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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비극의 주인공

2019.02.01 00:0002.01

비극의 주인공

유이립

귀신 이야기는 단지 들을 수밖에 없다.

군 입대 할 때 훈련소에서 귀신을 볼 수 있다는 동기를 봤다.

동기말로는 많은 귀신 이야기와는 달리 귀신은 자신을 죽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서는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개그 웹툰에서 귀신이 말한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 같은 귀신이 돼서 만나면 얼마나 뻘쭘 하겠냐고.

귀신은 단지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각양각색이다. 아직 죽지 말았어야 하는데 죽은 억울함이나 못 이룬 일이나 그냥 자기 이야기 등....귀신마다 다르다고 한다.

내 동기는 그 때문에 육체적으로 피곤한 훈련소 시절에도 밤에 잠을 못 이루었다.

군 시설은 남자들끼리 모여 기가 강하기에 귀신이 못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나 하필 훈련소 내에(어느 훈련소나 마찬가지겠지만, 한 가지 귀신이야기가 있다)

정말 특이한 귀신이 있는데,(기가 강한 훈련소에서 지박되어 있다는 의미로 특이한)내 동기를 보고는 밤마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 달라 졸라댄다고 했다.

밤마다 잠을 안 자는 동기는 남들 자대배치 받을 때, 따로 분류되어....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후에 자대 동기에게 듣기를. 동기가, 귀신이 동기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조교에게 말했는데, 간부들에게 와전되어 자살위험자로 분류됐다고 한다.

 

무당들 역시 말했다. 귀신은 말이 많다고.

자신들은 업이자 생계여서 그냥 들을 수 있다고. 어떤 기분이냐면...수많은 감각과 정보가 밀려든다고. 이야기가 듣는 게 아니다. 강요당한다.

자폐아 중에서는 일반인의 표정과 목소리 정보를 뇌로 자연스럽게 인식하지 못하기에 일방적으로 강요당한다.

평범한 신호도 신경을 자극하거나 엄청난 소음과 눈이 아플 정도의 빛으로 인식한다.

매우 고통스럽게.

그래서 일반인들이 보기에 자폐아들은 갑자기 이유 없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튼다고.

흔히 귀신들린다는 말은 귀신이 사람 몸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투정이라고 한다. 한을 품은 귀신은 자신의 한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고 한다.

어떻게 귀신이 됐는지. 억울함. 고통. 증오. 분노. 회한. 집요함. 지옥.

일반인들은 평생 모를 극단적인 모든 것. 수용 할 수 없는 정보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강요당하기에 흔히 귀신 들렸다는 증상을 일으킨다.

지금 내 딸아이가 그렇다.

 

착한 게 죄였다.

대학입학, 군 휴학, 대학졸업, 대학원 진학, 대학원 졸업, 메카트로닉스 교육원 과정.

연구소 주임직급으로 취직. 4년 후, 선임진급. 그제야 돈이 모으자 뒤늦게 결혼하여 늦게 얻은 딸이었다. 우리 같은 연구원들은 대개 늦게 결혼하고 늦게 자식을 갖는다.

뒤늦은 출산에 바라는 점은 하나, 공부 못해도 되니까(그래봐야 40세 되면 나가라고 눈치 주는 대기업이다)뭐 하나 잘나지 않아도 되니까, 건강하게 태어나 착하게 살았으면 한다.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딸은 정말 심성이 고왔고, 마음이 예뻤다.

아마 아무 문제없이 자랐으면 빈부차이나, 옷차림,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대할 사람이 됐을 거다. 그러기에 갑자기 어느 날 귀신이 들렸다는 증상이 나타났다.

교회, 성당, 전문 퇴마사라는 이상한 사람들 다 소용 없었다.

아니 복숭아가지 들고 온 퇴마사라는 양반들은 딱 한 마디 했다.

 

귀신은 들어갈 만한 사람에게 간다고. 이 아이는 평소에 어땠습니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게 이유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갑자기 귀신인지 뭔지와 갑자기 눈을 마주치게 됐고,(퇴마사들 말로는 일반인들도 겪지만 평생토록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귀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만한 착한 대상이라고 파악했고...

살다가 이런 독종은 처음 봅니다. 가장 강한 무당을 찾아가야 합니다.

 

...라는 조언에 딸을 데리고, 인천 검화산에 있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가장 강한 무당인지 모른다. 그냥 유명했다. 수많은 무당이라는 작자들을 만났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기에, 또 비싼 돈 내고 이 이상한 작자들을 알현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지쳤기에 반발심이 솟아올라 유명한 작자들 중에 아무나 찍었다. 복채를 안 받는다는...자원봉사자급으로.

산이라 날이 일찍 저문다. 오후 5시에 도착했건만...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나일론 줄에 묶여 발버둥 치는 딸을 업지만 않았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흔히 무당집 하면 있는 구리빛 귀신상이나 오색찬란한 띠나 제사상에 놓일 과일 같은 게 벽 전면에 크게 차려져 있었고, 처녀 보살이라는 무당은 담요를 둘러쓰고 촛불만 켜진 컴컴한 방에서 살기 흉흉한 눈빛만 내놓았다.

내 부르퉁한 표정과 의심가능한 눈과 마주치자마자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색한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씨발 년이 오는 걸 아침부터 진즉에 알았어.

