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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wind 물고기와 소년

2003.08.30 02:0508.30

  336년 봄은 최악이었다. 전해 겨울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멈출 줄 모르고 온 세상을 뒤덮어 버렸고 3월을 지나 5월이 다 되도록 멈출 줄 몰랐다. 봄이 왔지만 나무는 잎을 만들지 않았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죽어 버렸다. 농부들은 땅에 작물을 심을 수가 없었고 아이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으며 여자들은 원인을 모를 역병에 걸려 죽어갔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인육을 먹었다. 바닷가의 많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단체로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나마 유일하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바다…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다리나 팔이 달린 고기와 사람의 얼굴을 단 문어 따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바다로 나간 배들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람모양의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미치거나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몸서리를 치며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고… 세상은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타마스 구나라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336년 5월 27일. 해변가에 위치한 이 마을은 내가 이전에 지나친 마을처럼 텅텅 빈집들로 가득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 마을에 살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정도. 녹색 눈동자에 몸에는 군데군데 비늘이 나 있던 그 아이는 뭉텅뭉텅 빠져가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무언가를 바다에 던져 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것이 커다란 물고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뭐니?”

  “내 여동생.”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무언가 목에 걸린 것처럼 이상하게 들려 왔다.

  “엄마랑, 아빠는 죽었어. 여동생은 많이 아파. 오늘 아침에 나보고 물에 넣어 달라고 했어. 친구들은 어제 모두 바다로 떠났어. 여기에는 나 혼자야.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

  “라자스, 방랑자. 꼬마 네 이름은?”

  “사트바. 하지만 난 꼬마가 아닌걸. 이제 11살이나 먹었는걸.”

  속으로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1살밖에 먹지 않은 아이가 자신을 꼬마가 아니라고 주장하다니.

  “그래? 그럼 사트바라고 불러야겠군. 어른들은 모두 어디에 있니?”

  “병에 걸려서 모두 죽었어. 아이들은 아프다가 물고기가 되었어. 나는 어제 아빠랑 엄마를 집 앞에 묻었어. 다른 곳에 묻고 싶었지만 나 혼자라서 옮길 수가 없었는걸. 이런 때는 힘이 좀 더 셌으면 하지만…”

  그런건가.

  이 마을에도 먹을만한 것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차피 빈집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별 죄책감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뒤지는 내 모습에 사트바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지만 별로 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고 우리는 잠시 같이 앉아 있었다. 밤바다는 이상한 빛으로 빛났고 멀리서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들어 본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매혹적이었지만, 요염하고 어딘가 퇴폐적이었던 그들의 노래와는 달리 그저 즐거워 흥에 겨워 부르는 아이들의 노랫소리 같은…
문득 내 옆에 앉아 있던 사트바가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두통과 열증에 그는 꽤나 고통스러워했지만 묵묵히 견디며 밖에 나와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물고기가 되겠지, 아니면 어른들처럼 죽던가.”

  “…죽어?”

  나는 침을 삼키느라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라지는 거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종은. 아이들은 구원받겠지만.”

  “아저씨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

  “방랑자니까.”

  “방랑자?”

  “라자스, 활동. 한곳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이지. 태어나면서 방랑을 시작해서 죽을 때 그 방랑을 끝내지.”

  샤트바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서 아이들만 살아남지?”

  “아이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은 그러지 못해. 어른들, 봤어? 항상 현실에 불만족이지. 그리고 입버릇처럼 말해. 이런 생활을 때려치우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어쩌면 소년시절의 열망이었을 그런 일들을, 그들은 하지 못해. 얽매여 있으니까. 변화를 원하면서도 가장 작은 부분조차 버리지 못하는 것이 어른이지.”

  “아이라고 뭐든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이건 대체 뭐야?”

  그의 앞의 말과 뒤의 말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에 웃옷을 벗은 채로 상반신을 노출시키고 목 아래에 갈비뼈가 시작되는 부분쯤에서 두 갈래로 뻗어 나와 거의 배꼽 근처까지 내려와 있는 분홍색 살점을 손으로 쥐고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아가미일걸.”

  “아가미?”

  “물 속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잖아. 그게 있으면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을 거야.”

  “왜 이런 빛깔이야?”

  “바로 아래로 혈관이 지나다니니까… 그런데 무슨 말이지? 아이들도 아무 것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너희는 씌여지지 않은 종이이고 희망 그 자체이지. 고결한 성인이 될 수도 있고 살인자가 될 수도 있고 강인한 전사가 되거나 그저 그런 아버지가 될 수도 있지. 그런 데 무슨 말이지?”

  사트바는 아가미를 쥐고 짜증스러운 듯이 흔들어 대었다. 아프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아이라고 아무거나 되는 것은 아니잖아. 난 물고기가 되기는 싫어. 비린내는 싫고 바다는 더 무서워.”

  “물고기가 되기 싫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데. 왜 물고기가 되는 것을 싫어하지? 살고 싶지 않아?”

  “물고기가 되어 버리면 친구들이랑 축구를 못하잖아.”

  “그런 단순한 이유?”

  사트바는 고개를 흔들었다.

  “단순하지 않아. 자랑은 아니지만 난 이 마을에서 축구를 가장 잘 했어. 그런데 물고기가 되면 축구를 못해. 그런데 왜 어른들은 물고기가 되지 못해?”

  “미련이 많아서.”

  “미련?”

  “너처럼,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된다던가. 아니면 모아놓은 재산이 아깝다던가. 뭔가 다른 것에 미련이 있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다 그래. 그래서 죽어.”

  “아저씨는?”

  “나는… 자유롭게 떠도는 사람이니까.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지.”

  “그런데 아저씨는 아프지도 않고 물고기가 되지도 않아.”

  “나는… 나는 물고기가 되어도 라자스일까?”

  사트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안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내 할말을 계속했다.

  “내 모습이 변해서 다른 생물이 되어도 나는 나일까? 내 모습이 변해서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해도 그것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개구리가 된 왕자의 이야기를 알아?”

  대답은 재빠르게 나왔다. “응”

  “훗. 웃기는 이야기고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야. 실제로 사람이 개구리가 되면 어떨 것 같아? 말 그대로 개구리가 되는 거야. 그건 ‘왕자였던 개구리’이지 왕자가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외형은 본질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모습, 내 말투, 내 몸… 어느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건 이미 내가 아니야. 그것들은 나를 나로 있게 하지만 동시에 내가 내가 아닌 무엇이 될 수 없게 제한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의 말투에는 왠지 힘이 없었다. 아파서 그런 것일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나 역시 미련이 있다는 거지. 나 자신에 대해. 난 물고기가 되기 싫어. 물고기가 되면 그건 내가 아닐테니까.”

  “그래…”

  말꼬리를 흐리면서 그가 내 품에 안겨 들었다. 나는 조용하게 물었다.

  “바다에 넣어줄까?”

  “싫어.”

  “이대로 죽을 거야?”

  “아마도.”

  “잘 가.”

  “응.”

  그리곤 끝이었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그를 품에 안은 채로 밤을 새웠고 다음날 아침에 해변으로 찾아온, 아마도 그의 여동생으로 생각되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에게 아직 온기가 다 식지 않은 그의 시신을 그녀에게 건네어 줄 수 있었다. 아마도 사트바는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물고기가 되지 않고 죽었을 것이다. 그의 여동생은 시신을 안고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바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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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No Profile
    felias 03.09.04 17:34 댓글 수정 삭제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라는 의식을 낳고 동시에 '나'를 어떤 한계로 제약하지 - 쿠사나기 모토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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