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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바늘이 움직이면

빗물

 

“선녀님, 나는 아이 곁을 떠나기 싫어요.”
아기 선녀가 볼 멘 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람 나이로 스무 해를 먹은 걸.”
진화선녀가 아기 선녀의 볼을 감싸며 말했다. 본래 선녀들은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 꿈 주인을 지키는 일을 했다. 아기 선녀는 제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들의 꿈을 맡았다. 그러다 스무 해가 지나면, 아기 선녀는 그의 꿈속을 떠나고 새로운 선녀가 찾아가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아기 선녀가 맡은 첫 아이도 곧 스무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아기 선녀들이 어른이 된 아이와 헤어지는 밤엔, 거기서 가장 빛나는 연꽃을 찾아 꺾어들고 나와야했다. 
“너무해요.”
아기 선녀가 입을 샐쭉 내밀고 말했다.
“무엇이 말이냐.”
진화는 짐짓 모르는 척 답했다.
“겨우 스무 해가 지났다고 새로운 선녀를 만나야 하는 게 말이에요.”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서 땅의 시간이 차면 어른이 되는 거야. 네가 떠나도, 다른 선녀가 꿈속에 찾아가 지켜줄 거란다.”
“그치만...”
“그 아이 마음을, 네가 제일 잘 알아줄 것 같니?”
그제야 아기 선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녀님, 꿈 속 어느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그때 무엇이 아이를 해치는지, 나는 아주 잘 알아요. 나는 그 애가 꼭 나 같아요.”
“그래, 네 덕분에 여태 꿈이 그 애를 해칠 수 없었어. 그러니 그 애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가 오래된 꽃을 꺾고 새 꽃을 피울 차례야. 그 애 마음 속 길은 네가 가장 잘 알잖니.”
“...알겠어요.”
진화가 마지못해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아기 선녀의 볼을 감싸주었다.
“알겠지? 다른 꽃이 아니라 가장 빛나는 연꽃을 꺾어와야 해. 자, 늦겠다. 다녀오거라.”
아기 선녀는 날개옷을 펼쳐 아이의 방으로 날아가며 생각했다.
‘빛나는 꽃을 꺾어오라고 하셨지? 하지만 그 애 마음 밭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꽃 같은 건 없던 걸. 그렇다면 아주 어렵게 겨우 한 송이 피운 것일 텐데.’
아기 선녀는 절대 꽃을 찾지도, 꺾어가지도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이는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들은 스무 살이 되면 무엇을 할지 이야기하며 들떠있는 요새였지만, 아이는 어쩐지 어른이 되는 일이 퍽 무섭게 여겨졌다.
-이제 여덟 살이니까, 엄마 없이도 지낼 수 있지?
시설 앞에서 아이 손을 놓던 날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저만큼 멀어지면 달려가 손을 잡았고, 또 다시 엄마가 이만큼 멀어지면 그만큼 달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그렇게 걸어가서 다시는 오지 않았다.
-이제 열 세 살이니까 네 앞가림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열세 살이 되던 해, 아빠가 찾아왔다. 아빠 손을 잡고 간 집에는 새 엄마가 있었다. 그때 새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빨래를 잘못 개거나 그릇에 얼룩이 남으면 얻어맞았다. 동네 어른들은 아빠랑 새 엄마가 무슨무슨 지원금을 받으려고 아이를 데려왔다고 수군댔다. 그 지원금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지 못했지만, 그 집을 떠나지 않으면 제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만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낮에 퍽하면 트집을 잡혀 새 엄마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는 밤이 더 무서웠다. 밤이면 아빠는 두 칸짜리 방 중 아이가 자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열여덟이면 거의 어른이구나. 여기선 네가 맏언니야.
오년을 그렇게 지내다 도망치듯 집을 나왔을 때, 겨우 찾아간 쉼터에선 그런 말을 건넸다. 왜 집을 나왔냐는 물음에 아이는 차마 밤에 아빠가 하던 짓을 말하지 못했다. 새 엄마가 때려서요,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그 말은 사람들이 납득해도, 집을 나온 진짜 이유를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아이는 이제, 아빠 눈을 피해 다니던 낯선 학교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쉼터에선 아이가 너무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고 이젠 어른이 되었으니 3월이면 나가서 혼자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담임선생님도, 방의 담당 선생님도 없었다. 게다가 일주일 뒤면 생일이라, 법적으로도 아이는 성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제 아이는 학교에서, 쉼터에서, 결국에는 모든 곳에서 떠나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꼭 쥐고 뒤척였다. 옆에 부대낀 동생의 어깨에 팔이 부딪쳤다. 잠에 드는 일이 두려웠다. 꿈에는 매일 아빠가 나와 예전 같은 짓을 했다. 하지만 까만 밤중에 혼자 눈을 뜨고 있는 일 역시 무서워서, 아이는 옆 자리 동생의 옆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잠든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드르륵.

그때 갑자기 창이 열리더니, 서늘한 바람과 함께 인기척이 났다. 
‘도둑인가?’
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속으로 떨었다. 선생님이나 쉼터 어른들, 혹은 다른 방 아이들이라면 문을 통해서 올 텐데 분명 창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부스럭.


