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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마왕에게 꽃다발을

2005.02.26 12:0802.26

마왕에게 꽃다발을

 

 

 


 1. 레이디 밀피앙쥬

 

 “있지, 있지! 선생님.”


 티파렌이 그렇게 물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답하셨습니다.


 “네, 있겠죠.”


 김이 팍 빠져 버린 티파렌은,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선생님께 방글방글 웃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티파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걸어가기 시작한 선생님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습니다.


 “선생님! 아이 참, 선생님! 질문이 있어.”
 “네, 어디 한 번 들어 볼까요.”
 “선생님, 그…… 저, 선생님도 두근두근할 때가 있어?”


 티파렌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죽겠다는 양 몸을 비비 꼬았습니다. 아마 티파렌과 혼인하는 것을 지상 목표인 줄 알고 있는, 지한디 카이눈 기사단의 이엘파가 티파렌의 이 모습을 본다면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와 친절한 미소로 티파렌에게 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심장은 원래 두근두근 하고 뛴답니다. 멈추면 죽어요, 레이디 밀피앙쥬.”
 “…….”


 티파렌은 할 말을 잃고 선생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생님께서는 그 미소만큼이나 눈부신 흰색 로브를 펄럭이며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신 후였습니다.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야! 선생님!”


 레이디 밀피앙쥬, 밀피앙쥬 가문의 딸로 온 제국을 통틀어 현재 가장 고귀한 아가씨인 로즈티파렌 마류엔다 밀피앙쥬는 올해 열일곱 살 난 소녀입니다. 밀피앙쥬 가문은 제국에서는 그늘의 황제로 불릴 만큼 강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데다 황실에는 현재 황비 마마도 황녀 전하도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밀피앙쥬의 레이디는 가장 고귀한 여성이 된 것입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수련 시간입니다.”
 “응. 오늘은 지한디 카이눈으로 가는 거지?”
 “네. 첸더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티파렌은 괜히 짜증이 난 김에 오랜 소꿉친구인 첸더 경, 이엘파에게 화를 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좋아. 오늘은 이엘파하고 대련해야지.”


 밀피앙쥬의 딸은 강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티파렌은 어린 시절부터 실력 있는 선생님들로부터 검과 마법을 배워 왔습니다. 타고 난 재능에 우수한 교육이 덧붙여져 현재 티파렌은 제국 기사단인 지한디 카이눈에도 들어갈 수 있는 천재 검사입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닭살 돋는 이야기 관둬, 이엘파. 오늘은 나 너랑 대련만 하고 곧장 마법사의 탑으로 갈 거라 시간 없어.”
 “마법사의 탑? 거긴 왜?”
 “선생님이 부탁한 게 있어.”


 이엘파 첸더는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립니다.


 “선생님 선생님. 말끝마다 지겹지도 않아? 그런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거야? 애초에 사내가 돼서 말야, 몸이 약해서 검도 들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선생님은 마법사잖아. 검 같은 건 못 들어도 돼.”
 “그것보다 마법사의 탑이라면…… 티파렌, 설마 너 마법사 자격 땄어?”
 “아니.”


 제국에서 마법을 배우려면 반드시 마법사의 탑에 등록하여 정규 코스를 밟아야 하며, 구직을 위해서는 마법사 자격을 획득한 후 일련번호를 부여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밀피앙쥬의 따님이시자 이미 지한디 카이눈의 명예 기사 직위를 가지고 있는 티파렌은 마법사 자격시험을 포기한 지 오래인 것입니다.


 “아깝다. 당장이라도 제국 마법사가 될 수 있는데, 너라면.”
 “난 검이 더 좋아. 안 보이는 것 보다 보이는 게 편하니까.”


 티파렌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햇빛을 반사해 보였습니다. 이엘파는 어련하시겠어, 하고 반쯤 빈정거립니다.


 “……봐, 레이디 밀피앙쥬다.”
 “저 분이 레이디 밀피앙쥬?”
 “황태자 전하와 혼인한다는 소문, 정말일까?”
 “정말일 지도 몰라. 밀피앙쥬 가문을 거스르면 황위고 뭐고 없잖아. 일단 밀피앙쥬에는 ‘그것’이 있으니까…….”
 “쉿!”


 익숙한 수군거림을 무시한 채, 티파렌은 이엘파와 검을 맞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밀피앙쥬의 오랜 선조께서 제국을 세운 영웅과 함께 마왕을 물리칠 적에, 마왕은 ‘천하의 보물’인 자신의 ‘눈’을 두 사람에게 한 쪽씩 주었다고 합니다. 밀피앙쥬의 선조에게는 지혜와 어둠이 담긴 왼 눈을, 영웅에게는 용기와 빛이 담긴 오른 눈을. 그리하여 밀피앙쥬는 제국을 세우고 황위에 오른 영웅을 보좌하며 또 하나의 황제로 군림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황가는 이미 ‘오른 눈’을 도둑 맞았다!

 

 그 소문에 대해 황제께서는 크게 노하셨고, 새로 다가오는 봄날 황태자 폐하께 양위식을 올리는 동시에 그 오른 눈을 공개하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 눈의 진위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한 짝인 밀피앙쥬의 왼 눈을 공개하라는 명령 또한 있으셨지요. 두 개를 나란히 놓아 쌍을 이룬다면 황실에서 공개한 오른 눈이 진품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밀피앙쥬의 장이자 티파렌의 아버지인 키류헤든은 그 명에 순종해 왼 눈을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안팎으로 공고를 내 걸었습니다.

 

 “티파렌, 마법사의 탑에 같이 가 줄까?”


 대련 후에 이엘파가 물었습니다. 티파렌은 검을 검 집에 넣고 답했습니다.


 “아니. 넌 열심히 검 연습이나 해. 오늘도 나한테 졌잖아.”


 마법사의 탑에 무기를 품고 입장하는 건 금지 되어 있기에 티파렌은 검집을 매단 허리띠 채로 훌훌 풀어 맡기고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습니다. 풀어 놓은 검을 마차 안에 두고 마법사의 탑을 따라 올라 홀로 스물일곱 번째 서고로 들어섰습니다. 붉은 양장 서책들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수백 열은 족히 되게 늘어서 있습니다. 티파렌은 메모지에 적어 놓은 서명을 짚어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표지가 낡아 떨어질 것 같은 책에서 두어 페이지 필사를 하고, 금박으로 글씨가 쓰인 책 두 권을 왼 팔로 감싸 안았습니다. 두 시간 정도 책을 찾아 낸 후 티파렌은 시야를 반쯤 책으로 가린 채 뒤뚱뒤뚱 걸어 서고를 나섰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고함소리와 함께 검이 날아들었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는 품에 차곡차곡 쌓아 안고 있던 여섯 권의 책과 스무 장의 양피지를 순간적으로 앞을 향해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검을 피해 내고 달려 든 자의 발목을 재빨리 걷어찼습니다.


 “웬 놈들이냐!”


 바닥에 나동그라진 습격자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그것을 앞으로 휘둘러 내 밀었습니다. 빈틈없이 자세를 잡고 앞을 쏘아 보자 뒤따라 달려들던 두 명의 습격자가 멈추어 섭니다.


 “……칫.”
 “거기 서라, 정체를 밝혀!”


 티파렌의 검이 도망치는 자의 어깨를 할퀴었습니다. 그는 신음성을 흘리며 어깨를 쥐고 피를 흘리는 채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밀피앙쥬!”


