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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 거울 성 이야기

2003.12.26 19:2312.26

  옛날 옛날에 이름 없는 어느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머리카락은 꿀보다 더 향기로운 금빛이었고 눈은 흑요석처럼 검었으며 피부는 백옥처럼 티없이 깨끗하고 싱싱했답니다. 공주님은 너무 예뻤기 때문에 꽃이나 보석이 공주님 곁에 가면 빛을 잃었지요. 또한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여자도 공주님과 같이 선다면 얼굴을 붉히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은 고민 끝에 밖에 나갈 대면 언제나 면포를 쓰고 나가곤 했답니다. 너무 사람들에게 폐가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실은 공주님은 자신의 미모를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공주님의 뒤에는 언제나 공주님을 더욱 빛나게 치장할 금은 보화와 비단 옷들이 든 상자를 짊어진 노예들이 줄줄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의 발 앞에는 언제나 공주님을 사모해 마지않는 젊은이들이 무릎을 꿇었지요. 하지만 공주님은 연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냉가슴을 앓으며 상사병에 걸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하늘이 파랗고 해가 선명한 날에 아름다운 공주님의 열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사랑스런 공주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임금님은 그날 백성 모두가 일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즐겁게 보내도록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궁궐도 개방해서 어떤 사람이건 공주님의 생일 잔치에 참석해 축하하고 선물도 바칠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답니다. 공주님의 발치에는 평생 구경도 할 수 없을 진귀한 보물들이 그득그득 넘쳐 났지요. 하지만 공주님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공주님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요. 공주님은 뭔가 특별한 것을 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자 끊일 줄 모르고 줄을 이었던 손님들도 슬슬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홀연히 검은 옷을 입은 마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놀랍고 두려워서 웅성였지만 마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수줍은 얼굴로 용기를 내어 임금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공주님께 상냥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공주님, 저는 밤의 서쪽에 살고 있는 마녀입니다. 그곳에는 저 외엔 아무도 없답니다. 그래서 저는 공주님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제 조그마한 호의로 공주님이 꿈에도 그리던 것을 드리겠습니다. 저와 친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몹시도 외로운 얼굴을 한 마녀의 말에 공주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주신다면 기꺼이 그대와 친구가 되겠어요."

  그 말에 마녀는 기쁘게 웃으면서 사람들 앞에서 요술을 부려 임금님의 궁궐 옆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성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 성은 모두 거울로 만들어져 있어서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였습니다. 공주님은 깜짝 놀라며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때는 거울은 몹시 귀중한 것이었기에 공주님도 방에 걸어 놓은 벽 거울 밖에 가질 수가 없었거든요. 그나마도 몹시 오래되어서 상이 불균형하게 맺혔었지요. 마녀는 공주님이 거울 성까지 가시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성과 성을 잇는 다리까지 따로 만들었답니다. 공주님은 너무 기뻐서 마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당신과 나는 친구입니다. 함께 저 다리를 건너 성을 구경갈까요?"

  마녀는 기꺼이 공주님의 손을 잡고 거울 성으로 안내했습니다. 사람들은 몹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마녀와 거울 성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흥겨운 잔치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공주님이 없다고 해서 모두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멈춘 듯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한참 흥겹게 놀다보니 슬슬 저녁 무렵이 되었습니다. 궁에 초대되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저녁 인사를 하다가 문득 공주님이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녀의 안내를 받아 거울 성에 들어간 공주님께서 저녁 늦도록 돌아오질 않은 것이었습니다. 즐겁게 놀던 사람들은 이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마녀였으
니까요. 임금님은 그런 불안을 씻어 버리기 위해 시종을 보내 거울 성에 들어가서 공주님을 모셔 오도록 분부했습니다. 시종은 임금님께 깊숙이 허리를 굽혀 보이고 성들 사이에 놓인 다리를 단숨에 달려 거울 성에 도착했습니다.

  "여보세요?"

