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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천둥 아이

2019.08.01 00:0008.01

천둥 아이

노말시티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입을 벌린 채 쏟아붓는 물줄기를 그야말로 목격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한껏 들뜬. 그러니까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들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저 바깥에는 물이 많을까 공기가 많을까. 정말 진지하게 물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폭포나 한껏 돌려놓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정말 공기보다 물이 많다면 구름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땅에 닿을 시간이면 구름과 땅 사이의 공간 중 절반 이상이 물로 차올라야 한다는 계산을 재빨리 한 나는 아무리 그래도 물보다는 공기가 훨씬 많다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그럼 그렇지 하며 바로 코앞에서 쏟아붓고 있는 물줄기를 무슨 착시 현상이라도 되는 양 무시하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걸 홀렸다고 하는구나 싶다. 그 계산 자체야 틀리지 않았다고 해도 그 비를 보며 그런 생각이나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 건 아무래도 미친 짓이었으니까. 무언가에 홀렸을 때는 딴에는 무척이나 침착하고 차분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 법이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세상의 아수라장에서 혼자 벗어나 여유 있게 움직인다고 느껴지지만 실상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그런 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비에 홀려 있었다.

나는 그때 도시에서 살다 방학을 맞아 잠시 시골의 외갓집에 내려와 있었다. 당시는 나무기둥에 흙벽을 세우고 기와로 덮은 옛날 집 대신 밋밋한 옥상이 있는 네모난 벽돌집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던 때였는데 외갓집 역시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앉은 오래된 집을 버리고 언덕 아래 논 옆으로 막 그런 양옥집 하나를 지어 이사한 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다른 무슨 이유에선지 평소에 날 떼어놓는 법이 없으셨던 부모님은 며칠 후에 내려오시기로 하고 마침 놀러 왔던 이제 갓 스물이 된 사촌에게 딸려 나만 먼저 외갓집에 내려보낸다는 결정을 하셨고 나는 마침 사춘기에 접어들어 세상 만물이 다 하찮고 만만해 보이던 때라 겁도 없이 흔쾌히 사촌을 따라나섰다. 정작 날 시골집에 데려다 놓은 사촌은 뻔질나게 읍내며 또 어딘가를 돌아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는 일이 없었고 나는 새로 지은 양옥집 대신 아직 멀쩡한 옛날 집에 올라가 방과 마당 사이에 놓인 툇마루에서 뒹구는 걸 좋아하였으니 어느 하나 부모님이 뜻하던 대로 되지 않은 셈이다. 무엇보다 뜻밖의 일은 그 엄청난 비였으니 폭우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불이 나게 전화를 돌리셨지만 마침 할머니도 근처 동생 집으로 마실을 갔다 발이 묶였던 터라 아무도 집 전화를 받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셨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물론 비에 홀려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나는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무섭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날은 비만 온 것도 아니고 천둥과 번개까지 내리치고 있었고 심지어 하얀 빛과 동시에 귀가 찢어지는 천둥소리가 망치처럼 내리 찍히고 그게 바로 새로 지은 양옥집 앞에 떨어져 논 한가운데를 비행접시가 내려앉은 것처럼 둥그렇게 태워버리는 걸 보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짜로 이상했던 건 그 엄청난 비를 아무렇지 않게 맞으며 집 앞길을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서도 하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그 길은 언덕 위에 있던 외갓집을 제외하고는 아무 곳과도 연결되지 않았으니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해도 잠시 안으로 들어와 비를 피할 만도 한데 그럴 생각도 없이 유유히 흠뻑 젖은 채로 걸어간다는 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그 아이를 불렀다. 얼마나 비가 심하게 내렸냐면 내가 그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 아이는 나를 돌아봤다. 또 하나 신기한 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가 입었던 옷. 웃옷에 달린 단추. 신고 있던 운동화. 심지어 그 운동화의 한쪽 끈이 덜 묶여 길게 늘어져 있었던 것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유독 그 아이의 얼굴만큼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때는 분명히 얼굴을 확인하고 내 또래거나 더 어리다고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말을 놓았을 텐데 지금은 나를 돌아보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다가오던 그 아이의 모습 중에서 일부러 얼굴만 지워 놓은 것처럼 밋밋하다. 사람의 얼굴이야 원래 한 번 보는 것으로는 잘 기억이 안 나고 두 번 이상은 봐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고 하니 그건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는 이상한 일 축에도 끼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아이는 내 옆으로 다가와 툇마루에 껑충 올라앉았다. 온몸에서 물이 흘러내려 툇마루를 흠뻑 적셨다. 나는 비가 들이친 툇마루 끄트머리를 피해 문지방에 붙어 앉아 있었고 사실 내 바지도 절반 정도는 젖어 있었기에 그 엄청난 비에도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다. 툇마루는 내가 몇 번 올라가 뒹굴다 보니 여전히 사람이 사는 집처럼 깨끗했지만 버려진 방 안에는 먼지가 그득했고 어느새 천장 모서리마다 거미줄이 처져 있었다. 젖은 바지로 그 안에 들어갔다간 금세 새까맣게 지저분해질 게 뻔할 테니까. 비에 젖은 바지야 금방 쨍해질 햇살에 말리면 그만이지만. 그러니까 그 비는 장맛비가 아니라 소나기였다. 비가 쏟아붓다 그치기를 반복했는데 나중에 뉴스를 보니 그렇게 내린 비만 하루에 육백 밀리미터였다고 한다. 뉴스를 보며 역시 공기보다 물이 많을 수는 없다는 내 어림계산에 만족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부모님께 자랑할 순 없었다.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셨으니까. 사실 난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심지어 친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왠지 너무 부끄러웠고 솔직히 뭐가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정말 미친 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무척이나 겁이 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그날의 일을 무시했고 툇마루에서 자다가 꾼 꿈이었나보다고 억지로 눌러 붙이며 살아왔다.

