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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요원(遼遠)

2024.01.01 00:0001.01

요원(遼遠)

​- 안예은 님의 노래, "파아란"에 부쳐

미로냥

 

나는 구름과 구름 틈새에 있었다.

천둥의 씨앗이 어디에서 발아하는 지 볼 수 있는 동시에, 한 떼의 사람들이 지른 불이 어느 기슭에서 잦아드는지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구름 아래 사람들은 나를 선인이라고 불렀고, 구름 위의 사람들은 나를 덜 된 것이라고 불렀다.

​나는 구름과 구름 틈새에 있었다.

한 뼘 어름의 성취가 부족해서 나는 구름 위로 가지 못했다. 겨우 그딴 게 억울해서 벌벌 떨 만큼 어리석진 않아도, 천 년씩 숨을 죽이고 유유히 견딜 만큼 의젓하지도 않았던지라 나는 다른 ‘덜 된 것’이 으레 그리하듯 부족한 한 뼘을 찾아 헤맸다. 탐색은 구름과 구름 틈새를 벗어나 저 아래를 향하기 시작했다. 시야에 밟히는 개미떼 같은 인간들 쪽으로. 무르녹은 과실에 퍼지는 곰팡이처럼 들끓는 저 땅의 모든 먼지 사이로.

​덜 된 내가 보아하니 세상에는 적이 필요했다.

그런 세상이었다.

​세상에는 적이 필요했다.

희귀한 일도 아니었던 가뭄이 동쪽 끝의 비옥한 평야를 갈라놓았을 때부터 그랬다. 갑작스러운 전염병이 바로 그 가뭄 곁에서 고요히 번져 나가기 시작했을 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모두가 목놓아 울며 한탄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세상에는 적이 필요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적이 필요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엎어져 울어야 하는지 최소한 이유가 있기를 모두가 바랐기에. 그것이 괴조 때문, 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은 바로 제왕의 죄 때문, 이라고 누군가 속삭였다.

풍문은 구름을 타고 하늘 저편으로 뻗어 나가 크고 작은 도적을 부르더니 이내 그것이 일군의 무리로 불어났다. 그들이 가장 북쪽의 성벽부터 무너뜨렸다.

​각지에서 불어난 그 무리에 하나 둘 이름이 붙고, 어떤 적을 처단하겠다고 외칠 즈음 나는 구름 아래 세상에 약간 익숙해진 참이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엎드려 똑같이 흙을 파먹고, 빨갛게 열 오른 갓난애들을 대신 얼러주며 살짝 고쳐주곤 했는데 그런 걸로는 부족한 한 뼘을 채울 수 없어 고민에 차 있었다. 구름 위의 법도는 엄했다. 선인은 본디 구름 아래를 한 줌의 붉은 먼지로나 여기게 마련이었는데, 바람이 불면 흩어져 버릴 먼지 따위에 마음을 주어서야 구름 위에 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구름에 오를동말동 하던 수행자의 말석 무렵 스승 비슷한 자에게 오래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힘겹게 우화등선을 하여 구름 위로 오를 자격을 얻은 이가, 소싯적 부모가 울며 마소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만 마음이 흔들려서 발 밑을 보고 말았다고.

​그런 애석한 짓을 저지를 수야 없었다.

나는 본디 지상의 무지렁이일 적에 발에 흔히 채이는 미천한 생물이었고, 수명 또한 가을 이슬처럼 짧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등선하기 전의 가족 같은 끈끈한 무엇이 내게 남아있을 리야. 다행스러운 계산이 서자 나는 행동을 서둘렀다. 마음을 붙들리기 전에 얼른 내게 부족한 한 뼘을 얻어 훌쩍 도로 날아오르면 되리라고. 그래서 나는 전쟁이 휩쓸고 간 어느 마을 구석에 가서 슬그머니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처음 인간 흉내를 내는데 저 무식한 족속에게 설마 들키겠는가, 하고 내심 비웃으면서.

​거기에서 왕의 별을 타고 난 이를 발견했다.

그 자는 이미 한 무리를 이끄는 몸이었는데, 때가 그의 등을 밀어주고 사람이 그의 발치에 초개처럼 쓰러져 주고 하늘이 그가 가야 할 지평선에 별을 띄워 주었던 덕분이다. 섭능윤(葉能允)이라고 하는 그 사내는 이미 사라진 어느 왕가의 말석으로, 죽을 자리에서 살아남고 불행을 기회로 삼아 큰 싸움에서 승리할 팔자였다. 과연 얼마나 운이 좋았던지 능윤은 별 볼 일 없는 촌구석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넝마주이 같은 인간들을 하나하나 보듬어주고, 그중에서도 나를 골라 ‘가엾다’며 손수 챙겨 자기 무리에 끼워 주었다.

​나는 다른 이들을 따라 그를 주공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능윤은 내게 요양(遼陽)이란 이름을 붙였다. 요양 땅의 담벼락 아래에서 나를 주웠기 때문이다. 요양 땅의 처마 아래, 울타리 곁, 시체 위에서 만난 다른 모든 인간들은 능윤에게 큰 절을 올리며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들의 뒤통수를 따라 능윤의 이름도 함께 널리 퍼졌다. 그가 요양에서 마주친 것 가운데 오직 나만이 그의 깃발 아래에 남았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요양이었다.

​‘호걸이라 불리는 이의 곁을 지키자면 큰 기쁨도 대단한 절망도 닥칠 터이니, 개중 내가 손을 보태어 한 뼘을 채울 일도 마땅히 있으렷다?’

​계절이 몇 번 바뀌기 전에 때가 왔다.

능윤이 행차하는 곳마다 적과 의형제가 여럿 생겼는데, 개중 이름을 떨친 의형제 풍약의(馮若儀)와 객장 송경성(宋景星)의 활약으로 장택(長潭) 땅을 차지했을 무렵이었다. 풍약의는 진작부터 파양왕(鄱陽王)이라 불리며 장택 일대를 다스린 바 있는 명사였으나 송경성은 멀리 동악(東岳)에 면한 변경 담성(郯城)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진 촌뜨기에 불과했다. 일테면 초출한 청년이 굉장한 전공을 세운 셈이다. 고작 약관의 애송이 송경성의 등장은 군주인 능윤에게 있어 대단한 호재였다. 사람들은 대대로 고관이었던 이들이 뜻을 꺾고 소속을 바꾸는 것보다, 알려진 바 없는 인재의 출연을 더 값어치 있게 여기고 화젯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능윤은 장택의 절곡관(竊曲關)에 자기 깃발이 오르자 풍약의의 활약을 축하하고 나아가 송경성이라는 새로운 막하를 환영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봄이었다. 보리가 패어 사방이 푸른 시절.

연회는 때가 때인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모인 사람 면면이 두루 승리의 기쁨으로 빛났으며 식탁 또한 풍성했다. 대단한 제후과 거상이 그득한 대처만큼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장택 땅 얼룩염소의 고기며 말린 과일, 독을 빼내고 푹 삶아 돌이끼 향신료로 버무린 버섯 요리로 접시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넉넉하게 끓인 좁쌀 죽을 성 안의 사람들에게 두루 내렸고, 아껴 두었던 기름에다 콩싹과 숲기러기의 살도 볶아 차렸다. 나는 온갖 향기로운 냄새에 마음이 동했으나 구름 위로 나아갈 날을 그리며 참았다. 좁쌀 죽만 조금 쪼듯이 먹고 남은 것을 더 배고픈 이에게 주었다. 한 뼘, 오로지 한 뼘이 부족하여 나는 여즉 이 헛된 음식 따위에 흔들리는 구나 생각하니 도리어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내 눈에 질그릇 접시가 하나 들어왔다.

능윤의 의형제, 파양왕이었던 그 남자 풍약의가 호천떡 한 접시를 내 놓은 것이었다. 자기 백성들이 현군을 맞이하여 어렵게 마련한 것이라며 말이다. 호천떡이란 일종의 꽃 꿀을 섞은 촌스러운 주전부리인데, 장택뿐 아니라 천하의 서쪽에서는 꽤나 널리 알려진 흔한 종류였다. 대륙 서부에 두루 자라는 호천목의 꽃 꿀을 섞어 거친 곡물가루로 쪄낸 별미. 어린 시절을 서악(西岳) 끝줄기 골짝을 누비며 지낸 섭능윤이니만큼 호천떡에 조청을 한 번 더 발라 먹는 걸 몹시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귀한 것을 가져오셨구려, 아우여!”

​군주가 당장 치하하며 접시를 받았다. 나는 그 떡에 복어독이 묻어 있는 걸 알고 몰래 웃었다. 드디어 한 뼘을 채울 때가 온 것이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선적에 오르기 전, 청운의 꿈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헛된 목숨붙이였을 때처럼 말이다.

​나는 쉬운 일을 했다.

감추었던 신통력을 한 자락 풀어내어 능윤의 곁으로 다가가, 어리고 가여운 얼굴로 벙싯 웃었다.

​“주공, 그 떡이 정말 향기로워요. 저는 이런 걸 처음 봤답니다.”

​능윤의 시선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그리고 마른 목줄기로, 또 마음 깊이 그의 동정심을 이끌어낼 만큼 처연하게 축 쳐진 어깨로. 가련하고 청초한 자태였을 터다. 아마 지금 내 자태를 보면 그 누구도 한때 이몸이 두더지 한 마리였단 걸 짐작하지 못하리라.

​“내 백성이 배를 곯는데 군왕된 몸으로 꿀에 혀를 맡길 수야 없지.”

​그는 그리 말했다.

섭능윤은 사라진 왕가의 말석으로 태어나, 척박한 산과 들을 누비며 살아남았고 이제는 그를 따르는 수십 개의 깃발들을 앞세워 그가 한 번도 당도한 적 없는 먼 광야로 나아갈 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호천떡 한 조각을 먹고 싶었을 터이며, 지금도 따뜻한 떡의 온기에 군침이 동하였다. 그런데도 눈가에 그럴듯한 주름을 잡으며 활짝 웃었고, 냉큼 떡 접시를 내게 내민 것이다.

​‘그는 살겠구나.’

​승리까지야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선량함과 과감함을 갖추었다고 하여 더 높이 오르고, 사악한 술수를 저질렀다고 하여 고난의 구렁텅이로 거꾸러진다는 그런 법은 세상에 없다. 나는 한 마리 두더지로서 진탕을 기면서 견뎌낸 끝에 구름과 구름 틈새에 올랐으며 더 높은 저 상천(上天)의 보랏빛 궁전을 넘겨다보기도 하였으나, 그곳의 상량문에는 근엄하고 아름다운 말만이 찍혀 있었다. 좁쌀과 누룩에 대해서도, 거칠거칠한 시골 꽃떡에 대해서도, 변방의 왕으로 승승장구하다 자기 의형제에게 독을 먹이고 싶어하는 남자에 대해서도, 거기에는 적힌 바 없었다.

오욕과 영예도, 권선과 징악도 내게는 하잘것이 없으니, 나는 그저 한 뼘만 더 얻고 싶었다. 그러면 붉은 흙먼지와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이 따위 땅을 영영 떠나 그 부윰한 곳, 상아와 달이슬로 가득하고 훨훨 날아다녀도 되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나는 능윤이 주는 호천떡을 받아 끝을 베어 먹는 척하다가 소매에 감추고는 슬쩍 연회장을 벗어났다. 내가 떠난 자리는 어린애에게 자비를 베푼 군주를 향한 호사스러운 상찬으로 떠들썩할 터였다. 나는 혀끝에 고인 독을 뱉아 낸 후, 남은 떡을 잎사귀에 감싸 성벽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지지부진한 전쟁이 만든 시체들이 나가는 곳, 쓰레기로 가득한 구렁으로.

​이제 영웅은 살 것이고, 나는 저 구름 위로 돌아가리라.

두껍게 낀 비구름이 먼 지평선에서 버글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틈새로 티끌처럼 비칠 빛을 헤아려 보았다. 한 바탕 비가 내린 후 벗갤 구름 너머로 나는 갈 것이다.

+++

의기양양했던 것이 문제일까.

큰 비가 지나자 봄꽃은 이때다 싶어 우르르 떨어지고 서쪽 먼 골짝에서 부는 바람도 녹아내리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손바닥만하게 번쩍번쩍 펼치고 그리고 나는 똑같이 더러운 땅에 두 발을 딱 붙인 채 서 있었다. 나는 벽 틈에서 기어나온 벌레를 보고 왁왁대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깨벗은 애새끼들 사이를 피해 망루로 향했다. 먼 지평선은 고요했고 내 몫이 아닌 구름들이 떼를 지어 저편으로 몰려갔다.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신통력의 어느 언저리가 스르르 녹는 것이 느껴졌다. 잔설이 봄비에 조금씩 허물어지듯이.

나는 한 뼘을 더 얻기는커녕 잃고 있음이 확실했다.

연유를 알지 못해 속이 잔뜩 상한 채 몇 식경이고 기다리다가, 어스름이 닥친 후에야 마음을 굳혔다. 아까운 힘을 조금 더 헐어 써서 일대의 지신(地神)을 불러모아 을러멨다.

