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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 엄마 꽃

2005.12.30 23:0312.30

   방충망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차곡차곡 고이다가 어느 한 순간 후두둑 굴러 떨어졌다. 그건 어떤 징조도 소리도 없이, 적절한 중압감과 비정기적인 충격에 의한 발현이어서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아도 ‘지금’이 오기 전엔 ‘그때’가 바로 ‘그때’란 걸 절대로 예고할 수가 없었다.
   무희는 창 밖으로 고요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자작자작한 빗소리 외엔 세상 모든 것이 침묵 가운데에 있었다. 무희는 가스렌지에 얹어 둔 솥 불을 줄였다. 압력 밥솥의 빨간 금침이 알맞게 내려왔을 무렵, 덥수룩한 털개가 그녀의 종아리에 매달려 살랑이는 밥 냄새를 따라 꼬리를 흔들었다. 무희는 축축한 고무 장갑을 벗었다. 물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벌써 구멍이 난지 오래라 쓸 때 마다 샜지만 사러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사 나간다 해도 수퍼가 열려 있고, 고무장갑을 팔고 있으리란 확신도 없었다. 밖에는 <소원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희는 개수대에 기대 낯선 부엌-사용 방법이 그냥 드나들던 것에서 살림을 한다로 바뀌었기 때문에-을 둘러보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언제부터 엄마가 안 계셨더라?
   돌아가신 것도, 가출한 것도 아닌데 집안에 엄마가 안 계시다니 너무나 이상한 일인데도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개일 듯 말 듯 언제나 엷은 빗방울을 뿌리는 몽롱한 회보라색 하늘처럼 머리 속이 흐릿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소원비가 내리는데 고무장갑을 사러 나갔다가 발이 묶였을 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는 동안 실종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에흠, 에흠!”
   안방에서 아빠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무희는 화들짝 생각을 멈췄다. 소원비가 내리는데 생각에 잠기는 건 좋지 않다.
   “진지 잡수세요!”
   두 사람과 한 마리는 낡은 나뭇결을 따라 희미하게 조명이 반사되는 마루에 마주 앉았다. ‘딸그락 딸각’ 밥숟가락이 오가는 동안 털개는 널찍한 배를 상 밑에 털썩 깔았다. 무희는 풍성한 털 틈으로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윙’ 소리가 나는 보일러보다 털개의 배 쪽이 훨씬 따뜻했다.
   “소리가 시끄러워요.”
   “기름이 없나 보다.”
   “그건 아닌데…. 어딘가 손봐야 할 거 같아요.”
   “요즘 같은 때에 누가 밖에 나다녀?”
   아빠의 말이 옳았다. 비가 올 때는 아무도 밖에 나가지 않는다. 무희 네는 차도랑 바로 붙어 무척 시끄러운 집인데도 비오는 날에 비 튀기는 차바퀴 소리를 들어본 지 오래였다. 무희는 빈 숟가락을 들고 멀거니 너른 창을 올려다보았다. 짙지도, 엷지도 않은 그러나 견고한 회색 하늘이 꾸물대고 있었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속 살아남은 사람들이 맞이하는 고요처럼 세상은 고요하고 고요하고 고요했다. 그들만 살아 있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해 주는 건 매일 혼자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뿐이었다.
   -지금 서울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소원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께서는 빗물이 고이거나 배수로가 역행하지 않도록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시고,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 주십시오. 집안에 계신 분들께서는 부디 국민적인 염원 합일을 이루어 기적이 일어나는 데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의 <염원과제>는 현재 야기되고 있는 북한의 핵무기 비활성에 관한 건으로……
   채널을 돌리자 다른 뉴스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최근 사하라 사막에도 소원비가 내렸다는 특보가 들어왔습니다. 소원비 구름의 생성과 소원 발현의 조건에 관해서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미국 엘레노아 주의 한 주립 대학에서 연구 발표된 사례로 뒤틀린 소원을 되돌리기 위한 조건을 발견해 낸 교수가……
   전파 방해가 있는지 아나운서는 채 말을 다 못 잇고 화면 속에서 우그러져 나갔다. 무희는 어차피 별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빠, 제가 엄마를…”
   찾으러 나가 보겠다고 하려던 말은 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가로 막혔다.