 비로소 아래층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마법사와 호위관들이 달려 왔습니다. 티파렌은 검 날에 묻은 핏자국을 말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붉은 표지 책갈피 위로 덜 마른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습니다.


 “소란 피우지 말아요. 보고는 우선 아버님께 올리는 걸로 족합니다. 쓸데없는 말이 새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요.”
 “네, 레이디 밀피앙쥬. 이대로 댁으로 가시겠습니까?”


 티파렌은 습격자에게서 빼앗은 검을 손에 든 채 책을 다시 주워 품에 안고 마법사의 탑을 내려왔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께서 댁으로 돌아가신다. 호위를!”
 “레이디 밀피앙쥬, 귀가하십니다!”


 호위관들이 늘어서 큰 소리로 외치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티파렌은 넓고 쾌적한 마차 실내에 홀로 앉아 습득물인 검을 망토로 감쌌습니다. 값비싼 망토에 핏자국이 배는 것도 아랑곳없이 티파렌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혼자 투덜거렸습니다. 맞은편 좌석은 텅 빈 채, 고급스러운 방석 위를 다만 서책 몇 권이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다시 뵙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마차 꽁무니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고 호위관들이 ‘마법사 정원’의 대문을 닫았습니다. 정원 저 멀리 우뚝 솟은 마법사의 탑은 불길한 검은 구름에 싸여 오로지 고요할 뿐입니다. 티파렌은 망토 사이로 비어져 나온 검 자루에 시선을 붙박았습니다.


 “감히 제국의 문장을 쓴 검으로 습격해 오다니, 누구를 바보로 아는 건가?”

 

 

 

 

 2. 제국의 적

 

 “……제국의 문장이 붙은 검이라니, 이건 뻔히 보이는 눈가림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티파렌은 말했습니다. 티파렌의 아버지, 밀피앙쥬의 가장이자 음지의 황제라고 불리는 키류헤든은 티파렌이 내 놓은 검을 유심히 들여다본 후 무거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내 생각도 같다. 하지만 이건 틀림없는 제국의 문장이야. 어설프게 흉내를 낸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군요. 훔쳐 냈거나, 아니면 내부에서 빼 돌렸거나.”
 “양위식이 멀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키류헤든은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제국 안팎으로 상황이 좋지 못한데다 양위식에 얽힌 정치적 갈등까지 더해져, 현재 밀피앙쥬 가문 역시 산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드나드는 사람을 아무리 제한해도 수가 늘어가기만 했고 황궁에서는 안부를 가장해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황태자, 키젤은 지나치게 몸이 약한 형, 시린젤을 대신해 태자가 된 사람입니다. 명석하고 좋은 인재라는 말을 듣고 있긴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거라던 형이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아, 안팎으로 그 정통성을 의심 받고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아무래도 이 시끄러운 상황을 재빨리 정리하기 위해 불만의 소리가 커지기 전에 황위를 키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판국에 마왕의 눈이 없어졌다는 소문까지 돌고, 이제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성인 레이디 밀피앙쥬가 ‘마법사의 탑’에서 습격을 당하다니.
 “짚이는 데는 많지만 명확한 것이 없구나. 어쨌거나 이 일이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아. 좋은 날을 앞두고 언짢은 일을 꾸민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요. 폐하께서는 아버지가 혼사 문제를 거부한 것 때문에 아직도 노해 계시지요?”
 “그래. 나로서는 탐탁지 않으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그러나 폐하께서는 아직도 믿지 못하고 계시다.”
 하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은 하나면 족합니다. 태양은 하나, 둘이 되면 대지가 새카맣게 타 버리는 거라고 신화에도 나오는 거니까요. 그러므로 황제가 대대로 밀피앙쥬를 못마땅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데 황제도 아닌 사람이 음지의 황제라는 소리를 공공연히 듣고 있다면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황제는 밀피앙쥬를 어떻게 견제할까 고민하시다 지금은 몸이 약해 자리에서 밀려난 원래 황태자, 시린젤 황자가 열 살이 되었던 때에 티파렌이 태어나자마자 곧장 혼인을 제의했던 거지요. 하지만 키류헤든 밀피앙쥬는 외척이 지나치게 강성하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황권을 어지럽힌다는 생각에 혼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충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지요. 그런데 황제는 밀피앙쥬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해 버린 것 같습니다. 운 없게도 거절 후 얼마 되지 않아 시린젤 황자께서 사고를 당했고 심한 병을 앓은 후 사경을 헤매는 바람에 동생인 키젤 황자에게 태자 자리를 내 놓아야 했으니까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폐하께서는 우리를 경계하실 게야. 괜히 이런 걸 내보여 봤자 의심만 깊어 질 뿐이니.”
 키류헤든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티파렌은 검을 다시 망토로 감싸 손에 들었습니다. 요즘 들어 키류헤든은 자꾸만 음울해지고 황제의 경계 때문에 잔뜩 의기소침한 것 같았기 때문에 티파렌도 아버지와의 대화가 거북하기만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한테 보여 줄게요. 그래도 되지요?”
 “그래. 선생이라면 믿을 수 있지, 선생이라면……. 그 사람은 우리 밀피앙쥬에 권력욕이 없다는 걸 믿어 주니까.”
 그제야 키류헤든은 미미하게 웃었습니다. 티파렌은 망토에 휘감은 검을 품에 안고 아버지의 방을 벗어났습니다. 음침한 조명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는 걸까, 아버지는.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면서 가능한 한 햇살이 많이 비치는 장소로 나아갔습니다.
 “숨 막혀.”
 티파렌은 자그맣게 중얼거렸습니다.
 “나, 좋아서 레이디 밀피앙쥬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 그치? 선생님.”
 곧장 선생님을 찾아 온 티파렌은 망토에 싸인 검을 선생님 품에 덥석 안겨준 후 제멋대로 조잘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검을 보여 준다는 건 핑계고 선생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은 것뿐인 모양입니다.
 “하아…… 얼른 양위식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키젤 황자님은 황제폐하가 되고 마왕의 눈도 공개되고 그래서 모두들 조용히 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렇군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지, 선생님! 선생님! 내 말 들어 봐!”
 티파렌은 선생님의 흰 로브 소매를 잡아당기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선생님은 제국의 문장이 붙은 검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비로소 티파렌과 눈을 맞춰 주었습니다. 꼭 빛이 바래 버린 옷감처럼 흐릿한 빛깔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고요해 보였습니다. 티파렌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흡족한 듯 미소를 짓고 연달아 떠들어 댔습니다.
 “선생님도 얼른 키젤 황자님이 황제폐하가 되면 좋겠지? 그럼 모두에게 선생님을 소개해 줄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밀피앙쥬가 아무 활동도 할 수가 없어.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밀피앙쥬가 음지의 황제로 불리는 건 비단 권력과 전통의 탓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왕에게서 눈을 나눠 받은 건국 황제께서 밀피앙쥬의 선조에게 형제의 예를 갖추고, 후계자가 없을 경우 밀피앙쥬의 아이로 하여금 황권을 잇게 하겠다고 맹세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재 시린젤 전 황태자께서는 여전히 병으로 두문불출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계시고 키젤 현 황태자께서 양위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만약 소문대로 마왕의 눈이 황궁에서 사라졌다면 자동적으로 계승권은 밀피앙쥬로 넘어오게 됩니다. 티파렌은 얼굴을 본 지도 퍽 오래된 자신의 오빠를 떠올리고 입술을 비죽였습니다.
 “오빠를 노리는 녀석들이 부쩍 는 건 오래 되었지만 나까지 노릴 줄은 몰랐거든. 아, 정말이지 무식하게 달려드는 데는 놀랐다니까.”
 “흐음.”
 “치이. 선생님, 조금은 걱정해 줘 봐. 나는 하나 밖에 없는 선생님 학생이잖아? 밥줄이라구. 내가 죽기라도 했으면 당장 어디 가서 먹고 살려고 그래?”
 부투퉁한 표정을 지으며 티파렌은 선생님의 로브 자락을 홱 잡아 당겼습니다.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티파렌의 손을 떨어뜨리고 망토에 싸인 검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황실에서 보낸 자객일 리가 없을 터, 그렇다면 이 검은 레이디 밀피앙쥬께 일부러 빼앗긴 것일 테지요. 빼앗기러 오는 자가 쉽사리 레이디를 다치게 할 리 없지요. 발생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사건, 그것도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을 걱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치, 선생님 너무해. 선생님은 나 걱정도 안 되는 거죠?”
 “그럴 리가요, 레이디 밀피앙쥬. 저는 다만 레이디의 검술 실력을 믿고 있는 거랍니다.”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기 힘들어, 티파렌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와, 당신 설명 굉장히 알아듣기 쉽잖아! 대단해! 당신, 어딘가 소속이 있어?]