​“대관절 내가 행한 일이 저 오래된 모과나무 만큼은 될 터인데, 저 놈의 나무는 은근히 그 연홍색 꽃망울을 터뜨리는 와중에 어찌하여 이몸은 시궁창 위를 뛰어 건너야만 하는고?”

​나는 날고 싶었다. 두 발이 젖거나 두 손이 긁히거나 두 눈이 먼지로 흐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 시시한 삶은 버렸다.

​이제 천선(天仙)이 되어 마땅하건만 이 몸의 덕분으로 독을 걷어내어 목숨을 부지한 저 영웅의 장래를, 지엄하신 하늘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였는가?

​분통을 터뜨리는 내게 두더지를 타고 온 지신이 말했다.

​“모르는군. 그대가 한 뼘을 얻기는커녕 잃었다는 걸.”

“내가 잃었다고? 어찌하여?”

“그대는 아시는가? 그대가 저 섭가의 손에서 무엇을 받았는지. 그 떡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오.”

“허, 천선에 한 뼘 모자란 몸이기로서니 선적에 든 자가 그것을 모를까? 내가 섭가를 구해 큰 공덕을 쌓고자 하였음이야.”

“그러면 먹어 없애지 않고선! 그대 목숨을 버렸다면 적어도 잃지 않았을 게요.”

“잃다니, 내가, 대관절 왜! 왜? 무얼?”

​두더지가 보이지 않는 눈 앞을 앞발로 긁었다. 나는 한때 저것이었다. 미물이 미물로 남아 흡족하기를 거부하고 온갖 고통을 견뎠기에 나는 저 구름 위를 거닐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선인이라고 불렀다. 한 뼘을 더 보태면 천선이 될 참이었다.

​“그대가 던진 떡은 시체의 썩은 허벅다리 살 위에 떨어졌다오.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던 노인이 뼈에 뒤엉킨 속옷을 잡아당기는데 그 떡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지. 노인은 차갑게 식은 그 떡을 보고 얼른 주워 품에 감추고는 집으로 돌아가 온 가족이 나누어 먹었다네.”

​지신들이 높고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한 뼘을 얻기는커녕 한 뼘 반을 잃었구나.」

「구태여 두 뼘 반은 더 얻어야 등선하겠구만.」

「그 사이 진세(塵世)를 누벼 두 발은 검게 탈 것이고 손가락 끝은 거칠어질 것이며 기름진 음식을 탐하여 침을 삼킬지어니.」

「붉은 먼지 사이에 파묻힌 몸이 되어, 이내 꽃향기에 마음이 동하고 듣기 좋은 노랫소리를 흥얼거릴 터.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때로 즐겁고 때로 서러우리.」

​괘씸한 두더지들이 지신을 싣고 사라졌다. 나는 한때 저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선인이라고 불렀는데, 한 뼘이 부족하여 천선들은 나를 그저 덜된 것이라고 일렀다. 그래서 나는 구름을 벗어나 잠시 이 더러운 흙 위에 내려앉았다. 한 뼘을 얻기 위해.

한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는 알았다.

내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사실을.

배를 곯는 이들의 삶을 돌보지 않은 죄, 무지의 죄, 독을 주워 먹고 시체를 헤집는 허기를 상상하지 않은 죄. 그 죄로 나는 한 뼘을 더 잃었다. 신통력은 이제 찬 바람을 맞아 비틀대는 모기나 다를 바 없이 하찮았고 두 다리는 점점 무겁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주 마음이 상해 버렸다. 가여워하며 혹은 비웃으며 제물을 받아먹고 흩어지는 지신들이 부러웠다.

​구름은 계속해서 저편으로 밀려갔으나, 어떤 바람도 나를 휘감아 함께 데려가 주지 않았다.

​나는 먼 구름 아래에서 그저 미물 같았다.

​​

+++

​​

계절이 하릴없이 지났다. 절곡관에 의기양양하게 깃발을 올린 후 달이 몇 번 차고 이울도록 섭능윤은 장택을 벗어나지 못했다.

​“요양아.”​

능윤이 연못가에서 철 이른 낙엽을 구경하던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신통력을 가능한 한 아끼기 위해, 물 위를 뛰어노는 대신 마른 잎사귀가 수면에 그리는 동심원을 헤아리며 시간을 허비했다. 세월이 낙엽처럼 져버린다는 감상에 젖어, 군주가 나를 다시 불렀다.

​“요양아.”

​내게는 시간이 커다란 붕새의 깃털보다도, 사해구천을 이루는 물방울과 구름 먼지보다도 많았기에 그의 초조한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내게 이해를 바랐다. 요양아, 하고 나를 부를 때 그는 더 이상 요양의 무너져가는 담벼락과 그 그늘에 모여 앉아 죽을 날을 헤아리던 가여운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호천떡을 기억했다.

연회에서 기쁘게 받아 들었던 한 접시의 따끈따끈한 떡을. 몹시도 식욕이 치밀었던 그 찰나의 섭능윤 자신을. 그럼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대업을 이룬 자신을, 혹은 한 톨 정도의 연민을 끝내 저버리지 않고 내게 떡을 베풀었던 순간을 생각했다.

​그에게 그 순간은 ‘대업’을 위해 몸을 일으키거나, 첫 번째 승리를 거두어 도적무리를 무릎 꿇리거나, 장택 땅을 손아귀에 넣고 마침내 절곡관의 장수로 상아 깃대를 꽂던 것만큼이나 위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승리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그날의 기억을 멋대로 윤색하며 말을 옮겼다. 어떤 사람은 빌어먹던 계집애에게 주공께서 떡 한 접시를 주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도적의 아이를 가져 죽어가던 아가씨가 떡을 내 준 자비로움에 마음이 움직여 눈물을 지었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유민의 무리에 섞여 들어왔던 암살자가 고향에서 먹던 떡을 받고는 뜻을 꺾었다고도 했다.

​마지막 이야기는 그나마 흥미로웠다.

능윤의 의형제인 풍약의가 과연 호천떡에 독을 바른 장본인이었는데, 능윤은 그 사실을 어느 틈엔가 눈치 채고 그를 다시 설복했다. 암살자가 뜻을 꺾었다는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일견 소문에는 진실된 면이 있는 셈이다.

적이었다가 의형제가 되었다가 다시 영광된 순간 배신하려 들더니 결국 가장 충성스러운 심복이 된 풍약의는 이제는 유명한 청년장수가 된 송경성과 더불어 옛 진나라의 중심이었던 심주(深州)를 장악할 전략을 내 놓았다.

다만 전쟁에는 뜻 말고도 많은 것이 필요했다.

때와, 운수와, 그보다 더 많은 황금과 목숨이.

​“무엇을 그리 고민하세요, 나리?”

​나는 어엿한 소녀였다. 뺨은 그야말로 복숭아 같고 머리채는 우거진 등나무 꽃다발처럼 화사했다. 군주는 가여운 고아에 불과했던 나의 성장을 대개는 즐거운 성취로 누렸으나, 오늘은 그의 노쇠의 결과물처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요양아, 일을 하나 해 보려느냐?”

​나는 그가 지는 낙엽과, 자기 자신의 늘어가는 흰 머리와, 다소 둔해지기 시작한 근육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리께서 제게 원하시면 기꺼이 따를 밖에요.”

​겨우 한 뼘이 부족해 구름 위로 가지 못한 나는, 그가 내다 건 목숨 하나가 되어 볼까 하여 사르르 웃었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을 하늘은 과연 고귀하다 여겨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요양, 내가 부족하나마 올바른 뜻 하나에 기대 먼 길을 왔음을 믿느냐?”

“다시 이를 말씀인가요? 무너진 담벼락 아래 앉아, 흙더미에 파묻힐 날만 기다리던 촌것에게 떡 한 접시를 나누어 주신 분은 나리 뿐이었답니다. 절벽에 던져버릴 가을 부채나마 아깝게 여기신다면 마음껏 주워다 써 주세요.”

“너는 아느냐? 석계가 울면 이에 호응해 천하의 닭이 일제히 울기 시작한다, 는 이야기가 있단다.”

“돌로 된 닭이 어찌 운답니까? 요양은 어리석어서 나리의 크신 뜻을 알 수 없어요.”

“돌로 된 닭이 울 듯 하늘이 뜻을 허락하시고, 때가 무르익고, 사람의 정성이 팔방을 채우면 비로소 천하가 응답하리라는 의미일 게다.”

“하여서, 나리께서는 때가 무르익기를 고대하고 계신가요?”

“길게 드러누워 기다린 끝에 머리카락은 희게 바래 가고 두 다리는 전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꼴이 되었구나. 요양, 내가 정성이 부족한 탓이겠느냐?”

“저 같은 촌 것이 어찌 알겠어요?”

“요양, 사람은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자면 크고 작음과 늙고 젊음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이 보잘것없을 게야. 그러니 나는 감히 정성을 더하여야겠다.”

“나리의 막하에는 객장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하던데 어째서 촌 것에게 이런 일을 맡기시나요?”

“너는 글을 모르고, 너는 가여우나 충성스러운 백성이며, 너는 기꺼이 나를 돕겠다 하였기에 함께 하늘의 뜻을 기다리고자 한다.”

“자, 그럼 나리. 요양이 무엇을 할까요?”

“객장이었으나 지금은 내게 형제와도 같이 귀한 분이 된 송경성을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그분이 안 계셨다면 절곡관의 성문은 바스러지고 이 푸른 못도 피로 물들었을 거라는 노래를 저도 들었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부르거든요.”

“경성의 고향이 멀리 동악(東岳) 기슭이라는 것도 아느냐?”

“나리께서 일전에 말씀하셨죠. 호천떡을 만들 때는 귀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은 아니나, 동쪽 기슭의 괴화는 겉보기엔 닮았어도 호천나무 꽃과는 달라서 떡을 찌지 못한다고요. 날것으로 가루를 받아 납작한 약을 만들 순 있는데 쪄버리면 쓴맛만 남아 짐승도 피한다 하셨죠.”

“그래. 그 동쪽 기슭, 바로 그 동악이란다. 요양, 나를 위해 저 먼 동악의 담성(郯城)으로 가서 귀한 분께 서신을 전해 다오.”

​​

+++

​​

송경성은 멀리 동악(東岳)에 비스듬히 끝을 기댄 변경, 이른바 담성(郯城) 출신의 객장이었다.

그는 젊었고, 그 젊음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빛나는 열정과 무재(武才)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불현듯 나타나 벼락처럼 이름을 떨쳤다.

놀라운 승리는 기적과 다르지 않았고, 이야깃거리가 명성의 살을 불리는 동안 그의 선택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명처럼 받아들여졌다. 자연히 섭능윤은 하늘이 자신을 택했다는 증거로서 경성을 내세웠다. 유망한 청년 장수가 선택한 주인이니 천하의 새로운 해답으로서 온당하지 않느냐는 그 방만한 믿음이 능윤의 발자국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송경성은 사람의 자식이었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나와는 달리 일가붙이라는 것이 있었다. 능윤은 경성의 가족, 그러니까 괴화 가루로 떡조차 만들어 먹을 수 없는 동악 산골에 파묻혀 사는 촌사람들에게 서신을 전할 요량이었다.

내가 맡은 일이 그것이다.

​‘뭐라고 적혀 있을까?’

​천선이 되면 만물에 통달한다지만 나는 한 뼘 부족한 두더지, 아니, 아직은 한 뼘 반 정도만 부족한 항아 나부랭이였기에 호기심이란 걸 품고 있었다. 골치 아픈 게 싫어서 글 따위 모르는 척 가장하는 중이니 능윤은 허술한 풀로 붙인 종잇장을 대나무 조각에 말아서 내게 떡하니 맡겼다. 나는 내용물을 훔쳐볼까 말까 망설였다.

그깟 서신 하나 못 훔쳐볼 만큼 능력 없는 몸이 아니니 말이다.

​‘요런 짓을 하다가는 당장 두더지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슬슬 겁이 나는 걸 보니 구름 위의 유유자적한 선인 노릇에서 한참 멀어지긴 한 모양이다. 나는 부족한 한 뼘을 채워 보려고 지상에 내려왔다가 석 뼘, 넉 뼘쯤 부족한 몸이 된 내 신세가 처량했다. 두더지에서 선인이 될 때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우리 주공이 천하를 구해서 영웅이 된다면 나도 두어 뼘 넘치게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희망을 품고, 나는 발을 재게 놀렸다.

한 뼘 반을 잃었어도 분투하여 더 잘 해내면 그만 아니냐. 두 뼘이나, 혹여 잘 되어 세 뼘 채울 수 있다면야 손해도 뭣도 아니다. 당장에 저 구름 위로 돌아가서 유유자적하게 노닐 테다. 천의(天衣)를 제비 날개처럼 훌훌 떨치며 옅은 이슬 위를 날고 구름 틈새로 잠시 잠깐 보일 모든 무지렁이 미물들은 다시는 안 보아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볼라치니, 세상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것보다 가깝고 복잡하고 더러웠으며 또한 광활했다.

그 즈음 나는 몇 마리의 파리와 떠날 때를 놓친 귀뚜라미 몇 마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대단한 이지를 깨친 놈들은 아니었으나 막연하게 나마 선계의 정취를 느끼고 곁을 떠도는 모양이라, 나는 모처럼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거느리는 놈들도 있는 몸이니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가는 곳마다 지신을 불러 상황을 척척 물어보았다. 파리떼도 귀뚜라미도 그런 내 모습을 우러러 보았다.

