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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엄고아

 

주서(周書:중국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대방(帶方)에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방은 우리나라 중부지방을 대략적으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구태라(仇台羅)입니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암파고어사전(岩波古語辭典)’에서 구다라를 찾으면 백제슬, 구태량고도(百濟瑟, 久太良古度)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구태(久太)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일본의 구태(久太)와 중국의 구태(仇台)는 동음이의어입니다. 일본어로는 똑같이 구다(くだ)라고 발음합니다. 여기에 땅을 뜻하는 량()과 라()가 붙고 일본어로는 라()라고 발음하게 됩니다. 결국 일본과 중국에서 말하는 구태는 같은 인물을 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태는 우태와 소서노의 장자입니다. 우태가 죽고 소서노가 주몽과 혼인한 후 주몽이 예전에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리를 태자로 세우자 구태가 동생인 온조와 함께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습니다. 결국 구태는 비류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낙싱은 홀로그램에 한국, 중국, 일본의 오래된 역사서를 띄우며 설명했다. 낙싱이 역사서의 해당 부분에 동그라미를 쳐 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하는데도 나는 좀처럼 낙싱의 설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흔들리고 노이즈가 낀 데다 화면 일부가 깜빡이는 홀로그램이 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발음의 유사성만으로 인물을 정의한 것 같군. 오늘 발표를 처음부터 쭉 훑어보면 자네는 중국, 일본의 역사서도 많이 찾아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설(異說)까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한 수고가 눈에 보이네. 하지만 한자의 음훈을 멋대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 자네 방식으로 하자면 온조(溫祚)의 이름도 을 순우리말 백(100)으로 치환하고, ‘는 한문 그대로 왕조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 , 백가(百家)의 왕조를 세운 시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 내 의문점은 백제인은 자기네 나라를 구태라라고 부르지 않고 백제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야.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좀 더 연구해 보게. 그리고 연구하는 김에 일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나오는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자네는 구태를 우태의 아들이며 비류와 동일 인물이라고 설명했는데 주서에는 우태와 구태를 동일인으로 말한 기록도 있어.”

교수님! 중국 수서(隋書:중국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를 보면…….”

낙싱이 다시 열띤 설명을 시작하려는데 내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고대를 다룬 역사서는 한자와 우리말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을 따서 쓰기도 하고 뜻을 따서 쓰기도 하지. 후대의 우리는 음과 뜻을 모두 고려하면서 해석하고 주변 국가들의 역사서와 교차 검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물론 자네가 이만큼 연구한 결과를 보면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네. 하지만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실을 함부로 추측하는 건 좋지 않아, 용납할 수 없어. 일단, 오늘은 자네가 중국과 일본 역사서에 나오는 두 개의 구태가 같은 인물이라는 연구 결과를 갖고 왔으니, 다음번엔 주서에서 말하는 구태와 온조가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연구해서 가져와 보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추론하고 검증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말을 마친 후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었다. 낙싱이 거실에서 사라졌다. 낙싱의 졸업논문 주제는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는 게 타당한가?’였다. 논문을 위해 낙싱은 대학생 수준을 능가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중국, 일본의 역사서까지 뒤져가며 열심히 하는 그 열정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내가 낙싱의 연구 자세에서 불만스러운 점은 한문으로 기록된 옛 문헌들을 음역(音譯)과 훈역(訓譯)을 오가며 제 입맛에 맞춰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낙싱의 잘못된 자세는 지도교수로서 내가 마땅히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특히, 낙싱처럼 노력하는 학생은 잘 다듬으면 훌륭한 역사가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사명감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낙싱과의 연결을 서둘러 끊은 이유는 바로 고장 난 홀로그램 모듈 때문이었다. 안정되지 못하고 울렁거리는 홀로그램은 내 집중력을 흩뜨릴 뿐만 아니라 짜증까지 치밀어 오르게 했다. 계속하다간 낙싱에게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저걸 언제 설치했더라?’

홀로그램을 설치한 게 언제인지 기억해 보려했지만 당최 떠오르지 않았다.

지니!”

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홈케어 시스템을 불렀다.

, 주인님!”

지니가 대답했다.

홀로그램 AS.”

홀로그램 AS를 신청하겠습니다.”

몇 초간 조용하던 지니가 신청 상황을 보고했다.

내일 오후 두 시 방문 가능합니다. 예약할까요?”

예약해.”

내일 오후 두 시, 홀로그램 AS 기사 방문 예약했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내일 병원은 오전에 가는 거 맞지?”

오전 열 시까지 가시면 됩니다. 차는 아홉 시 반에 오기로 했습니다.”

알았어. 지니 쉬어.”

, 주인님.”

지니가 조용해졌다. 홈케어 시스템의 이름 지니는 내가 어렸을 때 본 영화 알라딘에서 따 왔다. 영화 속 램프의 요정 지니를 본 이후로, 하는 일이 막힐 때마다 내게 지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른이 되고 집안에 관리시스템을 구축한 후 시스템 이름을 지니로 지었다.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도록 세팅하니 램프의 요정이 옆에 있는 것 같은 즐거운 착각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니를 부르면 시스템 지니의 통제를 받는 로봇 지니가 가까이 오기도 한다. 지니를 집에 들인 지 오십 년은 넘은 것 같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것들은 모두 정확하지 않다. 굳이 정확히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기억력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다. 오늘 남은 일정을 기억하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다.

뇌도 바꿔야 하나?’

나는 처음 치매 치료를 받은 게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다. 60대 초반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치매의 위험이 있다는 결과를 받고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오십 년 정도 수술 없이 약물치료만으로 치매를 다스려왔다.

이젠 약발도 안 받는 건가?’

요즘 들어 기억력이 감퇴하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뇌는 건들고 싶지 않은데…….’

온몸의 장기를 다 인공장기로 교환해도 뇌만큼은 내 것으로 유지하고 싶었다. 몇 년 전부터 의사가 인공 뇌를 권유했지만 고집스레 마다하고 약물치료로 버텼는데,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인공 뇌에 대해 생각하니 이젠 정말 내가 늙었다는 느낌에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다.

