읍니다.”

남자가 말을 했어. 우리는 어느새 통성명을 하고 꽤 친해졌는데, 이 남자는 불란서인으로 자기를 바롱 드 끌라마르(Baron de Clamart), 그러니까 끌라마르 남작이라 불러달라고 하더군. 앞으로는 남작이라고 부를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읍니다. 함께 가시죠.”

남작이 나를 안내했어. 미술관은 3층에 있는데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널찍한 옥상 같은 공간으로 이어졌고 거기에 까페가 있더라. 커피의 본고장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커피 냄새가 진하게 나더라고.

여기는 거리의 까페도 그렇고 여기도 그런데 길바닥에 커다란 파라솔을 놓고 그 아래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많은 손님들이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어. 이런 곳을 까페테라스라고 부르더군. 우리에겐 낯설지만 구라파에서는 흔히 보이는 풍경이야. 어쩐지 운치가 있고 멋스러워 보여. 촌스럽고 지저분한 포장마차와는 전혀 딴판이야. 형도 여기 와서 봤으면 좋겠다.

남작이 안내한 파라솔 아래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어. 한 명은 아인슈타인처럼 헝클어진 백발을 지닌 나이 든 백인인데 미국인이고 이름은 로버트 오. 이스터(Robert O. Easter)라고 해. 수산물 유통업을 하는 사장님인데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의 초밥집에 생선을 공급한다더군. 처음엔 이스터 씨라고 부르다가 친해진 후로는 그냥 보브라고 불러. 또 한 사람은 체구가 작고 얼굴이 둥근 일본인인데 이름은 와따나베 겐이찌(渡辺賢一)라고 해. 내과의사였는데 현재는 은퇴하고 아내도 사별하여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니며 유유자적 살고 있다고 하더라. 정말 부러운 인생 아니야? 돈도 많고 어느 나라든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일본 사람들이 부러워. 나도 나이 들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본인이 의학박사라고 자랑하길래 친해진 후로는 박사라고 부르게 되었지.

그런 두 사람, 아니 남작까지 포함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점이었어. 이제 서양에서도 유행이 지나버린 줄 알았는데, 갑자기 콧수염 기른 남자들에게 둘러싸이니까 처음엔 좀 어색했어. 결국 지금은 나도 기르게 되었지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할게.

그들은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고 신기해하면서 한국에 대해 묻더라. 솔직히 말해줄 게 별로 없었어. 1987년의 어지러운 한국 상황을 말해주고 싶지도 않고. 맞아. 나는 형처럼 산업역군으로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지도 않은 도망자야. 부모 돈으로 해외로 도피한 비겁자야. 하지만 형만은 나를 이해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내년 개최할 올림픽대회에 대한 기대로 화제를 돌려 겨우 빠져나왔어. 그렇게 조금 친근해진 분위기가 되자 비로소 그들이 모인 이유와 목적을 말해주더라.

그들은 스스로 네리테스라고 지칭해. 그리스신화의 인물. 아프로디테가 조개로 만든 미소년이래.

형도 알겠지만 그리스 신화는 누군가가 창작한 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전승된 옛이야기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어.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헤로도토스, 아폴로도로스 같은 인물이 유명하지. 그래서 이들이 모은 신화의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어느 쪽이 정답이라 단정할 수 없어.

그중 가장 유명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네리테스는 아프로디테의 애인이었는데 자신과 함께 올림포스로 가자는 제안을 거부했다가 분노한 아프로디테에 의해 조개가 되었다는데, 히기누스의 『이야기』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실려 있어.

아프로디테는 네리테스를 너무나 사랑했고, 올림포스로 가면서 헤어지게 되자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그를 조개로 만들어 갖고 갔다고 하지. 그들은 이 판본의 이야기를 더 마음에 들어 했고, 조개가 가진 상징을 감안하면 이쪽이 옳다고 주장했어. 그렇게 여신의 사랑을 받는 조개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품고 네리테스라는 이름을 자청한 거야.

그러니까 그들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개교(敎)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만 오해는 하지 마. 조개라는 동물을 신처럼 숭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조개는 십자가나 만(卍)이나 다비드의 별처럼 그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해. 그들이 굳이 숭배하는 존재가 있다고 하면 그건 비너스, 아프로디테, 성모 마리아일 거야. 미와 사랑과 모성의 여신. 그건 곧 인류 문명과 문화를 낳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어머니를 상징해.

내 얘기가 너무 길어졌나? 그만큼 나는 그들 네리테스에게서 깊은 인상을 많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단 말이야.

이제 편지를 끝마칠 시간이 된 것 같아. 어느덧 해가 지고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네. 다음에 또 편지할게. 오늘 밤도 호텔방에서 그들과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만 해도 설레. 많은 지식과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하고 뜻깊은 시간이야.

이만 총총.

동생 찬수가.


