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bluewind 축제

2003.11.01 01:2311.01

  그는 눈을 떴다. 반쯤 올라가 있는 블라인드 아래로 늦여름의 햇살이 스며 들어와 침대 위를 흘러내린 팔다리에 기어오르고 있다. 뜨겁고, 따끔거리며, 끈적거리는 기분. 이 시기의 태양 볕은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손길을 가지고 있다. 그는 넌덜머리를 내며 팔을 들어올렸다. 눈을 감는다. 간밤의 지독한 악몽이 떠오를 것 같은 기분에 다시 눈을 뜬다. 땀에 젖은 시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기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촉수처럼 달라붙어 있다. 기분 나쁜 기상이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그렇듯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불쾌한 것은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엉망으로 휘저어져야 겨우 그 꼬리가 보일 뿐이었다. 놀라고, 당황하다가 정신을 가다듬으면 어느 새인가 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기억나지 않고, 다만 언뜻 보았던 그 불쾌한 기분만 앙금처럼 남아 있다. 물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흠뻑 젖은 온몸이 그걸 이야기 해 주고 있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훑어 내리자 손바닥에도 물기가 흥건하게 괴었다. 눈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저으면서 침대 머리맡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세면도구들을 주워 모았다.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문이다. 불을 켜지 않아 낮인데도 어두운 복도 끝에는 대조적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 강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벽에는 문이 있다. 양쪽으로 문들이 죽 늘어선 길을 걸어 그는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찬물로 몇 번 얼굴을 문지르고 고개를 들면 물때가 잔뜩 낀 지저분한 거울 사이로 지친 얼굴이 보였다. 눈, 코, 입, 전부 제자리에 붙어 있지만 위화감이 느껴진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인양, 내 얼굴에 붙어 있어야 할 것은 저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에는 안개 속의 사물을 보는 것처럼 흐릿한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비눗기가 남은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간다. 몇 mm 정도 간격을 남기고, 넘을 수 없는 유리벽 사이로 손가락을 맞누르고 있는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시간은 이미 정오를 한참 지나 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아 까실한 턱을 만지며 그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해는 결국 서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고 힘겹게 천정(天頂)을 넘을 때와는 사뭇 다른 속도로 지평선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떨어지는 정도를 초단위로 셀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는 새빨간 해를 눈이 아리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해마다 열리기는 하지만 아무도 먹지 않아 검은 흙바닥을 이리저리 발에 채이며 굴러다니는, 기숙사 앞의 앙상한 감나무에 매달린 감처럼 일그러지며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책상 위에 올려진 핸드폰이 온몸을 떨며 내는 요란한 소리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학교 신문 편집부에 있는 어느 친구였다.

  “뭐야, 여태 자고 있었던거야?”

  보이지 않을 수화기 너머의 상대를 향해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뭘 했지? 그냥, 멍하게 있었어. 대충 얼버무리는 가벼운 거짓말, 상대방도 느끼고는 있겠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그런 수준의.

  “축제인데 그렇게 방에만 처박혀 있을꺼야? 나와. 술이라도 먹자. 후배들이 주점 열잖아?”

  아. 축제였군.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을 상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곧 갈께.

  “빨리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잡음과 뒤섞여 진한 기계음이 풍겼다.