 

이맛살을 찌푸린 무당이 힘껏 쥐어짜내는 목소리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이 무당은 진짜다. 모든 걸 다 안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일론 줄에 묶여 악을 지르던 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침을 흘렸다. 간만에 얌전해진 모습에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때, 담요 속 앙상한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낮지만 악 지르는 톤으로 이야기를 쏟아 뱉었다. 딸이 귀신들린 후로 입에서 내뱉었던 톤이었다. 너무 억울해서 악에 바친 목소리.

딸은 작은 몸이 말라비틀어지도록 이 목소리로 욕하고, 울부짖었다. 기운이 바닥나 기절할 때까지...무당이 좌우로 시계추마냥 흔들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신없는 씨발 걸레년이야! 백치도 이 년보다는 똑똑해! 남쪽 항구도시 년이야. 비린내 나는 것이 태생은 못 숨겨. 지 애미는 다방에서 몸 팔던 오봉순이년이야! 이 년도 욕 처먹어야 해!

아니 더 처먹어야 해. 딸을 낳았으면 잘 키워야지. 함부로 내 굴리다가 딸년을 귀신 만들었어!

어렸을 적에 엄마가 다방에 몸 팔러 갈 때, 옆집 셋방 살던 놈이 7살 먹은 이년한테 손가락질을 했어. 손가락이 씨벌겋게 물들도록 말이야. 막이 깨진 거지. 그런데 이년은 지가 성폭행 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좋아한 거야. 왜?! 그 놈이 지 손가락 쪽쪽 빨면서 좋아하니까 말이야!

어린 지 몸이 찢겨지도록 아픈 걸 모르고, 그 놈이 좋아하니까 뭣도 모르고 좋아했어.

왜?! 애미라는 씨발년이 맨날 애를 방치해서 같이 놀 사람이 없으니까 사회성이 없어.

어디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런 기본 적인 것도 몰라. 게다가 애미가 가끔 보이는 모습도 남자한테 애걸하는 모습이니 애가 뭘 보고 배우겠어?

사람은 살아가다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돼.

근데 이 년은 남이 순서 안 가리고 먼저 깨버렸어. 그때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된 거야.

정확히 누가 결정해 준거지. 좁은 엄마 품 나온 곳이 애미 품보다 더 좁은 지방 촌동네야.

그런데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갈지, 나 빼고 모두가 결정해주는 곳이야.

촌동네는 중고등학교에서 미팅가면 맨날 만나는 놈년 끼리 만나.

동네가 좁으니까. 그 중에 한번 떡치면 소문이 돌고 돌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다 한번 씩 박아본 구멍형제사이가 돼. 그리고 모든 놈들이 한 년 먹으려고 달려들지.

이 년은 십대시절 동네걸레로 살지만 문제가 뭔지 몰랐어. 왜?!

촌동네는 놀 거리가 없어, 애들도 어릴 때부터 떡치는 재미 밖에 없는데, 누가 문제라 하겠어? 놀 거리 없다고 사람 쓸쓸 녹여먹는 그런 동네도 짐승소굴이지.

이 년은 사람과 조금 친해지면 자신의 문제...그게 사람이 어떻게 살까? 하다못해 졸업 후 어떻게 살까? 가 아닌...엄마가 아침에 짜증을 부린다 라는 시시콜콜한 흉하고 집안의 사소한 일만 떠들어대. 그 이상의 문제를 인식할 줄 몰라. 철이 없고, 생각이 없고, 입만 살았어.

발정난 새끼들이 이 년 한 번 먹겠다는 접근하는데 당연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늉하지.

그보다 더 한 시늉도 할 펄펄할 나이 때인데...

이 년은 이걸로 세상을 인식한 거야.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멈춰 서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구나. 그 후로 이 년은 세상을 이렇게 대했어. 남이야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이야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놔야 한다..라. 세상이 멈춰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봤다. 3년 전, 퇴사하고 내 사업하기 전 기업 연구소에서 일 할 때,

연구원 보조가 들어왔다. 35살 남성. 165cm 키에 얼굴에 홍조를 띠었는데, 거친 환경에서 피부가 상한 붉은 빛이었다. 헤어스타일을 가다듬지 않고 자라는 대로 내비 둔 게 딱 봐도 육체노동을 전전했을 외모였다.

법 때문에 고용조건을 나이무관으로 했어도 보조 일 시키려면 좀 어린 애를 데려와야 할 것 아닌가? 병신 같은 아웃소싱.

연구소에서는 공대 4학년들이 인턴으로 일한다. 그런데 27살 인턴이 성숙한 어른으로 보이게 만들 만큼, 찌질하고 철이 없었다. 애같이 한껏 들뜬 목소리. 자존심도 없어서 누가 뭐라하면 헤헤 웃었다. 문제를 지적하냐? 뭔가 지시하냐? 가 아니었다. 그냥 누가 뭐라 하면 먼저 헤헤 웃으며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항상 되물었다.

자존심도 없는 가 하면...연구소 내 매점에서 카드결제 문제로 오해가 생기자 하루 종일 그 애기를 하며, 두고두고 집요하게 씹었다. 35살 먹은 아저씨가 27살 인턴들 밑에서, 고용이 일용직으로 분류된 보조 일을 하는 것은 괜찮은 문제인지. 자존심은 좀 넓게 흘러야 하는데 좁은 데 집착해서 어쩌라는 건지.