 티파렌이 선생님을 만난 것은, 벌써 오 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모처럼 광장에 나가 제법 홀가분한 기분으로 구경을 다니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난 선생님은 티파렌에게 여러 가지 공부를 가르쳐 주었고 티파렌은 선생님이 한 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소속 되어 있지 않답니다.]
 [왜?]


 그 말에 안경 안의 눈을 찡그리며, 선생님은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구직에 실패했거든요.]
 [당신은 좋은 선생 같은데 어째서?]
 [연구만 하는 학자 자리는 아름다운 아가씨보다도 드물기 때문에 경쟁률이 아주 높답니다. 아니면, 저는 좋은 선생이지만 좋은 학자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거 안 됐네.]


 어린 티파렌이 선생님을 향해 그렇게 말했을 때 틀림없이 선생님은 티파렌과 똑바로 눈을 마주친 채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귀여운 아가씨, 그럼 아가씨께서 저를 주워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티파렌은 선생님을 ‘줍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랬으면서 너무 매정해, 선생님. 그렇게 ‘어서 나가, 방해가 된다고’ 하는 눈으로 쳐다볼 건 없잖아요.”
 “모처럼 공부를 하라고 돈을 받고 있으니까 공부를 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레이디 밀피앙쥬? 다만 레이디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선생님은 몸을 일으켜 티파렌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티파렌이 투덜대면서도 선생님이 열어 주신 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선생님은 탁자 위에 아직도 놓여 있는 벨벳 망토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건넸습니다.
 “괜찮으시면 저 검을 제게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레이디 밀피앙쥬를 습격한 ‘제국의 적’이 누구인가에 관해 관심이 있거든요.”
 “응. 그렇게 해, 선생님.”
 티파렌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선생님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섰습니다. 선생님은 친절한 동작으로 레이디의 숄을 티파렌의 어깨에 걸어 주셨고 티파렌은 손을 저어 보인 뒤 층계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선형 층계를 반나마 내려왔을 때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까 오늘 밤에 키젤 황자님 오신다는 거, 이야기 할걸.”
 그걸 핑계 삼아 한 시간은 더 같이 떠들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티파렌은 아쉬운 마음에 앞머리를 쓸어 넘겼습니다.

 

 

 

 

  3. 붉은 숄의 레이디

 

