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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마지막의 아이

2021.09.01 00:0009.01

마지막의 아이

 

갈원경


 

태어나는 순간에 축복을 한몸에 받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태어나는 순간에 저주를 그 몸에 받고 태어나는 아이도 있다. 수많은 목숨이 태어나는 우리의 세계 역시도 그러했다. 나는 이 시스템의 유지와 보완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 그래고 고풍스럽게 21세기 식의 용어를 써서 말하자면 국가공무원이다.

우리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자신이 맡을 아이들을 배정받는다.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저주받은 아이들’이다. 운명, 별의 흐름,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의 주변 상황들 모두를 종합해서 우리는 출산소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운명을 예정할 수 있다. 그에 따라서 저주를 받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세계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은 채로 조용히 살아가도록 세심히 살피는 것이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지금과 같은 국가기관이 생겨나는 데에는 꼬박 백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의 과도기적 모습에서는 모든 아이들을 감독할 수 없었다. 개개의 개체들이 자신의 후세를 낳는 것을 결정하고 심지어 자신의 집에서 아이를 낳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100% 생명을 관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일반에서 아이들의 탄생당시의 상황과 이후의 아이의 운명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출생률이 저하되고 아울러 기형아의 출생 역시도 늘어나면서 시스템적으로 신생아의 출생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저주 관리국’에 소속된 나와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난이도에 따라서 신생아 1명에서 10여명까지를 관리하게 된다.

 

“지금 맡고 있는 아이들을 다 관두라구요?”

바로 내 위의 감독자에 해당하는 치프의 명령에, 나는 어이없게도 이렇게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제가 맡고 있는 아이들은 신생아부터 15세까지 8명이나 돼요. 그런데 그 아이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란 말씀인가요?”

“그것은 우리 부서에서 알아서 배치하겠네. 그러니 그렇게 알고, 새로 맡을 이 아이의 관리에만 몰두해주기 바라네.”

“도대체 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요?”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관리하면서 한 건의 사고도 낸 적이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작년에는 우수관리사원으로 작은 표창까지 받은 사람이다. 저주받은 아이들은 그 운명 때문인지 제대로 성년으로 성장해서 천수를 누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들은 대개 어떤 사고에 휘말리거나 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 죽는 경우보다 여럿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 역시 그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관리하고 있는 아이의 숫자는 그 사람의 실력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한 상황에서 이건 터무니없는 강등 조치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니, 그 반대일세. 이 소하 군. 자네 정도가 되어야 이 아이를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치프는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소녀의 사진이었다. 나이는 열 대여섯 살 남짓 되었을까 싶었지만 표정은 어쩐지 나이보다 성숙해 보였다.

“프로파일을 보게.”

치프의 말에 나는 그가 내민 문서를 낱낱이 읽었다. 소녀의 출산모는 소녀를 태어난 순간에 숨을 거두었다. 소녀의 출산을 담당했던 의사와 조산사는 모두 한 달 안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소녀가 태어날 그 순간에 출산소 위에는 180년 만에 한 번 지구를 지나는 행성이 지나갔다. 소녀가 첫울음을 울었을 때 오랫동안 역사를 지켜오던 작은 섬나라 “리쿠리안”이 화산폭발로 멸망했고, 첫 번째 위탁모는 소녀와 놀이공원에 갔다가 소녀가 궤도열차에 탄 사이에 강도에 휘말려 죽었고, 그의 남편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소녀가 17살에 이르기까지 그 프로파일 안에는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이 가득한 게 당연하지만, 이 소녀의 경우에는 그 모든 것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거기에 적혀있진 않지만, 그 소녀를 담당했던 사람은 모두 죽었네. 첫 번째 관리감은 소녀의 10m 뒤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음주 자동차에 치였지. 두 번째 관리감은 고층에서 소녀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칼바람에 목을 베었네. 그 소녀가 여태 지나간 관리감만 벌써 다섯 명, 자네가 여섯 명째야.”

“우연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모든 것이.”

“그래서 우리는 결론을 내렸네. 이 아이의 탄생일과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말이지. 이 소녀는 ‘마지막의 아이’가 분명하네. 주변에 종말을 가져오고- 어쩌면 이 세계 전체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아이. 우리는 그런 존재를 예언한 많은 책들을 비웃어왔었네. 그런 것은 있을 리 없다고. 하지만 이 아이는, 충분히 그럴 만한 존재야. 이미 많은 증거가 그렇게 말하고 있네.”