매점 결제가 오류된 것이 세상 끝나는 문제인 것처럼 같은 보조알바지만 24살짜리를 붙잡고 소가 여물 먹을 때처럼 우직하게 되풀이했다.

배만 올챙이처럼 불룩 튀어나온 유아체형...일 못하는 건 둘째 치고 힘도 세지 않아 정말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잘못을 지적당하거나 누가 뭐라 하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아... 라는 말이었다.

 

참 거지같은 동네였어. 사내자식들은 일자리 없으니까 저이 동네 버리고 도망치고, 계집년들은 학교에서 먼 지역에 공장일로 팔아버렸어.

그런데 이년은 뭘 했겠어?! 가뜩이나 일 없는 지방에서 운이 지저분하게 좋았어.

별 시시한 사업하는 놈 밑에서 사무알바 하는 사장 첩이 됐어.

그냥 내가 사랑받기에 유부남과 불륜이 나쁘다는 걸 모르지. 알아도 신경 썼을까?

아니면 정말 몰랐을까? 알게 뭐야? 내 살면서 이 년처럼 이기적인 년은 처음 봤어!

이 년은 잘못인 걸 알아도 내 이야길 먼저 들어 주세요~ 할 년이야.

같은 사무실 여자들에게 첩년이라고 구박받아도....아니 이 년들도 웃긴 년이야. 지방은 본디 낙인찍힌 사람이 없으면 안 돌아가는 곳이야. 누군가는 감정적 화풀이 대상이 돼야해.

걸레든, 병신이든, 호구든. 한 동네에 그런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편안해지는....

피를 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정글이야.

같은 사무실 개씨발 호로년들은 이 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안단 말이야.

같은 촌동네에서 한 다리 거친 사이니까. 그런데 다 아는 년들이 더 심하게 굴었어.

따먹은 사내 놈들도 나이 먹고, 미안하니까 잘 대해 줬는데...

이 년도 마냥 사장 첩질만 했으면 좋으련만...사장 양아치 친구 놈이 배우 되자고 이 년을 꼬득였어. 기승전결, 앞뒤 없이 갑자기 배우야?!

왜?! 아무도 몰라? 이건 뒤진 년 한풀이 꼬라봐도 안 나오는 문제야!

이 년이 어렸을 때부터 뭐 그런 끼가 있었거나, 그럴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야. 갑자기 그냥 배우! 여.배.우.래!

나도 이 년이 당신 딸 안에 들어앉아 밤새 씨부렁거리는 건 쳐 죽일 짓이지만, 어떤 사고를 통해 갑자기 배우였는지는 듣고 싶어. 죽은 사람 훤히 들여다보는 게 내 일인데도 도무지 모르겠어.

세상물정 모르니까 사직서 내고, 사장첩질 위자료 받아먹고 천천히 올라가면 되는데,

뭘 모르고, 그 동네는 너 평생 이렇게 살아라 못 박고 대하니까 어떻게 사는지를 몰라.

그래서 지가 꼭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야밤도주 했어. 야밤에 역전에서 양아치 놈 손잡고 기차타고 서울로 쭈우쭉~ 올라왔어.

고향이라고 자기 쏠쏠 빨아먹던 짐승소굴에서 나와서 도달한 곳이...뭐겠어?! 에.로.배.우.

에로배우도 배우는 배우지! 이 년이 할 배우 짓은 벗고 빨고, 박히는 지랄이여~

그 양아치 새끼는 여관에 방 잡고, 경험 쌓는다며 이 년한테 성매매 일을 시켰어.

여관에서 몸 파는 것들은 대개 한물간 40-50대야. 그 아줌마들은 벽 건너에서 20살짜리가 자신들과 똑같은 일 한다는 걸 몰랐겠지.

불쌍한 것. 너는 죄가 없다. 니 애미와 그 짐승소굴이 문제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자신하고 돈 주고 그 짓하는 남자들 붙잡고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거야! 배우 일하러 와서 성매매하게 된 기구한 사연이 아닌, 짱깨 시켰는데 춘장에 너무 양파만 넣는다. 오빠. 서울 사람들은 양파 좋아해? 라는...

(목소리를 흉내 낸다)오빠. 서울 사람들은 양파 좋아해?...양파 그리 중요했니? 그런 건 물어서 어쩌게?!

그 양파 얘기로 1년 반을 보낼 때, 그니까 철없이 그 짓을 하며 아무 문제없이 1년 반을 보낼 때, 하늘은 공정한 지 누군가를 내리 보내셨어. 지 애미가 일했던 티켓다방을 같은 데서 20살 짜리가 여관에서 몸 판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어.

지 애미가 했던 일 그대로 물려받는 게 그나마 나은 미래였지. 그렇지 않아?

표정 봐라. 내가 너무해? 그럼 이 년에게서 어떤 미래를 볼 수 있는데?

 

그 알바는 말이 참 많았다. 그런데 말 잘 못하고, 매번 뚝뚝 끊기는 어색한 수다였다.

