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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매종노

2023.08.01 00:0008.01

매종노

유이립

 

살아남기 위해 하는 짓은 최악이 아니다. 차악이다. 아몬은 남자들의 결투를 보며

생각했다. 남자 중 한 명이 낮게 공격하는 척 몸을 숙이다가 바닥의 모래를 손에 쥐고는 상대에게 뿌렸다.“아아아!”상대의 눈에 모래가 들어가자 남자는 고함을 지르며 돌격했다.

아몬은 햇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 어귀에 앉아 한 층 정도 낮은 동굴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아몬을 스쳐가기에 아몬의 그림자가 동굴 전체에 드리웠다. 남자들과 같은 민족인 결투입회자들은 아몬을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이었지만 아무도 따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몬은 이들을 지배하는 영주 중 하나이고, 자신들은 민중이었다.

아몬은 갈색 머리카락에 백색 피부였지만 뚜렷하게 하얗기보다는 살구 색에 가까웠다. 가느다란 눈과 뾰족한 턱이 족제비를 연상케 했고, 키는 평균보다 약간 작았다.

“이제 봄이 온다.” 라고 가니아 민족 사람들이 속삭였다. 15년간의 긴 겨울을 마치고 실제로 봄이 오고 있었지만 아직도 추웠기에 아몬은 체온을 스스로 조절하는 웨어러블 방풍로브를 입고 있었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표정을 감추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가니아 남자 한 명이 영주에게 다가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중요한 부분만 가린 넝마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여기 왜 오셨어요?”

영주에게 전혀 공손하지 않은 호전적인 말투였다.

“결투한다니까 구경하려고. 누가 이길 것 같아?”

“음... 자콘이 이길 겁니다. 눈에 모래가 들어갔지만... 비겁하게 모래를 뿌리다니.”

“아냐. 자콘이라는 친구가 져. 왜인지 알아? 비겁한 것도, 속임수도 하나의 방편이거든. 살아남기 위해 하는 짓은 최악이 아니야. 차악이야. 비겁하다는 수치를 감수하고 싸웠으니 이길 게 분명해.”

“...다들 영주님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자콘은 덩치가 컸기에 눈에 모래가 들어가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의 허리를 휘감고 내리찍었다. 아몬은 어제의 꿈 내용이 떠올랐다. 작은 일은 분명하고 생생했다. 어젯밤 꿈 내용처럼 곁에 앉은 남자가 바지삼아 걸친 넝마에서 동전을 하나 꺼냈다.

“저랑 내기하실래요? 이 동전을 던져서 앞뒤 맞추는 겁니다. 제가 앞면입니다.”

“내 동전으로 하지. 자네 동전은 분명 양쪽 다 앞면만 있을 테니까. 자 봐봐. 앞뒤 정상적인 동전이지?”

“생각이 없어지네요. 계속 구경이나 하죠.”

영주에게 사기를 치려다가 걸렸음에도 가니아 남자는 태연했다. 가니아 민족 전체가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민족 영주를 좋아하지 않았고, 뻔뻔하고 대담했다.

“아냐. 자네에게 유리한 제안이야. 내가 앞뒤를 정한 뒤 세 번 던져서 한 번이라도 다른 게 나오면... 자네가 원하는 걸 말하게. 해주지.”

남자는 아몬이 건네준 동전을 손톱으로 긁어보는 게 뭔가 이상이 있는지 알아내려는 듯 했다. 이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버드콥터, 그것도 농작용이 아닌 전투용입니다.”

프로펠러가 달린 새 모양의 비행기를 버드콥터라 불렀다. 아몬은 눌러쓴 두건과 입가를 가린 마스크 사이에 드러난 눈 주위를 선글라스로 가렸다. 남자를 바라보자 선글라스 액정에 남자의 신상정보가 떠올랐다. 영주들은 가니아 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몸에 생체 칩을 이식했다.

“좋아. 나는 자네 여동생을 가지겠네. 불만 있나?”

아몬은 남자의 신상정보에서 가장 값비싸고 귀중한 것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남자는 욱하는 표정이었다가, 버드콥터와 여동생을 속으로 저울질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동전은 제가 던질 겁니다.”가니아 민족은 의심이 많았다.

“앞뒷면 중 하나를 고르시죠.”

“던지는 것도, 앞뒷면도 자네가 원하는 대로.”

“그럼 영주님이 뒷면입니다. 던집니다!”

남자는 겁을 주려는 기세로 동전을 높이 튕겼지만, 아몬은 놀라지 않았다. 어젯밤 꿈을 통해 동전 던지기를 이미 보아서 다 알고 있었다. 처음 던진 동전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뒷면!”

억울하고 분노한 목소리였다. 가니아 민족은 호전적이고 반항적인 종족이었다. 씩씩대는 남자의 눈과 아몬의 눈이 마주쳤다. 영주와 민중의 눈은 똑같이 엷은 푸른색이었다.

우주의 여러 자원 중 만나라는 에너지원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이 행성 메기도에서만 채굴되기에 희귀했다. 푸른색 광물로 부피에 비해 고 에너지원이어서 귀하게 취급받았으나 중독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가벼운 중독증상은 눈동자 색이 만나처럼 엷은 푸른색이 되는 정도로 끝나지만, 심한 중독은 흡사 마약 같은 정신착란과 환각 그리고 때때로 돌연변이가 태어났다. 가니아 민족은 돌연변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였다. 그러나 어떤 영주의 아들은 이민족이기에 가니아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걸 아몬 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두 번째... 뒷면입니다.”

이제 기회가 한 번 밖에 남지 않았기에 남자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마지막 역전이라는 희망이 담겨있는 기색이었다.

“네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가면 여자로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온갖 끔찍한 일을 겪게 할 거야, 동시에 여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었다는 쾌락을 맛보게 해주지.”

가니아 민족은 명예를 중요시하기에 사소한 문제에도 결투를 벌였다. 지금 이 동굴 안에서 싸우는 결투자들은 대단한 이유로 싸우는 게 아니라, 먼저 술을 마실 권리를 두고 싸우는 중이었다. 동전을 던지는 남자의 눈이 분노로 벌개 졌다.

“쫄리다 싶으면 납작 엎드려서 내 신발을 핥아. 그럼 다 없던 일로 해주지.”

모욕당했기에 남자는 그래도 동전을 던졌다. 세 번째도 뒷면이었다.

“봤지? 오늘밤 너희 움막으로 가서 여동생을 직접 데려갈 테니 깨끗이 씻겨 놔라. 알겠나? 속옷은 빨간 색으로 입혀 놔라.”

“....”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더니 잠시 생각하고는 아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몬은 못 본 척 무시하며 결투에 집중했다. 자콘이라는 남자는 상대에게 성기를 얻어맞아 끙끙 앓고 있다가 목이 졸렸다. 입회자들이 비겁하다고 소리쳤지만 자콘이라는 남자는 목이 졸려 죽었다.

“봤지? 역시 저 친구가 이길 줄 알았어. 저건 비겁한 게 아니야. 살아남고자 하는 모범이지.”

남자는 사라져있었다. 아몬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여동생을 명예살인 할 것이다. 그리고 죽었으니 내어줄 수 없다고 하겠지.

 

우주로 진출한 지구인이 우주인으로 정체성을 바꾸어가던 네오 고대 시기. 제국의

구 지구인 통합전쟁에 강제로 복속당한 가니아 민족은 생전 처음 보는 자원 행성으로 끌려와 만나를 캐도록 강요받았다. 가니아 민족은 토가라는 나노 물질을 만들어 행성 전체에 퍼뜨렸다. 만나를 중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하지만 네오 고대 시기의 기술이라서 그런지 중독을 완전히 예방하지 못했다. 후에 제국이 더 나은 과학기술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가니아 민족은 거부했다. 토가는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라는 뜻이었다.

가니아 민족이 믿고 있는 어떤 종교의 믿음이 담겨있었다. 이들은 차라리 중독 속에서 살면 살았지. 절대 타 민족에게 도움을 받거나, 여동생을 내주지 않았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거부했다. 결투가 끝나자 입회인들이 아몬을 향해 외쳤다.

“우리 불쌍한 민중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존심 강한 가니아 민족은 구걸하지 않는다. 입회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지 않고 삿대질을 하며 당당하게 자비를 요구했다. 만성적인 가난과 가혹한 노동을 면하게 해달라는 소리였지만, 아몬은 다른 걸 물었다.

“어이! 자네들 민주주의라는 말 알아?”

공부 따위 필요 없다. 오로지 만나만 캐서 돈을 벌라. 그 돈으로 술을 사먹고, 흥청망청 놀며 아내를 울리고, 자식을 때리고 다시 광산으로 들어가 만나를 캐라. 영주들이 가니아 민족을 이런 식으로 이끌었기에 입회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어젯밤 꿈에는 사소한 동전 던지기가 나왔다. 작은 일은 또렷하고 분명했다. 태아상태에서 만나에 중독되면 머리가 기형적으로 커다란 돌연변이로 태어났다.

이상한 건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일은 마치 신화 속이야기처럼 상징과 은유로 흘러갔기에 당장에 예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상징과 은유로 요란하고 혼란스러울 뿐, 작은 일처럼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높지 않았다. 며칠 전에 민주주의를 논하는 이상한 꿈을 꿨다.

“힘 있는 자가 가엾은 민중을 돌볼 생각을 해야죠!”

아몬은 동굴 안으로 침을 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가엾은 민중 같은 소리하네. 내가 영주가 아니었으면, 힘이 없었으면 진즉에 너희들에게 도살당했어.”

사소한 시비에도 결투를 벌이고, 여동생을 죽이는 잔인한 민족이니까. 아몬은 두건 속 자신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태어났을 때 멀쩡한 줄 알았는데 뒤통수가 삐죽 튀어나온 기형이어서 돌연변이라는 게 드러났다.

돌연변이 징표를 감추기 위해 늘 두건을 두르고 다녔다. 모든 돌연변이가 자신처럼 예지몽을 꿀 수 있었을까? 살아남은 돌연변이는 아몬 자신 혼자 밖에 없어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너희 놈들에게 민주주의는 과분해.”

 

메기도 행성은 네오 고대 전 사람들이 살았던 지구의 절반만한 크기였다. 변방의 이 조그만 자원행성을 관리하는 제국의 총독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이 때를 노리고 일부 영주들이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본래 자기 고향의 영주들이었으나 제국에게 강제로 복속당한 뒤 이곳 변방으로 밀려난 세력들이었다.

독립파에 맞서는 제국숭배파는 제국에 순종했기에 분수에 안 맞게 영주로 출세한 세력이었다. 변방이라고는 하지만 영주로 안락하게 살 수 있기에 제국에 충성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니아 민족은 중립 토착민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만나를 채취할 중요한 노동자원이라는 뜻이었다.

영주들끼리 합의한 약속이 있었다. 가니아 민족은 농장기보다 병장기에 관심이 많고 저절로 싸움을 터득하니 절대 전쟁병기를 쥐어주면 안 된다. 이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면 통제할 수 없는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기에, 만나를 캐는 본래 업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영주들이 고향에서 데려온 직속 사병들과 타 행성에서 데려온 용병들로만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근데 왜 우리가 전쟁을 치루고 나면 늘 토착민들 시체가 보이지? 그 놈들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구경하러 와서 죽은 건 아닐 테고. 당신네들 수상한데? 약속을 어기면 우리도 핵무기 사용금지 조항을 어길 거야.”

제국숭배파 아몬은 독립파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억지를 쓰고는 감찰하기 위해 영주 레베나의 영지에 방문 중이었다. 레베나는 아몬의 전 애인으로 아몬이 자신의 침대 위에서 자신의 하녀와 간음하자,“더러운 인간. 당신은 짐승 이예요.”라는 말로 질책했다. 아몬은 이왕 이렇게 된 것 도망가려고 바동대는 하녀를 꽉 누르고는 제 볼일을 다 보아서 침대를 마저 더럽히고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레베나와 이별했다.

약속을 어긴다는 억지로 실태를 파악하는 척 괜히 동굴을 방문해 결투를 구경했다. 억지를 부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접촉할 구실을 만들었으니 레베나에게 투항하라고, 배신하라고 권고할 생각이었다.

“뻔뻔한 사람. 무슨 낯짝으로 여길 다시 왔어요. 됐어요. 당신에게 말을 말죠. 우리는 어떻게 제국의 노예가 됐는지 잊지 않았어요. 나에게 다른 말을 할 생각하지 말고 감찰만 마치고 떠나줘요.”

라며 레베나는 직접 만나기를 거부했다. 만나 채취광산을 돌아보고 있어서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레베나. 불쌍한 가니아 민족의 고혈로 지배층으로 편히 살면서 노예라니...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나는 다른 말을 할 때 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아.”

아몬은 레베나가 만나줄 때까지 남의 영지에서 한가하게 결투를 구경하며 마음껏 활보했다. 아몬이 동굴 밖으로 나오자 경호하는 병사들이 바싹 붙었다.

“그래도 옛날에는 짐.승.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뻔뻔한 사.람.이라 불러주고. 광산에서 돌아올 때까지 영지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다니. 이거 좋은 징조지? 다시 예전 관계로 돌아가려나?”