   “켈룩! 말이야 쉽지. 사람 맘이 어찌 다 같을 수 있어. 그 속 지도 모를텐데. 바라는 게 말처럼만 쉬우면 세상이 이꼬라지가 났겠어?”
   아빠는 텔레비전에게 대꾸하고 있었다. 무희는 입을 다물었다. 아빠랑 대화를 시도한 자체가 별로 신통한 생각은 아니었다. 아빠 탓이 아니다. 누구든 가능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꼭 해야 한다면 절대로 중요하지 않은 말을 하는 편이 가장 나았다, 비가 오는 동안엔.
   아빠가 수저를 놓자 무희는 상을 치우고 남은 밥을 털개 그릇에 놓았다. 상 밑에 쭈그려 있던 털개는 반갑게 달려가 밥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무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밥 먹는 개를 구경했다.
    탁… 탁탁탁……
   뺨을 기댄 문지방을 덮은 나무와 벽돌과 천장 지붕으로 토닥이는 빗소리가 울렸다. 모든 것이 지독히 불규칙해서 정교하게 규칙적이기까지 한 리듬에 무희는 어깨를 떨었다. 비가 올 때는 가능하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생각은 여과지의 커피처럼 소리도 없이 똑똑 떨어져 갈색 향기를 띄고 사방에 퍼져 나갔다.
   누가 생각이나 해봤을까, 비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걸.
   지구를 돌고 돌아 식물의 뿌리 끝, 동물의 배설물, 사람의 뇌수부터 혈관, 땀방울까지 순환한 물이 신비한 힘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물은 강력한 염원의 성질을 가진 비가 되어 세상에 떨어졌다. 순간 모든 전쟁과 기아와 질병, 행복과 불행마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소원비가 내리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원이 어떤 순간에 발현되는 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고, 그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였다. 종교계에서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들썩거리며 매일 밤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며 날뛰었다. 세상이 더 손댈 수 없이 미쳐 있어서 때문에 세상 스스로 정화 작용에 나섰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귀기울이는 사람은 적었다. 사람들은 지나치리만치 다양한 취향과 선택권을 갖고 있었고 대부분이 종말보다도 이 새로운 작용의 영향과 이용법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어떤 이는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고 어떤 이는 이루어지지 않기를 염원한다. 그런 건 대게 어느 쪽의 염원이 더 강한가에 의해 결과가 나타났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바라면 그 일은 이루어졌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열망하면 그것도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잠시 뿐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누가 누구에게 앙심을 품을지 몰랐고, 누가 누구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어떤 종교 지도자들도 사람들을 완벽하게 감화시키지 못했다. 유일하게 작은 단체들이 선의, 혹은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으나 곧 와해되고, 또 생성되기를 반복했다. 단어에 묶인 이성적 열망이 아닌, 순수한 ‘바램’에 의해 움직여지는 소원비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신 속에 어떤 괴물이 살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리고 현재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굶주림이었다. 타인이건 자기 건 누군가 굶주리길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현관에 놓여진 식료품 상자를 주워 왔다-지구의 반대편에는 다른 방식의 다른 사건으로 굶주림이 해결되고 있다고 했다-. 요즘 같은 때에 대체 누가 밖을 돌아다니며 식료품을 나눠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일설에는 정부 산하 기관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정부측에서 부정했다. 그들은 소원비의 영향으로 들쭉날쭉한 관리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것만으로 벅차다고 말했다. 무희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거라면 좋은 일이니 정부가 했다고 말해도 될텐데 왜 경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란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무희는 생각했다-, 아무튼 먹을 것은 크게 부족하지 않았고 대체로 신선하며 깨끗했다.
