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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평론가

돌로레스 클레이븐

 

평론을 작성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 내 평론의 평론을 내놓는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그땐 나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젊은 시절,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론가를 평론할 정도로 정통한 사람이 평론하고 있을 리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 물론 인터넷 댓글로 열폭하는 머저리들은 예외였다. 놈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말 그대로 열폭 밖에 없었다. 그런 놈들은 인터넷 어딜 가든 잡초마냥 널려 있었다. 거기다 댓글에는 아무런 깊이도 없었다. 고작해야 느낌표와 조롱을 쓸 줄 안다고 그걸 평가라 주장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도 이 머저리들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달리 많은 댓글이 달려 있어 확인했지만 그곳에는 오로지 조롱과 멸시뿐이었다. 그런 건 갓난아기들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갓난아기보다 10년 이상 산 사람이라면 이것보단 나은 평을 내렸어야 했다. 단순한 욕이나 멸시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문장 하나하나에 파괴력을 실어 상대의 심리를 파고들 수준은 되어야 평론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댓글 창을 꺼버렸다. 당장 망해버리라는 댓글들과는 달리 내 영상에는 수많은 ‘좋아요’가 달려 있었다. 싫다는 의견은 고작해야 1/5 정도였다. 그야말로 시끄러운 다수였다. 나는 영상을 꺼버렸다. 그리고 에이전시에 전화했다.

몇 초쯤 수신음이 흘렀을까? 수화기 너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 장혁 씨. 무슨 일이세요?”

“별건 아니에요. 그냥 아까 아침에 제 영상이 비추테러를 받고 있다고 해서 봤는데요. 심각하지는 않던데요.”

“아, 그거 커뮤니티 쪽에서 좌표 찍고 달려들 모양새라서 알려드린 거예요. 아마, 지금은 죄다 안 좋은 평가밖에 없을지 몰라도 며칠 지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가 있어요. 제일 좋은 건 그냥 가만히 있는 거죠. 잠시 영상은 올리지 마세요.”

“얼마나요?”

내가 묻자, 담당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보름이라고 말했다. 보름이라.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요즘에는 눈에 띄는 기대작도 없었다. 못해도 6월부터 기대작들이 물밀듯이 들어올 터였다.

스파이더맨 신작과 존 윅 신작,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들도 개봉을 준비했다. 6월 말에는 웨스 엔더슨의 신작이 폴 토마스 엔더슨의 신작과 함께 개봉 예정이었다. 그 사이에 다른 영상을 찍어야 했다.

스케쥴을 확인해야 했다. 수첩을 펼치자, 다이어리 아래쪽에 영화와 드라마 이름이 적혀 있었다. 5월 17일 오늘도 드라마 한 편이 나왔다. 하우스 오브 도미네이션? 이름 한번 괴상한 드라마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예고편을 본 기억이 있었다. 쓸데없이 피가 튀기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넷플릭스가 만든 드라마치고는 유색 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거기다 내용도 단순했다. 80년대 슬레셔 무비를 그대로 드라마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내용이었다.

살인마가 나오고, 멍청한 10대들은 살인마의 전설을 무시한다. 그리고 살인마가 출몰하는 지역에 가서 온갖 추잡한 짓을 하다가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진부하다 못해 한물가버린 스토리에 나는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긴, 지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TV, 라디오, 소설, 만화, 그리고 이제는 대형 OTT까지. 모두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쏟아냈다. 소설은 드라마와 영화가 되었고, 영화와 드라마는 만화가 되었다. 서로 돌려막는 순환적인 이야기 산업이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모두가 질 좋은 IP로 진부함에게 빚을 져가며 돌려막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질 좋은 이야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야기는 더욱더 비슷해졌다. 그러니 영상을 평가하기는 나날이 어려워졌다.

봤던 걸 또 보고, 전에 본 걸 또 보니 이건 정말 사람을 고문하는 꼴이었다. 물론, 여전히 A급 이야기들에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A급의 턱은 점점 높아졌고, B급 영화들은 암처럼 증가했다. 이런 시대에 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한단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PC적인 관점과 제작사에서 쥐여주는 혜택에 따라 차등해서 평가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뻔뻔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뻔뻔한 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같은 돌덩어리라도 돈이 되는 쪽이 더 가치 있는 법이었다.

나는 일단 가산점을 추렸다. PC적인 요소들은 도합 20점 정도였다. 여성 주인공에 비백인 캐릭터, 그리고 시의성 있는 스토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주연배우 중 유색 인종의 숫자가 백인보다 많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고작 1화였음에도 몇 번이나 정지 버튼을 눌러야 했다. 핍진성도 엉망이었고, CG도 형편없었다. 대사는 진부했고, 무엇보다 뒷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하지 않았다. 너무 뻔했다. 흑인 여성 주인공은 살아남을 것이다. 혈통의 숨겨진 비밀을 찾을 것이며, 결국에는 마법적인 힘으로 적을 무찌르리라. 하지만 그전까지는 주인공은 밥맛에 고구마일 터였다. 백인들로 구성된 악당들은 시즌 내내 이기다가 마지막 시즌 중반에 치명타를 먹을 터였다. 그리고 반전이랍시고 몇 가지 요소들을 넣었다. 하지만 모든 반전 요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범인이 죄다 백인이라 마을에 사는 사람 중 백인들은 죄다 범인이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한숨만 튀어나왔다. 이따위로 이야기를 쓸 것 같으면 그냥 접는 게 나았다. 하지만 접으라고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평론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터넷 댓글을 다는 저능아들만 하는 짓거리였다. 그리고 혹평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 오간 뒤였다. 얼마가 오갔는지는 굳이 언급은 하지 않겠다. 7시간이 넘는 지루한 시간 낭비를 생산적인 시간으로 바꿀 정도의 액수였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요구한 조건에 맞추어 리뷰를 작성했다.

안다. 어떤 면에서 내가 하는 일은 사기였다. 하지만 정말 사기인가? 난 내가 느낀 점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었다. 젊은 시절 잡지사에서 영화 평론을 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지금은 영화와 나 사이에 조그만 선물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대가성이 모호한 선물 말이다. 그리고 내 리뷰를 보고서 사람들이 더 많이 드라마를 볼지도 미지수였다.

어쨌든 나는 예전에 본 영화들을 떠올리면서 드라마를 찬양했다. 고전 영화의 한 대목과 철학적인 사유를 담아 장문의 리뷰를 올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누구도 내 글에 평론가적인 허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정석적이었고, 누구도 부정 못 할 권위적인 고전들이 내 논리의 뒷바탕이 되어 있었다.

물론, 직설적이고 날것 그대로 발언하는 댓글들은 달렸다.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을 품고 있었다. 이 점은 나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진실이 내게 돈을 주지는 않았다. 지난 20년 동안, 글로 먹고살면서 진실보단 거짓이 내 손에 더 많은 돈을 쥐여주었다. 더더욱 자극적이고 신랄한 평가가 더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리고 난 바보가 아니었다.

평론을 다 작성하고 나니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2시쯤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으니, 평론 작성은 고작 1시간도 안 걸린 셈이었다. 영 수율이 높지 않았다. 나중에 방송에 쓸 영상은 따로 찍어야 했다. 편집하고 에이전시와 상담을 하면 아마, 일주일 정도는 걸릴 터였다. 앞으로 이 쓰레기 같은 드라마에 일주일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내 인생은 어디서 잘못된 걸까?