두 번째 편지는 1989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필모어 디스트릭트에서 보냈다. 80년대에 자유로이 세계여행을 다니고 이탈리아의 미술관을 관람했다는 사실에서 알고 있겠지만, 우리 집안은 과거에 꽤 잘 살았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후에 잡화상으로 시작한 가업이 국제무역회사로 부쩍 성장했고, IMF 사태 때 부도나기 전까지 우리 집안은 지역의 유지이자 큰 부자로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편지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버지는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받아 대학 졸업 직후부터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고, 삼촌은 서류상으로만 취직하고 출장을 빙자해 할아버지 돈으로 놀러 다녔다. 1989년 1월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으니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진 것 같은데, 어쨌든 삼촌은 이때도 여전히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형! 잘 지내고 있지?

설날에 못 가서 미안해. 아버지가 많이 화나셨을 텐데, 올해부터 구정이 3일 연휴가 되었다며? 계속 외국에서 지냈더니 모르고 있었어. 난 작년처럼 민속의 날인 줄 알았지. 아무튼 아버지에게 말 좀 잘해줘.

나는 지금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에 있어. 여기에는 나성 같은 코리아타운이 없어. 차이나타운과 재팬타운만 있어서 재미교포들은 주로 재팬타운에 모여 살지. 나는 지금 보브가 소유한 건물 위층의 빈방에서 와따나베 박사와 함께 지내고 있어. 걸어서 30분도 안 되는 곳에 김대중 총재가 미국 망명 시절 즐겨 찾던 중화요리점이 있는데 지금은 내 단골 가게가 되었지. 매운 짬뽕 맛이 와따야. 언젠가 형도 와서 먹어봤으면 좋겠다.

보브와 박사를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되겠지? 기억나지 않으면 재작년에 보낸 편지를 찾아봐. 끌라마르 남작도 옆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어.

더 숨길 필요도 없겠지만 나 역시 네리테스의 일원이 되어 이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어. 우린 지금 책을 편찬하느라 바빠. 인류 문명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조개라는 상징물을 조명하는 길고도 장대한 여정의 도중에 있지.

내 마음속에 담긴 두서없고 방대한 내용을 정리할 겸 형에게 우리가 쓰는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할게. 비록 전 세계 사람에게 퍼뜨릴 목적이라서 영어로 쓰고 있지만, 언젠가 완성되면 형에게도 꼭 보내주겠어.

인류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동굴 벽화일까? 라스코 동굴 벽화가 유명하지. 하지만 벽화는 인간의 지성을 상징할 수는 있어도 문명의 상징이라 하기에는 모자라. 집단 창작물이 아닐 수도 있잖아? 개별적으로 뛰어난 원시인이 혼자 그린 그림일지도 모르잖아.

문명의 정의는 인간이 무리를 지어 만든 사회의 부산물 아니겠어?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를 가리키는 증거물, 그건 바로 패총(貝塚)이야.

산더미처럼 쌓인 조개껍데기들. 패총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자연적인 퇴적물로 오인당했지. 하지만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이제는 인류 최초의 문명의 증거물임이 밝혀졌어. 사냥과 채집을 하여 생존하고 그 증거물을 후대에 남기는 행위. 이건 곧 인류가 쌓은 최초의 유적을 의미해.

이런 패총을 연구하게 되면 놀라운 한편 당연할지도 모를 결론에 이르게 돼. 지구상에 남은 거대한 패총의 위치가 곧 인류 문명의 발상지와 겹치거든. 4대 문명의 발상지라 불리는 장소는 모두 강 유역이고, 해당 지역은 민물조개의 산지이기도 해. 인류 문명의 요람은 조개껍데기로 만들었다는 얘기야.

그러니 지성을 가지고 원시인에서 문명인으로 도약한 인류가 조개 숭배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거대 종교들이 득세하면서 조개교는 역사의 이면으로 숨게 돼. 그리스로마 신화나 이집트 신화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취급받는 것처럼 말이야.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어느 종교 등 예외 없이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폄하하는 바람에 조개교는 토테미즘으로 간주당하게 되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개교는 끈질기게 살아남았어. 내가 봤던 보띠첼리와 리피의 그림에서처럼.

이때쯤 형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중세시대에나 전해지던 미신 아니냐고. 그렇지 않아. 조개교의 핵심 세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암약하고 있어. 그것도 그저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아냐.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스리고 있지. 지금의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무엇일까? 돈. 그래 바로 돈이야. 경제. 경제를 지배하는 자가 바로 세상을 지배한다 이거야!

이런 돈의 시작이 바로 조개껍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조개껍데기는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한 화폐야. 중국 최초의 왕조국가 하(夏)나라에서 조개껍데기를 돈으로 쓰면서 이를 패폐(貝幣)라고 부르게 되고, 이후 화폐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돼. 그래서 조개 패(貝) 부수가 들어간 한자 중에 재산과 거래에 관련한 글자가 많이 있지. 이 정도는 형도 학교에서 배워서 잘 알고 있을 거야.

조개 중에서도 특히 개오지 껍데기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화폐로 쓰였는데 이 개오지의 학명이 바로 모네리아 모네타(Monetaria moneta), 모네타라는 라틴어가 머니(money)의 어원이 돼. 조개가 곧 돈의 조상이라는 뜻이야.

그러니 조개 숭배신앙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세상의 부를 지배하는 개념이자 원리임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아직 믿지 못할 형을 위해 증거를 하나하나 제시해볼게.