   질병은 한때 거의 사라지는 듯 했다가 다시 재발했다. 병으로 완전히 죽는 사람의 비율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아직도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여러 가지 질병과 그에 대응한 약품들이 끊임없이 상호 보완을 이루었다. 아마도 호기심과 돈과 명예와 힘없는 자의 고통과의 연결 고리는 너무나 견고해서 한 칼에 끊어 낼 만한 강력한 소원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난은 여전히 어디서 건 팽배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몹시 ‘가난’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굶주림과 질병이 연계된 절대적 가난을 맛 본 사람들은 무희 세대에는 실상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더 나은 사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 의한 결과였기 때문에, 소원비로 사람들간의 교류가 단절되자 비교할 것들도 사라졌다. 모든 것들의 기준이던 티비 드라마는 이전부터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던 터라, 이제는 아무도 그게 현실적이라거나 삶의 기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희는 모두가 적당히 제자리에 있는 듯하여 내심 만족하는 한편으로는 무척 우울했다. 막힌 하수구에 아무리 새 비가 내려도 한번 썩은 물은 절대로 다시 깨끗해지지 않는 것처럼, 무희의 꽉 막힌 감정은 하수구에 빗방울이 파문을 만들 때만 잠깐씩 일렁이다 이내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밑에 응어리진 퇴적물이 있는데 뿌연 빗물에 가려져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않았다. 무희가 그것에 관해 생각에 잠길라 치면 따가운 빗소리가 경고했다. 그럼 무희는 겁을 집어먹고 얼른 아무 쓰잘 대기 없는 생각-내일 점심때는 닭고기를 먹고 싶다는 수준의-을 했다. 소원비는 이런 때 무척 불편했다. 어떤 부분이 소원비에 결정적 발현을 유도하는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심각하게 변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무희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생각도 짧아졌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멍하니 흔들리는 티비를 보거나 기계적으로 집안 일을 하는 정도뿐이었다. 그런 게 가능하게 되리라고 무희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예전의 무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보통 여자 애였다. 그녀는 하루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수다를 떨고 친구를 만나고 적당히 공부하고 실컷 놀고 가끔씩 부모님께 대들고 오빠와 싸우고 집안 일은 아주 조금만-용돈을 받기 위해 잘 보이고 싶을 때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외출은 커녕 긴 밤수다도 사라지고 가능한 한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누군가가-아버지, 어머니, 오빠, 혹은 털개가- 그녀가 얌전해지기를 소원했는지도 모른다. 무희는 전화에 대고 그만 좀 떠들라고 면박 듣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마지막 쇼핑에서 산 옷들도 이젠 구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침묵 속에서, 텔레비전의 몽롱한 헛소리 속에서 흐느적댔다. 회색 하늘은 세상의 명료한 모든 것들을 경계가 흐릿한 구름처럼 뭉뚱그려 버렸다. 햇볕을 본지도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일상을 이루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무희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강력한 의지를 가진 누군가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빌었을 지도 모른다.
   ‘지나친 생각이야.’
   무희는 씁쓸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소원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쓸모 없는 쪽으로 상념들이 오락가락하게 두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엄마에 관한 거였다. 음식하던 뒷모습, 빨래하던 뒷모습, 무희의 대학 졸업식 장에서 오빠의 양복만 가다듬어 주던 뒷모습. 그리고 빨간 고무장갑을 쥐고 수퍼 앞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멍하니 서 있는 무희의 상상 속에 앞모습. 엄마는 집에 오는 길을 떠올리려 하지만 계속 비가 내리고 인적도 목적지도 없는 길은 꿈결처럼 멀고 길기만 할 것이다. 무희는 엄마의 표정을 짜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웠다. 엄마가 뭘 생각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건 더 어려웠다.
   무희는 가느다란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엄마가 안 계신 건 무희 탓인지도 모른다. 무희가 엄마 따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소리질렀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어쩌면 그 비가 첫 소원비 일지도 모른다고 무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무희는 엄마가 싫었지만 정말로 미워서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어릴 때부터 고기 반찬을 하면 오빠 먼저 주고 무희에겐 젓가락도 못 가져가게 하는 엄마, 무희의 겨울 옷 값은 안 주면서 아들 용돈은 챙겨 주는 엄마, 무희가 4년제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붙었어도 오히려 간신히 전문대 밖에 못간 오빠를 더 가여워 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싫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사업을 한다며 적금 통장을 가져가 술로 마셔 버렸을 때도 오빠만 두둔했다. 무희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칭찬해 주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무희가 너무 드세서 오빠를 기 못 펴게 잡는다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무희가 기억하는 엄마는 부엌에 홀로 선 뒷모습과 오빠에게 활짝 웃어 주는 얼굴 두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오빠는……. 무희는 오빠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가 크고 허풍이 센 오빠는 무희를 못살게 굴며 끊임없이 가족을 휘둘러 댔었다.