그 아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그 아이가 내뱉은 단어들은 또렷했지만 이상하게 순서가 뒤죽박죽이어서 그 아이와의 대화는 떠올릴 때마다 다른 뜻이 되곤 했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는 그 대화가 무척이나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즐거웠냐면 그 아이는 다리를 툇마루 밖으로 내놓고는 엉덩이만 걸친 채 팔을 뒤로 짚어 비스듬히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비를 피한 건 가슴 위쪽뿐이고 바지는 여전히 쏟아지는 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엔가 나도 모르게 그 아이처럼 다리를 밖으로 내놓고 앉아 있게 되었는데 그러고 서로 떠든 말들이라고는 흠뻑 젖은 바지를 보며 오줌싸도 모르겠다 난 벌써 쌌는데 같은 유치한 말들뿐이었으며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한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그게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말들이 서로 주고받은 건지 그 아이가 다 한 건지 아니면 내가 한 건지는 또 희미하다. 확실한 건 그 아이와의 대화가 무척이나 재밌었고 배를 잡고 웃었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떠드는 도중에 또 한 번 벼락이 내리쳤는데 이번에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지 번쩍하고 나서 한 숨이 지나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역시나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천둥소리를 들은 아이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져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대신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아이는 섬돌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는데 굵은 빗줄기는 여전했던 터라 조금 말랐던 그 아이의 머리카락은 다시 흠뻑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아이는 뭐라고 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안 들려. 내가 소리쳤지만 빗줄기가 더 굵어져서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귀로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아이처럼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아 이러면 옷이 너무 많이 젖을 텐데 하는 걱정을 잠시 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나를 붙잡더니 귀에다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이와 나는 몸에 달라붙은 옷을 벗어 내기 시작했는데 워낙에 흠뻑 젖었던 터라 마치 풀로 바른 듯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아 서로의 옷을 떼어내 줘야 했고 그게 또 너무 재미있어서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게 몸에서 걷어낸 옷을 대충 쥐어짠 뒤 툇마루 위에 던져 놓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무척이나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어쨌든 옷이 계속 비에 젖는 것보다는 툇마루 위에 놓여 있는 게 조금이라도 빨리 마를 테니까. 처음 보는 아이와 벌거벗고 집 밖에서 뛰어다닌다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상해서 안 된다기보다는 그냥 너무 미칠 것 같이 신나서 이상하다는 쪽에 가까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고 다시는 하지 못할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그때 느낀 해방감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벌거벗고 비를 맞으면 옷이 젖지 않는데. 강물에서 수영하는 거하고 다를 게 없는데. 그 아이와 나는 마치 어른들이 꼭꼭 숨겨 놓았던 비밀 하나를 알아낸 것처럼 기뻐하며 집 주위를 뛰어다녔다. 처음에는 내가 도망치면 그 아이가 쫓아오는 편이었는데 어느샌가 내가 그 아이를 쫓아 다니게 되었다. 나는 주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언덕 위에서 맴돌았다면 그 아이는 대담하게 언덕 아래 마을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도 했는데 그게 또 무척이나 짜릿했다. 나는 그러다가 사촌을 만날까봐 살짝 걱정이 되었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한 걱정이라는 건 혹시라도 사촌도 그 아이와 나처럼 옷을 벗고 뛰어다니게 되면 큰외삼촌에게 엄청나게 혼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무언가 범상치 않은 짓이라는 생각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에 그런 걱정도 이내 씻겨져 내려가 버리고 나는 또 깔깔대며 그 아이를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는 도중에도 몇 번인가 천둥소리가 들려왔는데 조금 멀어지나 싶었던 천둥이 어느새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고 심지어 그리 멀지 않은 논 하나에 다시 벼락이 떨어져 새카만 자국을 남기는 걸 똑똑히 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는데 왠지 그 아이와의 만남이 끝나간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천둥이 칠 때마다 멈춰 서서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는데 마치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그 아이는 나를 보며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보고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봤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아마도 상관없지 않나 정도의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내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 때 그게 무슨 집이 아닌 넓게 펼쳐진 논바닥 한가운데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다지 큰 저항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빗물이 넘실거리는 논두렁에 디딘 벌거벗은 발이 생각보다 너무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고 그 느낌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며 이상하게도 그 아이의 걸음은 하늘하늘 가볍게 질척한 논 위를 디뎠고 심지어 점점 물 위로 떠올라 간다는 걸 알아채고 나서야 나는 그 아이를 쫓아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 아이는 시커먼 구름으로 덮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손을 놓았는데 화를 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했는데 역시나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아이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며 점점 크게 소리질렀는데 마지막 외침과 함께 번개와 천둥이 동시에 내리쳤고 눈이 멀듯 한 하얀 빛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한꺼번에 꿰뚫는 느낌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병원에서였는데 부모님은 내가 감기로 인한 고열로 입원했다고 말해 주셨고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날 때까지 나는 내가 툇마루에 누워 잠을 자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믿고 있었다. 문득문득 어떤 아이가 생각나고 엄청난 빗줄기 속을 벌거벗고 뛰어다니던 꿈을 꾸기도 했는데 그게 천둥이 치던 날의 그 일과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이상하게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기억의 조각들이 죄다 꿈이나 고열로 인한 망상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들었다. 처음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을 때 나는 어떤 전기 같은 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한꺼번에 꿰뚫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제야 나는 내가 논두렁에서 바로 눈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 내가 벌거벗고 있었으며 어떤 아이와 동네를 뛰어다녔고 심지어 그 아이가 눈부신 번개를 타고 빨려 올라가듯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걸 실제로 보았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내 추궁에 못 이겨 한숨과 함께 모든 걸 털어놓은 사촌에 의해 증명되었다. 나는 그날 벌거벗은 채 벼락이 떨어진 논바닥에서 발견되었고 내 옷은 툇마루 구석에 둘둘 말린 채 구겨져 있었다고 했다. 사촌은 다른 아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왠지 먼저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대신에 이렇게 저렇게 돌려 물으며 혹시 나와 같이 벌거벗고 뛰어다니던 아이를 본 사람은 없는지. 툇마루에서 내 옷 말고 다른 옷이 발견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았으나 사촌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그 비슷한 걸 본 사람이 있었다면 시골에서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리 없으니 적어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그러니 그게 실제였는지 내 환각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셈이다.