두툼한 뱃살을 매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생각했다. 물론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정말 수많은 일을 겪었다. 소설도 출간했고, 시집도 냈다. 물론,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법을 제대로 배웠던 경험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평론가가 되고 싶었던 걸까?

몸이 찌뿌둥한 중년이 된 지금 와서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어쨌든 지금의 난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평론가였다. 이제는 소설 같은 구질구질한 것을 쓸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않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기지개를 켜자 컴퓨터 모니터 위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8시가 넘은 뒤였다. 저녁도 아직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선호를 불러 볼까? 놈이랑 아는 후배들 몇 명 불러서 술자리를 가져도 되리라. 녀석은 전화 한 통이면 재깍재깍 달려올 것이다.

나는 전화를 집어 들어 선호의 번호를 눌렀다.

 

.

 

“뭐야? 너 한 명뿐이야?”

“어쩌냐? 다른 애들은 죄다 바쁘다고 하는데.”

“죄다 빠졌네. 새끼들. 어차피 이 바닥 좁은데 한번 군기 좀 잡아봐?”

내가 허세를 부리자 선호는 맥주를 마시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병적으로 푹 들어간 두 뺨이 일그러졌다. 정수리에 탈모가 조금 왔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허룩해 보였지만, 녀석은 아직도 젊어 보였다. 적어도 나처럼 몸무게가 90kg이 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는 말랐고, 운동을 하는 건지 팔에 근육이 조금 보였다.

젠장. 운동을 하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고혈압과 당뇨 걱정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의사의 충고는 알바생이 음식을 들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20대밖에 안 된 앳된 여자 알바생은 선호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튀긴 프라이드 순살과 양념 순살, 그리고 파닭이 골고루 담겨 있었다. 알바생은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며 멀어져 갔다. 내가 눈으로 알바생의 뒷모습을 쫓았다. 내 시선을 바라보던 선호는 혀를 찼다.

“아직도 그러냐? 얌마, 너 이제 40대야. 결혼이나 해라, 짜샤.”

“그래. 40대지. 하지만 결혼해서 10년 살다가 재산 반으로 갈리고 싶지는 않아. 자유연애라고.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자유’를 누려야지.”

“이 아스모데우스 같은 놈. 쯧쯧. 넌 어릴 적에나 지금이나 리비도가 넘쳐흐르는구나.”

선호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하고 톡 쏘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기름진 치킨이 당겼다. 나는 포크로 치킨을 하나 찍어 입안에 우물거렸다.

“선호야. 넌 요즘도 작품 쓰고 있냐?”

선호는 고개를 스프링 달린 인형처럼 까딱거렸다. 그의 제스쳐에는 묵직한 한탄이 서려 있었다. 그도 그럴 만도 했다. 녀석은 벌써 20년째 소설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아직 출간은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코딩 교육을 받고서 IT업계에 뛰어들었다. 뭐, 업계라고 해봐야 소규모 하청 업체에서 기본적인 코드 작성이나 하는 일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했다.

바보 같은 놈. 진작 소설을 그만두고 딴 길을 알아봤으면 인생이 폈을 텐데. 그래도 놈은 장편 소설을 3권 정도 냈고, 몇 년 전에는 단편집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전자책인지 뭔지 처음 듣는 거라 잘 팔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 댓글로 그의 작품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같은 시기에 소설 따윈 중요치 않았다. 나는 선호에게도 소설 무용론을 설파했었다. 그래서 선호와 함께 영상을 찍어 본 적도 있었다. 혹시라도 같이 일할 수 있지는 않을까 싶었더랬다. 하지만 녀석과 찍은 영상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인기가 없었다.

취기가 살짝 올라오자,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선호에게 쓴소리했다. 지금이라도 유튜브나 해라. 그게 돈을 더 많이 번다. 말이 안 되면 웅변학원이나 가라. 40줄에 아직도 중소기업이 뭐냐? 숙맥처럼 굴지 마라, 그러니까 여자가 없지 않냐. 온갖 잔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선호는 기분 나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탱커드 잔에 맥주가 절반가량 사라지자, 녀석이 말했다.

“요즘은 체력이 많이 떨어졌어. 집에 가면 그냥 곯아떨어지기 바쁜데, 주말에 조금 끄적이는 중이지. 그래도 이번에는 계약을 또 할 거 같아. 아, 그리고 나, 이거 샀다.”

선호는 자기 관자놀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선호가 가리키는 헤드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뭔데? 골전도 헤드폰 그런 거 아냐?”

“아냐. 전혀 달라. 나 요즘에 이걸로 하루에도 책을 40권을 읽는 거 같아.”

40권?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아무리 누군가 읊어주는 오디오북을 듣는다고 해도 하루에 40권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회의적인 눈으로 기계를 바라보자, 선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그것을 벗었다.

그는 내게 헤드폰처럼 생긴 기계를 건넸다. 기계는 상당히 가벼웠다. 플라스틱 외장인 듯했다. 나는 처음 보는 물건을 접한 침팬지처럼 그것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둥그스름한 곡면 안쪽에 큼지막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RUR-200? 애플에서 나온 거야?”

“맞아. 요즘 유행 타기 시작한 물건인데, 다들 해석기라고 부르더라.”

선호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이 해석기란 장치는 독립된 기기는 아니었다. 핸드폰에 연결하는 액세서리 개념의 물건이었다. 블루투스로 작동했고, 기기 자체도 조금 큰 머리띠 정도 크기였다. 관자놀이에 연결하여 전극 신호를 주는 말단부가 양 끝단에 두 개가 있었다. 말단부에는 작은 금속성 접합부가 있었다. 접합부에서 전극 신호를 주기 위한 용도로 보였다. 둥그스름한 동체는 카트리지 형태의 배터리가 달려 있었다.

내가 배터리를 빼자, 선호는 기다란 배터리 옆에 달린 것이 CPU임을 알려주었다.

“배터리 옆에 달린 CPU도 커스텀 할 수 있어. 저장슬롯과 외형도 바꿀 수 있지.”

“그래서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야?”

내가 묻자, 선호는 두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일단 한 번 써봐. 써보고 이야기하자고.”

뭐 이리 호들갑이람. 나는 콧방귀를 뀌면서 머리에 해석기를 썼다. 차가운 감촉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 위로 넘어간 고리가 자꾸 얼굴 앞으로 기우뚱 흘러내렸다. 보다 못한 선호가 내 머리카락과 함께 고리를 정수리까지 넘겼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선호를 재촉했다.

“뭔지 몰라도 할 거면 빨리 해 봐. 지금 머리가 조여서 힘들어.”

“알았어. 잠깐만 있어봐.”

선호는 화면을 이리저리 눌렀다. 손톱이 액정을 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거기다 이마를 까고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러다 탈모가 생겼다는 걸 남에게 들키는 거 아닐까? 거기다 머리가 조이는 이 감각은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해석기를 벗으려 하자 선호는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가만히 있어봐. 금방 끝난다니까.”

“아, 젠장. 난 머리에 뭐 쓰는 거 싫어한다고. 빨리빨리 좀 해봐!”

내가 손뼉까지 치면서 다그치자, 선호는 구시렁거리면서 핸드폰을 눌렀다.

변화는 금방 찾아왔다. 입에서는 절로 ‘세상에’가 튀어나왔다. 나는 양손으로 해석기를 잡아 눌렀다. 관자놀이 혈관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눌렀다. 그러자 머릿속을 채우는 감정이 더욱 확고하게 그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이게 대체 뭐야?”

“신기하지? 미국 애들이 드디어 이런 걸 만들었어. 작품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어진 거야.”