아몬이 자신을 경호하는 레베나의 병사들에게 들으라고 혼잣말을 했다.

“....”

병사들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몬은 결투를 구경하고 쾌활한 척 했지만, 단순한 결투구경이 아니었다. 가니아 민족이 민주주의를 논하는 꿈을 꾸었기에 민주주의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꿈속에서..

깃대에 매달린 깃발이 어디선가 흘러온 화약 냄새에 흔들렸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오셨습니다!”

“구세주께서 봉건제국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부활시켰습니다!”

깃발에는 선명한 월계수 문양이 박혀 있었다.

“저 분이야말로! 우리 가니아 민족의 왕이십니다!”

“아니다! 가니아 민족의 반인반신이다! 모두 숭배하자!”

여기저기서 발작적인 비명 같은 외침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저 분을 민주주의의 황제로 모십시다!”

“만민을 위하여 온 우주를 다스리소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민주주의라고 외치지만, 외침을 잘 들어보면 실상은 새로운 제국과 지배자였다. 물결 위를 스쳐가는 노을처럼, 다양한 이미지가 흘러갔다. 월계수가 상징하는 어떤 인물을 위하여 가니아 민족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자신들도 무수히 죽어나간다. 깃발의 그림자에 얼굴이 가린 구세주라는 인물을 위하여 가니아 민족도 수없이 죽어나간다. 왜?

저 자가 우주의 지배자 제국을 무너뜨리고, 온 우주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해서. 하지만 구세주라는 인물은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황제가 된다. 가니아 민족은 구세주를 위하여, 더는 민주주의가 아니게 됐음에도 민주주의를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다.

“구세주!”“구세주!”“구세주!”“구세주!”“구세주!”“구세주!”“구세주!”

구세주라 외치며 광신이 시작된다. 둥근 수레바퀴 같은 지옥의 문이 열리며 이글이글 끌어 오르는 지옥의 화염이 불어온 순간 꿈에서 깼다.

 

“레베나 영주님께서 돌아오셨답니다!”

호위병이 퉁명스럽게 아몬에게 말했다. 아몬은 속으로 갑작스러운 호위병의 외침에 놀랐으나 아닌 척 했다.

“아아? 그래? 이따가 남의 집 여동생 거두러가야 하는데... 오늘 참 바쁘겠네. 자네들 여주인을 만나러 가세나.”

일부러 영주라 부르지 않고 여주인이라 불렀다. 호위병들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으나 아몬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몬을 태운 버드콥터가 우주공항으로 향했다. 각 영지마다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우주공항을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대기권 밖에는 영주들의 전함들이 서로의 영지를 조준하고 있었다. 버드콥터가 우주공항에 닿자마자 아몬이 내렸다. 성큼성큼 반대편에 주차되어 있는 버드콥터에게로 다가갔다. 버드콥터 옆구리에 붙어있는 문이 옆으로 슬라이딩 되며 레베나가 내렸다.

본래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다가 영주로 벼락출세한 아몬의 아버지와 달리 레베나는 대대로 자유도시 연합의 고귀한 귀족출신이었다. 붉은 머릿결이 곱슬 대며 허리까지 내려왔고, 눈 꼬리가 아래로 살짝 쳐진 게 감정이 풍부하여 자주 눈물짓게 생겼다. 고분고분 말 잘 듣게 생긴 울보미인 같은 얼굴이지만, 왼쪽 눈 아래에 섹시한 점이 있어 강렬한 소유욕을 불러 일으켰다. 이 섹시한 점을 다시 희롱하고, 울리고 싶어서 독립파 세력 중에 레베나를 선택했다. 옛 애인에게 억지를 부려 감찰에 응하게 했다.

우아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베나가 굳어진 얼굴로 아몬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렴치하고 뻔뻔한 아몬은 그 시선을 보며 뭔가를 감지했다. 레베나는 이제 막 공항에 도착한 것처럼 연출하는 모습이지만.. 우리 쪽 버드콥터에서만 뜨거운 공기가 흐른다. 저쪽 버드콥터 엔진은 작동하지 않았다. 광산을 둘러보지 않았어. 계속 여기 있었어. 만나기 싫어서 시간을 끈 거야. 아니면 마음을 굳게 정리하거나.. 아몬은 성큼성큼 레베나에게 다가가 푹 파여진 상의에 드러난 가슴에 손을 뻗었다.

“안녕?”

“난 여기 있어요. 주인 없는 남의 영지에서 마음껏 활개 하셨다고요?”

레베나가 아몬의 손을 탁 내리쳐 거두게 했다.

“우리 포병들이 인근 산악지대를 점령했어. 이 공항을 파괴하면 궤도 밖에 있는 전함들은 보급을 받을 수 없겠지. 전함의 공중폭격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제국숭배파의 클론병사들을 무엇으로 막을 건데?”

“...감찰 중에 군사행동은 하지 않기로 약속 했잖아요?”

“당신이 더는 귀족이 아니게 된다는 소리야. 제국본토에서 이 반란을 알면 영지 몰수야. 우리 선에서 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식민지에서 문제를 일어나면, 제국의 영주나 관리들이 문제를 덮지 못했다고 추궁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영지를 몰수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국숭배파는 독립파의 반란을 조용히 덮으려했다. 그러기 위해 아몬이 계략을 짰고, 억지를 부려서 이 자리로 왔고, 지금 협박하고 있었다. 레베나가 말했다.

“제국은 곳곳에서 일어나 반란에 버거워하고 있어요. 이런 변방까지 5년 이내로 군사행동이 이루어질까요?”

“공군력이 사라진 당신의 영지부터 점령하기 시작하면 2년 내로 우리가 이기겠지.”

“치사한 인간! 감찰 중에...”

“그 약속은 그 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옳지 않아. 지금 당신이 우리에게 항복하라는 권고를 무시하게 되면 더 옳지 않을 거야.”

“...이건 선하지 않아요.”

“...강하고 약한 걸로 재는 거지. 도덕으로 판단할 게 아니야.”

“강하고 약하다는 걸로 재는 게 과연 올바른 기준일까요?”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강하지 못했으면, 영주가 아니었으면, 난 가니아 놈들에게 죽었겠지. 아몬은 레베나의 가슴에 눈을 돌렸다.

“그새 커진 모양이야.”

“저질! 늘 이렇게 당신을 미워하게 만들어요.”

“우리 아직도 사랑하는군.”

“당신의 욕정이겠죠.”

“음. 욕정 맞아.”

“난 당신이 더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포병대를 철수시키세요. 그리고 우리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어 봐요.”

“무엇을?”

“난 늘 당신이 더 나은 기회를 얻으면 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그런 기회가 없었던 걸 늘 아쉬워했어요.”

갑자기 아몬의 시야 주변으로 아몬의 병사들이 보였다. 감찰조건으로 호위를 레베나에게 맡겼기에 따로 행동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뭔가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면.. 당신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레베나가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우주선이 내려오고 있었다. 메기도 행성에 파견된 총독이 사용하는 전용선이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었던 게 아니 예요. 이번에 부임하시는 신임총독께서도 우리의 독립을 지지하세요. 힘을 모아 이 변방에서부터 제국에 대항하려 해요. 작은 반란이 아니 예요. 세상을 바꿀 혁명 이예요.”

“....”

“총독님께서는 강화보병들을 데려오셨어요. 지상군 싸움은 압도적으로 우리가 유리하게 됐네요. 진심으로 당신의 그 표정을 보고 싶었어요.”

아몬은 이제야 레베나가 왜 시간을 끌었는지 알게 됐다. 우리가 약속을 어기고 유리한 위치를 점령했다고 으스대는 사이, 더 유리한 상황을 점령했다.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됐다.

총독의 전용선에는 제국의 상징 검과 방패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월계수로 바뀌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상징이었다. 예지몽대로 정말 그가 도착했다. 미래에 독재자가 되고, 반인반신으로 숭배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학살자가 왔다.

“그 가련한 모습을 보니 당신의 모든 과오를 다 용서해주고 싶네요. 이번 기회에 우리 편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봐요. 우리 쪽으로 와요. 신임총독께서 직속 함대를 이끌고 오셨어요. 공군력도 상대가 되지 않아요.”

“...쉽게 억지에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바보는 바보 흉내를 내지 못하지.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했어.”

난 그냥 나쁜 놈이지만, 저 이는 학살의 신이야. 광신도들의 주인이 될 거야. 아몬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달려갔다. 어디선가 굉음과 함께 볼트탄환들이 발사되어 아몬의 병사들을 산산조각 냈다. 아까 분노에 떨던 호위병들이 키득대며 아몬의 병사들에게 탄환을 퍼부었다. 아몬은 즉시 통신 단말기를 꺼내어 연락을 걸었다. 제국숭배파가 아닌 제국본토에 보내는 광신호 단말기였다.

“저번 보고대로 가니아 민족에 수상한 동태감지. 현지에 부임한 신임 총독이 반란을 선언. 즉시 군사지원바람.”

꿈속에서 본 예언을 뭐라 설명할 수 없어서 수상한 동태라고 보고해 놨다. 쾅! 아몬이 뭔가가 터지는 듯한 폭발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총독의 우주선 위, 하늘 저 너머, 우주 먼 곳에서 뭔가 폭발하고 있었다.

“우린 이 폭발을 기다렸어요.”

폭발음 사이로 옛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몬은 제국에서 유학했기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인근 행성계에서 태양이 폭발했는지 우주폭풍이 발생했다. 하필 이때에!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꿈속에서 본 지옥의 화염 같이 보였다.

“정말 우리가 제국본토를 걱정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을까요? 총독님께서 가지고 계신 핵무기를 인근 행성계의 태양을 향해 발사하신다고 했어요. 태양이 폭발하여 우주폭풍이 발생하면 앞으로 20년 간 이 행성계로 아무도 올 수 없어요.”

우주폭풍이 일어나면 광신호 단말기라도 본토에 닿지 않는다. 우주선이 요동치며 요란하게 착륙했다. 착륙 진동에 떠밀려 아몬이 단말기를 놓쳤다. 단말기가 총독의 우주선 엔진에 빨려 들어가 자그만 점이 되더니 소멸했다. 어느새 레베나가 아몬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손짓하자 병사들이 어썰트 라이플로 아몬을 겨냥했다.

“제국이라 할지라도 우주폭풍을 뚫고 올 수 없어요. 우린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20년간 착실히 세력을 길러 나갈 거예요. 앞으로 우리 세상 이예요. 항복하세요.”

앞으로 너희 세상이라.. 태양이 폭발하는 모습이 꿈속에서 보았던 지옥의 화염과 똑같았다.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알 것 같았다. 지옥이 시작됐네.

“항복.”

“아.. 너무 빨리 항복하네요. 얄미워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살아남고자 하는 짓은 최악이 아니라 차악이야.”

 

“전략 고문의 의견은 보급선을 끊기보다 단시간에 벙커지대를 돌파하자라는 것이지만..”

“사령관님께서 부임하시자, 제국숭배파는 영주 나마를 총 사령관으로 추대했습니다. 나마는 워로드의 후예입니다. 대대로 우주 군벌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여자입니다. 보급선을 파괴하면 다른 보급선을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의 민병대로 적의 주력병력을 먼저 줄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우리 가니아 민병대가 많이 희생되지 않을까?”

독립파 사령부 작전회의실. 아몬은 과거에는 신임 총독이었고, 지금은 독립파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메타트론과 대화 중이었다. 메타트론은 키가 2미터에 가까웠고, 대머리에 팔이 길어 무릎까지 닿았다. 얼굴은 험상궂은 아저씨였지만, 말씨는 정중하고 태도에는 매너가 넘쳤다.

“...감수해야죠.”

“아니야. 아니야. 자네의 전략안은 언제나 탁월했지만 가니아 민병대를 대하는 방식이 너무 거칠어. 이 친구 사람 험하게 굴리는군. 어이 폴코? 어딜 가나?”

메타트론이 허물없이 부관을 불렀다. 폴코는 민병대 담당자로 가니아 민족주제에 근 1년 만에 벼락출세했다.

“아내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 진즉에 가봐야지!”

“아들입니다! 아들!”

지구인에서 우주인으로 바뀐 후, 아직도 아들에 집착하는 민족은 가니아 밖에 없었다. 아몬은 저 벼락출세자가 일찍 퇴근하면 생각해놓은 전략이 꼬이기에 부지런히 대안을 궁리했다. 저 이가 사령관과 대화하고, 내가 일찍 퇴근해야 하는데..

“휴가를 주지. 다음 주쯤에 돌아오게나.”

“아니요! 내일 당장에 돌아오겠습니다!”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야. 자네의 부인과 아들을 위해서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죠.”

“자네가 받아줘서 내가 진심으로 고맙네.”

참 좋은 상관이었다. 같은 민족이니까. 메타트론 본인도 가니아 민족이었다. 제국은 가니아 민족을 굴복시킨 후 두 갈래로 쪼개었다. 한 쪽은 이곳으로 끌려와 만나를 캐도록 강요받고, 다른 한 쪽은 우주 먼 곳으로 보내져 이곳보다 더한 변방을 개척했다고 했다. 메타트론의 눈은 붉은 색이었다. 가니아 랍비들이 말하길 만나에 중독되기 전 본래 가니아 민족의 눈은 붉은 색이었다고 했다.