 “제국의 적이라.”
 키젤 황태자는 진주 빛이 도는 음료 잔을 쥔 채 티파렌이 한 말을 반복했습니다. 티파렌은 공손한 태도로 황태자의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적, 오라버님을 노리는 암살 시도가 이번 달에 들어서 만도 최소한 일곱 번. 이것은 황실과 저희 밀피앙쥬 가문의 각별한 결속을 깨뜨려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적’의 소행임에 틀림없습니다.”
 “……결속을 노리는 자라. 레이디 밀피앙쥬께서는 그게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는가요? 어떤 불순한 무리들은 입을 모아 말하길, ‘황실은 마왕의 눈을 잃어버렸고 그리하여 밀피앙쥬에게서 마왕의 눈을 빼앗으려 한다’ 고 하더군요.”
 “그런.”
 티파렌은 심호흡을 한 후 주위를 흘긋 둘러보았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터였으나 멀찍이에서도 시선만은 호기심이 어린 채 티파렌과 키젤 황자를 바라보고들 있었습니다.
 “그런 무례한 자들을 그냥 두셨단 말입니까? 그 자들은 폐하를 모욕한 죄로 참수 하여야 마땅합니다.”
 과장된 티파렌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크지 않고, 그러나 충분히 먼 데에서도 잘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밀피앙쥬와 키젤 황자의 관계는 퍽 애매하였고 티파렌의 경우 그것은 키젤을 보는 것이 거북할 정도였습니다. 시린젤 황자가 사고를 당한 후 황실과 밀피앙쥬의 관계는 겉보기에는 다른 점 없으나 속으로는 썩어 간다고 할 만큼 곪아 버렸는데 얼마 전 황제는 키젤과 티파렌의 혼인을 제의해 왔던 겁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친 형과 불미스러운 말이 있었던 여성인 만큼 적합하지 않다.] 는 이야기가 안팎으로 터져 나왔는데도 황제는 밀어 붙이듯 결혼을 졸라 댔고 키류헤든은 이번에도 거절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아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문제를 여유롭게 무마하기 위해 키류헤든은 키젤 황자와 개인적으로 접촉했고 키젤에게 양위를 한다는 황제의 공식 발표가 있던 즈음에 키젤 스스로 나서서 레이디 밀피앙쥬와의 혼담을 부인했습니다. 이걸로 일은 잘 마무리 지어 지는 듯 했으나 아직도 사람들은 황제의 입에서 다른 혼담이 나온 일 없고 키젤이 밀피앙쥬에 이따금 드나드는 것을 들어 ‘혹시나’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쁘군요.”
 키젤은 그렇게 말하고 소리를 낮추어,
 “……어때, 티파렌? 정말 나한테 시집 안 올래?”
 하고 속삭였습니다.
 “웃기지 마, 키젤.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티파렌이 키젤을 껄끄러워 는 것은 두 가문의 불편한 관계뿐이 아니었습니다. 두 살 어린 키젤을 티파렌은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나 키젤은 혼담이 나오기 전부터 티파렌에게 자주 농담 삼아 ‘결혼하자!’ 따위의 말을 지껄여 왔던 것입니다.
 “매정하게 굴지 마, 티파렌. 우리 둘이 결혼해 버리면 차후 시끄러울 일도 없다고. 밀피앙쥬 경도 두문불출할 필요가 없을 테고. 안 그래?”
 밀피앙쥬 경, 즉 티파렌의 아버지 키류헤든은 섬세하고 착한 인물로 황권을 노린다는 둥 하는 소문과 질시에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그리하여 티파렌이 철들던 무렵부터 아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한 후 자신은 서재에 틀어 박혔던 것입니다. 비 오는 여름처럼 우울한 아버지를, 티파렌은 안타까워했지요.
 “양위식에나 신경 써, 키젤.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황태자 놀이, 열심히 해.”
 “티파…… 레이디 밀피앙쥬!”
 키젤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릅니다. 사실 역대 역사상 밀피앙쥬와 황실의 혼담은 자주 있었던 이야기고 황실의 견제로 인해 밀피앙쥬의 자식이 배척되거나 살해되는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티파렌은 자주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그 마왕이라는 자는 왜 영웅뿐 아니라 밀피앙쥬의 선조에게도 자신의 눈을 주었던 것일까 하고. 자신이 선조라면 그깟 눈 따위 영웅에게 줘 버리고 멀리 떠나거나 혼자 여생을 보내는 걸로 만족했을 텐데.
 “……선생님?”
 티파렌은 선생님의 방문을 노크하려다가 문이 열리는 바람에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 바람에 레이디의 숄이 어깨에서 흘러 내려 발치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가장 고귀한 밀피앙쥬의 레이디가 두르는 숄답게 우아하고 값비싸고, 빛 또한 붉은 숄이었습니다. 티파렌은 드레스 끝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렸고 선생님은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굽혀 숄을 주워 드셨습니다. 선생님의 흰 손은 숄을 쥐는 순간 불에 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티파렌은 문득 숨을 삼켰습니다.
 “주의해야지요, 레이디 밀피앙쥬. 고귀한 레이디는 무엇이든 함부로 떨어뜨리는 법이 아니랍니다. 그것이…….”
 “아, 주의할게. 선생님.”
 티파렌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손을 내밀어 선생님의 손에 들린 숄 끝을 쥐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러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손을 움직여 숄을 잡아당기고 천천히 양 끝을 벌려 티파렌의 어깨에 걸쳐 주셨습니다. 티파렌은 자신의 손끝에서 차갑고도 부드러운 숄이 미끄러지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마에 선생님의 머리카락 끝이 닿더니 다음 순간 선생님의 소매가 시선을 가리고, 이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것이 숄이든 마음이든 혹여 나쁜 남자가 주워가 버리면 곤란하잖아요. 그렇죠?”
 “…….”
 미소만큼이나 희미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선생님은 티파렌의 곁을 스쳐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는 선생님을, 티파렌은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
 그리고 티파렌이 레이디의 자존심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릎이 꺾이고 맨 바닥에 구겨지듯 주저앉았을 때, 간신히 돌아다 본 계단에는 이미 아무의 모습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왼쪽 눈은 유리처럼 투명하구나. 무엇이든 비칠 것 같아. 그리고 선생님 머리카락은 무척…… 무척……. 맙소사, 나,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지?’
 레이디 밀피앙쥬, 티파렌은 자신이 모르는 새 살이라도 찐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허리를 지나치게 조였던 것이라고. 분명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이렇게나 숨을 쉬기 어려운 것은. 이렇게나 세상의 모든 열기가 심장을 지나쳐 얼굴로 치솟아 오르기나 한 듯 시야를 어지럽히는 것은.
 ‘응, 식사를 줄이자. 오늘부터 당근 주스 같은 걸 챙겨 마신다든지…… 그래, 검술 대련도 더 많이 하고. 응. 그렇게 해야겠어.’
 티파렌은 어쩐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한참이나 더 망설인 후에야 계단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다시 파티장으로 향해 건성으로 몇 사람과 인사를 한 후 바깥으로 나오는데 발코니 쪽에서 대화하고 있는 키젤과 선생님이 눈에 뜨였습니다. 선생님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고 키젤은 과연 황태자다운 웃음을 연기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키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파티장을 가로질러 문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티파렌은 선생님과 마주치고 싶지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몇 걸음 재촉해 오르다 문득 멈추어 서서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하고 뒤를 살짝 돌아다보았을 때 선생님은 아래쪽 계단을 따라 다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못 봤나 보다.’
 만나지 않기를 바랐던 주제에 티파렌은 어쩐지 심사가 뒤틀려, 괜히 성난 걸음으로 파티장 문을 열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자 레이디 밀피앙쥬답게 적당히 대꾸해 웃어 주고는 곧장 다른 기사들과 담소하고 있는 이엘파를 찾아 망토를 툭툭 건드렸습니다.
 “이엘파, 후원에서 대련하자.”
 “……지금?”
 이엘파가 인상을 쓰고 소리를 낮춰 물었습니다.
 “지금.”
 “좀 봐줘, 레이디. 지금 대련해서 이 이엘파가 레이디 밀피앙쥬하고 실력이 엇비슷하다는 소문 따윌 내고 싶어? 밀피앙쥬는 지금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
 “지금이라고 했어. 할 거야 말 거야? 대련해 주면 내일 고전 수업 대신 너랑 승마 시합 해 줄게.”
 내일 고전 수업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게 싫으니까.
 라고, 티파렌은 생각했습니다. 이엘파는 잠시 갈등하더니 ‘승마’라는 말에 눈을 빛내며 답했습니다.
 “좋아. 하지만 뒷일은 나도 몰라, 레이디. 옷 갈아입고 후원으로 와. 기사답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엘파는 다른 기사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곧장 예식용 겉옷을 벗어 한쪽 팔에 건 채 셔츠 소매를 끌렀습니다. 티파렌은 드레스 자락을 반쯤 걷어차며 씩씩한 걸음으로 파티장을 가로 질렀습니다.
 ‘이럴 땐 땀을 실컷 흘리는 게 제일이야. 별 거 아닌 고민같은 건 함께 흘러내려 버릴 테니까.’
 짜증을 삭히지 못해 검에도 힘이 들어간 티파렌은, 그 날 달이라도 잘라 낼 기세로 무섭게 파고들어 이엘파에게서 세 판을 내리 이기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엘파는 여섯 시합 중에서 두 시합을 이겼고, 마지막 시합은 두 사람의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좋아, 레이디. 내일 약속은 꼭 지키는 거다? 난 지한디 카이눈의 명예를 구겨 가면서까지 레이디의 부탁을 들어 준 거니까.”
 “물론.”
 티파렌은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검을 쥔 채 몸을 돌리고,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며 웃고 있는 키젤 황태자의 바로 곁을 스쳐 걸었습니다.
 “정말이네, 검으로는 이길 수 없겠어.”
 “……?”
 “아무 것도 아닙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레이디의 검술 실력에 감탄한 것뿐이니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말아 주시지요.”
 키젤이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와 검을 마주대면 저라 해도 이길 거라는 장담을 못 하겠는걸요?”
 “아까 선생님과…….”
 “네?”
 “……아닙니다, 황태자 마마. 이만 물러가지요.”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티파렌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키젤은 가만히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싸움에서는 검을 맞댈 필요도 없을 거야, 나의 레이디.”

 

 

 


 4. 두 손에 검, 마음에 연정

 

 “……파렌! 티파렌!”
 “응? 아, 응. 이엘파.”
 좋은 혈통의 말을 끌어내어 몸을 싣고 티파렌은 이엘파와 함께 들판을 달렸습니다. 봄은 가까워 사방에서 눈이 녹아 흙빛은 검고 얼음보다 오히려 차가운 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들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티파렌은 말없이 달렸습니다, 마치 온 힘을 다해 달리러 나온 사람처럼. 이엘파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가능한 한 유쾌한 이야기들을 꺼냈지만 티파렌은 적당히 장단을 맞출 뿐 흥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말을 매어 쉴 자리를 찾고, 아직 푸른 싹이 움트지 않은 땅 위에 이엘파가 망토를 깔아 주었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온 제국을 통틀어 가장 고귀한 여성은 이엘파에게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니. 별 일은 아냐.”
 이엘파는 티파렌의 피곤한 표정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뿐인 오빠가 잦은 습격에 시달리다 결국 황궁의 보호를 받기로 결정, 궁으로 들어간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걸 아는 이엘파는 티파렌이 오빠를 염려하는 모양이라고 적당히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티파렌은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잘 되었군요. 실은 저도 외출할 예정이었으니까요.]


