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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직 40일의 바다

2023.09.01 00:0009.01

 40일의 바다

김아직

지금으로선 이 양피지가 하루 속히, 이치를 아는 자의 손에 들어가기를 신께, 이 땅의 신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구려.

나는 니콜로요. 
알렉산드리아의 비단을 베네치아로 실어 나르는 무역선 스페스호의 이발사라오. 선원들의 머리와 수염을 깎고 이런저런 외상들을 꿰매고 치료하고는 게 내 일이오. 짐배에서 선원들이 다칠 일이 뭐가 있으랴 싶겠지만 낡은 궤짝의 뿌다구니에 종아리가 찢어지기도 예사고 선원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칼부림이 날 때도 있다오.

고향은 피렌체요. 서적상 거리에 양피지를 납품을 하던 양피지 제조공의 외동아들이었소. 급박한 전언을 하면서 출신을 밝히는 것은 이발사라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이 양피지가 한낱 장난으로 치부되거나 그냥 버려질까 저어되어 그러오.

평생 염소 가죽을 두드려서 양피지를 만들어온 아버지는 아들만큼은 필경사로 키우고 싶은 욕심에 일찍부터 내게 글을 가르치셨소. 노름꾼 시절을 거쳐 내 손에 펜 대신 작은 칼과 바늘이 쥐어지게 되었소만 내 일찍이 단테의 책을 읽었고, 그 유명한 페트라르카가 라인란트의 어느 수도원 서가에서 발견한 고대 문헌의 필사본(*1)도 접했다오. 그러니 내 비록 이발사에 불과하나 글마저 미천한 무지렁이는 아니오.

오, 신이시여. 방금 선장의 비명을 들었소.
아침나절 내내 구토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객혈이 시작된 모양이오. 독한 술과 칼, 바늘과 실만 있으면 다루지 못할 상처가 없다고 자부해 왔지만 저 병증은 외과수술과 처치로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아니 제 아무리 용한 의사를 데려와도 소용없을 것이오. 저것은… 천형이오.

천형은 천형인데 이 땅과 이 하늘의 주인께서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신이 내리는 벌이오. 스페스호를 휩쓴 죽음은 감히 ‘테라 알리아’(*2)에서 온 신을 마주한 대가요. 이 땅을 만든 신께서도 손을 놓고 보고만 계시단 뜻이오. 이 말이 사제나 주교, 면죄사 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경을 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나의 신앙을 불경하다 단죄하기 전에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글이 다소 두서없이 이어지더라도 양해 바라오.

같은 피렌체 출신인 데다 나와 마음이 잘 맞았던 1등 항해사는 스페스호의 우현 쪽 선실에 틀어박힌 뒤로 기척이 없소. 다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끼쳐오는 시취가 그의 안부려니 하고 있다오. 선장마저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것으로 보아 항해일지는 중단된 지 오래일 것이오. 그러니 나라도 스페스호의 마지막 일들을 기록해야 하지 않겠소.

물론 이 글은 단순한 보고서는 아니오. 뭍의 사람들이 특히나 이치를 아는 자들이 읽고 발 빠르게 조처를 취해야 할 사안이라오. 순번이 뒤로 밀리긴 하였으나 내게도 곧 죽음이 닥칠 것이오. 해골만 남아 달그락거리는 사신들이 기어이 나를 찾아내어 화살을 쏠 거란 말이오. 이 기록을 마무리하고 죽기를 기도할 뿐이오. 

스페스호는 ‘테라 알리아’에서 온 신의 선택을 받았고 그 대가는 실로 참혹했소.
아, 안타깝게도 '테라 알리아'에서 온 신이란, 우리 신의 무심함을 원망하기 위해 끌어들인 표현이 아니오. 
그것은 실재요. 언젠가 도박판에서 만난 이교도에게 듣기로, 그 자의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했소. 괴물 손에 죽은 인간은 신도 구원하지 않는다.

이제야 그 말이 이해가 되는구려.
이 땅을 만든 신에게 버림받고 무저갱에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었소. 괴물 손에 죽는다는 건 우리 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 다른 신의 영토로 끌려간다는 뜻이었소. 

아! 스페스호는 이름값을 못하고(*3) 절망과 죽음만 가득하다오. 살아남은 자들은 선장이 발병한 뒤로 음식을 챙겨 각자의 공간에 틀어박혔소. 이발사 된 자의 도리로 혹여라도 내가 치료해야 할 부상자가 있을까 하여 수차례 짐칸과 선실을 둘러보았으나 구토와 비명 혹은 타인의 접근을 꺼리고 감시하는 광적인 침묵뿐이오. 아마 선실 곳곳에서 시신들이 부패하고 있을 거요. 

본래 스페스호는 베네치아와 알렉산드리아를 오가는 무역선이오. 알렉산드리아에서 비단을 실은 다음 키프로스에 들러 ‘달콤한 소금’(*4)을 싣고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인 항로였소. 하지만 이번에는 키프로스를 경유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곧장 베네치아로 향했소. 선장과 1등 항해사가 따로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항로에 이의를 제기하는 선원은 없었소. 기프로스를 거치든 베네치아로 바로 가든 선원들이 받는 삯은 같기 때문이오. 

처음에는 모든 게 정상적이었소. 파도는 잠잠하였고 사각 돛이 순풍을 만난 덕에 범선은 매끄럽게 나아갔다오. 스페스호의 뱃사람들은 성 에라스모를 수호성인으로 섬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더러는 성 니콜라오를 섬기는 자들도 있었소. 우리는 두 성인의 보호 아래 값비싼 알렉산드리아의 비단을 싣고 베네치아로 나아갔소. 포도주는 그득했고 시칠리아 출신의 순박한 요리사는 아침마다 새로 구운 빵에 신선한 올리브유를 곁들였고, 저녁에는 젊은 선원들이 로트를 뜯으며 노래를 하고 다들 흥겹게 먹고 마셨더랬소.

하지만 그 일이 벌어진 거요.
알렉산드리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소.

출항한 뒤로 코빼기도 안 보이던 면죄사가 내 방문을 두드렸소. 메스꺼움과 구토, 복통이 극심하니 사혈을 해 달라는 것이었소. 아닌 게 아니라 면죄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소. 흰자위에 바늘 자국 같은 붉은 반점들이 맺혀 있고 피부는 피멍으로 얼룩덜룩했소. 사혈이든 뭐든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소.