나는 사촌을 비롯한 그 누구와도 다시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가끔 외가 쪽 친척을 만나야 하는 일이 생겨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부모님은 은근히 그런 내 핑계를 편안해 하셨고 그날의 확인된 기억은 다시 조금씩 어렸을 때 누구나 한두 번은 겪은 희한하고 부끄러운 일 정도로 내 머릿속에서 퇴색되어 갔다. 하지만 나는 그날의 기억들. 그러니까 논두렁이나 툇마루나 벗어놓은 옷가지나 아니면 벌거벗었던 내 몸 같은 장면들과는 무관하게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떤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얼굴은 그날의 장면 중 유일하게 흐리고 밋밋한 부분이었고 한 번도 그 장면 속에서 선명해진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어느 날 결국 폭우가 쏟아지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유리 창문에 새겨진 어떤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아이는 여전히 매끈하게 지워진 얼굴이었기에 유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그 얼굴이 내가 보았던 아이의 얼굴이라고 확신할 방법은 없다. 다만 나는 그 얼굴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시 그 아이를 만나 그 아이의 얼굴이 정말로 그리하였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그런 바람은 내가 세상에 환멸을 느낄수록 점점 커졌으니 어쩌면 나는 그 아이와 함께 번개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기를 바라며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턴가 그 아이가 뒷걸음질을 치며 외쳤던 소리가 나를 데리러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툇마루는 이제 다 허물어지고 없다.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새로 지은 양옥집에 살던 큰외삼촌와 사촌도 이제는 모두 도시로 이사를 나왔으며 그 양옥집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살다가 귀촌을 꿈꾸는 도시 사람에게 팔고 나갔는데 새로 집을 지으려고 허물어 놓기만 한 채 무슨 사정이 생겨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걸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들려온 대화에서 엿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집터를 다시 사들여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머니가 내 눈치를 보며 무언가 작은 소리로 윽박지른 이후로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어쨌거나 나는 그날 이후로 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오고 있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그 얼굴은 오로지 나만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 오랜 궁금증을 확인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날은 내가 졸업 후 몇 년간의 백수 생활을 거쳐 겨우 첫 직장을 잡게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부모님 집을 나와 좀 더 큰 도시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어쨌든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비가 오기만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가끔 천둥소리라도 듣게 되면 심장이 터져나갈 듯이 뛰었다. 그 아이를 만났던 그날 이후로 나는 셋을 세기 전에 울리는 천둥소리를 단 한 번도 다시 듣지 못했는데 그 날은 하나 다음에 디귿을 내뱉기도 전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무실 형광등이 잠깐 꺼졌다가 다시 켜졌으며 사방에서 자동차의 도난방지 경고음이 들려왔다. 일하던 사람들은 전부 다 벌떡 일어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비명이나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손이 벌벌 떨리고 숨조차 쉴 수 없어 비틀거렸던 건 오직 나 혼자였다. 그런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 하나 없었던 게 그때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사무실을 빠져 나와야 했고 분명 처음에는 화장실로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내 발길은 어느새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척이나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고 어딘가 걸터앉을 곳이 필요했고 여차하면 바깥 공기를 잔뜩 들이마실 수 있는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그때는 무언가에 홀렸던 게 분명하다. 계단을 중간쯤 올라왔을 때 나는 우산이라도 챙겨와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이번에는 거의 동시였다. 나는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급해졌다. 두 층 정도 남은 계단을 나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뛰어 올라갔다. 옥상으로 나가는 문은 마치 누가 일부러 그런 듯 잠겨 있지 않았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나는 옥상 난간에 기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과 번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고 벌거벗고 옥상을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그래도 둘이 함께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옥상 난간에 기대 있었고 바로 눈앞에 떨어지는 번개와 천둥소리에도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번개 불빛이 유리창에 새겼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고 어렸을 때 만났던 그 아이의 얼굴과 같은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사람에게 내 어렸을 적의 기억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그 아이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빌딩의 다른 층에 있는 다른 회사에 입사한 신입 사원이었고 나와 비슷하게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매우 평범했고 그날의 기억을 뺀 내가 그렇듯 살아온 삶도 평범했다. 쏟아지는 비를 한 시간 넘게 맞고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나와는 달랐다. 나는 결국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그 사람은 퇴원할 때까지 매일 문병을 와주었고 퇴원하고 나서도 매일 내가 혼자 살고 있던 집에 와주었다. 나와 헤어질 때 마치 그 아이처럼 나를 바라보며 뒷걸음질치던 버릇은 내가 무척이나 혼내 주고 나서야 겨우 고쳐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 사람과 벌거벗고 뒹굴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나는 무엇보다 비와 번개와 천둥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듯 그 사람도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런 공통점은 무척이나 특이한 것이었기에 왠지 더 자세히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다른 점이 나오고야 말 거라는 불안함이 있었던 것 같다.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던 어느 날 나는 무척이나 용기를 내어 번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번쩍하는 불빛과 천둥소리가 그 사람과 나를 감쌌고 나는 또다시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이와 아니 그 사람과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 잠시 혼란스러워하다 눈을 떠 보니 내 앞에는 작은 반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사람은 내게 프러포즈를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의 입술을 보며 그 아이가 내게 수없이 반복해서 말했던 어떤 단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 단어를 말했고 툇마루를 뛰어내리고서도 서로 옷을 벗겨 주면서도 그 단어를 말했고 내 손목을 잡아끌면서도 말했으며 마지막 내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그 입 모양을 보여 주었다.

