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세상의 끝
이곳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차갑고, 깊고 영양이 풍부한 물 속에는, 아주 오래 전 바깥세상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전설의 동물이 남긴 거대한 뼛조각이 이정표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 뼛조각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순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놀랍고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들은 적이 없었다. 때가 되면 거칠지 않은 물살이 우리들을 스치며 움직였고, 때로는 거센 물결이 할퀴듯 지나갔다. 강하고 약한 물살의 흐름에는 박자가 있었고, 그 박자를 세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앞으로의 남은 박자들을 어림해보곤 했다.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작고 가냘픈 먹이들과 달리, 우리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모듬을 지어 살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만큼의 박자를 다 살아가고 나면 천천히 죽어갔지만, 그만큼 새로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우듯 태어났기에, 우리들은 늘 일정한 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쯤은 꿈에 잠긴 듯, 희미한 지각의 흔적처럼 촉수를 흔들며, 우리는 늘 반은 눈을 뜨고 반은 눈을 감은 듯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 물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 사이로 영양염류가 흘러들어오곤 했다. 무언가를 알고 느끼는 것은, 끝에서부터 끝까지 서로의 속삭임으로 이어졌다. 조류가 지나갈 때 마다 우리의 희미하고도 부드러운 촉수는 서로 맞닿으며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 아주 오래 전, 전설의 동물들이 예까지 들어와 놀았던 시절에는 예전에는 바깥세상과 이 세상도 이어져 있었지.
우리 중 누구도 직접 경험한 적 없는 먼 세상의 이야기들은, 그 속삭임으로 전해져 계속되었다. 아주 오래 전, 지금은 거대한 뼈로만 남은 그들이 이곳까지 자맥질을 하던 시절에는 저 위에 반짝이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고. 우리의 머리 위를 덮은 저 분홍빛의 띠가 층층이 자리리를 잡기 전, 아주 먼 옛날에는. 우리 중 일부는 그 이야기가 잘 만들어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고, 또 일부는 그 말을 정말로 진지하게 믿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다. 우리는 태어나고 살았으며 죽었다. 내가 언젠가 소멸할 그 날은, 내가 태어난 그 날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 그런 날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우리는 소멸을 맞아 마침내 이 모듬에서 떨어져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며,죽음이란 그렇게 세상의 끝 어딘가로 흘러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끝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우리들 중에서도 모험가는 있었다. 아주 드물게도 몇몇은, 대여섯이 서로 작은 무리를 지어 우리 모듬을 떠났다가, 수많은 박자가 지나간 뒤에 다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같았다. 우리들의 복족 아래에는 단단한 땅이 있고, 우리들의 촉수 위로는 차가운 물이 가득하지. 그 차가운 물 너머 어딘가에 죽음의 세계, 분홍빛 띠가 층층이 자리한 세계가 있다. 이 단단한 땅을 따라 계속 계속 움직여가면 위로 뾰족한 돌들이 줄을 지어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돌기둥, 흘러내린 물자국같은 흔적 가득한 장벽, 세상의 끝이 있지. 이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친 물살이 이곳과 다른 박자로 소용돌이치는. 누군가는 그 세상의 끝을 따라 기어올라가는 모험을 하기도 하였다 들었다.
대부분은 조금 올라가보다 어쩐지 숨을 쉬기 어려워져 돌아왔다고 하지만, 단 한 마리가 저 분홍빛 띠가 있는 곳까지 가 본 적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우리 세계이고 어디부터가 저 세상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분홍빛 띠 너머에도 무언가가, 우리와는 다르게 생긴 작은 물벼룩 같은 것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숨이 막히고 역겨운 그 분홍빛 띠에 촉수를 밀어넣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물속을 부유하던 것을 그의 동료들이 겨우 붙잡아 구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제 숨결로 그 속삭임을 우리 모두에게 전하기도 전에 죽었다. 그의 동료들은 죽은 그의 몸을 세상의 끝에서 떠나보냈는데, 그의 몸은 물 속으로 떠올랐다가, 세상의 끝의, 그 거친 물살에 휘말려 저 아래 쪽의 좁은 틈새로 영영 사라졌다고 했다.
이 세계는 닫혀 있었다. 세상의 끝 밖으로 나가본 이는 없었고, 단 하나의 통로일 것 같은 우리들의 위쪽은 우리에게는 독약과 같다는 분홍빛 띠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는 결코 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다른 어떤 선택지도 변화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복족으로 단단한 땅을 붙든 채 납작 엎드리고, 꿈에 젖은 듯 물살에 몸을 맡긴 채, 우리 모듬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물살의 박자를 세며 살아가면 족했다. 저 세상 밖에는 커다란 괴물이 있고, 깊은 골짜기가 있고, 이곳에는 살지 않는 어떤 신비로운 존재들이 지느러미를 펴고 헤엄쳐 갈지 모르지만,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는 독으로 가득 찬 분홍빛 띠가 놓여 있어 살아서는 결코 건너갈 수 없었다. 마침내 죽음이 다가와 그 띠를 건너갈 때, 우리는 짜거나 희박한 물의 층을 건너 거친 물살과 함께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곱씹으며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라고 해도 현실과 다를 게 없어, 나는 깨어나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때가 아닌데도 거친 물살에 내 온 몸이 흔들렸다.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속삭임들이 오고갔다. 무슨 일일까. 나는 눈을 떴다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섬광과 맞닥뜨렸다.