수다소재도 시시해 같은 알바들도 아무도 귀담아 듣지 못했다. 연구소 보조 일은 상시가 아니어서, 일이 없으면 연구소 구석에 의자 끌어다놓고 마냥 대기하다가 시간 되면 퇴근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놀 시간 참 많은 한량일이라고 했다. 한가하게 대기하면서 장갑이 이랬다 저렇다. 날씨가 요즘...이니 뭐니 굳이 시시콜콜한 수다로 채우려 했다. 모두가 무시하고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할 때...이렇게 무시 받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자기가 말 많이 하는 것만으로 알바 중에 인싸, 센터로 여기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겉모습이 볼 품 없고, 무능하고, 말투마저 병신 같은 사람이 자신감을 가지면 사람 심기를 거스르는 뭔가를 품게 된다. 이렇게 내 주목을 끌었다.

연구원이 간단한 작업을 하면, 굳이 보조가 필요하지 않는다. 그래도 옆에 와서 쳐다보는 시늉이라도 하는데...안 부른다고 꿋꿋하게 앉아서 수다삼매경이었다.

눈치 빠른 알바들이 내가 안 불러도 공구나 테이프, 시제품 부품들을 가져다주는 걸 봤으면서도 허공에 말을 던지길 멈추지 않았다.

집이 먼데도 예전에 하던 공단 생산직보다 일이 쉬우니까 보조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데 집이 무려 서울이란다. 여기는 경기도 끝인데. 하도 어이없어서 내가 쉬운 일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니까. 아주 당당하게 저는 이제 나이 들어서 생산직이나 힘들 일 못해요.

부끄러운 태도가 아닌 내가 말했으니 네가 이해하라는 투였다.

할 말이 없어 내가 가만히 일에 열중하자, 각자 일은 각자 해결하자고, 자기 인생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했다. 물론 나는 연구원이고, 자기는 알바이니 싸가지 없게 말하지는 않았지만...나중에 뒤돌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알바는 갑자기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를 가졌다. 아마 내가 말을 걸어주니 자기의 수다에 이끌려 친분을 만들고 싶다고. 그런 착각을 한 것 같다. 나에게 허물없이 툭 말을 던졌다.

 

저기요. 보조 일 정규직은 안 돼요?

...예.

왜요?

 

연구소 보조 일은 상시 일이 아니다. 본래 졸업학기에 실습 온 인턴들 일이다.

이번에 베트남에 공장을 확장하기에 신제품을 양산하기 전, 테스트할 시제품을 대량 만들려 잠시 일용직 단기알바를 뽑았다. 봐라. 평소에 연구소에 일이 많았나? 한가해서 스마트폰 게임하지 않냐? 설명하니...

 

아,..그럼 1~2년 계약직은 안 돼요?

.....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충분히 이해가능 했다. 본디 남의 말은 듣지 않았다.

남의 태도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

재혼한 아버지 집 마련하느라 자신이 대출 받았다. 대출금 갚느라 일을 해야 한다. 원래 이 근처에서 살았는데, 형이 갑자기 이사 가자고 해서 이사 갔다. 형이 서울에 왜 이사 가는지는 모른다. 그냥 일방적으로 통보 받았다. 새벽 5시 반 전철을 타야 여기 출근시간까지 올 수 있다....이 말을 내가 허리 숙이고, 테이블에 바싹 붙어 시제품에 테이프 붙이는 동안 떠들어댔다. 본래 갑이 말하고, 을이 일하는 건데...세상 눈치도 신경 안 쓰는 듯 했다.

 

말하기도 질린다. 이 년은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네. 그러니 아이가 죽을 만 하지.

이 년을 구하러 온 것은 마담이었어. 이 양반은 진짜 양반이야. 어린 아가 여관방에 처박혀 몇 달간 빛도 못보고 사는 꼴을 보고는 한 눈에 앞뒤 상황 파악 끝냈지.

고향에서 끌고 온 양아치를 불러 세우고는, 찰진 사투리로 서울에서 젓갈 담길래? 잉? 우덜 고향가서 물질하며 머슴 할래? 하니 양아치는 여관 복도가 쿵쾅 울리도록 쎄빠지게 달아났지. 물론 마담도 공짜로 구해준 거 아니었지. 다방에서 일 시키려 했지만...한 일주일 데리고 있어보니 애가 진짜 이상한 거야! 이 바닥에 맨정신이 들어오겠냐는...애는 진짜! 진짜! 이상한 거야!

마담도 오죽하면 일주일 만에 망할 년이라는 소리가 입 밖에 나왔겠어? 그런데 이 년의 기도하는 손모양을 본 거야. 애가 교가 같네? 너 시주하니? 고향에 유명한 절이 있으니 어설프게나마 할 줄 아는 거였는데, 마담 입장에서는 쓸모없는 애를 섬에 팔아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일 할 계시였지. 마담은 자기 한참 예전에 같이 올라온 친구가 어느 방직공장장 마누라이기에 이 년을 살리려 그곳으로 보냈어. 그런데 왜?!

이 쳐죽일 년이 일주일 만에 일이 힘들다고 도망 온 거야! 옛날에 방직공장이면, 빽을 써서라도 들어가려 했어. 뭐 내세울 것 없는 년이 그래도 옛날 여관 일은 재미라도 있다고. 주둥일 나불거렸지. 헛소릴 듣고 마담 눈이 쉬이익 하고 돌아가는 게 독사눈이여! 그때부터 이 년은 마담에게 사람이 아니었지.

마당 다방에서 사람대접 못 받으며, 일하던 중에 양아치가 슬쩍 다시 접근했어.