  문지기는 성문 앞에서 주춤주춤 문지기를 찾았습니다. 예의 바른 시종은 문지기에게 안내도 받지 않고 남의 성에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을 불러도 성안에서는 전혀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시종은 아무도 없는 곳에다 절을 하고는 문지기도 없는 성문을 가만히 밀어 열었습니다. 거울 성은 성문 안부터 온통 거울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시종은 갑자기 성문 안에서 뛰쳐나온 수 천명의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은 몹시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시종은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뛰어 오느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옷과 모자가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 수
천 개가 나타나자 그것은 세상에 어떤 괴물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괴물로 보였습니다. 시종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겁에 질린 채로 거울 성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성으로 돌아와 임금님께 말했습니다.

  "마녀가 공주님을 성안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수 천명의 괴물로 성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 성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공주님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나라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임금님은 당장 슬픔에 몸져누우셨고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으로 창백해졌습니다. 공주님의 흥겨운 생일 잔치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느냐. 누가 사악하고 힘센 마녀에게서 공주를 구해 올 수 있다는 말이냐."

  임금님의 혼잣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마녀의 저주와 거울 성의 괴물들이 너무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는 채로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소문은 바람을 타고 번져서 이웃나라의 임금님 성에까지 닿았답니다. 이웃나라 임금님에게는 젊고 강하고 현명한 왕자가 셋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웃나라 임금님과 이름 없는 나라 임금님은 오래 전부터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답니다. 딸 걱정에 몸져누운 친구를 동정한 이웃나라 임금님은 세 왕자를 불러모아 이야기를 했겠지요.

  "자랑스럽고 용감한 나의 아들들아. 이웃의 근심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물며 그것이 절친한 벗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늙었으니 누가 내 대신 가서 내 벗의 근심을 덜어 주겠느냐?"

  그러자 당연히 첫 번째 왕자가 임금님 앞에 나섰습니다.

  "제가 아바마마를 위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겠습니다. 저에게 강하고 날카로운 무기와 말 한 필을 주십시오. 반드시 이름 없는 나라 임금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

  이웃나라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면서 무기고를 열어 가장 강하고 가장 좋은 무기를 첫째 왕자에게 주었습니다. 첫째 왕자는 무기를 들고 말을 타고 거울 성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국경을 넘어 이름 없는 나라에 도착했답니다. 그곳에서 첫째 왕자 융숭히 대접을 받고 시종의 안내에 따라 거울 성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는 물에 걸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의 정원 위에 예쁜 돌들을 마주 놓아 이은 것이라서 다리 양옆에는 정원수들이 잔뜩 우거져 있었습니다. 첫째 왕자가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용감하고 아름다운 기사님 그렇게 무장을 하고 어디를 가시는 지요?"

  여자가 묻자 왕자는 말을 멈추고 대답했습니다.

  "거울의 성에 마녀를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해내러 간다."

  그 말에 여자는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기사님, 공주님은 마녀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랍니다. 거울 성에 싫증이 나시면 곧 스스로 나오실 겁니다."

  첫째 왕자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낮에도 새까만 옷은 너무나도 이상해서 왕자는 그녀가 거울 성을 만든 마녀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습니다.

  "오호라 그 검은 옷을 보니 네가 거울 성의 마녀로구나! 하찮은 거짓말로 나를 꼬이려 하지 말고 냉큼 내 칼을 받아라."

  갑작스런 공격에 마녀는 팔에 상처를 입고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왕자는 다리를 건너 거울 성에 다다랐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거울 성에는 문지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괴물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절대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문고리는 바로 좀전에 닦아 놓은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첫째 왕자는 심호흡을 하고 칼을 뽑아 들고 성문을 밀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천 명의 기사가 왕자의 눈앞을 막아섰습니다. 왕자는 너무 놀라고 긴장해서 그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비겁하구나 한 명을 상대로 수 천 명이 나서다니.... 아무래도 좋다. 공주님을 내 놓아라. 나는 강하니까 이런 허풍에 겁먹지 않는다."

  첫째 왕자는 거울 속의 기사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기사들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더욱 덤벼들 태세를 취할 뿐이었습니다. 왕자는 칼을 휘두르면서 더욱 크게 소리쳤습니다.

  "당장 물러가라 감히 누구에게 대 드는가?"

