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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20XX 회령, 경원, 라선

 

 

학길은 한밤의 고요 속에서 잠을 깼다. 발가락의 끝이 한마디씩 곱아있었다. 언 흙바닥 위에 천막을 치고 누워 등 언저리는 군데군데 아렸다. 전날 부지런히 땅을 골랐으나 도중에 나무뿌리가 나오는 바람에 그것을 자르고 뽑으면서 힘이 다하고 말았다. 그마저도 어린 손자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학길은 곁에 누운 솔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여러모로 자신과 닮은 점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뼈도 굵고 허리도 두꺼웠다. 찾아 먹인 것이 별로 없는데 단단히 붙은 살이며 그 아래를 도는 피며 제 몸을 이루는 걸 어디서 마련했는지 학길은 그것이 종종 궁금했다. 손자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한 뒤에 조심스레 모포로 발을 덮어주었다. 천막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고 새벽이었다.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많지 않았다. 모닥불이 하나 가까이서 지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환하고 뜨거운 것이었다. 보초를 맡은 군인들이 불 곁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학길은 저들과는 별로 붙어 있고 싶지 않았다. 입고 있는 행색이나 말투 때문에 오래전 이 땅에 있었던 어떤 나라가 생각났고, 자연히 숨통이 갑갑해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 밤 한기가 심해 불 없이는 견딜 수도 없었다. 다가가자 그들이 고개를 돌렸다.

“동지. 왜 그렇습니까?”

“내 통 잠이 안 와서.”

“숭한 걸 봐서 그렇습니다.”

병사 한 명이 낮에 본 시체를 언급했다. 경원으로 향하는 길에 행렬은 낮은 둔덕 아래로 시체 대여섯 구가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면서 바짝 말라 미라가 된 시체들이었다. 선두에서 사람이 내려갔다. 한참이나 품을 뒤지며 건질 게 없나 살피더니 낡고 홀쭉한 전대 하나만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행렬은 다시 출발했고 앞쪽으로부터 소식이 전달되었다. 다롄시 출신의 피란민들이었다고. 누군가 공허한 목소리로 따라 중얼거렸다. 다롄에서 왔단다. 다롄에서. 학길은 그 말이 몹시 기이하게 들렸다. 학길이 알기로 다롄은 지금 바다였고 그렇게 된 지가 이십 년이 넘은 곳이었다. 아무도 그곳에서 올 수는 없었다.

불티가 튀어 생긴 잔불에 학길은 곱은 발가락을 녹였다. 불을 땐 곳 주변은 언 바닥이 녹아 흙이 포슬했다. 학길은 생각했다. 자신도 타고 타서 더 타지 않는 무언가가 되면 이렇게 될 것인가. 육신에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만 학길은 지난 예순여섯 해 동안 얼거나 포슬해져선 안 되는 몸이란 게 영 성가셨다. 이곳의 한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한밤이었다. 학길은 손가락과 발가락 몇 개, 귀 한쪽이 동상으로 상한 상태였고 뺨에도 불그스름한 홍반 자국이 남아 있었다. 팔과 다리엔 난로에 데인 자국이 많았다.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상태. 학길은 삶을 그렇게 이해했다. 불 없이는 살 수 없으나 불 속에서도 살 수 없는. 사는 동안엔 시체를 무수히 보았다. 굶어 죽은 몸과 재해에 죽은 몸, 싸우다 죽은 몸과 질병에 걸려 죽은 몸을 보았다. 살았을 땐 제각각이었으나 죽고 나면 숱하고 한 덩이에 불과한 몸들. 그중에 부모가 있었고 형제가 있었고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아들이…….

학길은 잔불을 발로 꺼트리며 생각을 끊어냈다. 수십억이 죽어 나간 세상이었으니 저 혼자만 기구할 일은 아니었다. 


이튿날 행렬은 룡계리를 벗어나 오룡천을 따라서 행군했다. 경사가 급한 길인 데다 돌이 많아 수레를 움직이는 일이 버거웠다. 행렬은 경원의 군인들과 회령에서 온 인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계작전을 끝내고 복귀하는 소대 병력에 짐 나르는 인부 몇 사람이 얹힌 것이었다. 정오가 지났을 무렵 솔호가 학길에게 다가와 물었다. 언제쯤 경원에 도착하느냐고. 학길은 지도를 보지도 않고 여기가 룡문리이니 이미 경원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솔호는 혼잣말처럼 뭐이 보이진 않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학길은 다시 룡문리와 룡현리에는 논밭밖에 없어 이 계절엔 사람이 별로 머물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룡현리를 지나야 룡북구와 고건원구가 나오고 그 중 고건원이, 경원에서 가장 큰 행정구역이자 이 행렬의 최종 목적지였다.

고건원엔 탄맥이 있어 학길도 석탄을 나르기 위해 들른 적이 여러 번이었다. 경원에서 갈탄을 도매로 떼 와 회령에 내다 파는 일을 크게 하는 상인이 있었는데 그가 학길을 신뢰해 매번 일을 맡겼다. 쉰 살이 조금 넘은 여자였다. 공화국이 망하기 전부터 국경지대에서 밀수든 뇌물이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장사하며 부를 축적해온 돈주로 유명했다. 학길을 오라바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지만 정작 삯을 치를 때는 말수가 적어지고 셈이 철저해 어딘가 계산적이란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그가 보름 전에 학길에게 찾아왔다. 조심스레 일을 부탁했다. 경원 일대에 혁명인지 뭔지 하는 소란이 터졌는데 큰 싸움으로 번진 것 같지는 않다고, 그냥 세력만 바뀐 것 같으니 가서 탄을 받아오는 김에 동향도 좀 살펴줄 수 있겠냐고. 평소보다 세 배 많은 삯을 제시했다.