치프는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자네에게 이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네. 그러기엔 무리지. 솔직히, 목숨을 내놓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지금 이 아이는 어디 있죠?”

나는 소녀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맡겨진 일은 마다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가르침. 어쩌면 소녀의 아이답지 않은 표정에 홀려 버린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지금은 서부 위탁센터에서 데리고 있네.”

하긴, 부모도 죽고 없다고 했으니 다른 보호자가 생길 때까지는 당연히 위탁센터에 있을 수 밖에 없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소녀를 관리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주겠나?”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목례하고 치프의 방을 나오려 했다.

“참, 이 소하 군. 오늘이 자네 부모님들의 기일이었지?”

치프를 돌아보았다. 치프는 내 아버지의 오랜 벗이었다. 그 분들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슬퍼해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그 때 갓 스물이 되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내가 직장을 구하고 하는 것은 치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보다 스무살이나 위인 치프를 그래서 나는 부모님처럼 신뢰하고 있었다.

“예,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사에는 참가 못하겠지만, 잔을 올릴 때 내가 자네 아버질 많이 그리워한다고 전해주겠나.”

“…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아마도… 지금 내가 이렇게 관리감이 된 걸 알면 아버지는 분명 자랑스러워 하셨을 거다. 치프를 항상 대단한 친구라고 추어주곤 하던 아버지였으니까. 부모님이 유언을 내게 남길 수 있었더라면 두분은 분명 치프를 믿고 의지하라고 이야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분명 홀려버린 거야. 나는 처음 실제의 소녀를 멀리서 보며 생각했다. 열일곱 살의 소녀라면 좀 더 밝고, 훨씬 더 감정 표현이 격렬하지 않던가? 능력센터의 원장실에서 나는 운동장에 서있는 소녀를 창 너머로 쳐다보았다. 짧게, 머리카락이 눕지조차 않을 정도로 자른 머리카락의 소녀.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지도 않고, 소녀는 단지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 속해 있는 존재처럼.

“글쎄요, 저 아이가 ‘마지막의 아이’라고 하셔도… 저희가 그걸 알아볼 방법은 없으니까요.”

원장은 조금 쓴웃음으로 내게 말했다. 지독하게 쓸쓸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맡은 아이가 세계의 파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여기엔 다들 버림받은 이들 뿐이고.”

“버림받았다.”

나는 원장에게 들리지 않을 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장은 이제 20대 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다. 이 시스템이 생겨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원장도 어쩌면 부모가 양육을 거부한 경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언은, 솔직하게 저한테는 버거운 아이에요.”

원장이 말한 순간에,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이 똑바로 내 눈과 마주쳤다. 관리감의 의무 중에 하나는, 아이가 자신이 관리 대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 이런 상황을 모면하는 자연스러운 대처 방법을 몇 가지 떠올렸고, 그중 하나에 따라 행동했다. 그건 최대한 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원장 쪽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야의 끝에서 소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죽어가는 짐승을 보는 것 같은 안쓰러운 얼굴. 일순간 나는 이 소녀가 내가 관리감인 것도, 자신의 주변에서 관리감이 몇이나 죽어나갔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작문 수업에서 이언이 쓴 글이에요.”

원장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백만이 보이는 종이 한가운데 문장 하나가 커다랗고 굵은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그럼 잘 들어, 나는 영원히 사랑을 저주하겠다.’

이것이, 나이 열일곱 살의 소녀가 쓴 글이라니. 어른인 척하는 치기어린 감수성의 글이라고 보아야 할까. 스무살 정도가 되어도 성인으로 대우받던 20세기라든가. 하지만 그건 미개한 시절의 일.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가져본 뒤의 스물 다섯이 적어도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는 나이다. 물론 영재성이 인정되어서 그보다 빨리 졸업하고 빨리 경력을 쌓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일단 저는 저 소녀의 전담이 되었으니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수습하기 위해서 일어섰다. 원장은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흠칫 멈추어 섰다. 소녀이, 이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갈색의 짙은 눈동자가 나를 뚫고 지나간다.

“안녕?”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모두 죽을 거야.”

“뭐?”