​“지신이여, 이몸의 자태를 보아하니 어떤가? 그대도 두 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이몸의 뒤를 따르겠다면 쾌히 허락하겠네.”

​파리떼도 귀뚜라미도 거두었으니, 지신도 몇 거두어 나와 같은 선인으로 나아갈 길을 안내해 줄까 싶었다.

​“어린 두더지여, 그대는 인간을 속였다 여길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몹시 영악하다네.”

​하여간 이곳 지신들은 중천의 선녀 나리를 존경할 줄 모른다며, 나는 혀를 찼다. 이몸이 아무리 두더지였다 해도 구름을 밟고 다닌 세월이 얼만데 인간 따위에게 속아 넘어가겠는가 말이다. 애당초 섭능윤은 나를 그저 요양 땅 담벼락 앞에서 주운 유민인 줄로나 알 뿐인데, 속고 속이는 것도 뭐 이용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거기 가시는 밭쥐(田鼠) 신선 나리.”

​절곡관에서 멀어져 까마득한 계곡을 하나 지나고 산을 둘쯤 넘으니 주변 풍광도 색을 바꿀뿐더러 지신들도 예의가 발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낯을 하고 공손하게 군들, 지신들은 지신들일 따름이었다.

​“누가 쥐란 말인가?”

“말 한 마리 양 한 마리 거느리지 않고 홀로 대지를 누비는 신선 나리가 아니라 또 누구겠습니까?”

“말도 양도 구름을 밟고 올라서면 하잘 것 없어 거느리지 않는 게야. 그리고 나는 쥐가 아니다.”

“아무렴, 지금은 어엿한 아씨이지요.”

​지신이 눈치를 살살 살폈다.

나는 그 지신이 엄연히 나를 따르는 중인 파리와 귀뚜라미를 무시해 버린 것이 언짢았으나, 다투기 싫어 입을 다물었다.

​“신선 나리께서 오시는 그 맑은 기운이 백리 밖에서도 느껴지지 뭡니까. 여기 아껴 두었던 열매를 잔뜩 바치니, 저희 땅을 축복해 주십시오.”

“오냐. 내 비록 지금은 포의를 걸치고 붉은 흙을 몸소 밟고 다니는 몸이나, 훗날 구름 너머로 돌아간 후에 보랏빛 안개를 두르고 살 날이 온다면 반드시 너희 정성을 기억해 주마.”

​그리하여 정성을 보아서 지신이 올린 개암 열매에다 소금 한 조각을 얻어먹긴 했다. 별 맛도 없고 호사스럽지도 않은 걸 보아하니 지신에게 와서 누가 치성을 드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주위 땅덩어리에 크게 사람들이 모여 살며 재미 볼 여지도 없을 것이 뻔했다. 나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장사치가 득실거리고 넓고 기름진 땅에 붙은 지신이라면, 길 지나는 두더지에게 와서 먼저 고개를 조아릴 리 없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세 일에 기분이 상하면 안 되는데, 역시 너무 오래 지상에 머물렀다.

슬슬 다시 떠날 채비를 갖추며, 나는 지신이 내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는 꼴을 도저히 못본 척 할 수가 없어 물었다.

​“뭘 보느냐?”

“다름이 아니라…… 신선 나리. 저 뒤에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불길한 무리는 누구랍니까? 나리를 따르는 인간들인가요?”

​그야 물론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는 자들은 필시 섭능윤의 천리안 역할을 담당한 것일 터다. 혹은 추적자. 그들은 내가 절곡관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거리를 두고 은밀히 뒤를 밟았다. 나를 경계해서도, 내가 역할을 다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 때문에.​

그 목적이란 게 대관절 뭔지는 나도 모른다.

알 이유도 없기에 발 가벼운 이들의 대단한 미행 따윈 모르는 척, 요양 땅 담벼락에 기대 다 죽어가던 계집애답게 천둥벌거숭이인 척, 그렇게 걸었던 참이다.

​“홍진에 발을 디딘 이상 인연이 얽히는 걸 어찌 막겠느냐? 그림자를 질질 끌 듯 불경한 무리도 질질 끌어야만 하는 법이지.”

​지신이 아주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곧 다시 등선할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지신과 헤어져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질퍽거리는 흙탕과 다리가 놓이지 않은 개천이 곧바로 나를 가로막았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며 크고 작은 마을로 향하는 길은 어디 한 군데 평탄하지 않았다.

나의 만족감은 수레국화 잎사귀에 맺힌 아침이슬보다도 빨리 쪼그라들었다.

그러자 지신 하나에게 괜히 허세를 부린 내 자신이 저 구름 위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도로 땅 속에 몸을 감춘 두더지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운과 때와 노력을 더하여 한 백 년쯤 도를 닦아 겨우겨우 성취를 이루었는데, 한 뼘 부족한 걸 채워보겠다고 건방을 떨다 기껏 갖추었던 것도 죄 잃어버릴 지경이란 위기감도 들었다.

​‘아니다. 섭능윤은 하늘이 정한 영웅이니, 그자가 가는 길이 피로 물들거나 말거나 하여간에 나는 그 곁에서 다디단 과실을 좀 얻어먹을 것이다. 내가 그자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한 뼘 반쯤 뭘 얻어가는 것이 설마 염치없는 짓이겠는가?’

​그렇게 섭능윤의 꼬리를 길게 달고 나는 동악 땅에 이르렀다. 사나운 산줄기가 불그스름한 토지로 미끄러지듯 맞닿아 있었고 잎이 삐죽한 교목이 무성한 땅이었다.

​‘동악이란 땅이 붉은 곳이로군.’

​한참을 걸었거늘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두더지였더라면 여기까지 닿기도 전에 벌써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두더지가 아니란 말이지.’

​이 기꺼운 마음을 누구와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동악에서도 골짝 지나, 수레바퀴의 흔적이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걷자니 겨우 담성(郯城)이었다. 담성의 토지는 더욱이나 붉었다. 듬성듬성 전쟁의 흔적으로 시커멓게 타 버린 마을의 땅도 붉었고 쓸만한 나무는 온통 베어가 훤히 드러난 산기슭도 붉었다. 나는 그래도 사람들이 좀 모여 사는 산하촌 어귀에 앉아 차가운 감자 한 톨을 지신에게 주었다.

​촌 동네의 지신은 매우 성가셔 하는 듯한 얼굴로 나타나선, 내가 묻는 말엔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송경성이라는 이름도, 그의 피붙이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한 번 지상에 팽개쳐진 후 다시 천상으로 돌아간 이는 드물다오.”

​누가 들으면 그 자신이 구름 너머 또 구름 너머 보랏빛 안개를 두르고 노니는 천선인 줄 알 만한 소리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대로 나의 주인, 아니지, 이 ‘요양’이라는 고아 계집아이가 주공으로 모시는 섭능윤의 수하들을 기다리는 편이 좋을까? 그는 임무를 잘 마치기 위해 자기 수하들을 내 꽁무니에 달아 보냈다. 그러나 따져보자. 섭능윤은 과연 촌 계집애에 불과한 요양이 자기 수하들의 추적을 눈치 채길 기대했을까?

아닐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몰고 온 파리들이 내가 떨구어 둔 감자 위에 새까맣게 앉은 꼴을 내려다보았다. 지신은 또한 나를 따라 온 귀뚜라미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입바른 말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녀석들을 죄다 몰고 사라져 버렸다.

이리하여 홀로 떠난 나는 담성의 산하촌에 겨우 도착하자마자 다시 홀로 남았다.

​구름 위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과 더불어 있을 적에는 흙먼지 사이에서도 향취가 나는 듯하더니, 그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도로 두더지 한 마리로 팽개쳐진 것만 같았다.

‘아니지! 이몸은 중천을 누비는 선인이었단 말씀이야.’

선인이란 무릇 걸을 때 흙먼지에 파묻힐 수밖에 없는 홍진(紅塵)의 무리와는 다른 몸이라는 것을 나만큼 잘 아는 이도 없었다. 나는 엉덩이를 툭 털고 일어나 누가 보아도 두더지 같지 않은 자태로 물었다.

“여기 송경성이라는 사내의 부모가 계시다 들었는데, 혹 아시오?”

“송씨? 송 아무개라면 머구나물 댁 아니겠나?”

좁은 동네에서는 사정이 빤해서 나는 이내 ‘머구나물 댁’이라는 외딴 집의 위치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신이 나서 슬렁슬렁 팔짝팔짝, 선녀답지 않게 그러나 두더지같지도 않은 자태로 걷자니 누가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군주의 그림자들처럼 거리를 두고 은밀히 따르는 것도 아니라 나는 거리낄 것 없이 뒤를 돌아섰다.

붉은 흙이 드러난 산기슭, 다 자라지 못하여 가여워 보일 만큼 빈약한 숲을 등진 채로.

“누구냐.”

상대는 나와 비슷한 키의 사내애였다. 소년이라기에는 조금 더 자랐고 청년이라 하기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는, 이도저도 아닌 어린 인간. 그 아이가 달처럼 희고 청아한 얼굴 가득 호기심을 품고 말했다.

“송경성은 내 형님이셔.”

나는 낯선 이를 맞이하고도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그 친근한 어조가 신기했다. 섭능윤과 함께 하는 모든 인간들은 누구나 품에 칼 한 자루를 지니고, 상대가 자신을 해치려 할지 재는 데 능했는데 이 낯선 사내애는 완전히 달랐다. 하기야 이 작은 동네에서는 송경성의 부모 댁을 찾는 내게 누구 하나 왜 찾냐고, 뭘 원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송관동(宋款冬)이 내 아버지고.”

그는 내게 재차 정보를 주었다. 나는 냉큼 말투를 고쳐 공손한 척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저는 멀리 장택에서 왔는데, 다름이 아니라…….”

“내가 아니라 아버지랑 어머니를 만나러 온 거 아니야?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보아하니 너나 나나 비슷한 또래 같은데.”

“아이, 어떻게 그리 하겠어요? 저는 군주의 명을 받아 왔사온데, 군주께서는 송장군을 몹시 귀하게 대접하고 계시답니다. 저 같은 아랫것에게는 하늘 같은 분이시지요.”

“하하!”

그는 정말로 하, 하, 하고 그림처럼 웃었다. 그리고 나를 스쳐 앞질러 가면서 손짓했다.

“하늘 같은 분은 내 형이지 나는 아니잖아. 그렇게 따지면 커다란 성에서 온 너도 나한테는 높으신 분일지도 모르지.”

나는 공손하고 연약한 계집애인 척, 까막눈인 척, 적의를 잘 눈치채지 못하는 척, 그저 동정 한 자락에도 감읍하는 척, 그렇게 지내는 데 익숙했다. 섭능윤이 이끄는 사내들은 모두 그런 걸 편안하게 여겼으니까. 안 그래도 칼을 품고 서로를 대하느라 고통 받는 와중에 발에 치이는 백성 하나까지 경계하자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무릇 선녀인 내가 맞춰주어야지.

‘제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겨우 수십 년 살고 흙으로 돌아갈 테니, 가여운 노릇이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몸을 낮추어 왔다. 한데, 이 사내애에게는 나의 그런 장한 마음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인간이 나를 진정 우러러보면서 뒤를 따르던 파리며 귀뚜라미와 닮은 것도 아니니, 나는 이거 참 곤란해지고 말았다.

“나는 송연리(宋渷里)인데, 너는 이름이 뭐야?”

연리가 말했다.

‘나는 두더지다. 그러나 지금은 저 구름 위를 노니는 선녀로, 중천을 두루 아우르며 이깟 하계(下界)에는 잠시 잠깐 다니러 왔을 뿐이니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샐샐 웃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군주께서는 나를 요양이라고 부르시지요. 요양 땅 담벼락 앞에서 주웠기 때문이랍니다.”

“아, 그래.”

아, 그래?

감히 선녀가 몸을 낮추었으면 ‘에구 가엾구나’ 하거나 ‘다행이다. 나는 너보다 형편이 낫구나’ 할 일이지 ‘아, 그래’ 하고 앞장서서 묵묵히 걸어갈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산을 오르는 사내애, 그러니까 송연리라는 녀석을 잠깐 노려보았다.

선녀로 하여금 속이 상하게 만들다니 어린 것이 아주 제법이다.

​“송 장군님의 식솔이 맞으십니까?”

​나는 혹시나 하여 물었다.

​“이 시골 구석에서 송가라면 우리집 뿐이지. 달리 송씨가 또 있겠어? 있다한들 여기 토박이가 아닐거야.”

​연리가 뒤를 몇 번 돌아보면서 꼬박꼬박 답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대화한 탓에 즐거운 기색을 통 감추지 못한 채였다.

​“요양! 그러다 해가 다 떨어지겠다. 어서 와, 어서.”