세상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바닥을 붙잡았던 복족에 힘이 풀렸다. 하마터면 죽은 이들처럼 저 너머의 세계로 흘러가버릴 뻔 했는데, 다른 이들의 촉수에 내 촉수가 엉켜 겨우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그런 빛은 처음이었다. 어슴푸레한 빛을 내는 발광충들은 있지만, 발광충으로 이 세상을 가득 메운다 해도 그 한 번의 번쩍임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속삭임이 촉수에 닿았다. 저런 것은 처음 봐.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은 정말로 처음 보았으니까. 거대한 발광충의 덩어리 같은 것이 바닥을 뒹굴다가 어딘가의 돌틈에 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도 남을 만큼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흙먼지의 콜로이드 사이로 산란하는 빛 가운데, 그 거대한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존재는 이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컸고, 네 개의 긴 다리와 짧고 둥근 돌기가 매달려 있었다. 둥근 돌기에서는 계속 무언가가 뽀글거리며 새어나왔고, 한편으로 돌기 뒤편에서는 액체가 번지고 있었다. 그 액체는,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올 때는 검게 보였지만 점차 붉게, 다시 희미한 분홍빛으로 변하며 사라져갔다.
죽음의 띠야. 누군가가 속삭였다. 죽음의 분홍빛 띠라고. 그 존재가 꿈틀거릴 때 마다 물살이 일었다. 우리들의 속삭임은 비명처럼 거칠어졌다. 독으로 가득 찬 분홍빛 띠가 물살 사이로 번져나갔다. 우리들은 모두 죽고 말 거야. 우리들의 비명에 박자를 맞추듯, 그의 네 다리가 허우적거렸다. 그의 돌기에서 뽀글거리며 새어나온 것들은 처음에는 위로 올라가다,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제야 우리는 거센 물결이 밀려올 박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거센 물결이 우리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검은 존재의 거대한 몸이 들썩였다. 뽀글거리던 것들은 위로 올라가다, 물살에 쓸리듯 아래로, 세상의 끝을 향해 쓸려나갔다. 그는 잔 가지가 달린 짧은 다리를 뻗어, 그 좁은 틈을 향해 내밀었지만 소용없었다. 저 너머는, 이미 죽은 이들 만이 닿을 수 있는 또 다른 세계. 그는 천지를 뒤틀 듯이 움직이다가, 자신의 돌기 끝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돌기에서 굵은 관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 검은 껍질이 벗겨지고 흰 속살이, 희고 울퉁불퉁하며 절반은 갈색 촉수로 뒤덮인 그 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울퉁불퉁한 쪽에 난 구멍들마다 붉은 체액을 토해내다가 결국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죽음의 띠를 넘어 우리의 세계로 왔을까.
그런 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그 불안이 속삭임을 타고 번져갔다. 우리의 세계 한가운데에 알 수 없는 자의 시체가 놓인 채로.
우리가 대대로 살아온 이 한결같은 세계는 순식간에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물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비린 맛이 났다. 그보다 더 나쁜 일도 있었다. 잠시였지만, 우리에게는 과하게 자극적인, 자신의 박자가 얼마 남지 않은 개체들이 순식간에 죽어버릴 만큼 독한 것들이 물속에 섞여 떠돌기 시작했다.
- 난 저것들을 맛본 적 있어. 분홍빛 띠 아래까지 기어올랐을 때.
오래 전, 자신의 박자가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모험을 떠난다며 세상의 끝 근처에 있는 돌기둥을 타고 오른 적이 있다는 누군가가 속삭임을 전했다. 죽음의 분홍빛 띠 아래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독성분이 우리의 세계를 뒤덮었다는 속삭임에, 지레 겁을 먹고 모듬을 떠나 도망치려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곳을 떠난다고 해서, 딱히 달리 살아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자꾸만 살갗이 벗겨져 쓰라렸다. 누군가 견디지 못하고 해면 속으로 몸을 밀어넣어 보았고, 그만큼 상처를 덜 입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잠시 모듬에서 벗어나 너도나도 뒤집어 쓸 해면을 구하려 애썼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거센 물살에도 쓸려나가는 일 없도록 바닥을 꼭 붙잡는 것 외에 거의 사용할 일이 없었던 복족을 움직여, 해면이든 무엇이든 뒤집어 쓸 것을 찾아 멀리 나아갔다.