혁명.

학길은 바로 앞에서 행군하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붉은 현수막을 군장에 부대기처럼 달아둔 자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주체 110돐’이라는 글귀가 여러 번 접혔다 펼쳐지며 학길의 눈길을 끌었다. 주체년호 110년. 그것을 기념한다는 뜻이었다. 서기로 치면 2020년이나 2021년쯤, 아마도 그해 열병식이나 국가행사에 쓰인 선전물이었을 거라고 학길은 짐작했다. 왜 저런 것을 매달고 다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학길이 어린 시절 질리도록 본 당의 선전물이 저 자에겐 영검한 유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너무 낡고 해져 누더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학길은 고개를 크게 돌려 주위의 군인들을 전부 조감했다. 길이 위험하지만 않았다면 학길은 결코 이들과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스물에서 서른 살 정도로 나이가 몹시 어렸으며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굴었으나 학길은 그런 태도마저 영 거북스럽기만 했다. 틈만 나면 꺼내는 ‘재결성된 공화국’ 이야기도 싫었다. 대체 누가 그것을 원하며 만들 만큼 힘이 세단 말인가.

 

 

학길에게 조선인민공화국은 십수 년 전 망해 사라진 나라였다. 그 뒤로 학길은 쭉 나라라는 것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회령 지역에서 계속 살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곳을 나라로 여기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당에서 내려온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학길은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명확히 기억나는 내용은 없었다. 그즈음엔 국경을 단단히 걸어 닫고 밀입국자를 경계하란 명령이 비슷비슷한 맥락으로 하달되곤 했었다. 재해가 끝도 없이 몰아치고 해수면이 감당 못 할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학길은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회령 국경 소초에 걸린 선전물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다녔다.

‘한 발자국만 건너와도 주체의 핵탄이다.’

만주에서만 수천만의 수재민이 발생해 회령교두에 서서 용정을 바라보면 피란민들이 쳐둔 움막이 새까맣게 보일 지경이었다. 학길도 고향 청진이 바다에 잠겨 회령으로 강제 이주해온 처지였으므로 그들에게서 느끼는 비애가 적지 않았다. 당은 난민을 단 한 명도 수용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누가 건너올라치면 군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총을 쏴 그들을 돌려보냈다.

“야. 정말 세상이 망했나 보다. 어찌 저 밖에서 여기로 건너온다 하니.”

국경경비대원 가운데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학길은 그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똥이 튈까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평양도 물이 들어와 만수대고 려명거리고 다 초토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랬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지역위의 소식이 끊기고 당의 서한이 사라졌다. 시기가 뒤숭숭해 다들 가쁘게 살 방편을 마련하고 다녔는데 회령에 연줄이 없었던 학길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달러를 조금 구해 초급당비서였다는 사람을 찾아갔다. 가보니 그쪽 집은 세간이 벌써 정리된 모습이었고 막 보따리 들고 떠날 참에 자신이 찾아온 듯했다. 그는 숨기지도 않고 저는 도강할 터이니 따라오려면 오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어차피 갈만한 사람들은 진작 비행기를 타고 사천까지 날랐다고.

그런 조선을 다시 만든다고.

학길은 눈앞에서 펄럭이는 선전물도 그걸 짊어지고 가는 병사도 영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여기 모인 장정들 가운데 공화국을 제대로 기억할 만큼 나이가 있는 병사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행렬은 비탈을 벗어나면서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손자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고자 그쪽을 바라본 학길은 솔호가 어느 새부턴가 어깨에 소총을 멘 채로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한 고생 말고 총을 수레에 실으라고 말했다.

“비적 떼가 오면 어찌함까.”

솔호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손바닥이 하얘지도록 아랫총몸을 움켜쥐고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놓기 싫은 눈치였다. 학길은 이미 골짜기를 벗어났고, 설령 근방에 강도들이 있더라도 이 많은 군인을 공격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솔호는 여전히 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집부리지 말고 총 놓으라.”

“……”

“내 말이 탄내나니?”

마지못해서 한다는 투로 솔호가 총끈을 풀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신경질적이고 부주의했다. 반항의 뜻이라는 걸 알았으나 학길은 더 다그치지 않았다.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학길은 지난해 중풍을 앓고 난 뒤로 몸 반쪽이 성치 않았다. 솔호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짐승을 부리는 일도 수레를 끄는 일도 혼자선 버거웠다. 솔호는 요사이 불쑥 자라 학길과 키가 엇비슷했고 계속 자라고 있으므로 조만간 학길을 넘어설 게 분명했다. 이따금 바깥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는 몸에 돋기 시작한 굵은 체모를 아무에게나 서슴없이 드러냈다. 또래와 세워놓고 보면 늘 두 살에서 세 살가량 나이가 많아 보였다. 주위에서 솔호를 아는 이웃들이 그 아이를 이야기할 때마다 은근한 부러움을 내비치곤 한다는 걸 알았으나 학길은 손자가 자랑스럽지 않았다. 외려 가끔 징그러웠고 대개는 근심스러웠다. 속머리는 아직 어린 것이 몸에 너무 큰 옷을 입은 사람처럼 무언가에 휘둘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학길은 아들인 겸호가 열네 살에 어느 정도로 의젓했는지 곱씹어보았고 이어서 자신이 그 나이 때 청진서 중학교에 다녔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 엄한 태도는 솔호에게 불공평했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다른 누군들.