주인님!”

지니가 나를 불렀다.

?”

예나가 오고 있습니다.”

, ! 가장 중요한 걸 잊었네. 얼마나 왔지?”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그래. 간식 준비해 줘.”

, 주인님.”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지니의 예측대로 예나가 드론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예나가 안전하게 내린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예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드론과 함께 날아올랐다. 예나는 나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뛰어왔고, 나는 얼굴을 활짝 펴고 예나를 안아 주었다.

 

예나는 샐러드 한 입에 불만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가 펭귄잼 준단 말이야.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펭귄잼은 쪽쪽 빨아먹어 버리잖아. 달기만 달고……. 샐러드는 씹는 맛이 있으니 더 재밌잖아. 고기 씹는 맛이랑 과일 씹는 맛이랑 채소 씹는 맛이랑 다 다르니까 얼마나 재미있어?”

예나가 먹고 싶은 건 오로지 펭귄잼이었다. 화학물질로 합성한 몇 가지 영양소에 여러 가지 인공 감미료를 첨가해 펭귄이 그려진 기다란 튜브에 담아 쪽쪽 빨아먹을 수 있게 만든 젤이었다. 요즘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간식이었다. 바쁠 땐 입에 물고 일을 할 수도 있고,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귀찮은 사람들은 몇 개만 빨아먹으면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그런 저급한 간식은 절대 먹이고 싶지 않다. 유기농으로 키운 신선한 식재료에 합성 감미료를 전혀 첨가하지 않은 소스를 뿌린 자연스런 먹거리가 성장기 아이들 몸에 가장 좋은 음식이다. 거기에 유기농 과일을 갈아 만든 진짜 과일주스까지 주었건만 예나는 천박한 화학약품 덩어리를 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하다. 구시렁거리며 마지못해 깨작깨작 먹는 예나를 보니 한숨만 나온다.

펭귄잼인지 비둘기잼인지는 너희 아빠한테 사달라고 해. 나는 네 건강을 위해서 그딴 건 못 주겠으니까.”

할머니는 구식이야.”

예나가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구식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에딘이 백 살 넘으면 구식이래.”

구식…….’

심장을 강타하는 말이었다. 예나보다 수십 배나 많이 살아온 내 심장을 여섯 살짜리 예나가 그 한마디로 베어 버렸다. 그래, 구식이라 이젠 머리도 고장 났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 왜 웃어?”

네 말이 맞아서……. 할머니는 구식이야. 저녁에 너희 신식 아빠 오면 먹고 싶은 거 다 사달라 그래.”

결국, 예나는 간식을 남겼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예나의 아빠인 건휘가 왔다.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TV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예나는 아빠를 보자마자 나를 봤을 때처럼 팔을 벌리고 뛰어들었다.

리나는 언제 온다니?”

나는 예나 엄마의 귀환 일을 물었다.

“1년은 더 걸릴 거 같아요.”

무슨 가족이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살아? 예나 두 살 때 갔다. 예나가 엄마에 대한 정은 있겠니?”

건휘는 내 잔소리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예나를 얼른 안아 들고 뒷걸음으로 조금씩 현관으로 향했다.

도망가지 마.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떨어지는 거야. 머지않아 너희 가족 파탄 날 거다. 리나보고 얼른 오라 그래.”

회사에선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고요, 매일 밤마다 예나 잠들기 전에 동화책 읽어 주는 건 리나가 다 해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깟 홀로그램이 사람이랑 같니? 옆에 있으면서 서로 부대껴야 가족인 거야.”

할머니가 펭귄잼 안 줬어.”

내 잔소리 지수가 막 상승하던 시점에 예나가 건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 딴에는 속삭였겠지만, 그 소리는 내 귀에까지 들렸다. 건휘는 이 위기의 순간에 말을 돌려 준 예나가 고마운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펭귄잼은 건강에 안 좋다니까.”

내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요. 식약처에서 안전하다고 인증했어요.”

건휘가 항변했다.

식약처에서는 영양성분이랑 유해 물질만 검사해 보고 판단한 거지. 그런 합성식품보다 자연식품이 훨씬 좋아. 영양도 골고루 있고, 다양한 식감으로 애들 정서 발달에도 좋고…….”

저도 어렸을 때, 친구들은 다 먹는 에너지바를 안 사주셔서 많이 속상했는데…….”

건휘의 항변은 내 기세에 눌려 흐지부지 수그러들었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자란 거야.”

! 그건 할머니께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내일은 조금 일찍 올게요. 할머니 생신이잖아요.”

잔소리를 들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한 건휘는 어느새 현관문이 손에 닿았다.

생일이 뭐 별거니? 나 때문에 일찍 올 필요 없어. 네 할 일 다 마치고 와도 돼.”

빨리 가고 싶어 하는 건휘의 눈치를 살핀 나는 더 이상 잡지 않았다.

백열두 번째 생일 미리 축하드려요.”

건휘는 인사하고 얼른 뒤돌아 나갔다.

할머니는 구식이야.”

현관을 나서자마자 예나가 건휘에게 말했다.

할머니께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건휘가 예나를 나무랐다. 둘의 대화는 천천히 닫히고 있는 현관문 틈으로 들려왔다.

에딘이 그랬어. 백 살 넘으면 구식이래.”

현관문이 닫혔다. 예나의 구식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 예상대로 의사는 인공 뇌 이식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아주 강한 어조로 이식수술을 하지 않을 시 일어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겁을 주었다.

인공 뇌를 이식하면 내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나도 이번에는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구체적인 과정을 물었다.

이식수술은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가장 손상이 많이 된 부분만 일부 먼저 이식할 거예요. 그러면 남아 있는 뇌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기능이 인공 뇌로 전달되지요. 그런 식으로 기억의 손상이 거의 없게 수차례에 거쳐 수술할 겁니다.”

