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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직 허스키한 시베리

2023.08.01 00:0008.01

허스키한 시베리 

김아직

유미는 일찍 간판 불을 껐다. 기다리다 보면 늦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 두엇은 더 받겠지만 내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예정이라 마음이 들떴다. 레몬수 병을 씻어 엎고 음악을 껐다. 

이게 얼마만의 휴가며 얼마만의 해외여행이란 말인가. 
유미는 1초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카페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앞치마를 돌돌 말아서 숄더백에 넣고 카운터를 빠져나오는데 ‘띠링!’ 하고 가게 문이 열렸다. 
“죄송하지만 영업….”
하지만 손님은 상당히 허스키한 목소리로 유미의 말허리를 잘랐다. 
“커피 두 잔 값을 낼 테니 잠깐만 쉬었다 가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밤색 트렌치코트에 검정색 페도라를 깊이 눌러쓴… 누군가였다. 손님은 유미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카운터에 만 원권 지폐를 올려놓고는 입구 정반대쪽 구석자리로 갔다. 

어이가 없어서 손끝으로 지폐를 콕콕 찍고 있는데 다시 ‘띠링!’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119 구조대원이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큰 개 못 보셨습니까? 이 앞쪽 골목으로 지나갔을 텐데요.”
“큰 개요?”
유미가 의아한 눈길로 되물었다. 유기견을 포획하겠다고 119 대원들이 출동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유미도 알고 있었다. 
“아, 그게… 상당히 긴급한 상황입니다.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이는 큰 개가 뛰어다닌다는 신고가 동시다발로 접수되었거든요. 중간에 시민 한 분이 포획을 시도했다가 충돌로 부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고요. 아, 개가 사람 옷을 입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유미의 눈길이 만 원권 지폐로 옮아갔다. 
모자로 얼굴을 가린 데다 손에도 흰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에이 설마…. 

“잠깐씩이겠지만 사람처럼 걸어다녀서 얼핏 키가 작은 성인 남자처럼 보인다더군요.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구급대원이 쐐기를 박자 유미로선 구석자리에 있는 ‘손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개가 혹시 말도 하느냐고 구급대원에게 물으려는 순간 다시 ‘띠링!’ 소리가 울리더니 다른 대원이 카페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극장 사거리 쪽에 바바리맨이 있다는데요? 암만 해도 목격자들이 그 개를 바바리맨으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
구급대원들은 유미의 카페를 빠져나갔다. 

유미는 돌연 카페가 낯설게 느껴졌다.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서커스단에서 탈출했다는 개로 추정되는 존재가 이 공간에 있었다. 개는 분명 아니었다. 아무리 유전공학이 발달했다 해도 사람 말을 유창하게 하는 개는 없었다. 저 손님은 모종의 이유로 목격자들에게 ‘개’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확실한 건 손님이 위험인물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클리셰에 충실한 스릴러 영화라면 저 손님은 유미의 호의를 배신하고, 유미를 죽여서 카운터 안쪽에 처박은 다음 유미의 옷을 입고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누구 맘대로! 하늘이 두 쪽 나도 내일 아침 비행기 타고 만다, 내가!

유미는 700ml들이 스테인리스 스팀피처를 치켜들었다. 일단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단단한 걸 집어든 것이었다. 카페를 연다고 했을 때 이모할머니가 칼국수집이 낫지 않겠냐고 훈수를 두던 게 떠올랐다. 평소 신기 있다는 소리를 듣던 이모할머니는 그때 혹시 스팀피처가 아니라 밀방망이가 필요한 순간이 오리란 걸 내다본 게 아니었을까. 

“영업 끝났습니다, 손님.”
유미는 조심스레 모퉁이를 돌아 구석자리로 갔다. 손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괸 채로 대꾸가 없었다. 
“저기요….”
손님은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유미는 덫을 의심했다. 크리처 영화에 보면 괴물이 죽은 줄 알고 건드렸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조연들이 나오지 않던가. 