 


고건원 구내 초입의 도로는 빙판처럼 갈라져 있었으나 시가지는 예상 밖으로 멀쩡했다. 너무 멀쩡해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구내 경계에서 검문을 받은 일을 제외하면 이전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바둑판처럼 놓인 중심거리와 콘크리트로 지어 올린 다층건물시설, 동북부에 뻗은 산봉우리인 마요봉과 그 밑에 고건원 공업대학, 고건원 문화회관, 산업병원. 석탄산지에 세운 계획도시의 풍경이 여전히 구태의연했다. 그것을 둘러보는 중에 열 살쯤 된 사내아이가 양손에 풀꽃을 쥐고 와 학길에게 건네주었다. 등에 88식 자동보총을 메고 있었다.

“겁 아니 나니.”

학길이 물었다. 아이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혹시 말을 못 하는가 싶어 그냥 지나치려 할 즈음에 아이가 알 수 없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다 도망쳤슴.”

그 말뜻이 궁금해 학길이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 했으나 하필 그 순간 사무원이 회령에서 온 인부들을 불러 모았다.

“아바이들. 따라오시오.”

학길은 사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초대소로 이동했다. 이 층짜리 복도식 건물이었다. 방에 들어서니 벽은 벼락 줄기처럼 금이 가 있었고 창틀에는 유리가 없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들이쳤다. 학길처럼 경원에 짐을 받으러 온 인부인 윤보와 지창이 방에 함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학길보다 열 살가량 어렸지만, 똑같이 늙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외양의 노인들이었다. 방에서 한 시간 정도를 지냈을 때 안내원이 찾아와 불편한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윤보가 불도 안 때는데 창이 다 뚫려서 너무 춥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안내원이 어디서 나무 널빤지를 여러 개 구해와 창틀을 막아주고 떠났다. 전등 대신 쓰라고 호롱 등잔 하나를 남겨주었다. 방을 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일행은 춥더라도 낮엔 창 하나를 열어두기로 합의하였다.

윤보가 끌끌 혀를 찼다.

“개나발 부는 소리만 해대니 이래 산다.”

지창이 그 말을 듣고는 그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경원 경흥이야 본래 이랬지.”

이 지역은 원래 못 먹고 못 사는 곳이었다고. 안 그래도 살기가 힘든 곳인데 바닷물이 올라오면서 논밭이 거의 잠겨 굶어 죽는 사람 많은 곳이었다고. 지창이 그 말을 내뱉은 덕에 학길은 청진에 있던 수성평야를 떠올렸다. 해안을 따라 난 길고 좁다란 논에다 볍씨를 뿌리고 낙엽을 묻었던 어린 시절을. 뻘처럼 무겁고 찰기가 있는 수성의 흙에는 아무리 모를 빽빽하게 심어도 벼가 자라고 익었다. 그 좋은 땅들을 잃어버린 사실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송정동의 아버지 집도. 겸호를 데리고 체육 경기를 보러 갔던 청진 경기장도, 물난리에 잃어버린 가족 친지들의 추스르지 못한 뼈도 모두 거기 물속에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성니메.”

지창이 학길을 불렀다. 예전 경원의 모습을, 성내동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학길은 손을 내저었다. 너무 피곤해 눈을 붙일 테니 누가 찾아오면 깨우라 말하고 돌아누웠다.

학길이 눕고 난 뒤로 하늘서 겨울비가 조금 뿌렸다. 창공이 흐려지고 쌀쌀해져 누운 바닥에서도 눅진한 습기가 올라왔다. 자연히 선잠을 깼는데 때마침 안내원이 돌아왔다. 옆에 일행이 있었다. 수염 숱이 많아 왼쪽 구레나룻부터 오른쪽 구레나룻까지 하관을 전부 털로 덮은 중년의 사내였다. 새치가 군데군데 있어 터럭의 반이 희고 반은 검었다. 키는 중키였지만 솔호처럼 몸이 두꺼웠다. 사내가 방안을 스윽 둘러본 뒤에 모某가의 평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래 여기 보위부 대장이요. 보기 드물게 평안도 말씨를 쓰는 사내였다. 평일은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그럼 갑시다, 하고 말했다. 벽에 대고 혼자 말하듯 거침이 없었다. 어딜 가느냐고, 지창이 다급히 일어서며 물었다.

“탄 가지러 온 거 아니오? 갑시다. 탄 줄 테니까네.”

 

 

평일은 말투만큼이나 걸음도 거침없었다.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몸 반쪽이 불편한 학길로서는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뒤에 바짝 붙었다. 가는 동안에 평일은 고건원 탄광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화국 때 채산성이 맞지 않아 버려둔 곳을, 시절이 이렇게 되고 나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캐 먹고 살았는데 일 년 전엔 꽤 굵은 탄맥까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원 사람들 다 맥여 살릴 만한 량이었는데, 탄주가 혼자 먹겠다고 증산을 안 하다 사달이 났지.”

학길은 되도록 흘려듣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한편으론 꽁무니에서 따라오는 안내원이 거슬려 자꾸만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그가 솔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처음엔 무미건조한 대화로 시작했지만, 나이를 안 뒤로는 집요하게 관심을 보였다.

“열넷? 어린 동무는 뭐를 먹고 그리 컸는가?”

“쌀 먹지. 무시르 먹겠슴까.”

“야, 공화국 전사감이다. 일꾼 하면 로력영웅도 되겠다.”