형은 세계에서 제일 크고 돈을 많이 버는 회사가 뭐라고 생각해? 우리에겐 덜 알려져 있지만, 정답은 바로 석유회사야. 중동 산유국들이 막대한 오일 머니를 벌어들이고 있는 건 잘 알고 있겠지.

그런 석유회사 중에서 제일 큰 회사의 이름은 쉘. 영어로 shell이 무슨 뜻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지? 쉘을 상징하는 로고가 바로 조개. 이 노란색 조개에 붉은 글씨로 적힌 회사 이름을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어. 이 회사는 원래 런던의 작은 골동품 가게에서 시작해. 동남아에서 수입한 조개껍데기 장식 같은 걸 팔던 작은 회사였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커질 수 있었을까?

원래 미국 정유산업은 록펠러가 장악하고 있었어. 그런데 반독점법을 내세워 억지로 회사를 해체시켰지. 당연히 이득을 본 건 신흥 정유회사들이었어. 쉘 역시 이 시기에 영국 및 네덜란드 왕실의 비호를 받아 성장할 수 있었지.

록펠러를 견제하고 쉘을 끌어올린 건 역시 뒤에서 조개교의 암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야. 우리가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이유는 조개교의 본산지가 구라파에서 미국으로 옮겨 왔기 때문이야. 구체적인 얘기는 조금 뒤에 할게. 지금은 쉘 말고 알려줄 예시가 더 있어서.

퀴즈 하나 낼게. 세계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먹는 음식이 뭐게? 음료수는 아마 알겠지. 코카콜라. 음식은 아마 모를 거야. 정답은 맥도날드라는 미국 회사에서 만든 햄버거야. 햄버거는 설마 알고 있겠지? 빵 사이에 고기와 치즈를 끼워서 간편하게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야. 맥도날드가 아직 한국에 없는 모양인데, 와따나베 박사 말에 따르면 일본에선 70년대에 개점해서 아주 난리가 났대. 지금도 줄을 서서 먹는 모양이야. 그 정도로 인기래.

그 회사의 상징물은 노란색 아치야. 맥도날드의 앞글자 M을 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노란색 M과 붉은색 배경이 쉘의 조개 로고와 비슷해 보이지 않아? 실은 이 마크는 영어가 아니라 조개의 모양을 형상화한 거야. 두 개의 빵 안에 고기 속살이 든 모습은 조개를 상징하고.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햄버거라는 이름은 독일 함부르크 지방의 다짐육 스테이크에서 비롯되었어. 이 함부르크식 스테이크를 빵 사이에 끼워서 먹는 샌드위치를 미국에서 햄버거라고 부르게 되었다지. 그런데 남작의 말에 의하면 맥도날드 햄버거를 창업한 맥도날드 형제는 단순한 식빵이 아니라 위쪽이 둥근 빵을 만들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햄버거의 모양을 선보였어. 왜냐하면 이들이 바로 조개교의 후예였기 때문이지. 사진으로 햄버거 모양을 보면 그 모습이 고기라는 속살을 품고 있는 조개의 모습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거야.

한 가지 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돈을 제일 많이 벌어서 기네스 기록에 오른 전자 오락기가 있어. 〈팩맨〉이라고 하는데, 노랗고 동그란 주인공이 적을 피해 돌아다니면서 콩을 먹는 오락이야. 이걸 만든 나까무라라는 일본인은 팩맨의 모양을 조개에서 따서 만들었다고 해.

이제 실감이 나지? 이렇듯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 조개처럼 생긴 음식을 먹고 조개처럼 생긴 주인공을 조종하는 전자오락을 하면서 주유소에 그려진 조개 그림을 볼 수 있는 거지. 바로 조개가 인류의 문명,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근원이자 핵심임을 가리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야.

그런 조개교에 큰 명암이 드리워져.

바로 세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한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인 비극이고 세계의 경제를 위축시킨 비극이지. 여기에는 조개교를 둘러싼 비화가 존재하고 있어.

아까 햄버거 얘기를 했지? 조개교 신앙은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흘러갔는데 그 후예 중의 하나가 바로 히틀러야.

형이 깜짝 놀랄 진실을 알려줄게. 원래 히틀러는 화가였어. 정확히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생도지만.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히틀러는 정치가의 길을 걷게 돼. 얼핏 보면 뜬금없어 보이지 않아? 그림을 그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라니.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도시 비엔나에 있는 미술대학에 들어가려 했으나 낙방하여 좌절했어. 방황하던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바로 이태리 삐렌체야. 그래, 그는 바로 내가 갔던 과정을 그대로 밟아 〈비너스의 탄생〉을 보고 감동하여 초기 조개 숭배집단의 일원으로 가입했지.

하지만 그들과는 결별했던 것 같아. 세상의 뒤편에 숨기에는 그의 야망이 너무 크고 무모했으니까. 히틀러는 독일제국으로 돌아와 나찌당 당수가 되고 총통이 되어 우리가 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돼.