 ‘오늘은 고문 수업 대신 첸더 경과 소풍을 갈 거야.’ 하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는 새벽부터 거울을 보며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선생님께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그렇구나. 선생님, 어디 가는데?]


 마음 한 켠이 괜히 휑해지는 걸 들킬세라 티파렌은 목소리를 높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한쪽 손에 쥐고 있는 흰 모자를 반듯하게 쓰며 문 밖으로 한 발 걸어 나왔습니다. 돌아 서서 문을 닫고 주머니에서 모자와 같은 빛의 장갑을 꺼내 끼었습니다. 모든 동작이 한없이 느리고 정갈해서 티파렌은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른 채 선생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도 누굴 좀 만나러 갑니다.]
 [뭐? 누굴 만나러……!]
 [아아, 위험한 사람은 아닙니다. 조금도.]


 선생님은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힘주어 말하고 티파렌은 입 밖으로 뱉을 말이 궁색해 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누굴 만나러 간 다는 것일까, 티파렌은 고민했습니다. 선생님은 별다른 교우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요.


 [그…… 렇구나. 흥, 잘…… 잘 다녀 와.]


 누구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티파렌이 열심히 생각하는 사이 선생님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아, 조금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요.]
 [……!]
 [약간의 단서가 있어서 찾아가 보는 것에 불과해요, 레이디 밀피앙쥬. 레이디께서 염려하실 만한 모험에는 저도 관심이 없으니까요.]
 [내가 같이…….]


 위험하니까 같이 가 줄게, 하고 말하려다가 티파렌은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는 것일까 하고 자신이 고민 또 고민 했다는 것 때문에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앙 다문 입술 끝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아니, 주의해. 그리고 밀피앙쥬의 이름에 자칫 누를 끼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선생님.]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선생님은 얄밉게도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햇볕이 유난히 좋은 오월의 어느 날만큼이나 환한 미소였습니다. 티파렌은 괜히 쌀쌀 맞은 동작으로 돌아 서서 쿵쾅쿵쾅 계단을 달려 내려왔습니다.

 

 “티파렌!”
 “까, 깜짝이야. 이엘파, 귀먹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소리 지를 거 없어.”
 이엘파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고귀한 레이디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곁에 없는 것 같다고, 그는 깨닫고 만 것입니다.
 ‘첸더 가의 명예도 이걸로 땅에 떨어졌군.’
 입맛이 써서, 이엘파는 다른 화제를 꺼냈습니다.
 “티파렌. 황실에서 밀피앙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 들었지?”
 “물론.”
 “밀피앙쥬는 그럴 리 없다는 의견인가, 역시?”
 “당연하지.”
 두고 볼 것도 없이 티파렌은 답했습니다. 만약 황실에서 밀피앙쥬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황실에 발이 묶여 있는 티파렌의 오빠가 위험한 상황이므로 이것은 무척이나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키류헤든은 황실을 의심하고 싶지 안하고 말해 왔고 티파렌은 우울한 표정의 아버지에게 더 이상 ‘가설’에 불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황실과 밀피앙쥬는 마왕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왜. 마왕의 눈은 한 쌍이라서 양 쪽이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뭐 그런.”
 “흐음.”
 양팔 저울에 달아 올린 것처럼 황실과 밀피앙쥬가 존재하지 않으면 제국은 무너진다, 고 마왕이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워낙 민간에 널리 퍼져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티파렌은 굳이 이엘파의 들뜬 목소리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망설였지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잘 들어 주세요.]
 [선생님? ‘위험한 일’ 때문에 나가신다더니 벌써 끝이 났나요?]


 나가려고 몸단장을 하고 있던 티파렌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선생님이셨습니다. 티파렌은 어쩐지 얼굴에 웃음이 피어서 선생님께 웃는 표정이 들킬까 하여 고개를 벽 쪽으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티파렌에게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레이디. 그 검에 관해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답니다. 아무래도 ‘제국의 적’은…….]
 [제국의 적은? 빨리 말…… 아니, 잠깐. 선생님, 당신 그런 위험한 조사 같은 거 하지 마. 검 한 자루 들 줄 모르면서 무슨 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
 [제국의 적은, ‘황실’이 분명합니다.]
 [선새…… 뭐?]


 티파렌은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 쪽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선생님은 슬픈 표정으로 티파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티파렌은 바로 두어 걸음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이 제 몸에 닿기라도 한 양 펄쩍 뒤로 한 발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꼴사나워 빽 소리를 쳤습니다.


 [레, 레이디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 선생님!]
 [주의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망설임 한 점 없이 돌아 서서 티파렌의 방을 나섰습니다. 티파렌은 닫으려는 문을 붙들어 잡아당기고 선생님의 로브 자락을 쥐었습니다. 진하게 탄 홍차 향이, 다음에는 캐모마일 향이 풍겨 정신이 아찔해 집니다. 티파렌은 그래도 선생님의 로브 자락을 놓지 않고, 기어이 눈을 마주한 채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물었습니다.


 [증거는 하나도 없잖아?]
 [네, 레이디 밀피앙쥬.]
 [그런데도 황실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
 [……네, 레이디 밀피앙쥬.]


 티파렌은 선생님의 로브 자락을 놓았습니다. 흰 모자와 색이 옅은 머리카락 아래 선생님의 눈이 슬퍼 보였다고, 티파렌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자신의 착각에 불과하다고도.

 