학길은 곁눈질로 안내원을 흘겼다. 헛바람 넣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솔호는 대화가 싫지만은 않은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그게 못마땅해 이쪽으로 오라고,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외치자 표정을 굳히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야트막한 언덕을 백보 더 걸어 올라가서 탄광의 입구가 나왔다. 산 중턱에 갱도를 내고 침목으로 연결한 궤도를 통해 안에서 채굴한 탄을 운반하는 구조였다. 탄은 탄차에 실려 가공 시설로 옮겨졌다. 평일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연간 10만 톤도 생산이 가능한 규모라고 설명했다. 굳이 이 모든 걸 보여주기 위해 일행을 끌고 온 듯했다. 학길은 의문스러웠다. 창틀에 끼울 유리도 못 구하는 사람들이 무슨 역량으로 이런 산업 시설을 마련했는지. 때마침 탄차 너머로 누가 지나가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학길은 자세히 그를 바라보았고, 곧 그가 피부는 희고 머리털은 노란 백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진녹색 외투에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여자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여자는 조선 사람 같았다. 맵시가 묘하게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학길이 평일에게 물었다. 저들이 누구기에 여기 있는지. 평일은 별로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인지 아주 짧게 답변을 해주었다.

“포로요.”

학길은 왜 외국인들이 포로로 잡혀 있느냐고 다시 캐물었으나 평일이 서늘한 눈으로 쏘아보는 바람에 질문을 멈춰야만 했다.

그 이후로 일행은 부쩍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대화도 웃음도 없이 걸어 다녔다. 안내원이 의미 없는 안부 인사 같은 것으로 말문을 터보려 시도했으나 짧게 이어지다 그칠 뿐 전과 같은 분위기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중간부터는 평일도 탄광을 보여주는 일에 감흥을 잃었는지 설명이 몹시 간략해졌다. 하지만 구내로 내려가기 직전에는 미리 준비해둔 듯한 긴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경원에 스스로 탄주炭主라 부르던 놈이 있었디요. 룡북이고 고건원이고 졸개들 풀어놓고 탄광이 지 물건이라고 우기던 개간나 반동 새끼였는데. 야래 새끼도 있지 않겠어? 이 새끼도 새끼를 까니까네. 어찌나 징그럽게 깠는지. 졸개 반이 아들이고 나머지 반은 사위야. 내래 직접 목을 땄지. 라선으로 달음치려는 걸 잡아다가. 기켔더니 새끼 졸개들은 싹 튀어서 증산으로 들어갔소. 나도 빨치산 해봤디만은, 산에 들어가서 먹을 것 떨어지면 고거이 비적이고 도적이야. 아바이 지금 나가면 죽소.”

 


밤중엔 호우가 내렸다. 온 사방에서 물 튀는 소리가 들렸고 바닥에 검은 탄가루가 섞여 있어 흙 사이로 검은 구정물이 흘렀다. 학길은 석탄을 받았다. 셈을 여유롭게 해주어 수레를 가득 채울 만한 양이었다. 바로 회령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평일의 경고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말고 이틀 뒤에 움직이라고 조언했다. 이틀 뒤 새벽에 라선으로 외국인 포로들을 송환할 터인데 그들도 룡계리까지는 가는 방향이 같으니 행렬에 얹혀가란 말이었다.

일행이 다시 초대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학길은 모두 잠든 심이야 홀로 안뜰에 나와 처마 아래서 마요봉을 바라봤다. 기온은 더 내려갔으나 거주구 곳곳에서 갈탄을 때 공기는 후끈했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불어 학길은 탄에서 나오는 매캐한 냄새, 돌을 태워 불을 지필 때 나는 특유의 악취를 맡았다. 밤은 검어 비도 검었다. 온 세상에 검은 비가 내리고 있는 듯했다. 학길은 발걸음을 소리를 들었다. 복도 끝에서 작은 불씨가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한동안 응시한 끝에 학길은 그것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형상임을 알 수 있었다. 진녹색의 외투를 입은 여인, 학길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도 기척을 느꼈는지 학길을 보았다.

“저를 아시나요.”

어색한 대치 끝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조선 말씨였다. 학길은 그를 몰랐다. 다만 이름을 알았다. 유라. 낮에 탄광에서 백인 남자가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러시아 이름 유리Ю́рий의 애칭이기도 했으나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흔히 쓰이는 이름이니 아마도 조선 이름 유라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흘러가는 말을 들은 것이라 확실하진 않았다. 유라, 혹은 유라. 어느 쪽이든 조선 글씨로 쓰면 유라. 다시 생각해보니 이름조차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었다. 학길은 모른다고 답했다. 같은 조선 사람인가 싶어 오래 봤다고, 미안하다고.

“아니에요. 선생님. 저도 아는 사람인가 싶어 물었습니다.”

유라는 정중하게 한 대 피우겠냐며 담배를 권했다. 포로에게서 물건을 함부로 받는 행위가 위험한 일임을 학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냄새를 맡고 나니 한 대가 몹시 간절했다. 주변을 살핀 뒤 슬쩍 받았다. 유라가 반쯤 태운 자신의 꽁초를 성냥처럼 손에 들고 불을 옮겨 주었다. 불티에서 불티로.

“남조선서 왔소?”

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고려인이냐고 묻자 그것도 아니고 한국에 살던 부모가 재난 때 우수리스크로 피란을 가 그곳에서 자신을 낳았다고 말했다. 거기엔 한국이나 일본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많다고.

“지금 어째 여기 있소.”

유라는 멀리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석탄을 고즈넉이 응시했다. 비닐 방수천을 돌담 위에 얹은 가건물 아래로 경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비와 추위를 피했다. 얼굴엔 검댕이 묻었고 발목엔 진흙이 묻었으나 그들은 안락하고 단란해 보였다. 유라는 조도가 희미한 두 개의 눈동자로 한밤을 우두커니 비추는 등 같았다. 저 돌이 얼마나 뜨거운지 아시냐고, 유라가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란 걸 알고 학길은 잠자코 기다렸다.