   “끼잉….”
   무희가 한참 동안 기척이 없자 털개가 그녀를 찾으러 왔다. 무희는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하늘 속에도 밤은 분명히 찾아왔다. 다만 비 때문에 흐린 낮처럼 밤도 붉게 퇴색되어 있었다. 무희는 마루 한구석에 개를 끌어 앉고 누웠다. ‘윙’하는 보일러 소리가 고즈넉함을 깼다. 늙은 개는 세상이 더 고요하도록 낮은 위치의 보일러 스위치를 껐다. 세상은 빗소리에 잠기고 무희도 눈을 감았다.

   ‘다녀올게요, 엄마.’
   컬컬하고 무거운, 산짐승이 우글대는 밤처럼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무희의 가슴을 때렸다. 오빠가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나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온다는 지 그런 건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빠의 뒷모습을 오래,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엄마의 뒷모습이 무희의 눈을 찔렀다.
   ‘엄마…’
   무희가 불러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는다.
   ‘엄마, 나도 여깄는데…….’
   다시 부르자 엄마의 모습은 미끄러지듯 현관문을 빠져나가 사라져 버렸다. 무희는 땀에 젖어 눈을 떴다. 토닥토닥한 빗소리가 엄마 뒤에 남겨진 발자국 소리처럼 창 밖에 울렸다. 무희는 엄습하는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갑자기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무희는 이대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뭐든 좋으니 뭔가 해야했다. 그녀는 집안을 발칵 뒤집어 엄마가 사라지기 직전에 남은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단지 며칠 안 계셨을 뿐인데 엄마 물건이라고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또 대부분이 가족 공동의 물건이라 딱히 ‘엄마 것’이라고 가름하기 어려웠다. 무희는 엄마가 꽤 오래 직장에 다녔었다는 걸 기억 해냈다. 옷차림도 화려한 걸 즐겨서 외출복이 무척 많았다. 무희는 그런 사소한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것에 당황하는 한편으로 일단 안심이 들었다. 집안 살림살이에서 엄마 것을 가려내는 건 어렵지만 옷이라면 확실히 엄마 물건이니까 뭔가 다른 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무희는 살금살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밤의 어둠 속에서 더 검게 웅크린 장롱을 열었다.
   “아!”
   무희는 하마터면 비명 때문에 아빠를 깨울 뻔했다. 무희는 입과 장롱을 후다닥 닫고 얼른 뒤돌아 나왔다. 장안엔 아빠의 정장 몇 벌만 목매단 시체처럼 흐느적거릴 뿐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급히 치워 버린 듯 빈 옷걸이들만 들쭉날쭉한 장롱 속은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짐승 옆구리처럼 심란하고 흉악했다. 갑자기 엄마란 존재가 꿈처럼, 불쑥 땅 속으로 꺼져 버린 것처럼 느껴져서 무희는 어지러워졌다. 엄마 얼굴까지도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무희는 거실에 걸린 가족 사진을 흘끗 보았다. 거기엔 사진이 걸려 있던 흔적만 볕 바랜 자국으로 남아 있을 뿐 사진은 온데간데 없었다. 무희는 언젠가 아빠가 거울같이 넙적한 것을 밖으로 내가던 것이 떠올랐다. 생각 해보니 그게 가족 사진이었을 거다.
   왜 아빠가 사진을 치웠지?