“이런 힘든 순간에 태어난 아이라니. 우리가 얼른 전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일세.”

폴코가 나가자 메타트론이 인자한 표정으로 아몬에게 말했다. 아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숭배파는 우주폭풍이 걷히는 20년 뒤까지 저항할 계획이고, 자신은 독립파 전략고문이라 하지만 제국숭배파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항복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19년 내내 허술한 전략안을 내놓으며 발목을 잡을 생각이었다.

메타트론은 변방에서 수재로 소문났기에 제국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승승장구했다. 제국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독립행성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여 민간인들까지 학살하자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의 몸집이 커질수록 변방 통제가 힘들기에 곳곳에서 강제로 복속당한 세력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래도 제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진압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일부러 우주폭풍을 유도하여 제국이 쳐들어올 수 없는 안전지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메기도 행성을 시작으로 인근 행성들을 차근차근 점령하여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다. 20년 뒤에는 이 변방을 박차고 나아가 제국본토 행성들을 노릴 계획이었다.

“우리 힘으로만 전쟁을 끝낼 수 없어. 제국숭배파는 클론공장을 밤낮없이 쉬지 않고 가동 중일세. 그 공장에 우리 가니아 민족이 일하고 있네. 이들도 우리 편으로 돌려야 하네. 왜 그들은 같은 민족을 적대하는 길을 걷고 있을까?”

“제국숭배파가 더 강하다고 생각해서이겠죠.”

아몬은 가니아 민족인 메타트론 앞에서 본래 가니아들은 호전적이고 싸움을 좋아해서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라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아몬이 알기로는 가니아 민족은 자신들은 같은 민족을 죽이고, 모욕할 수는 있어도, 다른 민족이 뭐라 고 하는 걸 조금도 참지 못했다.

“그래서는 안 돼. 강하다고 굴복하면 제국의 논리이고, 포식자 짐승의 사고방식이야. 우리는 사람이야. 약육강식 논리에 고개를 숙일 수 없어. 이에 대항하는 선한 영향력이 필요해. 레베나 영주가 말했네. 자네가 그럴 수 있다고.”

“예?”망할 년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난 네오 고대 전에 있었던 정치체제 중에 민주주의라는 것에 관심이 많네. 자네가 남들보다 얼굴이 두껍고, 행동이 대담하기에 훌륭한 선전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레베나 영주에게서 들었어. 나와 함께 선한 영향력을, 약육강식에 대항하는 진리를 퍼뜨리세. 민주주의!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워지는 그런 세상 말이야. 독립파 영주들은... 다 수긍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쓰러뜨린 후 민주주의 체제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했어. 제국, 압제자가 사라지면 영주들도 더는 현재 지위를 고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향을 내비쳤네.”

영주 직을 스스로 포기한다고? 미친놈들. 아몬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희 가니아 민족은 하등하니까,

“선지자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메신저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중요합니다.”

메타트론이 원하는 대로 생각이 떠오르며 저절로 말이 나왔다.

“그렇지. 그래야 할 거야. 선지자들은 목소리가 참 크지. 우리 가니아 민족은 목소리 크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

아몬은 폴코의 퇴근으로 엉망이 된 전략의 대안을 떠올렸다. 부지런히 한 손을 뒤로 옮긴 후 통신기를 조작했다.

“계몽시키는 데는 시간이 많이 들 겁니다.”

“우리 가니아 민족을 시작으로 민주주의가 다시 부활하게 되면.. 이 우주는 더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지옥이 아닐 거야. 시간이 많이 들어도 꼭 해야지.”

아몬은 통신기를 들어 메타트론에게 보였다. 누군가 호출신호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인근 포대에서 배치문제로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직접 가봐야겠습니다. 혹시 더 이야기하고 싶으시면 기다리시겠습니까?”

감히 상관에게 기다리라고 한다. 같은 민족에게 좋은 상관, 좋은 사람이었는데, 다른 민족에게도 그럴까?

“그래. 우리 이 이야기로 밤을 새서 논의하게나. 얼마든지 자네를 위해 시간을 내줄 수 있어. 자네가 다녀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겠네.”

2미터에 가까운 거인이 가슴을 두드리며 굳은 신의를 표현했다. 좋은 사람이어서 기다린다고 말할 줄 알았기에 아몬은 살짝 웃어보이고는 방을 나왔다.

 

꿈에서 구세주라 예지됐던 메타트론이 이곳으로 온 지 1년이 지났다. 그 후 이 메기도 행성에 변화가 생겼다. 만나가 기화되는 성질이 있다는 게 처음 발견됐다. 광물이 기화되다니.. 여태까지 왜 몰랐을까? 기화된 만나는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온 땅을 적시고, 안개가 되어 아침을 뿌옇게 만들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야. 그 분이야말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줄 구세주야.”

가니아 민족들이 메타트론을 구세주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로지 한 가지, 한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오 고대에 만들어진 토가라는 나노 물질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심층 레이더에 더는 잡히지 않았다. 이건 왜인가? 아몬이 의문을 가지니 일자무식처럼 아는 게 하나도 없어도 가니아 민족이라는 이유로 장교가 된 폴코가 말했다.

“토가는 네오 고대 때부터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약속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줄 분이 오셨으니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토가는 저절로 소멸 중입니다.”

“그러면 만나 중독은 어찌하나?”

“만나조차 저분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예언서에 그리 나와 있습니다. 예언서를 믿기에 토가를 만들었고, 저 분을 기다렸습니다. 만나 때문에 우리 민족이 이곳에 못 박혔고, 중독에 시달려 끔찍한 괴물들을 낳았습니다. 대대로 우리를 핍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대로 만나가 비와 안개가 되어 저 분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만나는 이제 우리의 팔다리가 되어줄 겁니다. 토가는 저 분이 오실 때까지 잠시 우리를 지켜줄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더는 필요가 없습니다.”

“...예언서?”

콧구멍이 넓고, 코 주위에 점이 있어서 미련해 보이는 폴코가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가니아 랍비들이 두꺼운 종이책을 가지고 다니는 걸 봤는데.. 아몬은 웬 미신인가 쉽게 생각했는데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단단한 믿음이었다.

만나는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내리고, 안개가 될 수 있다. 때마침 만나 중독을 막아주는 토가라는 장벽이 사라졌다. 심각한 만나 중독이 퍼지기 시작했다. 억누를 수 있는 토가가 사라지자 가니아 민족은 만나에 의해 집단 환각증상을 일으켰다. 아침에 만나 안개를 만나면, 출근하는, 근무지 교대하는, 식사준비를 하는 가니아 민족들이 간질 환자처럼 등에 멍이 들 정도로 대로를 뒹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이 세상 아닌 곳을 보는지 눈이 진한 푸른색으로 변해 눈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발작이 끝나고 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이, 중독과, 정신착란이, 광기가 만연한 일상이었다.

대낮에 만나 비가 내리고 나면, 중독증상으로 정신이 알딸딸하기에 저녁쯤에 수십 명씩 마을회당이나 공터에 모여 난교를 벌였다. 신음소리 사이로,

“우리의 구세주이시여!”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을 이 변방에서 이끌어 더 나은 약속의 땅으로, 가장 풍요하고, 우월한 곳으로 이끌어주소서!”

“우리 민족을 가로막는 누구든 짓밟겠습니다!”

라는 외침이 또렷했다. 만나의 비와 안개로 인해 일상적으로 기분이 붕 떠있고, 쾌락에 쩔어 버렸기에 더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근거도 없이 우리 민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드디어 우리 민족에게 봄이 왔어!”

하필 이 행성의 봄의 기간이 20년이어서, 메타트론이 만들어낸 20년의 안전지대와 일치했다. 예언서에도 가니아 민족이 온 우주를 경작하기 전 씨를 뿌리는 20년의 세월이 적혀있다고 주장하는 랍비들의 모습이 흡사 예언이 메타트론 한 사람만을 위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듯 했다.

메타트론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뭔지 몰라도 응하겠지. 이 흐름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몬은 꿈에서 봤다. 가니아 민족은 메타트론을 위해서 온 우주를 죽이고, 또 죽이고, 학살한다.

아몬은 그래서 호출기를 조작해 자신에게 호출했고, 메타트론에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은 오늘 정말 꼭 일찍 퇴근해야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아몬이 사령부 진지를 방어하는 포대로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수레 하나가 지나갔다. 수레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분명 시체였다. 시체를 끄는 가니아 노인에게 물었다.

“전사자들 시체를 왜 이리로 가져오나?”

“전사자들이 아닙니다. 만나 중독으로 인해 돌연변이들이 태어났습니다.”

“....”

아몬은 최근 만나중독으로 인해 돌연변이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강에 버려졌다고 들었다.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강에 내던질까 생각 했는데.. 부모 대신 강에 내다버리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폴코님 댁으로 갑니다. 화가 나서 펄쩍 뛰고 계십니다. 돌연변이가 태어나서 재수 없으니 빨리 치우라고.. 나으리.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노인이 신생아 시체 수레를 끌며 멀어지자, 아몬은 땅에 침을 뱉었다.

“끔찍한 야만족 놈들.”

아몬이 메타트론에게도 슬쩍 이런 얘기를 했으나, 메타트론은 같은 가니아 민족이라서 그런지,

“...돌연변이는 우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지. 제국본토로 가지 않는 이상 신체개조 시술도 비싸고...”

흐지부지하게 넘어갔다. 밤마다 모여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한데 뒤섞여서 난교하며,

“메타트론!”

사령관의 이름을 구호처럼 외친다. 독립파 영주들이 가신들을 이끌고 광란 속에 뒤섞여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우릴 구해주실 분. 우리를 약속으로 땅으로 데려다주실 거라 예언되어 있는 분!”

“그러니 우리도 저 분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자. 말하면 듣고, 행동하면 따르고, 생각하시면, 소원을 들어드리자!”

특별히 만나의 비나 안개가 돌지 않아도 매일 밤마다 거대한 화롯불을 켜놓고는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며 메타트론을 마치 신처럼 숭배했다. 아몬은 사령부 숙소에서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살피며 왜 저들이 돌연변이들을 죽였는지 이해했다. 돌연변이인 자신의 눈동자는 아직도 엷은 푸른색이었다.

저들은 만나에 만성으로 중독됐기에 진한 푸른색. 돌연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만나에게 자신을 내어줬기에 면역이 있어서 더는 진해지지 않은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환각, 광란, 춤도, 숭배도 모두 아몬을 비껴갔다. 집단하고 뼛속까지 다르니 분명 생김새 외에 뭔가 이질감을 느끼고 죽이는 게 분명했다. 너는 왜 우리와 같지 않아?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해야지.

네오 고대 전 우화가 떠올랐다. 마시면 바보가 되는 우물물을 마시고, 모두가 바보가 되어가자, 현자는 처음에는 마시지 않고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똑같이 우물물을 마시고 바보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돌연변이들은 만성중독이 되지 않도록 면역이 있기에 저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다. 끝까지 바보가 되지 않으려는 현자였다. 바보가 되고 싶어도, 바보가 될 수 없다. 그러면 바보들이 죽이려 들겠지. 앞으로 바보가, 똑같이 춤추고, 난교하며 미치지 않으면 죽이는 세상이 올 터였다.

 

아몬은 포대에 도달했다. 방어포대의 조종석은 반구형의 방탄장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포대는 방탄장벽 밖으로 삐쭉 나와 있었다. 조종석 안으로 들어오자 어제 미리 해치워두었던 가니아 포병대원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본래 폴코라는 미련하게 생긴 야만족 놈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메타트론과 대화하며 비위를 맞춰주고, 아몬 자신은 일찍 퇴근해서 이리로 왔어야했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조종석에 앉아 조준렌즈에 눈을 갖다 대자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렌즈 안에 어떤 건물의 창문이 보였고, 그 창문 안에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거구가 얌전히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몬을 기다리는 메타트론이었다.

렌즈와 연동된 모니터에 풍속과 목표물과의 거리에 대해 수치가 떠올랐다. 어제 미리 포격각도를 맞추어 놨기에 안 봐도 다 알 수 있었다. 한 번에, 한 방에 끝낼 수 있다는 숫자들이었다. 일이 끝난 뒤, 탈출할 버드콥터도 준비해 놨다. 아몬은 포대발사버튼에 손을 올렸다. 19년 동안 이곳에서 부대낄 필요가 없었다. 지금 누르면 구세주가 뭐고 단 번에 끝난다.

저자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리 숭배하게 만들까?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를 위해 예비 되었던 예언서라는 미신만 없었다면, 자신의 예지몽만 아니었더라면 구세주라는 걸 믿지 않았을 터였다.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나, 신의 한 조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몬 자신과 대화할 걸 기대하는 순박한 얼굴과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이 아몬의 가슴 속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어냈지만.

“잘 가시오. 아직 구세주가 되지 못했던 총독각하.”

쾅! 발사는 엉뚱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사령부 진지 밖에서 포탄이 날아 들어와 아몬의 포대를 산산조각 냈다.