그런데 그의 모습을 잘 봐. 코의 면적을 넘지 않는 작고 검은 콧수염, 인상적이지 않아? 당시 그를 제외한 나찌당의 다른 인물들은 그런 수염을 하지 않았지. 작은 콧수염을 기르는 게 나찌의 유행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나도 네리테스 동료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어. 그들이 모두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이유를. 콧수염은 조개교 지도자의 상징이었어. 그것도 히틀러나 차플린이 했던 그런 조개처럼 생긴 작은 콧수염 말이야. 사실 히틀러와 조개교의 관계를 증명하는 증거가 더 있는데, 그는 사실 콧수염을 기를 수 없는 사람이거든. 그럼에도 굳이 가짜 콧수염을 만들어 붙였단 말이지. 왜 그랬을까?

내가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줄게. 히틀러는 사실 여자였어. 이건 그의 주치의였던 테오도어 모렐의 회고록에서도 암시된 내용이야. 모렐은 히틀러의 신임을 얻으며 주치의로 일했지만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인정되어 석방되었고 회고록을 남겼어. 여기서 그는 히틀러의 정체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처방한 수많은 약물 중에 남성 호르몬 성분을 언급해서 간접적으로 인정했지.

히틀러의 사후 골격을 입수해서 조사한 소련 공산당도 여성의 유골임을 알고도 쉬쉬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가 여자라는 센세이쇼날한 사실 때문에 대중의 시선이 그쪽으로만 쏠리면 상대적으로 그의 악행이 가려질까 우려했다는 설이 유력해.

아무튼 그래서 히틀러는 여자임을 감추기 위한 목적과 동시에 조개교의 상징을 드러내기 위해 조개 모양의 가짜 콧수염을 붙였던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그릇된 야욕 때문에 조개 콧수염은 악마의 상징처럼 되어버렸고 조개교는 더더욱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야만 했지.

이후 조개신앙의 분파는 갈라져 구라파에는 석유회사 쉘, 일본에서는 전자오락 팩맨, 미국에서는 맥도날드를 만들어 돈으로 세상에 조개의 힘을 널리 떨치고자 했지.

그 뒤로 조개교의 본거지는 미국으로 옮겨졌고 희극배우 챨리 차프린이 지도자가 되었어. 히틀러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었던 그가 같은 비교(秘敎)의 사상을 물려받았다니 의아스럽지? 나도 처음에 듣고는 상당히 놀랐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차플린의 콧수염도 가짜로 만들어 붙인 거야. 그 역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조개교 신앙을 상징하기 위해 조개처럼 생긴 가짜 콧수염을 훈장처럼 달고 있었어.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네리테스였던 거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플린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인해 공산당이라는 누명을 쓰고 영국으로 쫓겨나듯 이주하여 평생 미국 땅을 밟지 못하게 돼. 정작 공산당이 조개교의 두 라이벌이자 적(敵)중 하나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말이야.

소련 공산당은 히틀러를 조사하다가 조개교를 나찌의 기원이라고 오해했고, 선민사상이라고 여겨 탄압했어. 공산당의 상징물인 낫과 망치를 봐. 낫은 닫힌 조개를 억지로 벌리는 도구이고 망치는 조개껍데기를 때려 부수기 위한 도구야. 자본주의의 상징인 조개를 향한 공산주의의 적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징이지?

반면 미국은 차플린 없이도 조개교의 사상이 자본주의라는 탈을 쓰고 번성하게 되지. 영국에서 온 쉘도 일본에서 온 팩맨도 미국에서 제일 크게 성공해서 큰돈을 벌어. 미국에서 자생하여 세상으로 뻗어나간 맥도날드는 말할 필요도 없지.

이걸 알고 나면 나찌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쳤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어색하게까지 느껴져. 물론 우리는 이후로 아직까지 이어지는 긴 냉전을 겪고 있으니까, 당시엔 그저 공동의 적을 위해 임시로 손을 잡았을 뿐임을 알고 있지.

아까 내가 라이벌이 둘이라고 했지? 남은 하나는 바로 프리메이슨이야.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고대 석공의 후예인 그들은 유태인과 함께 나찌의 탄압을 받았기에 조개교를 적으로 여기고 있어. 프리메이슨의 상징물이 지금은 콤파스와 직각자인데 원래는 망치와 흙손이었어. 그들의 기원에서 유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조개를 부수고 자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기 위해 망치를 썼지. 그러다 이미지 세탁을 위해 지금의 상징물로 바꾼 거야.

현재 우리의 상황은 좋지 않아. 프리메이슨과 공산당이 우리를 적으로 여기고 있잖아. 히틀러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조개 콧수염을 하는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어졌고.

내가 기르고 있는 콧수염도 조개 모양이야.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아버지가 하도 뭐라고 하셔서 챨리 차플린 흉내라고 둘러댔지만, 이제 형에게 진실을 털어놓게 되어 후련해.

한국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할게. 나는 조개에 대해 토론할 때 우리 한국인만 아는 비밀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어. 조개는 우리네 은어로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지. 우리 인간이 태어난 근원 말이야. 그런 장소를 조개라 부르는 우리 한민족이야말로 조개 신앙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거기다 내 이름을 봐. 김찬수의 찬(贊) 자에는 조개 패(貝)가 들어 있지. 나 역시 선택받은 사람임이 분명해.