   무희는 의아해 하며 장식장 속에 들어 있던 오랫동안 펼쳐 보지 않은 사진첩을 몽땅 끌어냈다. 그러나 앨범에서도 엄마 사진이 있던 자리엔 빈틀 뿐이었다. 무희는 당황했다. 마치 원래 있지도 않던 것을 억지로 찾아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어깨를 스믈대는 한기를 느끼면서 무희는 고개 저었다. 하지만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씻은 듯이 사라질 수 있을까? 무희는 갑자기 엄마는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오빠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랑 털개랑 셋이서 쓸쓸한 날들에 무희 멋대로 상상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밤이 밝은 날, 엄마가 거실에서 혼자 춤추고 있었다. 심장을 울리는 느린 음악에 맞추어 미지근한 물 속을 헤엄치는 금붕어처럼 흐느적거리며.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무희는 지금도 또렷하게 눈 앞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럼 대체 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생각에 빠져들기가 무섭게 무거운 빗소리가 머리를 짓눌렀다. 무희는 갑자기 냉장고로 달려갔다.
   “하…!”
   머리 꼭대기가 얼얼할 만큼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엄마는 분명히 존재했다.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빈자리가 흉흉하게 들춰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끼잉….”
   한 밤의 소란에 잠이 덜 깬 털개가 꼬리를 살랑이며 무희의 발치를 쫓았다. 무희는 어스름한 밖을 내다보았다. 거센 폭우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으르렁대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신화 속의 폭우가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의 모습도 이랬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무희는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의식적으로 강하게 소원을 빌었다.
   “엄마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오빠만 좋아해도 좋으니 부디 돌아오게 해주세요.”
   무희는 비가 오는 밤새 빌고 또 빌다가 새벽녘에야 설핏 잠들었다. 꿈에는 무희의 바램처럼 엄마가 나왔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이상한, 빛나는 노란 꽃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집안에선 무희가 엄마 따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홧김에 꽃으로 변해 버렸다.
   ‘흐…….’
   무희는 슬펐다. 잘못된 건 그녀가 아닌데 모든 게 무희의 탓인양 엄마는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무희는 억울하고 슬퍼서 통곡하다가 제 소리에 놀라 깼다. 아침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오랜만에 창에 걸린 회색이 조금 엷어진 느낌이 났다. 무희는 귓바퀴를 맴도는 이명과 기묘한 공허감으로 나가보지 않고도 비가 그쳤다는 걸 알았다. 창 밖에선 바람에 잎 부딪는 ‘쏴아-’ 소리가 들렸다. 그건 소나기 소리와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리듬이 달랐다. 무생물과 생물은 그들 안에 각자 다른 소리를 갖고 있어서 비슷하게 들리더라도 다 달랐다. 고요한 빗소리 덕분에 예민해진 무희의 청각은 그걸 구분할 수 있었다.
   무희는 마당으로 나갔다. 비가 멎은 하늘은 바람의 세상이었다. 무희는 얼룩진 구름 사이로 춤추고 있는 키 큰 꽃을 발견했다. 오랜 비 때문에 화단의 흙은 다 쓸려 가 버리고 하수구 근처에 한줌이 간신히 남았는데 그 위에 꽃이 피어 있었다. 무희는 소름이 돋았다. 꿈속에서처럼 꽃은 선명한 노랑색이었다. 키는 무희만큼 컸으며 줄기는 허벅지만큼 굵고 팔처럼 갈라진 두 개의 큰 가지에는 무수한 이파리가 달려 있었다. 그 이파리들은 풀줄기처럼 얇고 길어서 바람에 흩날리는 폼이 사뭇 팔꿈치에 술을 장식한 옷소매처럼도 보였다. 무희는 꽃 가까이로 다가갔다. 얼굴이 딱 사람만 하고 노란 꽃잎에 점점이 박힌 무늬는 눈썹, 눈, 콧구멍, 윗입술, 아랫입술, 그리고 턱에 선명한 점 하나로 끝나 있었다. 무희는 몸을 떨었다. 엄마 턱에 그런 점이 있었다!
   “엄마?”
   무희는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았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엄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무희는 울면서 정신없이 꽃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꽃은 무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희를 보지도 않았다. 꿈이랑 똑같았다. 꽃은 아들이 돌아올 대문만 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 흑…….”
