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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무사

서계수

 

전쟁을 끝낸 왕을 위해 신료들은 존호를 지었다. 현왕은 무영왕(無影王)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왕은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비대한 몸이었으나 건강엔 이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하늘이 보우한다면 천수를 누릴 터였다. 어째서 생전에 신료들로부터 그림자 없는 왕이란 이름을 받아냈는가?

“이해가 되지 않나?”

자서의 물음에 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현왕께서 그리하신 까닭은 짐작이 돼.”

“대체 뭘?”

예주와 자서는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왕의 치세가 끝나면 신하들이 알아서 시호를 지어다 바칠 것인데, 생전에 존호를 달라 어린아이처럼 떼쓴 까닭이 이해가 된다?”

장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무영왕이란 이름은 너무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사방천지에 그림자 없는 것은 귀신 뿐….”

자서가 부드럽게 끊어냈다.

“말이 과하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온사방이 빛이란 의미이니, 전하께서, 아니 일국의 왕이라면 누구든 바라마지 않을 이름임은 분명해.”

팔짱을 낀 장영이 대꾸했다.

“내가 왕이라면 그런 이름은 바라지 않을 거다.”

자서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렸다.

“너는 왕이 아니다. 이 나라의 왕, 전하의 여식이지. 그리고 아무리 전하의 여식이라 한들 더 이상의 오만방자함은 간과할 수 없다.”

장영이 픽 웃었다.

예주가 장영을 보자, 장영은 다시 웃지 않았다. 자서를 마주보는 척 태연한 장영의 입꼬리 한쪽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예주는 보았다.

예주는 그 미약한 떨림의 의미를 알았다.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예주의 물음에 자서가 대꾸했다.

“그래, 끝이다.”

소리 없이 일어난 예주는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갔다.

“…….”

“나는 아직 안 끝났는데.”

자리에 앉은 채, 장영이 자서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 건방진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자서에겐 더는 장영의 반항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전하께서 무영왕이란 이름을 받으신 것은 스무 해도 더 전의 일이다. 오늘 얘길 더 나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자서는 힘없이 항의했다. 장영의 눈빛이 일순 사나워졌으나, 사나움은 빠르게 체념으로 바뀌었다.

“바꿀 수도 없는 것에 대해 배우는 이유를 모르겠다.”

저를 따라 일어난 장영의 등을, 자서는 어린 아이 달래듯 토닥여주었다. 같은 나이임에도 어른스러운 예주와 달리, 자서에게 장영은 귀여운 고집불통 동생같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너, 또 나를 그리 보는군.”

다시 사나워진 장영의 음성이 자서의 귓가에 울렸다. 자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장영의 어깨를 한팔로 감싸안으려 했으나, 장영은 그 팔을 걷어냈다. 명백한 거부의 의사였으나 뿌리쳤다… 고 말하기엔 부족했던 것이, 매몰찬 기색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서는 그것으로 족했다.

“오전엔 검열 일로 바쁜데 오후에까지 내 이야길 듣느라 피곤하겠구나. 이만 가서 쉬어라.”

자서가 저를 대할 때면 묘하게 어르는 듯 하다는 것을 장영이 눈치 못 챌리가 없었다. 그것을 분하게 여기면서도….

“…알았다.”

창작부에서… 아니, 이 나라 왕족과 귀족 중에서 저를 피붙이처럼 대하는 것이 자서 뿐인 것 또한 눈치 챈 터였다. 정말로, 정말로 인정하기 싫었으나, 이따금 장영은 고작 두 해 먼저 태어난 자서의 내리사랑이 몹시 기꺼웠다.

자서가 미닫이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걷다, 이따금 열린 유리창이 보이면 닫았다.

“이제 가을인가. 제법 날씨가 쌀쌀하구나.”

장영이 열린 창문을 닫는 것을 보던 자서가 중얼거렸다.

장영이 날선 반응을 보였다.

“시간 가는 얘기는 그만하지. 나도 알아.”

“음? 아… 그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미안하다.”

자서는 바로 사과했다. 장영은 잰걸음으로 앞서더니, 이내 평상시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자서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은 듯했다.

자서는 장영의 뒤통수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하나로 길게 땋아내린 머리칼이 걸음마다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장영은 늦가을에 태어났다. 그건 자서가 장영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식 중 하나였다.

올해 늦가을에 장영은 태어난 지 스무해 째, 즉 성년을 맞이한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다. 무영왕에겐 자식이 무수히 많았고, 부왕의 관심을 끌기에 장영은 미모도 교태도 가진 것이 없었다.

아니, 앞서 말한 것은 의미가 없다.

애초 장영은 무영왕의 자식이 아니었다. 장영이 소문에 맞설 만큼 머리가 자라기도 전에, 그러니까 장영이 저를 가둔 독채에서 아장아장 걸을 즈음 장씨 집안 내에선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저것’은 아기씨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증거일 뿐이다. 무영왕의 사생아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대우를 해도 좋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장영의 생일을 알았을 친모, 아기씨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떠나기 전에 집안 사람들에게 제 딸을 간곡히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아기씨는 죽은 물고기를 보는 눈으로 딸을 보았고, 죽은 물고기 대하듯 딸을 대했다. 즉, 궤짝에 가두어 길렀다. 아기씨의 유모가 아기를 불쌍히 여겨 젖을 먹여 살렸다. 아기씨의 죄가 들키기 전까지, 장영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기씨의 죄가 들킨 후에는 ‘아직 장씨 집안에 딸이 없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이제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과거였기에 장영은 그때에 대해 누군가 물어도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사람들은 몰랐다. 아이가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어린 장영 또한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하다 생각했다… 한 사람 외에는.

자서는 그 이가 아니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장영을 향해 자서가 외쳤다.

“내일 보자꾸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문은 20주년 기념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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