 “……이엘파.”
 문득 든 어떤 생각에 티파렌은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이엘파는 아직 쌀쌀한 바람 탓에 옷깃을 여며 매며 티파렌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
 “티파렌, 너 오늘 정말 이상해.”
 “……젠장!”
 레이디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으며 티파렌은 곧장 말 위에 올라탔습니다. 이엘파가 놀라 티파렌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티파렌은 이엘파에게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젠장, 젠장! 이엘파, 미안해! 급한 일이 생각났어!”
 불길한 기분이 티파렌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습니다.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르도록 말을 달렸는데 꽉 다문 이가 시릴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님, 설마 그 위험한 일이라는 거…… 아니겠지? 부탁이니까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 줘!’
 말에서 뛰어 내리다시피 바닥에 착지 하자, 무릎이 울려 왔습니다. 티파렌은 눈물까지 어린 채 고삐를 쥐느라 더러워진 손바닥을 앞섶에 문질러 닦고 곧장 선생님의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나선형 계단을 박차고 오르며 한 번도 난간을 쥐지 않았습니다. 숨이 턱에 닿은 채 노크도 없이 문을 양 쪽으로 열어젖히자 급작스레 쏟아진 빛 덕택에 잔 먼지들이 반짝이며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하게 정돈 된 방 안에는 이끼처럼 책들이 빼곡하게 꽂혔을 뿐 사람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티파렌은 문간에 선 채 숨을 고르고 주문을 외워 빛을 띄웠습니다. 빛은 온 방을 제법 고르게 밝혔으나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선생님, 제발.”
 부탁이니까 부디 무사하게 돌아와 줘요.
 티파렌은 속으로 염원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항상 앉아 책을 읽던 자리로 다가가 의자 팔걸이를 쓸어 보았습니다. 붉은 빛 도는 나무로 옻칠을 여러 번 해서 만든 책상이 있고 조금 검은 빛 도는 나무로 짠 책장이 나란나란 놓였습니다. 티파렌은 책상 위에 놓인 낯익은 망토와, 그 사이에서 비죽하게 자루를 드러낸 검을 발견했습니다. 마법사의 탑에서 티파렌을 습격했던 자들이 남겨 놓은, 바로 그 검이었습니다. 제국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선생님이 정말 황실에서 나온 것이리라고 거의 확신 했던 것인 만큼, 문장의 마무리가 조금 조악하다는 점을 빼면 검은 대단히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습니다. 티파렌은 검을 손에 쥐고 날을 높이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습니다.
 그때.
 “으, 크윽!”
 “선…… 선생님?”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티파렌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선생님은 문간에서 채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한쪽 무릎을 꿇고 반쯤 쓰러져 있었습니다. 티파렌은 선생님이 돌아왔다는 기쁨에 미소를 지으려다,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왜 이래! 피, 피가 나잖아! 선생님!”
 “위…… 험, 위험합니다. 레이디…… 밀피앙…… 황, 황실에서…….”
 “선생님, 말 하지 마! 누구야, 어느 자식이 감히!”
 티파렌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치유 마법 같은 건 거추장스럽다고 기초만 익혀 두었는데 하필이면 눈앞에서 이런 일이 터지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그깟 자존심쯤 꺾어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나설 것을.
 “동쪽 재스민…… ‘제국의 적’. 거기서 틀림없이 확인 했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말 하지 마, 선생님. 지금 의사를 부를 테니까.”
 “저는, 당신이 상처 입는 게 싫어요.”
 몸을 일으키던 티파렌은 귀까지 피가 몰리는 기분에 옷가슴을 쥐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선생님이 말한 ‘동쪽 재스민’이라면 티파렌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장소입니다. 아마도 성도 동쪽 외곽에 위치한 선술집을 이르는 말일 터, 그 곳에서 선생님은 무언가를 보았고 그들은 ‘황실’에 관련 되어 있으며 또한 그들이야말로.
 “……의사, 당장 부를 테니까 선생님은 여기에서 꼼짝 말고 쉬도록 해. 나, 당신이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는 이야기 들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레이디?”
 티파렌은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곧장 뛰어 나가 의사를 부르라고 말을 전하고 다시 말에 올라탔습니다. 성도를 구역으로 나눈 은어들 중에서 동쪽, 특히 재스민이라면 확실히 남의 눈에 쉽게 뜨이지 않으면서도 광장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 쪽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이 몇 개의 선술집. 낮에도 해가 제대로 들지 않는 그 곳으로 티파렌은 달렸습니다. 광장에서 말을 적당히 풀어 버리고 사람들이 발을 들이지 않는 그늘로 그늘로 파고들어, 해가 높이 뜬 지 오래인데도 눈이 제대로 녹지 않은 골목까지 당도했습니다. 더러운 물이 문 바깥으로 흐르고 벽에는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늘어섰는데 이윽고 티파렌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아냈습니다.
 “제국의 적!”
 힘 있게 외쳐 부르자 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지, 꼬마?”
 “잘도 우리 선생님께 상처를 입혔겠다? 각오해 둬라!”
 티파렌은 잿빛 후드를 둘러 쓴 사내를 향해 똑바로 달려가 검을 들이 댔습니다. 사내는 몸을 날래게 피해 폐가로 보이는 집 문 쪽에 등을 대더니 이성을 잃은 탓에 몸 균형이 흐트러진 티파렌의 배를 걷어 차 냈습니다. 티파렌은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날카롭게 뜨고 다시 사내를 향해 검을 쥐어 보였습니다.
 “하앗!”
 잿빛 후드 사내를 보호 하려는 듯 티파렌을 에워 싼 서넛의 사내를 서슴없이 베어 버리고, 티파렌은 다시 기합을 넣었습니다. 달려가 지면을 박차고 사내의 빈틈을 노렸을 때 사내는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해내며 자신의 검으로 티파렌의 검을 버티어 냈습니다.


 “네가 올 줄 알고 있었지.”
 “……!”


 검의 행방을 추적하는 이를 노린 것이라면 선생님이 다쳤을 때 뒤를 밟지 않은 것이 이상합니다. 뒤를 밟지 않았다 해도 그 다음, 티파렌이 오기를 기다려 ‘제국의 적’이라는 키워드에 응답한 것이 이상합니다. 티파렌은 비로소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웃음소리마저 흘리며, 사내가 잿빛 후드를 벗는 광경을 아연하여 지켜보았습니다.


 “키……!”
 “어서 와, 나의 레이디.”
 “황태자 전하!”


 키젤이 노린 것은 자신이라고, 티파렌은 확신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던 것일까요. 정말로 황실은 밀피앙쥬를 위협으로 단정하고 멸문할 생각이었던 걸까요. 티파렌은 검을 고쳐 쥐고 키젤을 노려보았습니다.


 “이제 알겠지? 순진하고 고귀한 레이디. 밀피앙쥬의 장남은 이 손에 달려 있어. 그리고 황궁에는 이미 오른 눈이 없지.”
 “그런!”
 “그래서 이렇게 너를 기다린 거야, 나의 레이디. 자, 어떻게 할래? 로즈티파렌. 왼 눈을 넘기고 네 혈육을 살릴 테냐 아니면 왼 눈을 넘기지 않은 채 오빠를 죽일 테냐?”


 ‘황실은 이제 우리를 믿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아.’ 하고 키류헤든은 말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방에 홀로 앉아 우울한 얼굴로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딸에게 말해 왔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하게 두지 않는다고. 사방에서 목청을 높여 밀피앙쥬를 규탄하며 황실은 노골적으로 질시와 경계의 눈을 보내오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고. 티파렌은 분노로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래가는 시야를 다잡으려고 노력하며, 그녀는 키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키젤은 답 없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티파렌은 키젤의 뒤를 따라 달렸습니다. 답을 얻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습니다.


 “키젤! 키젤, 대답해! 제발 대답해 줘! 어떻게…… 어떻게 키젤이 내게 이럴 수 있어?”


 앞장 서 달려가던 키젤은 망토를 풀어 버립니다. 역풍을 타고 날아든 망토는 티파렌의 시야를 뒤덮었습니다. 두텁고도 질 좋은 망토와 시야를 다투며 티파렌은 달리고, 찌푸렸던 눈살을 펴 저만치 앞서 가는 키젤을 보았습니다.


 “대답해! 어째서 내게 이렇…… 키젤!”


 한 줄기 핏방울이 다시, 망토가 날아왔던 길을 따르듯 역풍을 타고 흘러듭니다. 키젤을 거쳐 온 바람에 묻은 그 핏방울은 티파렌의 뺨을 적시고, 티파렌은 눈앞이 일시에 환해지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안녕, 나의 레이디.”


 키젤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 멀었습니다. 티파렌의 눈이 빛에 익숙해졌을 때 눈앞에는 태양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제국 광장, 수많은 사람들의 경악에 찬 눈이 티파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키젤 황자는 쓰러진 채 팔을 움켜쥐고 있고, 티파렌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검에 제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역모다! 레이디 밀피앙쥬, 감히 황태자 전하를! 역모다! 역모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습니다. 키젤 곁에서 같은 망토를 두른 채 티파렌을 위협하던 사내입니다.