‘어떡하지, 어떡하지...’
도둑이나 강도가 틀림없었다. 이대로 있다가 더 큰 일을 당할까 무섭기도 했지만, 속으로만 덜덜 떨면서 아이는 우선은 계속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그건 아이가 아주 자신 있는 일이었다.
“힝차.”
그런데 어째 이상했다. 한밤중의 침입자는 이상한 기합소리를 내더니, 챱챱챱챱, 자그만 강아지들이 걸을 때 나는 발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발이 작은 도둑인가? 설마 자기 발이 작은 것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범죄를...? 더 무서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등에선 식은땀이 송송 솟아났다. 아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챱챱챱, 소리는 가까워지더니 아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오지마, 오지마...!’
“에고, 완전히 늦을 뻔했네.”
아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귓가에 들리는 건 이 쉼터에 있는 막내보다도 훨씬, 훨씬 어린 여자아이 목소리였다. 그러곤 무슨 상황인지 미처 알기도 전에 자그만 손이 뺨에 닿았다.
“늦어서 미안해. 오는 길에 우는 별을 만나 달래주느라...”
여리고 말랑한 뺨이 아이의 뺨에 닿더니, 새근거리는 소리로 귀에 대고 종알댔다. 아이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뜬 바로 그 순간,
“에고고, 벌써 꿈이 시작됐겠다!”
아기 선녀가 낮은 어깨로 날개옷을 활짝 펼치고는 아이의 꿈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가 내민 손끝이 날개옷 끝자락에 닿았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이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아이가 꿈을 담당하는 아기 선녀를 보아버렸다는 것. 그 바람에 지금 이 아이는 그만 깨어있는 상태에서 꿈을 꾸게 된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만히 누운 채로 제 꿈을 누비게 되어버렸다.
‘갑자기 방이 이상해.’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낯선 곳으로 이동한 아이는 안개가 들어찬 듯 온통 희뿌연 꿈속에서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이 아닌 것 같아... 여기가 어디지?’
그때 저 앞에 어렴풋한 형체가 보였다. 한 발짝 다가서자 자욱한 안개 사이로 자그만 몸집이 드러났다.
“너는...!”
고운 날개옷을 차려 입은 어린 여자 아이. 분명 방금 전 방에 나타난 낯선 아이였다.
“꼬마야, 꼬마야!”
얼른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히고 불러보아도 아기 선녀는 아이가 보이지 않는 듯 엉뚱한 곳만 보고 있었다.
“야아아.”
급한 마음에 아이는 아기 선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아기 선녀의 눈동자가 아이의 눈동자에 닿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기 선녀는 그대로 눈길을 내려 제 발 끝을 쳐다보더니 입을 삐쭉 내밀고는 신발코로 땅바닥을 문질거렸다.
“쳇... 이거 봐, 여기 꽃이 어디 있다고. 만약에 꽃이 있다면 그건 엄청 엄청 귀한 꽃이니까 시들지 않게 내가 지켜줄 거야.”
“꼬마야...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아기 선녀는 아무래도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시 귀가 안 들리고 앞이 안 보이는 아이인가? 그런데 꼭 선녀옷 같은 걸 입고있네.’
갸우뚱하는데, 아기 선녀는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앙 다물더니 씩씩하게 팔을 내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아이의 뒤를 따라 제 꿈속을 밟았다. 그리고 눈 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우리 딸.”
소름끼치게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웅얼대는 그것은 거대하고, 어둡고, 축축하고 질펀한 털로 뒤덮여있었다. 괴물. 그 무언가를 보는 순간 아이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은 채 속으로 내뱉었다. 괴물. 괴물이었다. 밤마다 꿈속에서 숱하게 마주하던 바로 그 괴물. 깨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을 ‘우리 딸,’하고 부르던 괴물. 
“우리 딸, 우리 딸.”
대걸레처럼 두꺼운 털에 뒤덮인 팔을 허공에 휘두르던 그것이 동작을 멈춘 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 우리 딸.”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향한 순간, 텅 빈 눈 두 개가 반달모양으로 기이하게 일그러지며 괴물은 단숨에 몸집을 부풀렸다. 그리고 나풀대는 사지를 뻗쳐왔다.

헉, 헉.

눈을 질끈 감은 아이가 한참 만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 순간 마주한 광경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꿈속에서 늘 아이 위에 올라타 더럽고 끈적한 손아귀로 몸을 누르던 괴물은 꿈 속 아이가 눈을 뜬 순간 언제나 반질반질한 얼굴로 눈앞을 가득 채워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과 똑같은 괴물이, 지금은 처음 보는 저 작은 아이를 덮치고 있었다. 나비날개처럼 얇고 여린 선녀 옷을 걸친 어린 아이가,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으로 옆으로 웅크려 몸을 말고 있었다. 괴물은 한껏 부풀린 몸으로 아기 선녀의 몸을 꽁꽁 묶고 그 위를 제 세상인 양 누볐다.

키득키득.

괴물이 웃었다. 

 

(전문은 20주년 기념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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