   무희는 오열했다. 숨 넘어가게 들먹여지는 그녀의 어깨 위로 잠깐 개였던 하늘에 다시 가느란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꽃은 잎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시원해서 약간 몸을 틀었다. 아직 완벽하게 식물화 되지 않은-혹은 인간화 되고 있는-, 모양뿐인 몸은 불편하긴 하지만 의지에 따라 주었다. 꽃은 자기 원래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지금이 약간 불편하고, 등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기분 좋고 세상이 우울과 고요와 불안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것은 곧 꽃 안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꽃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소원 비가 내리던 날 미친 듯이 웃으며 ‘이번엔 꼭 성공한다!’고 뛰어나간 아들은 여직 소식이 없었다. 꽃은 며칠이나 흘렀는지 헤아릴 머리도 없었다. 꽃에겐 스스로를 자각할 어떠한 외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그립고 가엽고 걱정스럽기만 한 아들 얼굴이 꽃잎으로 변한 꽃의 얼굴, 꽃의 주름, 꽃의 전신에 새겨져 있었다. 꽃은 비가 그치기만을 바랬다. 비가 그쳐서 햇살같은 아들의 얼굴이 내밀어 지기만을 바라고 바라고 바랬다.
   “흐… 흑흑…….”
   무희는 엄마 꽃이 뭘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서러웠다. 그때 작은 빗방울 하나가 눈물에 섞여 그녀의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무희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빗물을 삼켜도 된다고 했던가? 아마도 절대 아닐 것이다. 비를 삼킨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고 뉴스에서 나온 적은 없지만, 암묵적으로 모두가 먹기는커녕 빗물에 닿기도 꺼려했다. 무희는 덜컥 이는 두려움과 함께 중요한 걸 깨달았다. 소원비 때문이었다, 엄마가 변한 건.
   엄마는 집 나간 오빠가 보고파서 비를 맞고 기다리다 그리운 노란 꽃으로 변했다. 무희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노력해도 엄마는 떠나 버린 오빠를 원했다. 그러다가 꽃이 되 버렸다. 무희는 슬프면서도 고소했고, 걱정스러우면서도 만족했다. 엄마는 오빠를 원했지만, 꽃을 다시 엄마로 되돌릴 수 있는 건 지금 옆에 있는 무희뿐이었다.
   무희는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작은 뿌리 채 엄마를 캐다가 깊은 장독에 넣었다. 그리고 우묵진 구석 여기저기에 고여 있는 소원 빗물을 끌어 모아 독에 부었다. 엄마는 돌아오실 것이다, 무희 곁으로. 무희가 엄마를 되돌려 놓을 것이다, 비에 소원을 빌어서.
   뉴스에서 잠깐 스쳐 간 적이 있었다. 아직 확인 작업 중이지만 소원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며 그러려면 다량의 빗물이 필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소원이 이루어질 때와 같은 조건하에 두어야 한다고 어느 과학자가 말했다. 그가 그걸 어떻게 왜 발견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그걸 알고 싶은 게 그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소원을 되돌리기는 소원을 이루기보다 더 힘들었다. 완벽히 똑같은 조건이라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무희는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했는지 기억을 헤집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무희는 해야만 했다.
   무희는 거세지는 빗줄기를 피해 서둘러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고 장독은 처마 밖에 내 놓았다. 그리고 얼른 세상이 다시 고요해지길 빌었다. 세상이 소원비로 가득 차서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면,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돌아오실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무희는 행복감이 가득 찼다.
   그때 불쾌한 발소리가 골목을 울리며 대문을 차고 들어왔다. 무희는 흠칫했다.
   “여어, 동생, 뭐하냐?”
   무희의 등골에 차가운 것이 내달렸다.
   “오빠?”
   믿고 싶지 않지만 진짜 오빠였다.
   “그럼 니 오빠지, 택배 기사냐? 그건 뭐냐? 나 몰래 돈이라도 숨기는 거냐?”
   오빠가 장독 쪽으로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아냐. 그냥 청소했었어.”
   무희는 재빨리 뚜껑을 닫았다.
   “네가 무슨 장독 청소를 하냐? 비켜 봐봐. 좀 보게.”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어허! 씨발 좃내 비싸게 구네. 한 대 맞기 전에 안 비켜?”