녀석은 정말이지 몸이 날랬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땅 아래로도, 구름 위로도 갈 수 있었으나 꾹 눌러 참고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뒤를 쫓았다. 땀이 줄줄 흘러 내려 연리의 등을 적셨다. 동쪽 땅의 초가을은 서쪽과 별 반 다를 바가 없어서 한여름에 비하자면 놀랄 만큼 빨리 노을이 내렸다. 산등성이 나무 우듬지마다 붉은 점이 번져나가는 광경 아래 다람쥐처럼 걷던 연리가 홱 뒤를 돌아 보더니 내 쪽으로 폴짝 뛰어왔다. 그리고 속살거렸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지 않아? 요양? 너 혼자 온 게 맞니?”

​섭능윤이 매단 그림자 같은 병사들이 아직도 쫓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내가 송경성의 식구를 만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구나. 나는 하나 깨달았다. 그러면 서신을 전해주는 광경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게 아닐까. 당장 일을 확실히 해 보려고 나는 얼른 옷가슴에서 서신을 꺼내 주었다.

​“형님의 주공이신 섭 나리께서 주신 서신입니다.”

“안에 무슨 내용이 써 있는 지 알아?”

​연리가 서신을 바삭거리면서 슬쩍 들어 붉은 하늘에다 비추어 보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나는… 아니, 소인은 요양 땅 담벼락 앞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반푼이인지라 문자와는 연이 없었답니다.”

“그렇구나. 내가 예전에는 여기까지 온 학자가 계셔서 공부를 배웠거든. 그때 글자도 많이 익혔지.”​

그러고는 서신을 아쉽다는 듯 어루만졌다. 침향이며 산호에 진주며 하는 귀한 보물이 담긴 자단 상자가 장택 땅의 보물창고에 한껏 쌓여 있었는데, 섭능윤이 이따금 그것들의 표면을 쓰다듬을 때나 지었던 그런 표정이었다.

​“한데요?”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도 물었다. 연리가 서신을 도로 나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한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싸고 돌면서 공부도 못하게 하는거야. 괜히 촌구석에서 글월을 많이 익히면 곱게 죽지 못한다고 말야. 형님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말 끝을 웅얼거리면서 연리가 도로 산을 재바르게 올라갔다. 나는 그 뒤를 슬렁슬렁 따랐다. 붉은 하늘 기운이 나무 등걸까지 폭 적실 즈음이 되어 오두막이 하나 눈에 들어 왔다. 연리는 알량한 문짝을 겁도 없이 열어주고 나서 날더러 안에 들어가 앉으라더니 저는 도로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화전 일구러 나간 양친을 모셔 올테니 거기 있어. 금방 올게.”

​참이면 좋겠다. 나는 슬슬 이 임무가 지루해졌다. 서신을 전하라 해서 이미 전했으니 다 끝난 노릇이 아닌가. 이제 인사를 사뿐 하고는 다시 섭능윤이 차지한 장택 땅으로 돌아가면 그만일 터였다. 그러고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봐야지.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움직인 덕을 보아 한 뼘 어치 뭐라도 채워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는 일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한숨 섞어 한탄이나 장하게 하면 그만이다.

아무려나 보잘것이 없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나는 가물가물 잠이나 한숨 잘까 하다가 풀이 이리저리 돋은 앞마당, 아니, 그냥 집을 둘러싼 산길로 나아가 나무 등걸에 기대 세워진 돌탑을 하나 보았다. 산길의 돌을 주워 누가 서툴게 쌓아 올린 듯 그야말로 볼품 없는 탑으로 헛된 돌무더기 같은 모양새였다. 어쩌면 연리나 그의 부모가 먼 데서 전공을 쌓으며 귀신처럼 달리고 있는 송경성의 무사안위를 빌며 오고 가면서 툭툭 던져 올린 건 아닐까.

내가 덧없이 돌 하나를 툭 던져 올렸더니 기다렸다는 듯 지신이 나타났다.

​“중천의 선인께서 하강하시어 이리 찾아 주시니 영광, 영광이옵니다.”

​지신은 공손했고 흐릿했으며 몸집이 작았다. 두더지조차 타지 못해 맨발로 거적을 뒤집어 쓰고 나타났다.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지팡이 끝에 이끼가 돋아 있었다. 지신이 말했다.

​“이씨 성을 가진 여인네와 송씨 성을 가진 남정네가 부부의 연을 맺어 저 촌집에 기거한 지 여러 해입니다. 그러는 동안 별 거 아닌 자작나무 등걸의 괴석에 돌을 쌓아 정성을 들이고 온 천하의 신들에게 보호를 청하며 귀한 옥을 바쳤으니, 소인이 여기 머무는 바입니다. 저 돌탑 아래 부부의 옥 가락지 한 쌍이 묻혀 있지요.”

“한데 본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이냐?”

​나는 거만하게 물었다. 지신은 잎사귀 가득 맑은 이슬을 떠와 내게 바치더니, 내가 목을 축이기를 기다려 서신의 내용을 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내가 왜 서신을 보아야 하느냐. 괜한 연을 맺게 되면 곤란한 걸 너라는 신도 알 것이 아닌가?”

“무엇인가 하나를 알게 되면 즉시 인연이 맺히게 마련인 것을 소인이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돌탑 아래 옥 가락지를 묻은 부부가 내도록 큰아들의 장래를 빌고 또 빌었으니 사실 소인이 오랫동안 그 연유가 궁금하던 차. 내력을 알게 된다면 그 또한 소인에게 덕을 베푸는 일 아니겠습니까?”

“괜한 인연은 탈이 나게 마련이건만.”

​하나 나도 이미 한 잔의 맑은 물을 얻어 마신 참이었다. 외면만은 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나는 벌레들을 불러 일렀다. 자, 어서 연리를 따라가 서신 속의 문자들을 하나 둘 훔쳐 오너라, 하고. 한 식경 겨우 넘었을까, 새붉어진 하늘로 까만 벌레떼가 오글오글 날아왔다. 글자를 물고. 그리고 두 번 접힌 서신의 글자들을 신통력을 발휘해 끄집어 내 와서 반듯하게 괴석 위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서신의 절반 가까이는 그저 인삿말과 공치사에 불과했고 남은 절반의 또 절반은 장래의 아름다운 몽상을 그림이니 겨우 네 등분 하여 하나 정도가 서신의 본론일 터였다.

​섭능윤은 이렇게 말했다.

송경성이 평남위(坪南衛)라는 마지막 왕손의 자제인 것을 누구보다 귀하게 여겨 반드시 그 몸을 높여 주리라고.

‘흠. 그러면 송경성이 아니라 평경성이었구나.’

내 감상은 겨우 그 정도였다.

​​서신의 내용을 알아온 벌레들이 주위를 맴돌며 요란한 날갯짓소리를 냈다. 나는 벌레들을 움직여 서신의 문자들을 만들어 보이며 지신에게 한껏 잘난 척을 했다. 인간들이란 말이다, 서신의 절반은 산수와 풍경을 떠들어대고 남은 절반의 또 절반에는 내일도 모레도 아니라 먼 훗날의 정경을 꿈처럼 그리게 마련이라고. 인간의 서신 따위는 별로 본 일도 없으나 섭능윤의 서신이 그러하니 다른 것들도 뭐 비슷한 놀음을 놀지 않겠는가. 나는 자신이 있었다. 지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벌레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지신이 돌탑 뒤로 몸을 감췄다. 지팡이 끝이 툭, 돌더미 곁을 스치는가 싶더니 마른 나뭇가지만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나는 서늘한 바람에 몸을 일으켰다. 사위는 어느 새 어두웠고 연리가 빛 바랜 옷을 입고 저만치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기 저 분이 서신을 가져와 주신 분입니다.”

​연리가 나를 가리키며 자기를 따라온 두 사람에게 알렸다. 여자와 남자는 둘 다 비슷한 몸집에 비슷하게 굽은 등허리를 가진 노인들이었고, 새카맣게 탄 얼굴에 두 눈만은 별처럼 반짝였다. 나는 두 사람의 주름진 뺨과 비뚤어진 콧등에서 송경성의 그 환한 이목구비와 닮은 점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연리의 마른 뺨과 강가의 조약돌같은 이마, 한쪽 어깨가 조금 치켜올라간 자세에도 노인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가족은 서로가 영 다른 풀을 엮어 만든 인형 같이 달랐다.

​‘그러나 나이 들면 상하고 죽으면 썩어 흙과 먼지로 돌아가리라.’

​나처럼 부단히 노력해 선적에 들지 않는 한 뼈빠지게 노력해도 한 뼘 두 뼘을 채우기는 커녕 그저 하루하루 더 늙어가기만 하리라. 세상 모든 것이 시간 앞에 낡듯이. 나는 금세 기분이 우쭐해졌다. 흩어진 파리와 귀뚜라미, 풀벌레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면 내가 깨달은 이 이치를 다시 한 번 설파하며 너희도 모두 덕을 쌓아 도를 이루라고 잔소리를 퍼붓고 싶었다. 누가 아는가, 개중에 특출한 녀석이 하나 둘쯤 있어 장차 도를 이루고는 내게 그 공을 나누어 줄지 말이다.

​“장택에서 오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촌구석이라 뭐 대접해 드릴 것이 없사오니.”

“맑은 물 한 대접, 낟알 몇 톨이라도 대접해 드려야 마땅한데….”

​나는 얼른 손을 저었다. 배를 곯는 거야 유쾌하지 않은 노릇이다. 일단 나도 몸뚱이란 걸 매달고 다니는 신세니까. 그러나 남의 살림에 해를 끼쳐서야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니 멀게만 느껴지는 구름 위가 점점 더 멀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나는 차라리 두어 끼 더 굶는 쪽을 택했다. 아까 지신이 가져다 준 물을 마셔서 버틸만 했기 때문이 절대 아니었다.

노인들이 서신을 품고 촌집 안으로 들어간 후 나는 앞마당으로 내려섰다. 이만하면 임무를 다 수행한 셈이니 노인들에게 답신이라도 받아 돌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니 참 그럴듯했다. 서신을 전달하고, 증표로서 답신을 받아 든다. 그걸 섭능윤에게 가져다 주면 그가 기뻐하며 내 공적을 치하하겠지. 나는 겸손한 척 할 터였다. 내가 누릴 복락은 이승에는 없었으니까. 금은보화와 부귀공명이 다 거품 같고 흩어지는 향로의 연기 같다는 걸 나는 잘 아니까.

​‘어서 구름 너머로 돌아갔으면.’

​나는 초조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때 연리가 내 주위를 배회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말이야, 요양. 너의 주공께서 서신에 무어라 하셨는지 너는 알아?”

“아이고, 소인같은 무지렁이는 그저 곡식을 실어 나르는 저 들판의 소나 말에 불과합니다. 소나 말이 등에 짊어진 것이 몇 푼이나 나가는지 알겠습니까?”

“그래도 그게 쌀인지 보리인지는 알 것이 아니겠어? 요양. 혹시… 혹시 형의 식솔을 데려오라는 내용이 아닐까? 만약에 그런 거라면 나는….”

​연리의 마른 뺨에 노을이 내린 듯 홍조가 올랐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 한 쌍이 반질반질한 청동거울처럼 둥실 떠올라 똑바로 나를 향했다. 나는 깨달았다. 연리는 이 산을 떠나고 싶은 거로구나. 산 아래로, 들판으로, 높이 세운 성벽 너머로, 혹은 강줄기 너머 대처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구나.​

「장수라면 큰 전장을 꿈꾸고 검이라면 큰 장수를 바라는 법. 사람이 새끼를 낳으면 대처로 보내라지 않아?」​

그러고 보니 장택에서도 흔히들 그렇게 떠들곤 했다. 흩어지는 와중에 섭능윤을 따라가는 내게 사람들이 어깨를 쳐 주면서 했던 말도 비슷했다. 계집애지만 대처에 나가 좋은 혼처라도 찾을지 누가 알겠냐고. 이왕 구원을 받을 거면 주공같은 호걸에게 받아 더 기쁘지 않느냐고. 나는 덜 좋은 혼처, 덜 기쁜 구원이 무언지 궁금했지만 눈치껏 묻지 않았다. 그저 샐샐 웃으며 말을 맞췄다. 아무렴요,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라지요. 생선도 큰 물에 놓아 기르면 웃자란다 하더이다.

모든 생선이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저기, 저기 말이야… 요양. 우리 형님을 너는 알지? 형님은… 어떤 분이셔?”​

그건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송경성이라는 걸출한 장수가 어떻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얼마나 대단한 전공을 세웠는지, 어떻게 절곡관을 함락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는지, 사람들이 그를 이르러 불세출의 기재라고 칭송할 때면 저자가 어떤 식으로 진동하는지 구구절절 늘어 놓았다. 흡사 섭능윤의 치세를 치켜세우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내던 상인들처럼 달콤하게. 내가 듣기에도 이야기는 한 번 끊임이 없이 매끄러웠고 송경성의 활약은 꼭 하늘이 그를 위해 모든 승리를 마련한 듯 들렸다. 연리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고 이내 콧김이 씩씩 뿜어져 나왔다.​

“형님은 정말 대단하구나!”​

이야기를 꾸며내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나는 내친 김에 송경성의 벗을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그들이 모시는 섭능윤이 어떻게 천하의 영웅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늘어 놓을 셈이었다. 입에 참기름이라도 머금은 듯 혀가 미끄럽게 굴러갔다. 그러나 그때, 촌집 문이 벌컥 열리고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리야!”​

두 사람이 엄하게 부르자, 소년은 즉시 얼굴빛을 단정하게 바루고 몸을 돌렸다.​

“어머니, 아버지. 이 손님의 이야기를 좀 들어 보세요. 글쎄, 우리 형님이…!”