 

탕! 탕! 탕! 볼트탄환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 높은 곳에 홀로그램이 반짝였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진 해골무덤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아몬은 포대잔해를 헤집고 나오자마자 홀로그램 깃발을 보고는 이곳을 급습한 상대가 나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방풍로브의 두건이 찢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뒤통수를 더듬어보니 돌연변이의 증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탕! 탕! 탕! 볼트탄환이 발사되는 소리와 함께 똑같은 얼굴, 똑같은 체격의 클론병사들이 진지를 휘젓기 시작했다. 비명과 저항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아악! 어머니!”

앳된 얼굴의 소년병사가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도와주세요!”

같은 분대원으로 보이는 소년병사가 아몬에게 한 팔을 내밀며 소리쳤다. 아몬은 못들은 척 잔해를 파헤쳤다. 어제 해치워두었던 포병대원의 헬멧이 필요했다.

“살려주세요! 통신기가 있으면 이곳으로 지원을 불러주세요!”

선택의 순간이었다. 저 소년병은 가니아 민병대 소속이었다. 만약에 지원을 부른다면..

“네 가니아 친구들을 부르면, 그들이 과연 나도 구할까? 아니면 죽일까?”

“예?”

소년병은 죽은 소년병의 시신을 내려놓고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아몬은 잔해를 파헤치는 사이, 등 뒤로 다가온 소년병의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돌연변이! 괴물!”

간단한 반응과 함께 철컥. 발사하기 위해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 아니야. 그냥 나쁜 놈이야.”

아몬은 손만 뒤로 돌려서 플라스마 권총을 발사했다. 지직- 짧은 정전기 소리와 함께 타들어가는 냄새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탕! 탕! 볼트 탄 소리가 점점 줄어드는 게 메타트론 아니면 나마의 승리가 확실시 되어가고 있었다. 전장이 말끔해지기 전에 서둘러 헬멧으로 뒤통수를 가려야했다.

파헤친 잔해사이로 포병대원의 시체가 드러났다. 아몬이 시체에게서 헬멧을 벗겨내어 착용한 순간,

“꼼짝 마! 손들어!”

클론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몬을 포위했다. 아몬은 제국숭배파의 핵심병력 클론병사에 대해 잘 알았다. 저들은 권위에 약하다.

“이 개자식들아!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내가 바로 메타트론이다! 너희 조잡한 복사본들이 감히 제국의 관료를 위협하느냐?! 누가 너희의 원본을 만들었느냐?! 누구의 기술로 너희가 삶을 부여받았느냐?! 메기도 행성의 총독이자 제국의 신실한 종복 메타트론의 이름으로 명한다! 당장 총을 버려라!”

살아남고자 자신이 방금 비열하게 속이고, 비겁하게 죽이려 했던 사람의 신분을 사칭했다.

“....”

클론병사들은 병사 헬멧을 쓴 아몬이 총독의 권위를 내세우자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디론가 무전을 보냈다. 무전에 응답하듯이 버드콥터 한 대가 인근에 착륙하려 했다. 깡총거리는 느낌으로 한 여자가 착륙하기 전에 뛰어내렸다. 키는 작지만 비율이 좋아 다리가 길어보였다. 얼굴 안색은 하얗다못해 창백하여 흡혈귀 같은 느낌이었다. 은발머리카락. 머리 곳곳이 삐죽거리는 게 개성 있는 더벅머리였다. 눈은 엷은 푸른색이었고, 코와 입가는 방독면으로 가려져있었다.

“야 니가 메타트론이라고?! 썅놈아! 뒤질려고!”

당장에 아몬에게 달려와 퍽! 다짜고짜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덩치 큰 겁쟁이가 버드콥터로 도망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어디서 거짓말이야! 너 대체 누구야?”

메타트론을 사칭한 보람이 있었다. 예상대로 나마가 직접 왔다.

“...나야.”

“누구세요. 썅놈아. 헬멧 바이저 올려봐.”

아몬은 1년 전, 자신과 같은 편이었던 나마에게 얼굴을 드러냈다.

“햐! 배신자 놈이네요~ 제국을 배신한 역적이 오자마자 바로 그쪽으로 붙은 놈이 제국의 권위를 사칭해?”

“...살아남고자 하는 짓은 최악이 아니야. 차..”

“차악이지. 네 유행어를 내가 모르겠니?”

나마가 짝 달라붙은 검은 색 라텍스 슈츠 허리에 고정된 플라스마 권총을 뽑아들었다. 아몬을 겨냥했다.

“네 유언을 네 유행어로 대신하자?”

“잠깐만 설명할 시간을 줘!”

“해봐. 진짜 잘해야 할 거야.”

아몬은 어쩔 수 없이 우주공항에서 바로 마주쳤기에 항복했던 일과 일부러 무리한 전략안을 내어서 가니아 민병대를 소모시킨 전과를 설명했다.

“어쩐지 무지렁이 놈들이 죽어라 돌격만 한다. 이상하게 생각했지.”

“우리 쪽에 이득이 됐잖아.”

“어디서 은근슬쩍 우리 편이래? 덕분에 우리 포탑이 수도 없이 박살나서 수리할 자재가 부족할 지경이야.”

만나가 기화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견된 일과 춤, 숭배, 난교, 광기, 메타트론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것 같은 예언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 놈이 구세주라 불린다는 건 우리 쪽 가니아 애들이 하도 노래를 불러서 잘 알아.”

“그런데도 클론공장에서 일해?”

“일을 안 하면 사지를 하나씩 뽑으며 비명으로 노래를 부르게 만들었거든. 비명 중간에 구세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라고 추임새를 넣더군.”

“....”

“이 방독면 보여? 만나가 갑자기 비와 안개가 되어버리고, 토가는 가출해버렸기에 만성중독을 피하려고 우리가 개발했어. 춤? 난교? 우리 쪽이라고 없었겠어? 기미만 보여도 모두 노래를 부르게 만들었지. 그래도 악착같이 하려고 해. 구세주라며... 역적은 어떤 사람이야?”

아몬은 메타트론에 대해서 생각했다. 1년간 가까이 있었지만,

“구세주로서의 면모는 안 보여. 좋은 사람일 뿐이야. 내가 봤던 사람들 중에 손으로 꼽을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는 해.”

“그 걸로는 부족해. 1년간 함께 있었는데도 가니아 잡놈들이 왜 열광하는지, 구세주로서의 면모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우리 쪽에서 널 데려갈 필요가 없네. 잘 가라.”

플라스마 권총 끝에 초록 불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냐. 난 오늘 메타트론을 죽이려 했어! 방금 그랬다고!”

“그 말을 누가 믿어?”

“...주위 놈들을 보내고 단 둘이 이야기하자.”

“니가 명령할 상황이 아니야.”

“이 말이 내 마지막 말이 되어도 좋으니 주위 놈들 물러서게 해봐. 보여줄게 있어.”

나마가 자신의 목덜미 쪽 라텍스를 잡아 뜯자 탁! 요란한 고무소리가 났다. 클론병사들이 멀리 착륙돼 있는 버드콥터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아몬은 헬멧을 벗고는 뒤통수를 내보였다.

“봐.”

“세상에... 너 병신이었어?!”

설명했다. 예지몽. 꿈. 민주주의. 월계수. 메타트론. 예언서. 환각에 빠지지 않는다. 라는 장점.

“내 약점을 넘겨줬어. 네가 어딜 가서 내가 돌연변이라고 하면 내 권위는 붕괴돼.

우리 고향에서 데려온 가신들도 날 따르지 않을 거야. 누가 병신 말을 듣고 싶겠어.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부모님과 유모가 죽자 나 혼자 온 세상을 속여 왔어. 넌 내가 어떻게 비루하게 살아남았는지 알게 됐고, 내가 살아온,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삶을 쥐고 있어. 이제 네가 원한다면 나를 한 번에 끝낼 수 있게 됐어.”

아몬은 떨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었고, 무릎 뒤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날 보내줘. 메타트론을 죽여야 해. 거짓 전략안으로 속이려 했는데 속지 않아. 수재소리 들으며 사관학교 입학했기에 전쟁에 프로야. 전쟁으로 메타트론을 죽일 수 없어. 오늘같이 뒤에서 찔러야 해. 비겁하게 암살해야 돼. 그러지 않으면 온 우주가 지옥으로 변하고, 너도, 나도 영주로서 계속 안락하게 살 수 없게 돼. 난 대학살의 생존자야. 돌연변이라고 학살하는 지옥에서 살아남았어. 이번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대학살이 시작될 거야. 그럼 누굴 먼저 죽이겠어? 우리 같은 영주, 귀족, 제국의 신하들이야. 이번 대학살에는 나처럼 운 좋은 생존자가 없을 거야. 우리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같은 개소리보다는 제국이 존속해야 돼.”

대학살을 피하고 영주로서 계속 안락하게 살고 싶다. 너무나 뚜렷한 욕심이기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순수하게 고백했다. 나마가 아몬의 가랑이를 쳐다봤다.

“너 본래 레베나 년과 시시덕거렸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늘 이 가랑이 사이에 있는 걸 갖고 싶어 했지. 레베나 년이 부러웠어.”

나마가 아몬 곁으로 다가오더니 아몬의 엉덩이를 음탕하게 꽉 쥐어짰다. 아몬은 입을 꽉 물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돌연변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부정한 몸이니까 더 나빠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겠군. 그래 더 타락해. 뒤에서 찌르는 야비한 놈이 돼.”

“충분히 이 정도만 나빠도 돼.”

“닥쳐! 네 약점을 알았으니 넌 이제 내꺼야. 난 남들이 치를 떠는 끔찍한 악당과 같이 침대를 뒹굴고 싶어. 그냥 우리를 배신한 놈인 줄 알고 졸장부라 생각했는데, 진짜 개자식이 될 싹이 있었어. 풀어줄 테니 돌아가서 구세주를 죽이고 야비한 악당이 돼.”

나마가 말을 마치고는 아몬에게 플라스마 권총을 발사했다.

“개새끼로서 제국에 충성해라!”

나마의 기습공격으로 기존의 저지선이 붕괴됐다. 사령부는 나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네오 고대시절 이곳에 처음 온 탐사대들이 세운 전초기지였다. 이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건물들은 제국의 취향을 반영하여 지붕이며, 첨탑이며 뭐든지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있었다.

아몬은 나마의 클론병사들에게 사로잡힐 뻔 했지만, 영웅적인 분투로 버드콥터 한 대를 탈취하여 이곳까지 날아왔다. 다만 다리에 맞은 플라스마 상처가 심하여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상처 괜찮으십니까?”

“그럼 괜찮지 않기를 바래?”

코에 점이 있어 미련하게 보이는 폴코와 눈이 앞이 아닌 물고기처럼 옆에 달린 것 같은 헤넨이 찾아와 아몬에게 안부를 물었다.

“수술경과가 좋다고 합니다.”

아몬은 지팡이를 짚으며 병원 정원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마주친 가니아 민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어느 때 보아도 절대 좋아지지 않을 터였다.

“좋아? 뼈와 살이 녹아서 실리콘 피부로 대체하는데? 부러우면 자네도 시술받지 그래?”

폴코는 입을 다물었고, 헤넨이 어눌하고 단조로운 어조로 따졌다.

“가니아 민병대에 내리신 무리한 돌진명령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무슨 권리로?”

“저희는 가니아 민병대 장교들입니다.”

“훌륭한 군대지.”

“가니아 민병대는 메타트론 사령관님의 직속입니다. 빈정대지 마십시오!”

아몬은 화를 내도 억양이 없는 어눌한 말투를 통해 헤넨이 굉장히 고지식하고 답답한 타입이라는 걸 알았다.

“환자한테 뭘 원하는 거야?”

“왜 무리한 명령을 내렸는지...”

“너희 가니아 놈들에게 작전도 허락받아야 해? 너희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며 따라야 해! 알고 있어?”

“방금 그 발언은 월권입니다. 우리에게 죽으라고 명하실 분은 메타트론님 한 분 뿐입니다.”

“작전은 그 분을 통해서 결정됐어. 하극상 끝났으면 이제 꺼져.”

“그 분에게 무리한 권고를 한 것에 대해...”

“너희들의 구세주에게 못 따지니 나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거잖아?”

헤넨은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등 뒤로 뭔가를 조작하고 있는 손이 잠시 멈추었다. 폴코가 말했다.

“메타트론님께서 찾으십니다. 저희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아몬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그 좋은 사람이 환자한테 오라 가라해? 자기가 직접 찾아와야 할 텐데?

“거짓말. 다리 다친 환자한테 직접오라고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럼 저희가 없는 말을 지어내겠습니까?!”

헤넨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고함마저도 답답하게 들렸다. 폴코가 손바닥에 작은 손거울 같은 레이더를 올려서 아몬에게 내보였다.

“여기보시면 다른 영주님들의 콜사인들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영주들은 만약을 위해 위치추적에 동의했기에 영주들의 위치가 표시 돼있었다.

“그래도 내가 가지 않으면 사령관님 명.령.위.반.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좋아. 사령관님 명령이라면 가지.”

 

가니아 장교들이 아몬을 데리고 간 곳은 도시의 재판소였다. 아몬의 눈앞에 재판장자리가 반원형을 그렸다. 독립파 영주들이 재판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몬의 눈에 구석에 앉아 고개를 돌린 레베나의 처연한 모습이 보였다.

“아몬! 우린 그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고자 한다!”