이 얘기를 들려줬더니 남작이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어. 내게 네리테스가 될 운명이 아니었냐고 그러더라.

그만 끝내야겠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답장은 기대하지 않지만 조카가 태어나면 사진 꼭 보내줘.

형과 가족들이 이슈타르의, 비너스의, 마리아의 조가비 같은 단단한 가호를 받으며 안식하기를

동생이


편지 말미에 언급한 조카가 바로 나를 가리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1989년 5월에 태어났으니 아버지가 이 편지를 받은 석 달 뒤의 일이다.

삼촌의 편지는 흥미롭지만 과연 여기 담긴 이야기가 모두 사실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채플린 콧수염을 기른 남자 네 명이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건물 어느 방에 둘러앉아 세계의 문명과 경제를 논하며 주제만 거창한 책을 편찬하는 광경은 그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이후 삼촌은 몇 번 한국으로 와서 체류했던 모양이지만 대부분 시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삼촌은 아마 미국 영주권은 있어도 시민권은 없는 것 같다. 아버지 사망신고 때도 그렇고 이전에도 가족관계를 확인할 때 삼촌이 여전히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편지는 제법 긴 시간을 뛰어넘어 1995년부터 1996년 11월까지 짧은 분량으로 수차례 이어졌다. 발송한 주소를 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안에서 이주했는지 조금씩 바뀌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를 거쳐 캠브리아라는 생소한 소도시까지 이어지는데, 공통적으로 주소가 우체국 사서함으로 되어 있기에 삼촌이 실제 거주했던 주소를 알 수 없었다.


형.

정말 미안해. 염치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2만불만 더 보내주지 않겠어? 해외송금 한도가 1년에 5만불이라고 알고 있는데, 올해 형이 3만불 보내줬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딱 5만불 채우는 게 보기에도 좋잖아.

이젠 더 달라는 소리 안 할게.

다음 달까지 좀 부탁해.

이역만리에서 형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리는 동생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에게

다시는 이런 글 보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면목이 없어.

다 털어놓고 솔직하게 부탁할게. 5만불만 더 보내줘.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형 말대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게. 형은 애초에 내가 갚을 거란 기대를 안 한 모양이지만, 난 정말 작년까지만 해도 다 갚을 작정이었다고. 형이 준 은혜와 내가 진 빚을 한시도 잊어본 적 없어. 갚을 거란 다짐은 지금도 변함없어. 반드시 꼭 갚을 거야.

다만 당장은 그러기가 좀 곤란해. 지금 처음 하는 말이지만, 보브의 사업이 작년에 망하는 바람에 우리 중에 돈을 버는 사람이 없어졌어.

그리고 남작이 미국에서 추방되는 바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네리테스의 지도자가 되었지. 사실 이전부터 남작과는 교리 해석의 문제로 갈등이 있었어. 남작은 새로운 이슈타르, 비너스, 성모 마리아를 찾아내 상징적인 여신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조개 자체의 상징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에 그의 주장을 거부했어.

결국 남작은 독단적으로 비너스를 찾겠다고 나섰다가 미국 정부의 탄압을 받아 고향 프랑스로 쫓겨나고 말았지.

조개교를 처음 발흥시킨 인물의 부재는 우리에게 큰 손실이었지만, 내가 이어받은 이후로 개혁에 매진한 끝에 안정을 되찾았어. 선교활동에 주력하는 방침을 세운 결과 지금은 스무 명 정도 모였어.

이렇게 세상을 바꾸려는 종교를 향한 기득권 세력의 탄압이 거세지지만 우리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야. 원래 묻힌 진실을 알리는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기 마련이지. 다 알고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야.

그래도 현실적인 문제는 외면할 수 없어. 당장 이 사람들을 다 거두어 먹여야 하는데 돈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조금만 믿고 기다려줘. 우리 조개교 뒤에는 쉘이 있고 맥도날드가 있어. 채플린에서 이어진 헐리우드의 거대 영화사와 인기 영화배우들 속에도 조개교가 파고들어 있다고. 그들과 우리가 연결만 된다면 프리메이슨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비밀결사가 될 날이 꼭 올 거야.

그때가 되면 5만불이니 10만불이니 하는 액수 따위는 껌값에 불과해지겠지.

마지막으로 제발 부탁해.

누구보다 형을 사랑하는 동생이


형! 김찬종 사장님!

왜 답장이 없어. 설마 말도 없이 이사간 건 아니겠지?

제발 부탁해. 5만 달러만 더 안 될까?

우리 조개교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순간이라고.

진짜 마지막 부탁이야. 하나뿐인 동생의 평생 소원이라고 생각이고 이번 한번만 더 도와줘.

조개교가 융성하면 이자 쳐서 갚을게. 아니 이자 정도가 아니야. 열 배, 백 배로 돌려줄 수 있어.

형도 시시한 무역회사 때려치우고 조개교 한국교구의 주교를 맡는 게 어때? 명심해. 형 이름 찬종에도 貝가 들어 있어. 어쩌면 형도 나와 같은 운명일지도 몰라. 곧 조개교가 세상을 평정할 날이 올 테니 그 전에 결단을 내리도록 해.