기억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 참 다행이었다. 그뿐 아니라 컴퓨터처럼 한번 기억한 것은 지워지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오래된 기억도 필요할 땐 쉽게 떠올릴 수 있다고 했다. 학자인 나에겐 인공 뇌가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인공 뇌도 공장 생산 제품이라 기본적으로 모두 똑같은 운영체제가 탑재돼 있을 것이고, 누군가 몰래 백도어(backdoor) 프로그램이라도 숨겨 놓거나 해킹이라도 하는 날엔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방지하는 법 장치가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범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0.00000001%의 가능성 때문에 나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환자분의 뇌세포는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늦게 결정할수록 잃어버리는 기억만 많아질 뿐이에요. 학자이시라면서요? 평생 연구해서 쌓은 것들이 자꾸 소실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계실 겁니까?”

의사는 결정을 종용했지만 나는 일주일의 말미를 달라고 하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나왔다. 이번에는 심장내과로 향했다.

 

환자분이 사용하시는 인공심장은 배터리가 구형이라 충전을 자주 해야 합니다. 지금 충전하신 지 10년 됐으니 다시 충전하실 때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젠 오래돼서 충전도 잘 안 돼요. 아예 배터리를 바꾸셔야 하는데, 다행히 작년에 신형 배터리가 나왔어요. 이걸로 교환하시면 백 년은 충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뇌뿐만 아니라 심장도 말썽이었다. 인공심장 배터리가 구형이라니…….

할머니는 구식이야.’

예나의 말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인공심장이식은 40대에 받았다. 딸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극심한 흉통을 느끼며 쓰러졌는데, 깨어나 보니 새로운 심장이 달려 있었다. 그 당시엔 남편이 비용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이식해 달라고 해서 최신형으로 이식했다고 들었다. 그게 70년쯤 전 일이니 이젠 구형인 게 당연한데도 마음 한구석이 어두워지는 건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다. 예나의 목소리가 귀에서 자꾸만 맴돈다.

할머니는 구식이야.’

의사는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한 달 안에 수술하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일정을 조율해 보겠다고만 말하고 병원을 나섰다.

 


 

집에 도착하니 소포가 와 있었다. 이게 뭘까 하며 막 뜯어보려는 순간 요란하게 생일 축하 음악이 울리며 온 집안이 유흥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알록달록한 조명이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는 데다 홀로그램 모듈 고장 때문에 노이즈까지 있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리번거리는데 번쩍이는 조명 사이로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백열두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친구야!”

90년 지기 대학 친구 규원이었다. 요란한 파티복을 입고 머리엔 생일케이크 모양의 우스꽝스러운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깜짝이야!”

나는 나무라듯 그에게 소리쳤다.

놀랐어? 그러면 서프라이즈 파티는 성공적이군. 그거 열어 봐. 생일인데 샴페인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이 오랜 친구의 요란한 파티에 미소를 지으며 소포를 열었다. 안에는 샴페인이 든 잔과 안주가 든 작은 접시가 있었다. 잔과 안주를 꺼내고 내용물의 형태를 유지해 주는 속 포장을 걷어냈다. 잔에 들어 있는 샴페인은 하나도 새지 않았고, 접시의 과일들은 방금 썰어 놓은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거 유기농 과일들이야. 너 유기농 좋아해서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주문했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친구의 생일파티가 고마웠다.

그래도 친구밖에 없구나. 생일이라고 서프라이즈 파티도 해주고. 그런데 그 요란한 옷은 뭐야?”

홀로그램 옵션이야. 파티 조명하고 함께. 설마 내가 진짜로 이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는 그러고도 남아서…….”

규원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현란한 조명과 파티복을 제거했다. 정신없던 거실은 다시 차분해지고, 규원의 옷은 편안한 평상복 차림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선 뭐래?”

규원이 물었다. 나는 샴페인으로 입술을 축이며 속으로 놀랐다.

나 병원 다녀온 줄 어떻게 알았어?”

며칠 전에 얘기 했잖아. 오늘 정기검진 받으러 간다고…….”

이번에는 내 기억력 감퇴에 놀랐다. 며칠 전에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뇌의 상태는 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 그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규원은 내 눈치가 심각해 보였는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하고 내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인공 뇌 이식을 빨리 해야 한대. 더 이상 약물로는 치매의 진행을 막을 수 없대.”

가만히 제 턱을 만지작거리던 규원이 갑자기 만세를 하듯 두 팔을 들었다.

난 또, 뭐 대단히 큰 문제라도 있는 줄 알고 긴장했네.”

나는 이 상황이 심각한 데 반해 규원은 별일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백 년 넘도록 자기 거를, 그것도 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어? 우리 동기 중엔 너밖에 없어.”

정말?”

그래. 이십 년 전에 이식 수술한 나도 의사가 참 대단하다고 박수 쳐 줬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수술 전하고 수술 후하고 뭔가 바뀐 거 없어? 주변 사람들이 너 변했다고 하지 않아?”

규원은 그제야 내가 심각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 마음 이해해. 나도 수술하기 전엔 뇌가 바뀌어서 나라는 사람이 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두려웠어. 그런데 네가 보기에 예전의 나랑 지금의 내가 다른 거 같아?”

전혀 아니.”

90년 전부터 쭉 알고 지낸 내 친구 규원은 언제나 똑같은 내 친구 규원이었다.

거 봐. 수술 선배의 말을 귀담아듣고 어서 수술해. 어물어물하다가 예나 얼굴 잊어버리는 수가 있어.”

누가 나쁜 마음먹고 인공 뇌에 백도어 프로그램을 심어 놓거나 해킹이라도 당하면…….”

어허! 이 친구 쓸데없는 걱정을 쌓고 사는구먼.”

규원은 더 이상의 걱정을 허락하지 않고 내 말을 끊었다.

물론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 그런데 우리나라가 아니라 후진국 얘기야. 사람들의 인공 뇌에 이상한 걸 심어서 정권교체까지 시도했지, 아마?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 있었다는 말 못 들어봤으니까 걱정 접어두시고 어서 날짜 잡으세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걱정을 한다고 그래?”

요즘에? 난 아직 예전을 살고 있는 사람인가?’