영주 베파르였다. 나이들어 머리가 희어지자 하얗게 염색했고, 장기가 노쇠하자 젊은이들의 장기를 사들여 수명을 연장한 늙은이였다. 제국본토의 기술이라고 해도 육체에 너무 많이 손을 댔기에 얼굴에 핏기가 없어졌다. 그러자 얼굴마저 진한 백색으로 화장했다. 아몬은 가니아 장교라는 것들의 주장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군사재판이라니.. 생각보다 함정이 컸다.

“제가 왜 군사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베파르는 재판장 앞의 단상에 올라 아몬을 내려다봤다.

“그대는 무리한 전략안으로 가니아 민병대에 타격을 입혔다. 나마는 민병대가 약해진 것을 알고 대담하게 기습공격 했어. 이제 그 상처를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뒤늦었지만 우리는 잘못된 인과율을 따져 앞으로의 군사행동에...”

“그건 핑계고. 지금 저 스파이라고 의심하는 거지요? 제가 플라스마 한 대 맞고 살아 돌아왔다고요. 포로로 잡히거나 죽었어야 하는데.”

“...나마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

“메타트론 사령관님도 빠져나가셨습니다.”

“대신 많은 민병대가 죽었지. 자네는 홀로 빠져나왔어. 게다가 전략회의의 기록을 보면 나마가 이끄는 제국숭배파에게 유리한 전략안을 냈어.”

“베파르님. 심증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재판 메타트론 사령관님의 승인을 받았습니까?”

“....”

“영주들 관행상 이런 류의 추궁은 먼저 원로원을 구성하고는 영주들의 특권을 배려하여.”

“닥쳐! 영주 놈들!”

뒤에서 아몬을 감시하던 헤넨이 소리를 빽 지르고는 녹음기를 꺼내자,

“너희 가니아 놈들에게 작전도 허락받아야 해? 너희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며 따라야 해!”

아까의 말이 흘러나왔다.“개자식!”아몬이 뒤돌아보니 배심원 자리에 가니아 장교들이 바글바글 서있었다.

“저 놈의 엉터리 전략 때문에 우리 민족이 수없이 많이 죽었어!”

“누구보고 죽는 시늉하라는 거야! 우린 노예가 아니야! 아무도 우리에게 죽으라고 할 수 없어!”

“영주 놈들! 악질지주! 제국의 앞잡이! 민주주의의 걸림돌!”

“영주 놈들도 잘못하면 죽여야 해! 특권 따위 없어! 민주주의는 모두가 평등해!”

저 놈들이 언제 민주주의라는 어려운 단어를 배웠지? 벌써 다 퍼지고 있구나. 아몬은 간담이 서늘했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 표정을 숨겼다. 영주들은 가니아 민족들이 자신들을 욕하자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몬은 독립파 영주와 가니아 장교단 사이의 불화를 감지했다. 아몬이 슬쩍 뒤돌아보자 폴코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다. 아몬은 폴코가 돌연변이라고 자기 자식을 내버렸던 일을 떠올렸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민주주의라고 으스대기는. 너희 놈들에게 그런 사치는 없다.”

“여러분 모두 조용히! 이 영주 놈이 뭐라고 중얼대고 있습니다!”

베파르가 폴코의 외침을 듣고는 빈정댔다.

“아몬. 이 난리를 만들어놓고는 할 말이 있나?”

아몬 역시 녹음하고 있었다. 녹음기를 꺼내어 재생시켰다. 뭔가 수상하기에 강조하려고 일부러 악센트를 넣어서 발음했다.

“그래도 내가 가지 않으면 사령관님 명.령.위.반.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좋아. 사령관님 명령이라면 가지.

아까의 말이 흘러나왔다.

“모두 들으셨습니까? 가니아 장교들은 명령을 사칭했습니다. 게다가 총 사령관 메타트론님이 인정한 지휘관인 영주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재판은 저들이 받아야 합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대항하자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모두 조용해졌다.

“....”

헤넨은 답답한 타입이기에 속임수에 능숙하지 못했다. 아몬은 헤넨이 자신에게 말을 걸며 손을 뒤로 돌리고는 뭔가 조작하는 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 베파르가 방청석을 둘러보고는 맞은 편 가니아 장교들까지 훑어보더니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풋! 이 난리를 만들어낸 죄인을 처벌하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을... 복잡하고 느린 행정을 거쳐야 할 이유가 있나? 법보다 총칼이 가까운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

두 집단의 긴장을 해결하려면, 두 집단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인 아몬을 죽이는 게 상책이었다. 정당한 명령이나 논리, 이성 따위 없는, 마치 집단 따돌림 같은 억지였다. 아몬은 돌연변이 학살 트라우마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마녀사냥입니다!”

“닥쳐! 친애하는 가니아 제군들. 저 자는 분명 나마가 일부러 풀어준 스파이다! 여러분들의 손으로...”

“이건 마녀사냥일세!”

메타트론의 목소리였다. 출입구에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배심원 자리를 지나 아몬의 곁에 섰다. 그리고 감동적인 연설이 시작됐다. 배신과 속임수가 판치는 이 전쟁터에서 사람을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민주주의를 통한 평등과 자유, 정의를 위해 우리 사이에 금이 갈수록 서로를 더욱 껴안아야 한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추운 겨울이 있다. 마음에 따스한 불이 붙을 때까지 서로를 껴안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얼려 죽일 거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아몬은 딴 생각 중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걸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 이끄는 리더를 알 수 있다. 이 쪽 사회는 개새끼였다.

“사실 모든 결정을 내린 내가 무능한 탓이네. 아몬 고문은 잘못이 없어. 민병대의 죽음은 모두 내 잘못이네. 난 절대 내 잘못을 회피하지 않겠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겠네.”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한 가지 더 빌겠네. 아몬 고문에게 원한을 품지 말고, 해를 끼치지 말라고 간청하겠네! 그를 내 형제처럼 대해주게나!”

그런데 리더는 괜찮았다.

 

군사재판 다음날. 아몬은 사령부 건물 최상층에 있는 메타트론의 개인 방으로 초대받았다. 총 사령관의 방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간소한 방으로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현관과 이어진 칸은 거실이었고, 다른 칸은 침실이었다. 아몬은 거실 칸 테이블에 메타트론과 마주앉았다. 벽면 전체가 유리였기에 노을 지는 게 훤히 내다보였다.

“어제 레베나 영주가 그렇더군. 자네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이 말을 증언하려 그 자리에 갔다는데, 기회가 없어서 말 못해서 미안하다고 자네에게 전해달라는군.”

“예. 마음은 전달 받았습니다.”

그 가슴도 전달 받고 싶지만. 아몬은 레베나의 큰 가슴을 떠올렸다.

“...어제의 일은 분명 내 무능에 대한 질책이야. 나마의 기습으로 민병대의 사기가 위축됐어. 게다가 영주들이 자신들의 병사를 아끼느라 소극적으로 나오니 불만이 쌓여 있는 게 당연하지. 자네에게 부당하게 화풀이했던 거야. 모두 내 잘못일세. 내 불찰이니 용서를 구하네.”

아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레베나의 뽀얀 젖가슴을 떠올렸다. 메타트론은 분명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젯밤에,

 

꿈을 꿨다. 인근 행성계 곳곳에서 만나가 관측된다. 더는 이 메기도 행성에서만 나는 희귀자원이 아니었다. 20년 뒤 우주폭풍이 걷히면 만나가 온 우주로 진출한다. 그러면 우주 곳곳에 만나의 비와 안개가 피어오른다. 모든 사람들이 만나에 중독된다.

“구세주!”“구세주!”“구세주!”

광란의 춤과 난교, 비명 같은 외침도 퍼져나간다. 모두의 꿈에 메타트론이 떠오르고, 담벼락에 메타트론의 초상화가, 문서에는 메타트론의 이름이, 만나의 환각 속에서 사람들은 오로지 한 인물만을 떠올린다.

구세주 메타트론 외에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 해골 위에, 또 해골이, 그 위에도 해골들이.. 해골 피라미드 최고 정점에 메타트론이 앉아 있었다. 배심원 자리에서 보았던 가니아 장교들이 메타트론을 주위에 서 있었다.

“보아라! 모든 민족이 우리 민족을 우러러보고, 두려워하노라! 바로 이 자리가 우리 민족이 영원히 머물 땅이다!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준다는 전설이 이루어졌노라!”

“우리는 구세주께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러니 우리도 구세주의 뜻을 이루어드리자! 온 우주에 민주주의를! 제국의 잔재를 남김없이 죽이고, 불태우고, 강간하고, 파괴하고, 지워버리자!”

해골 피라미드.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는 상징과 은유였다.

 

“이보게. 내 말 듣고 있나?”

“예. 듣고 있습니다.”

아몬은 레베나의 젖가슴과 해골 피라미드 꿈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지만 아닌 척 했다.

“재판소에서 봤던 대립 기억나나? 가니아 민족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가니아 민병대와 영주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리가 없지. 영주들은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민병대에 위협을 느꼈는지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아. 자신들 병력을 많이 소비시켜서 약해지면 민병대에게 잡아먹힐까봐 걱정하고 있어. 어제 일로 인해 더욱 영주의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걸세. 영주들의 공군, 포병지원이 없을 경우 민병대는 계속 몰살당할 수밖에 없네. 둘 사이에 오해를 풀고 싶어. 민주주의는 민병대가 생각하는 대로 영주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아니다. 영주들이 느끼는 것처럼 자신들을 죽이려는 무기가 아니다. 라는 걸 알리고 싶네.”

아몬은 꿈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들은 후 고민해왔다. 소멸한 제도이기에 어렴풋이는 알아도 잘은 모르기에 연구했다. 민주주의의 시작은, 지배자의 억압이 가혹해지자 시민들이 행동했다. 어떻게? 말이 저절로 나왔다.

“불복종선언문을 작성하는 겁니다. 먼저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아주 단순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무엇에 대한 불복종이냐면 바로 약육강식 같이 잘못된 가치관, 힘 있는 자가 우주를 지배한다. 힘 있는 자가 우주를 통일한다. 이렇게 제국이 내세우는 지배논리에 대항하고,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가치관을 가진 정치체제를 더는 원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공유해야 합니다.”

“...자네 나를 놀라게 했어.”

메타트론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는 게 굉장히 감동받은 듯 했다. 이런 적이 있었다. 폴코의 아이가 태어난 날. 메타트론이 아몬을 붙잡고 선전관 어쩌고, 저쩌고 하자, 아몬은 메타트론을 위해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번에도 저절로 나왔다. 메타트론은 좋은 사람이기에 그를 위한 좋은 생각, 좋은 말이 저절로 나온다. 너무 평범했다.

아몬은 이제야 메타트론에게서 구세주로서의,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알아봤다. 평범한 인물이 어떻게 대단한 인물이, 신의 한 조각으로 숭배 받는지 알게 됐다. 미래에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할 독재자는 평범함 속에서 나온다. 그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추종자들에게서.

“나는 자네를 형제처럼 생각했는데.. 오늘은 내 스승이 되어 줬구만. 고맙네.”

아몬은 메타트론의 감동에 전염되지 않으려 시선을 돌리다가 얼핏 보이는 침실 칸에서 촛대를 발견했다. 전등이 있는데 왜 촛대가 필요할까? 꽉 조이는 라텍스를 입고 다니는 나마와 비슷한 취향인가? 촛농으로 누굴 괴롭히나? 아니면 자신을? 이렇게 딴생각으로 눈앞의 거인의 감동과 거리를 두는데,

“아! 저 촛대 말인가? 내가 사관학교 시절 우연히 사들인 후 늘 가지고 다녔네. 저걸로 내 손바닥을 지지네.”

“예?”

“매일 밤 촛불로 내 자신을 단련한다네. 군인으로.. 이제는 정치인으로.. 통치자로.. 혹시나 쾌락과 안락함에 빠질까봐 스스로를 불에 달구어 언제나 예리한 정신을 유지하려 하지. 이리 와서 보게나. 내 침실에 들어와도 돼. 우리는 허물없는 사이야. 자네에게 내 기벽을 모두 자랑하고 싶어. 자네라면 알 자격이 있네. 저 침대보이지? 들추어 보게나? 얼른! 봐! 가시덤불이야. 난 촛불과 가시덤불 침대로 고통을 수용하네. 인생은 이런 거야. 편안하지 않아. 쉬운 건 없어. 고통은 나쁜 게 아니야.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 쉬운 일이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힘들지만 대단한 일에 도전할 수 있게 도와주네.”

그간 메타트론을 상징하는 문양이 월계수라고 생각했는데 침대를 보고난 후, 실은 가시덤불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몬은 자신이 어떤 괴물과 같이 있는지 알게 됐다. 불에 달궈지고, 살이 찢기는 가시덤불에서 자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에..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굴복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이 사람의 지지자들도 타협하지 않는다. 남들이 광신이라고 배척할 지라도, 총칼로 저지하려고 해도... 기어이 해낼 것이다.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이다. 자신들의 뜻대로, 원하는 대로 이뤄낼 것이다. 민주주의를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는.. 신황제(GOD EMPEROR)와 신황제를 섬기는 선택받은 민족이 될 터였다.