우리 몸에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네 가지 체액이 존재하는데 이들 사이에 균형이 깨지면 질병이 생긴다오. 이럴 땐 환자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빼내야 하는데, 이 양피지를 발견한 그대가 식자라면 알겠지만 1163년 투르 공의회가 피를 끔찍한 것으로 정의하고 외과수술을 금하면서 빌어먹을 사혈도 의사가 아닌 우리 이발사들의 몫이 된 거요.

어깨나 뒷목에 상처를 내어 피를 빼낸 다음 장미기름을 발라주면 끝이니 사혈 자체는 까다로울 게 없소. 문제는 사혈만 하면 모든 병이 사라지리라는 맹신이오. 내 일찍이 피렌체 서적상 거리에서 뛰어 놀며 자란 덕에 믿을 것은 가운데 뇌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오. 가운데 뇌(*5)가 관장하는 이성만이 세상의 이치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오.

이성은 근거를 딛고 서는 법이 아니겠소. 하지만 내게 사혈을 청하는 사람 대부분은 근거 없이, 피를 뽑는 것만으로 몸속의 모든 염증이나 혹들이 사라진다고 믿는 자들이오. 스페스호에 탄 자들 중에 학식이 가장 높다는 면죄사마저 그럴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수술 칼을 쥐었소.

사혈을 하였으나 당연히 면죄사의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소. 처방할 만한 약도 없었소. 민간에서는 임신한 귀부인들의 메스꺼움과 구토를 다스리는 데는 값비싼 생강을 쓰고 여염집 임신부들의 구토는 페퍼민트 차로 다스린다오. 임신과는 무관한, 속탈로 인한 구토 증세에는 카모마일 차를 쓰는데 내 보기에 면죄사의 증상은 단순한 속탈이 아니었소. 카모마일 차를 처방했으나 차도가 없었고, 면죄사도 그만하면 되었다며 더는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소.

면죄사는 구토에 이어 혈변 증세를 보였소.

나는 불안한 마음에 다른 선원들을 살피고 다녔소. 이태 전부터 흑사병이 도는 터라 누가 병증을 보이면 전염성 여부부터 따져봐야 한다오. 스페스호에는 의사가 따로 없소. 의사들은 대부분 성직자들이거나 부유한 집 자제들이라 이런 짐배에 승선하려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오. 그래서 사람들 머리나 깎고 찢어진 살갗이나 꿰맬 줄 아는 내가 본의 아니게 의사 노릇을 겸하는 거요.

선실과 갑판을 두루 돌아본 결과 선장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자가 둘 더 있었소.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에 얼굴이 검은 선원이고 또 하나는 면죄사의 호위를 맡고 있는, 출신을 알 수 없는 무사였소. 선원들 사이에 떠도는 말들을 종합해 보면 무사는 견습기사 시절에 마을 아가씨를 겁탈하려다 추방당한 뒤 면벌부를 얻는 대가로 면죄사의 종자가 된 것으로 보이오.

알렉산드리아 출신 선원은 입술과 혀뿌리에 궤질이 생겨 피가 나고 면죄사의 호위무사는 피를 토하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속에서 게워내는 게 아니라 목구멍의 출혈이었소. 그 둘과 면죄사는 원인미상의 출혈이라는 증상 외에 승선 전에 같은 숙소에 묵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같은 객잔에서 묵은 뒤 면죄사의 짐을 배에 실었던 거요.

나는 선장을 찾아가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면죄사와 그 둘을 큰 선실에 함께 격리하라 청을 넣었더랬소. 하지만 선장은 면죄사에게 별도의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했소. 이 범선에서 감히 선장의 명을 따르지 않을 자가 있느냐고 되물었으나 선장은 골치가 아프니 면죄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거요. 선장과 면죄사 사이에 내가 모르는 전사가 있는 듯했소. 나는 심히 염려가 되었으나 물러날 도리밖에 없었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면죄사 일행이 보이는 증상이 흑사병과는 조금 달랐다는 점이오.

알려진 바대로 흑사병은 구토와 발열이 주된 증상이며 감염자 대부분이 몸져누워 운신을 못 하오. 그런데 면죄사와 호위무사,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선원은 비트적거리며 스페스호 곳곳을 누비고 다녔소. 피부 괴사와 출혈로 섬뜩한 몰골을 하고 있어도 정신은 멀쩡한지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고 피가 흐르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기도 했다오. 그리고 얼굴과 팔뚝, 목덜미에 피멍이 들어 있었소. 옷을 벗겨보진 않았으나 온몸이 그러할 듯 했소. 처음에는 기력이 없어서 어디 부딪친 모양이라 여겼으나 셋 다 멍의 양상이 흡사했소. 멍든 부위가 늘어나고 하루하루 멍의 빛깔도 짙어지는 거요.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내 치료일지에 그들의 병증을 낱낱이 기록했소. 바다에 던져지고 없는 기록을 들먹여 무얼 하겠소만 내가 가운데 뇌로 사태를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아주길 바라오.

이틀 후 알렉산드리아 출신 선원이 정신을 놓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소. 그리고 다음날엔 면죄사가 그 다음날엔 호위무사가 비슷한 증상을 보였소. 나는 전염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소. 병증이 유사한 데다 추이까지 비슷하니 당연한 거 아니겠소. 선장에게 세 사람을 격리하라 재차 요구했으나 미련한 선장은 우유부단하기 그지없었소. 그래서 내가 나서서 나이가 있는 선원들을 불러모으고 사태를 알린 뒤,  그 셋을 빈 화물칸에 감금하였소. 다행히 선장은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힘을 실어주었소. 

우리는 세 사람의 옷가지를 모조리 불태우고 나머지 짐은 바다에 던졌소. 선원들 사이에선 면죄사 일행이 흑사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소. 흥분한 젊은 선원들이 그들을 바다에 던지자 하였으나 이번에도 선장이 반대하고 나섰소. 선장의 말인 즉 ‘이 일’에 면죄사가 꼭 필요하다는 거요.

세 사람을 가둔 날 밤, 나는 선장을 찾아가서 ‘이 일’이란 게 무언지 캐물었소.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자로서 이 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했소.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던 선장도 면죄사 일행이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어 보인다는 말에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소. 나는 그 셋을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선상에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쐐기를 박았소. 그러자 선장도 결심이 선 듯 자기가 아는 바를 털어놓더이다.

스페스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곧장 베네치아로 가는 데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오. 그때까지 나를 비롯한 선원들은 키프로스를 경유하는 않는 게 알렉산드리아의 비단만으로 짐칸이 다 찼거나 이번에는 키프로스의 ‘달콤한 소금’을 주문한 상단이 없기 때문인 줄 알았소. 하지만 선장 말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특별한 짐’을 실었고, 그 짐을 속히 베네치아로 수송해야 한다는 것이었소. 그 일의 책임자가 면죄사 일행이라 했소.