“하늘에, 죽음이 와.”

이 소녀에게 자폐 증상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관리하는 소녀와 마주친 사실보다도 나는 이 뜬금없는 말에 더 당황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에.

“잠깐 이언, 진정하고 나랑 이야기를….”

그러나 내 말은 곧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에 묻혔다.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대가 아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죠? 무슨…”

“다, 죽을 거야….”

이언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같은 순간에 우리 눈 앞에서, 벽이 무너져내렸다. 헬기의 소리에 묻혔지만 확실하게 고막을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이언을 끌어당겨 내 뒤로 숨겼다. 관리하는 소녀에게 불의의 사고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임무다. 건물 전체가 삐걱대며,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원장 대신 이언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곧 이언의 발놀림이 생각보다도 느리지 않다는 것에 놀랐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곧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우성소리와 함께 학생들 일부가 건물을 빠져나오고 또 일부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 건물은 기어코 무너져내렸다.

“맙소사.”

나는 겨우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욱신, 하고 어깨가 저려와 어깨쪽을 보니 옷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다. 무너져내리는 벽의 잔해에 부딪혔는지도 모른다. 그걸 느낄 순간도 없이 도망치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언은 내 얼굴을 보더니 주욱, 자기 옷자락을 찢어 어깨를 감쌌다. 처음이 아닌 것처럼 익숙한 동작이었다. 아이들이 어디선가 울먹이고, 소리치고, 흐느꼈다. 그에 비해서 이언은, 아까까지 그렇게나 겁에 질렸던 사람같지 않게도 담담해 보였다.

“…하늘에서, 죽음이….”

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을 때, 이언이 쉿, 하고 입을 막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긴 했어도 우리는 완전히 외부로 노출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우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이언은 숲으로 가려진 곳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정신없이 따라 걸었다. 울먹이던 아이들 중에 몇몇이 상황 파악을 했는지 울음을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곧 아이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등 뒤에서는 아직도 남아있는 건물의 잔해에 대고 헬기가 끝없이 폭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경찰한테 가자, 이언. 남은 사람들을 보호해 줄 거야.”

내 말에, 이언이 돌연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보호? 웃기지 마. 그 헬기, 시스템의 소속이었어.”

시스템이라는 말에 흠칫 아이들이 몸을 떨었다. 나와 같이 시스템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 이 시설 전체를 폭격했다고?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헬기를 보았다. 거기에 시스템의 문양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다.

“모를 줄 알아? 언니가 뭐하는 사람인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잖아. 언니 같은 사람 처음 본 것도 아니라구.”

“생각…?”

예상 못한 진행이다.

“‘저주받은 아이’, ‘마지막의 아이’, 그렇게 날 부르고들 있잖아. 언니같은 사람들, 벌써 몇이나 지나쳤는지 몰라. 언니가 이제 여섯 번째야.”

이언은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힘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통칭 ‘능력자’라고 하는 그들은,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엠퍼스라든가 상대에게 자신의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텔레파시스트라든가, 혹은 사물을 의지로만 움직이는 텔레키네시스 같은 자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소녀이, 고작 17살인 이 소녀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들은 바 없다. 어쩌면 시스템에서도 모르고 있었을지도.

“엠퍼스, 텔레키네시스. 그 정도겠지. 그만 중얼거려.”

이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거니?”

“이대로 죽을 순 없잖아. 가까운 곳에 동굴이 있어. 거기는 아직 아무 모르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우리 모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목소리를 막고 뒤를 따르는 소녀들은 나보다 더 이언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사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내 마음을 읽고 이언이 반박해 왔을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미심쩍은 추측 하나는, 헬기가 우리를 추적하지 않고 있는 것에 이언이 뭔가 작용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동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이동숫자는 10여명. 소녀라고는 해도 10대 중후반이다. 그들과 내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조금 기이한 일이었다.

동굴 안에서 아이들이 조금씩 흩어져 웅크리고 앉았다. 낮은 소리가 동굴에 조금 울리다가 곧 가라앉았다. 놀라운 존재감이었다. 학교 안에서 이언이 보였던 고립적인 행동이 환상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다.