선호는 핸드폰을 조작했다. 그는 넷플릭스를 틀고서 드라마 한 편을 틀었다. 그러자 너무나도 선명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감정을 품고 움직이고 있었다. 캐릭터들의 생각이 이해되다 못해 내가 그 캐릭터가 되었다. 모든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날것 그대로 머릿속에 빗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감정들이 뇌 주름 속으로 스며들 즈음.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해석기를 벗어 던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신경질적인 감각이 섬뜩하게 날을 세웠다. 뺨을 만지면서 나는 선호에게 쏘아붙였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야? 설정을 어떻게 한 거냐고!”

“설정은 무슨.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해석기 어플로 넷플릭스 드라마 하나를 틀었을 뿐이라고. 봐봐.”

선호는 넷플릭스 화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로채서 살펴보았다. 화면에는 낯익은 드라마의 제목이 떠 있었다. 하우스 오브 도미네이션이란 선 굵은 제목이 위압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선호에게 물었다.

“이걸 튼 거야?”

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석기가 처음 사용하면 조금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진정 좀 해봐.”

“세상에. 이게 뭐야?”

나는 소름이 돋아난 두 뺨을 손으로 쓸었다. 뒷머리가 당겼고, 미간이 저렸다. 주위에 번쩍거리는 반딧불이 수십 마리가 날아다녔다. 대체 뭐였을까? 머리를 손으로 누르자, 곧이어 끝도 없는 생각의 바다가 펼쳐졌다. 마치 몇 시간 동안 한가지 생각을 골똘하게 한 것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감각, 복합적인 감정들이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튀어나왔다. 곧이어 손을 적시는 미끄덩한 감각이 날아들었다. 비릿내와 단내, 그리고 시큼한 냄새를 밟고 구린내가 일어서다 사라졌다. 곧이어 알 수 없는 만족감과 짜릿한 성욕 사이로 상실감이 양 떼처럼 지나갔다. 그 뒤로 분노가 폭풍처럼 뇌를 할퀴고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들기도 전에 안도감이 뇌리에 내려앉았다.

내가 멍한 얼굴로 술집 한 귀퉁이를 노려보자 선호가 말했다.

“괜찮을 거야. 다들 처음에는 그래. 나도 그랬고.”

“이거, 막,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올라. 너무 생생해. 세상에.”

“해석기가 전극으로 네 머릿속에 드라마 요약본을 쏴 준 거야. 감독이 의도한 감정과 독자가 느끼는 감정들을 모두 추려서 네 머릿속에 입력시켜준 거지. 어때? 해석기 처음 써보니까 좋지 않아?”

“좋아? 뭐가 좋아? 주인공과 적대자의 공생적 악연 속에서 싹트는 로맨스 따위를 내가 좋아할 리 없잖아. 잠깐만, 뭐라고?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선호는 안경을 올려 쓰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해석기를 머리에 썼다. 그러고는 화면을 재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호는 살충제를 뒤집어쓴 벌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잠시 눈가를 찌푸리더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다.

“어, 주인공과 적대자의 공생적 악연이 서사 진행 과정에서 로맨스로 발전하는 모습이 별로라고 이야기했어. 하지만 감독은 악당과 주인공의 연애가 21세기 적인 법률에 따른 차별의 서사를 철폐하고 더욱 발전한 형태의 인류사적 아가페의 가치를 작품을 통해 선보이고 싶은 거야.”

나는 입을 쩍하고 벌리고서 선호를 노려보았다. 이놈이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유창하게 했던가? 말도 되지 않았다. 지난번 합방 때도 우물쭈물거리고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조회수가 안 나오지 않았던가? 내가 눈을 부라리자, 선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해석기를 벗었다.

“별거 아냐. 해석기가 내 머릿속에 쏴준 요약본과 감정을 그대로 읊은 것뿐이야. 어때? 신박하지 않아? 이게 제대로 유행을 타게 되면…….”

그다음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 이건 불안한 확신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나는 확인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래. 저런 게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요약을 좋아하는 시대라고는 해도 적어도 누군가는 읽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선호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선호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석기를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쓰다가 만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는 호언장담했다. 그는 뇌가 편해진다고 말했다. 멍때리고만 있어도 정확한 정보와 느껴야 하는 감정들이 머릿속에 콕콕 박히니 너무 편하다고.

결국 우리는 해석기에 관해 토론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딱 하나였다. 해석기가 머리에 쏘아준 정보가 너무 강렬하다는 점이었다. 혹시라도 뇌신경이 직방으로 망가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을 노려보며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 불빛 주위에는 벌써 벌레들이 꼬였다. 나는 불빛 속을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문뜩 해석기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설마 해석기가 인간들을 유혹하는 새로운 가로등 불이 되려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자, 라이터가 주머니 밖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라이터를 주웠다. 허리를 굽히자, 뱃살이 눌려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몸을 곧추세운 뒤에 숨을 몰아쉬고서 담배를 하나 꺼내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부디 해석기의 운명도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해석기가 유행을 타기까지 불과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

 

유튜브 구독자 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조회수는 반년 전에 비해 1/9로 줄어들었다. 나는 씁쓸하게 마지막으로 올린 영상들을 살폈다. 댓글에는 너무 길다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10분이 긴 시간인가? 숏츠가 나왔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적어도 숏츠와 유튜브 사용 연령대가 달랐고, 서로의 목적이 달랐다. 하지만 해석기가 두 매체 모두를 집어삼켰다.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댓글의 반응을 보기만 해도 시대가 변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글자로 된 댓글을 다는 이는 없었다. 대부분의 댓글에는 이모티콘이 가득했다. 해석기로 쉽게 해석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이모티콘들이었다. 문제는 해석기가 없으면 그 이모티콘이 함유한 뜻을 파악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확 유튜브에 댓글은 문자로 적어달라고 공지를 올릴까? 하지만 그랬다가 조롱만 당할 게 뻔했다. 물론, 이제는 조롱도 이모티콘 몇 개로 하는 시대다 보니 당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내게는 해석기가 없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쉬면서 인터넷 창을 바꾸었다. 넷플릭스에 새로 나온 기대작을 틀었다. 다음에 리뷰할 영화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내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에이전시에서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전소민 팀장이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오, 안녕하셨나요? 장혁 씨.”

“네. 안녕하세요.”

간단한 안부 인사 끝에 전소민 팀장은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최근 내 유튜브 조회수를 언급했다. 1/9가량 조회수가 떨어졌다는 점이 문제라면서 새로운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혁 씨. 혹시 프로그래밍 가능하신가요?”

“아뇨.”

내가 짤막하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은 괜찮노라 말했다.

“그래도 장혁 씨는 영화 평론 분야라서 아직은 괜찮아요. 다른 유튜버들은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죠.”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가요?”

“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요즘 유튜브 쪽으로는 광고가 안 달릴 정도예요.”

그녀의 한마디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광고가 안 달린다니. 그건 그냥 유튜버들의 종말을 뜻했다. 광고 비용으로 먹고사는 중소 유튜버들은 다 죽을 것이고, 나 역시 위험했다. 나는 팀장에게 물었다.

“혹시 회사 차원에서는 대책을 내놓은 게 없나요?”

팀장은 지금은 버티는 수밖에 없노라고 말했다. 일단 공이 해석기 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해석기에 맞춰 콘텐츠를 짜야 한다고. 팀장은 곧 해결책을 내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란 말을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꺼지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전화를 거실 소파에 던져놓았다. 그러고는 머그잔을 든 손을 축 늘어뜨렸다. 머그잔 속에서 물방울 몇 개가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깊이감 모를 무기력감이 덮쳐왔다.