수송 명령을 내린 이는 지난달에 벌써 스페스호의 선주에게 두카트 금화로 비용을 치렀다고 했소. 선장이 아는 건 거기까지가 전부라 했소. 면죄사를 보낸 걸로 보아 ‘특별한 짐’을 실어오라 명령한 이는 수도원장이나 주교 같은 고위 성직자가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보태긴 했다오.

다음날 화물칸 문을 열었을 때 면죄사 일행은 모두 죽어 있었소.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한 지 이레째 되는 날이었소. 셋 다 피를 토하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살갗이 터진 채였소. 우리는 선장의 동의를 구할 것도 없이 시신들을 바다로 던졌소. 시신들이 누웠던 자리는 독한 술을 붓고 재로 덮은 다음 그 짐칸을 봉쇄했다오. 죽은 자들의 선실에 있던 옷과 짐들도 모조리 바다에 버렸소. 

그 후로 며칠간 유사 증상을 보이는 병자가 나오지 않아서 면죄사 일행이 앓았던 병은 전염되지 않는 걸로 잠정 결론이 났소. 세 사람은 분명 같은 병으로 죽어갔는데 그게 전염되지 않는다면 무슨 뜻이겠소? 이치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거요.

그렇소. 나는 중독 혹은 독살을 의심했소.
면죄사가 운반하는 ‘특별한 짐’을 탐낸 누군가가 면죄사 일행에게 일주일에 걸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끔찍한 독을 먹였다고 말이오. 문제는 독을 유추해낸 자가 나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오. 하지만 그 다음 수순이 달랐소. 나는 독을 먹인 자의 정체와 범행 동기를 알고자 했고, 저들은 누군가 면죄사 일행을 독살하고서라도 차지하고자 했던 그 ‘특별한 짐’에 눈독을 들였소.

나는 ‘특별한 짐’을 노리는 선원들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소. 선원들 사이에 그 짐이 ‘달콤한 소금’보다 비싼 향신료거나 금궤일 거라는 소문이 돈다는 것도 까마득히 몰랐다오. 내 진즉 그 우둔한 자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면 그 다음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매일 밤 후회로 가슴을 쳤소.

그 미련한 자들에게서 증상이 나타났소. 구토와 혈변, 잇몸 출혈에 온몸의 피멍까지 면죄사 일행을 죽음으로 몰아간 병증과 동일했소. 모두 넷이었소. 갑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어린 선원들이라 면죄사 일행과는 따로 접촉이 없었던 자들이었소. 출혈과 통증으로 울어대는데 내가 할 수는 있는 건 진통 효과가 있는 라벤더 차를 먹이는 것밖에 없었소.

이제 보니 아둔하고 아둔한 건 나였소. 그때까지 나는 독을 쓰는 자가 이 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선장에게 부탁하여 선원들의 출신을 면밀히 조사한 뒤 범인을 잡아 죽이면 더는 독살당하는 선원이 없으리라고 말이오.

넷 중 가장 어린 녀석의 증상이 유독 빠르게 진행되었소. 이미 면죄사 일행을 겪어본 터라 그들이 어떻게 죽어갈지도 그려지더이다. 사흘째 되는 밤 가장 어린 선원이 입을 열었소. 실은 면죄사의 ‘특별한 짐’을 열어보았다고 말이오. 상자에서 불길한 빛이 새 나오는 바람에 다들 겁을 먹고 다시 뚜껑을 덮었다고 했소. 하늘에 맹세코 그 안에 든 물건은 구경도 못했다고 말이오. 그때 비로소 내 가운데 뇌가 새로운 가설에 도달했소.

누군가 저들에게 독을 먹인 게 아니라 ‘특별한 짐’ 자체가 독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 짐을 만지거나 근거리에서 접촉한 자들에게 병증이 나타난다.

흑사병도 공기가 매개가 되어 환자의 날숨을 들이마시면 감염된다고들 하지 않소. 그러니 ‘특별한 짐’에서 뿜어져 나온 독성 공기가 원인일 수도 있지 않겠소.

나는 당장에 그 짐을 보러갔소.

납으로 된 궤였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궤 자체만으로도 괴이했소. 누가 무거운 납으로 궤를 만든단 말이오. 양옆에 설치된 자물쇠가 부서져 있었으나 선뜻 뚜껑을 들추진 못했소. 안에 든 것을 확인하면 스페스호를 덮친 죽음의 비밀이 드러나겠지만 나 역시 죽음의 행렬에 휘말릴 거 아니오. 나는 신중을 기하고자 갑판장의 방을 찾아갔소.

갑판장의 선실에 책이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오. 소싯적 피렌체 서적상 거리에서 배운 바는 지혜를 구하려거든 책과 양피지를 뒤져야 한다는 것이었소.

나폴리 출신인 갑판장은 십 년 넘게 연금술사의 조수로 지내다가 연금술사가 사망하자 ‘쓸모없는 책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들었소. 말은 쓸모없다 하면서도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걸로 보아 연금술에 미련을 아주 떨쳐내진 못한 듯했소.

듣던 대로 갑판장의 선실에는 책과 양피지 상자가 쌓여 있었소. 연금술사에게 물려받은 유산답게 대부분이 연금술 관련 서적이었소. 아르메니아 점토, 녹청, 증류기, 황소의 쓸개, 비소, 유황, 쥐오줌풀…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들을 나열하고 하나하나의 쓰임을 설명한 책들만 해도 수십 종은 되는 듯했소. 실제 연금술 과정이 기록된 책에는 수은, 황산, 맥아즙 등 온갖 것들을 끓이고 섞는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결말은 언제나 ‘현자의 돌’이라는 연금약액이 없어서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소.

결말만 놓고 본다면 허망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연금술 덕에 많은 물질들의 성질을 밝혀내게 되었으니 아주 쓸모없는 기술만은 아닌 듯했소. 내가 알고자 한 것은 납의 성질이었소. 연금술은 본래 납이나 구리 따위의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기술이니 납에 대한 설명도 어딘가에는 있을 게 아니겠소. 하염없이 책과 양피지를 뒤지는 꼴이 답답했던지 갑판장이 무얼 찾느냐고 물었소.

솔직히 대답했소. 면죄사가 실은 물건의 성질을 알아내고자 납으로 만든 궤의 쓰임을 연구중이라고 말이오. 갑판장은 어느 멍청한 놈이 물러빠지고 무겁기만 한 납으로 궤를 만드느냐며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주었소. 납의 성질이 정리된 두루마리였소. 라틴어가 반이나 섞여 있었으나 피렌체에서 익힌 라틴어를 복기해 가며 더듬더듬하게나마 읽을 수 있었다오.