  일년에 한번 있는 대학교의 축제라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떠들썩하지도, 흥겹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 학교에서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대학교의 축제를 일부러 찾아 가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고 굳이 그럴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했었다. 어쨌든 그렇다는 것은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였고, 드물게 기숙사에만 처박혀 있던 인간군상들이 전부 밖으로 몰려나와 시끌벅적하게 놀아댄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축제를 본 것이 언제였더라.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란 곳은 석탄가루가 날리는 작은 광산 도시였고 사람들은 옥상에 널어진 흰 빨래가 금새 시커멓게 물들어버리듯 삶에 찌들어 있었다. 공기 중에 흩날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가루들은 숨쉬는 것만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뭐든지 까만 빛깔이었다. 집 뒤로 흐르는 작은 개천이 그랬고, 파헤쳐져 내장을 토해놓은 산이 그랬고, 산 아래로 굴러다니는 폐석들이 그랬고, 심지어 하늘도 검은 빛이었다. 낮이나, 비온 뒤 구름이 개인 날쯤은 환하게, 흔히 말하는 터키색 빛의 말간 하늘이 드러날 법도 했지만, 그의 기억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언젠가 본적이 있는 석탄 원석 뿐이었다. 새카만 그것은 연필심을 갈아 놓은 것처럼 단면에서 칙칙한 흰 광택을 내고 있었다. 하늘 위로 떠다니는 구름이 꼭 그런 빛이었다. 하늘은 석탄 색이야. 꼭꼭 묻혀서 탄화되어, 다시 땅 위로 드러날 때쯤은 새카맣게 변해있는 석탄처럼 그의 기억도 그런 빛이었다. 집 뒤를 흐르던 썩은 하천처럼 퀴퀴한 냄새가 났다.
  축제 비슷한 게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아.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축제를 본 것은, 어머니를 따라 나갔던 근처 도시의 어느 축제였다. 단오절을 맞아서 열린다는 그것은 어쩌면 축제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머니를 따라 완행 열차를 타고 내린 후에 본 그것은, 시골 마을의 몇 일마다, 혹은 몇 달에 한번씩 열린다는 장날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늘은 처음 보는 듯 맑고 파랬고, 바다는 그에 뒤지지 않게 진하고 검은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폭죽이라도 터졌었던가? 초등학교 운동회 날 의례 그렇듯 만국기라도 걸려 있었던가?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 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를 거리는 노점상들로 가득했고 싸구려 장난감과 먹을 것들은 아이의 시선을 하늘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는 충분할 정도였다. 손안에 있는 어머니의 손가락을 조물락거리면서 그는 끊임없이 그 노점상 사이를 흘러 다녔다. 흥정을 하는 상인과 손님들은 서로서로 목청을 세우고 있었고 아이는 그 사이에서 뭘 사달라고 할지 고민하면서 어머니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하루종일 걸어도 이곳 전체를 구경하기는 시간이 모자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동아리 주점은 운동장 구석에 있었다. 근처의 건물에서 끌어온 전선 끝에는 샛노란 빛깔의 백열 전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엉성하게 설치된 천막 아래에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때묻은 테이블이 그에 못지 않게 허름한 의자들과 함께 널려 있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기름타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빈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맥주 몇 병과 잔 두 개, 그리고 안주로 파전을 부탁한 후에는 기다릴 일만이 남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동아리 후배가 파란색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병을 꺼내는 것을 보며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촛불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타들어가며 눈물 흘리는 것 밖에 없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 절반쯤 타들어 가고 나서야 도착했다. 시켜놓은 맥주병은 이미 둘 정도 비어있었고 남은 것들도 뚜껑이 열려 있었다.

  “미안, 좀 늦었지?”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시간은 이제 많다. 너무 많아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난다.

  “졸업한 선배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그쪽에서 좀 잡혀있었어. 볼 것도 없는데 뭐하러 왔는지 몰라.”

  그녀는 이어서 졸업한 선배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뭐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하는지,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먹고 말야. 취직한 선배가 몇 있고, 아직 그러지 못한 선배가 몇 있다고 했다. 술이 들어가자 왜 자신이 아직도 백수인지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탓에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다고 한다. 누군가는 결혼을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나도 졸업하면 그렇게 될까 무섭다 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미지근해진 잔에 진한 오줌빛 맥주를 가득 채웠다. 이미 꽤 취해있는 듯 했지만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투였다.

  “마지막이잖아, 어쨌든?”

  어쩌면.
  
  “올해로 마지막이네… 정말.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를 줄은 몰랐는데.”

  친구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에는 반쯤 비워진, 혹은 반쯤 채워진 술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흘러 넘친 맥주자국이 노란 오줌색으로 번져있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는 여전히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쯤 어찌되던 상관없다는 투로, 자신의 앞에 놓인 빈 유리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리잔에 있던 맥주는 이미 뱃속으로 넘어가 버린지 오래였지만 그도, 그 앞에 있는 그녀도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맥주는, 늦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처럼 역겨운 쓴맛이 났다.

  “올해는 그거 하지 않을꺼야?”

  “그거라니?”

  “기사- 기사 말야. 매년 했었잖아?”

  그랬던가. 그는 다시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학교에 처음 들어오고 나서 맞는 대학교 축제에서, 나는 늘 쓰던 노트를 들고 축제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주점에서 공연장으로, 이벤트장으로, 어둑하고 후텁지근하게 감겨오는 늦여름의 공기는 알코올 냄새, 시큼한 토사물과 땀냄새에 뒤섞여 점막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왔고 호흡곤란을 느끼면서도 그는 그 사람의 물결 사이에 묻혀 이곳으로, 다시 저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너는 내게 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냐고 물었다.

  “응, 그랬지.”