유미는 모퉁이 콘솔에 놓인 조화 장식품에서 부들 줄기를 꺼냈다. 부들 끄트머리로 손님의 어깨를 툭 건드려보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손님이 왁 달려들어도 방어가 가능할 터였다. 
“손님? 저기 가게 문 닫아야 하는데요? 지금 남자친구가 태권도장 문 닫고 저 데리러 오고 있거든요. 그 사람 다혈질에 분노조절이 안 되거든요. 저번에도 카페 진상 손님 하나가 그 사람한테 잘못 걸려서 앞니가 다 털렸잖아요.”
없는 남자친구까지 만들어서 으름장을 놓았지만 손님은 반응이 없었다. 외려 옆으로 휙 쓰러지는 것이었다. 

페도라가 벗겨지며 손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흰색, 회색, 검정색 털이 고루 섞인… 개였다. 
정확히는 시베리안 허스키였다.  
손님 아니 개의 입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새 나오고 있었다. 

“이봐요!”
119에 신고하면 아까 그 대원들이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키가 165센티미터쯤 되고 직립보행을 하고 인간의 말을 하는 개였다. 119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X파일 부서 소관일 텐데 문제는 유미가 그 부서의 연락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신고하면… 사장님도 위험해집니다.”
유미가 동동거리고 있는데 손님이 다 죽어가는 소리로 입을 떼었다. 
“내 존재를 지우려는 자들이 사장님까지 없애려 들 겁니다.”
개소리치고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진실을 아는 자들을 입막음하고 다니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유미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럼 어쩌죠? 어디 연락할 데는 있어요? 사실 저 빨리 문 닫고 집에 가야 해요. 내일 새벽 일찍부터 일정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합니다.”
개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부디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그 얘기 들어주면 떠날 건가요?”
“약속하겠습니다.”

개는 유미가 건넨 냅킨으로 거품을 닦아낸 뒤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를 ‘허스키한 시베리’라 부르십시오. 몇 년 전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내 살던 행성에는 더는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차원의 통로로 들어가서 평행지구들을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비딕> 도입부 패러디


개는 평행지구에서 유미의 지구로 넘어온 허스키한 시베리 경이었다. 본래 이름은 ‘필드스타 주니어 포장지에 ‘시베리안 허스키’ 사진이 있는 개 사료 
 허스키한 시베리‘였으나 부모가 죽고 가문의 책임자가 되면서 ‘허스키한 시베리 경’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허스키한 시베리가 속한 지구는 영장류가 아니라 개가 지구의 지배종으로 자리잡았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까니스 사피엔스’ Canis spiens: 라틴어로 ‘생각하는 개’라는 뜻
라 부른다. 까니스 사피엔스들도 호모 사피엔스들처럼 여러 종의 반려동물을 키우는데 소형 영장류의 진화체인 소인간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소인간은 키가 80센티미터 내외라는 점만 빼면 전체적으로 유미네 지구의 인간과 유사했다. 허스키한 시베리도 어릴 적부터 소인간을 키웠다. 

“몹시 예쁘고 똑똑한 반려인간이었습니다.”
어느덧 유미는 허스키한 시베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었다. 엄마는 유미더러 부모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온갖 개소리는 다 믿고 다닌다고 혀를 차곤 하였는데 아주 근거 없는 비난은 아니었던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전에 투자한 사업이 잘못되면서 집안은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반려인간도 집안 재산으로 분류되어 압류되었다. 허스키한 시베리가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소인간을 찾으러 갔지만 소인간은 허스키한 시베리와 떨어진 충격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허스키한 시베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거품을 닦은 냅킨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 녀석 이름이 똔똔이였습니다.” 
“똔똔이요?
유미는 그 이름이 이 세계에선 본전, 엇비슷함 등의 뜻으로 쓰인다고 설명하려다 말았다. 괜히 흐름을 끊었다가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못 믿으시겠지만 사장님과 인상이 비슷했습니다.”
살짝 개수작의 냄새가 났지만 유미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 주었다. 
“똔똔이가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반려동물을 환생시키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똔똔이가 사라지자 내 가문, 내 나라, 내 지구가 통째로 시시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로 여행을 왔습니다.”
허스키한 시베리는 꼬깃꼬깃해진 냅킨에다 쿨럭 피를 토하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여행경비를 마련하고 똔똔이를 닮은 영장류가 지배종이 되었다는 이 지구로 건너온 겁니다.”
하지만 평행지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 탓에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준비해온 화폐부터 말썽이었다. 허스키한 시베리가 챙겨온 화폐는 중세시대 베네치아에서 통용되던 듀카트 금화였던 것이다. 처음 들른 슈퍼에서 금화를 내밀었다가 욕만 듣고 쫓겨나고서야 현시대의 인간은 지폐라는 종이 화폐나 ‘카드’라는 것을 주로 쓴다는 사실을 배웠다. 결국 허스키한 시베리는 구리시 수택전당포에서 18K 금화가 잔뜩 든 주머니를 달랑 만 원권 지폐 열 장과 맞바꾸었다. 

