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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20주년] 웨딩 데이

2023.07.01 00:0107.01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웨딩 데이

미로냥

[이 주례는 이렇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낯선 두 사람이 만나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함께 성장하며….]

“헐랭.”

“너는, 얘, 남의 결혼식에 와서 헐랭이 뭐니, 헐랭이.”

“헐랭방구.”

“야. 임 과장아, 철 좀 들어. 주례사 못들었어? 같이 성장하라잖아.”

“결혼을 안해서 성장을 못하나 보네요, 제가. 힝구루삥뽕풍. 아니 웃기잖아요. 다 커서 털 부숭부숭한 어른들이 결혼하는데 뭘 성장을 또 하래. 그만 하면 됐지, 우리 유진이 다 큰 거 보세요. 번듯해, 아주.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아아.”

“네가 키웠니? 유진이를 혜나 네가 키웠어?”

“그럼 뭐 선배가 키웠어요?”

“사람이 말이야, 성장을 해야지.”

“어디까지가 성장이고 어디부턴 쇠락인데요?”

“야이….”

“영락의 경계는 어디인가!”

“야, 야. 너는 잘도 그런 소리를.”

“돌이켜 보면 이미 굽어져 있는 것이 물길이게 마련 아니겠나요?”

“노래 가사에… 그, 왜. 서서히 익어가는 거라잖냐?”

“익은 것과 물크러진 것의 경계는 또 어디일까요. 비뚤어진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물크러진 과일이 끝내 가지에 남는 거겠죠?”

“뭐 그게 가지에 남겠니? 네 말마따나 물크러질 정도면 떨어져서 폭 뭉개지거나 아님 팍삭 썩겠지.”

“초 치지 마요, 정말. 지금 눈물 조금 맺혔는데 쏙 들어갔네.”

“화장 지워진다?”

“화장 아닌데. 속눈썹 연장했는데. 다들 화장 안 해도 한 줄 알더라고요. 개꿀.”

어디서부터가 성장이고 어디부터가 노쇠인지. 무엇이 익는 것이고 무엇이 원숙이며 또 무엇은 다만 낡아가는 것인지 묻자, 선배가 말했다. 결혼식에 올 사람이 늘어나고 지불할 돈이 부담스러울 때까지는 나름대로 성장이고 슬슬 네가 지불한 돈을 받기가 힘들어 지겠다 싶을 때 연락도 하나 둘 끊어지면. 그래서 남은 사람이 불 난 초가 아래 갈퀴로 슥 긁어 뭐 하나 걸치적거리는 게 바늘 한 쌈도 없을 때. 그때부터는 낡아가는 거겠지.

결혼식은 어지간히도 길었다.

나는 선배와 나란히 서서 우리의 막내 동생뻘 되는, 아니, 20살에 결혼했더라면 그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을 법한… 아무리 그래도 이건 허풍인가. 아무튼 우리 동생이라기엔 이미 좀 과한 나이 차이가 나는 신입직원 결혼식을 지켜보다가 하품을 쩍 했다. 조카뻘 되는 애가 잔뜩 기합을 넣고 온 사방을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 놨는데 ‘낡고 지친’ 선배들은 꽃에는 시선도 안 줬다. 십수 년 직장 생활 하면서 온갖 예식장의 온갖 꽃을 줄줄이 들고 귀가한 경험이 있다 보니, 처음 방문한 것도 아닌 예식장의 흔한 절차가 사뭇 지루하긴 했다.

“식권 제가 챙겨 뒀거든요.”

“아, 어쩐지. 나한테 없더라.”

“빨리 가요. 축가 부를 때 가면 안 되나?”

“뭔 축가를 두 곡이나 불러.”

“유진이 밴드 하잖아요. 직장인 밴드.”

“헤엑… 우리 회사에 밴드가 있었어?”

“아뇨. 연합 밴드래요. 뭐 무슨… 심야 영화 보고 패러글라이딩 하는 모임에서 의기투합했다나.”

심야 영화를 보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모임.

말하는 순간까지도 그게 뭔지 잘 몰랐다. 사실 조조 영화를 보고 뜨개질을 하는 모임이든, 양양에서 서핑을 한 후 전주에서 플래시몹을 하는 모임이든 크게 다를 바는 없지 않을까.

아닌가?

“유진이 패러글라이딩도 해? 야, 부지런하게 살았다. 나도 소싯적에 테니스는 좀 쳤는데.”