너 배우 해야 하지 않냐고? 뭐더러 서울 왔냐고? 이 년은 양아치의 말에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쩔쩔매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또 도망쳤지. 마담은 이 년이 야밤도주한 다음 날 아침에 현관에서 웃으면서 소금 뿌렸어. 이년은 배우가 됐냐고? 배우가 됐지!

에로배우 말했지?! 그런데 이년이 왜 욕을 먹어야 하냐면....이 년은 현장에 가서야 자신이 에로배우 짓 한다는 걸 알았어. 뭐? 그럼 왜? 여관 성매매 일을 했냐고? 여태껏 몰랐대. 얘기 안 들었냐고? 양아치 입장에서는 미리 설명했대! 그런데 이 년이 기억이 없어! 그니까 말이야. 이 년도 왜 성매매 시켰는지 몰랐어. 그리고 의문도 품지 않았지. 이런 사람에게는 왜? 가 없어.

무시하려 했건만, 알바는 무능함으로 나의 신경을 긁었다.

사소한 누전 테이프 붙이는 것도 잘 못해서 가르치려 하니, 각자 스타일대로 하자며, 자신은 원래 빨리 일 못한다며 너그럽게 봐달라고 한다. 친한 사이인 것처럼 넉살좋게.

상황은 생각지 않고 너무 당연하게 상대의 호의를 기대한다.

공대 인턴들이 갈굴 짬밥도 아닌데, 갈구는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들어보니 알바는 딱 제 시간되면 항상 꺼먼 음료수를 만들어 먹는데, 바쁜 상황 속에서도 시간이 되니까 일은 팽개치고 음료수를 타온 것이다. 인턴들은 나이가 있으니 때 되면 뭘 먹어야 하는 질환이 있나? 했는데...그냥 먹을 때 돼서라고. 뭘 먹냐고 하니. 코코아.

상상도 못했던 대답이 나오자 인턴들은 조용히 해산했다. 나이차가 큰 데 뭐라 할 수도 없으니까. 알바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아니 정확히 너무 어려운 문제를 본 표정으로. 왜? 왜?

....며칠 뒤, 시제품 중 일부만 양산품으로 결정되자 알바 인원감축 결정이 소문으로 퍼졌다.

알바들끼리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개 20대니까 관두면 학교 복학하거나 다른 일 알아본다고. 그런데 그 알바는 즉각 폰을 켜더니 구직 사이트로 가 다른 연구실 보조 일을 찾았다.

나 이제 다른 일 못한다고. 힘든 일 안 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자기 주제를 모르고...

본래 연구실 보조 일은 인턴들을 시키기에 우리같이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구직 사이트에 올리지도 않는다. 물론 그 알바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후 1시간도 안 돼서 인턴들이 저번에 가르쳤던 일, 전혀 어렵지 않은 간단한 볼트 결합과 전선정리를 못한다고 하며 다시 가르치니. 아...라고 방금 배운 것처럼 굴었다.

본인도 이건 부끄러운지. 가만히 옆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고는 괜히 다가왔다.

무슨 게임하세요?...나한테 왜 이런 말을 거는 걸까? 친하지도 않는데, 그간 인사도 무시했는데. 게임 안 하고 공부 한다고 하니. 왜요? 취직하셨잖아요? 직장 다니잖아요? 라고 되묻자 분노가 치밀었다.

연구직은 입사한 지 3개월 후에 인생루트가 결정된다. 뭐하고 뭐하고, 40세 되면 동남아 현장 책임자로 가던가 관둬라. 열심히 공부해봤자. 버려지는 인생. 어떻게든 생존을 위해 더 공부로 발버둥 치는데...왜요? 라는 말에 분노와 함께 짐승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는 짐승이다.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분위기 눈치 못 채고 계속 말을 따따다 잇는다.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좋은 일자리가 나올 거라고. 아니면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주제에 결혼을 꿈꿔? 했더니...언제가 좋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좋은 자리로 이끌어 줄 거란다.

세상이 언젠가 호의를 베풀어 본인이 잘 살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난 이 말을 아주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옷 벗고, 빠구리 흉내 내는 것도 똑똑해야 하는 거야. 이 년이 뭘 해도 되는 년이겠어?

에로배우가 대사가 많겠어? 신음소리가 많겠어? 간단한 대사도 못 외우고. 카메라 쳐다보지 말라니까 카메라만 죽어라 빤히 쳐다보고. 너무 멍청해. 게다가 성격이 착한지 바보 같은지 계속 웃으니까. 사람들이 더욱 화가나 멸시해. 별 수 있겠어? 감독이나 스텝들이 잠깐 데리고 나가서 지들 물받이로 써먹을 수밖에. 그 밖에 쓸모가 없는 거야.

더 난감한 것은 애를 돌려보낼 곳이 없어. 계속 데리고 책임질 수 없으니 슬쩍 버려야 하는데, 버리기가 곤란해. 이 년은 이 년대로 눈치 없이 아무나 붙잡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이 호응해주길 기대해. 무슨 호응이냐고?! 그냥 지가 말하는 것 듣고 웃고, 표정 반응하길 기대하는 거야. 자신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왜?!

따지지 마. 우리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년이야.

한 가지....이 년의 이야기 중에 자신이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내 입장이 이러니까 너는 당연히 나를 존중하고 베풀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세상을 그렇게 보고 상대도 그렇게 보길 원해. 이게 중요해. 이 년도 나름 세상을 보는 기준이 있었던 거야.