지금 영상을 찍어야 하나? 어차피 찍어봐야 조회수도 안 나올 게 뻔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도 힘들었다. 40 넘어 경력도 없는 사람을 누가 채용하랴? 답이 없었다. 굳어버린 머리는 술을 갈구했다.

선호라도 불러 볼까? 하지만 핸드폰까지 걸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공지능 스피커를 불렀다. 인공지능 스피커는 재잘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네, 장혁 님. 어디에 전화를 걸까요?’

“선호에게 전화를 좀 걸어줘.”

인공지능 스피커는 알겠노라 말했다. 스피커에서 수신음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번 더 걸었지만, 선호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재깍재깍 전화를 받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니. 이 녀석까지 날 무시하는 건가?

화가 치밀었다. 나는 뒤뚱거리면서 소파까지 다가갔다. 그러고는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왜 전화를 안 받느냐는 둥. 그따위로 살지 말라는 둥. 머릿속에서 팝콘처럼 튀어나온 문장들을 조립해서 보낸 문자였다. 하지만 읽었다는 표시는 뜨지 않았다.

나는 선호 욕을 하면서 TV를 틀었다. 오랜만에 튼 TV 화면에는 광고가 짧게 지나갔다.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의 편지’ 리메이크 드라마 광고가 지나갔다. 나는 채널을 돌렸다. 때마침 뉴스채널이 떠올랐다. 마침 해석기를 놓고 늙은이들이 토론 중이었다. 둥근 데스크에 빙 둘러앉은 사람 중에 50대보다 아래인, 젊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많은 짤막한 단신이 노인들의 발밑을 빠르게 지나갔다. 노인들은 해석기를 놓고서 자기 경험을 늘어놓았다.

“이제는 불명확하거나 자주 쓰지 않던 감정에도 명확한 색을 입힐 수가 있게 된 겁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목성에 간 탐사선이 적외선과 전파를 분석해서 소리로 변환시켜 주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셈이죠.”

“혹시 이런 RUR 기계의 무분별한 사용이 아이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TV가 아이들을 망친다고 했었죠. 그다음은 컴퓨터게임과 만화였고, 그다음은 인터넷이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TV와 인터넷을 보며 자랐지만, 지금 우리는 범죄자가 되거나 일탈을 즐기는 반사회성을 띤 성인으로 자라지는 않았죠.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그런 걱정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뉴스에 나온 상대적으로 젊은 뇌신경학 교수는 그렇게 말했다. 술김에 화가 치밀었다. 개새끼들, 평소에는 그렇게 이것저것 사소한 것까지 중독된답시고 죄다 반대하더니!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손에 잡힌 것을 TV에 집어 던졌다. 하지만 TV는 부서지지 않았다.

부서진 것은, 아니, 정확히는 찢어진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찢어진 것은 내 손가락뿐이었다. 들썩이는 탁자 모서리에 손바닥이 긁혔다. 씹힌 종이처럼 손바닥 살갗이 상처를 따라 밀려 올라가 있었다. 희미하게 피가 맺히는 걸 보자, 또 돈이 들어갈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그래, 그래야 했다.

 

.

 

촬영을 마치자, 다른 유튜버들은 내게 악수를 권했다.

나는 그들과 악수하고서 곧 영상을 편집해서 올리겠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과학 유튜버 한 분이 내게 다가왔다. 안경을 쓴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악수를 받아주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참고 자료가 필요하시거나 편집하실 때 어려운 용어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네. 아, 이번에 제시해주신 자료 정말 좋았어요.”

“그렇죠? 요즘 미국에서도 RUR-200의 유해성을 주제로 활발하게 논의가 오가는 중이더군요. 강경론자들은 RUR-200이 치매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렇군요.”

내가 과학 유튜버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유튜버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괴상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빨간 부직포 같은 걸로 만든 가면이었다. 하지만 만듦새가 좋지 않았다. 미키마우스와 프레디 크루거의 유전자가 뒤섞인 괴물을 주먹으로 몇 대 때린 것 같았다. 그는 거대한 쟁반처럼 생긴 가면에 달린 귀를 손으로 튕기면서 말했다.

“두 분은 앞으로 유튜브가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 전 하나 만드는데 로케이션 비용부터 겁나 들어요. 그렇다고 이미 자극적으로 나온 영상들의 자극을 줄일 수도 없고요.”

“글쎄요. 저도 과학 소개는 계속하겠지만, 당장 저도 논문 요약하려고 해석기를 사용하는 처지라.”

과학 유튜버는 깡마른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가면을 쓴 유튜버 역시 자기도 해석기를 쓴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 해석기의 기종을 물으면서 화기애애하게 쑥덕거렸다. 두 유튜버는 해석기에 관해 말할 동안, 나는 일 때문에 먼저 가겠노라고 말했다.

내가 가든 말든 촬영장 인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면서 핸드폰을 켰다. 낡은 핸드폰은 건물 밖으로 나갈 때쯤에나 완벽하게 켜졌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스튜디오에서 대략 100m가량 떨어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폰에서 영상을 찾았다. 폰에 담긴 영상을 누르자, 영상이 재생되면서 3시간 전의 내 모습을 비추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과학 유튜버이신 이과마왕님과 생물 크리에이터 마귀님을 모시고 토론을 진행하려 합니다. 요즘 해석기 사용으로 인해 영상매체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데요…….”

영상 속의 나는 재잘거리면서 말했다. 뒤룩뒤룩 찐 살 때문인지 내 모습은 말하는 버터에 가까웠다. 하지만 말하는 버터는 생각보다 말을 잘했다. 아무래도 그간 영상을 찍으면서 짬밥이 생긴 모양이었다.

내가 뿌듯해하는 사이. 버스가 엔진 구동음을 으르렁거리면서 정류장으로 다가왔다. 나는 영상을 잠시 정지시키고서 버스가 멈춰서기를 기다렸다. 버스의 문이 오른편으로 비켜서자, 나는 버스에 올랐다. 계단을 올라 버스카드를 찍자, 한산한 버스 내부가 보였다. 하지만 그 한산한 공간 속에서도 해석기를 쓴 5명의 사람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노려보다 뒷문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광고 덕분에 햇빛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늘 속에 숨어 버스를 핥고 지나가는 햇살에 반짝이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멀미가 가볍게 지나갔지만, 화면을 보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나는 영상을 마저 보았다.

유튜버 3명의 대담이었고, 각자 업계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했다. 과학 쪽은 더 이상 논문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콘텐츠를 뽑아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논문 역시 해석기가 요약해서 뇌리에 박아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가면을 쓴 생태 크리에이터는 자기 영상이 너무 빨리 소비된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5분 이상 시청을 해야 실질적인 조회수가 오른다는 점을 언급했다. 해석기가 15분 영상을 순식간에 요약해서 공유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회수는 낮았다.

나 역시 어려운 점을 공유했다. 사실 두 사람보다 내가 더 어려운 처지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영화의 감정 포인트가 담긴 해석기 코드를 찾았다. 그것만 있으면 평론가 못지않은 해석과 감정을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았다. OTT에서 스트리밍되기를 기다렸다.

스트리밍이 시작되면 그들은 1년 넘게 찍은 1시간 반짜리 영상을 단 1분 만에 소비했다. 모든 매체가 더 이상 산업을 유지 할 수 없었다. 이 메뚜기 떼가 먹어 치우는 작품들의 숫자를 따라갈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영상 산업 자체도 해석기에 의해 코드로 압축되고 있었다. 장르는 파괴되었고, 뉴런을 어떻게 자극하는지에 따라 축소되고 있다고 들었다.