  그러나 거울 속의 기사들은 전혀 물러날 기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왕자에게 덤벼들 것처럼 위협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첫째 왕자는 당하기 전에 상대를 베어야겠다는 생각에 앞 뒤 가릴 것 없이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거울들이 산산이 깨어져서 왕자를 덮쳤습니다. 적들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첫째 왕자도 크게 다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왕자가 쓰러지자 행여나 망원경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던 시종은 깜짝 놀라서 달려와 다친 왕자를 업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웃 나라에는 가슴아픈 소식 전해졌지요.

  형이 거울 성에서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둘째 왕자는 잔뜩 분개를 했습니다. 이제는 이름 없는 나라 임금님뿐 아니라 이웃나라 임금님가지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으니까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둘째 왕자는 이웃나라 임금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아바마마, 제가 가서 형님의 복수를 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저에게 가장 강한 무기와 용의 갑옷과 말 한 필을 주십시오."

  이웃나라 임금님도 한때 용맹한 기사였기 때문에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걱정으로 그를 붙잡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번에는 둘째 왕자가 거울 성에 도전을 했습니다. 둘째 왕자는 우선 이름 없는 나라 임금님의 성에 들러서 형의 문안을 살핀 뒤에 거울 성의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둘째 왕자가 다리를 반쯤 건넜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를 불렀습니다.

  "아아, 용맹하신 기사님, 거울 성에 가십니까? 제발 권고하건대 기사님의 안녕을 위해서 여기서 말머리를 돌리십시오. 공주님은 때가 되면 스스로 돌아오실 겁니다."

  왕자는 여자의 말과 여자가 입은 검은 옷과 그리고 그 위에 빨갛게 피가 베여난 상처를 보고 단번에 그녀가 마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이 마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미리 말해 주었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거울 성문을 지키는 마녀로구나. 당장 공주님을 내 놓아라."

  마녀는 이번에도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둘째 왕자의 칼에 상처를 입은 채로 숲 속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둘째 왕자는 분에 못이긴 채로 거울 성에 도착했습니다. 거울 성의 입구는 첫째 왕자의 공격으로 깨어진 뒤 복구되지 않아서 엉망이었습니다. 둘째 왕자는 깨진 거울 조각 위에 검게 굳어버린 형님의 핏자국을 보고 분개하며 그곳을 통과했습니다. 서로의 빛을 반사해 내부를 밝히던 거울이 없었기 때문에 복도는 어두컴컴했습니다. 둘째 왕자가 그 어두운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반인 반용 떼가 왕자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공주를 내놔라 이놈들! 공주를 어떻게 했느냐?"

  둘째 왕자는 다짜고짜 거울로 뛰어들어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깨진 거울 조각들이 왕자에게로 쏟아졌고 그도 첫째 왕자처럼 상처를 입고 거울 성에서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님들에겐 근심이 더해졌지요. 이제 양쪽 나라 왕가에 남은 것은 셋째 왕자 하나 뿐이었습니다.

  셋째 왕자는 형들처럼 싸움을 잘 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았습니다. 셋째 왕자의 별명은 겁쟁이였습니다. 칼싸움 연습 시간이면 도서관으로 달아났고 승마 연습 시간에는 들판에 나가 개와 뛰노는 것이 셋째 왕자의 일과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형들처럼 이웃 나라 임금님 앞에 섰습니다.

  "아바마마, 저는 형님들처럼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마녀를 만나서 공주님을 풀어주고 두 형님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보겠습니다. 대화가 잘 통한다면 마녀는 분명히 공주님을 풀어주고 억울하게 다친 형들을 가엽게 여겨줄 것입니다."

  임금님은 셋째 왕자를 몹시 말렸습니다.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았거든요. 가장 강하고 가장 용감한 두 형들마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가장 약하고 조용한 왕자가 마녀를 상대하러 간다니 안될 말이었지요.

  "애야 나는 네 두 형을 잃었다.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구나. 제발 다시 생각해다오,"

  그러나 셋째 왕자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저는 가겠습니다. 아버님.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험이 느껴지면 곧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저에게 무딘 단검 한 자루와 상처를 대비한 구급 약 상자를 주십시오. 말 대신 저의 개와 함께 가겠습니다."