이 년은 지 몸 착취하고, 물받이로 써먹어도 이거 하나만은 양보 못하는 거야. 어떤 존중이냐고? 그걸 알면 그 년을 딸아이 몸에서 금방 빼내겠지.

영화질 한다던 그 짐승새끼들도 더는 못 참겠는지 이 년을 버리려고 궁리를 했어. 그리고 버릴 계획을 세우고 불러냈지. 이 년은 암 것도 모르고 따라가고.

 

알바는 게다가 썸녀가 있단다. ...어떤 여자일까? 상상도 가지 않는다. 대출금에 허덕여 최저시급 받으며, 20대들 밑에 일하면서도 썸.녀! 라고 크게 강조하더니. 만나러 가냐? 마냐?

썰을 푼다.

마치 짐승 같다. 생각 없이 한 순간의 안락이나 쾌락을 위해 산다. 아마 여기로 출근하는 이유는 일이 쉽지만, 이미 익숙해져서. 지능이 낮으니 변화를 두려워해 다른 곳으로 못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못 생겼고, 무능하고, 제대로 된 경력도 없고, 말도 애 같고. 도대체 어떤 여자를 만나는 걸까? 누군가 썸녀에 대해 묻자 그거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문다. 마치 우월한 태도로.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순간 화가 날 정도로 거만해지기에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지금 여자 쫓아다닐 때예요?! 지금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요?

뭐가 잘못됐는데요?

....

 

그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경력도 없고, 앞가림도 못하고, 이해 못할 이유로 여기에 연연하고, 막연하게 세상이 나를 위해 양보할 거라는. 자기 처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그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이상하게 단어화 시킬 수 없다. 그냥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가 맞는 말 같다. 그런데...뭐가 잘못됐는데요? 라고 되물으니 아무 할 말과 따질 의지가 사라졌다.

평소에는 정말 뭐만하던 사람이라 여겼는데, 자기 고집이 있었다.

그 태도에 교양시간에 배운 그리스 비극이 떠오른다.

그리스 비극을 한 줄로 요약하면 세상이 잘못됐다고, 하면 망한다고 말리는데도, 고집스럽게 자기 뜻대로 진행하다 몰락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혹시 고집 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그래요?

 

남 얘기하듯 받아들인다.

 

이 년은...차로 끌려가다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 버려졌어. 불쌍한 년. 천하의 개새끼들!

예술 한다는 새끼들이 생각하는 것도 아트야. 어떻게 사람을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버릴 생각을 해? 개새끼들. 삼대가 벌 받을 거야! 이 와중에도 이 년은 문제를 인식 못했어.

이번에는 이 년 잘못이 아니야. 왜?! 예술 하는 새끼들이니까 대마초를 피우게 했거든. 난생 처음으로 대마를 피우니까 구토하면서 휘청휘청 걸어가는데...스텝 중 한명이 뒤 쫓아와 몰래 이 년을 낚아챈 거야. 정신 못 차리는 년을 데리고 간 곳은 뱃일에 여자 공급하는 알선소야. 소장이 아무리 그래도 먼저 확인 차 이런 일 해봤어요? 물어보니.

이 년은 헤롱헤롱해가지고 저 잘해요! 자신 있어요! 이렇게 대답한 거야.

정말 대마에 취해서 그랬을까? 아닐 거야. 세상에 사랑 받기 위해 언제나 철썩 같이 말했어. 단 한 번도 싫다는 자기 표현을 한 적이 없어. 불쌍한 것.

하는 일은 배에서 하는 성노예 짓이지. 뒤늦게 아니다 싶지만. 싫어?! 하고 윽박지르면, 바보같이 헤헤 웃으며 순간을 모면할 뿐. 불쌍한 것.

 

연구소 드디어 퇴사할 때가 됐다. 가족들까지 동남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지만...

미쳤냐? 한 번 가면 영원히 발 묶인다.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며 아등바등 산 게 아니다.

내가 관둔다는 소식이 퍼지자, 알바가 뜬금없이 다가와 친해지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미친 놈 아닌가? 저랑 나랑 신분차가 있는데...대체 무슨 사이 이길래?

알바는 막연한 호의와 정을 기대하는 눈빛이다. 상대하기를 거부했다.

내가 나가는 그 날까지, 단 것을 항상 입에서 떼지 않았다. 뭘 시켜도 일을 못했다.

매번 아...라는 혼잣말. 여전히 누가 조금만 말을 걸어도 폭포처럼 쏟아내며 자신의 히스토리를 늘어놓는다. 별거 없다. 군대 전역 후 알바전전. 생산직 일용직. 형이 일방적으로 통보. 이사. 돈 가져오라는 무능한 가족들 이야기. 계속 듣던 이야기. 매번 하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가 자신의 처지를 존중할 거라 기대한다.

이야기가 끝나면 처음 돌아가 다시 시작된다. 매번 버전이 바뀐다. 그 중에 자신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다. 이야기를 할수록 상대와 내가 정이 깊어질 거라는 순수한 선의를 품으며 배려를 기대했다.