영화를 평론하던 나 역시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석기에 우려를 표하는 영상에 내 분량은 가장 적었다. 제일 많은 건 과학 유튜버였고, 가면을 쓴 유튜버와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에이전시에서는 과학적으로 사람들에게 해석기에 대한 우려를 심으려는 모양이었다. 과학 유튜버의 말에 따르면 해석기를 쓰면 쓸수록 사람들이 주위 환경에 무심해진다고 했다. 이 모든 기저가 일종의 치매와도 비슷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신문물에 과학을 끌어들이는 것은 옛날부터 잘 먹히는 선동법이긴 했다. TV 보면 바보가 된다느니, 게임을 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느니 하는 선동과 궤를 같이했다. 어릴 적에 이런 선동을 바보 같다고 여겼었는데. 이제는 이 바보 같은 선동에 내 목숨 줄이 달려 있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해석기가 정말 치매를 유발하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해석기를 내려놓고 빌어먹을 유튜브에 접속하기만 하면 족했다. 반년 전처럼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고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시대가 올까? 기술이 퍼지고 난 뒤에 퇴보하는 꼴은 본 적이 없었다. 스마트폰도 그랬고, 유튜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오늘 나는 최첨단 러다이트 운동을 벌인 걸지도 몰랐다. 역사에 기록되어 조리돌림 당해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후대의 조리돌림 따위야 무슨 상관이랴?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데 후대 일이야 알 바 아니었다. 아니, 빌어먹을 후대 놈들이 내게 한 푼이라도 쥐어줄 게 아니라면 놈들은 닥쳐야 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번잡하게 터져 나오는 사이. 어디선가 찢어지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곧이어 굉음이 버스를 때렸다. 나는 고개를 빼 들고서 차창 너머를 살폈다. 그러자 바로 앞 사거리에 널브러진 오토바이가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쪽으로 가자, 도로에 드러누운 사람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토바이 헬멧까지 벗겨진 것이 사고가 상당히 크게 난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도와줘야 했다. 내가 119에 신고하려 하자,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버스는 무정하게 출발했다. 나는 버스 기사에게 말했다.

“아니, 잠시만요. 저거 신고는 하고 가야죠.”

버스 기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머리에 쓴 해석기 주위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렸다.

“뭔데? 요약해봐.”

“뭐긴요! 방금 봤잖아요. 오토바이 사고 말예요.”

“사고? 거, 신고해서 뭐 하게? 이 사거리는 사고 자주 나요. 괜찮아. 죽든 말든 다 지 팔자지.”

나는 입을 벌리고서 버스 기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흔들리는 차량 속을 거닐면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아 나는 119에 신고했다. 119는 알겠노라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19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에서는 안내음이 주적주적 쏟아졌다. 다음 역은 광나루역 앞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내려서.

‘띠링’

알림 소리였다. 나는 핸드폰 상단에 떠오른 기다란 바를 바라보았다. 버스가 덜컹거리든 말든 나는 알람을 노려보았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짧은 생각이 스쳐 간 끝에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러고는 선호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

 

여전히 선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대신 유튜브 알람이 내게 선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국내 인문학 뉴스를 전하는 채널이었다. 그 채널 섬네일에 선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 채널에 들어갔다.

선호의 얼굴이 실린 영상을 틀자, 선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선호에 대한 4분 남짓의 영상을 본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평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말이 되나? 1위? 베스트셀러? 이게 말이 되나? 나는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일단은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벌써 온몸이 땀투성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정류장에서 집까지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걸음은 등속도로 움직였다. 손이 떨려서 엘리베이터 버튼도 힘들게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6층에 다다랐다. 나는 602호실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도 열쇠는 미끄러지듯 열쇠 구멍 속에 빨려 들어갔다. 도어록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책이 날 맞이했지만, 내 책은 없었다. 그런데 선호는.

나는 현관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었다. 바지와 신발을 같이 벗을 때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문이 제대로 맞물려 들어가지 않아 도어록이 삑삑 소리를 냈다. 놈이 울든 말든 나는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빨래 더미에서 양말을 집어 들었고, 식탁 위에 놓인 옷가지들을 추렸다. 그렇게 난 구겨진 옷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잠시 실감이 나다가 사라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선호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고? 그게 말이 되나? 애초에 놈은 처음부터 국문학과를 나오지도 않았다. 놈은 사회시스템공학부였다가 국문학으로 전과했다. 단지 공학 나부랭이를 공부하다가 코딩을 좀 배웠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심지어 동아리에서도 그의 작품은 욕만 먹었다.

반면에 나는. 내가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박수갈채 소리가 귓가를 날아들었다. 처음 쓴 작품을 아무도 비판하지 못했을 때 친구들이 쳐준 손뼉 소리와 비슷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박수치는 사람은 없었다. 눈두덩이 달아올랐다. 달군 쇠로 두 눈을 지지기라도 하듯 고통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동아리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장혁이 너는 진짜 글 잘 쓴다. 깔끔하고 좋아. 미리 사인이라도 받아 놔야 하는 거 아냐? 맞아, 베스트셀러 작가군에 들어갈 거 같은데.

내가 좋아하던 민아도 그렇게 말했다.

베셀 쓰려면 술이나 작작 마셔. 술은 이 누나가 대신 마셔줄게. 그리고 그날 밤 난 민아와 잠자리를 가졌다. 원나잇이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나질 않는다. 민아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집 앞 사거리에 서서 눈을 부라리며 민아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지금 보면 비대칭에 두꺼비 상인 얼굴은 젊음의 아름다움 대신 20대의 풋풋함이 묻어났다. 고약한 악취와도 같은 풋풋함이었다. 그건 그녀에게서 나는 악취가 아니었다. 내 썩어버린 풋풋함이 푹푹 썩어가며 내는 악취였다.

모든 게 버거웠다. 내가 했던 모든 충고가 떠올랐다. 너무 자만했던 내가 싫었다. 어쩌면. 글을 계속 썼다면. 공모전에서 떨어지든 말든 글을 계속 쓰고 노력했더라면. 수많은 가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파란불이 되고 다리는 횡단보도를 건넜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하철 입구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이 머리에 해석기를 끼고 지하철역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해석기를 쓰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나만이 기계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멍하니 검은 차창을 바라볼 동안 수많은 이들은 해석기를 머리에 쓰고 전류에 취해있었다. 광화문에 내릴 때까지 나는 해석기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역사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통과해서 또 계단을 올랐다. 지상과 지하의 애매한 경계선에 자리한 교보문고 입구 앞에 다다를 때쯤. 정문에 걸린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 광고 오른쪽 귀퉁이에는 선호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최초로 작성된 해석기에 호환되는 강렬한 소설.’이란 문구가 상단에 적혀 있었다. 제목은 ‘폭발하는 평론가’였다. 폭발하는 평론가?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소설 제목으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적합한지 아닌지는 내용을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문을 열자 한기에 가까운 선선한 바람이 몰아쳤다. 마치 차가운 납관 속에 들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계산 대 앞에 놓인 거대한 책장에서 선호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책장 한 줄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눈 닿는 곳마다 그의 작품은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선호가 쓴 책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겉표지에 싸여 있었다. 표지에는 핵폭발이 일어날 때 솟구치는 버섯구름들이 꽃잎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버섯구름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 위에 한 뚱뚱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 그것은 남자로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검은 얼굴에 내 얼굴이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책 한 권을 책장에서 집어 들었다.