   오빠는 무희를 밀치고 뚜껑을 빼앗다시피 해 장독을 열었다. 독 속에는 멋대로 구겨진 꽃줄기가 푸른 뱀처럼 뒤엉켜 있었다. 오빠는 그 속에서 꽃잎이 불쑥 떠오르는 것 같아서 얼른 뚜껑을 닫았다.
   “뭐냐, 이 기분 나쁜 건. 시래기가 썩었으면 내다 버리지 보물처럼 싸 안냐? 세상이 미친 김에 같이 미치기로 했냐? 할 일 없으면 가서 밥이나 차려.”
   “알았어.”
   무희는 슬슬 오빠 눈치를 살폈다. 오빠는 태풍이었다. 항상 소란을 몰고 왔고, 가 버린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무희는 오빠가 간 자리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 보다 오빠의 소란이 엄마 꽃에 미칠 영향이 두려웠다.
   “어이고 울 아버지 여직 주무시네? 살아는 계시나?”
   안방을 흘끗 들여다보는 오빠의 말에 아버지는 마른 몸을 뒤척였다.
   “누구냐?”
   “노친네가 치매가 들었나? 아님 날 까먹자고 소원을 비셨나. 나야 잘됐네. 다 까먹고 이 집도 까먹으면 다 내 꺼니까.”
   무희는 농담 같은 한마디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슨 소리야 오빠?”
   “아, 내가 사업을 좀 하는데, 이번에 사정이 좋지 않아. 저쪽에 좀 줘야겠다.”
   뭘 준다는 건지,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 무희는 한참만에 이해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돼! 나랑 아빠는 어쩌고?”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그리고 준다고 없어지는 거 아니다. 내 사업에 투자하는 거라고.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텐데 뭘 그렇게 아까워해?”
   “안 그런 거 알아! 엄마 통장이랑 아빠 퇴직금도 오빠가 그렇게 다 없애 버렸잖아! 집은 절대로 안돼!”
   “웃기는 년, 네가 안 된다고 안될 줄 아냐? 어차피 아빠가 나 줄 건데 좀 미리 가지면 어떠냐? 그리고, 일 거의 다 됐는데 이딴 쪼매난 집 하나 때문에 그걸 다 망쳐야겠어 응?”
   “안돼! 부모님을 모시는 건 오빠가 아니라 나야. 오빠 따위 호적에서 파 버릴거야! 그럼 오빠 아무 것도 못 가져!”
   “이 쌍년이!”
   무희는 목을 움켜쥔 손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네까짓 게 짖는다고 뭐 될 줄 알아? 그리고 뭐, 네가 부모님을 모셔? 기껏 늙은이 하나 놓고 밥이랑 빨래 간신히 하는 거 같고 유세 떨기는. 내가 화끈하게 한방 날리면 파출부고 식모고 다 불러서 훨씬 편안하게 모실거다. 네 더러운 손 같은 거 빌릴 필요도 없이. 그리고 뭐 호적에서 뭘 파? 웃기고 있네. 너나 잘 해, 살모사 같은 년아. 너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어차피 그 빗은 내가 해결해야 되는 거고, 못 갚으면 아빠가 갚아 줘야 하는 거니까 더 잔말 할 것도 없어.”
   무희는 호흡이 가쁘다 못해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털개가 오빠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악! 이 망할 개새끼! 주인을 물어?”
   걷어 채인 털개가 헐떡대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풀려난 무희는 어지러움에 구역질을 느끼며 바닥을 더듬었다. 왜 거기 있는지 모를 쇠가위가 손에 잡혔다.
   “오빠, 엄마 기억해?”
   “너 진짜 미쳤구나. 어떻게 그걸 잊냐?”
   무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야말로 미친 거 아냐? 엄마가 오빠한테 얼마나 잘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어?”
   “엄마는 죽었어.”
   오빠는 이를 드러냈다.
   “바로 여기서. 목을 맷지, 설마 너 기억 안나? 그때 네가…”
   오빠의 입술에 야비한 미소가 걸렸다. 무희는 불안을 느꼈다. 뭔가, 아주 기분 나쁜 예감이 가슴을 눌렀다.