“이해할 수 있어? 모두의 마음이 들리는 게 어떤 건지? 그 사람들의 반응이, 마음과 다른 목소리가 들리면-, 미칠 것 같지. 언니 역시 마찬가지야. 날 쳐다보고, 내 얼굴을 살피면서 맨 처음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어. 저 애가 ‘마지막의 아이’구나 하고. 그런 주제에 눈이 마주치고는 급히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잖아.”

“……그게, 내 일이니까.”

궁색한 변명이었다. 이언은 핏,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어쨌든 나, 피곤하거든. 좀 잘께.”

이언은 동굴 벽에 기대어 스르륵 잠들었다.

잠든 이언 옆에서 나는 동굴 안을 둘러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품 안에 갖고 있었던 셀cel이 생각나 꺼내 보았다. 갑작스러운 공습에 대한 정보든, 혹은 이 사건에 대한 외부의 소식이든, 무엇이든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소식들을 검색하기 전에 먼저 내게 남아있는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 그 아이의 담당 배정이 취소되었으니 본사로 돌아올 것. 급. /

이제와서 어쩌라고. 셀에 들어온 시간은 폭격이 있기 오분여 전이었다. 치프가 공습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메시지가 온 것은 한 번 뿐이었다. 내가 이것을 확인했는지의 여부도 본사에서는 알 수 있다. 이 셀을 가지고 있는 나의 현위치도. 그렇다면 공습 당시에 이미 본사에서는 내가 이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고, 학교 건물에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곧 그 셀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정밀한 기계일수록 쉽게 망가진다는 것은 21세기부터의 공식이다. 나는 그러고도 미덥지 않아서 셀을 몇 번이나 발로 밟아 확실하게 부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이언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언을 쳐다보았다. 셀을 망가뜨리는 소리가 아무리 굴 안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시끄러웠을까.

“쉴 새 없이 생각하는 사람이네 언니는. 머릿속에 생각이 쾅쾅 울려서 못자겠다구.”

아아, 그런 이야기였군.

“셀이라면 괜찮아. 이 동굴은 전파가 못 새어나가서, 예전에 수신한 메시지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야.”

이언은 몸을 탈탈 털고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아이들은 잠을 자고 있거나, 이언을 보고 뭐라고 말도 못하고 애처로운 눈빛만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대장같은 느낌이다. 이 아이들, 아까까지만 해도 운동장에서 이언만을 내버려 두고 함께 어울리던 애들이 맞나.

“헬기, 네가 못 오게 하는 거니?”

머뭇거리며 내가 물었다. 이언은 피식,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고는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들어가, 잔뜩 위축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 쪽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으슬으슬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도망쳐 나오느라 이 곳이 어떤 지역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었지만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 것하며 바깥보다 7-8도는 낮을 것 같은 온도를 보면 화산동굴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석회동굴처럼 물이 계속 떨어져내린다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된 이 곳에서 입밖에 내지는 않더라도 아이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지는 짐작되는 일이었다.

“이언,”

나는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얼굴만은 어려보이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지는 않는 이언이 나이에 맞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시스템이 왜 널 없애려고 한다는 건지… 말해주겠니?”

“짐작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그렇다면 곤란한걸.”

또, 차갑게 웃음.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 이 아이들이 왜 너를 이렇게 두려워하는지도. 나는 네가 시설에서 외톨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

“내가 그렇게 명령했어. 쓸데없이 주목받는 건 사양이라서. 아이들은, 무엇이 살기 위해 필요한지 알지. 어느 쪽이 자신의 편인지 잘 알고 있어.”

말문이 막힌 내게 이언이 다가왔다.

“잠시 바깥을 살펴보고 올테니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마. 이 애들한테 이미 말해뒀으니까.”

나는 그를 붙잡지도, 뭐라고 반문하지도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지금껏 맡았던 아이들과 나는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동호회의 선배언니로, 때로는 학교의 선생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그들이 정서적 결함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관리감이라는 사실도, 내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도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이언은 마치 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처럼, 이 굴 전체의 우두머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이언에게 반박하거나 맞설 힘이 없었다. 관리감에게는 원칙적으로 무기의 지급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언니.”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13살쯤- 혹은 그보다 좀 어릴 것 같은 단발머리 여자아이다.

“오빠는 무서워하는 거예요. 언니가 죽을까봐요. 언니, 관리감이죠? 우리는 다 알아요. 원장님이 이야기 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원장님까지 죽었으니까, 우릴 지키려던 사람은 아무도 안 남았으니까, 오빠가 저러는 거예요.”