이 년은....배에서도 상태 이상하다고 버림받았어. 어이구. 여기서도 버림받으면 진짜 끝인데 말이야. 뭐?! 하긴 그래도 여기서 버림받은 게 다행이긴 하지만. 이봐! 그건 일반 사람들에게 나 해당되는 이야기야! 이 년은 특수한 년이야! 이 년이 온 이후로 뱃일 운이 안 좋았거든. 안 그래도 상태 이상하니까, 미친 년 때문이라는 미신 때문에 버려졌어. 그래도 이 뱃놈들이 예술 하는 놈들보다는 나은 게 과거 이야기를 그냥 흘려듣지 않고, 마담에게로 돌려보낸 거야. 그러고 보니 이 놈들은 그래도 사람이네. 그리고 마담도 씨발년! 개같은년! 해도 받아준 거야. 그것도 선수금을 챙겨주고.

이 년 빚으로 묶어 놓으면, 누군가 몰래 데려갈 엄두는 못 낼 것 아닌가? 지도 사람이면 은혜 갚으려 하겠지. 이런 게 진짜 세상인심이야! 그런데...그 양아치 놈이 다시 나타난 거야.

너 배우 시켜줬는데, 왜 도망갔냐고 적반하장 뒤집어씌운 거야. 그리고 어디서 들었는지 대마 핀 것까지 알고는 경찰에 신고한다 겁을 줘. 이 년이 시시비비를 따졌을 것 같아?

죽을죄를 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다가 양아치가 살짝 얼러주니까 다시 헤헤 웃으며 고맙다고 꾸벅 90도로 인사했어. 이 년은 스스로 지옥을 품을 년이야. 너무 넓어.

마음이...업보가...

양아치는 가수 시켜준다며 이 년에게 돈을 요구했어. 뜬금없는 가수제의. 그런데 이 년이 어떻게 나왔을 것 같아? 가타부타, 앞뒤 없이 나 (에로)배우 일도 했으니 가수도 할 수 있겠구나. 그 전에 노래를 좀 했나? 안 했나? 그런 건 몰라! 배우 일은 알아서 했나?

마담에게서 받은 선수금을 전부 내줬어. 마담이 며칠 뒤, 눈치 까고 돈 어디다 썼나? 닦달하다가 전모를 알게 됐지. 이 양반은 진짜 사람 좋아. 지 일도 아니면서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더니 그 년 머리끄댕이를 잡고 악을 썼어. 이 년아! 너 또 속았다! 그 놈은 사기꾼이다! 넌 빙충맞은 등신이다!

그.런.데...이번에는 이 년이 다른 거야. 자기 위해주는 사람. 자기 도와주는 사람 욕하지 말라며! 눈을 치켜뜨고 대드는 거야. 자기와 양아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며!

결국에는 사기였지. 한 달, 두 달 기다렸지만 연락이 오겠어?

 

뭐가 ‘잘못‘ 됐는지 알았어야죠.

 

나의 말에 무당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욕하던 기운을 나에게로 향했다.

응시가 한 순간 흐려지더니 흐리멍텅해졌다.

 

이 년. 어느 날 손목 긋고 자살했어. 유서를 남겼어. 그래도 그런 말 하면 안 됐다고.

그게 나를 더 아프게 했다고.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고. 양아치가 아닌 걱정해준 마담을 원망했어. 마담은 그 후로 원인불명으로 신음신음 앓다가 죽었어.

그래. 그 다음 이야기는 알겠지? 그 년 아직도 이 세상을 떠돌고 있어.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으면...다른 버전으로 약간 각색하던가 해서 한 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또 한 번 더 끝까지.

이야기 중에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고, 세상은 내 말을 꼭 들어줘야 한다는 굳은 믿음이야.

당신 딸이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이유만으로. 그 병신 같은 찌질한 년이 들러붙었어.

가장 큰 문제는 당신이야. 왜 아까 ‘잘못‘ 어쩌구 끼어들었어? 이건 살풀이 과정이었어.

이 년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몰라. 엄청 선한 년이야.

이야기를 그냥 끝까지 들어야 했다구....고집 피우면 안 되는데...

이 년의 한풀이 중에 끼어들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해.

 

나는 한 순간, 억울함과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럼 내 입장은? 내 딸은? 이 미친 년의 입장은 챙기면서...

 

끼어들지 않았으면 뭐 어땠습니까?

뭐 대가는 똑같어. 이 년 한결같은 거 하나는 말 안 해도 알지?

 

무당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당신 그간 내 이야기 듣지 않고, 자기 생각 중이었지? 참 위험한 사람이야.

뭐가 위험합니까?

.....

 

지금부터 내가하는 말 잘 들어. 지금 당장 딸을 업고 산을 내려간다. 단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이 년 어느 정도 풀어줬으니, 여기 이 산에 묶어 둘 거야. 무당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야.

너무 강한 귀신이라 어찌할 수 없으면, 산에 묶어 버리는 거. 이 산을 내려갈 때,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그럼 평생 이 년을 떼어낼 수 없어. 그냥 내려가. 쭈욱~ 내 눈 앞에서 영영 사라져. 명심해. 당신 생각이 어찌됐건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그럼 끝이야.

 

나는 딸을 업고 산을 내려갔다.

산을 휘감은 고속도로에 꽂힌 조명등이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저 고속도로가 그년이 버려진 그 고속도로처럼 느껴진다. 어쩌라고. 너는 그런 삶을 살만했어.

너는 선의로 무장했기에 더 악질이다. 내 딸이 착해서 죄인 것은...