“우수리스크는 지금 폐허예요. 짠 물이 범람해 들어와 땅이 망가졌어요. 다음은 어디일까요.”

 


청진과 우수리스크의 다음. 맹렬한 기세의 해수면이 집어삼킬 다음 집과 논밭과 무덤들. 학길은 일단 라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많은 부분이 잠겼고 점차로 잠기고 있으므로. 학길도 라선에 간혹 다녀갔지만, 해안 지방까지 가본 일은 없었다. 마대령 근처에서 물건만 바꾸고 돌아왔다. 그 이상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송진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조산만과 라진만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라진 구역과 선봉 구역, 서포항 세 곳은 완연한 바다였고 남은 사람들은 저슬령에 모여 사는 듯했다. 주요 접경지마다 쇠 울타리가 처져 있었고 밤에는 울타리를 따라 전깃불도 켜졌다. 언뜻 보기엔 공화국 시절보다 잘 사는 것 같았다. 주로 곡물과 피륙을 가져가 팔았고 약이나 기계, 기름을 받아왔다. 갈 때는 무겁고 올 때는 한없이 가벼웠다. 비교적 길이 안전해 솔호도 자주 데리고 다녔는데, 솔호는 밤의 산자락을 따라 켜진 전깃불이 신기해 좀처럼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고개를 돌리다 잦게 넘어졌다. 그때 생긴 흉터가 정강이에 남아 있었다. 어쩌다 그것을 볼 적이면 학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상했다.

좋은 세계의 끝자락.

학길이 보기에 라선은 그런 곳이었다. 시의 절반이 잠겼음에도 회령과 달리 호사가 남은 곳. 부유한 외국인들이 쓰는 게 흘러드는 곳. 이제 그곳도 수물되는 중이었다. 도리없이 공평하게.

학길은 속이 갑갑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창이 나귀를 끌고 다가왔다.

“어디 편찮소?”

“일 없다.”

학길은 이튿날 아침 일행과 함께 수레를 끌고 탄광으로 올라왔다. 이틀간 경원에 머무르면서 밥을 받는 대가로 탄광 일을 돕는 중이었다. 광부들이 탄 조각이 붙은 혈암이나 부스러진 탄 쓰레기를 솎아내 수레에 실어주면 구내로 나르는 게 일의 전부였다. 아침저녁으로 두세 번이면 끝났고 힘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발도 저는 사름이 무시기 나와 말썽이오.”

지창이 학길의 몸을 들먹이며 들어가 쉬라고 얘기했다. 학길은 손자가 걱정되어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아새끼 일 잘하오. 두 사람 몫도 합네.”

“그래서 나와 있는 거 아니니.”

학길은 턱짓으로 솔호를 가리켰다. 광부들을 도와 삽으로 탄을 떠서 수레에 싣고 있었다. 손과 얼굴이 시커메 덩치 있는 몸이 아니면 광부들과 구별도 되지 않았다. 뭐가 즐거운지 한창 떠들며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보라. 저거. 쓸데없이 힘 빼는 거 보라. 배 꺼지게.”

별게 다 심통이라며 지창은 웃고 말았다. 한 차례 구내에 석탄을 나르고 탄광에 돌아왔을 땐 정오였다. 윤보가 참이라며 강냉이 알곡 한 자루를 받아왔다. 세 노인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강냉이를 씹으며 볕을 쬐었다. 그들은 찰기도 없고 크기도 작은 지금의 작물을 불평하고 같은 종자를 심어도 두 배는 더 크게 영글었던 과거의 토지들을 그리워하며 떠들었다. 가뭄도 적고 수해도 적었던 예전의 날씨도. 이것들이 전부 어찌 된 것이냐, 한탄을 한 차례 나누고 나니 윤보가 탄차에 실린 석탄을 가리키며 저것 때문이 아니냐고, 저게 그런 줄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창이 그 말을 듣고 피, 웃으며 조선 사람들은 죄 없다고 받아쳤다.

“못 먹구 못 살아서.”

때고 싶어도 땔 것이 없어 얼어 죽는 사람이 있는 나라였는데, 잘 사는 나라가 내뿜은 것들에 비하면 조선이 쓴 석탄은 조족지혈이 아니었겠냐며. 웃음이 터져 나와 학길은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록적인 가뭄으로 조선에서만 수십만 명이 아사했던 일이 있었다. 청진이 아직 물에 다 잠기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학길은 당시 조선중앙방송에 익히 익숙한 그 여자가 노구를 이끌고 나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계 각 곳의 식량 작황이 모두 심각해서 서구에서도 아사자가 속출하던 시기였다. 당은 자본주의 체제의 탐욕과 방종이 이 천재지변의 원인임을 명확히 하며 특히 미국이, 미국과 중국 등의 패권주의자들이 전 세계 인민에게 저지른 만고의 대죄는 백번 머리를 깨며 사죄를 빌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그것은 지도부의 무능을 감추려는 체제선전에 불과했으나, 곰곰이 따져보면 놀랍게도 틀림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학길도 당시엔 진심으로 당과 함께 분노했다.

그러나 규탄 성명 이후에 중앙방송은 반대로 공화국의 사회주의가 얼마나 뛰어난 체제인지, 종파주의자들의 오염된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와 달리 인민에게 절제를 가르친 주체의 사회주의가 왜 훌륭한지를 피력해 학길이 온몸을 차게 떨도록 만들었다. 집마다 시체가 넘치고 산천에는 풀 포기 하나 안 남아 있었다. 청진 시민들은 땅 팔 기운도 없어 화장터로 시체가 몰렸다. 이삼일쯤은 화장터가 돌았지만 그 후엔 연료가 떨어져 시신을 받지 않았다. 학길의 가족도 학길의 어머니와 형의 시체를 수습 못 해 마당에 두었는데, 나중엔 팔다리를 떼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이불로 몇 겹을 감싸 안방에 숨겨두었다. 안전하게 매장할 땅뙈기를 구할 때까지 집이 비지 않도록 교대로 경계를 서가며 집을 지켰다.