  나는 네게 뭔가를 베껴적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학교 신문 편집부였던 그녀는 나중에 나에게 몇 장인가, 그때의 대학 축제에 대한 원고를 부탁했었고 나는 별 생각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A4 몇 장, 몇 킬로바이트쯤, 하얀 종이 위에 검게 새겨진 축제의 기록이 친구에게 넘겨졌고 댓가로 몇 장인가 지폐와 짤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투를 쓸데없이 무겁게 만들던 동전을 받았다. 그런 식의 관계가 몇 번인가 반복되었고 그녀와 나는 어느덧 가끔 술잔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뿐이다.

  “올해는 하지 않아.”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말을 끊었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미지근하게 데워진 유리잔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흰 맥주거품 같은 미소였다. 건드리면 툭툭 터지면서 역한 대기 속으로 진한 한숨을 토해낼 듯한 그런.

  어렸을 적 놀러다니던 산기슭에 굴러다니던 석탄 폐석 중에는 간혹 화석이 들어 있는 것이 있었다. 누가 담벼락에 지려놓은 오줌자국처럼 그것에서는 진한 악취가 풍겼다. 삼엽충, 혹은 이름 모를 나뭇잎, 본적도 없는 종류의 잎맥이 거미줄처럼 그어져 있는 그것처럼, 축제에서 돌아온 아이는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었다. 축제가 끝나도 아이는 축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딱딱하고 매끄러운 나뭇결을 가진 플라스틱으로 만든 공룡 모형과, 지글거리는 기름 냄새를 풍기던 먹거리들과 모퉁이를 돌아가면 나오던, 한약재를 팔던 작은 노점상에 대해 적었다. 이름 모를 풀들은 짚단처럼 쌓여 대충 묶여 있었다. 한약재 특유의 기묘한 향기가 나는 풀들은 한결같이 짙은 암갈색이었다. 그 구석에 말린 지네들이 덩달아 매달려 있었다. 교수형 당할 죄인들처럼, 굴비 두릅처럼 노끈에 묶여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한 뼘이 될까 말까 한 그 작은 짐승들은 어울리지 않게 말린 한약재 빛깔이 났다.


  아깝네. 덕분에 매년 편했는데. 아쉬움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남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얼굴을 유리잔에 대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낸다. 흘러내리는 맥주 거품 뒤로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진 얼굴은 석양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올해 졸업해?
  글쎄,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니 일년 더 다니면서 재수강이나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빴나? 그녀의 목소리는 아깝네. 덕분에 매년 편했는데 라고 말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잘라 붙인 그의 성대가 한번도 낸 적 없는 피리 소리를 내며 떨린다. 그는 웃었다. 후덥지근하게 말라붙고 술냄새와 토사물 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인 축제의 공기가 그의 웃음 속에 담긴 일상에 떤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는 말했다.

  “얼른 졸업해서 취직해야지. 언제까지 부모님한테 기대어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거야? 너 순수과학해서 연구하는 쪽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그건 어릴 적의 꿈이었으니까. 하얗게 얼룩진 달에 오르려 하고 구름 위로 돌을 던지고 지치지도 않고 축제를 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의 희망이었으니까.

  “요즘은 그런 걸로 먹고살기 어렵잖아?”

  정신없이 축제를 구경하던 나는 곧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생이 되었고, 취업 준비를 한다. 언제나 새카만 석탄가루가 섞인 흙을 묻히고 돌아오던 손에는 연필가루가 묻게 되었고 굵어진 팔다리와 지방이 잔뜩 낀 허리와 무거워진 머리통을 가지게 되었다. 지칠 줄 모르고 이 상점에서, 저 상점으로 모퉁이와 모퉁이를 돌아다니던,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며 양팔을 펼치고 날아갈 것처럼 소리지르던 아이는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았다. 바닷가 마을의 단오제는 그 이후로 한번도 가지 못했다. 대학에 와서 첫 축제를 맞이했을 때 아이는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지만 기록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세월의 먼지만큼이나 누렇게 변한 종이조각들이 쌓여간다.

  빈 술병 너머로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괜찮아? 그가 손을 내밀어 부축한다.

  “바람이나 좀 쐬고 들어가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갑을 열고 가장자리가 닳아 뭉게진 지폐를 꺼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동아리 후배에게 건냈다. 안녕히 가세요. 기운찬 목소리와 다 타서 꺼져 가는 싸구려 향초와 너절하게 찢긴 파전과 빈 술병들을 뒤로하고 걸어나온다. 말갛게 닦여 있을 달은 가로등 불빛에 엉망으로 가려져 있다. 부산하게 남은 열기를 연소시키고 있는 축제의 비일상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부서져 내리고 있는 보도 블럭 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라앉는다. 문득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고등학교 때는 축제 끝에 캠프파이어 같은 것하고 그랬었지.”