납은 무른 금속이지만 물에 상하지 않아 배관과 식기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고 되어 있었소. 내가 알고자 하는 성질은 두루마리의 끄트머리에 기록되어 있더이다. 납은 밀도가 높아서 밖으로 새 나오면 안 되는 것들을 가둘 때 쓰인다는 것이었소. 밀도가 높기로는 금이 한수 위지만 금은 값이 비싸니 대체제로 납을 쓴다는 것이오. 하지만 ‘밖으로 새 나오면 안 되는 것들’이 무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소.

갑판장도 아는 바가 없다 했소. 그러면서 연금술사의 조수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우스갯소리 하나를 들려주더이다. 연금술사를 붙들고 납에 대해 캐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연금술에서 납이란 속히 벗어나야 할 천한 시발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오.

양피지를 본래 자리에 돌려놓고 선실을 빠져나오는데 갑판장이 나를 불렀소.
두려워 마시오, 이발사 양반. 그분이 우리 배를 지켜주고 계신다오.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까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실 거요.

나는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소. 이 시국에 가장 쓸데없는 게 신앙고백 아니겠소. 그분이 정말 우리를 지켜주고 계시다면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갈 리가 없으니 말이오. 차라리 신께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시련을 주신다는 면죄사들의 궤변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았소.

그래도 갑판장의 책 덕분에 납으로 궤를 만든 연유를 추측할 수 있었소. ‘밖으로 새 나오면 안 되는 것’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운반하려 했던 거요. 이제 남은 일은 납으로 만든 운반함을 처리하는 것이었소. 땜질로 궤를 단단히 봉인한 뒤 바다에 던져버리면 끝날 일 같았소. 하지만 나의 앞쪽 뇌가 망상을 부추겼소. 납궤가 나를 부르는 것 같더란 말이오.

희망 없는 배에 오른 이발사여, 납궤에 든 것이 궁금하지 않느냐. 어서 와서 궤의 뚜껑을 들추어라. 일찍이 헤파이스토스가 진흙으로 만든 여인(*6)도 해치운 일을 네가 못할 게 무어냐.

내가 망상과 씨름하는 사이 어린 선원들이 차례로 죽어나갔소. 저희끼리 궤를 열어본 지 엿새째 되던 날 셋이 죽었고 마지막 한 명은 이레째 날에 죽었소. 발병부터 사망까지 걸린 시간은 면죄사 일행과 비슷했소. 나는 이발 보자기를 포개고 꿰매어 두툼한 입 가리개를 만들었소. 납궤 안에 든 것이 뿜어내는 독성 공기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었소.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납궤를 열지 못했소. 병증을 보이는 선원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선장의 명령으로 종일 진통제 허브를 달여야 했던 거요. 납궤 든 것이 괴질환의 원인인 듯하다고 보고했더니 선장은 ‘특별한 짐’이 있는 화물칸 출입구에 쇠사슬 자물쇠를 채웠소. 베네치아에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납궤가 있는 화물칸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소. 비단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해야 하는 상단 소속 선원들이 반발했지만 뭐 어쩌겠소.

나는 상단 소속 선원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선장의 결정이 마뜩찮았소. 짐칸을 무턱대고 폐쇄할 게 아니라 그 빌어먹을 납궤의 정체를 확인하고 바다에 버리는 게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겠소. 본래 열창 부위는 잔가시나 모래알갱이, 못 따위의 이물질을 제거한 뒤에 꿰매야 하는 법이오. 짐칸 출입구를 막아버린 선장의 결정은 얼뜨기 이발사가 서둘러 시행한 봉합수술이나 다를 바 없었소.

환자들의 증상을 살피고 다니다 보니 모든 게 원점이었소. 병의 전염성을 다시 고민하게 된 거요. 새로 발병한 환자들은 납궤를 만진 적도 없는 자들이었소. 그러니 앞서 죽은 7명이 병증의 중간 매개가 되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소. 선장은 비단을 쌓아둔 짐칸 하나를 비운 뒤 환자들을 그 안으로 몰아넣었소. 출입구에 사람 머리통 크기의 구멍을 낸 뒤 먹고 마실 것과 똥통만 드나들게 했소.

나는 격리실 문 앞으로 가서 환자들의 상태를 보고받고 기록했소. 살려달라는 말과 진통제를 달라는 말 빼고는 건질 게 별로 없었소. 격리실 환자들 중에는 이발 일을 배우고 싶어 하던 어린 선원 리샤르댕도 있었소. 파리의 유대인 거리에서 푸주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생 마를렌 교구에 모종의 죄를 짓는 바람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베네치아까지 흘러온 아이였소. 지금도 리샤르댕의 시신이 바다에 던져지던 때를 생각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오. 

눈빛이 영민하고 손끝도 야무지던 리샤르댕은 나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언지 정확히 꿰고 있었소. 그 아이는 객혈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제 병증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었소. 

나의 예상과 달리 리샤르댕은 앞서 죽은 젊은 선원 넷과 비슷한 시기에 발병했다고 했소. 처음 이틀 동안 속이 뒤집히고 구토가 일고 피부에 멍이 올라왔으나 이후 닷새 동안은 견딜 만했던 모양이오. 그러다가 젊은 선원들이 죽던 무렵부터 가윗날로 장을 끊는 듯한 복통과 혈변이 시작됐다는 것이오.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다고 했소.

젊은 선원들이 납궤의 뚜껑을 열 때  리샤르댕은 지하 짐칸을 복도를 청소하던 중이었다고 했소. 선원들이 납궤를 여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납 상자에서 나온 나쁜 공기가 쉽게 가 닿을 만한 거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했소. 그런데 그들과 같은 시기에 발병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소.

마지막 때가 되자 리샤르댕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고 제 고향 말투로 뭐라 뭐라 지껄이다가 다음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소. 그때가 젊은 선원들이 납 상자를 연 지 열사흘 만이었소.

죽은 자들의 시신을 바다에 던진 뒤 선장은 음식물을 최대한 부엌과 빈 선실로 옮기게 했소. 짐칸 전체를 폐쇄하려는 것이었소. 누구도 선장의 명령 없이는 짐칸에 내려갈 수 없게 된 거요. 짐칸은 환자들이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는 격리실이 되었소. 우리는 순번을 정해서 짐칸에 갇힌 자들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러 갔소.