“들을 것 없다. 모두 뜬구름 잡는 세상 소문에 불과한 게야.”​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사 뜬구름 아닌 게 있는가. 나는 몰래 입을 삐죽거렸다. 곧 죽으면 썩어질 몸이면서 그럼 뭐 명성 따위가 항구하겠는가 아니면 소문이 감히 영원하겠는가. 두 노인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귀하신 객을 모시기에 마땅하지 않사오니 참으로 송구합니다.”

“아뇨, 아뇨. 그러실 것 없습니다. 소인은 그저 답신을 한 장 써 주시면 가지고 얼른 돌아갈 마음 뿐입니다. 우리 주인께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웃는 낯을 꾸며 굽실거렸다. 그러자 노인 두 사람은 서로를 또 한참 바라보더니 한 사람이 눈을 꾹 감고, 다른 한 사람이 나를 향했다.​

“당장 써 드리자니 등불 기름이 없어 침침한 눈을 이기기 어렵겠네요. 손님, 죄송한 말씀이나 날이 밝으면 다시 오셔서 답신을 받아 가시지 않겠습니까?”​

손님맞이를 이렇게 하는 법은 없었다. 찬물 한 바가지 못 얻어먹는 건 물론이려니와 마굿간 구석 짚더미라도 내주지 않는 집구석이라니. 그야 산속에 지은 오두막엔 마굿간조차 없었으나 낡은 집 한켠이나마 내 주려면 못 내줄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호히 나를 거절하며 다음 날을 기약했다.

​‘뭐야. 나를 더러 이 산을 내려갔다가 내일 또 기어오르라는 말인가?’​

이몸이 선녀였기에 망정이지 한낱 촌 계집애였다면 그 얼마나 고된 길이 되었겠는가. 나는 내심 불편한 기색을 누르며 덕을 쌓는다 생각하며 얼른 기쁜 낯을 꾸며냈다.​

“안 그래도 소인이 귀한 댁에 신세 지기 죄송하던 참입니다. 산 아랫동네로 내려가 하룻밤 자고 얼른 올라와 어르신들을 뵙겠습니다.”​

당장 서신 한 장 써 주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련만, 성가시게 되었다. 그러나 한탄해서 무엇하며 분쟁을 일으켜 또 무엇할 것인가. 나는 덕을 쌓아 어서 한 뼘 반 부족한 것을 메우리라 다짐하면서 냉큼 촌집에서 등을 돌려 세 사람을 떠났다. 그리고는 산하촌으로 내려가는 대신 숲을 거닐며 뭇 벌레들을 불러 내가 구름과 구름 틈새를 누비면서 무엇을 보았는지, 슬쩍 올려다 본 상천의 궁전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용을 가지고 있는지 한껏 자랑을 해 댔다. 개중 몇 녀석은 도를 깨우쳐 구름 위로 기어올라와 줄 것이며 그것이 내 덕분이 되리라는 내심을 품고 말이다.

​그렇게 한참동안 풀밭을 뒹굴며 어둠을 즐기자니 불길한 기운이 뒤통수로 확 끼쳤다. 나는 남천나무가 우거진 곁에 엎어져서 썩은 감잎사귀로 덮인 흙을 파헤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멀리까지 어두운 냄새가 났다.

어둠 너머로부터.

웃자란 나무와 붉은 흙과 괴석 위에 쌓인 돌탑 저편으로부터.​

나는 달려갔다.​

연리의 촌집 가까이까지 가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피 냄새, 살육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드물게도 손을 벌벌 떨었다.​

“아, 낭패로다. 무슨 일이 난 것이야.”​

하필이면 내 눈 앞에서 이 무슨 난리란 말인가. 몇 식경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얼굴로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던 이들에게서 죽음의 기운이 풍기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내 곁으로 벌레들이 먼저 신이 나서 쐥 하며 날아갔다가 좽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파리떼가 앵앵 지절거렸다.

​“중천의 선녀 나리, 글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네들의 얼굴이 하마 새파랗답니다!”

“문간에 불이 붙었답니다!”​

아이고야, 이대로라면 정말이지 두더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지를 잃고 시들어버린다면 차라리 다행할 것이나 두더지에게는 두더지의 몫이 또 따로 있는 법. 도로 두더지가 된 자신이 어떤 심경으로 막막한 어둠 속을 꾸물거릴 것인가. 대관절 다 헤아릴 수가 없을러라. 그리하여 나는 앵앵대는 벌레들을 떨치고 냉큼 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부실한 문을 온몸으로 부딪혀 부수고 들어가자마자 흰 줄에 데롱데롱 목이 매달려 발버둥치는 연리가 눈에 들어왔다. 토사물과 피 위에서 버둥거리는 발길질에 먼지가 폴폴 피었다. 불티가 휘날려 눈 앞이 멀어졌다. 나는 얼른 달려가 연리의 목에 묶인 끈을 단숨에 끊어냈다. 연리는 컥컥거리며 바닥에 한쪽 어깨를 기대 쓰러지더니 바닥에 팔뚝을 대고 기듯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 곁에서 이미 목이 깊이 베여 숨이 끊어진 여자와 미약하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칼에 깊이 찔린 남자를 발견했다. 연리와 송경성의 부모였던 그 노부부였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신이 문제였는가.

한데 서신에는 섭능윤의 지극한 존경의 말 뿐이었다. 송경성이 평 아무개라는 어떤 높으신 왕손의 자제이니 더 높이 쓰겠다고 적혀 있었지 않은가.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노부부는 왜 죽음과 불을 택했단 말인가.

연리도 이제 외로운 산 생활을 정리하고 대처로 나갈 수 있으리라 희망에 차 있었다.

그는 자기 부모에게 극진해 보였고 부모가 자식을 헤칠 이유 따윈 흔하지 않을 터였다. 서신이 아니라면. 서신만이 그날 저녁의 다른 점이었다.

아니면 침입자가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방 안 어디에서도 침입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연리가 기듯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흔들었다.

​“왜요? 아버지, 왜 그러신 거예요?”

​그는 아버지의 멎어가는 숨을 살려보려고 제 입을 붙여 보고 옷가슴을 풀어헤쳐 맥이 뒤는 소리를 듣는 등 안간힘을 썼다.

​“아이고, 데이고. 이것은 신령이 와도 불가한 노릇이지요.”

“하믄요. 이미 끊어져버린 목숨입니다. 실낱 같은 것이 방금 툭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건 하늘조차 불가합지요.”

​왱왱대며 몰려든 벌레들이 지껄였다. 나는 검은 연기가 폭 치솟아 오르는 와중에 연리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여기서 나가야 돼!”

​공손한 말투를 잊고 외치자 그는 불길이 번져가는 문갑으로 다가가 소매를 흔들며 불길을 몰아내었다. 그리고 작은 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서 서신을 꺼내 손에 틀어 쥐었다. 연리는 이제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채, 도리어 내 팔을 잡아 당기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불을 끌까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죽어야 한다 여기신 거라면 그 뜻을 지켜 드리고 싶어. 난… 난 여기서 죽은 거야. 송연리는… 어머니, 아버지랑 같이 죽은 거야.”​

죽지 않았는데 뭘 어떻게 이미 죽은 거란 말인가. 나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불길은 훨훨 날개가 달린 커다란 신천옹처럼 번져나가 작은 집을 홀랑 뒤덮었다. 연리의 얼굴로 주홍색 그림자가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그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섬호(陝湖)로 가고 싶어.”

“섬호?”

“형님에게서 서신이 도착하면 섬호로 왔거든. 아주 오랜만에 한 번씩, 산하촌 사람이 섬호에서 오는 상인으로부터 서신을 넘겨받아 우리집에 가져다 주곤 했어. 그러니까 아마 섬호에 간다면… 그러면.”

​그러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라고 소년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나는 그의 말이 나를 향한 도움 요청이라는 걸 즉시 알아듣고도 대답을 망설였다. 내 임무는 서신을 전달하는 것까지였다. 잘 받았다는 답신 한 장이면 진작 끝이 났을 일이 두 사람의 죽음과 화재로 이어지고 말다니, 절로 팔자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섬호가 어디인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나는 다시 예의바른 척을 하며 투덜거렸다.

​“잘은 모르지만 승산(升山)이 있는 능주(陵州)의 중심으로 더없이 번화하여 하늘 아래 그런 곳이 또 없다던걸.”

“아하, 능강이 가로지르는 남도의 향기로운 고장을 말하는 거였군요.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어렴풋이 떠오르고 말고요. 장택에도 오가는 상인들이 능강을 따라 복숭아꽃이며 사과꽃 향기를 물씬 묻히고 들어오곤 했지요. 이야, 섬호라니. 섬호에 갈 일이 있을 리야. 저같은 촌 계집애가 무슨 섬호입니까.”

“같이 가 주지 않을래? 내가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아니오, 아뇨. 저는 우리 주공께 바칠 답신 한 장이면 됩니다. 송 장군의 동생분이신 연리 도련님께서 몇 글자 적어 주시지 않으렵니까?”

​말하면서도 이게 쉽게 풀릴 리 없다고는 생각 했다. 내 그간의 행로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섭능윤이 매단 그림자 같은 병사들을 질질 끌고 와서 이제 그런 감시도 끝났겠다, 싶었더니 보라. 일이 더 꼬이지 않았는가.

나는 검은 연기를 힐끔 올려다 보다가, 불이 더 번지지 않도록 벌레들을 불러 구름을 좀 빌려 오라고 일렀다. 벌레들은 지신에게 가서 하소연하고 지신은 또 더 높은 신령에게 읍소하였는지 이내 산등성이가 새카만 구름으로 뒤덮였고, 툭툭 비꽃이 피기 시작했다. 발치를 적시는 찬 기운에 발가락을 옴쭉거리자니 연리가 위악적인 목소리를 가장하여 이렇게 말했다.

​“못 써 주겠는데.”

“아니, 뭐라고요? 제게 왜 이러십니까, 연리 나리.”

“그도 그럴 것이, 송경성의 부모와 동생은 아까 저 집에서 죄 죽어 버린 거잖아. 그런데 죽은 송연리가 살아서 서신을 썼다 하면 그게 무엇이겠어. 너의 주공이 묻겠지. ‘자, 요양아. 이 서신을 적은 자는 어디 있느냐.’ 그러면 요양은 내가 불길 속에서 죽었으나 그 후에 몇 글자 적어 주었다고 답할 테야?”

“아이고, 이런. 몹쓸 도령 같으니라고.”

​기가 막혀 웃음이 샐샐 새어 나왔다. 연리는 새침을 떨면서도 꼭 쥔 두 주먹을 발발 떨어댔다. 빗방울이 눈물처럼 소년의 마른 뺨을 때렸다. 나는 검은, 한 치의 작은 빛도 새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한 비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밤은 끝날 테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 성 싶은 순간이었다.

​“섬호로 가서 어쩌시렵니까. 죽은 송연리가 섬호에 가서 송경성 장군의 서신을 보고 싶다 하겠습니까?”

“몰라. 모르겠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죽길 바라셨는데.”

​연리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기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싶어. 우리 형님이…. 형님이… 아니, 아무튼, 나는 알아야만 하겠어. 그러니 요양, 나랑 같이 가 줘….”

“송 장군의 서신을 보아 뭘 알고 싶으신가 모르겠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이제 돌아갈 길도 막혔으니 끝까지 가 보십시다. 송 장군의 서신을 본 후에는 꼭 송연리가 살았노라고, 살아서 요양에게 글월을 남기노라고 써 주셔야 합니다.”

“형님 서신을 보고 나면 내가 꼭 요양을 위해 글을 써 줄게.”

​기쁜 얼굴로 소년이 답했다. 나는 섭능윤이 붙인 병사들이 뒤를 밟아 나타나기 전에 잿더미가 된 촌집을 떠나야겠다 생각했다. 그들이 어차피 곧 나를 쫓아오고 말 테지만 잠시잠깐 길을 어지럽혀 섬호까지는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도 이제 앞으로 닥칠 일을 알지 못할러라.

이미 한 뼘 두 뼘으로 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정말로 곧 두더지가 될지도 모른다. 그네들을 죽인 것에 내 탓이 얼마쯤 들었을까? 상상하니 골이 지끈거렸다. 아니, 빌어먹을. 저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어 넘어진 걸 대체 날더러 뭐 어쩌란 말인가?

하나, 그렇게 따지자면 담 밖으로 던진 독을 주워먹은 이들부터가 내 탓이 아니다.

상천의 도리는 지엄한 것이며 하늘의 잣대는 엄격하여 일견 성겨 보여도 그물코를 잡아당기고 보면 빠지는 것 없이 걸려 올라온다 한다. 그놈의 그물코에 나라는 두더지 한 마리도 덥석 붙들려 올라갈 터인가, 아닌가. 내가 쌓은 공덕이 중천을 지나 상천까지 오를만 한가 아닌가.