규원의 요즘에라는 말 때문에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내 버렸다. 아무튼 지금은 규원 덕분에 인공 뇌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인공심장도 교체해야 된대.”

이번엔 나의 또 다른 걱정거리인 심장 이야기를 꺼냈다.

잘됐네. 수술대 올라간 김에 한꺼번에 다 해버리면 되겠네. 시간도 아끼고 좋잖아. 4학년 졸업논문 봐주느라 바쁜데 말이야.”

졸업논문

규원의 이 단어 때문에 낙싱이 생각났다.

야먼 낙싱이라는 학생 알지?”

내가 물었다.

! 낙싱 그 친구, 엄청나게 열심인 학생이지. 4년 내내 과 톱이었잖아. 우리 과에서 걔를 누가 몰라?”

규원도 나와 같은 대학, 역사학과 교수였다. 90년이나 이렇게 가까운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건 같은 직장에서 늘 마주치기 때문이었다.

낙싱, 그 녀석 참 열심인 놈이라 졸업논문은 내가 봐주고 싶었는데, 하필 고대사를 선택하는 바람에 너한테 뺏겼어.”

규원이 제 턱을 쓰다듬으며 아쉬워했다.

내가 뺏은 게 아니라 낙싱이 고대사를 선택한 거지. 아무튼, 걔는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고대 문헌들을 너무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어. 고집도 세서 어떻게 바로잡아 줘야 할지 막막해.”

나는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역사서들을 망라하며 음역과 훈역을 제멋대로 하는 낙싱의 해석 방식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들은 규원은 나와 다른 생각을 말했다.

아무것도 정확히 밝혀진 게 없는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옳고 어떤 방식이 틀리다고 꼬집어 말할 수 있을까? 광개토대왕릉비도 21세기 들어서 새로 출토된 여러 가지 증거물들이랑 대조해 봤더니 그간의 해석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밝혀졌잖아. 백제 건국과 관련된 기록이 아주 적은 데다가 문헌마다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서 어쩌면 낙싱의 새로운 해석 방법이 해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래도 낙싱은 너무 심해. 새로운 이론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걘 너무 막무가내인 것 같아.”

막무가내라…….”

규원은 들고 있던 샴페인을 홀짝 다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옛날에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그걸 깨뜨리고 나니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었어. 철석같이 믿었던 천동설이 깨졌고, 과학자들은 우주의 암흑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위대한 뉴턴의 동역학도 수정했어. 상대성이론은 양자역학이랑 상충해.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깨뜨리고 수정하면서 세상은 발전한 거야.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규원이 나에게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 사람들은 기존 이론을 반박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했을 거 아니야. 낙싱은 그런 타당한 근거가 없어 보여. 다음에 만나면 나를 설득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 한번 더 물어봐야겠다. 근데, 넌 언제부터 그렇게 물리학을 잘했어?”

, 이거! 다 인공 뇌 덕분이야. 인공 뇌가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거든. 책을 읽으면 그게 다 머릿속에 들어와서 저장이 돼.”

인공 뇌가 참 대단하구나. 너 그러다 조만간 물리학 논문 하나 쓰겠다?”

기억력만 좋아진 거야. 사고방식은 그대로라서 내 머리는 여전히 역사에 최적화 되어 있어. 물리는 그저 남의 이론을 외우는 정도야. 만약에 사고방식이 물리학적으로 바뀌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인격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으면서 기억력은 좋아지고, 치매의 위험이 제로다. 이 이야기를 실제로 20년이나 인공 뇌를 사용한 사람의 입에서 들으니 이식 수술에 대한 내 결심이 공고해졌다.

다음 수업 땐 낙싱의 얘기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어봐 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가 틀렸걸랑 그때 바로 잡아주면 되는 거잖아?”

규원은 마치 낙싱의 지도교수인양 나에게 부탁했다. 나도 낙싱의 개인 사정을 잘 알기에 규원의 부탁이 없어도 낙싱을 더 세심하게 봐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백 년 남짓 되었을 것이다. 큰 지진으로 동남아의 섬 몇 개가 사라지는 재난이 발생했다. 그 당시 갈 곳을 잃은 수십만의 난민이 생겼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들을 나누어 수용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줄어드는 데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이민자와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때였다. 그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난민의 후손이 낙싱이었다. 비록 한국 국적을 갖고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해도 살아온 내내 차별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낙싱은 악착같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낙싱은 졸업 후 취업을 하면 인공피부 이식을 하겠다고 친구들에게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치료 목적이 아니라 차별받지 않기 위해 큰돈을 들여 인공피부 이식을 하려는 낙싱을 생각하자 내가 차별한 게 아닌데도 마음 한쪽이 아리고 미안했다.

모처럼 친구 생일을 핑계로 유유자적하게 시간 낭비 좀 하려고 했는데, 결국 일 얘기를 했네.”

규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AS 기사가 곧 도착합니다.”

지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두 시였다.

이런! 헤어질 시간이네. 덕분에 점심 즐겁게 잘 먹었어. 고마워.”

나도 즐거웠어. 다음 주 중으로 수술 날짜 꼭 잡아.”

규원은 신신당부를 하고 연결을 끊었다.

 

AS 기사는 수행하는 로봇도, 공구통도 없이 단출하게 혼자 왔다. 고쳐야 할 제품이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거나 무겁거나 위험한 경우를 대비해 로봇을 동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로봇도 없고 손에 든 것도 없는 게 이상했지만, 지니가 이미 신원조회를 마친 후라 별 의심 없이 그를 집안에 들였다. 과연 이 사람이 뭘 고칠 수나 있을까 의심하던 찰나 AS 기사는 천장에 있는 홀로그램 모듈을 고치기 위해 다리를 길게 늘여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머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AS 기사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런 반응이 아주 익숙해 보이는 미소였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신체를 개조해도 된다는 법이 작년 말에 통과돼서요, 아직 저 같은 사람이 많이 없어서 고객님들이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시간이 지나고 저처럼 신체를 개조한 사람이 늘어나면 다들 익숙해지겠죠.”