동생 찬수가


나는 중간에 빠진 편지를 찾아봤지만 결국 전부 찾지 못했다.

일부 찾아냈지만 일관되게 5만 달러를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내용이라 굳이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끌라마르 남작이 미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겨 인터넷에 찾아봤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애초에 그의 본명도 모르고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라서 찾을 거란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편지만 봐서는 종교 탄압으로 체포당한 게 아닐까 싶어 흥미가 생기긴 했다. 그렇게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종교를 과연 미국 정부가 탄압할까?

그렇지만 답은 허무할 만치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편지가 담긴 슈트케이스 속에 담긴 수많은 문서 중에 미국 신문기사를 오려 붙인 A4용지를 발견했다. 캘리포니아 지역신문 〈산호세 머큐리 뉴스(the San Jose Mercury News)〉 1995년 9월 6일자 사회면의 일부였다. 참고로 이 신문은 2016년에 모기업 산하 복수의 신문들과 통합해 머큐리 뉴스(The Mercury News)가 되었다고 하니 지금은 없어진 신문인 셈이다. 나름대로 역사적 유물이라고 할까.

스마트폰의 실시간 번역 앱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앙투안 클라마르라는 52세 프랑스인이 9세 여아를 유괴·감금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해당 인물은 불법체류자임이 밝혀졌기에 추방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로 기사를 끝맺고 있다.

기사도 조그만 단신이고 짤막한 내용이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어렵지만 일단 남작이 추방된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삼촌이 뒤를 이어 조개교 지도자를 맡게 되었다는 말을 보니 남작의 단독범행이었던 모양이다. 편지에서 보이는 남작은 지적이고 정중한 신사 같은 분위기였는데…….

이후 삼촌은 나름대로 선교활동을 해서 신도 스무 명 정도를 모은 모양이지만, 보브의 사업이 망해 수익원이 사라지자 아버지에게 손을 벌린 모양이다. 편지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애원하는 걸 보니 한두 번 빌린 게 아닌 듯했다.

다음 편지가 미국에서 보낸 삼촌의 마지막 편지다. 1996년 11월 캘리포니아주 캠브리아의 우체국 사서함 주소가 적혀 있다.


그리운 형에게

잘 지내고 있어? 어머니랑 형수님도 잘 계시고? 우리 조카 여을이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

우리는 캠브리아라는 작은 시골 항구마을에 자리를 잡았어. 어지간히 큰 미국 지도를 보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들 거야. 그렇지만 나는 여기가 꽤 마음에 들었어. 이래 봬도 예술의 마을이거든. 수는 적지만 꾸준히 관광객이 찾는 곳이야. 서부 개척시대의 건물과 정경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고 그림, 옷, 인형, 도예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인 공방이 꽤 많거든. 주민 5천 명 남짓한 마을치고는 이런 공방과 갤러리가 많은 편이야. 그래서 예술의 마을이라고 불리지.

우피치 미술관에서 시작한 나의 여정이 작지만 아늑한 예술의 마을 캠브리아에서 마무리 짓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운명처럼 느껴져.

그래, 맞아. 우리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

이 세상과, 지구라는 별 그 자체와의 이별.

인간이 지구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냐고 묻겠지. 형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니까. 어릴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업에 전념했어. 형은 그런 사람이야. 나는 그런 형을 존경해.

하지만 형과 나는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어. 형은 늘 땅 위를, 사람들을 보고 있었지? 나는 달라. 내 시선은 저 하늘을 향했어. 이 세상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찾았어.

조개라는 발판을 딛고 이슈타르와 비너스와 성모 마리아라는 초월적인 여신을 탐했고, 세상의 이면에 있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비밀결사를 추구했어.

이제는 그런 모든 행위가 철모르는 어린애의 장난 같이 느껴져. 지금 나는 인간을, 지구를 넘어서려고 해. 내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 우주. 찬란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서.

형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일축하겠지. 아폴로 계획이 겨우 사람 몇 명을 달로 보냈을 뿐인데 별이라니?

하지만 잘 생각해봐. 살아있는 인간의 몸뚱이를 우주로 보내는 건 어려워.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듯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서 겨우 달 착륙에 성공했을 뿐이야. 이제는 지쳤는지 시도조차 더 하려는 기색이 안 보여. 앞으로도 아마 당분간은 인공위성 발사에만 힘을 쏟을 것 같아.

하지만 정신이라면 어떨까? 우리의 영혼은 중력과 공기 같은 물리적 한계를 가볍게 초월할 수 있어.

우리는 그 실마리를 라마교 경전 『티벳 사자(死者)의 서』를 읽고 찾아냈지. 라마교 승려는 정신수양을 통해 바르도라고 불리는 영계로 자유로이 자기 영혼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어.

미확인비행물체 UFO. 그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 있어?

외계인의 비행접시라고 알고 있겠지만, 진실은 우리 인간이 만든 거야. 어떻게? 집단으로 모인 인간의 영혼이 뭉쳐서 비행접시 같은 모양을 이루게 된 거지.