​나는 원래 땅 아래 살았고, 나중에는 구름 틈새로 날아 올랐으며, 이제는 구름 위로 갈 셈이었다.

송연리를 데리고 섬호까지 가는 일은 내 부족한 공덕을 조금이나마 채워줄 것인가, 아니면 지금껏 있었던 온갖 재수 없는 일들처럼 또 내 뒤통수가 얼얼하게 만들 것인가.

​중천의 선녀에게도 장래란 섣달 밤처럼 깜깜한 것이렷다.

+++

그림자를 따돌렸으니 그놈들이 맴맴 헛다리를 짚는 동안 섬호까지 쏙 들어가 버리리라.

​…하고 작정한 것을 비웃기나 하듯 능강을 타기도 전에 추적자 무리에게 뒤를 잡히고 말았다. 능강 하류로 향하는 길목까지 가기도 전이었으니 동악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채였다. 담성의 경계에서 산은 점점 울울창창했고 날은 맑아 아주 먼 곳까지 훤히 보였는데 나와 연리는 웬 병사 복장을 한 무리들에게 둘러싸였으니 갑갑한 노릇이었다.

​“병사 나리들께서 무슨 볼일이십니까?”

​연리가 벌벌 떨면서 그저 빨리 놓아 보내 달라 빌었지만 나는 그 자들에게서 나는 장택 땅의 흙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섭능윤이 달아 보낸 그림자들 가운데 일부가 틀림 없었다. 아니면 그들로부터 사주를 받았거나. 주공이 도대체 뭘 바라서 서신을 들려 나를 동악까지 보내고, 또 무엇을 노려서 자기 수하들로 하여금 뒤를 밟게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나와 연리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묻고 답할 것 없이 예서 눈을 감거라.”

​한 사내가 거친 목소리로 말하며 곧바로 검을 높이 치켜 들었다. 왜냐. 왜 저 하잘것이 없는 어린애를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인가. 연리가 무엇인데. 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기에. 초조해하면서도 납작 엎드려 있던 나는 여러 자루의 칼날이 가을 빛을 반사하며 반원을 그리는 순간, 발딱 일어났다. 양 손에 냅다 흙을 움켜쥔 채로. 나는 야무지게 쥐고 있던 흙을 그들에게 흩뿌렸다.

​“어억!”

​예상하지 못한 반격에 놀랐는지 병사 한 사람이 칼을 떨어뜨렸다. 나는 그 칼을 주워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연리에게 외쳤다.

​“도망치시오! 어서! 어서!”

​여러 개의 칼날이 정수리 바로 위를 스치는 바람에 모가지가 선뜩했다. 팔자가 워낙 좋았는지 나는 칼에 맞지 않았다. 우리는 데굴데굴 구르듯이 산기슭을 내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몸이 날랜 병졸들을 낡아빠진 옷을 걸친 촌 아이들 두 사람이 어떻게 완전히 따돌릴 수 있겠는가. 나와 연리가 무사히 능강의 하구까지 당도한 것은 실은 내가 신통력을 쓴 덕분이다. 나는 몰래 지신을 불러 물 한 잔과 열매 한 줌을 바치면서 기원하고 벌레들을 불러 병사들의 눈을 공격하라고 이르기도 했다. 지신은 풀이라도 엮어 병졸들의 발을 묶어 주었다. 다 그 덕분에 나와 연리가 무사히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이 선행을 하늘이 높이 산다면 당장이라도 나를 높이 들어 저 구름 너머 보랏빛 궁전으로 데려가고도 남음이 있을 터인데, 아직도 몇 뼘이 모자란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한 뼘쯤, 한 티끌쯤 남아 넘칠듯 넘치지 않는 술잔처럼 찰랑거리고 있을 뿐인가.

나는 답답증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능강 포구가 있는 호포(湖浦).

섬호만은 못할 터이나 눈 돌아가게 번성한 마을이 들어섰고 넓직한 길목에는 이리저리 어지러이 세워진 주루며 여관이 보였다. 산더미같은 짐을 재주 좋게 실은 짐차가 지나가는가 하면 소떼가 연신 길을 가로질렀다. 비색 비단 옷을 떨쳐 걸친 한량들이 대낮부터 술에 불콰하게 취해 이 정자에서 저 누각으로 건너다녔다. 연리는 입을 헤 벌리고 벌레가 백 스무 마리쯤 들어가도 모를 듯한 멍청한 자세로 서서 주위를 휘휘 둘러 보기만 했다. 나는 연리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어디 좀 들어가서 목을 축이고 배를 채웁시다.”

“하지만… 사실 나는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연리가 부끄러움을 탔다. 나는 새삼스러운 소리에 혀를 차며 소매에서 한 꿰미의 동전을 꺼내 보였다.​

“내 한 턱 낼 테니 달아 두었다가 꼭 갚아 주십시오.”

“갚고 싶어도 나는….”

​소년이 말끝을 흐리다가 뭘 계산했는지 눈에 총기가 돌아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양에게 꼭 갑절로 보태서 갚을게.”

​붉은 등과 노란 등을 내다 건 누각으로 걸어가 빈 자리를 묻자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 두 개가 나와 연리의 몫으로 주어졌다. 나는 연리와 바짝 붙어 앉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탁자에서 미적지근한 국물을 나누어 마셨다. 사람들이 어린 여행객에게 관심을 보일 적이면 섬호에 사는 친척에게 몸을 의지하러 간다 이야기하는 걸로 족했다. 특출하게 아름답지도 특출하게 몸집이 커다랗지도 않은 두 사람은 이러저러한 동정의 시선을 잠깐 받았을 뿐, 긴 시선을 끌지 못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저편에서 상인인 듯 머릿수건을 하고 등짐을 짊어진 중늙은이가 다가와 끼어 앉으며 물었다.

​“이쪽은 요양이라 하옵고 저쪽은 연리랍니다.”

​송가라는 이야기를 삼갔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 여겨 솔직히 답했더니, 상인 사내는 연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런 이야기 아나?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 평씨 나라가 망할 적 이야길세.”

​이야기인 즉슨 이러했다.

평씨 왕조가 섰던 나라는 진나라라고 하는데, 그게 조그맣게 어디 끼어 있다가 이웃한 대국의 군세에 떠밀려 망하게 되었다. 그때 충성스러운 가령(家令) 부부가 왕손을 빼돌려 도망을 쳤단다. 나는 그것이 평 아무개 왕족의 후예라는 송경성 장군 이야기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연리만을 뚫어져라 보는 채로 입술을 싸구려 술로 축이더니 기름이 떠 있는 국물 한 숟갈을 떠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도망친 부부가 남쪽인지 서쪽인지 그도 아니면 동쪽인지 어딘가로 도망을 쳐, 산 깊은 골짝에 초막을 짓고 왕손을 금이야 옥이야 길렀겠지. 그 도련님이 살아 계시면 어디쯤이시려나. 요즘처럼 각지에서 깃발이 높이 서고 너나할 것없이 스러져간 나라의 대업을 잇겠다 떠들어대는 때라면 평씨 왕가의 자손도 한 자리 차지할 법 한데 말일세.”

“그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어르신은 그 귀한 왕손을 모셔간 이들과 아는 사이십니까? 친척이라도 되시는가요?”

​내가 묻자 사내는 꿈에서 확 깨친 것처럼 와르르 웃더니 덜 먹은 국그릇에 숟가락을 푹 꽂았다. 몸을 일으켜 등짐을 고쳐 매고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내게 한 푼을 건넸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아씨 혼자 뿐이니, 이걸 줌세. 이 주루 위층으로 가면 화 아무개가 술을 팔고 음률을 파는데, 아씨를 맞아줄 걸세. 가서 한 잔 얻어 자시게나.”​

사람들이 갑자기 시끌벅적 일어나며 자신도 이야기를 들었다, 너도 듣고 저이도 들었다, 하고 떠들었다. 화씨라는 누군가에게 공짜로 얻어먹을 기회였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내 손에 공으로 들어온 은전을 베풀어 공덕을 한 푼 더 쌓을까 했으나 그만 연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연리가 글쎄 비 맞은 개 꼴로 나를 돌아보고 있지 않겠는가. 배 부르고 국을 마시고 왜 저런 얼굴인가 하면서도 나는 딱한 마음에, 그를 향해 손짓하고 말았다.

​하기야 먹다 남은 밥을 흘려 준대도 우선은 내 탁자 아래의 개에게 주어야 옳지 않겠는가.

+++

화씨는 화백영(華白瑛)이라는 고운 이름의 여인네였다. 나는 그 여자와 눈을 맞추는 순간 구름 너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랬다. 백영은 서늘한 흰 옥 팔찌를 몇 개나 팔목에 걸고 흐늘거리며 악기를 연주하면서도 적강 선녀의 풍격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여자였다. 백영은 금사 은사에 진주와 산호, 밀화를 꿰어 만든 대삼작 노리개를 걸고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낀 채 비단 보료에 기대 앉아 있다가 나와 연리를 맞아 주었다. 그녀의 기름한 눈매가 봄날 나비가 팔랑대듯 깜박깜박 거리면서 연리를 보다가 자기 시비를 불러 한 상 거하게 차려 내 오라 일렀다.

백영은 연리에게 밥상을 차려주고는 나를 내실로 불러 앉혀 싱글거리며 물었다.

​“상천은 아니고 어디 중천에서 내려 오셨는가? 보아하니… 뭐 토끼거나 그 비슷한 무엇일 테지?”​

하필 토깽이 취급이라니. 나는 속이 상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이래 봬도 두더지라오.”

“호오… 두더지라니, 각지를 돌며 누십 년 장사를 해 먹었지만 두더지는 또 처음이로군.”

“두더지가 등선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님이야. 그보다, 적강 선녀께서 이리 사치하심은 무슨 연유인가? 상천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야?”

“한 치 쌓고 돌아서면 흐르는 땀이 식기도 전에 두 치 깎여 나가는 것이 이 속세일진대,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지? 선한 도리를 따르기란 바늘 밭을 맨발로 거니는 것처럼 어렵고 제 아무리 피 흘려 도를 얻는대도 한 번 부는 봄바람에 십 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십상. 그러니 겨우 얻은 좋은 시절을 아니 즐기고 무엇하리오?”

“하지만 나는 한 뼘이고 두 뼘이고 재빨리 채워서 저 상천으로 기어 오르고 말 것이야!”

“저런. 저런. 내 여기 앉아 헛된 꿈을 꾸는 도사 나부랭이를 백이고 천이고 실컷 보았소만 그중 누구 하나 저 구름 너머로 가지 못하더군.”

​백영은 담뱃대에 불을 붙여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더니 백옥 팔찌로 장식한 팔을 내게 뻗었다. 속이 비쳐 보이는 물항라 저고리가 붉은 등불빛에 온갖 색으로 반질거렸다. 내실의 비단 문 너머에서 교묘한 음률이 거품처럼 흘러 넘쳤다. 나는 그만 정신이 혼곤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지 말고 예 남지 그러나, 두더지 아씨. 자네도 이 황금의 강에 발을 담글 수도 있다네. 참고 견디어 굳이 풍찬노숙을 택한들 홍진의 삶이란 구차한 법. 필시 자네가 지을 죄와 내가 범한 죄가 다르지 않을 것이니, 구태여 갚아 보려 용을 쓰다 다 허물어 맨손으로 똥밭을 구르지는 말게나. 장담하지. 고난을 감수함은 오직 두 손과 두 발을 거칠게 할 뿐이란 것을.”

​백영의 말은 마침맞았다. 나는 섭능윤의 곁에서 공을 세워 보려다 운수가 나빠 벌써 몇 사람이나 되는 목숨을 잃었다. 차라리 술잔을 벗삼아 능라주단에 파묻혀 세월을 허비했다면 피를 볼 일은 없었을 것을.

​“육씨가 망한 진군주 이야기를 했다지. 평씨 왕가 말이야. 그러면서 자네를 내게 보낸 건, 두더지 아씨가 거느린 저 꼬마가 그와 관계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지. 영락한 왕손이 기를 쓰고 높이 오르지 않으면 도처에서 창칼이 날아들게 마련인데 자네는 그걸 감수하면서도 저이를 살리려는가? 언제까지? 그러면서 죄를 더 짓지 않을 자신은 있으신가? 권력이란 더러운 것일세. 어찌해도 피투성이로 구르게 되어 있지.”

“영락한 왕손이라니. 뭐 잘못 알고 계시군 그래. 평 어쩌고 하는 작자의 아드님은 벌써 창칼을 드리우고 군공을 높이 쌓고 계시지. 연리는 그저 촌부가 키운 어린것에 불과해.”

“글쎄…. 자네는 모르는가? 자네 말대로 송경성이 벌써 열 여섯 방위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지. 하여 천하 영웅을 자처하는 섭가가 그를 높이 쓰겠다고 다짐했다 들었어.”

“그렇지. 연리는 형님의 군주가 저를 같이 불렀는가 하고 설레더군.”