AS 기사는 다시 모듈을 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자그마한 공구가 손끝을 뚫고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고객들은 로봇보다는 사람이 직접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고객이 갑일 때 서비스 직원은 철저하게 을이어야 했다. 을이 직접 일하지 않고 로봇을 부리면 갑의 가치가 반감된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실제로 기업들의 매출 순위를 보면 사람이 직접 제품을 설치하고 AS를 시행하는 기업들이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그러니 기업들은 각종 혜택을 제시하면서 직원들의 신체 개조를 독려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위해 일해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움이 아닌 우월감을 느끼려는 그들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못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것 아닌가. 돈을 주기 때문에 몸으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전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얘긴가? 사람의 가치가 돈보다 못하다는 개똥같은 말이다. 하지만 AS 기사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개조 인간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모듈 수리는 30분 안에 끝났다.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사람의 몸 안에서 나왔으니 정리하는 것도 간편했다.

살펴보니까 화면에만 문제가 있었던 거 같네요. 음향 상태는 이상 없었죠?”

, 음성은 잘 됐어요.”

화면도 말썽인데 소리까지 문제였으면 규원의 생일 축하도 제대로 못 받을 뻔했다. AS 기사는 고장의 원인과 수리 과정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떠났다. 고객평가 점수를 의식한 친절이었지만 그래도 점수를 높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AS 기사의 친절함과 상관없이 그의 개조된 몸은 내게 썩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고 믿는다. 노화된 신체를 인공신체로 교체하는 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행위이므로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편의를 위해 인간이 아닌 몸으로 개조하는 건 탐탁지 않다. 그러면 생각하는 로봇과 뭐가 다른가? 신체 개조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길 바랐는데, 결국 작년 말에 통과되었다. 이제 일상 속에서 개조 인간들과 늘 함께할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청소 도구와 몸이 연결된 청소부를 보며 사람일까, 로봇일까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 거북하다. 말을 걸어야 할 땐 존대해야 할까, 명령조로 말해야 할까?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이 현실이 짜증 난다.

혹시 리나도?’

문득 리나 생각이 났다. 리나는 건설 현장 노동자다. 리나는 로봇과 건설 장비를 조종하는 기술자로 현장에 가 있지만, 필요할 땐 근육 강화 슈트를 입고 직접 현장 작업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너무 놀라자 건휘는 그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나는 건휘의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리나도 번거로운 근육 강화 슈트 대신 신체를 개조해서 작업할 수도 있다.

건휘와 리나는 내가 신체 개조법을 격렬히 반대한 걸 알고 있다. 만약 리나가 나 몰래, 겉으로는 표나지 않게 신체 개조를 했다면 나중에 만났을 때 그 사실을 내게 털어놓을까? 나는 리나의 말을 듣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족의 화목을 위해 리나는 개조 사실을 숨기고,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 서로 연기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얼굴이 구겨진다.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왜 쓸데없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거지? 그만큼 개조 인간이 싫다는 얘기겠지.

 


 

존엄사가 뭐야?”

예나가 펭귄잼을 쪽쪽 빨아먹으며 물었다. 병원에서 오는 길에 사 온 펭귄잼 덕분에 오늘 예나의 기분이 하늘을 날았다. 그런 예나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와 놀랐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에딘이 그랬어. 백 살 넘으면 존엄사를 해도 된대.”

에딘네 부모님은 도대체 애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어린애 앞에서 말을 가려 하지 않는 에딘의 부모가 한심스러워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걔네 집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아마, 백 살이 넘으면 구식이라는 말도 하고 존엄사해도 된다는 말도 하나 봐.”

내 혼잣말인 줄도 모르고 예나가 한 대답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이 아이는 구식이라는 말뜻은 알고 하는 걸까? 존엄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옛날에는 온몸에 생명유지 장치를 잔뜩 달고 침대에 누워 겨우 숨만 쉬고 있는 환자가 더 이상 활동력을 되찾을 가망이 없을 때 존엄사를 시행했다. 그러나 인공 신체 덕분에 아무리 늙어도 침대에 누워 여생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없는 요즘, 존엄사는 곧 자살을 뜻했다. 그것은 너무 오래 살아서 더 이상 삶이 의미가 없어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여였다. 사람은 이제 불의의 사고로 즉사하지만 않으면, 아무리 다치거나 늙어도 죽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은 계속 태어난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인구 증가는 전 세계의 골칫거리다. 이제 지구 안에서는 폭발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다. 세계는 지구 밖에 콜로니를 건설해 인간들을 이주시켰다. 지금도 콜로니는 계속 건설되고 있다. 리나도 콜로니 건설 현장에 가 있다. 건휘는 같은 건설회사에 근무하지만 지구에서 현장을 관리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콜로니를 건설해도 해결되지 않을 만큼 인구는 늘어만 간다. 그래서 나는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세상과 지구에 기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로 잠시 내 정신이 예나 곁을 떠난 사이 건휘가 들어왔다. 예나는 펭귄잼을 빨아먹느라 아빠를 보고도 뛰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손만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뭐지, 이 패배감은? 아빠가 펭귄잼한테 진 거야?”

건휘가 웃으며 예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나는 펭귄잼 때문에 아빠를 건성으로 맞이하는 예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는 저런 화학물질 범벅 따위 안 사줄 거다. 건휘는 내 생일을 맞아 식당을 예약했다고 했다. 우리는 오랜만의 외식을 하러 집을 나섰다.

 


 

건휘가 예약한 식당은 훌륭했다. 내 취향에 맞는 유기농 식재료로 건강하게 조리한 담백한 음식이 나왔다. 상당히 비싼 식당이었다. 나를 위해 큰돈을 쓴 건휘가 고맙고 기특했다. 한편으론 미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하루에 두세 시간씩 예나를 봐주는 대가로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나가 콜로니 건설 현장으로 떠날 때 예나는 겨우 두 살이었다. 건휘와 리나는 예나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후 건휘가 퇴근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예나를 돌봐줄 보육 로봇을 대여하려고 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아이를 로봇 따위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남들도 다 보육 로봇을 써요.”