   “내가 뭐?”
   “네가 잠든 엄마 목에 올가미를 걸었잖아? 끝은 저기 커튼 봉에 감았지. 엄마가 자다가 물 마시러 가면 목이 당겨지도록.”
   무희는 갑자기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 네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더 말해 줄까? 넌 그날 저녁을 무척 짜게 했고, 반주도 내놨어. 엄마가 자연스럽게 취하고 반드시 목이 말라지게 말이야.”
   무희의 눈앞에 엄마가 춤추고 있었다. 목에는 예쁘게 꼬인 철사 목걸이를 걸고 있었고 발은 무용수처럼 가볍게 허공에 떠 있었다. 공중에서 춤추던 엄마의 몸은 돌고 돌고 돌다가 무희를 마주 보았다. 무희의 마음 속 꽉막힌 하수구의 물이 조금씩 빠져 나가며 부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죽은 엄마였다.
   “아니야!”
   “넌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을 수 있지? 그런 주제에 나한테 뭐라고? 내가 그때 엄마 통장을 빼돌린 거만 아니었으면 넌 여기 있지도 못했어.”
   “거짓말이야! 오빤 거짓말쟁이야! 나한테서 엄마를 뺏아 가 놓고, 이제 다 뺏아 가려는 거지! 나쁜 놈!”
   무희는 가위를 쥐고 돌진했다.
   “야! 뭐야! 너… 컥!”
   날카로운 가위 날이 살에 박히며 진득하게 감겨드는 지방의 감촉을 느끼기 전에 무희는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그건 아버지의 음성이기도 했다.
   “무희야 그만해라!”
   토닥토닥토닥토닥하는 소리가 달아나는 오빠의 발소리와 겹쳐졌다.
   “내 딸아, 이 미친년아….”
   무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빠가 무희를 감싸 안았다. 무희는 멍하니 중얼거려다.
   “아빠, 엄마가…. 있잖아, 내가 엄마를…….”
   “무희야 다 잊어. 잊어버려. 아무 생각도 하지마라. 그게 우리가 살길이다.”
   무희는 아빠를 뿌리치고 손에 묻은 피를 씻을 틈도 없이 엄마 꽃이 담긴 독으로 달려갔다.
   “아니야, 미친 건 오빠야. 아빤 아무것도 몰라. 이게 진짜 엄마라고.”
   소원을 되돌리려면, 소원이 이루어질 때와 똑같은 시간과 환경 조건을 제공해야 된다. 엄마를 다시 마당에 내 놓아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가 엄마가 변한 조건의 시작인 걸까? 엄마 꽃이 엄마가 되면, 과연 어떤 엄마가 되어 있을까? 무희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 진짜 엄마는 죽었고 이 꽃은 단지 무희의 바램인 거라면, 그럼 이 꽃은 무희를 좋아해 주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오빠 같은 거 잊어 버리고 아빠랑 셋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무희는 빗방울에 흔들리는 독 수면을 빠질 것처럼 들여다보았다.
mirror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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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5.12.31 22:10 댓글 수정 삭제
    몇 번 읽어도 다시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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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1.02 09:29 댓글 수정 삭제
    reset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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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1.03 01:15 댓글 수정 삭제
    세계와 자아의 거리 말인데요. "소원비"라는 건 자아가 세계에 너무 많이 반영되게 만들기 때문에, 자아 쪽에서 생각을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자아와 세계를 밀착된 거리에다 두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세계로 못 나가고 오히려 "집"에 격리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인 미학이군요. 그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망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결론적으로 완전히 똑같다는 것도... 비관적이네요. 거기에 놓인 자아는, 불쌍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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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elaznied 06.01.03 10:25 댓글 수정 삭제
    비슷한 아이디어가 정반대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화화된다는 소문 들리는, 루디 러커의 시간과공간을지배한사나이 읽어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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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1.03 14:09 댓글 수정 삭제
    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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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7.11.26 17:04 댓글 수정 삭제
    인상적이었어요. 엄마 꽃, 소원비. 계속 비가 내리는 인적없는 회색빛 도시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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