“원장님이 이야기를 해 주셨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고… 원장님도, 우리랑 같으니까요. 원장님이 생각하는 건, 우리가 다 아니까요.”

“혜영이가 시설을 나갔을 때 원장님은 굉장히 많이 울었어.”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는 건, 그보다 서너살은 어려 보이는 꼬마였다.

“혜영이, 민성이, 도하, 기영이…, 모두 엄마 아빠가 되어 주겠다고 데리고 갔지만 모두 죽었어요.”

“그래서 원장님은 울었어. 자기는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다고, 계속 울었어.”

나로서는 그 남자가 우는 장면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더 기이하게 느껴진 것은 한 마디 말이었다. ‘원장님도 우리와 같다’는 말, ‘원장님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도 다 아니까’ 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공황에 빠지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이 아이들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더 이상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은 단 한마디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다가, 몇 시간 정도가 흐르고 나서 돌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공간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그건 매우 기묘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말을 건넸던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나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오빠가 와.”

그리고, 동굴 안으로 이언이 들어섰다. 등에 잔뜩 뭔가를 짊어지고.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이언에게서 짐을 나누어 받았다. 이언은 손에 들고 있던 렌턴을 켜서 중앙의 바위 위에 놓았다. 폭격된 시설에 지하 창고라도 있었던 것인지 이언의 짐에는 빵과 과일에서부터 상비약같은 것, 심지어 얇은 모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언은 사과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불그레한 사과를 받아들었다. 염체없는 말이지만 뱃속에선 이미 허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원장님도 ‘저주받은 아이’였니?”

“그래. 목숨과 바꿔서 거래를 했지. 뭐, 결국 죽여버렸으니 거래고 뭐고 없는 게 되어버렸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몇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살려주는 대신에, ‘저주받은 아이들’을 감시하기로 했다는 이야기야. 워낙에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그게 나름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엄청난 고문이었지. 죽으러 가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곧 죽으러 갈 아이들인 걸 알면서도 시설에서 맡아서 지켜봐야 했으니까.”

“자,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죽으러 가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을 보내다니? 곧 죽을 아이들이라니 도대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왜 ‘저주받은 아이’들의 결말이 그렇게 비참하겠어? 시스템에서는 우리를, 저주받은 아이들을, 내버려두지 못한다구. 우리들에게 당신같은 관리감을 붙여서 계속 감시하다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면 무슨 핑계든 대어서 없애버린단 말야. 내 어머니가 왜 죽었고, 내 관리감들이 왜 모두들 죽었다고 생각해? 나는 같이 죽을 거였어, 양모가 날 죽이려 했지만 난 놀이기구로 도망쳤어. 양부는 나와 같이 죽으려고 불을 질렀지만 나는 빠져나왔어. 더 이야기해? 첫 번째 관리감은 나를 차로 치였지만 나는 날아가서 숲으로 떨어지고 그 차는 난폭운전에 휩쓸려 뒤집혔어. 두 번째 관리감은 날 빌딩에서 밀어버렸지만 나는 난간에 매달렸고 떨어진 건 그였어. 시스템에선 계속 날 죽이려 했어, 이번에는 이 저주받은 아이들을 모두 한꺼번에 없앨 계획까지 세웠단 말야!”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동요해선 안된다. 이 아이는 능력자이고, 주변 사람들의 죽음으로 정서적으로 결함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아이들의 공상이 어떠한 체계를 가지고 그럴싸하게 들리더라도 그건 사실일 리 없다. 시스템은, 폭발할 시설로 나를 보냈을 리 없다.

“바보같으니.”

이언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맡은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해. 당신이 맡고 있는 한 죽이지 못했겠지. 당신은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설득하려고 하지 마. 난 믿지 않아. 저주받은 아이들을 도대체 시스템에서 왜 죽이려고 한다는 거니?”

“우리는, 하나면서, 전체거든요.”

단발머리 여자애가 대신 대답했다.

“저주받은 아이들이라거나 우리가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하는 건 핑계 뿐이에요. 일반인들은 단지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능력을 두려워해서, 그런 낙인을 찍는 거죠. 우리가 서로 완전하게 교감을 이루는 걸 무서워해서.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서 일반인들의 위에 서게 되지 않을까, 이 세상을 홀로만 살아가면서 최후까지 완전한 교감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하는 인간들에겐, 우리들은 정말 저주일지도 모르니까.”