 ‘아니야! 키젤은 스스로 제 팔에 상처를 냈다! 이 검은 제국의 것이 아냐, 이것은 내가 선생님의 방에서 들고 나온 것뿐이다!’


 티파렌은 입 속에서 빙빙 도는 말들을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날아들었던 키젤의 핏방울이 티파렌의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피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 생…… 님.”

 

 역모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이며 변호의 여지조차 없다, 고 재판관들은 말했습니다. 티파렌은 황궁으로 인도 되어 갇혔습니다. 벽에 어리는 그림자만으로 시간의 변화를 그럭저럭 짚어낼 뿐입니다. 그 그림자가 길고 짧아지는 걸 세어, 바깥에서 며칠이나 흘렀는지 적당히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꼭 열 번을 세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오빠와 아버지가 역모 혐의로 사형 되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낯선 목소리로 통고하듯 날아든 비보에 티파렌은 울 기운조차 없이 멍하니 방에 앉아 있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야속하게 느껴져서 피가 날 때까지 주먹으로 차가운 벽을 두들겼습니다. 모든 일이 지독하게 빠르고 지독하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러 목소리가 들렸을 때 티파렌은 그때까지 참고 있던 눈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뺨을 적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귀한 레이디답지 않은 목소리로 울음이 흐르고 티파렌은 끝없이 울었습니다. 창으로 깃드는 빛이 붉은 색을 띠다 이윽고 어둠으로 바뀌는 순간까지 티파렌은 열리지 않는 문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습니다.


 “레이디. 레이디의 죄를 제가 변호하여 씻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세요.”
 “하지만 오라버님은, 아버…… 아버님은! 선생님, 오라버니랑 아버님은 어디 있어? 응? 선생님!”
 “……레이디.”


 티파렌은 차라리 숨이 끊어지기를 기도하며 울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지면 이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조차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티파렌은 섧게 울고 죽음을 바라지 않는 자신을 경멸하기 위해 다시 울었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레이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선생님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듯 상냥하게 속삭여 주었습니다. 티파렌은 출소 수속을 위해 관리가 올 때까지 울었고 문이 열리자 선생님의 옷자락에 매달려 비로소 잠이 들었습니다.

 

 

 

 

 5. 향기

 

 사랑하는 그 이는
 내가 필요하다고
 나한테 말했어요

 그래서
 난 가야 할 길을
 조심조심 살피며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합니다.
 비를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듯이.

 - 베르톨드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레이디 밀피앙쥬. 양위식은 바로 내일입니다. 지금 결정하셔야 해요.”


 티파렌을 풀어 준 것은, 키젤이 마왕의 왼 눈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밀피앙쥬의 가장과 후계자, 티파렌의 아버지와 오빠는 마왕의 왼 눈을 건네주기를 거부한 채 죽음을 택했다고도 말했습니다. 티파렌은 입을 다문 채 감옥을 빠져 나왔습니다.


 “선생님, 나 결정했어.”
 “이대로 도망이라도 칠까요? 만약 당신이 그걸 바란다면…….”
 “집으로 가자. 선생님, 나 이제 두려울 게 없어. 그러니까 왼 눈은 넘기지 않을 거야.”


 티파렌의 말에 선생님께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어 주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고마워, 선생님. 나를 도와줘서.”
 “괜찮아요.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니까.”


 속삭이듯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문의 멸망보다도 더 눈물샘을 자극했기 때문에 티파렌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황궁을 벗어나 어느덧 봄다워진 바람을 맞으며 티파렌은 조용히, 가만히, 선생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나, 선생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감동적이지? 선생님.”


 선생님은 레이디의 숄을 티파렌에게 둘러 주었습니다. 붉고 보드라운 숄이 티파렌의 긴 머리카락과 함께 목을 스치고, 이내 바람에 너울거렸습니다.


 “네, 나의 레이디.”


 밀피앙쥬 가는 당장 허물기라도 할 것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동그마니 서 있었습니다. 밀피앙쥬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값나가는 물건은 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굳건히 닫힌 채 하늘을 찌를 듯 당당히 섰던 대문은 한쪽이 박살 나 정원에 드러누웠고 흰 돌을 깔아 만든 정원 길은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습니다. 티파렌은 깨진 창문이 들이쳐 반짝거리는 자신의 방바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좋은 책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던 선생님의 방 역시 잡동사니나 들어 있는 창고처럼 음침하게 방치 되어 있고 아버지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던 방에는 여러 마리의 벌레들이 벽을 기었습니다.
 황궁에서 왼 눈을 찾기 위해 뒤진 듯한 흔적도 몇 군데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티파렌은 울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이제 왼 눈이 어디에 있는가는 나만 알고 있어. 아버지께서 오빠가 황궁의 보호 아래 들어간 다음 내게만 알려 주셨으니까.”
 “그렇군요.”


 선생님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웃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레이디.”
 “응. 선생님만은 그렇게 말해 줄 거라고 믿었어.”


 티파렌도 선생님을 향해 웃었습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건 한 두 가지가 아니야, 선생님. 갇혀 있는 동안 그렇게나 정신없이 모든 일들이 진행 되어 버려서……. 선생님.”
 “네, 레이디.”
 “……그 검의 출처,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야 쉽지요, 레이디.”
 다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캐모마일 향이 풍겨왔습니다. 열어 젖혀 놓은 문 쪽으로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듯 사람 기척이 났습니다. 티파렌이 뒤를 돌아보는 것과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은 것은 거의 동시였습니다.


 “제가 한 일이니까요.”


 티파렌은 눈앞에 서 있는 키젤을 보면서도 차마 선생님 쪽을 향해 돌아설 생각도, 키젤을 향해 소리를 지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다만 말을 했을 뿐인데 티파렌은 크고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 졌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티파렌을 향해 입 끝을 끌어 올려 미소하고, 키젤은 티파렌과 한 방에 서 있는 다른 사내를 향해 말했습니다.


 “형님.”


 비로소 티파렌은 뒤를 홱 돌아다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웃음을 띤 채 키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디에도 놀란 기색이 없습니다. 거짓으로라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
 “성급한 게 당신의 결점이라고, 제가 십 년 전부터 말씀 드렸을 텐데요. 키젤.”


 선생님의 평온한 말에 키젤은 거침없이 외쳤습니다.


 “아아, 날 성급하다고 비난할 모양이시군, 형님? 좀 참아 줘. 지금까지는 모두 형님 계획대로 되었지만 이제는 좀 불안하지 않겠어? 그 ‘왼 눈’은 어디에 있지? 설마 형님이 가로채려는 건 아니겠지? 오른 눈을 잃어버린 것도 형님, 그래서 밀피앙쥬의 왼 눈을 빼앗아 만회 하겠다고 한 것도 형님이 아니었던가?”
 “……저런.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겁니까, 키젤? 당신의 형은 십 년 전 오른 눈이 사라진 그 날에 죽었어요.”