“저런.”​

백영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름답게 단장한 손끝으로 제 미간을 눌렀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모르겠는가? 두더지 아씨. 평가위의 가령이 왕손을 품고 도망쳤지. 그런데 여기는 두 아들이 있다… 그걸 진정 모르겠느냔 말이야. 가령 부부는 왕손의 친부모가 아니었지. 그들에게 천하 영웅 밑에서 군공을 세워 언젠가는 왕후장상이 될지도 모를 장군이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 보게, 선녀 나리.”

​나는 영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담뱃대에서는 연기가 연신 퐁퐁 올라오고 음악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쯧쯧. 자네는 속세의 일에 아직 밝지 못하니 두루 상처를 입겠구려. 역시 다 그만두고 예 남는 것이 어떤가? 나쁘게 대하지는 않음세.”​

선녀의 말이 그럴듯하다.

남아서 영화를 누리는 편이 차라리 덜 잃는 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연리는….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연리는 어떡하나?

​“요양! 요양, 이만 가자!”​

연리가 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주렴이 사방으로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혼곤하던 나는 황량몽에서 깨어난 옛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가야지. 가야하고 말고.”

​온갖 세속의 사치스러운 것들에 파묻힌 채, 백영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백영이 남으라 하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남아선 안 되지. 어서 가야지’, 하면서 연리를 따라 길을 떠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능산이 멀찍이 보일 즈음이 되니 나는 슬슬 몸이 근질거렸다. 이건 다 생각할 시간이 넉넉한 탓이었다. 백영이 내어 준 뱃삯 덕분에 나와 연리는 몸 편안하게 능강을 따라 섬호까지 당도할 수 있었고, 덕분에 뱃전에서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시간이 차고 넘쳤던 것이다. 여유롭게 정신이 산란하니 무엇이 떠올랐겠는가.

본전이다.

나는 자꾸만 백영의 말을 곱씹게 되었다. 나는 본전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내 앞에 내가 어찌하지 못할 죽음이 나뒹굴면 어쩌나. 아예 손 쓸 방법도 없이 두더지가 되어 진흙 사이를 파헤쳐야 하는 게 아닐까.

해서 나는 곧장 섬호로 들어가지 않고 괜히 능산 기슭을 배회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졌다. 이대로 연리는 섬호로 가고 나는 능강을 따라 돌아가 백영의 주루에서 신세를 지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솟았기 때문이다.

섬호는 코 앞이었다.

연리는 무사히 섬호에 들어 자기 형님의 서신을, 물론 그것이 거기 있다면 말이지만, 하여간에 그 골치덩어리를 손에 넣을 터다. 그러는 사이 지치지 않고 쫓아왔을 그림자에게 목숨을 잃거나 발이 걸려 넘어져도 내가 곁에 없기만 하다면 내 탓은 아닐러라. 이치를 따져 봐도 그것이 옳다. 괜한 연을 맺으면 괜한 진흙만 튀어 옮겨 붙는 법. 나는 연리를 버릴 작정이었다. 섬호 앞에. 섬호가 훤히 바라 보이는 능강 포구, 능산 기슭에.​

​하면 어떻게 연리를 버릴 것인가?

자, 이제 인연이 다하였으니 두더지와 인간이 각자 길을 가자,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나저제나 틈을 엿보았다.

​‘할 만큼 하였으니 연이 다하면 과연 별래무양이려느니.’

​마음을 먹고 보니 한시가 여삼추, 걸음걸음 어찌나 무거운지 당장이라도 ‘에라, 나는 더 못 가겠다’ 하며 드러눕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드디어 때가 왔다.

바로 그림자였다.

섭능윤이 연리를 죽이라고 보냈던 무리가 지치지 않고 능산 기슭까지 쫓아왔던 것이다. 나는 익숙한 군장을 짊어진 무리를 보자마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놈들을 끌어들여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막아내면 공은 내 몫이 되고 연리는 홀로 도망쳐, 섬호로 갈 것이다. 완벽한 결말이 아닌가. 연리의 눈에 나는 추적자 무리를 막아내고 목숨을 잃은 은인이 될 터이니까. 아무렴, 은인이고 말고. 나는 슬쩍 신통력을 발휘해 두더지로 돌아가 흙 아래 숨을 작정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감춘 채 새침을 떨며 연리에게 말했다.

​“가시오, 연리 나리.”

“하지만… 요양! 전처럼 같이 도망치자! 나도 흙을 뿌릴 수 있어!”

“같은 방법에 두 번 당할 만큼 호락호락한 무리가 아닙니다. 이 요양,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연리 나리를 지키고 죽을 뿐이니 그저 나리가 오랫동안 이몸을 기억해 주시면 족하겠습니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요. 어서 가세요!”

​나는 연리를 반대쪽으로 힘껏 밀어내고 추적자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이것 참 기똥찬 발상이 아닌가.

한 번 목숨을 구해주고 죽어버린 동행으로 남으면 그만이 아닌가. 죽은 척 흙 사이에 묻혀 두더지로 남았다가 다시 요양으로 변해 희희낙락 누각으로 돌아가 술잔을 기울인다면 그 어찌 아니 통쾌하리.

신이 난 나와 달리 연리는 흙더미 풀더미 위를 두르며 봉두난발을 한 채로 멀거니 이쪽을 바라보다가, 어둡고 축축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그러다가 화다닥 꽁지에 불 붙은 개처럼 달렸다.

뛰어 내려갔다.​

‘그래, 가라. 가.’

​나는 시원섭섭했다. 왜 섭섭한 지 몰랐다. 그새 정이 들고 말았는가? 하여간에 연을 맺는 일은 이래서 위험하기 그지 없다. 나는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가라, 연리야. 어여 가. 멀리 가라. 네가 산을 내려가고 나면 내가 벌레떼를 불러 추적자들의 발을 한 번 마지막으로 묶어 주마. 그리고 나는 두더지가 되련다. 잠시 두더지 모습으로 돌아가련다. 따뜻한 흙 아래가 백영의 내실만큼 안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 눈에 불그스름하게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헛것을 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연리였다.

연리가, 색이 다 빠진 옷을 걸친 흙투성이 송연리가, 쏜살같이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손에 어디서 주웠는지 길다란 막대기 하나를 쥐고 아주 비장한 동작으로 달려들어 추적자들에게 몸을 홱 던졌다.

​“네가 죽으러 왔구나!”

​추적자가 기뻐 외쳤다.​

“그렇소! 죽겠소! 한낱 어린애를 죽이러 오는 이들이 어찌 천하를 논한답니까? 내 목숨을 잃더라도 귀신이 되어 당신네들 주인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세상에 두루 알릴 것이오!”

​기백이 좋다고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단단한 것과 무른 것이 부딪히면 무른 것이 뭉개지고, 큰 것과 작은 것이 부딪히면 대개 작은 것이 부서지게 마련. 연리는 철저하게 짓뭉개지는 쪽이었다. 추적자의 칼이 연리의 어깨를 꿰뚫었고 그들의 발이 연리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는 도중에도 연리는 두 팔을 뻗어 몽둥이를 휘둘렀고 또 나의 몸을 감싸 자기 품에 넣어 주려 애를 썼다. 요양, 요양, 그가 어린 새가 어미를 찾듯 울부짖었다.

​“요양을 때리지 마시오!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지 말란 말이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리석은 것.’​

이 얼마나 어리석은 어린 것이란 말인가.

송연리가 어찌 나를 구하러 돌아왔는가. 내가 무엇인데. 내가 누구인데. 너는 내가 두더지인 것도 모르고. 선녀인 것도 알지 못하고.

나는 이것저것 가릴 새도 없이 벌레떼를 불러들여 추적자들의 발을 묶고 시야를 가렸다. 벌레들이 왱왱거리면서 이리저리 구름처럼 몰려다녔다. 그러는 동안 연리는 떠밀려 깎아지른 언덕배기에서 데구르르 굴러떨어져 돌밭에 사지를 비튼 채 쓰러졌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는가?

나는 열이 펄펄 올라 사지를 비틀고 다 죽어가는 아이를 들쳐업고 섬호로 갔다. 섬호로 달려가 의원을 외쳐 찾자니 때마침 의원 노릇을 하는 여우가 하나 곰방대를 물고 저자에 나섰다가 나를 보고는 손짓했다. 손님이 올 줄 알았다는 투다. 망설일 새도 없이 여우의 뒤를 따라 달렸다. 땀을 뻘뻘 흘리는 내 곁에서 벌레들이 쟁쟁 귓가를 맴돌았다.

​“운이 좋습니다, 선녀 나리.”

“여우들은 꾀가 신통해서 무슨 병이든 잘 고친다더이다.”

​내 신통력으로는 연리를 다 고칠 수 없었다. 여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우는 연리를 이불 위에 길게 눕히고는 부러진 뼈를 맞추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거 아주 박살이 났구만.”

“선녀가 어쩌다 이런 꼴을 당했는지 묻지 않소?”​

내가 도리어 먼저 말을 붙이자 여우는 성가신 소릴 한다는 양 손을 홱 저었다.​

“대처에 살면서 상천의 손님도 수두룩하게 보았는데 중천의 선녀 나부랭이야 뭘.”​

나는 자존심이 적잖이 상했지만 여우가 연리의 뼈를 열심히 맞추며 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고 입을 꽉 다물었다. 여우는 충충 걷어 붙인 소매로 자기 관자놀이를 훔치더니 내게 대놓고 요구했다.

​“공덕을 좀 떼어 줘야 약을 쓰지. 그쪽 같은 중천의 선녀 공덕이야 빤한데 그걸 좀 받고 약을 쓰면 내가 손해요, 알겠소?”

“손해 날 손님을 왜 받소?”

“의원이 죽어가는 환자를 외면해, 그럼?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릴 다 듣네. 해서, 공덕을 내 놓겠소 아니 내 놓겠소? 나야 아무래도 좋소만 그래서야 이 환자는 살아 일어나질 못할 게야.”

​그런 소리를 듣고도 발을 뺄 순 없었다. 눈 앞에서 또 시체가 나가는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연리다. 연리인데. 연리라서 그게 뭐? 나는 혼란스러워 눈을 꾹 내리 감았다가 한참만에 침음하며 겨우겨우 답했다.

​“알았소. 공덕을 쪼개 내 놓을 테니… 연리를 살려 주시오.”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캥!”

​여우는 처치가 다 끝난 후 연리를 무명천으로 둘둘 감아 무슨 고치처럼 만들어 놓곤 환자 곁에서 곰방대를 척 꼬나 물었다. 그리고는 별 반 관심도 없는 척 한 것 치고는 내 하소연이며 그간의 일을 제법 열심히 주워듣고는 갑자기 캥, 하고 웃었다. 그냥 캥, 도 아니라 캥캥캥 아주 박장대소를 했다.

​“아이고야, 송경성 장군의 서신을 받으러 왔어? 아이고, 참. 그게 그쪽이었구만. 아무려나… 아주 헛걸음을 했네 그래.”

“헛걸음이라니?”

“배를 타고 섭호로 왔으면 화백영을 못 만났는가? 바로 그 화백영이가 소식통이니 서신을 가지고 있었을 걸세. 한데 아무 말 없이 자네들을 예까지 실어 보냈구만. 몹쓸 사람 같으니라고.”

​나는 앞이 캄캄해서 그만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백영이 어찌 그랬을까?”

“달라 하지 않는데 뭘 내줄 턱이 있나. 장사치 하는 일이 다 그렇다네. 오히려 자네들 향한 곳을 추적자들에게 팔아 먹었겠지.”

“그건 죄를 더하는 길인데.”

“홍진에 발을 묻고 사는 것이 다 죄를 더하는 길이야.”

​여우는 이미 두 발이 진흙에 푹 파묻히고 나면 거기 한줌 흙을 더한들 능강에 배 지나간 듯 무슨 표시도 나지 않는다며 흥흥 웃었다. 그리고는 연리를 치료하면서 꺼내 두었던 구겨진 서신을 펼쳐 멋대로 한 번 슥 훑더니 곰방대로 재떨이를 내리치며 외쳤다.

​“평경위의 자제분이었구만!”

​그게 대체 뭐 어쨌다고 여기서 난리 저기서 난리인가. 따지고 보면 일의 시말이 다 그것이다. 송경성 장군이 평 어쩌고의 아드님이며 진나라의 왕손이라는 것.

​“그래. 그렇다더군. 송 장군이 평 어쩌고의 아드님이란 말씀이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여우는 또 캥, 했다.

​“그게 아니야. 중천의 선녀께서는 멍텅구리로군.”

“뭐야?”

“왜 저이가 쫓기고 왜 저이의 부모라는 이들이 죽음을 택했겠는가.”

“왜 택했는데?”

“아이고! 참.”

​여우는 곰방대를 아주 멀리 치워 놓고는 팔짱을 딱 끼고 앉았다. 콧가에 기른 삐쭉한 수염을 보란듯이 쓰다듬으며 여우가 풍성하게 자란 눈썹 아래, 사람을 가장하여 갈아 낀 누런 눈깔을 번뜩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게. 왕손이라면 공을 세워 일국의 왕이 될 지도 모를 일. 그러나 촌부의, 혹은 기껏해야 망한 집안 가령의 아들이라면 어떨까. 제 아무리 공을 세워도 하늘이 영웅을 위해 내린 칼 한 자루 취급을 받지 않는단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인가. 이 서신을 받았을 때 촌부들은 생각했을 걸세. 아, 우리 아들이 왕손인 걸로 할 수 있겠구나. 저 진짜 왕손이 아니라 우리 아들이!”