  이렇게 셋째 왕자는 언제나 함께 지내는 개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셋째 왕자도 두 형님을 다치게 한 마녀의 계략에 속으로 분개하고 있었으나 천천히 걸어가는 길 중에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녀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왕자는 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늦게 이름 없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형님들을 만나볼 새도 없이 바로 거울 성의 다리를 건넜습니다. 왕자가 다리를 지날 때 앞선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몹시 힘없는 목소리로 셋째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젊은이 거울 성에 가지 마세요. 당신 또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상처입지 마세요."

  셋째 왕자는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왕자는 말을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와 똑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칠 수 있었거든요.

  "잠깐만요."

  셋째 왕자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여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왕자가 자신을 헤치려는 줄 알고 달아나다가 몇 걸음 못 가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상처를 입고 있는 데다가 매일 매일 들판에 나가 개와 경주하던 왕자의 빠른 걸음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자는 그녀가 몸부림 쳐서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게 살포시 감싸 안고는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거울 성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까?"

  "마녀가 일부러 공주님을 가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하러 갈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성에서 기다려 주시면 언젠가 공주님이 스스로 나오실 겁니다."

  여자의 말에 왕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야합니다. 이대로 라면 공주님이 언제 돌아오실 지 알 수 없고, 그러면 늙으신 임금님은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병에 걸리게 될 겁니다."

  그러자 여자는 잠시 생각을 한 후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여기에 그 칼을 두고 저를 따라 오세요. 저를 치료해 주신 보답으로 거울의 미로를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곳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저를 믿어 주신다면 무사히 그곳을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셋째 왕자는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칼을 내려놓고 그의 개를 데리고 여자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둘은 거울 성문 앞에 섰습니다. 여자가 육중한 거울 문을 어깨로 밀어 열자 마치 죽은 고래의 입속처럼 어두컴컴하고 너저분한 문안이 보였습니다. 셋째 왕자는 여기 저기에 요란하게 깨진 거울 자국과 눌어붙은 핏자국들을 보고 조금 불안해졌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여자의 뒤를 따랐습니다. 첫 번째 입구를 지나 두 번째 복도에 들어서자 역시 그곳도 엉망으로 부서져 있어서 도저히 아름다운 거울 성의 명성을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자는 그곳도 아무렇지 않은 걸음으로 지나쳐 그들은 드디어 미로 끝의 작은 방문 앞
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문을 열면 공주님이 계신 곳과 바로 이어져 있습니다. 말씀드리지만 저조차도 이곳의 열쇠는 없습니다. 여기는 완벽하게 공주님의 상상만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공간이니까요. 앞으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여기서 기다릴 것을 다시 한번 충고합니다."

  그제야 왕자는 그녀가 거울 성을 만든 마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들어가야겠습니다. 만약을 위해 여기서 저의 개와 함께 저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흘이 지나도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웃나라 임금님과 왕비님이신 저의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개는 당신에게 부탁드립니다."

  셋째 왕자의 부탁을 마녀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마녀의 말에 그렇게 진심으로 귀기울여 준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녀는 만약 왕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 스스로가 그를 찾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조심하세요."

  마녀가 거울의 문을 열어주자 왕자는 그 희끄무레한 빛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문은 닫혔고 복도는 또다시 정적에 감싸였습니다. 마녀는 거울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왕자님과 공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마녀는 굶주림을 느끼지 않았지만 함께 남겨진 개는 살아 있는 생물이었습니다. 마녀는 개가 배가 고파 하면 마술로 뼈다귀를 만들어 주었고 그렇게 아홉 개의 뼈를 만들고 나자 마녀는 벌써 사흘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전히 왕자님과 공주님은 문안에서 나올 기미가 없었습니다. 마녀는 너무나 슬픈 마음으로 비보를 안고 이웃나라로 갔습니다. 당장 왕자를 찾으러 거울문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왕자와의 약속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마녀가 왕자의 개를 데리고 이웃 나라의 궁전으로 가자 그 개를 알고 있던 문지기는 별다른 것은 묻지 않고 그녀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마녀는 거리를 지나 임금님의 궁전으로 향하면서 예상과는 달리 성안에 즐거운 축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가 거울의 성에서 다친 채였고 셋째 왕자는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마녀는 꽃이 가득 든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농부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습니다.