이천만 인민을 굶겨 죽여도 세계를 망가뜨리지 않았으니 최선의 나라라고. 그런 게 문명이라면 차라리 인간은 멸하는 게 순리일 것이라고 학길은 생각했다. 귀신 같은 몰골로 광장에서 김부자 초상화를 불태우던 폭도들, 휴짓조각이 된 돈을 수성천에 뿌려버리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던 돈주들,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그때 나라는 끝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일을 다시 떠올리고 나자 심란함이 지극해 학길은 두 눈을 감았다.

“내 말 듣고 있습메?”

눈을 뜨자 자신을 보는 윤보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가 손으로 고건원 탄광의 시설을 가리키면서 이게 다 외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지어준 것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네가 어째.”

“마구잡이로 캐 쓰지 말고 조금만 캐서 살뜰하게 쓰라 하고. 그거 많이 때면 바다가 올라온다 하니.”

귀동냥해 들은 바에 의하면 시설뿐 아니라 무기와 탄약 등을 경원의 탄광 군벌에 엄청나게 지원해줬다고 말했다. 증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헌데 전쟁 나니까네 싹 다 내버리고 도망만 치댔다니, 간나들 속이 얼마나 쓰겠소.”

윤보는 그 사실이 재미나기라도 한 듯 껄껄대며 웃었다.

 

 

두 번째로 수레가 채워졌을 때는 저물녘이었다. 윤보와 지창이 먼저 구내로 내려갔다. 몸이 불편한 학길은 뒤에 남아 천천히 움직였다. 수레에 줄을 매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나귀는 얌전했다. 손을 느리게 움직여도 성질을 부리지 않고 기다렸다. 주인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학길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자 검고 축축한 코로 학길의 오른쪽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가 툭 내려놓았다. 너는 이제 이것을 쓸 수 없냐는 듯. 학길은 짐승에게 노쇠해가는 몸에 관해 설명할 도리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사이 탄광에선 간간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본래 작업현장이 시끄러워 고함이 일상인 곳이었으므로 학길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소리는 점차 크고 잦게 울리더니 마침내 악다구니에 가까운 목청이 되었다. 마침내 학길이 고개를 들었을 땐 백인 기술자가 침목 위에서 새빨개진 얼굴로 한 광부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거칠게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한순간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서로 멱살을 붙잡았는데, 광부의 키가 백인보다 머리 하나 이상 작아서 몸싸움이되 어딘가 안쓰러운 꼴이 되었다.

경비들이 달려와 둘을 떼어놓았다. 사실상 백인만 그 자리서 끌어내는 조치였다. 차마 때리지는 않았지만 사정을 봐주는 움직임도 아니었다. 발을 걸어 자빠트리곤 부거운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갔다. 백인의 윗도리가 그 과정에서 뒤집히며 벗겨졌고 노출된 맨살이 자갈 바닥에 그대로 쓸렸다.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윗몸을 들어 올릴 때마다 등에 세로로 길게 그어진 생채기들이 드러났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다른 기술자 포로들이 뛰쳐나와 군인을 향해 소리쳤다. 누군가는 참지 않고 달려들었으므로 마지막에는 광부들까지 소동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흙먼지가 한껏 부풀어 오르고 가려진 시야 안에서 사람을 두들기는 살벌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학길은 솔호가 거기 있었음을 떠올리고 아득해졌다. 분위기가 험악해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칫 말려들기라도 하면 불편한 팔다리로는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자욱이 깔린 먼지 밖에서 발만 구르다가 학길은 뜻하지 않게 유라를 발견했다. 엎질러진 석탄 더미의 위에, 난전을 벌이는 군중 먼 곳에, 외따로 흘러나와 있었다. 여전히 정물처럼 착잡한 표정을 하고 물끄러미 서서 사람들을 응시했다. 지침과 질려버림과 길 잃음 같은 것들이 그 얼굴에서 쏟아져나왔다.

 

 

박명이 오고 사물이 어두워질 즈음에야 솔호는 돌아왔다. 평일의 손에 붙들린 채였고 싸운 흔적으로 얼굴이 상처투성이였다. 소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내에서 군인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공중에 총을 발포해 무리를 해산시키고 탄광의 가동을 일찍 중단했다. 싸움에 연루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탄광에서 근로 중이던 외국인 포로들은 모두 연행해 어딘가로 호송했다. 광부들도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떠나고 나자 낮에 보았던 활기는 거짓말인 것처럼 광산은 텅 비고 쓸쓸해져 있었다. 군인 몇이 돌아다니며 흙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발로 쓸어 지웠다.

“아바이.”

평일은 멀리서 갱도 입구를 서성이던 학길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팔로 솔호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어째선가 자세가 다정했다. 그는 당신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다거나, 혹은 왜 아이를 제대로 간수하지 않느냐는 식의 불평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들떠 있었다.

“시절이 이런데 탄 좀 뗀다고 소래기를 지르고 지랄들이야.”

그렇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하듯 평일이 솔호를 바라보았다. 솔호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평일은 개의치 않고 솔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려주었다. 부하를 칭찬하는 상관 같기도 했고 아들을 다독이는 아버지 같기도 했다. 학길은 문득 두 사람이 무척이나 닮게 느껴졌다. 큰 덩치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단지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평일이 오히려 솔호의 친부처럼 보였고 자신은 아이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인처럼 느껴졌다. 그 기분이 두려웠다.