선은 더 큰 선에게 먹히기 때문이다. 내 딸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면 이것 먼저 가르치겠다.

비정한 인간이 되어라.

너는 지금도 나를 쫓아오고 있다. 이 메마른 날씨에, 비온 날 걸음처럼 추적추적 젖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으리라...푸우...나무 잎들이 쌓인 곳에 발 얹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따라잡을 듯 타다닥 달린다. 소리는 가까워지지만 나를 끝내 따라잡지는 않는다.

나는 비정한 인간이다. 너에게 어떤 동정도,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는다.

남 일이라며 쳐다도 보지 않을 그런 인간이다. 다 헛수고이다.

너 같은 인간들은 그리스 비극에 많이 나온다. 세상이 하면 죽는다고, 망한다고 말려도, 자기 고집대로 끝까지 밀어붙이지만, 도달하는 곳은 비극이다. 너 역시 니가 지옥에 가더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난 잘못한 것 없어요. 라고 끝까지 고집 부리겠지.

 

가지마세요.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소름 돋지만, 이미 예상했다.

너. 정신병자. 미친년이 이러리라고. 넌 나쁜 년이야. 너의 모든 건 잘못됐어.

넌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잠깐만 들어주세요.

 

다른 생각을 한다. 일부러 증오심을 키운다. 연구소에 전화해 그 찌질한 알바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후배들에게 언질을 주던가, 흥신소에서 사람 고용해서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으리라.

최근 중동위험지역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처럼 착하고 올바른 걸 추구하는 줄 알았다. 예상된 위험은 상대를 존중하고, 내가 조심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겼다. 그들은 끌려가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납치범들을 따라갔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선한 이야기와 행동을 보여주면, 상대도 그러할 줄 알았다.

막연한 선의와 호의를 기대했다. 그들은 강간당한 뒤, 시체로 발견됐다.

자신이 착하게 굴면, 세상도 착하게 굴며, 자신을 존중하리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입장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세상을 반쪽만 보는 멍청이들.

결과는 중동에 복잡한 정치문제와 외세 개입을 이끌어냈다. 평화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한 번만...제발 한 번만...들어주세요.

 

증오심이 마음을 독하게 다듬는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

자신이 무조건 옳고 착한 줄 아는 멍청이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이쁘고 착하게..유치하게 해석하는 병신들. 너희의 선한 마음이 세상에 독을 가져왔다.

여기서 내려가면 모든 너희 같은 놈들을 증오하며 살 거다. 일단 그 알바부터.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발자국 소리에 감정이 담겼다. 들어달라는 시위이다.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웹툰에서 귀신이 말한다. 자신이 사람을 죽여 귀신으로 만들면, 나중에 마주칠 때 뻘줌 하지 않겠냐고...그래도 너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붙잡을 것이다.

자신이 귀신으로 만든 이를 붙잡고, 뭘 잘못한 지도 모르고 먼저 내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라고...다 듣고 나면 상대가 비록 나 때문에 죽어서 귀신이 되었어도, 이해할 거라는 굳은 믿음과 선의. 난 절대 널 이해하지 않는다. 내 고집은 너 따위보다 강하다.

넌 분명히 잘못 살았고! 잘못했어!

 

지금 가면 애가 죽어요! 애를 죽일 거예요!

 

서늘한 협박을 무시하기 힘들다. 한 순간, 발이 후들거려 무릎이 올라가지 않았다. 최후의 관문이다. 최후의 관문이다. 속으로 주문을 왼다. 난 잘하고 있다. 저건 분명 최후의 발악이야.

 

애를 죽일 거야!! 평생 따라 다닐 거야!! 내려가지 마! 한 번만 들어줘!

 

그간의 애원하는 태도가 싹 사라지고, 가슴을 도려내는 섬뜩한 소리가 들린다.

마음 속 다짐이 한 순간 오그라들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린다. 낄낄. 벌써 내가 진 것 같다. 아니다. 난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 주문을 외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고속도로 조명등이 가까워 보인다. 주차된 내 차가 보인다. 본래 바늘 같은 블랙박스 신호등이 어둠속에서 크게 보인다. 다 왔다. 내가 이겼다! 그러나...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 고집이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 넌 잘못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뒤돌아봤다.

이렇게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End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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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로프박사 19.02.01 13:26 댓글

    주인공 역시 그 알바나 귀신처럼 고집 센 비극의 주인공이네요.

    사실 누구나 조금은 그러지 않나요? 왕왕 고집 세고, 가끔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고, 남들이 내 말 들어주는 거 좋아하고, 멋대로 세상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고.

  • 쁘로프박사님께
    No Profile
    글쓴이 유이립 19.02.02 00:27 댓글

    음...그렇죠. 그래서 제가 스토아 철학과 불교를 공부 중입니다; 그래도 힘들더군요.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마음 수련은 평생해야 할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 No Profile
    엄길윤 19.02.06 06:19 댓글

    사람에 따라서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글이 될 수도 있겠네요. 전 일단 이 글을 보고 공포를 느꼈습니다.ㄷㄷㄷ 꼭 괴물과 귀신이 나와야 무서운 게 아니지요...ㅠㅠ

  • 엄길윤님께
    No Profile
    글쓴이 유이립 19.02.06 17:38 댓글

    오! 여기까지 오셔서 댓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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