 

 아주 오래 전에 한 영웅이 친구와 더불어 마왕을 물리치고 온 세상을 구했습니다. 죄악과 비탄으로 뒤덮인 대륙을 위해 영웅은 순백의 검을 높이 들었고 그 친구는 은 화살로 영웅의 뒤를 받쳐 주었습니다. 그때 마왕은 한 뼘의 초록이 남은 성지에서 영웅과 마지막 일전을 벌였고 봉인 되며 자신의 눈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왼 눈으로는 지혜, 오른 눈으로는 용기를 보며 왼 눈에는 어둠, 오른 눈에는 빛을 담고 이 땅을 소유하라. 시간도 기록도 승자의 몫.]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두 가문 중 한 가문이라도 상대 가문의 소멸을 바라는 날이 오면 이 균형은 깨지는 것이다, 승리자여. 빛이 어둠으로 깃들거나 어둠이 빛으로 손을 뻗는 날 너희의 기쁨은 비극으로 변해 버릴 지니. 만약 그대 중의 한 사람이 자신 몫의 눈을 들어 올리고 나를 부른다면 나는 다시 깨어날 것이다. 나를 깨운 자를 삼키고 다른 쪽 눈을 얻기 위해 그를 향해 날아가, 결국은 양쪽 모두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워 버릴 테다.]

 

 “티파렌, 이런 이야기 알아? 밀피앙쥬 없이는 황위마저 불안하다고 여긴 불행한 황제 이야기. 그리하여 그 황제는 자신이 황태자와 밀피앙쥬를 혼약으로 맺으려 하였지.”


 그러나 밀피앙쥬는 혼담을 거절했고 황실이 거부당했다고 여긴 황제는 자신의 아들, 어린 황태자를 버렸습니다. 키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티파렌은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귀를 막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버려진 황태자는 그 날, 그 십 년 전의 어두운 밤에 스스로 마왕의 오른 눈을 훔쳐 내 마왕을 깨우고 말았지. 바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해서, 다만 밀피앙쥬에 복수하기 위해서.”
 “거짓말!”


 티파렌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 쳤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 말이야, 선생님이 마왕이라니! 선생님이 사실은 선생님이 아니라니, 그런 말 같은 거…… 안 믿어! 안 믿는 다고! 난 안 속을 거야!”


 소리치는 것만으로도 살아 갈 모든 힘을 소진한 양 티파렌은 휘청거렸습니다. 순식간에 키젤에게 달려가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선생님의 목에 검 끝을 겨눕니다. 누군가 보았다면 빛이 바람을 타고 일렁인 것이 불과하다고 말할 만큼 아름답고 처연하며, 또한 재빠른 솜씨였습니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응? 거짓말인 거지, 선생님!”
 “네. 거짓말입니다, 레이디 밀피앙쥬.”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답했습니다. 색이 유달리 연한 왼쪽 눈동자가 깊은 어두움을 담은 채 티파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티파렌은 선생님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절망적인 심정으로 들여다보며, 그러나 기어코 칼끝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티파렌! 허튼 생각 하지 마! 설마 저 ‘마왕’에게 왼 눈을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하면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고! 자, 어서 왼 눈을 내게 넘겨! 그렇게 하면 최소한 제국만은 멸망하지 않는다. 티파렌, 네 목숨을 보장해 주마! 티파…….”


 키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었습니다. 티파렌은 검을 겨누고 얼굴을 마주 댄 채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그러나 바라볼수록 마음 아픈, 캐모마일 향과 짙은 홍차 향이 풍기는 얼굴로 선생님은 웃었습니다. 웃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확신하는 듯이.


 “왼 눈을 얻기 위해 마왕에게 협조하는 척 했을 뿐이야! 넘겨줄까 보냐!”
 “……큭!”


 또 한 자루의 검을 뽑아 쥐고 키젤은 달려들었고 티파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검을 막아 냈습니다. 티파렌은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표정으로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검과 검이 서로를 퉁겨 내며 요란한 소리를 냈습니다.


 “그것 봐요, 키젤. 그 파티 날에 말했잖아요? ‘당신은 레이디를 검으로 이길 수 없다’고. 나는 친절한 성격이니까.”


 선생님은, 마왕은, 혹은 또 다른 존재는 봄바람처럼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달콤한 차에 관해 말하는 사람처럼 무심히. 다음 순간 다시 부딪혔던 두 사람의 검이 불꽃이 내며 서로를 빗겨 내고, 또 다시 맞부딪혔습니다. 키젤은 떨고 있었습니다. 티파렌도 떨고 있었습니다. 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팽팽한 긴장이었습니다.


 “큭!”

 티파렌이 검이 키젤의 검을 퉁겨 냈습니다. 검은 원호를 그리며 날아가 저쪽 벽에 닿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티파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검을 쥔 손바닥이 시큰거렸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손가락이 티파렌의,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뒤에서 모아 감싸 쥐더니 가만히 귓불을 스쳤습니다.

 “자, 레이디 밀피앙쥬. 당신은 ‘저를 위해서’ 왼 눈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실 겁니다, 그렇죠?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습니다. 키젤이 다시 검을 주워 들고 기합을 넣은 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티파렌은 그 검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왼 눈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어.”

 티파렌의 몸이 가만히 쓰러져 내렸습니다. 선생님은 티파렌을 받아 안지 않고 뒤로 한 발 몸을 피해, 바닥이 피로 물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선생님, 그런 눈 하지 마. 나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이윽고 총명하던 눈동자마저 생기를 잃어버리자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의 몸은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끝났군. 연극 한 번 대단한데, 형? 귀여운 아가씨는 형이 정말 마왕이라고 믿었을 거야.”
 “과찬을.”
 “그럼 왼 눈은 어디 있지?”


 키젤이 검 날을 닦아 내며 물었습니다, 지극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네 귀로 듣지 않았느냐?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고. 그런 건 처음부터 여기 없었으니까.”


 선생님, 키젤의 형 역시 동요 없는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두 가문이 서로 증오하여 마왕을 불렀던 건 마왕이 봉인된 지 겨우 이십 년 후의 일이었어. 부활한 마왕은 약속대로 양 가문을 멸문 시키고 멀리 떠났고 그 이후로는 양쪽 다 단순한 돌멩이를 넣어 보관해 오고 있지.”
 “아아. 인간이라는 건 정말 재미없구나.”
 “재미없지, 마왕도. 그때 완전히 멸문 시키지 않고 한 명씩 아이를 살려 주었으니까. 정말 우스운 일이야. 마왕이면서 인간 따윌 연민하다니. 결국은…….”


 결국은 다시 죽이고 또 죽일 뿐인데.


 시린젤은 그 말을 삼켰습니다. 키젤은 기지개를 길게 펴고 이미 숨이 남지 않은 레이디의 등을 밟고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그는 형의 맹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십 수 년 전에 스스로 폐태자를 자처하며 골방에 틀어박힌 날부터 오로지 밀피앙쥬의 멸문만을 바라 왔음을.


 “이제 형 소원대로 밀피앙쥬는 없어졌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인간을 동정할 마왕 따위는 여기 없으니까.”
 “시시해.”
 “시시하니까 돌아가자, 형.”


 키젤은 몸을 돌이키려다 표정 없는 형, 다만 밀피앙쥬를 없애기 위해서만 살아 온 남자가 가만히 몸을 기울여 레이디의 숄을 주워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 설마 그 계집애 정말 사랑하기라도 했어?”
 “그럴 리가.”


 딱 잘라 답한 후 시린젤은 그 숄을 힘주어 쥐었습니다. 다시 손가락을 풀자 숄은 피투성이가 된 레이디의 어깨 위로 흘러 내렸고 시린젤은 키젤을 따라 밀피앙쥬의, 곧 석양이 지듯 쇠락해 갈 저택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리가.”


 그는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 작고 귀여운 소녀가 흰 빛 내리는 광장에서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 왔을 때, 그때에는 어디선가 날개 소리마저 울렸는데. 언제나 목을 태워 놓던 달고 아득한 향기는 그 숄에서 풍기는 것이리라 믿어 왔었는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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