“선배, 축가 끝나 가는데 식당 가실 래요?”

“사진 찍어야지. 그거 찍으러 온 거 아니냐.”

“어우. 친구와 동료는 뭔 사진도 제일 나중에 찍나 몰라요, 아주.”

“내 말이. 가족친지사돈팔촌이랑 느긋하게 찍으시지… 괜히 우리 같은 스쳐가는 인간들이 끈덕지게 남아서 저걸 다 보고 있잖냐.”

선배가 팔짱을 끼고 꽃이 주렁주렁 달린 기둥에 기대 섰다.

“하이고야. 길다 길어. 그런데 우리하고 자재팀만 왔니? 시설팀은 한 명도 안 왔나?”

“시설팀 윤 팀장님 왔던데요. 그쪽 통해서 부조 했겠죠. 쟤가 저래봬도 동기 대표 했잖아요. 아는 사람이 오죽 많은데요.”

“동기 대표야? 와, 그 발표 이런거 잘 하는 게 엠제트(MZ)여서 그런 게 아니구나.”

“그 엠지 말인데 저도 아슬아슬하게 엠지래요.”

“왐마야.”

“아니, 거 반응 너무하시네.”

겨우겨우 사진을 찍고 부케를 던지고 받는 짜고 치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 잔뜩 지쳤다. 식당은 이층이었고 앞 시간과 뒷 시간 하객이 뒤엉켜 난리법석이었다. 마감시간 마트 반찬코너같은 인파 속을 물고기처럼 누비며 우리는 산더미처럼 뷔페 음식을 퍼 담았다. 그걸 각자 세 번 반복한 후 테이블 그득 접시를 늘어 놓고 갈비부터 한 입 막 먹으려 순간이었다. 그새 폐백까지 하고 환복한 건지 어쨌는지, 흰 원피스로 갈아입은 신부가 신랑을 옆에 키링처럼 달랑달랑 달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른 자리 다 제쳐두고 쏜살같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이다.

“어머나. 쟤 왜 이리 오니?”

“엥, 저는 모르죠. 유진이 사수가 선배였나?”

“아닌데?”

신부가 눈을 반짝이며 우리 테이블 바로 곁에 붙어 섰다.

“혜나 언니! 나 언니 아까 우는 거 봤잖아. 세상에 언니 보석같은 눈에 눈물이 막 글썽글썽 하더라고. 너어어무 감동한 거 있지. 나도 안 우는데 언니 우니까 그거 보고 나까지 눈물이 터질 뻔 했지 뭐야.”

그 말에 나는 음식을 앞에 놓고 입만 오물거렸다. 아니, 실은 운게 아니라 하품을 쩌억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선배는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일을 목도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직장 후배 놀리는 게 십 년 넘게 재밌으신 모양이다. 사람은 성장을 해야 한다면서요?

“저한테 눈이 보석같다 그런 거 들으셨죠?”

유진이가 다른 테이블로 인사를 돌러 간 후, LA갈비를 세 쪽째 먹어 치우고 있는 선배에게 말했다.

“그랬니? 얘 너 자세히도 들었다.”

“제가 또 자재팀 에이스 아닙니까. 아니, 글쎄 유진이가 제 눈이 보석같다 그랬다고요.”

“임 과장아, 유진이 방금 결혼했다.”

“하… 나만 또 잠 못 자고 나만!”

“유진이가 죄가 참 많네. 초밥이나 먹어.”

“뷔페 초밥 다 거기서 거기죠, 뭐. 아이고…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 날씨 좋다.”

“사방에 창문 하나 없는데 날씨는 무슨. 내가 한 잔 사 줘?”

“어우, 뭐 누구 결혼할 때마다 선배하고 한 잔 하네.”

“네가 신입사원만 들어왔다 하면 반하니까 그렇지.”

선배는 혀를 끌끌 차고는 그새 빈 접시를 테이블 구석에 차곡차곡 쌓았다.

“혜나야. 사람이 성장이란 걸 해야 한댔다.”

“아니,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굳이 뭐 성장 소리를.”

“아래를 봐서 안 되면 위를 봐라, 그런 말도 있지. 왜.”

“…와우, 나 지금 소름 돋았어요.”

“재수없어. 야, 술은 네가 사라.”

“어허, 박 부장님. 저 오늘부터 술 끊었습니다.”

어떤 감정들은 익기도 전에 물크러지곤 한다던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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