그 표지 위로 투명한 비닐이 책을 보호했다. 슬쩍 읽어보고 싶었지만, 비닐 때문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책 자체는 상당히 가벼웠다. 거의 속이 빈 플라스틱 쪼가리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직원에게 이게 실제 판매하는 제품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럼요. 그냥 한 권 가져가셔서 계산하시면 돼요.”

깡마른 직원은 내게 말을 툭 던지고서 쌩하니 지나갔다. 나는 집어 든 선호의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캐셔가 계산을 마치기 무섭게 나는 비닐을 찢었다. 비닐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자,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객님, 쓰레기 버리시면 안 돼요. 고객님!”

쓰레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새끼는 뭘 어떻게 썼단 말인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교보를 빠져나와 계단을 쪼르르 내려갔다. 그리고 개찰구 앞에서 슬쩍 책을 펼쳤다.

“아니, 이게 뭐야? 이게 뭔…….”

나는 책을 바라보았다. 아니, 책이라 생각했던 플라스틱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케이스에는 짤막한 코드가 몇 줄 적혀 있었다. 그게 다였다. 나는 도망쳐 나온 서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비원이 날 붙잡아 세웠다.

“고객님.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리시면 안 됩니다.”

나는 알겠노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경비는 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경비는 미안하면 다냐고 말했다.

결국 짜증이 치밀었다.

“씨발, 미안하다고 하면 됐잖아! 뭘 어쩌라는 거야? 미안하면 다지 뭘 더 바라는데? 비켜, 바쁘니까!”

내가 쏘아붙이자, 경비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든 말든 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가 쫓아오는 듯했지만, 지금은 놈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아까 책을 구매했던 카운터로 향했다. 점원이 계산하는 중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여자를 밀어내고서 계산대 앞에 섰다. 여자가 항의했지만, 나는 아까 산 플라스틱 케이스를 내밀었다.

“이거, 이거 안에 내용물이 없잖아. 내용물이 어디 있어?”

“고객님. 차례를 지키셔야…….”

“내용물이 없다고! 내용물이 어디 있느냐고!”

“고객님, 그건 원래 내용물이 코드가 답니다. 해석기로 들으시면 됩니다.”

점원은 조용히 말했다. 경비까지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경비의 손을 뿌리쳤다. 더는 이 빌어먹을 서점에 볼일이 없었다. 아, 서점이라 불러주기도 우스웠다. 그냥 플라스틱 공예품을 파는 잡화점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았다.

나는 말없이 이 거대한 ‘잡화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싸울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더 이상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즐거움은 느낄 수 없는 걸까? 해석기를 사용하지 않을 자유는 없는 건가?

하. 나중에는 기계에게 밥도 대신 먹어달라고 하겠군. 나는 지하철에 올라타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곧 길고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퇴근 시간에 접어든 만원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이 모판처럼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해석기를 쓰고 있었다. 머리 위에 달린 플라스틱이 라벨처럼 번들거렸다. 나는 몸서리를 치다가 지하철에서 내렸다. 도저히 지하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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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올린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조회수는 1,000회를 넘기지 못했다.

댓글 역시 9개가 고작이었다. 하나같이 지난 백 년 동안 해온 선동을 또 반복하느냐는 성토뿐이었다. 뇌가 망가져 봐야 술 마시는 것보다는 낫다는 댓글도 있었다. 반박 영상이라도 찍어 볼까 싶었다. 하지만 같이 영상을 찍은 과학 유튜버는 며칠째 연락을 받지 않았다. 생물 크리에이터 쪽도 두 달 전을 마지막으로 영상을 올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 다 다른 일을 찾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쓸모없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연락이 없는 건 두 사람뿐이 아니었다. 에이전시에서도 연락은 없었다. 팀장은 바쁘다고 내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답장도 늦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버려지는 모양이었다. 선호 역시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달 사이 몇 번이나 걸었지만, 문자도 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부숴버리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베스트셀러 소설 하나 냈다고 사람을 깔보다니.

“재수 없는 새끼. 꺼져버려! 그따위로 살아라, 이 개새끼야!”

나는 소주병을 던졌다. 병은 총알처럼 벽에 처박혀 산산조각이 났다. 크고 작은 파편이 술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저리가 났다. 내가 발을 구르는 사이. 소음들이 날아들었다.

켜놓은 뉴스채널에서는 오늘 뉴스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끊어졌다. 단신을 알려주던 자막도 나오지 않았다. 옆집에서도 고함이 날아들었다. 밖에서는 빠르게 내달리는 오토바이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현관 인터폰이 따르릉 울렸다.

나는 반쯤 취한 상태로 인터폰을 받았다. 그러자 나이 지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경비원이었다. 그는 내게 층간 소음 때문에 항의가 있었노라고 말했다. 빌어먹을 노친네 같으니. 나는 경비원에게 소리를 질렀다. 층간소음이고 나발이고 꺼지라고 말이다. 노인은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짜증이 치밀어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옷을 입고서 현관에 섰다. 하지만 그냥 나갈 수는 없었다. 맨정신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었다. 널브러진 술병들 사이에서 나는 켄터키 버빈을 꺼내 들었다. 빌어먹을 빨간 촛농이 병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특이한 디자인의 술병 버빈이었다. 누가 예전에 선물로 준 녀석이었다. 누가 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켄터키 버빈의 빨간 액체를 흔들면서 다시 현관으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뜯는 거지? 촛농을 손톱으로 긁다가 화가 치밀었다. 확 병목을 신발장 선반에 내리쳐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술이 쏟아질까 두려웠다. 다행히도 촛농 뒤편에 살짝 튀어나온 라벨 하나가 보였다. 라벨을 당기자 촛농이 벗겨지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병뚜껑이 보였다. 사막을 지나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나는 잽싸게 병뚜껑을 열었다.

따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병뚜껑은 살짝 병에 새겨진 나사산을 긁으면서 열렸다. 버빈의 톡 쏘는 스파이스 향이 올라왔다. 군침이 절로 도는 향이었다. 병뚜껑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뒤 병나발을 불었다. 몰칵 밀려드는 복합적인 향기와 아린 알코올 냄새가 정수리를 찔렀다. 그 바람에 술이 역류하는 하수구 구정물처럼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목덜미를 따라 아까운 술이 흘러내렸다.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술이 아까워 화가 더욱더 거세게 치밀었다. 확 신발장을 쓰러뜨릴 기세로 문짝을 세게 열어젖혔다. 신발장이 앞뒤로 흔들거렸다. 그러든 말든 신발 장 안에서 신발을 꺼내 바닥에 팽개친 뒤 신발을 구겨 신었다. 신발이 내 발을 받아들이기 무섭게 나는 현관을 세게 닫았다. 문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세차게 닫혔다.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났고, 손이 떨렸다. 위는 쓰렸지만, 화가 나서 도무지 머리가 돌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앞집 사람이 문을 열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안경 쓴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 날 모른척하고서 쓱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금쇠를 채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날아들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나는 이를 갈았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노인 하나가 문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면서 날 바라보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곧이어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섰다. 1층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나는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가만히 술 먹는 것도 못 하다니. 술 먹다가 소리 좀 질렀다고 지랄이야? 나는 아파트 공동 현관에서 경비실을 노려보았다.

정말 지랄이 뭔지 보여줄까? 가슴 속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는 불길을 억누르면서 켄터키 버빈을 마셨다. 톡 쏘는 향이 내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머리가 조금은 다른 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은 경비 따위나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다 해석기 때문이었다. 해석기, 그 망할 것이 문제였다. 놈을 죽여야 했다. 빌어먹을 기계를 전부 고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주위를 노려보며 길을 가로지르자, 사람들이 하나둘 비켜섰다.