그 존재의 근처에서, 우리의 세계에 없었던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어느새 우리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던 빛의 덩어리가 내쏜 빛을 받고 있던, 세상의 끝과도 이어져 있던 바위벽이, 물 색깔 같기도 하고 빛의 색깔 같기도 한 오묘한 빛깔로 군데군데 물들어 있는 것을 본 것은.나는 그 빛이 부담스러웠다. 지난번, 너무 놀라 무리에서 떨어져나갈 뻔 했던 것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파랗고도 노르스름한 얼룩이 무엇인지 굳이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다 저 빛은 내가 아는 빛과는 달랐다. 그 거대한 존재가 이곳에서 쓰러지고, 저 빛이 우리의 세계를 비추면서부터, 이곳의 수온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특히 저 빛이 비치는 곳은 유난히 쉽게 가열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모험가의 기질 같은 것은 없었고, 기분좋은 서늘함이라고는 없는 미지근한 바위벽을 굳이 기어올라가 저것들을 조사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참동안 촉수를 꿈지럭거리며 그 위를 바라본 끝에 굳이 그 번거로운 일을 하고 말았다. 물살의 흐름이 나의 촉수들을 스치며 수십 번의 박자를 세는 동안, 나는 꿈틀거리며 있는힘껏 아랫배에 힘을 주고 바위벽을 붙잡아 올라갔다. 마침내 나의 촉수 한 가닥이 그 처음 보는 노르스름한 것에 닿았을 때, 나는 이것이 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머지 촉수들을 바르르 떨었다.
그 노르스름한 것들은 먹을 수 있었다. 적어도 먹고 죽지는 않았다. 일찍이 먹어본 적 없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독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별 맛은 없었지만 뱃속이 편했다. 나는 저 기묘하고 처음 보는 것들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당분간은 비밀로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속삭임이 우리의 촉수와 촉수 사이를 거쳐갔지만, 나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어디에 아직 해면이 남아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는 것처럼. 숨이 막혀. 물맛이 이상해.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갔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면이 없어도 살 수는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이들이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는 해면이 필요했다. 어린 것들과 죽음이 가까운 이들이 하나둘씩 죽어갔지만, 새로 번식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서로 해면을 숨기고, 더러는 빼앗았다. 속삭임은 이제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다. 가끔, 비명과 탄식이 스쳐갈 뿐이었다.
우리의 촉수에 휘감기는 물이 아주 조금 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살아남은 이들은 이미 그 맵고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져 있었다. 해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곳마다 죽은 살이 떨어져나가고 새 살이 돋아났다. 우리들의 죽은 살점은 물살에 쓸려 밀려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왔고, 우리는 전에 없던 먹이들에 섞여 돌아온 그 살점을 먹었다.
그랬다. 전에 없던 먹이들이 생겨나 있었다. 지난번 내가 바위 기둥을 기어올라 맛보았던 것과 비슷한 무언가가. 우리가 그동안 먹었던 염류나 부유동물과도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것들이. 변화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다른 세상에서 넘어와 저기 쓰러져 죽은 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우리의 세계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참,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던 우리들의 속삭임이 조금씩 다시 활발해졌다. 발광충을 수도 없이 모아놓은 것 같은 저 빛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저 존재가 흘린 붉은 액체가 우리들의 새 먹잇감이 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 어린 것들과 일찍 죽어버린 이들을 대신하여, 다들 번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제 몸에 머지 않아도 분리되어 따로 살아갈 새 개체를 싹처럼 틔워내면, 다른 이가 그 개체를 제 체액으로 수정시켰다. 수정이 된 채 어느정도 자라난 싹은 꿈틀거리며 떨어져 나가 복족으로 바닥을 짚었다. 나 역시도 싹을 틔워 보려 했지만, 한번 그렇게 분열이 일어나면 몸이 회복될 때 까지 당분간은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말에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으레 주변에서 싹을 틔울 때 서로 돕듯, 몇몇을 수정시켰다.
- 너는 분열해본 적 없지?
수정이 끝날 때 까지 곁에 있어주는 동안 속삭임이 전해졌다. 난 분열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다고 속삭이자, 침묵 끝에 조심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 아무래도 박자가 이상해진 것 같아.