“우린 다 아니까. 언니가 갖고 있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우리가 본 것을 언니에게 전해줘. 우리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야.”

“물론 모든 것을 공유하는 건 아니야. 우리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기도 하니까.”

마무리는 이언이었다. 나는 고개를 격하게 내저었다. 그럴 리가, 이십 삼세기가 오기까지 인류에게 진화란 없었을텐데. 신인종이라는 것, 생길 리가 없을 텐데. 능력자들은 몇 세기 전에도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런 건 그저 특이한 개체형질일 뿐일 텐데.

“하지만 우리는 또 우리와 같은 아이들을 낳겠지.”

“내 마음을 맘대로 읽지 마!”

새되게 소리치며 나는 몸을 움츠렸다.

“마지막의 아이는 우리들을 모두 규합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 우리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가르치는 구원자. 당연히 시스템에서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생기는 걸 바라지 않을테지.”

이언은 마치 그 말이 지칭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분명히 이언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 헬기의 눈을 피해 이 무리를 대피시키고, 그들이 숨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조달할 수 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무슨 능력에 의한 것인지 이언은 말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시스템에서 파악하고 있는 초능력 중에 하나임엔 분명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우리랑 같이 하자고는 하지 않아. 언니는 시스템에 속해 있는 사람이니까, 우리 말을 완전히 믿기도 힘들 거야.”

이언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길쭉한 두 개의 케이스였다. 장거리 릴레이 경주때에 쓰는 바톤처럼 생긴 것이,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지 움직일 때마다 타탁거리는 소리가 났다.

“파랑은… 우리 말을 믿기로 할 때 열 것, 흰색은 우리에 대해서 모두 잊고 싶을 때 열 것. 어느 쪽을 열든지 언니 맘대로 해.”

나는 영문을 모르고 이언을 쳐다보았다. 이언은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알아. 그러니까… 돌아가도 좋아. 나한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하면 아마 믿어줄 거야. 셀도 내가 부숴버렸다고 해.”

이언은 앞장서서 입구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마냥 두 개의 통을 품 안에 갈무리하고 동굴 입구까지 허우적거리며 나왔다. 이언은 더 이상 말이 없이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돌렸다. 내가 가는 것을 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언,”

그가 돌아보았다.

“너는… 그래서, ‘저주받은 아이들’의 구세주가 될 생각이니…?”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굳이 말한다면 ‘요한’이지.”

그가 곧장 몸을 돌려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말뜻을 물을 수 없었다.

 

걸어서 산을 내려가 다시 차를 잡아타고 관리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내가 이언을 만난지 24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언의 말대로 나는 관리국에 사고 당시에 이언이 나를 데리고 도주했고, 나는 산에 내버려졌다가 겨우 산을 내려왔다고 보고했다. 언뜻 거울에 비친 모습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관리국의 의사가 나를 검진해보고 가벼운 찰과상 뿐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나서야 치프는 나를 집으로 보내주었다.

업무상의 사고에 대한 보상으로 내게는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텅 빈 집에는 부모님의 제사상을 위해서 봐놓은 식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제사는 이미 틀린 일이었다. 나는 털썩 침대에 기대 앉아 두 개의 통을 꺼냈다. 그러고보면 신기한 일이다. 품안에 이 통이 들어 있었는데도 치프와 의사, 나를 만난 누구도 이 통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 역시 이언의 힘이었을까. 나는 두 개의 통을 양손에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어느쪽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걸까. 이 모든 것을 부수고 이언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 고려할 가치조차 없을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 도망쳐!

귓속에서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낮지만 또렷한 그 목소리는, 분명 이언의 것이었다.

- 어서, 나와, 그 집에서 나와!

반복되는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품에 두 개의 통만을 붙잡고 집을 빠져나와, 바로 앞 공원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 움직이지 마, 드러나면 안돼, 거기 그대로 있어!

이언의 목소리가 다시, 움직임을 제지했다. 나는 곧바로 집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그림자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얼굴도. 그건, 치프의 얼굴이었다.

“예, 국장님. 쥐덫은 전소됐습니다. 예, ‘마지막의 아이’가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분명 소각되었을 겁니다.”