남들은 너희처럼 아이를 봐줄 할머니가 없잖니. 교수라는 직업이 시간을 탄력적으로 쓸 수 있어서 이럴 땐 참 좋아. 예나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들 일에나 집중해.”

보육 로봇이 사람보다 좋은 점도 많아요. 예를 들면 감정이 없어서 아이 때문에 화가 난다고 아이를 학대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학대하는 친부모보다 차라리 로봇이 낫죠. 어린이집에도 로봇이 보육교사보다 많대요.”

건휘는 보육 로봇을 고집했고, 리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내가 예나를 학대한다는 얘기니?”

내 말에 건휘와 리나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 말은 어린애 돌보는 게 많이 힘들어서 할머니가 심적으로 괴로울 수 있다는 말이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농담이다. 네가 내 손에서 컸는데 나를 의심할 리가 없잖니? 로봇은 화도 안 내지만 아이 정서 발달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감정이 없으니까.”

그렇게 내 고집대로 돌봐주기 시작한 예나가 지금은 여섯 살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홀로그램 엄마가 해 줄 수 없는 걸 해주며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훌륭한 저녁 식사를 끝내자 건휘가 예약한 무인 택시가 식당 입구에서 나를 기다렸다. 건휘는 예나의 손을 꼭 잡고 내가 탄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배웅했다. 건휘는 드론을 타는 모습을 나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오래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드론 혐오자다. 나의 이 혐오증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다. 고치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지워버린 존재를 혐오하는 게 뭐가 잘못돼서 고친단 말인가? 그 사고 때문에 건휘는 엄마를 홀로그램으로만 기억한다. 드론 추락 사고는 승객만 위험한 게 아니다. 추락 지점에 있던 사람들도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내 남편과 딸처럼…….

사고가 있은 지 3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드론을 타지 않는다. 조금 더 불편하고 오래 걸려도 차를 이용한다. 그동안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 드론이 차보다 안전해졌다고 해도 내 마음이 안전하지 않다. 내 가족이 드론을 타는 것도 불안하다. 그러나 건휘가 독립하고 나서부터는 내 고집을 세워 드론을 이용하지 말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가끔 건휘가 드론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좀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는 건 인정한다. 그 때문일 것이다. 건휘가 드론을 이용하는 모습을 내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가 택시를 타는 순간에도 식당 옥상에선 드론들이 뜨고 내렸고, 집으로 달리는 지금도 주변의 드론 정류장에서는 드론이 계속 사람들을 삼키고 뱉어냈다. 그 사람들 중에 건휘와 예나도 있겠지, 젠장!

택시!”

, 손님.”

푸른 초원이 보이게 해줘.”

, 창밖의 배경을 바꿉니다.”

투명한 차창으로 밤거리를 보던 나는 택시의 모든 유리가 너른 들판과 푸른 하늘을 보여주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탁 트인 초원을 드라이브하는 중이다. 배경에 맞춰 택시 안에는 풀 내음이 담긴 상쾌한 바람이 살랑 분다. 합성 향인데도 꽤 자연스럽다. 이제 드론이 보이지 않으니 불편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오늘 낮에 조교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먼 낙싱이 논문 주제를 바꾸겠다고 합니다. 고대사는 자신에게 너무 버거운 주제였다고요.”

심장이 덜컹거렸다. 한낱 기계 덩어리 주제에 놀란 뇌의 반응을 잘도 알아차리고 몇 차례 불규칙하게 뛰었다. 어쩌면 약해진 배터리 때문에 뇌의 신경 반응을 무시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으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낙싱은 아직 새로운 주제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사는 아닐 것이다. 그 말은 지도교수를 내가 아닌 다른 교수로 택하겠다는 말이다. 주제를 무엇으로 바꾸든 낙싱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시간도 촉박하거니와 사학계에서 제법 입지가 높은 나를 버린 학생을 선뜻 맡을 교수도 없을 것이다. 해가 바뀐다면 모를까. 그걸 알면서도 낙싱은 후회가 막심할 게 뻔한 선택을 했다.

어리석은 녀석! 고집을 버렸으면 내가 앞길을 탄탄히 열어 주었을 텐데.

 


 

예나는 오늘도 간식을 깨작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심장은 덜컹거린다. 이젠 조금씩 아프기까지 하다. 고통은 신체가 뇌에 보내는 경고다. 지금 뭔가 잘못됐으니 어서 고치라는 뜻이다.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이상이 있음을 알면서도 경각심을 느끼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죽는 거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인공신체도 어느 정도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내 심장도 나에게 경고하고 있는 거다.

예나는 아무리 좋은 말로 달래도 간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 모습을 보니 열이 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숨이 가빠온다. 낮에는 낙싱이, 저녁에는 예나가 내 뇌를 압박한다. 이젠 뇌가 심장인 양 뛰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구식이야.”

예나가 입이 부루퉁해져서 말했다. 나는 자제력을 잃고 예나의 간식을 싱크대에 쏟아 부었다. 예나의 울음이 터졌다. 내 뇌도 터질 것 같다. 덩달아 심장도 통제력을 잃고 터질 듯이 날뛴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예나의 울음소리가 머리에서 울린다. 어지럽다. 눈을 감았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대로 평화가 찾아왔으면, 아무도 날 건들지 않았으면…….’

나의 이 바람은 간절했다. 이 순간 누군가 날 건들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잠시 동안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 왜 그래?”

나의 평화를 깨는 소리였다. 눈을 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예나가 코앞에 와 있었다. 불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할머니 아파?”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둬.’

속으로만 외쳤다. 예나가 홀로그램이면 꺼버릴 텐데……. 할 수만 있다면 예나를 멀리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다. 덜덜 떨리는 손을 힘겹게 뻗어 예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구조대가 들이닥쳤다. 내 상태가 비정상인 것을 감지한 지니가 구조대를 부른 것이다.