“환란이 어드래 오니마니 해봐야 살 거는 살고 죽을 거는 죽게 돼 있어. 너래 그거 알간? 다 정해진 거야.”

평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솔호를 놓아주었다. 등을 세게 떠밀어 학길의 곁으로 돌려보낸 다음 발길을 돌려 병력과 함께 구내로 떠나버렸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학길은 솔호와 단둘이 남겨졌다.

빛은 아까보다 더 사라져 능선의 나무들은 이제 구별되지 않았다. 검은 수풀만이 거대하게 이어지는 듯했다. 밤바람이 불어칠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충분히 흔들리면서 바람이 어디쯤을 지나는지 보여주었다.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숲에서 들려왔다. 난파하는 배의 잔해처럼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솔호가 입가를 문지르자 거기서도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피와 먼지가 굳어 생긴 것이었다. 어깨와 목 사이엔 검자줏빛으로 번진 멍이 보였다. 학길은 솔호가 무엇이든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으나 솔호는 아무런 해명도 없이 나귀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그들은 산 아래를 향했다. 보름달이 떠 길은 창백하게 밝았다.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 학길이 물었다. 싸웠느냐고. 그 난장판에 끼어 들어가 다퉜느냐고. 솔호는 답하지 않고 등만 내보일 뿐이라 학길은 늑골 안쪽부터 머리끝까지 진저리가 올라왔다.

“너 이제 따라 나오지 말라.”

“…….”

“집에만 있으라.”

“싫슴.”

“좀 보고 지껄여라.”

학길이 손아귀로 팔을 붙잡자 솔호가 강하게 뿌리쳤다. 예상치 못한 반동에 학길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수레 바퀴에 어깨를 박았고 다시 몸이 뒤집혀 형편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닿은 뺨이 차가웠다. 솔호는 제가 한 짓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학길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주체할 수 없는지 그 와중에도 호흡이 거칠었다. 가슴이 엄청난 기세로 부풀고 꺼졌다. 잠시 그렇게 굳어 있다 도망치듯 고삐를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달리는 기세라 쫓아갈 수 없었다.

학길은 황망하게 혼자 몸을 일으켰다. 손자가 요즘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매사 분노에 가득 차 있는지.

저 애가 도통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슬펐을 것이라고 학길은 생각했다.

마대령에서 빛나는 도시를 보고 회령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난하고 싸늘하고 배 채울 것 없는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일이. 말하지 않았을 뿐, 그쯤부터 손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 다름에는 어떤 까닭이 있고 누리는 인간과 누리지 못하는 인간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지. 부아가 치밀고 샘이 일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대상은 없이 그저 사방에. 광부들이 난전 중에 외쳤던 말을 학길은 들었다. 왜 훼방질이냐. 조선 사람이 조선 거를 쓰겠다는데. 그 외침을 듣고 주먹을 들고 가서 사람을 쳤을 솔호를 상상했다. 어설프게, 라고 해봐야 기대일 뿐 어쩌면 잔인하고 능숙하게 뼈마디나 연한 살로 감싸져 있는 내장을 노렸을지도 몰랐다. 주먹을 받고 누가 극심한 고통과 함께 쓰러졌을 지도 몰랐다. 학길이 보기엔 잘해봐야 철없는 짓거리에 불과한 재주였다.

인간이 마음먹고 인간을 해하려고 만든 물건들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그걸 쓰는 난전에서는 일방적으로 때리는 인간도 없고 얻어맞는 인간도 없고…… 다만 한 번에, 몸이 다 찢어지거나 운이 좋게 목숨을 부지하거나의 연속이라는 걸 솔호가 알지 못해 학길은 두려웠다. 학길은 알았다.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간 곳에서였다.

추수기였다. 성북리 강변에 있다고 들었다. 연길에서 피란민들이 무장한 채로 내려와 논의 작물을 베어가려 했다. 그들도 회령 시민들처럼 버려진 사람들이었고 늘 추위와 기아에 시달렸다. 그들과 싸우다 죽은 것이었다. 학길이 가보니 현장은 매캐한 화약 냄새와 쇳물이 섞인 피 냄새, 불에 살을 구운 냄새로 진동했다. 여기저기 땅이 움푹 패 있어서 걷다 보면 발이 빠졌다. 겸호가 죽는 것을 보았다며 한 남자가 학길을 데리고 가 눕혀 놓은 시체 다섯 구를 보여주었다. 여기 있는 게 겸호가 있던 참호에서 나온 시체들이라고, 죽는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포탄이 호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런 폭발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해주었다. 학길은 구덩이에서 나온 시신들을 하나씩 살폈다. 아들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왼쪽 무릎부터 잘려 나온 다리 한쪽이었다. 슬개골과 연골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고 피부 뭉텅이와 힘줄이 달랑달랑하니 붙어 있었다. 신발은 벗겨지고 없었다. 불에 탄 다리 조각을 손에 들고서 학길은 이것이 겸호의 다리인가 헤아려보았다. 알 수 없었다. 다 크고 난 뒤로는 발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아들의 발 같다고 안간힘을 써야 겨우 아들의 발 같았고 아니라고 부정하고 나면 한순간에 전혀 아닌 발이었다. 한참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본 끝에 학길은 신발을 벗고 자신의 왼쪽 발에 그것을 가만히 대보았다.

혹시 닮았을까 싶어서.

이 아이가 그런 것을 알까.