  "저.... 오늘이 무슨 날인가요?"

  그러자 농부는 마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별 사람 다 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이웃나라의 공주님과 우리 왕자님이 혼례를 올리는 날이우. 삼일 전에, 왕자님이 공주님의 손을 잡고 우리 성문 앞에 나타나셨지 뭐유? 소식을 들은 이웃나라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셔서 두 번 다시 공주님이 거울의 성에 돌아갈 수 없도록 아예 이곳에서 혼례를 올리도록 주선하셨지. 그리고 오늘이 그 혼례날이유."

  그 말에 마녀는 갑자기 멍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분명 셋째 왕자가 공주님을 구하러 들어갔는데 공주님은 그새 다른 왕자님과 결혼이라니요, 마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공주님이 성에서 나오셨지요?"

  마녀가 묻자 농부는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벌려 놓았습니다.

  "아, 글세. 우리 현명하신 왕자님이 공주님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셨지 뭐유? 성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시려던 공주님은 이름 없는 나라 임금님의 병환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져서 펑펑 울었다지. 그래서 우리 왕자님이 말씀하셨다우. 거울 성에는 언제건 다시 오면 된다고. 그때는 아무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자신이 함께 와 주겠노라고, 그리고 거울도 좋지만 시간이 흐르는 데로 현재의 모습밖에 비춰주지 않는 거울 보다 아름다움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림을 공주님께 선물하겠다고 말이우."

  마녀가 농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그녀의 발 언저리를 맴돌고 있던 셋째 왕자의 개가 끙끙대더니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줄을 쥐고 있던 마녀는 깜짝 놀라서 끌려가다 시피 개의 뒤를 따라 뛰어갔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혹스런 일이라서 마술을 부리는 것조차 깜박 잊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간 개는 갑자기 훌쩍 뛰어 오르더니 넓은 대로에서 멈춰 섰습니다.    마녀는 개가 뛰어 오를 때 줄을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는 따라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대로변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오호라 이 녀석 무사히 돌아왔구나. 누가 데려다 주었니? 아니 네 영리한 그 코로 혼자 돌아 온 거냐? 기특한 녀석. 아, 공주님 놀래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무척 아끼는 개지요. 충실하고 순한 녀석입니다."

  마녀는 개의 목을 끌어안는 남자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는 바로 거울의 문안으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았던 셋째 왕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웃나라 공주님이 햇살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습니다.

  "이름 없는 나라 공주님과 셋째 왕자님의 성혼을 공표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커다란 뿔 나팔 소리와 축포가 터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에 마녀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마녀는 성으로 가는 셋째 왕자와 공주님의 뒤를 따라가려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쳐지다가 결국 모두가 가 버린 후에야 넓고 황량한 길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대낮의 거리는 하얗고 넓고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마녀는 밤의 어둠속보다도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치솟을 것 같은 뜨거운 눈과 창백한 얼굴을 하고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그때 조그만 꼬마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더니 호들갑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마녀다! 나쁜 마녀가 나타났다."

  "에구머니 무서워라. 공주님을 거울 성에 가두었던 그 마녀지? 악랄하고 못된 것! 썩 네 땅으로 꺼져 버려라!"

  "그래, 두 번 다시 여기 올 생각 말아라. 우리 왕자님들을 다치게 했지? 너만 보면 이가 갈린다."

  마녀는 사람들에게 쫓겨 거리를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람아, 네 날개를 나에게 빌려주려무나, 구름아 사람들의 눈에서 나를 가려 다오. 아아, 눈 시리게 빛나는 아름다운 태양아! 가서 그들의 혼인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비야 와서 내 눈물이 되어라. 두 번 다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외롭다고 말하지 않겠다. 내 성으로 돌아가자. 나는 영원히 검은 밤의 친구가 될 것이다."

  바람과 비와 구름과 태양은 즉시 그녀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마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 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하늘에는 해와 비가 오락가락 하는 아주 이상한 날씨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성안에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아서 셋째 왕자와 공주님의 옷은 단 한 방울도 젖지 않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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