“아.. 내가 눈치 없이 자네를 너무 오래 붙잡았군. 이제 가서 불복종선언문을 준비해주게나. 아하? 이 친구 내가 자네를 너무 굴린다는 것을 눈치 챘나? 하하하. 자네 혼자가 아니야. 자네가 밤을 샐 동안, 나 역시 밤을 새겠네. 우리 둘이 신세계를 건설하는 그 날까지! 누가 더 열심히 일하나. 내기하세나!”

아몬은 메타트론의 방에서 나오면서, 좋은 사람과 헤어지니까 느끼는 당연한 감정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가니아 민족이 있는 자리에 자신과 같은 돌연변이가 서있을 자리는 없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니 귀족영주들은 결국 권력을 포기해야 했다. 신세계의 지배층 자리는 가니아 민족이 모두 독점할 터였다.

아몬이 가진 개인의 정체성과 공적인 권리 모두가 위협받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떤 민족, 어느 계층에게는 좋은 사람이겠지만, 자신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얼른 죽여야겠다. 라고 다짐했다. 아몬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등 뒤에서 가니아 호위병들이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저들이 지키고 있기에 메타트론에게 접근하면 몸수색을 받고 감시당한다. 방금 같이 좋은 기회가 왔어도 몸수색을 당했기에 활용할 수 없었다.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아몬은 통신기로 메타트론에게 연락했다.

“사령관 각하. 불복종 선언을 선포하는 공개 연설을 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미래에 우리를 이끌어 민주주의를 실현하시려면 반드시 공개 연설을 하셔야 합니다. 직접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나는 군인출신이라 대중연설에는 약한데.. 하지만 하겠네. 자네가 나한테 무슨 일을 시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하겠네.”

좋은 사람답게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하니 함정을 파놓고 들어가라고 시키면 된다. 연설하는 도중에 폭탄으로 날려버린다.

 

메기도와 인접한 행성들에게서 만나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치 들꽃처럼 자연히 발생하더니 쑥쑥 자라고 있다고 했다. 가니아 민족은 놀라지 않았다.

“우리 민족을 괴롭히던 만나가 하인이 됐으니 주인님 가실 곳에 미리 꽃피우는 게 당연하지!”

“예언서에도 쓰여 있었어! 만나가 진정한 주인을 만나면 온 우주에 씨를 뿌리리라!”

가니아 민족은 메타트론이 전 우주를 제패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어썰트 라이프를 처음 지급받았던 가니아 민족이 오늘은 러쉬탱크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었다. 한 달 뒤에는 버드콥터 조종교육이 이루어질 거라 했다. 본래 호전적이었던 민족이었기에 거칠 것 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메타트론을 위해서.

“그 분이 민주주의라는 걸 선포하신다고 하셔! 이제 영주 놈들에게 불복종해도 된데!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지배자와 사슬을 끊어 주시는 거야!”

“해방이야! 모두가 평등해지는 해방이 오고 있어! 귀족 놈들을 죽일 수 있어! 강간할 수 있다고!”

“우리의 구세주께서 영주 놈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그 놈들도 우리와 평등하다! 높은 곳에 숨어있지 말고, 똑같이 어썰트 라이플을 잡고 발로 뛰어다니며 싸워라! 라고 연설하신데!”

연설문 내용이 미리 유출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몬은 곳곳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에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퍼뜨린 소문이었다. 독립파 영주들이 겁을 먹게 영주들 권리를 위협하는 내용이 섞여 있었다. 여러분 아무리 귀족영주의 명령일지라도 여러분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면 불복종해도 됩니다.

게다가 가니아 민병대에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버드콥터까지 가르치면 영주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된다. 버드콥터 교육소문도 아몬이 퍼뜨렸다. 독립파 영주들과 가니아 민병대와의 불화를 더욱 부추겨야 했다. 영주들이 메타트론에 대한 지지를 포기할 때까지. 그리고 메타트론이 암살되면 가니아 민병대는 당연히 영주들을 의심하게 된다. 영주들이 권력을 뺏길까봐. 우리의 구세주를 죽였다. 라고.

메타트론이 죽으면 가니아 민병대는 미쳐 날뛸게 분명했다. 무기를 놓고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총칼이 제국숭배파든, 독립파든 모든 영주들에게 향할 터였다. 독립파 영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다시 제국숭배파 영주들과 협력할 게 분명했다.

그럼 다시 옛날로 돌아온다. 가니아 민족을 노동자원으로 써먹고, 괴롭히고, 억압하는.. 그러나 영주들과 지배층들은 평화로운 문명생활을 유지하고, 우주는 지옥에서 벗어나게 된다. 수십 광년, 수백 광년 떨어진 수많은 행성들과 사람들이 안전하게 된다.

“옛날로 돌아가야지. 혁명은 얼어 죽을. 꼭 말하는 것마다 살인과 강간을 넣어야 하는 미친놈들아.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민주주의가 괜찮아 보였을 거야. 너희야말로 민주주의 걸림돌이야.”

아몬은 자신의 방에서 벽돌모양의 폭탄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혼잣말했다.

 

민주주의로의 첫 도약. 불복종선언. 제국의 인기 스포츠 검투사 대회를 개최하는 콜로세움에서 연설하기로 결정했다. 아몬은 노을 지는 시간대에 버드콥터 한 대를 타고 콜로세움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삼일 후에 이곳에서 연설하기에 아몬은 먼저 와서 어디다 폭탄을 설치할까 궁리했다. 연설하기로 되어 있는 귀빈석 단상에 설치하면 호위병들이 찾아낼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당일 날에는 병사들이 스캐너를 들고 폭탄 같은 위험물질을 탐색할 것이었다.

아몬은 제국유학시절 교양으로 얕게 배운 건축학 지식을 떠올렸다. 설계를 감안하여 기둥에 설치하여 폭파시켜서 무너지게 한다. 어느 기둥이냐면 귀빈석 바로 아래층, 귀빈석 층과 연결하는 계단과 이어지는 복도, 그 복도가 다른 복도들과 겹쳐지는 교차로 로비기둥이었다. 도미노 현상을 유도해야 복도들이 뭉그러지면서 계단을 공격하고, 계단은 주저앉으며 귀빈석 층 바닥도 같이 주저앉게 한다.

아몬이 허리띠의 추진기능을 작동하여 허공에 가볍게 떠올랐다. 오래 떠있을 수 없기에 재빨리 기둥상부에 폭탄을 장착했다. 금속과 나노 물질이 하나도 섞이지 않아 스캐너가 잡아내기 쉽지 않은 귀한 폭탄이었다. 아몬이 가니아 장교단에게 버드콥터 교육을 장담했기에 무기고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무기고에서 이 폭탄을 몰래 꺼내왔다. 폭탄을 설치하는 시야에 얼핏 하얀색 옷이 보였다. 잘못 봤나? 싶었지만, 시선을 의식하고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게 분명 누군가 있었다. 가니아 민족이 민병대가 되자마자 성취한 자유는 야근 거부였다. 본래 다혈질에 노는 걸 좋아하기에 총을 잡자마자 야근을 거부해버렸다. 콜로세움도 외곽에만 경비병이 서 있을 뿐, 관계자들은 모두 퇴근한 줄 알았다. 어디서 춤을 추거나, 난교하거나 아니면 둘 다 하거나. 그러고 있어야 하는데.

아몬은 플라스마 권총을 뽑아들고 기둥에서, 다음 기둥으로 조심스레 이동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음 기둥으로 이동하는데, 귀빈석 쪽으로 검은 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뛰고 있었다. 몸집이 작은 게 소년병사로 생각됐다. 사람들을 불러올까 걱정이 들었기에 소년병사의 뒤를 쫓았다. 소년병사는 계단을 올라 귀빈석 층으로 몸을 숨겼다. 아몬이 플라스마 권총을 내세우며 계단을 다 올라온 순간,

“아마추어 같긴. 가만히 있어. 총 이리 내.”

소년병사는 검은 색 라텍스 슈츠를 입은 나마였다. 클론병사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강한 클론 코만도 병사들이 어썰트 라이플로 아몬을 조준했다. 나마가 아몬의 플라스마 권총을 넘겨받은 후 분해해서 산산조각 냈다.

“우리 영토에 있는 노동자님들께서 집단봉기 하셨어. 만나 환각 때문에 총으로 쏘고, 고진동 블레이드로 내리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해. 마치 네오 고대 전에 인류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넣었다는 좀비들 같아. 게다가 역적이 연설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 연설문 우리도 입수해서 읽어봤어. 정신 나갔더라. 이 연설이 돌면 그나마 노래 부르며 우리를 잘 따르는 다른 노동자님들마저 미쳐 날뛸 거야. 그런데 이 연설문 네가 기획했다는 첩보가 있더라?”

“아.. 그게 어찌됐냐면.”

“닥쳐요. 내가 아직 우리 사이의 수많은 오해들을 다 설명하지 못했어요. 너 제국본토 감찰부와 내통하는 프락치였다며? 네가 광신호 단말기로 우리 영주들 동태를 평소에 감시하고 보고해왔다며?”

“...어떻게 알았지?”

“연설문에서 뭔가 쎄하기에 네 영지를 뒤지다가 통신기록을 보게 됐지. 우리 다 총독을 거쳤는데, 너 홀로 제국과 직접 통했더라. 다 까고 보니 이런데, 널 어떻게 믿니? 그래서 이 소녀가 직접 역적 놈 모가지를 따러 왔지.”

“....”

메타트론이 공항에 올 때 소멸한 광신호 단말기는 같은 영주들을 감시하고 보고하라고 감찰부가 내어준 비밀장비였다.

“...너 설마. 약점 잡혔기에 감찰부에게 이용당한 거야?”

“응.”

아몬은 제국유학이 끝나고 메기도 행성으로 돌아올 때, 직접 감찰부로 찾아가 자신의 뒤통수를 보여주고는 돌연변이임을 알렸다. 자신의 약점을 넘겨줄 테니 자신을 프락치로 이용해달라고 거래를 제안했다. 왜냐하면 식민지 총독은 대부분 중앙과 연관된 인물이 되기에 식민지인은 총독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영주보다는 감시하는 영주가 되는 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동료영주들을 팔아, 동료들보다 잘 살고 싶었다. 왜냐 하며 남들보다 잘 살려고 노력하는 건 누구나 저지르는 소악이니까.

“그 대신에 돌연변이여도 영주직 승계가 가능했던 거야?”

“응.”

나마가 알아서 착각하기에 아몬은 짧게“응.”이라고만 대답했다. 감찰부는 매우 관대하여 돌연변이여도 승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야만족들과 변방영주들을 감시하는데 자원해줘서 고맙다고 아몬을 격려해주었다.

“자 그럼 남은 오해를 풀어볼까요? 영주의 명령을 거부해도 된다는 개소리를 연설하려는 니 의도가 무엇인지 오해를 빨리 풀어주지 않으면.. 아니지 먼저 이 고생을 시킨 대가로 저번처럼 네 다리 한 번 더 따스해지라고 플라스마로 지져야겠네.”

“제 오해도 같이 풀어요.”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귀빈석 발코니를 통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코만도들이 총구를 겨눴으나 레베나가 들고 있는 음파 수류탄을 보고는 멈칫했다. 레베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에는 플라스마 권총을, 다른 손에는 핀을 뽑은 수류탄을 들고 있었다.

“그 이한테 손대지 마세요.”

“쌍년.”

나마가 이를 갈았다.

 

우리 말로 합시다. 다 같이 망할 수 없기에 무장을 해제하는데 모두 동의했다. 총과 수류탄이 바닥에 깔리고, 똑같은 얼굴을 한 병사들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평화로운 삼자대면이 시작됐다. 레베나가 먼저 시작했다.

“왜 따라왔는지 말할게요. 연설문 내용이 뭔가 이상했어요. 억압자로 영주를 명시한 부분에서 이건 영주와 민병대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의도라고 파악했지요. 독립파 영주들은 가니아 민족의 격한 동요에 불안해하고 있어요. 몰래 제국숭배파에 연락을 넣을 정도니까요. 누가? 왜? 이런 불안을 유도할까? 선동할까? 추적 끝에.. 이상한 장비를 기둥에 설치하는 것까지 보게 됐네요.”

나마가 빈정댔다.

“옛날에 사귀던 애인을 꽁무니 쫓는 게 보기 좋네. 왜 예전처럼 쭉쭉 빨고, 같이 빨가벗고 뒹굴지? 멍석 깔아줄까?”

“...아몬이 이미 충분히 단련시켜서 그런 말에 화가 나지 않아요. 당신의 남창노비들이 잡히면 성기가 잘리는 걸 알면서도 왜 도망치는지는 알 것 같네요.”

“왜?”

“남창노비도 상대 못 할 시커먼 저질이니까요.”

“이 년이!”

아몬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그만! 레베나. 나 돌연변이이고, 예언능력이 있어. 모든 돌연변이들이 예언능력이 있는지는 몰라. 그런데 나는 있기에 미래를 알 수 있어. 난 미래를 봤어.”

“....”

아몬이 모든 걸 설명했다. 돌연변이, 예지몽, 상징과 은유, 메타트론의 등장, 가니아 민족의 광신, 제국의 몰락, 민주주의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왕조의 시작, 신황제 등극, 혁명을 내세운 대학살. 전 우주에 퍼져나갈 지옥도.