  아, 그랬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려진 나뭇조각들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고 타오르면서 허물어지고, 싸구려 스피커는 철지난 유행가를 불러대고 있었다. 모닥불 빛에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들은 되는대로 춤을 췄다. 아직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걷지도, 모퉁이를 돌 때마다 숨을 헐떡이지도 않던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춤을 추곤 했었다.

  “캠프파이어, 우리끼리 할까?”

  문득 그가 그렇게 말한다. 그녀는 반쯤 감기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아무것도 없잖아?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내렸다. 노점상에서 교수형을 당한 죄수들처럼 매달려 있던 중국산 지네, 짚단처럼 묶여 있던 풀들이 흘리던 한약재 냄새가 난다. 지난 밤 밤새도록 서랍을, 단단히 묶여 구석에 갇혀 있던 박스를 풀어내고 지난 세기의 유물을 탐사하는 것처럼 그가 차곡차곡 캐어낸 공책과 종이조각들이 바닥에 흘러내린다. 내가 쓴 일기장과, 내가 쓴 편지들과, 축제의 기록들이 한데 엉켜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그거 태우게? 아깝지 않아?”

  “상관없어. 기록하는 일은 다른 녀석이 하게 되었으니까 말야.”

  그가 말한다. 석탄 가루가 섞인 흙도, 어두운 광택을 띠던 연필 가루도 더 이상 묻히지 않는, 살찐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열쇠고리와, 20년도 지난 동전들과 엉킨 먼지조각들을 집어내던 그는 곧 성냥을 꺼내 불을 던진다.

  “다른 사람? 누가?”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되물어오는 그녀 대신 그는 타 들어가는 종이조각들을 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나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점상에 목매달려 있던 중국산 지네 더미와, 이제는 없어진 바닷가 마을의 단오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신 고향에서는 말야, 요즘은 겨울을 맞아 눈 축제라는 것을 열더라고. 탄광촌이었던 마을은 이제 쓸모 없어진 석탄 대신 석탄을 파내던 산으로 눈을 돌렸다. 높은 산, 산꼭대기에는 내 기억 속에 있던 것 같은 불투명한 하늘대신 새하얗게 눈빛으로 탈색된 구름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를테면 거기서 도로변으로 밀려나서 새카맣게 먼지를 뒤집어쓴 얼음덩어리들이 되어 버린거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는 다시 차분하게 설명을 되풀이했다. 축제가 끝나면 떠들썩했던 일은 잊고 일상으로 다시 찌들어가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아이가 있었다고, 나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어떻게 그 아이가 목매달린 말린 지네처럼, 도로변으로 밀려난 때묻은 얼음조각처럼 버려졌는지 설명했다. 그가 어떻게 나를 버리고 축제를 쓰는 일을 그만두고 어릴 적부터 계속되었던 떠들썩한 축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 석탄 폐석에 말라붙은 잎맥은 거의 가치가 없는 싸구려 화석들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것을, 그는, 아니 나는 몇 개씩 집으로 집어와서 쌓아두곤 했었다. 이제 거기에 말라붙은 잎맥처럼 그저 과거에 있었다는 것만을 증명하는 나를 어떻게 했는지 설명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는 내 것이었던 입술을 움직이고 내 것이었던 성대를 떨리게 하며 말한다.
  그냥, 버려 버렸지.
mirror
댓글 1
분류 제목 날짜
양원영 그녀, 사랑스런 아줌마 - 본문 삭제 -2 2003.12.26
은림 거울 성 이야기2 2003.12.26
아밀 H 이야기 - 본문 삭제 -8 2003.12.26
pena 마왕 2003.12.26
김수륜 오래된 사람 2003.11.28
赤魚 분실의 도시 - 본문 삭제 -1 2003.11.28
양원영 만병통치 병원 - 본문 삭제 -1 2003.11.28
가는달 지구로 돌아오다 2003.11.28
세이지 달의 고치(月の繭) 2003.11.01
bluewind 축제1 2003.11.01
김수륜 그녀는 목이 길다 - 본문 삭제 -1 2003.11.01
pena 누메논 2003.11.01
赤魚 신의 정원 - 본문삭제 - 2003.09.26
가는달 우주화(宇宙花) 2003.09.26
은림 할머니 나무3 2003.09.26
bluewind 물고기와 소년1 2003.08.30
은림 얼음 공주6 2003.08.30
정해복 좌변기를 찾아 떠나는 모험2 2003.08.30
세이지 사라방드Sarabande1 2003.07.26
가는달 윤회의 끝1 2003.07.26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