선장은 면죄사가 초장에 죽어버린 걸 안타까이 여겼소. 교황청에서 받은 면벌부 판매 허가증을 가진 자라 했으니 분명 유력 수도원 출신일 게 아니오. 죽음의 춤판이 그치질 않는데 남은 자들 중에는 기도를 할 줄 아는 자가 없었소. 신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거나 태어난 일을 저주하는 자들은 넘쳐났으나 기도로 신의 호의와 관심을 스페스호로 끌어올 사람이 없었소.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이 땅의 신에게 의지하고 기도의 힘을 믿었던 거요.

어리석게도….

일찍이 피렌체 거리에서 면죄사들이 사람들을 등쳐먹는 꼴을 수차례 본 터라 나는 그 작자들을 신뢰하지 않았소. 하지만 끊이지 않는 선상의 죽음 앞에서 나 또한 면죄사의 부재가 아쉬웠소. 면죄사라면 이 난리통에 그럴싸한 구실을 달아줄 것 같았소. 누가 어떤 죄를 지어서 신께서 벌을 내리시는 거라거나, 신께서 어떤 연유로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이야기들 말이오. 이유를 모르는 고통보다야 구실이 달린 고통이 좀 낫지 않겠소.

흔히들 흑사병을 두고, 하늘의 신께서 내리꽂는 진노의 화살이라고 하지 않소. 종교박해 시절에 나무 기둥에 묶인 채 수십 개의 화살을 맞고도 살아남은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을 흑사병의 수호성인으로 섬기는 이유도 그래서가 아니오. 하지만 스페스호에 날아든 재앙은 흑사병의 화살과도 달랐소.

흑사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발병하지만 젊고 건강한 자들은 상대적으로 많이들 살아남았소. 늙고 약한 자부터 데려가는 게 죽음의 본성 아니오. 그런데 납 상자에 든 것이 퍼뜨린 병증은 나이나 건강상태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소. 신께서 우리 가운데 뇌에 이성을 심어주신 것은 이성이 신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오. 피렌체 서적상 거리의 훌륭한 책들은 그 믿음의 기반 위에 지어지고 필사되는 것들이라오. 그런데 젊음과 건강이 도움이 되지 않는 병증이라니, 나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소.

스페스호에는 이치를 아는 자가 없었소. 책을 지닌 갑판장은 연금술 외의 지식에는 무지했고 선장과 1등 항해사의 지식도 항해술에 집중되어 있었소. 서적상 거리에서 나고 자란 나도 7일에서 15일 만에 머리가 빠지고 살이 썩고 온몸에 피멍이 들고 객혈을 하고 혈변을 보며 헛소리를 중얼거리다 죽게 되는 병을 설명할 지식은 갖지 못했소.

이치를 모르는 자가 필요한 지식을 찾는 방법은 두 가지라오.
하나는 이치를 아는 자들이 엮은 책을 찾아보는 일인데 갑판장이 가진 것을 비롯해 스페스호에 있는 책은 이미 다 뒤져본 터였소. 또 하나의 방법은 일의 근원으로, 접근 가능한 데까지 거슬러간 다음 처음부터 되짚어 오는 것이오. 이는 피렌체의 서적상 거리를 드나드는 고문헌 사냥꾼들이 쓰는 방법이라오.

사라진 문헌을 찾는 첫 번째 단계는 그 문헌이 작성된 곳으로 가보는 것이오. 작가가 누군지, 어느 가문의 누구에게 헌정되었는지, 후원자는 누구였는지, 처음에 몇 부가 제작되었는지 확인한 뒤 원전의 행방을 가늠하는 것이오.

하여 나는 사람들이 납궤를 열기 전으로, 면죄사가 ‘특별한 짐’을 스페스호에 싣기 전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소. 사람을 죽일 만큼 위험한 것이 들어 있는 납궤가 어찌 하여 스페스호의 짐칸에 실렸으며, 면죄사는 왜 그 일을 맡았는지 알아내려는 거였소. 앞서 면죄사 일행의 옷가지와 짐을 죄다 바다에 던졌다고 한 것을 기억하시오? 그 자의 짐은 의외로 단출했소. 여벌 수도복에 속옷이 두 벌, 면벌부와 뭔가 달그락거리는 것이 담겨 있던 항아리들이 전부였소.

항아리는 따로 열어보지 않았소. 보나마나 구원을 빌미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도구들이었을 거요. 언젠가 베네치아에서 만났던 면죄사는 낡은 천 쪼가리를 들고 다니며 그리스도의 수의라고 떠들고 다니더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사기꾼도 그런 사기꾼이 없으나 면죄사들의 달변이 더해지면 둘 중 하나는 그 말을 믿는단 말이오. 그래서 면죄사의 잡동사니들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다에 처박아 버렸던 거요.

하지만 딱 하나 남겨둔 물건이 있었소. 바로 돈주머니였다오.
직접 보진 못했소만 선장이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대로 변호사를 수소문하여 면죄사의 유산을 맡기겠다고 하는 걸로 보아 제법 두둑한 돈주머니였을 게요. 본래 면죄사들은 수도복 허리춤에 면벌부 보자기를 비롯해 온갖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위세를 과시하는 법인데 그 자들의 돈주머니는 본 적이 없었소. 그게 무슨 뜻이겠소? 돈주머니만큼은 속에 품고 다닌다는 거요. 우리 같은 속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나는 선장에게 면죄사의 돈주머니를 보여 달라 청했소. 선장은 선실 금고에서 면죄사의 돈주머니를 꺼내주었소. 염소가죽으로 만든 돈주머니 안에는 두카트 금화와 그랏쏘 은화가 잔뜩 들어 있었소. 하지만 돈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소. 나는 면죄사가 가장 안전한 곳에 두었을 만한 다른 것을 찾고 있었소. 예상대로 돈주머니 안쪽에 작은 겹주머니가 있었소. 그 안에 얇은 가죽으로 다시 싼 종이가 있었소.

밀라노의 어느 주교가 보낸 친서였소.
밀라노 주교의 인장이 찍힌 편지 안에 내가 찾던 답이 들어 있었소. ‘특별한 짐’의 정체 말이오. 그것은 1000년 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어느 성인의 유해였소. 주교의 서한은 그 유해를 베네치아로 모셔오라는 명령서였던 게요.

성인의 유해를 모시는건 교회의 오랜 전통이지만 근래 들어 그 풍토가 한층 가열되고 있소. 성인의 유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회나 수도원의 급이 결정될 정도니 말이오. 성 유골을 모신 교회는 성지가 되어 순례자들이 모여들었고, 성 유골을 모시고 도시를 순회하면 성전 건립 기금도 수월하게 모아진다오. 그러니 1000년 전 박해지역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성인들의 유해를 찾아다니는 뼈 사냥꾼들까지 생겨난 거요.