“저거 영화 평론가 아니야?”

어디서 누군가가 말했다.

“음, 장혁이었던가? 그 유튜버잖아.”

“왜 저러고 다닌다냐?”

“모르지. 누가 알겠어? 네가 요약이라도 해보든가.”

나는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나는 인간 머리로 만든 갯벌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개처럼 짖었다.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를 질렀다. 그러든 말든 사람들은 해석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석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매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과 운전하는 사람들 역시 24시간 해석기를 놓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매체를 빠르고 편하게 보기 위해서 해석기를 24시간 가동했다.

예술 뿐만 아니었다. 뉴스, 교육, 모든 분야에서 해석기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 누구나 고급스런 어휘를 구사할 수 있었다. 모두가 요약된 모든 것들을 알았고, 모든 이들이 자신이 아는 것을 과시했다. 그에 반해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장 바보 같던 선호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하며 날 깔보기 시작했다. 물론 대놓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점점 시크해지는 제스처와 짧아지는 문자를 보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란 인간은, 해석기를 머리에 쓰지 않는 인간은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화석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유튜브 구독자 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제는 유튜브 자체가 사양 산업이 되어갔다. 모두가 요약의 요약을 원했고, 요약은 코드로 통일되었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잘나가는 것은 깃허브란 사이트뿐이었다.

나 역시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뭐가 뭔지 어지러운 코드 덩어리 사이트였다. 그 흔한 다운로드 버튼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깃허브를 잘만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더 효율적으로 이야기를 압축해줄 정렬 코드를 찾았다. 그 코드를 해석기에 설치하면 해석기는 더 자극적으로 감정을 짜준다고 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감정은 내 뇌가 느끼는 감정 아니었나? 타인도 아닌 전기를 뿜어대는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감정인가? 아니면 지금, 알코올 냄새 나는 이 감각이 진짜 감정인 건가?

그래, 어느 쪽이 진짜든 상관없었다. 내 눈에 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계에 종속된 좀비들이었다. 빌어먹을 좀비들. 놈들의 군체의식을 끊어야 했다. 놈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해석기들을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해석기를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거지?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술병을 단번에 들이켰다.

향신료 내가 풀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알싸한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고는 길가에 세워놓은 택배차를 노려보았다. 나는 차를 향해 다가갔다. 마침 택배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도 꽂혀 있었고, 무엇보다 시동이 걸려 있었다. 마치 트럭이 날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른 타. 장혁아. 얼른. 네가 괴물들을 죽일 수 있어.

“아냐. 난,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괴물을 죽이는 건 간단해. 네가 날 몰고 기지국을 들이받는 거야. 기지국을 폭파하는 거지. 그러면 분명 좀비들이 사람으로 돌아올 거야. 트럭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런가? 나는 핸들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거울에는 초췌하고 충혈된 두 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된 거야. 다시 특별해질 때가 된 거라고.

트럭은 내게 속삭였다.

그래. 맞아. 더는 이딴 취급을 받으며 살 수는 없었다. 왜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선호 같은 놈이 어떻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머리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뭔가 야로가 있었다. 무언가 음모가 있었다. 확실했다. 누군가가 날.

“아저씨.”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트럭 운전석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유니폼으로 봤을 때 택배 기사인 듯 보였다. 나는 조수석에 던져놓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내가 병나발을 불자,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글자가, 요약을 좀 해주세요. 너무 길어서.”

“뭐?”

내가 중얼거리자, 택배 기사는 불안한 듯 말했다.

“나, 이거 요약이 안 돼서, 뭐, 몰라요. 그게……. 해석기가 잘 안 돼요. 충전을 깜빡했어. 어제. 충전을 했어야 했는데, 요약이 안 되니까 너무 복잡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속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술이 없으면 도저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버번을 들이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코올이 들어갔음에도 주위 풍경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들. 널브러진 사람들. 불타는 차량과 그 주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인파들이 보였다.

과학 유튜버가 말을 하긴 했었다. 해석기를 쓰면 결국 주위 환경에 무감각해진다고 말이다. 그 말이 정말인가? 단순히 선동용 구호 같은 게 아니었나? 아니면 내가 지금 환각을 보는 건가? 하긴 지금 술을 마셨다.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다. 어쩌면 내가 망가졌는지도 몰랐다. 세상이 망가지는 것보단 나 혼자 망가지는 게 나았다.

어차피 나는 쓸모가 없으니까.

나는 덜덜 떨리는 트럭의 액셀을 밟았다. 곧이어 트럭은 발을 동동 구르는 택배 기사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트럭의 핸들을 돌렸다. 경첩에 매달린 차 문이 휘청거렸다. 문은 곧 내 어깨를 살짝 때리고서 차체에 맞물려 들어갔다. 나는 그러든 말든 액셀을 밟았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다 문뜩 기지국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기지국을 날려버리자. 그래, 그러면 인터넷이 끊어지리라. 인터넷이 없으면 핸드폰이고 뭐고 죄다 바보가 될 것이다.

그래. 좋은 생각이었다. 기지국. 그걸 폭파해야 했다. 망할 전파탑이 무너지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모두 다 해피엔딩이었다. 그러기만 하면. 해석기는 뒈질 것이다. 나는 구불구불한 길을 내달렸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한 손에는 술병과 핸들을 쥐고서 나는 기지국을 향해 내달렸다.

 

.

 

다행히도 기지국은 멀지 않았다. 아니, 이게 기지국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전파탑처럼 생기기만 하면 화가 치밀었다. 저 빌어먹을 것이 내 인생을 똥통에 처박았다. 그러니 내게는 저것을 부술 자유가 있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자유의 정의가 떠올랐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누릴 수 있는…….

“꺼져! 난 이미 피해를 봤다고!”

나는 핸들을 내리쳤다. 비틀거리는 트럭을 몰고서 빠르게 거리를 내달렸다. 그러고는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굉음이 사방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얼굴이 핸들을 때린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차창 위로 그림자가 서서히 짙게 드리웠다. 곧이어 무언가가 앞 유리를 뭉갰다. 움푹 안으로 밀려 들어온 차 지붕이 내 머리를 위협했다.

나는 일단 차에서 내렸다. 바퀴 아래 뭉개진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발아래를 뒹굴었다. 지독한 냄새가 뺨을 때리고 지나간 바람에 조금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 기분이 싫었다. 나는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수석 안을 보았지만,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병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맛이 간 게 분명했다. 나는 버번 병을 입에 가져댔다. 물보라를 치며 위장 속으로 내려오는 버번이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하늘이 돌았고, 난장판이 된 땅바닥도 돌았다. 그러나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더 많은 기지국을 파괴해야 했다. 그래야 해석기를 죽일 수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곧 그 소리는 걸음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빌어먹을 좀비 놈들. 다른 차가 필요했다. 다른, 좀 더 크고 튼튼한 차가 필요했다. 어디 그런 차가 없을까?

나는 스파크가 튀기는 전선과 고장 난 트럭을 빙 둘러 한산한 도롯가로 나갔다.

차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자,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구토감과 위가 조이는 감각이 기분 나쁘게 치밀었다. 나는 턱을 바싹 안으로 당기고서 눈을 부라렸다. 맞은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불탄 미용실과 바퀴에 깔려 뭉개진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시체나 불탄 미용실 따윈 거들떠보지 않았다.