냉철한 과학의 눈으로 생각해봐. 태양계 바깥의 가장 가까운 별조차 4광년이 넘어. 여기에 우리 인류를 능가하는 뛰어난 외계인이 살고 있다고 가정해도, 그들의 우주선이 얼마나 빛의 속도에 가까울 수 있을까?

UFO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 지구 안에서 비행하는 거야. 하지만 그 모양을 주목해 봐. 처음 발견한 사람의 편견 때문에 접시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 진짜 모양은 입을 꽉 다문 조개 형상이야.

우리의 이름을 빼앗긴 거야. 앞으로는 비행접시가 아니라 비행조개라고 불러야 마땅해!

우리 조개교는 라마교의 고승 락파툴바를 모시고 그의 가르침 아래 밀교 수행을 거듭하며 집단 유체이탈을 경험했어. 우리는 몇 번이나 황홀경에 빠지고 임사체험을 거치며 몸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면서 모두의 영혼이 하나로 뭉쳐서 진주조개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감각을 공유했어. 당연히 그 안에는 빛나는 조개와 같이 아름다운 우리의 무지갯빛 영혼이 담겨 있지.

이제 우리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 너머로 여행할 수 있게 된 거야. 태양계 내부라면 어디든 가능하겠지. 알파 센타우리까지는 무리겠지만.

형은 이쯤에서 궁금하게 생각할 거야. 우리의 목적지는 어딜까?

당연히 답은 하나야. 금성. 영어 이름 Venus. 다른 나라 이름으로 이슈타르, 루시퍼, 태백성.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학창 시절에 다들 외웠잖아?

점성술에서 금성은 여성이며 물을 상징해. 사랑과 결혼을 관장하지. 비너스 여신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과 예술, 조화와 생명을 상징하기도 해.

그리고 그 상징물은 ♀, 바로 암컷을 상징해. 지구는 수놈, 금성은 암놈이었어. 언젠가는 하나로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 새 낙원을 탄생시킬 운명의 별. 그 역할을 우리가 할 거야.

떠올려줘. 조개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나는 거대한 별, 생명을 낳아줄 자궁을 향해 날아가는 거야.

출발 날짜도 정해졌어. 적절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더라고. 헤일-밥 혜성이 지구로 근접할 때, 우리의 영혼으로 만든 비행조개가 혜성을 타고 금성으로 떠날 거야. 그날은 바로 1997년 3월 26일. 모든 걸 훌훌 털어놓고 이 육신을 버리고 지구를 떠날 거야.

그렇지만 형과 영원히 이별할 날이 다가온다는 게 슬퍼.

형에게 했던 약속을 못 지켰지. 빚을 갚지 못하고 떠나게 돼 미안해. 지구에 남긴 유일한 미련이야. 여을이가 자라는 모습을 더 보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워.

이것만 기억해줘. 나는 형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리워할 거야. 형도 나를 잊지 말아줘.

안녕.


편지를 다 읽고 나니 우습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은 금성이 아니라 수성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중론이다. 티베트의 서적을 읽고 유체이탈을 연구한다는 것도, 미국에 있다는 티베트 고승이 과연 진짜인지부터 시작해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엉터리 정보들에 기반하여 하겠다는 영혼의 우주여행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하긴 사이비종교가 다 그렇지 않던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굳게 믿고 끼리끼리 설득하고 확신하며 내부 결속에 이용한다. 이런 음모론과 유사과학이야말로 확증편향의 가장 확실한 예시 아닌가.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같은 시기 집단자살을 한 사이비종교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헤일-밥 혜성이 오는 시기에 지구를 떠나겠다는 목적만 비슷할 뿐 종교단체의 이름과 위치 등 모든 내용이 조개교와는 달랐다.

삼촌은 어디로 갔을까.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아직 생존한 걸로 기재되어 있는 삼촌 김찬수.

서재를 나오니 2층 복도 끝에 발코니가 보였다. 널찍한 탁상과 화분 여러 개를 놓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여유로운 발코니는 단독주택만의 장점이었다. 여기서 보이는 남해안 뷰도 꽤 멋졌다. 곧 철거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아쉬워졌다.

당장 커피라도 한잔하고 싶었지만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미 가스도 끊어진 지 오래일 거다. 전기는 들어오지만 커피포트가 없다. 아쉬운 마음에 등나무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을 보았다.

오전에 내린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물러나면서 빛내림 현상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분명 화가일 거다. 지구라는 빈 캠퍼스를 아름답게 채색하기 시작하면서 생명이 태어났으니까. 나는 보티첼리의 그림을 생각했다. 미의 여신 비너스의 탄생은 그 자체로 예술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을 동시에 은유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편지를 읽은 내 마음에 남은 유일하게 긍정적인 영향이라면 그런 것이리라.

넋 놓고 바라보는 사이에 먹구름이 지나가고 맑아진 하늘 위를 조각구름들이 지나갔다.

보통 구름이라면 솜이나 양털에 비유할 텐데, 그 광경이 내게는 어쩐지 조개처럼 보였다. 둥근 구름은 입을 다문 조개, 구부러진 구름은 크게 벌린 조개 같은 식으로.