 


 

알았다니까. 그렇잖아도 오늘내일 중으로 날짜 잡으려고 했어. 너도 어서 일해야지.”

나는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었다. 내가 아침 일찍 병원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휘가 회사에서 일하다 말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해댔다. 길고 긴 잔소리를 요약하면 병원에 며칠 누워서 안정을 취하다가 수술받을 것이지 왜 나왔냐는 지청구였다. 누굴 닮아서 잔소리가 심한 건지…….

내 핏줄이 맞는군!”

건휘는 내 유전자를 제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지니가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지니!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린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내가 허락할 때까지 걸려 오는 통화는 모두 차단해. 학교 관계자들 빼고.”

나에게 잔소리할 만한 사람들과 당분간 연락하지 않을 셈이다.

,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번 학기 남은 수업은 모두 다른 교수들에게 넘겼다. 4학년 졸업논문은 그럴 수 없다. 무리해서라도 그 애들은 내가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졸업논문을 생각하니 낙싱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규원이 탐을 낼 만큼 노력파 학생인데 고집이 세서 문제다. 그런 식이라면 어느 교수를 만나도 힘들어질 게 뻔하다. 그 아이의 아집을 제대로 꺾어 주어야겠다. 이건 지도교수를 바꾼 데 대한 졸렬한 복수심이 아니다. 교육자로서의 책임감이다. 그러려면 먼저 낙싱의 연구에서 허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짚어서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

나는 낙싱이 그동안 제출한 연구 보고서와 홀로그램 통화 영상들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낙싱이 참고한 한, , 일의 고대 역사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외 백제 건국이나 교역에 대한 단서가 있을 만한 고서들을 모두 열었다. 이것들은 학부생인 낙싱은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책들이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예나는 제 집에서 보육 로봇이 봐줄 것이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를 염려하는 건휘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간 아까 들은 잔소리의 서너 배는 더 듣게 생겼기에 할 수 없이 허락했다. 덕분에 예나 걱정 없이 책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고서와 번역서, 각종 논문들이 거실 공간을 금세 공기처럼 채웠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가들이 노력했지만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정리하고, 내 지식을 총동원해 다시 한번 풀어 보았다.

역시나…….’

그 오랜 세월 안 풀리던 문제가 몇 시간 들여다본다고 풀릴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낙싱의 보고서대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낙싱이 참고했던 고서들을 낙싱의 방식대로 해석해서 한쪽에 미뤄놓고, 낙싱이 몰랐던 다른 책들도 낙싱의 방식을 응용해 같은 글자를 음역과 훈역을 모두 해 본 후 퍼즐을 맞추듯 짜 맞췄다.

내가 고서를 띄운 홀로그램 속에 파묻혀 휘몰아치는 한문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사이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하루가 가는 동안 지니가 점심과 저녁을 준비했지만 도로 냉장고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낙싱의 방법으로 새롭게 고서들을 해석하는 이 작업을 배를 채우는 원초적인 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간 생각해 보지 않은 방법이기도 했고, 오히려 사학자들 사이에선 아전인수 격으로 우리 입맛에만 맞게 잘못 해석할 우려가 있어서 기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금기의 벽을 깨니 작업이 점점 흥미로워졌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리가 이런 건가? 덕분에 두 끼를 굶고 밤을 새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밥 생각은 없었고, 잠도 올 틈이 없었다.

주인님!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지니가 다시 새로운 밥상을 차렸다.

생각 없어. 나 방해하지 마.”

지니는 또 아침 식사를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에만 집중했다. 잠시 후, 로봇이 펭귄잼 두 개를 가져왔다.

지니, 이게 뭐지?”

예나에게 주고 남은 펭귄잼입니다.”

펭귄잼인 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펭귄잼은 인체에 무해하고 건강을 지켜주는 각종 영양소를 골고루 배합한 간식입니다. 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어 바쁜 일상에서 간편하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건 펭귄잼 광고 문구잖아.”

집중을 방해한 지니에게 점점 짜증이 나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펭귄잼을 먹으라고 주는 바람에 기분이 더 상했다.

주인님은 지금까지 세 번의 식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인공신체도 연속된 식사 거부는 견디기 힘듭니다. 또한 생체인 주인님의 뇌는 제대로 된 영양을 공급받지 않으면 다운될 수 있습니다.”

다운이 아니라 기절이겠지.’

그 말을 들으니 시원찮은 뇌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 일단은 펭귄잼을 받아 물었다.

생각보다 맛있군!’

그래도 예나에게 줄 순 없다. 일하느라 바쁜 사람에게는 생존을 위해 가끔 필요하겠지만 성장기 아이들에겐 좋지 않다. 책에 집중한 채 나도 모르게 두 개를 다 먹어치웠다. 배는 고프지 않았는데도 펭귄잼을 먹으니 이상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식사와 수면을 거부하면서까지 하던 작업은 진전이 꽤 있었다. 낙싱은 제 방식대로 고서를 해석함으로써 많은 부분이 풀릴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래도 막히는 부분과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았다. 그런 부분은 내가 아는 다른 책들로 연결이 가능했다. 물론, 낙싱의 해석 방식을 통해서다. 그렇게 해석해놓고 보니 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했던 부분이 점차 정리가 돼갔다.

유레카!’

속으로 환호성을 지름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저녁이 왔다. 도저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나는 지니가 주문한 펭귄잼으로 점심과 저녁을 때웠다. 그렇게 펭귄잼으로 식사를 대신하면서 작업에 몰두하던 내게 로봇이 또 펭귄잼을 가져다주었다. 벌써 아침인가 하고 창밖을 보니 아직 캄캄했다.

지니야, 몇 시야?”

밤 열 시 삼십 분입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식사 시간도 아닌데 왜 이걸 주는 거야?”

주인님은 인공 영양식품으로 불완전한 식사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지금 밤참을 드심으로써 불완전한 영양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빠른 시일 내에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않으면 또 다운되실 수 있습니다.”

다운이 아니라 기절이야.”

나는 순순히 펭귄잼을 받아먹으며 지니가 나를 사육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했다.