예전에는 한번 싹을 틔워서 분열할 때 까지 큰 물살이 적어도 여섯 번은 왔다갔다 했는데, 지금은 스무 번 가까이 큰 물살이 오간 뒤에야 분열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른 이들에게도 넌지시 물어보았다. 다들, 박자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말들을 조심스레 속삭여왔다.박자만 세어 보면 이미 죽었어야 할 이들이 아직도 살아있고, 전에는 여기서 저 전설의 동물이 남긴 뼛조각까지 갔다가 돌아오고도 남을 박자 동안 반밖에 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어린 것들이 계속 태어나, 예전보다 훨씬 많은 수가 이곳에서 모듬살이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감히 앞으로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조심스레 속삭이려 하면, 다들 그런 화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다른 이야기들을 앞다투어 꺼낼 뿐이었다. 이해한다. 속삭임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무서우니까. 하지만 정말 무서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는, 그렇게 우리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영영 죽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아주 조금씩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씩 커지다가, 어느날 되살아난 듯 바닥에서 떠올랐다. 그가 살아났어. 공포어린 속삭임이 물결처럼 밀려왔다가 되돌아왔다. 그가 우리 모두를 죽일지도 몰라. 그 속삭임이 마침내 우리 모듬 전체를 뒤흔들고, 갓 분열한 어린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성체들이 바삐 움직여 도망치려 할 때, 그 존재는 떠오르며 몸을 뒤집다가 세상의 끝 가까이, 바위기둥 바로 아래에 매어달린 뾰족한 곳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토록 거대한 존재가 부딪치고 다시 땅으로 내려앉자, 지축이 흔들리고 땅이 울렸다. 그리고 바위벽에 매달린 뾰족한 돌조각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존재의 몸뚱이에 내리꽂혔다.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지나간 뒤에, 존재의 배는 다시 납작해져 있었고, 돌조각이 꽂힌 자리에서 붉은 액체와 함께, 들큰하고 고소한 액체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바위벽의 윗부분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며 벽 중간까지 커다란 동굴이 입을 열었다. 물살은 거칠어졌고, 더 이상 우리는 박자를 셀 수 없게 되었다. 존재의 배에서 거품이 일었다. 그 거품은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물살이 거칠어지면 아래쪽으로 새어나갔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동굴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팔락이며 밀고 들어왔다. 그들이 오가면서 전에 없던 영양염류와 부유생물들이 함께 밀려들어왔지만, 좋은 일이라고는 없었다. 피식체가 늘어난 것 보다, 새로운 포식자가 생겨난 것이 문제였으니까. 우리는 더 이상 평화롭게 모듬을 짓고 살 수 없었다. 서로서로 다시 복족을 움직여, 저 존재가 처음 이 세계에 나타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때처럼 바위 틈 사이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모조리 잡아먹히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서로 가까이 닿으면 그때마다 어떻게든 자손을 늘려나갔다. 분열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나 조차도 몇 번인가 싹을 틔우고 길러내어 내 몸에서 갈라 떠나보냈다.
물고기들은 존재의 살점을 파헤치고 뜯어먹었다. 물은 점점 더 비려졌지만, 거센 물살이 들어올 때 마다 전과는 다른 맛이 나기 시작했다. 바깥 세상은, 죽은 뒤에 가는 세상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바깥 세상에는 저 물고기들이 있고, 이곳과는 다른 염류와 부유물이 있을 뿐이다. 어차피 이 곳에 있다 한들, 저 갑자기 나타난 포식자들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 움츠려 살아가는 것 밖에는 다른 답은 없었다.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 나는 알고 싶었다. 그 다음을, 저 너머의 세상을. 나는 물고기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조심,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끝이라 부를 수 없을 저 벽을 향해 움직여갔다.
빛이 닿은 벽은, 이전에 보았던 노르스름한 것들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그 노르스름하고 보드라운 것들을 잘못 밟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벽을 따라 기어올라갔다. 벽을 기어오르다 잠시 멈추어 촉수로 노르스름한 것들을 뜯어먹다가,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위에 자리했다는 그 죽음의 분홍색 띠가 예전과는 달리 희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있는, 갑자기 나타나 이 세계를 이만큼이나 바꾸어버린 그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살갗은 이미 꽤 많이 찢겨져 나갔고, 희멀겋고 검붉은 속살이 그가 이곳에 가져온 선명한 빛줄기 아래 드러나 있었다. 닫힌 세계를 건너며 그는 결국 죽고 말았겠지만, 그 존재의 죽음과 함께 굳게 닫힌 이 세계의 문은 다시 열렸는지도 모른다. 속삭임과 속삭임을 타고 전해졌던,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처럼.
그로 인해 세상은 바뀌었고,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던 앞으로의 모든 날들은 모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바뀌어 버렸지만. 나는,낯선 노르스름한 것들을 몇 입 더 뜯어먹으며 다시 위로, 천천히 기어올랐다. 밖이 있다면, 다른 세상이 있다면, 또 다른 날들도 있을 것이다.나와 함께 모듬살이를 하던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죽은 뒤에야 그 거친 물살에 실려 넘어갈 수 있다던 그 다른 세상을 향해서, 나는 천천히 벽을 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