결국 납궤 안에 든 것은 1000년 전 종교박해로 이집트에서 세상을 떠난 어느 성인의 유골이란 뜻이었소.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소. 축복받은 성인의 유골이 왜 나쁜 공기를 뿜어내고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 한단 말이오. 더 이상한 것은 성인의 유골은 언제 어디서 어떤 연유로 죽은 성인인지 상세 기록이 따르기 마련인데, 납 상자 안의 유골은 그 신상을 알 수 없단 점이었소.

항간에는 돼지뼈를 들고 다니며 어느 성인의 넙적다리뼈라고 사기를 치는 면죄사도 있다고 들었소.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 뼈가 누구의 뼈인지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오.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오. 혹시나 하여 염소가죽 돈주머니를 뒤집어서 탈탈 털어보았지만 돈과 밀라노 주교의 친서가 전부였소.

가능성을 두 가지로 좁혀 보았소. 먼저 밀라노 주교가 어느 사기꾼에게 속아서 가짜 성인의 유해를 사들였을 가능성이었소. 하지만 납으로 만든 운반함 자체가 그 가능성을 반박하고 있었소. 누가 성인의 유해를 납궤에 담는단 말이오. 두 번째는 밀라노 주교가 유해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었소. 그래서 미리 납궤를 준비한 뒤 면죄사를 파견하여 실어오게 한 거요.

한편 유해의 진위만큼이나 석연찮은 게 밀라노 주교의 정체였소. 면죄사의 돈주머니에서 발견된 친서에는 밀라노 주교의 인장이 찍혀 있었으나 주교의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소. 결국 나는 이 일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주교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무언가를 이름 모를 성인의 유해로 둔갑시켜 스페스호에 실은 사건이라고 결론 지었소.

내가 밀라노 주교의 친서에 빠져 있는 사이 갑판장에게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소. 흰자위에 붉은 점들이 돋아나더니 자꾸만 입에서 ‘납’ 맛이 난다고 했소. 연금술에 입문할 당시 수차례 납을 맛보았기 때문에 틀림이 없다고 했소. 돌이켜보니 앞서 죽어간 선원들도 발병 초기에 입맛을 다시거나 침을 뱉곤 했었소. 다만 그게 납 맛이라는 걸 그들은 몰랐던 게요.

갑판장이 쓰러지는 건 일개 선원이 죽어나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소. 선장도 갑판장을 짐칸에 가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소. 갑판장이 보이지 않는 것과 그가 피부가 괴사된 몰골로 갑판을 누비고 다니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섬뜩한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오. 결국 죽는 순간까지 배를 돌보겠다는 갑판장의 뜻에 따라 선장은 그를 내버려두었소. 갑판장은 복통과 출혈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선미에 매달려 바다를 살피곤 했소.

한 번은 요리사를 대신해서 빵을 던져주러 갔더니 갑판장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나를 불렀소. 
폭풍이 몰려올 거요. 걱정은 마시오. 신께서 이 배를 베네치아로 데려갈 것이오. 장담컨대 스페스호는 본래 항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을 거요.
그러고는 킬킬 웃는 것이었소.

그날 밤 갑판장이 배 밖으로 몸을 던졌고 다음날 새벽엔 정말로 폭풍이 몰려왔소. 배 안에선 죽음의 행렬이 배 밖에선 검은 파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선장이 선원들을 단속하는 틈을 타 큰 자루를 몸에 감고, 등불과 망치를 챙겨서 짐칸으로 내려갔소. 밀라노 주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들인 것의 정체를 마주할 결심이 선 거요. 우리 가운데 책을 가장 많이 읽고 한때 연금술사의 조수였던 갑판장마저 죽어나가는데 내가 무슨 수로 죽음을 피하겠소. 그러니 죽기 전에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의 정체라도 알고자 했던 거요.

격리실에서 누군가 울부짖었지만 이내 바람소리에 묻혀 버렸소. 예사롭지 않은 폭풍이었소. 나는 격리실을 지나쳐 맨 안쪽에 있는 짐칸으로 갔다오. 망치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소. 납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길이는 내 양팔 너비쯤 되었고 높이는 내 허리춤에 닿는 제법 큰 궤였소. 그 빌어먹을 것을 진즉 열었어야 했는데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나를 가로막았던 거요.

궤의 뚜껑을 힘껏 들어 올린 다음 뒤로 밀었소. 반뼘쯤 틈이 생겼을 때 궤짝 안에서 눈부신 섬광이 새 나왔소.
그제야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의 정체를 알 것 같았소.
그건 나쁜 공기가 아니라 빛이었던 거요!
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빛이 이미 내 눈과 뇌,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든 뒤였소. 나는 눈을 비빈 뒤 궤의 뚜껑을 완전히 벗겨냈소.

푸르스름한 빛 아래 유골이 있었소. 빛을 뿜어내는 그것은 분명 인간의 뼈가 아니었소. 지금껏 보고 들은 그 어떤 동물의 뼈도 아니었소. 내 팔 길이 두 배만 한 길이에 두께는 보통 체격 성인남자의 넙적다리뼈와 비슷한 큰뼈였소. 뼈의 중앙에는 길게 이빨들이 나 있었소. 두 줄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맞물려 있는 기이한 형태였소. 거미 다리와 비슷한 형태의 것들도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중 두 개가 눈에 띄게 컸다오. 

머릿속으로 뼈들을 짜 맞췄더니 세로방향으로 기다린 입을 가진 뭔가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꼴이 그려졌소. 몸의 정중앙에 세로 방향으로 기다란 입이 있고, 그 입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개의 이빨이 맞물려 있었소. 두 줄로 이빨이 돋아난 기다란 뼈가 그것의 몸통이었던 거요. 나는 그것이 두꺼운 거미 다리 두 개로 버티고 서서, 긴 입을 양쪽으로 벌린 다음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상상을 해 보았소. 그 같은 생물체는 삼라만상의 지식이 모두 들어 있다는 플리니우스 <박물지>에서도 본 적이 없소이다. 

<박물지>에도 기이한 동물들에 대한 기록이 있긴 하오. 눈을 마주치면 누구든 죽고 만다는 에티오피아의 카토블레파스나 바실리스크 뱀 같은 것들 말이오. 하지만 그것들은 들소와 뱀의 변형태에 지나지 않소. 이미 지구에 존재하는 것들에다 인간이 앞쪽 뇌가 상상으로 덧칠을 한 존재들이란 뜻이오. 하지만 납궤에 든 것은 우리가 알던 것의 변형태가 아니었소.