가만, 열 시 반이면 건휘는 아직 안 자겠군. 건휘 연결해 줘.”

이틀이나 보육 로봇에 맡겨진 예나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문득 걱정되었다. 멍청한 로봇이 예나가 조른다고 펭귄잼만 잔뜩 먹이는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내일은 내가 유치원에 가서 예나를 직접 데려올 것이다.

내 우려와 달리 예나는 보육 로봇을 참 좋아했다. 보육 로봇과 함께 유기농 채소로 샐러드를 직접 만들어서 먹었단다.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제 손으로 직접 만들면 잘 먹는다는 걸 새삼 기억해냈다. 내 딸이 예나 나이였을 땐 나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잊고 있었다. 지금은 리나가, 정확히는 리나의 홀로그램이 예나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고 했다. 동화책은 보육 로봇이 골라줬다. 보육 로봇은 예나뿐만 아니라 건휘도 관찰하고, 평소 내가 예나에게 해 주거나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들은 후 프로그래밍 된 보육지식을 바탕으로 예나에게 맞는 돌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제는 예나가 보육 로봇을 낯설어 했지만 오늘은 잘 따르고 떼도 한번 안 썼단다. 로봇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다.

나는 내 딸과 손자인 건휘를 키웠다. 둘 다 바르게 자랐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잘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 애들을 아주 잘 키워냈다고 자부한다. 당연히 예나도 그 애들처럼 잘 키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불평만 늘어놓던 예나가 로봇은 잘 따르고 있다. 화가 난다. 로봇에게 화가 나지만 로봇이 무얼 잘못했는지 콕 집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잘못이 없는 로봇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나는 그렇게 비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로봇에게 화가 난 게 아닐 것이다. 그러면 로봇을 잘 따르는 예나에게 화가 난 건가? 어린아이한테? 예나 또래의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관철하기 위해 떼쓰고 불평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행동을 교정해 주고 바르게 이끌어 주는 게 나 같은 양육자가 할 일이다. 예나의 행동을 교정해 주는 역할을 하는 양육자가 바로 나다. 결국, 나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인가…….

로봇은 나보다 예나를 더 잘 돌보고 있다.

나는 세 끼를 그토록 혐오하던 펭귄잼으로 때웠다.

낙싱의 해석법으로 고서들의 비밀이 풀리고 있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막히고 있다. 왜 나는 그토록 낙싱의 연구를 고쳐 주려 했을까? 왜 예나가 그렇게 원하던 펭귄잼을 무조건 안 된다고 했을까? 왜 예나를 무리해서 봐주겠다고 우겼을까?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실행해 왔던 것들이 모두 틀린 게 되었을까?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오래전부터 맞는다고 믿었던 것들, 아니 정말로 오래전에는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틀린 게 된 것 같다. 세월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는데도 나는 타성에 젖어 변하지 않고 옛날대로 살고 있었다. 70년 전 딸을 키웠던 대로 예나를 키우고 있다. 90년 전 학교에서 우리나라 사학계의 거물들이 가르쳐 준 대로 연구했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내가 예나와 제자들에게 크게 못할 짓을 저지른 것 같다.

또 뭐가 있지?’

내가 아집 때문에 주변에 못할 짓을 한 게 더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드론?’

내 남편과 딸을 앗아간 드론 추락 사고는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드론에 타고 있던 13명 전원 사망에, 드론이 추락해 밀려가면서 거리를 걷던 보행자와 상점, 운행하던 차들을 덮쳐 33명이 사망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실려 갔다. 이후 사고 희생자 가족 모임이 생겼다. 희생자 가족 중에는 나처럼 드론 혐오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드론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상담 치료를 지원했다. 나는 치료를 거부했다. 지금껏 드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상담 치료를 받았던 사람들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드론을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과 따로 이동해 왔고 건휘에게도 차를 이용할 것을 강요했다. 그렇게 건휘와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면서도, 드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나는 이해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이기주의의 극치인지! 내 행동은 이기적이라기보다는 폭력적이라고 하는 게 맞을 지경이다. 내 과오를 깨닫고 있는 지금도 솔직히 드론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다. 이렇게 살아온 나는 관성대로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내 과거가 모두 거짓이 될 것만 같다. 내 뇌는 규원처럼 유연하게 사고하는 뇌가 아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그걸 깨뜨리고 나니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었어. 철석같이 믿었던 천동설이 깨졌고, 과학자들은 우주의 암흑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위대한 뉴턴의 동역학도 수정했어. 상대성이론은 양자역학이랑 상충해.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깨뜨리고 수정하면서 세상은 발전한 거야.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규원이 이렇게 말했었다. 과거에 맞는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깨지면서 새로운 진리가 생기고 인류는 발전하는 것이라고. 새로운 진리가 생기면 과거의 진리들은 거짓이 된다. 내가 생각을 바꾸면 내 과거는 천동설처럼 거짓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관성을 꺾지 않을 거다.

인공 뇌 이식을 해도 내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는다. 인공 뇌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건 불법이다.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조작에 의해 내 사고방식이 바뀐다면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나는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가족에게 심리적 폭력을 이어갈 것이고, 역사학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겠지.

교체가 필요하다. 내 늙은 뇌가 인공 뇌로 교체되고, 내 인공심장의 구형 배터리가 신형으로 교체돼야 하듯이 새로운 세상에도 새로운 교체가 있어야 한다. 내가 옳았던 시절이 다 된 이 고집쟁이 늙은이는 낙싱 같은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인류가 발전한다. 그래야 건휘와 예나가 지금보다 더 발전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내일은 의사에게 연락해 날짜를 잡아야겠다.

 


 

아침 일찍 심장내과 담당 의사를 연결했다.

배터리를 교체하지 않겠습니다. 흉통이 더 강해지기 전에 존엄사 날을 잡겠습니다.”

앞으로 개조 인간들을 볼 일은 없겠군.’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예나는 예나의 시대에 맞게 건휘와 리나가 나보다 잘 키우겠지. 세상의 구형 배터리인 나는 이제 신형 배터리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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