학길은 초대소로 돌아와 솔호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방안은 컴컴했지만 산처럼 드러누운 몸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솔호는 고작 사십일 된 아기였다. 송주. 이름이 송주였던 아이의 엄마를 학길은 떠올렸다. 10개월 된 망아지를 다루다 뒷발에 턱을 차였는데도 이 하나 흔들리지 않았을 만큼 뼈가 단단했던. 그 때문에 솔호의 덩치는 모계 핏줄일 거라고 학길은 언제나 확신했는데…… 그러나 그 애도 죽었다. 꼬박 이 년 더 살고 폐병에 걸려서.

학길은 너무 오래 살아온 기분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없어지는 동안 어째서 자신은 먼저 간 사람아 아니라 남은 사람이었는가 의아했다. 가까운 이들을 무덤에 묻을 때마다 학길은 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차피 멸할 세상에서, 먼저 멸한 사람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세상이 멸할 거라고 여기지 않았고 멸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손자가 남아 있었다. 솔호마저 죽고 난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멸이 오기를 바랄지도 몰랐다.

당연했다.

학길은 솔호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폭이 좁은 복도 난간을 따라 조심스럽게 일 층으로 내려갔다. 호위인지 감시인지 건물에 붙은 병사들이 탄광에서 가져온 탄조각을 때며 추위를 견뎠다. 학길이 난간에서 계단 밟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자 이목이 잠시 끌렸으나, 곧 반신불수의 노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계를 풀었다. 뜰에는 유라가 먼저 와 있었다. 재떨이로 가져다 둔 작은 쟁반 위에 연달아 피운 꽁초들이 너저분했다. 학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유라가 보자마자 한 대 피우시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담배를 깊게 빨았다.

유라는 지친 손동작으로 여러 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피 얼룩이 흰 소매에 묻어 있었다.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색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학길이 천천히 들여다보니 의사가 입는 의복 같았다. 아이는 괜찮으냐고 유라가 물었다. 낮에 싸우는 걸 봤어요. 학길은 손자가 너무 철이 없어 미안하다고 답했다. 유라는 대답없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잿가루가 싸리 눈처럼 희게 떨어졌다. 유독한 물질은 어느 곳보다 두 사람의 폐에 쌓였다.

“런런유저.人人有責

유창한 중국어 발음으로, 유라가 한 단어를 한숨의 연기와 함께 뱉었다. 선생님. 저는 이 말을 아주 어렸을 때 배웠습니다. 베이징에서 피난 온 중국인 교수에게 배웠어요. 사람마다 갖는 책임.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환경보전. 문명창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거라고. 여기서 일 년을 꼬박 지내고 나니 알겠어요. 전부 거짓말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세계가 모든 인민의 것이 아닌데.”

 

*

 

새벽녘 행렬은 다시 꾸려져 고건원에서 룡계리로 향했다. 이틀 전 밤에 내린 비가 고였다 얼어 진흙에 살얼음이 껴 있었다.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바닥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짝의 달구지로 얼음 바다를 쇄빙하며 항해 중인 것처럼 그들은 갔다. 솔호는 여전히 학길과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덥수룩한 뒷머리만 보여주는 머리통을 보다가 학길은 그새 키가 더 자랐음을 깨달았다.

저 몸을 이루는 건 모두 어디서 왔나. 학길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는데 손자는 벌써 어른이 되어있었다. 이제 솔호가 품을 떠난다면 학길은 그걸 막을 힘도, 방향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 솔호가 보다 어렸을 때, 여러 가지 것을 궁금해했던 나이에, 더 정성스럽게 대답해주지 않은 일을 학길은 후회했다. 예컨대 세상이 어떻게 끝나버렸냐는 질문. 듣기에 엉뚱하고 설명하기도 성가셔 그냥 서서히 망했을 뿐이라고 둘러댔지만 기회가 온다면 학길은 제대로 말해주고 싶었다. 두만강을 도강하려다 멈춰선 피난민들에 대해.

조선이 망하고 남쪽지평선에서 몰려왔던 사람들.

반대편 기슭에 버려진 용정 난민들을 보고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

그게 학길이 본 종말의 방식이었다. 살 곳을 찾아 떠난 이들이 서로 반대편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디든 떠나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집을 잃었음을 깨달은 것. 언제고 이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고 학길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행렬은 룡문리를 지나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선두는 산등성이 어딘가에 있을 습격자들을 가상하며 속도를 늦췄다. 이 길을 살아 건너갈 수 있을지, 불안과 공포에 눌러 모두가 조용했다. 그 가운데 누가 학길의 수레 쪽으로 다가왔다. 건너편에서 걷고 있는 유라에게 접근하더니 이제 어찌할 것이냐고 물었다. 아는 동료인 듯했다. 말하는 방식도 걷는 방식도 대체로 정신 사나운 자였는데 무엇보다 주머니가, 떠나올 때 급히 물건들을 챙겼는지 상의 양쪽 주머니가 묵직하고 단단했다. 그는 차라리 강도 떼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길에서 석탄을 싣고 다니는 사람들만 골라 습격하고 싶다고.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크게 흔들려 주머니에 든 뭉치가 수레 벽면의 널빤지를 딱, 딱, 소리 나게 쳐댔다. 봐라. 이 사람들 하는 걸…… 세상이 어떻게 되든 저들만 살겠다고……. 그는 점차 수위를 높여가며 비난을 쏟아냈지만 주머니가 수레를 치는 소리에 묻혀 학길의 귀엔 잘 들리지 않았다. 저렇게 치다간 구멍이 날 것 같은데, 짐승이 불안해 줄을 끊을 것 같은데, 도저히 멈추지를 않아 학길은 조바심이 났다. 마찬가지로 견딜 수 없었는지 유라가 참지 않고 동료에게 쏘아붙였다.

네 주머니에 든 것부터 꺼내고 얘기하라고.

 

 

솔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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