그것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어떤 모습일지, 뼈로 추정되는 크기보다 더 크게 자라는지, 권속이 더 있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소. 확실한 건 그것의 뼈가 빛을 뿜어내고 그 빛이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 한다는 거요. 나는 허리춤에 감고 온 자루를 풀어서 그 망할 뼈들을 주워 담았소. 그 순간… 입에서 납 맛이 번지더이다. 드디어 나도 죽음의 행렬에 끼게 된 거요.

폭풍우에 배가 뒤집힐 것처럼 요동쳤소. 나는 자루를 끌고 갑판으로 올라와서 선미 쪽으로 갔소. 배가 기울 때마다 자루를 끌어안고 미끄러지고 패대기쳐졌지만 기고 구르며 기어이 선미에 다다랐소. 납궤에서 꺼내온 그것을 드디어 바다에 버릴 수 있게 된 거요. 고물 난간 너머로 그것을 밀어버리기만 하면 끝이었소.

그런데 시커먼 바닷물 속에 뭔가가 있었소. 폭풍에 질린 물빛보다 더 검은 것이 스페스호를 따라오고 있었소이다. 그 순간 파도에 배가 기울어, 나는 자루를 놓치고 고물 아래쪽 갑판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소. 갑판 너머로 바닷물이 치고 들어왔소. 이대로 가다가는 저 유골이 내뿜는 빛 때문이 아니라 배가 가라앉아 다 죽고 말 것 같았소. 하지만 배는 이내 균형을 되찾았소. 돛은 꺾여서 주저앉았고 폭풍은 정점을 향해 가는데 배는 어찌나 꼿꼿하게 나아가던지….

몸을 일으키고 다시 고물로 가는데 구토가 일었소. 속이 메스껍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 쓰라리기 시작했소. 죽음의 모래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요. 그나마 아는 길을 간다는 게 위안이 되었소. 어떤 증상들을 거쳐 죽게 될지 빤히 보이니 몸은 통증에 시달릴지언정 머릿속은 침착하고 담담했소.

고물 난간 너머 파도 속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소. 그제야 나는 그 검은 것이 스페스호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소. 그것은 스페스호를 밀고 있었소. 폭풍 속에서 침몰하지 않도록 배를 붙들고서 항로를 따라 밀고 있었던 거요. 폭풍이 오기 전까지, 유래 없는 순풍이 이어졌더랬소. 하지만 순풍을 만났던 게 아니라 무언가가 스페스호를 베네치아 쪽으로 밀고 있었다면….

갑판장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시오?
신께서 이 배를 베네치아로 데려갈 것이오. 장담컨대 스페스호는 항로에서 한치도….
갑판장이 말한 신은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낸 그분이 아니었던 거요. 파도 아래 어른거리는 그것은 다른 신이었소. 이 땅의 것과 온전히 다른 것, 인간의 앞쪽 뇌가 그려본 적 없는 이계의 신이었소. 배의 항로를 설계하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인간을 몰아가며, 폭풍 속에서도 배를 지탱하는 존재였소. 갑판장 그 작자는 물빛보다 검은 것이 스페스호를 베네치아로 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요.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소.
엄마의 몸을 빠져나온 갓난아이가 터뜨리는 울음 같은 거였소. 다른 세상에 도착해버린 낭패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전에 낯선 공기가 내 폐를 찌르고 들어온 거요. 이계의 신을 마주한 뒤의 첫숨이란 그런 것이었소. 내 우는소리를 들으셨는지 이 땅과 바다를 만드신 신께서 마지막 선물을 주시더이다.

번개였소. 찰나의 빛에 나는 파도 아래 있는 이계의 신을 볼 수 있었소.
수십 갈래 촉수들 아래 고사목의 뿌리 같은 몸집이 자리잡고 있었소. 그 중심부에 깊은 골이 있고 그 사이로 이빨 같은 것들이 맞물려 있다가 벌어지길 반복하고 있었소. 그대가 이치를 아는 자라면 눈치를 챘을 거요.

그렇소. 그 존재는 내가 납궤에서 꺼내온 것의 권속이었소. 납궤에 든 유골보다 수백 배는 컸지만 형태는 같았소. 나는 왈칵 피를 토했소. 나의 영혼은 부디 나의 신이 거두어 가기를! 내가 마지막까지 이계의 신에게 저항했다는 걸 기억해 주시길! 나는 구두를 벗어서 이계의 신에게 던졌소. 그러자 맞물렸던 이빨들이 양쪽으로 멀어지며 그 깊은 골에서 섬광이 새 나왔소.

빛이 다시 나의 눈과 이마를 건드렸소. 잇몸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서 턱과 목덜미가 뜨듯했다오. 내 피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갑판으로 돌아가 자루를 끌고 돌아왔소. 이계 신의 유골을 제 권속에게 돌려보내려는 것이었소. 유골을 돌려주면 그것이 물러가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소. 나는 피렌체에 두고 온 부모 형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루를 바다로 던졌소.

그 후에 벌어진 일이, 내가 이 기록을 남기게 된 계기라오.
그때 그것이 얌전에 제 권속의 유골을 챙겨서 바다 속으로 사라졌더라면 나도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을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검고 굼실거리는 촉수를 뻗어 유골이 든 자루를 배 위로 도로 던져 올리는 것이었소. 믿어지시오? 납궤가 스페스호에 실린 것도, 이계의 신이 배를 베네치아로 밀고 가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거요.

나는 확인차 다시 자루를 난간 너머로 떨어뜨렸소. 이번에도 그것은 자루를 배 위로 돌려놓았소. 그러고는 검은 촉수를 배 위로 뻗어서 나를 휘감는 것이었소. 순식간에 내 살갗과 촉수의 경계가 뭉그러지기 시작했소. 놈이 촉수를 거둬들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소. 들러붙은 살갗을 통해 이계 신의 메시지가 전해졌소.

유골을 다시 상자에 실어라, 니콜로. 너는 유골을 베네치아로 옮겨야 한다.

이계의 신은 경고의 엄중함을 일러주듯 내 살갗을 잡아뜯으며 촉수를 거둬갔소. 나는 팔뚝의 피부가 벗겨진 채 선장을 찾아갔소. 하지만 자루에 무엇이 들었는지 선미에 무엇이 들러붙었는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장이 내 목에 칼을 겨누었소. 흑사병 환자가 날숨을 내뿜으며 달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오. 하는 수 없이 나는 자루를 끌어안고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렸소.