화폐 다음 문제는 이 평행지구가 철저히 인간 중심이라는 점이었다. 허스키한 시베리의 지구에선 까니스 사피엔스를 비롯한 여러 종의 지성체들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전 지구적으로 차별금지법이 시행되어 다른 지성체를 비하하거나 차별 또는 무분별 포획하는 자는 법적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 지구에서 허스키한 시베리는 ‘유기견’이었다. 유미네 지구에 온 지 반나절 만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취총에 두 번이나 맞았고 분식집에서 김떡순 세트를 사먹은 뒤로 장이 괴사되기 시작했다. 순대 써는 도마에 묻어 있던 살모넬라균이 허스키한 시베리의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균이어서 단순한 식중독을 넘어 치명상을 안긴 것이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깨달은 터였지만 장 괴사로 인한 통증을 덜어줄 진통제가 필요했다. 약국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다시 사달이 났다. 트렌치코트와 페도라, 마스크, 장갑으로 몸과 얼굴을 철저히 가렸으나 귀신같이 알아보고 비명을 질러대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의 가게로 뛰어든 건, 제가 이 지구에서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입니다. 가물가물해졌던 똔똔이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으니 말입니다.”
손님은 유미를 똑바로 쳐다보며 시베리안 허스키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헥헥, 소리도 났다. 

유미는 개의 아니 허스키한 시베리 씨의 웃음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장이 괴사되고 있다면 진짜 큰일이잖아요.”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차원의 통로까지만 가면 다 해결됩니다.”
“차원의 통로요?”
“웜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 어디 있는데요?”
“구리시 교문동 외곽에 큰 타이어 가게가 있습니다. 그 가게 앞에 폐타이어를 엮어 만든 흑마가 있습니다. 그 흑마의 등이 웜홀입니다. 제 고향지구는 사장님이 속한 평행지구보다 과학기술이 조금 더 발달해서 다들 분기별로 기억을 백업해 둡니다. 유사시를 대비해 몸도 두 벌 정도 복제해 두지요. 그러니 이 지구에서 장이 썩는다 해도 웜홀을 통과하기만 하면 됩니다.”

허스키한 시베리는 이야기를 들어주면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아주 떠나갔다. 
기나긴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죽어버린 것이었다. 유미가 목덜미와 심장 쪽을 더듬어 보았지만 맥이 잡히지 않았다. 
아, 젠장…. 
심장을 눌러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뼈 부러지는 소리만 우둑우둑 들릴 뿐 허스키한 시베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제라도 119에 전화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간 허스키한 시베리를 숨겨준 혐의로 벌금을 물지도 몰랐다. 112에 전화를 할까도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여행도 못 가고 경찰서에 출두해야 할 것이다. 평행지구에서 온 까니스 사피엔스의 사체가 유미의 카페에서 발견된 경위를 낱낱이 고백했다가 살인 아니 동물살해 피의자로 몰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유미는 엄지손톱을 잘근거리다 시간을 확인했다. 
21시 30분. 
미쳐버리겠네. 집에 가서 짐을 싸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그 순간… ‘짐’과 관련된 무엇이 유미의 뇌리를 스쳤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달려간 유미는 여행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언젠가 친구랑 백화점에 가서 어디 이민 가느냐는 놀림을 받으며 구입한 대형 캐리어였다. 지금껏 유미는 스릴러 영화에서 살인마가 캐리어를 끌고다니는 게 그저 그런 클리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손수 처리할 사체가 생기고 나니 캐리어 말고는 답이 없었다. 
토막을 낼 순 없잖아?
생선도 제대로 못 만지는 유미였다. 

가게로 돌아와 허스키한 시베리의 사체를 가방에 밀어넣었다. 오래 되어 몸체가 부드러워진 캐리어는 허스키한 시베리의 사체를 너끈히 수용했다. 유미는 캐리어를 끌고 구리행 버스를 탔다. 