술에 취한 정신으로 보아도 기이할 정도로 사람들은 차분했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119를 부르는 사람도 놀란 사람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버스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가 은행 옆을 지나기 무섭게 은행 앞 횡단보도에 초록색 불이 반짝거렸다. 나는 반짝이는 신호등을 노려보면서 핸드폰을 가지고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나는 왜 핸드폰을 찾고 있는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던 그때였다.

버스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그대로 치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외마디 비명과 둔탁한 소리가 뺨을 때리자, 나는 황급히 인도로 달음박질쳤다. 곧이어 버스는 곧장 트럭 꽁무니를 들이받았다. 거대한 차체가 뒤틀리면서 유리 조각에 금이 갔다. 출입문 쪽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문이 떨어져 나왔다. 트럭은 조금 옆으로 밀려났고, 버스 역시 중앙선 밖으로 밀려 나갔다. 버스는 곧장 불탄 미용실을 지나쳐 미용실 옆에 성업 중인 중국집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음과 소음이 마찰을 일으켰다. 곧이어 고막을 찢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솟구친 불길은 건물 외벽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건물의 유리창이 깨지면서 유리 비가 쏟아졌다. 유리 비는 길가를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커다란 조각 하나가 길 가던 여자의 정수리를 때렸다. 여자는 비틀거리면서 몇 걸음 가다가 쓰러졌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불타는 버스 안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버스뿐만 아니었다.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한 건물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창가에 매달린 사람은 등에 불덩이를 매달고서 3층 높이에서 떨어졌다. 목이 꺾인 인간은 온몸을 파르르 떨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식당에서도 몇몇 불덩이들이 몸을 일으키며 걸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그라든 몸을 펴려다가 털썩 자리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지만, 거리는 평온했다. 너무나 평온했다. 뛰는 사람도 없었고,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불타는 사람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버번을 입에 가져댔다. 조금이라도 두려움이 가실까 했지만, 두려움은 술을 먹고 더 커졌다. 가빠지는 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숨을 고르던 그때였다.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뭐야? 이거, 뭐야?”

“어라? 어?”

길을 가던 사람도, 가게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손을 멈추고서 머리에 쓴 해석기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손오공이 금고아를 벗으려고 애쓰는 모습과도 같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핸드폰에는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인터넷도 꺼져 있었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내가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솟아올랐다.

고개를 쳐들자, 고함은 내 면전을 후려쳤다. 휘청거리는 시선 속에서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그대로 도로 위에 쓰러졌다. 곧이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서너 번, 어쩌면 그보다 많이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몸을 웅크리자, 사람들은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 사람이에요. 얼핏 봤어요. 이 사람이 계속 앞에서 얼쩡거렸어요.”

“맞아요. 트럭에서 내렸어요. 화물트럭에서 뛰어내렸다고요. 그게 전봇대를 들이받았어요!”

“잠깐만 누가 요, 요약 좀 해줘!”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은 점점 고함으로 바뀌었다. 분노와 고함이 내 머리를 포위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주먹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다. 곧이어 날 부축하던 이들은 날 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는 발길질이 날아올까 싶어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날아온 것은 아우성이었다.

“신호가 잡히지 않아요!”

“인터넷이 꺼졌어! 와이파이는 어디 있는데?”

“데이터도 전화도 먹통인데 누구 전화 되시는 분! 아이, 씨, 급한데!”

사람들은 머리에 뒤집어쓴 해석기를 벗었다. 곳곳에서 고성과 시선들이 난잡하게 몰아쳤다. 지금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을 쳐야 했다. 나는 바닥을 기어서 도로를 가로질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가오던 오토바이 하나가 날 피하려다 인도로 돌진했다. 오토바이가 불타고 있는 버스를 때리고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관성 때문에 오토바이 운전자 역시 불구덩이 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앞에는 불구덩이 속에서 소사하는 이들의 비명으로 가득했다. 뒤에는 날 죽이려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날 쫓았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술을 잔뜩 먹은 탓인지 구토감이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나는 바닥에 토악질했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서 술과 으깨진 안주를 쏟아냈다. 그러자 날 쫓아온 사람들은 내 면상을 구토 자국 위에다 처박았다. 나는 상황을 살피려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파도처럼 밀려든 사람들의 분노는 날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이 날 어떻게 때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골이 흔들렸고, 얼굴이 부어 눈을 뜨기 힘들었다. 바지가 뜨끈한 걸 보니 오줌이나 똥을 지린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날 때렸다. 때리던 놈들 중 하나가 내 가슴살을 손으로 붙잡았다.

“개새끼가 남의 요약을 막는 거야? 왜애!”

“당장 내 감정을 돌려줘! 요약, 요약을 해달라고!”

사람들이 아우성을 시작했다.

“이 사람 해석기도 없어.”

“설마 해석기를 안 쓰는 거야? 야,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해석기는 원숭이도 쓸 줄 안다. 이 개새끼야.”

“자세히 보니까 이 사람 그 평론가 아냐?”

“맞네. 이 새끼 해석기 반대론자잖아. 야, 이 새끼 목줄 채워. 이 개새끼가 목줄도 없이 감히 어디서 사람처럼 걸어 다니려고 하는 거야?”

사람들은 으르렁거리면서 내 옷을 벗겼다. 어디에서 가져온 목줄이 내 목에 채워졌다. 목을 너무 꽉 조이는 바람에 숨도 쉬기 힘들었다. 구두와 하이힐, 벽돌 따위가 날아들었다. 놈들이 내 배를 때릴 때마다 배에서는 방귀가 튀어나왔다. 입 밖으로는 비명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만두란 상투적인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화가 풀릴 때까지 날 때릴 생각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옆에서 사람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새끼들이 전파가 끊겼다고 이 난리라니. 나는 실실 웃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해석기를 쓴 초췌한 노인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콘크리트 조각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멍멍, 월월, 낑낑. 애원하는 개처럼 울부짖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차도가 내가 쏟아낸 오물과 피로 엉망이 될 동안에도 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나는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내게서 관심을 끊고서 거리를 따라 사라졌다. 비난하던 목소리도 곳곳으로 흩어졌다. 막힌 혈관이 뚫리듯 사람들은 하나둘 거리를 따라 사라졌다. 도로 위에 홀로 남은 나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피를 뱉어내면서 눈알을 돌렸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하나 남은 왼쪽 눈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거리의 풍경이 반짝거렸다. 사이렌 소리도 없고, 차 소리도 거의 없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아무래도 해석기가 다시 작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강렬함에 중독이 된 이들은 또다시 해석기가 내뿜는 전류 속에 녹아들 것이리라. 그들은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불길과 차량, 그리고 나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이미 거리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거리는 평온했고, 여전히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재잘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목을 파고드는 목줄 때문에 목덜미가 아팠다. 점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몸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오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이게 현실인가? 아니면 꿈인가? 눈을 파고드는 상황들을 볼 때마다 목구멍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짖어, 이 개새끼야!

어디선가 무언가가 말했다. 그러자 전선으로 만든 채찍이 가슴을 때렸다. 나는 개처럼 짖고 싶었다. 왈왈왈! 90kg이 넘는 민둥민둥한 개새끼의 울음소리였다. 왈왈! 개는 제발 구해달라고 짖었다. 그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이제는 나오지 않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눈앞에 벌들이 날갯짓하듯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나 뇌리에 파고든 몇 마디가 사라지지 않았다.

왈왈. 나는 생각했다.

왈왈. 왈왈왈. 왈왈. 헥헥헥.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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