바다가 잠잠해지고 시야가 트이자 나는 스페스호가 아드리아해에 있다는 걸 알았소. 우리가 비단과 설탕을 싣고 기분 좋게 들어서던 그 바다였소.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소. 알렉산드리아의 고급 비단은 짐칸에 방치된 채 시취에 절여졌고 많은 선원들이 죽었으며 남은 자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말이오.

나는 병증으로 총기가 흐려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소. 선미에 들러붙어 있는 것의 정체와 면죄사가 옮기려 했던 유골의 정체를 베네치아의 관리와 주교에게 알려야 했소. 진실을 기록하여 전하는 일을 내 마지막 과업으로 삼은 거요.

하지만 잊고 있었던 항구의 규칙이 떠오르지 뭐요.
흑사병으로 인하여 베네치아 항에 들어오려는 선박은 해상에서 40일을 대기해야 한다는 규칙이었소.
40일이라니! 상자를 연 자들은 엿새나 이레 안에 죽어나가고 근처에 있던 자들은 열사나흘 안에 죽는데 40일을 무슨 수로 버틴단 말이오.

뱃머리에 서서 자루를 흔들어보고 고함도 질렀으나 항구는 냉담했소. 콰란타(*7)를 채우기 전에는 누구도 뭍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었소. 선장을 비롯에 목숨이 붙어 있는 선원들은 각자 선실에 틀어박혔소. 이제는 우리들 중 누가 병증을 보이고 누가 멀쩡한지 확인할 방법도 없소이다. 

선장이 죽어간다는 것만은 알고 있소. 내게 칼을 거둘 때 이미 잇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 말이오. 나는 어제 저녁부터 혈변을 보고 있소. 피가 섞인 변이 아니라 피가 물처럼 쏟아지더이다. 죽음이 지척이오. 오늘 아침엔 배의 좌현으로 비상 탈출선을 내렸소. 항구에서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 배에 흑사병보다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다는 걸 알려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밧줄을 다 풀기도 전에 검은 촉수가 탈출선를 박살내어 물속으로 끌고가 버렸소. 그뿐인 줄 아시오. 탈출선에 옮겨 실으려던 내 짐들도 가져가 버렸소. 선원들의 병증을 기록한 의료일지까지 모조리 말이오. 이 배를 살아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 것 같소. 이계의 신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고 우리는 콰란타의 바다에서 모두 죽을 거요. 

나는 자루를 짐칸으로 도로 가져가서 납궤에 밀어넣었소. 바다에 버릴 수 없다면 그나마 안전한 곳에 두는 게 낫다 판단한 거요. 식당 칸에 물을 얻으러 갔더니 요리사 둘이 죽어 있더이다. 나는 포도주와 굳은 빵 두 덩이를 챙겨 내 선실로 돌아왔소.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소.

이계의 신은 그 유골이 베네치아로 전해지길 바라고 있소. 그 위험한 것을 인간들 틈에 보내려는 게 인간을 학살하기 위함인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소. 콰란타 이후의 일들은 이 양피지를 발견한 그대에게 맡기겠소. 부디 이치를 아는 자들에게 이계 신의 존재를 알려주시오. 돛이 망가진 스페스호가 어떻게 베네치아 해안에 당도할 수 있었는지, 납궤에 든 유골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도 널리 알려주시오. 그리고 감히 이계 신을 베네치아로 끌어들인 밀라노 주교의 정체도 추적해 주길 바라오.

면죄사에게 친서를 보낸 주교는 이 땅과 바다를 만든 신을 섬기는 자가 아니오. 그 자는 ‘테라 알리아’의 신을 받아들인 자요. 마녀를 찾아서 불태우는 도시들이 있다고 들었소. 그 주교가 바로 우리가 찾는 마녀요. 그 자는 이계 신의 수하로 어디선가 이 죽음의 춤판을 즐기고 있을게요. 그러니 이 양피지를 발견한 그대는 납궤가 어디로 이송되는지 살펴 주시오. 간절한 당부를 남기며 글을 매조지으려 하오. 이 땅과 바다의 신께서 그대와 함께하시길...

-1349년 6월, 성령강림대축일에 즈음하여, 이발사 니콜로


니콜로의 양피지가 발견된 것은 1357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 위치한 항구도시 바르플뢰르에서였다. 무역상의 아내 코드르가 바르플뢰르의 해안으로 떠밀려온 유리병을 발견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흑사병의 2차 대유행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코드르는 항해를 떠난 남편이 걱정되어 해변을 거닐던 중에 유리병을 발견했다.

코드르와 양피지가 든 유리병의 이야기는 스웨덴 학자 올라우스 마그누스가 1539년에 제작한 <카르타 마리나>의 1555년판 비공식 필사본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필경사는 어떤 연유에선가 <카르타 마리나> 원본에는 없던 부분을 첨가하였는데 바로 ‘테라 알리아에서 온 것들’이란 장이다.
그 중에서도 양피지를 발견한 코드르의 이야기와 양피지에 기록된 니콜로의 보고서는 ‘납궤에 담겨 온 이계 신의 유골’이라는 소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니콜로가 1349년 성령강림대축일 무렵에 남긴 글 전문이 수록되어 있고 1357년 바르플뢰르에서 코드르가 유리병을 발견했다는 언급이 있을 뿐, 니콜로가 남긴 글의 진위여부나 납궤의 행방, 밀라노 주교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피렌체 서적상으로 알려진 마르실리오 다 비스티치의 1561년 2월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낮에 밀라노 출신 희귀판본 수집가에게 듣기로, 몇 해 전 그의 고향 마을에 급성 전염병이 돌았다고 한다. 그 일로 40일 동안 마을이 통째로 폐쇄되었으며, 신앙심 깊은 어느 귀족의 정원 부지에 납으로 된 작은 창고가 지어졌다고 했다. 납으로 된 창고의 용도를 물었으나 수집가는 알 수 없는 웃음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주석>
(*1) 키케로 <수사학> 사본
(*2) Terra Alia: 다른 땅, 다른 지구, 다른 세계 등으로 해석되는 라틴어(*3) 스페스(Spea)는 라틴어로 ‘희망’이라는 뜻
(*4) 설탕을 뜻하는 중세적 표현
(*5) 중세의 상식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맨 앞쪽 뇌는 상상력을, 가운데 뇌는 이성을, 맨 뒤쪽 뇌는 기억을 관장한다. 
(*6)판도라
(*7) ‘40일’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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