사람들이 자꾸만 캐리어를 흘깃거리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었다. 차창에 비친 유미는 어딘가 지쳐 보이는 게,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 같았다. 다행히 버스도 한산하여 캐리어 때문에 다른 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도 없었다. 

허스키한 시베리의 사체는 웜홀로 밀어넣는 게 최선일 것이다. 
어딘가에 유기했다가 발각되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한단 말인가. 허스키한 시베리 역시 원래 살던 곳으로만 돌아가면 백업된 기억과 여벌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유미네 지구에서 죽어버렸으니 이곳에서의 일들은 복기가 불가하겠지만 팔 할이 도망다닌 기억일 텐데 잊으면 또 어떠랴. 

승객들이 하나둘씩 줄어들더니 버스에는 기사와 유미, 유미 동년배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 이렇게 셋만 남았다. 내릴 때가 되었는지 단발머리 여자가 카드를 치켜들며 뒤쪽 출입문 쪽으로 걸어왔다. 요금정산기에 카드를 찍고 무심히 유미 쪽으로 시선을 틀던 여자가 갑자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여자의 커다란 눈알이 캐리어와 유미의 얼굴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다. 여자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유미는 캐리어를 살펴보았다. 낡은 캐리어의 지퍼가 20센티미터 정도 벌어졌고 그 틈으로 하얀 장갑을 낀 손목 하나가 쑥 비집고 나와 있었다. 

“이거 손목 아니고 개다리 아니 앞발….”
유미가 허스키한 시베리의 손목을 다급히 가방 안으로 밀어넣는데 버스가 정차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유미도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원래는 교문동행 마을버스로 갈아탈 예정이었지만 지퍼가 고장난 캐리어를 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순 없었다. 유미는 밤길을 20분쯤 걸어서 문제의 타이어 가게 앞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타이어 가게는 문을 닫은 뒤였다. 
폐타이어로 만든 흑마만이 어둠에 어둠이 중첩된 칠흑빛으로 서 있었다. 
유미는 캐리어를 바닥에 눕힌 다음 지퍼를 열었다. 야간 사이클을 즐기는 무리와 산보를 나온 듯한 가족이 유미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타이어 가게 주변의 인기척이 끊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캐리어 상판을 들추었다. 

유미는 젖 먹던 힘을 다해 허스키한 시베리의 사체를 흑마의 등에 걸쳤다. 하지만 사체는 젖은 빨래처럼 말 등에 축 늘어져 있을 뿐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유미는 허스키한 시베리의 말을 믿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평행지구의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 반려인간 똔똔이와 닮은 사람한테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웜홀이란 게 상가건물 셔터처럼 단순하게 열리고 닫히는 게 아닐 테니 시간이 좀 걸리겠거니 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카페에서 동동거린 데다 허스키한 시베리의 일까지 더해져서 피로가 극심했다. 캐리어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허스키한 시베리를 올려다보던 유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개꿈들이 지나가고…. 
비행기 소리에 잠이 깼다. 여객기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침 7시였다. 유미에게 공간이동 능력이 생기지 않는 한 예약해 둔 8시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스키한 시베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흑마의 등에 우그러진 금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간밤에 허스키한 시베리가 말한 중세시대 베네치아 금화인 듯했다. 유미는 금화를 주머니에 넣고는 지퍼가 고장난 캐리어를 끌고 새벽길을 걸어갔다. 

망가져버린 여행 일정을 수습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집, 카페의 쳇바퀴에서 탈출하려던 욕구는 조금 해소된 것 같았다. 살면서 이토록 멀리서 온 누군가를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금화도 하나 얻었으니… 똔똔이였다.   

하지만 유미가 아직 모르는 게 있었다. 
이 지구로 건너왔던 허스키한 시베리는 죽었지만 유미는 까니스 사피엔스들의 지구에서 유명인이 되었다. 허스키한 시베리의 트렌치코트 특수단추들이 여행지에서의 일들을 모조리 녹화했던 것이다. 유미가 일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휴가를 다녀오고 며칠 뒤였다. 

카페 간판 불을 끄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트렌치코트에 페도라 차림의 손님이 들어왔다.
“나를 와치치라 부르시오.”
키가 자그마했고, 야윈 얼굴에 눈알이 툭 불거진 손님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장님.”
와치치는 이미 유미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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