“진짜… 왕손…?”

“저기 누워 죽을 날 받아 놓은 어린것 말이야.”

“연리는 안 죽네!”

“하이고, 그래 안 죽소. 안 죽어. 팔이나 나리 한두 개쯤 못 쓰겠지만 목숨이야 꽉 붙어 있겠지.”

​내 공덕을 깎아 내놨는데 어찌 그렇단 말인가 따지자 여우는 살려 놓은 것만 해도 신의라고 두루 불릴 만 하다면서 되려 큰 소리를 쳤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어떻단 건가. 결국은 뭔가.

송연리가 송가가 아니라 평가이며 진나라 왕손이다.

송경성은 그대로 송씨로, 진나라 가령의 아들이다.

가령 부부는 군주의 자식과 더불어 자기 자식을 키워내어 세상으로 놓아 보냈는데, 자식이 무명을 떨치기 시작하자 기대를 품었다. 이대로라면 제후가, 아니, 왕이 될 수도 있다. 전란의 시대에 아들은 하늘의 점지를 받았다. 그러나 평범한 어느 촌부의, 혹은 망국의 가령의 자제라면 그걸로는 이름을 떨치는 데 한계가 있다.

만약 아들이 가령의 자제가 아니라 왕손이라면….

왕손인 걸로 친다면….

​“…사실을 아는 이가 죽어 사라지면 되는 일이라고 여긴 게야. 송 장군의 주공이 보낸 서신은 그걸 약조한 거나 다름 없네.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아들을 평가위의 자제로 믿어 주겠다고.”

“겨우 그걸 위해 죽는다니. 겨우 그것 때문에 연리를 죽이려고 든다니.”

“어느 영웅 곁에 진나라를 잇겠다느니 진나라의 유지를 받들어 왕손을 모시겠다느니 하며 모여 든 이들이 수백이나 된다더군. 거기 어린애가 하나 이제와서 끼어들면 곤란한 거지.”

​나는 누워있는 연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명천에 뒤덮인 얼굴에서 눈 한쪽만 드러나 있었다.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푸르스름한 눈썹에 물기가 맺혔다가 이윽고 굴러 떨어졌다.

홀린듯이 내 목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송 장군이 그걸 알았겠는가.”​

송경성도 그것을 아는가.

송경성은 그것을 이해했는가.

송경성마저 그것을 원하는가.

​그렇구나. 연리는 그걸 알기를 바랐기에 형님의 서신을 필요로 한 것이다.

​​

+++

 

송연리는 과연 죽지 않고 살았다.

한참만에 눈을 뜬 연리는 시야가 가물거리는지 한참이나 누워서 깜박깜박 거리다가 나를 돌아 보고 겨우 웃는 얼굴을 꾸며냈다.

​“요양…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 산중에서 대체 누가 연리 나리를 짊어지고 내려온 줄 아십니까? 소인까지 다쳤더라면 두 사람이 모두 능산 기슭의 외로운 뼈와 먼지로 흩어질 뻔 했지 뭡니까.”

​연리는 깨어났지만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특히 그의 오른 발은 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걷는 연습을 한참이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리는 벽을 짚고 조심조심 걷다가 의지할 것이 없어지면 영락없이 고꾸라지길 반복했다.

​그래도 살았으니 요행한 일이라고, 여우의 의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떠들었다.

여우는 섬호에서도 아주 잘 나가는 의원이었고 자기 말마따나 신의라 불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좋을 만큼 머물다가 가시오. 한데, 꼬리를 붙이고 온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워 하긴 했지만 그림자가 따라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능산에서 연리가 영영 죽은 줄 알고 장택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아무튼 영원히 여우 신세를 질 순 없었다. 연리부터가 형님의 서신을 꼭 봐야겠단 의지가 강했다.

그는 막대기를 짚고 춤추듯 휘청휘청 일렁일렁 제법 걸을 수 있게 되자, 나를 재촉해 백영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나는 그 동안 여우의 의원 일을 거들어 주면서 박하디 박하나마 몇 푼 더 손에 넣었기에 그걸 뱃삯으로 쓰자고 내 놓았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백영에게 가서 서신을 받고 나면 헤어지는 거요.”

“그래. 도와줘서 고마웠어, 요양.”

​연리는 그 사이 부쩍 어른이 된 것처럼 의젓하게 굴었다. 대처에 나가 보고 싶어하던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섬호의 화치스러운 풍경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국인들이 재주를 넘고 커다란 짐승들이 산더미같은 보물을 끌며 나아가도 입을 헤 벌리기는 커녕 조용히 벽 쪽으로 피해 설 뿐이었다.

​‘가여운 녀석.’​

나는 여우에게 들었던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혀만 찼다.​

나와 연리는 다시 배를 타고 하구로 내려갔다. 배가 뜨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별 일이 없어 안심했다. 백영에게 돌아가는 길은 섬호로 오는 길보다 안락했고 백영을 다시 만나 서신을 받는 일도 손 쉽기 그지 없었다.

백영은 여전히 사치스러운 것들에 파묻힌 채 내실에서 빈둥거리는 중이었다.

​“왜 진작 송 장군의 서신이 자네 손에 있다 말하지 않았어?”

​묻자, 백영은 과연 파초 잎에 맺힌 이슬처럼 곱게 웃으며 붉은 입술을 벌려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묻지 않는 걸 왜 내 놓아야 하지? 괜한 인연은 탈이 날 뿐인 것을.”

​나는 서신의 내용을 보지 않고 고스란히 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연리는 능강 포구에 앉아 서신을 무성의하게 펼쳐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곧 두 번 읽었다. 한참동안 그는 흐르는 물결을, 그리고 물살이 포말을 일으키며 포구에 맨 뱃전에 와 부딪히고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웃는 듯 마는 듯 오묘한 얼굴로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역시 형님이야.”

​그리고 서신을 휙 하고 흐르는 능강 물결에 던져 버렸다. 해서 나는 송경성이 서신에 뭐라고 적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약조했지. 마지막이라고…. 요양, 약조대로 답신을 써 줄게.”

​연리는 답신을 써 줄테니 가지고 형님과 형님의 주공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너에게 갑절로 은전을 갚으라고 적을 작정이야. 그러니 너는 내 형님께 가서 빚을 받아.”

​내 형님이라. 과연 송 장군이 연리의 형님으로 남아 있긴 한가. 나는 온갖 질문을 감추고 세상사 일 따위 하나도 모르는 두더지 꼬마처럼 의뭉을 떨었다. 연리가 거친 종이를 얻어 답신을 썼다. 요양이 얼마나 귀한 도움을 주었는지, 송연리가 어떤 신세를 졌는지, 소박하지만 구구절절하게. 인지상정이 있고 보면 연리의 서신을 보고 눈물 흘리며 열 푼이고 스무 푼이고 갚지 않곤 못 배길 터였다.

​그리고 우리는 작별했다.

포구에서.

능강의 상류로 향하는 배들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길게 자란 갈대가 맞바람에 눕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와 연리는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는 백영의 주루를 지나 한참을 더 걸었다. 이대로 끝이다. 이제 나는 연리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아도 좋다. 이제 나는 임무를 다하여 주공에게 돌아가, 과연 천하 영웅의 일에 힘을 보탠 일이 얼마쯤 내 몫으로 떨어질지 가늠해 보기만 하면 된다.

​나는 한 번 휙 돌아 보았다.

저편 언덕배기로 연리가 비틀거리며, 어깨를 아래위로 흔들어 대면서, 춤을 추듯이, 덜 불편한 다리 쪽에 힘을 싣고,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다. 비틀린 발이, 소년의 낡은 옷자락이, 이내 동그란 수박같은 머리꼭지가, 점점 언덕배기 너머로 사라졌다.

​툭, 툭, 빗방울이 발치에 떨어졌다.

비꽃이 요란하게 피었다.

나는 몇 번이나 돌아보다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 다음 몇 리를 더 걷다가, 그러다가 비가 완전히 거세져서 시야가 새카매진 후에야 몸을 되돌렸다.

돌아서서 달렸다.

​연리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연리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어째서?

나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없었다. 공교롭고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두더지의 지혜가 아니라, 선녀의 앎도 아니라, 그저 비가 내리면 비를 죄다 맞아야 하는 인간의 이지로 깨달았다. 연리는 죽으려는 것이다.

그 초막에서 원래 그랬어야 했던 것처럼 죽어 사라질 작정이다. 그가 형님을 용서했는가? 그가 형님을 이해했는가? 형님은, 천하의 명장이라는 송경성은 자기 주공과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가? 동생이 죽기를 바랐겠는가? 그 어떤 해답도 상관 없이 연리는 모든 것을 다만 알길 바랐다. 알았으니 이제 죽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발이 미끄러지면서 달렸다.

다시 포구가 보였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죽으러 가는 연리가 보였다. 빛 바랜 등짝이. 강물에 허리까지 잠긴 채로 빗방울이 시작되는 방향을 올려다 보고 멍하니 서 있는 한 사람의 소년이.

​연리야.

​나는 외쳤다.

​연리 나리.

​나는 달렸다.

​죽지 마라, 연리야. 살아라. 살자꾸나.

​더 이상 눈 앞의 시체를 늘릴 수 없기 때문조차 아니었다. 나는 연리를 살려야 했다. 연리가 몽둥이를 들고 나를 위해 달려와 나를 자기 품에 꼭 끌어 안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죽으러 가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나는 연리가 죽는 것을, 연리가 폭우 아래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두 발은 진흙으로 더러워졌고 내 두 손은 생채기로 뒤덮였다.

나는 한때 흙 아래 살던 두더지였고 얼마 전에는 구름과 구름 틈새에서 유영하는 선녀였으며 원래는 구름 너머 보랏빛 궁전으로, 상아와 자개로 만든 아름다운 달 층계로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구름 아래에. 쏟아지는 폭우 속에 서 있다. 다시는 홀로 구름 위로 가지 못하리. 다시는 구름 위에서 내리는 비를 무심히 바라볼 수 없으리. 비 속에 연리가 있으니. 폭우 아래에 연리가 서 있으니.

​“요양, 대체 왜 돌아왔어? 왜 요양이….”

​연리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부르르 떨었다. 나는 추적자들을 향해 온몸으로 덤벼들던 연리가 그러했듯이 이번에는 내 품에 연리를 꾹 들이밀었다. 어깨에 닿은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사방으로 물막이 쳐진 듯 비가 내렸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왜 요양이, 요양만이 나를 구하려고 해?”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연리 나리… 연리야. 나하고 살자. 같이 살아서 앞으로 가자.”

​쫓아오는 추격자들이 보였다.

빗방울의 세찬 기세 때문이 아니라 달리는 말발굽의 진동으로 지면이 울렸다. 시야는 검었고 막막했으며 영원한 밤이 시작되어 다시는 벗갠 하늘이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무자비하게 비가 쏟아졌다.​

“왜 살아야 하는데, 왜? 내가 없는 편이 좋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형님께도, 내가 없는 편이….”

​연리가 집어던진 서신은 이미 물길을 타고 산산이 흩어져 먹으로 새긴 글자 한 자 남지 않았다. 사람의 글월이란 겨우 그런 것. 돌에 새긴 맹세도 세월이 가면 바스라지는 법. 나는 연리가 내게 남긴 서신을 꺼내 기름을 먹이지 않은 탓에 너덜거리는 그것을 억지로 펼쳐 내밀었다.

​“내게 신세를 졌다고 하지 않았어, 연리. 연리야. 그러니 살자.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디라도 가서.”

“나는… 나는…!”

“연리야.”

​나는 연리를 끌어 얼른 버려진 쪽배에 실었다.

​“살아라. 사는 거다.”

​그리고 이제는 몇 마리 응답하지 않는, 거의 나를 떠나 버린 벌레들을 목놓아 불러 뱃전을 밀어 달라 청했다. 지신에게. 강의 신에게. 세상의 모든 빗방울 아래의 생물에게 연리를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빗속에서 노를 저었다. 왜 살아야 하는데. 연리가 물었다. 수십 년 수행을 한 두더지도 그걸 모른다. 눈 밝은 구름 위 선녀들도 그것을 모를 터였다. 나는 흙 아래에서 수십 년을 보냈고 구름과 구름 틈새에서 또 수십 년을 보냈으며 이제는 땅 위에서, 구름 아래에서, 진흙에 발을 적신 채 살아갈 작정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왜 내가 폭우 속에서 돌아서서 달렸는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나는 힘껏 노를 저어 배가 물살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안개 너머 그림자들이 보였다. 불룩불룩 솟은 어깨 무리와 벌떡거리는 등판들이 보였다. 그들이 포구에 발이 묶여 이쪽을 멀거니 바라보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나아갔다.

​하하.

​작게 웃음이 터졌다. 연리는 몸을 웅크리고 뱃전에 등을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살자, 연리야. 살자꾸나.

​나는 연리에게 자꾸만 말을 건네면서 점점 더 떨기 시작한 그 연약한 육신과 함께, 내 눈썹에서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조금씩 조금씩 능강 저편으로 나아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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