“구세주라고 불리는 좋은 사람을 죽여야 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악당이 되는 걸 거부하면 온 우주에 대재앙이 벌어져. 가니아 랍비들에게 스파이 드론을 보내어 그들이 말하는 걸 엿듣게 했어. 예언서에 따르면 아마겟돈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바로 이 메기도 행성에서 시작된대. 생각해봐. 온 우주로 만나가 퍼져나가 그리고 중독되겠지. 환각 속에서 오직 메타트론 한 사람만을 숭배해. 다른 생각, 다른 선택권은 없어. 메타트론 아니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해. 메타트론을 선택하지 않으면 가니아 민족들이...”

“우리가 좋은 관리자가 되어 계몽하면 되요. 우린 협상 중이예요. 영주직은 사라지지만 다른 이름의 지배층이 될 수 있어요.”

나마가 레베나를 비웃었다.

“순진하다 못해 얼빠진 독립파 백치야. 가니아 민족이 그 자리를 양보할까? 제국숭배파는 바보여서 매일 반란이 일어나는 제국이 정말 위대한 줄 알고, 충성하는 걸로 보여?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관리자층은 국가에서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들로 구성돼. 우린 제국에서 특권을 하사받았으니까 제국을 계속 유지하려는 거야.”

아몬이 말했다.

“...레베나. 가니아 민족은 노예로 살다가 해방됐어. 다시는 자신들 위에 누구도 군림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아몬 역시 나마처럼 현실주의자였다. 레베나는 가니아 민족을 잘 알고 있기에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 없다가 툭 말했다.

“돌연변이. 알고 있었어요.”

아몬은 어떻게? 라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보다는 비밀을 왜 말 안 하고 있었는지가 아몬에게는 더욱 예민한 문제였다. 돌연변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모든 권위가 무너질 수 있는데 비밀을 지켜주다니. 무엇을 원하기에?

“난 아몬 당신이.. 몸이 불편하기에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늘 당신에게 아쉬워했던 부분이죠. 오늘에서야 대화가 시작되네요.”

공항 때에도 선한 사람이 될 기회가 없었던 게 아쉽다고 했다. 레베나는 그런 대화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아몬은 단순했다.

“어떻게?”

“당신이 늘 두건을 두르고 다니는 이유를 저 말고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난 당신과 같은 침대에 있었기에 기회가 있었죠.”

“아냐. 그 돌연변이 징표는 이 자식이 더 심한 개자식이 될 수 있다는 축복이요! 세례야! 너 마음만 먹으면 나쁜 일 중에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돌연변이.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계기로 봤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타락해도 된다는 증거로 여겼다.

“....”

누구에게 대답할까? 아몬이 선택하기 전,

“야이 개자식들아! 사악한 영주 놈들아!”

갑자기 어린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얼기설기 이어 만든 가난한 옷이 가니아 민족의 아이라는 걸 드러냈다.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자 중 한 명의 아이야.”

“나마. 그걸 어떻게 알아?”

“검투사 대회를 후원했기에 이곳의 관리자들에 대해 좀 알아. 승부조작 할까봐 관리자들의 자식들 사진을 찍어갔어. 혹시나 승부결과가 이상하면 자식들의 몸도 조작해주겠다고 했지.”

“그리고는 니가 승부조작 했지?”

“당연하지.”

아이는 넝마 같은 옷에서 새총을 꺼내더니 미리 집어온 돌을 재고는 발사했다.

“죽어라! 악마 놈들! 나 다 들었어! 우리 구세주님을 아무도 건들지 못해!”

레베나가 아이에게 온화하게 반응했다.

“어머. 아이야. 어떻게 이 자리에 있니? 누구와 같이 왔어?”

“독립파 백치야. 지금 저 아이의 귀에 네 말이 들리겠니?”

“죽어! 이 괴물영주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악덕지주들을 벌하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겠다! 온 우주를 지배할 민족이 누구인지 예언서에 나와 있어! 바로 우리 가니아 민족이야!”

돌 한 발, 두 발, 세 발. 새총 돌이 발사될 때마다 아몬은 가슴이 쿡쿡 찔렸다. 저번에 소년병이 돌연변이라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이번에는 그보다 더 어린 아이가 영주라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확실히 세상이 미쳐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어떤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는지 알겠어? 가니아 야만족들이 어제는 돌연변이들을 죽였지만, 내일은 우리 영주들과 가신들, 병사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족들이야.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내세워서 거침없이 학살할 거야.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주장만 듣겠지. 표면으로만 민주주의이고, 그 밑에 피에 굶주린 어떤 싸이코 민족이 있다고는 생각 못할 거야. 이 개자식아. 조용히 안 해!”

“닥쳐! 돌연변이! 돌연변이는 병신 이래요~ 돌연변이는 죽어서 거름이 돼야 한 대요~”

아이는 돌이 떨어지자 액땜하는 손 모양을 내보이며 아몬을 조롱하는 노래를 불렀다.

“왜에~? 아몬 너 병신 맞잖아? 꼬마 녀석 노래 잘 부르잖아?”

나마는 노래에 장단을 맞추어 싱글벙글 웃다가, 플라스마 권총을 집어 단 번에 아이를 꿰뚫었다.

“독립파 백치야. 표정이 왜 그래? 저 가니아 애새끼가 날뛰는 걸 보고도 할 말이 있어? 애도 저 지랄이야. 애한테도 저런 걸 주입시키면 방법이 없어. 할 말 없으면 우리 메타트론 뒤진 후에 어떻게 통치할지 논의나 하자. 독립파 영주들 넘어오면 과거는 불문에 붙일게. 세상물정 모르는 계집애야. 살고 싶으면 넙죽 엎드려.”

레베나는 침묵했다. 암살 후 연락을 주고받을 통신 프로토콜을 공유하고는 삼자대면을 끝냈다. 코만도들이 아이의 시체를 조각내고는 몰래 불태웠다.

 

아몬은 그 날 저녁 꿈을 꿨다. 갑자기 급박한 상황이 시작되자 어썰트 라이플을 뺏어서 쏘지만,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한다. 실패했다. 그런데 아몬은 가슴이 터져라 시원하게 웃었다. 실패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은 편안했다. 실패? 아몬이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 옆 창문 밖으로 아직도 달빛이 진하게 빛내고 있었다. 꿈 내용이 작고, 또렷하니 이루어질 확률이 높은 꿈이었다. 어디다 누구에게? 무엇에게? 왜 총을 쏘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알 수 없었다. 기묘하게도 알지 못했음에도 꿈속의 느낌은 매우 평화로웠다.

 

연설하는 당일이었다. 오후 3시경. 콜로세움 귀빈석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아몬은 귀빈석에 앉아 분위기를 살폈다. 독립파 영주들과 프로토콜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영주들끼리만 알고 있는 통신을 통해 긴밀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들에게는 예지몽, 돌연변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가니아 민족은 민주주의를 내세워 귀족영주들을 적대하기에 영주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버드콥터 교육까지 받게 되면 더욱 통제하기 힘들어지기에 긴장이 치솟고 있었다. 아몬은 독립파 영주들에게 비밀스런 일이 진행되고 있으며 곧 알게 될 거라는 암시를 흘렸다. 영주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고는 투항의사를 밝혔다. 일부는 소극적이었으나 확실히 일이 일어난 뒤에 넘어온다고 다짐했다.

귀빈석을 스쳐가는 봄바람에 불온한 기운은 없었다. 아몬은 혹시나 있을 배신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그러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하기로 되어있는 연설내용이 사전에 유출됐기에 가니아 민족이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가 모두의 관심사이자 걱정이었다.

“야만족 놈들 폭발할거야.”

“재산은 이미 다 빼놨어. 제국숭배파 지역으로 넘어갈 거야.”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가니아 장교단은 왜 병사들 가족에게서 음식과 향락을 접대 받지? 저 놈들 하는 짓이 또 다른 지주 아니야?”

아몬은 영주들 사이에서 레베나가 보이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시선을 내려 보니 가니아 민족이 개미떼처럼 콜로세움 경기장안을 꽉 메우고 있는 걸 알게 됐다. 귀빈석, 일반 관람석, 경기장 안 어디서도 레베나는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탕! “영주도 죽이고 강간하자!” 탕! “모두 평등하자! 그러니 영주 놈의 첩도, 민중의 여자로!”탕!

오늘 예정된 역사적인 선포에 흥분했는지 가니아 민병대가 총을 허공에 발사했다. 총기를 나누어주자 우주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다르게 남자들만이 총을 독식하고는 민병대를 가담하거나, 남자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들고 다녔다.

탕! “메타트론!” 탕! “구세주!” 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국을 타도하자!” 탕!

“다음 시대는 가니아 민족의 시대!”

아몬은 발밑에서 올라오는 총성 사이로 뭔가를 보게 됐다. 머리가 매우커서 몸을 가누기 힘든 게 분명 돌연변이였다. 돌연변이가 가니아 민족들 사이에 있다고? 아몬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메타트론이 입장했다는 나팔 소리를 들었다. 아몬은 자리에서 기립하여 메타트론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 근처에 버드콥터를 대기해놨다. 메타트론이 연설하러 단상에 올라갈 때 음향장비를 조정하는 척 사운드 부스로 간다고 말하며 재빨리 버드콥터로 향한다. 탑승하고는 폭탄을 작동시킨다.

메타트론이 양 옆에 가니아 호위병을 데리고 귀빈석 안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건네는 영주들에게 품위 있게 일일이 답하면서 천천히 아몬에게 다가왔다. 아몬은 메타트론에게 인사를 건넸다.

“각하. 컨디션은 괜찮습니까? 오늘 정말 중요한 날입니다.”

“...그대가 배신했다는 걸 알고 있소. 레베나 영주가 다 말해주었소. 아니 오늘부터는 민정고문이지.”

레베나가 배신했구나. 아몬은 곁눈질로 레베나가 입장하는 걸 보게 됐다. 우아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베나는 귀빈석 한 구석에 자리 잡고는 부채를 펴서 표정을 감추었다. 메타트론 양 옆의 호위병들이 진한 푸른 눈을 번뜩이며 아몬을 쏘아봤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그대가 돌연변이라는 것도 알지.”

호위병 중 한 명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더러운 걸 봤기에 입맛을 돌리려는 태도였다. 호위병들 어깨가 들썩이며 당장에 총을 뽑아 쏘려는 태도가 배신 때문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혐오해서 드러나는 증오였다. 돌연변이니까.

“레베나 민정고문은 제국을 타도하고, 온 우주에 평등을 가져다 줄 민주주의를 선택했네. 영주 직을 포기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간 억압한 가니아 민족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포기했네. 가니아 민족과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민주주의를 위해 선한 사람이 됐어. 자네에게도 선한 사람이 될 기회가 있네.”

“...어떤 기회입니까?”

아몬은 총살형과 화형을 떠올리며 물었다.

“용서해주겠네. 대신 진심으로 우리 편이 되게나.”

“에?”

배신을 이리 쉽게 용서하다니.. 아몬은 너무나 관대한 제안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내가 연설하지 않겠네. 자네가 대신 하게나. 민병대에게 미움 받는 자네가 내 대변인 역할을 하면 가니아 민족에게 앞으로 존중받을 거야. 자네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게나.”

어떤 민족, 어느 계층에게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몬 자신에게도 확실히 좋은 사람이 되려 한다. 나쁜 짓하다 걸렸는데 되레 용서 받는다. 게다가 좋은 자리까지 얻는다. 이런 제의를 거절하면 바보였다.

그런데 아몬의 눈에 호위병들 뒤로 어떤 사람들이 보이고 있었다. 흐릿한 게 진짜 사람은 아니고 홀로그램이나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왜 대답이 없는가? 이건 자네의 영혼을 위해서 더 선한 사람이 되라는 응원이고, 격려야. 자네 인사말처럼 오늘 정말 중요한 날이지 않은가? 오늘 이 연설을 통해 가니아 민족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가 퍼져나가네. 제국의 네오 봉건주의를 무너뜨리는 성전의 시작이야! 우리 가니아 민족에게는 꼭 가야할 약속의 땅이 있네. 제국이 두 갈래로 찢어놓아서 못 갔지만, 이제 다시 하나 되어 약속의 땅으로 향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누가 막아도 반드시 가! 가니아 민족이 일등 민족이 되는 약속의 땅! 온 우주를 민주주의로 평등하게 만들고는 가니아 민족이 평화롭게 통치할 걸세. 자네도 우리 민족을 좋아해주게나.”

“..수많은 돌연변이 아이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우주 어디서도 차별로 인한 이런 조직적인 학살은 없습니다.”

“내가 자네를 형제로 대해주지 않았나? 내 민족을 이해해주게나. 자네의 배신을 용서할 테니. 우리 민족을 좋아하라고. 우리 민족과 같아지라고 명령하겠네.”

분명 좋은 사람이니까 처벌하지는 않는다. 가니아 호위병들은 명백히 아몬을 혐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몬은 좋은 사람의 눈에서 그 전과는 다른 걸 보게 됐다. 사람을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말 잘 듣는 개를 보는 시선이었다. 돌연변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붉은 눈의 사령관은 어느새 자기 민족처럼 진한 푸른 눈으로 변해있었고, 돌연변이를 혐오하는 법도 배웠다.