목소리도 분명 치프의 것이었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타들어가는 나의 집을 보았다. 그들은 공원의 낮은 나무숲 사이에 몸을 숨긴 나를 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두 개의 통 중에 푸른 통을 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들 이보다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안에는, 길쭉한 단말기 하나가 들어 있었다. 패스워드를 넣으라는 말이 화면에 떠오른 채로.

- 패스워드, ‘마지막의 아이’

이언의 목소리에 따라 나는 단말기의 작은 키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단말기의 화면에 빼곡히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Code 22100511-2392032 이 소하

부 : 21900306-1194218 이 소훈, 저주받은 아이.

모 : 21930520-2018824 강 하영, 저주받은 아이.

비밀리에 출산을 시도하였으나 포착에 성공. 산모와 생부 사살.

위탁부 : 21871109-1118176 이 정호, 관리감

위탁모 : 21870908-2209182 김 미연, 관리감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화면에 뜨는 글들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내가 부모님으로 믿어온 이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던 그 순간에 나에 대한 임무를 마치고 다른 지구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는 내용이 화면에 나타났다. 처음부터 그들은 아이를 20년간 맡는 것을 계약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보장받았다는 것도.

- 아직 힘이 발현되지는 않았으나 유전적으로 보아 20세 이후 발현가능성이 높음. ‘새장’과 함께 소멸시키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임.

마지막의 문장은 이언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이것은 분명히 시스템에서 취급하는 기밀문서의 파일이다. 이 단말기도, 위조가 불가능하고 외부 유출도 불가능하며 유출된다고 해도 시동되는 방식을 해독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안전하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언이 어째서 이걸 입수할 수 있었는지는 곧바로 이해가 되었다. 아이들이 말했던 대로, 그들은 하나이면서- 또 전체니까.

- 그들이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제거하려는 거라고? 이 세계는 그렇게 해야만 지켜진다고? 그럼 잘 들어, 나는 영원히 사랑을 저주하겠다. 죽은 후에도.

갑작스럽게 기억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일깨워졌다. 그것은 이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피 속에서 흐르듯이 떠오른 목소리는 나직하고 굵고, 다정했다. 나를 가로막으며 서 있던 사람의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가 바로 내 아버지의 유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언어를, 나조차 잊고 있었던 그 말을, 이언은 들은 것이다.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의식 안에서.

나는 나머지 하나의 통을 열었다. 새하얀 통 안에는 단말기처럼 생긴, 그러나 껍데기뿐인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크게 웃음을 터뜨려버릴것처럼 허탈했다. 처음부터 내가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쪽을 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들은 확신한 것이다. 어차피, 내 마음속은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을 테니 당연한 것일까. 나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그 때에도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원장이 나를 보고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도, 소녀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것도, 이언이 내게 보여주었던 기묘한 확신들도, 다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 돌아오세요, 우리들의 동굴로, 우리들의, 어머니.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 우린 이미 많이 기다렸어, 너무 많이.

꼬마의 목소리, 그리고 비슷한 내용의- 굴 안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목소리임에 분명한 목소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귀를 채웠다.

- 나는, 우리는,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이- 내 목소리를 듣게 될 날을. 나는 먼저 오는 자, 길을 닦는 자. 이제 당신의 차례야.

이언의 목소리였다. 나는 일어섰다.

그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힘. 서로를 의식으로 연결시키는, 개인이되 집단인 우리들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소리에 검은 옷의 그림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검은 옷의, 치프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진다. 다른 하나는 내게 총을 겨눈다.

“마지막의 아이가 살아있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마지막의 아이’, 당신들의 시스템을 무너뜨릴 저주의 아이. 나는 눈을 감는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내 힘은 공간을 편린으로 쪼개어 나는 그 모든 조각에 존재하는 의식이 된다. 육체는 이제 무의미하며 의식은 전체의 일부가 된다.

“힘이 발현되었다!”

그들이 소리쳤다.

- 나를, 데려가줘. 너희에게로, 나에게로.

온 몸이 따뜻해지고, 뜨거워지고, 눈 앞이 희게 빛난다. 나는 손을 들어, 이 대기에 충만한 우리들의 전체 의식에서 힘을 빌려온다. 나는 요한의 뒤에 서는 자, 그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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