별 헤는 시인이 별 하나에 이름을 부르듯 나는 구름 하나에 이름을 불러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구름은 소라

납작 반듯한 구름은 대합

조그만 구름은 꼬막

채운(彩雲) 현상으로 빛나는 구름은 진주조개

넓적한 구름은 굴

색이 짙은 구름은 홍합

둥그스름한 구름은 앵무조개

…….

어느덧 남해안의 하늘 위로 무수한 조개들이 유유히 날아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건 아마도 삼촌을 비롯한 수많은 조개교 교도들의 열망이 담긴 영혼의 여정일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언젠가는 금성까지 갈 수 있을지도.

“누나! 거기서 뭐 해!”

1층에서 동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내밀어보니 대문 근처에 서 있던 동생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허리까지 오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고 고개를 내밀었다. 녹슨 금속 난간은 세게 밀면 그대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이거 다 버려도 되는 거지?”

동생 녀석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엄청난 글을 읽어본 이상 이제 여기에 있는 종이 한 장이라도 허투루 봐선 안 되었다. 나는 반쯤 비명처럼 놔두라고 소리를 지르며 얼른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거 어디서 났어?”

물어보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긴, 우편함이지. 보니까 전단지랑 뭐 쓸모없어 보이는 것밖에 없던데.”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해.”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건네받았다.

척 보니 동생의 말 대로였다. 순간 중요한 편지가 편지 사이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교훈을 떠올렸는데. 그러고 보니 포도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나? 안 되겠다. 옛날에 콧수염 기른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망상에 사로잡혀 버린 것 같다.

전단지와 낙엽과 흙먼지로 사이에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10년도 넘은 옛날에 보낸 적십자 지로용지 밑에 있는 편지의 보낸 사람 이름은 김찬수.

제대로 주소도 적혀 있었다. 경상북도 어느 군에서 보낸 2011년 소인이 찍힌 편지다.

지구를 떠난 줄 알았던 삼촌의 이름을 보자 반갑기도 하고 놀라웠다.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지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삼촌이 옛날 집으로 편지를 보낸 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삼촌의 소식이 끊어진 뒤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며 직원이 서른 명도 넘었던 회사가 한순간에 무너지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작은 도서대여점을 운영했다. 그때부터 옛집은 오늘까지 이렇게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편지를 보냈으니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을 수밖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동생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셨다. 아주 가끔, 그 자식은 죽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동생은 이미 금성으로 떠나버린 듯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가 동생을 향해 품은 애틋한 마음을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상자 안에 암모나이트와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니. 결국 갚지 못할 줄 알면서 돈을 빌려준 것도 그렇고, 역시 아버지에게 동생은 평생 동생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고 동생이 무사히 잘 있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봉투를 뜯어보니 태닝 기계처럼 보이는 뚜껑 달린 침대 사진이 담긴 얇은 리플렛과 함께 짧은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지금까지 본 중 이번에만 유일하게 타자 쳐서 출력한 편지였다.


형!

정말 오랜만에 연락하네.

뉴스에도 안 나와서 내 소식을 모르고 있었겠지?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걱정 끼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잘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실은 몇 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어. 차마 찾아갈 염치가 없어서 알리지 못했어. 미안.

형은 조개의 힘을 알고 있어?

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존재한 자연의 힘이고, 이건 숱한 실험을 통해 증명한 과학적 진리야.

조개가 모래알을 품으면 영롱한 진주가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이걸 우리가 과학적으로 입증한 거야.

조개 안에 넣은 시신은 썩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미라가 돼. 조개에서 비너스가 태어나듯이 말이야.

조개 안에 면도날을 넣으면 무뎌지지 않고 날카로운 상태 그대로 보존되지. 가치 없는 돌조각을 넣으면 반짝이는 보석으로 변해.

연금술의 비밀, 그건 바로 조개 안에 있었던 거야.

그런 조개의 힘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조개 침대를 발명했어. 같이 넣은 카탈로그를 살펴봐.

생긴 건 뚜껑 달린 침대처럼 보일지 몰라도, 첨단과학의 결정체이며 자연이 내려준 신비한 힘의 정수야.

이 안에서 잠을 자면 무병장수하고 피부는 물론 외모가 아름다워져. 진주를 만드는 조개의 힘과 비너스의 마력을 온몸으로 흡수할 수 있지.

원래 가격은 2500만 원인데 형한테는 2천만 받을게. 아무한테나 주는 기회가 아냐. 완전 밑지고 파는 건데 형에게만 눈 딱 감고 이 가격에 주는 거야. 원하는 이상적인 몸을 얻을 수 있는데 2천이면 하나도 비싼 게 아니지.

우리 여을이가 지금 몇 살이지? 스물 둘인가 셋? 한창 예쁠 나이잖아. 딱 조개 침대가 필요할 시기지. 이것만 있으면 미스코리아도 따 놓은 당상이야. 형이랑 형수도 그렇고, 무엇보다 여을이에게 꼭 필요할 것 같은데 연락 좀 줘.

형과 가족들에게 조가비처럼 단단한 가호가 있기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는 동생이

 

(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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