호위병들이 아몬의 양어깨를 잡고 단상으로 돌려세웠다. 경기장 쪽으로 돌출된 다리 끝에 단상이 있었다. 단상 내부스크린에 연설문이 띄워져 있었다. 뒤에서 총 끝으로 찌르기에 아몬은 비틀대며 단상으로 향했다.

“와와아!”

아래를 내려다보자 개미떼처럼 바글대는 가니아 민족이 함성을 터뜨렸다. 메타트론을 소개하는 연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개미떼처럼 시커멓게 바글대는 가니아 민족들 사이에서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환영들이 보였다. 아몬은 자신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았다. 뒤통수에 혹이 툭 튀어나오거나, 똑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커다래서 좌우로 기우뚱 거리는 모습이 흉물스러웠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돌연변이 형제이며, 자매들이었다. 가니아 민족이 죽인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삐익- 내부스크린에 경고음이 떠올랐다. 아몬에게 빨리 연설하라는 독촉이었다. 아몬은 늘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살아남고자 하는 짓은 최악이 아니다. 차악이다. 비겁하게 살아왔다. 이미 제국숭배파에서 독립파로, 독립파에서 암살을 기획하는 등 여러 번 배신했다. 오늘도 배신하는 날이었다. 강한 자를 배신하려던 게 들통 났지만 용서받았으니.. 만만한 약한 자를 배신하는 게 안전했다. 세상사 약육강식으로 돌아가니..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런데 온 우주로 만나가 퍼진다면 돌연변이는 계속 태어난다.

가니아 민족이 우주를 장악하게 되면 대학살은 멈추지 않는다. 아몬은 돌연변이들 사이로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이 자리에 죽은 돌연변이들만 온 게 아니었다. 앞으로 미래에 태어날 수많은 돌연변이들도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만나가 곳곳에 퍼졌으니 저 아이들은 미래에 태어날 게 분명했다. 돌연변이여도 차별하지 않는 행성계에서 자란다면, 저 아이들은 과학자, 음악인, 행정관료, 선생님,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데..

가니아 민족이 오늘을 계기로 민주주의를 내세워 전 우주로 퍼져나가면..

온 우주에서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가니아 민족을 받아들이면..

저 아이들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난 그냥 나쁜 놈이야. 아몬이 뒤돌아보니 메타트론이 뒷짐 지고 아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놈은 학살의 신이다.

 

진짜 좋은 사람은 가해자를 이해하라고, 가해자와 같아지라고 하지 않는다.

 

메타트론은 가니아 민족들에게만 좋은 사람이었다. 탕! 어디선가 총성이 들려왔다. 대구경 볼트탄환은 코만도들의 무장이었다. 발각됐으니 어디선가 나마가 제압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탕! 탕! 탕! 소리가 거세지고 있었다. 영주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특이한 탄환소리에 당황했다. 귀빈석 입구에서 가니아 호위병들이 우르르 쏟아지더니 영주들을 포위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너희 귀족들을 체포한다! 네 놈들의 피를 볼 거야!”

“드디어 너희를 죽이고 강간할 수 있게 됐어!”

“너희들의 재산은 우리 것이 될 것이며, 너희들의 여자와 딸은 우리의 여자가 될 것이고, 너희의 기름진 음식과 황금도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너희는 우리처럼 가난하고 핍박받고, 우리 민족은 너희처럼 부유하고 안락하게 살 것이다! 우리 민족을 위해 온 우주가 이렇게 평등하게 될 것이다!”

그래. 이게 너희가 해석한 민주주의의 평등이구나. 아몬은 호위병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우주를 개혁하고, 모두를 자유롭게 만들 정의를 실행할 수 있었지만, 입만 열면 살인과 강간을 꺼내는 가니아 민족은 그러한 마음을 배울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 민족뿐이었다.

“정말 너희 놈들에게 민주주의는 사치야.”

탕! 탕! 대구경 탄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나마는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부채로 가렸지만 살짝 드러난 레베나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 전부터 선한 걸 따지더니.. 가니아 민족에게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동족인 영주들을 배신했다. 레베나. 자신이 착하다는 걸 그렇게 증명하고 싶었어? 삼자대면 때, 돌연변이 징표를 두고 누구는 나아질 수 있다. 누구는 더 타락해라. 라고 했기에 선택을 고민했다. 메타트론은 좋은 사람이다. 레베나는 선한 사람이다. 탕! 탕! 나마의 총성이 들려왔다.

“나는 나쁜 사람이야.”

아몬이 폭탄 트리거를 눌렀지만 터지지 않았다. 레베나가 배신했으니 해체 된 게 분명했다.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이제와 버드콥터로 탈출할 수도 없다. 어찌해야 할까? 손으로 두건을 젖혀 돌연변이 징표를 드러냈다. 돌연변이 동족을 배신하며 살아남는다 해도, 가니아 민족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아몬은 그간 살아남고자 배신하고 기만하며 악을 저질러 왔는데.. 지금은 최선을 다해 죽으려 했다.

“나말이야. 어느 민족에게는, 어떤 계층에게는.. 멀쩡한 사람들에게는.. 나쁜 놈일지 몰라. 그런데..”

희뿌연 한 돌연변이들이 가니아 민족들 위에 구름처럼 형성돼 있었다. 아몬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나쁜 놈으로 죽으면 안 돼. 악마가 돼야해. 가니아 놈들에게 민주주의는 사치야. 그에 걸맞는 걸 주마.”

연설이 시작됐다.

“들어라! 개자식들아! 그래 너희 개자식들을 말하는 거다! 총을 줬더니 남자들만 독식하여 여자과 아이를 억압하고, 이웃을 위협하는 기 싸움에 이용하는 개잡종들아! 민중을 위한,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인과 강간을 논하는 도적놈들아! 봐라! 난 돌연변이다! 너희가 그렇게 혐오하고 죽이려 했던 돌연변이가 여기 끝까지 살아남아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에게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저주를 새기겠다!

그 잘난 예언서와 함께 영원히 기억해두어라! 너희는 욕심내는 모든 걸 해낼 것이다! 사소한 시비에도 목숨 걸고 싸우는 너희를 누가 가로막겠느냐? 온 가족 모인 장소에서 강간과 살인을 논하는 너희들과 누가 맞서겠느냐? 너희는 너희의 구세주를 신황제로 등극시킬 것이다! 민주주의를 내세워 제국을 무너뜨리고, 너희만의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을 죽였으니, 너희도 다른 민족에게 죽을 것이며, 돌연변이 아이를 검열하고 살해했으니, 가족과 사회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살인은 큰 일이 아니게 되어 아무렇지 않게 이웃을 죽여 원수가 되고, 연인을 강간하며 친구를 죽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미래에도 수많은 돌연변이를 죽이게 될 터이다! 그러나 언젠가 돌연변이 하나가 끝까지 살아남아 너희의 신황제와 너희 민족만의 왕국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나 오늘 일찍 죽어서 지옥에서 악마가 되어 그를 보살필 거다! 너희 왕국이 무너지는 날 너희는 반드시 내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되리라!”

“죽여!”

메타트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몬이 뒤돌아보니 아까 침을 뱉었던 호위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몬이 몸을 낮추고 달려들어 호위병의 어썰트 라이플을 뺐었다.

뺏은 순간, 아몬은 꿈을 떠올렸다.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편해진다. 실패한다는 걸 알면서도 메타트론을 조준했다. 메타트론은 피식 웃으며 대담하게 단상으로 향하는 다리로 뛰어들어 사격을 가볍게 피했다. 입가에 비웃는 미소가 실려 있었다. 다른 호위병이 아몬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댔다. 역시 실패했다. 이제 죽는다. 그래도 아몬은 마음만은 편했다. 그런데,

“죽여라!”

“구세주를 위하여!”

“추잡한 돌연변이!”

“저 악마새끼를 죽여!”

경기장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군중들 중에서 총을 가진 자들이 일제히 총을 뽑아 단상을 향해 발사했다.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애송이들이기에, 본래 호전적인 민족들이니까 흥분하는 대로 방아쇠를 연이어 당겨대는지 탕! 탕!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볼트 탄들이 소나기처럼 단상으로 날아들었다. 호위병이 맞았다. 아몬도 맞았다. 단상대가 부서졌다. 그리고 메타트론도 맞았다. 2미터의 거인은 한 번 휘청 이더니 자신을 숭배하는 민족들에게로 추락 했다.

 

그날 메타트론은 죽었다. 아몬도 죽었다.

 

만나는 본래의 성질에서 중독성을 잃었다. 평범한 고체자원이 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레베나는 메타트론이 죽자, 가니아 민족들에게 말했다.

“그 분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예견하시고 계셨어요. 혹시라도 자신이 악마 아몬에게 쓰러지면, 언제가 부활해서 다시 돌아올 터이니 믿음을 잃지 말고 기다리라 하셨어요.”

어느 누구도 메타트론이 레베나에게 이 말을 했다는 증거를 대지 못했지만, 레베나는 이 말 한 마디에 가니아 민족의 성녀가 되었다. 레베나는 가니아 민중을 이끌고 영주들을 공격했다. 영주들은 힘겹게 방어했지만 메기도 행성의 절대 다수인 가니아를 막아내기 힘들었다. 이에 나마가 조건부로 항복하기 위해 레베나에게 항복의사를 보냈다. 레베나는 항복조건을 논하기 위해 협상에 응했다.

 

두 개의 계곡 사이로 좁은 산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계곡이기에 공군이 폭격하기 힘든 곳이었다. 계곡 사이의 실금 같은 산길에서 나마와 레베나가 마주했다.

레베나가 하얀 부채로 비웃듯이 부채질했다.

“보니까 조건이 형편없더군요. 겨우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하려고, 항복하신다 하시고는 6개월이나 시간을 끄셨나요? 그쪽의 참모 네비로스라는 사람의 기획이라는데?”
“내 참모는 내 도구일 뿐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영주들이 모여서..”

“아몬은 제국 유학시절에 매음굴을 방문할 때면 N이라는 가명을 썼어요. 네비로스라는 뜻이죠. 그이가 네비로스이지요? 아몬은 아직 살아있죠?”

“....”

“아니라고 딱 잡아떼셔야지. 타이밍을 놓치셨군요.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구세주를 죽인 악마 아몬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과연 가니아 민족이 이 전쟁을 멈출까요? 더 폭발할까요?”

“...내가 가진 카드가 더 있나?”

“영주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통치 권리를 포기하고, 평등한 개인이 되어 민중의 군대에 복무하겠다는 서약을 받아오세요. 그럼 항복을 논의하죠. 아! 그이도 꼭 넘겨주세요.”
“시간이 필요해. 아마도 3개월..”

“일주일. 일주일내로 하지 않으면 가니아 민중이 악마 아몬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영주들의 배를 가르려 할 거예요. 그것도 산채로!”

레베나는 떠나려고 몸을 돌리고는 허공으로 말을 던졌다.

“그 사이를 못 참고 그 악마가 개수작을 부리면 대가를 치를 거예요.”

그리고 사라졌다. 나마는 산길을 내려왔다. 산길 끝에 버드콥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계획은 진행되는 게 아니라 거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아몬은 집착했던 안락한 영주의 삶 일부를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메기도 행성 영주들의 통치 권리를 인근 행성계 영주나 워로드, 기업에게 임대했다. 특히 가니아 민족에 대한 모든 지배 권리를 포기했다. 한 민족 전체를 팔아넘겼다. 가니아 민족은 다혈질이기에 쾌락에 약했다. 적당한 쾌락만 보상해주면 노동자로 부려먹기 쉬었다. 호전성이 문제가 됐지만, 둘로 나뉘었던 예전 역사를 참고하여 이번에는 수십 가닥으로 찢을 계획이었다. 다시는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구매자들은 피지배층을 거느린 권력자들이어도 한 민족 전체를 사들인다는 것은 반인륜적인 일이라 주저했다. 그러자 아몬이 돌연변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가니아 민족의 풍습을 증언했다. 그리고 태양폭발과 우주폭풍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구매자들은 아몬의 증언을 듣고는 가니아 민족을 사냥하여 자신들 영토로 데려가 영원히 노예로 부리기로 결정했다. 가니아 민족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연합군이 탄생했다. 아몬은 자신의 돌연변이 동족을 학살했던 가니아 민족을 팔아버리는데 성공했다. 나마가 손목에 찬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아아. 버드콥터 무전연결. 작전성공.”

한 민족 전체를 팔아버리는 전무후무한 일로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하는 짓은 최악이 아니라 차악이다. 저 광신도들은 구세주를 위해 살인하고, 약탈하며 자신들만의 약속의 땅을 끝까지 기다릴 터였다.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굳게 믿으며. 한 민족 전체를 노예로 팔아버리는 사악한 악당이 되어서라도 저 놈들을 막을 수만 있다면 온 우주가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 멍청한 것이 내일 구매자들이 함대를 이끌고 도착한다는 걸 모르고 무려 일주일이나 시간을 줬다고 아몬에게 얼른 알려. 아몬의 예지몽대로 항복한다고 6개월이나 시간 끌 길 잘했어.”

개수작을 부렸다고 그 악마가 대가를 치르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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