우리 같이...

그리고 그 단어와 함께 나는 툇마루에 앉아 엄청나게 쏟아지던 비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날의 기분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어쨌든 여러 가지로 힘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왜 그랬는지 잘 생각나지도 않고 생각나는 이유 몇 가지도 하나같이 그 나이때나 할 만한 사소하고 하찮은 고민들이었지만 그래도 그 중 하나만큼은 지금도 그대로 되새길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때 나는 왜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외로웠다.

그 사람이 그 단어 뒤에 어떤 말을 더 붙였는지 나는 기억이 나지 않고 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껴안고 입을 맞췄고 쉴 새 없이 그 단어를 반복했다. 소리내어 말하기도 했고 그냥 입 모양으로만 속삭이기도 했다. 우리가 벌거벗고 서로가 서로를 더듬는 동안에 계속해서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귀로 들은 소리인지 그저 머릿속에서 울린 소리인지 확실하지 않다. 전부 다 실제로 떨어진 천둥이라기엔 너무 많았고 우리가 결국 지쳐 쓰러졌을 때는 비가 그쳐있었으니까 아마도 그 중 상당수는 그저 내 머릿속에서 울렸던 천둥소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재미있게도 그 이후로 나는 비와 번개와 천둥을 평범하게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사실 자기도 천둥이 조금 무섭긴 했지만 내가 너무 좋아해서 같이 좋아해 주었다고 털어놓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니면 그냥 내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둘 다 천둥을 평범하게 무서워하게 되었으니 계속 공통점이 있는 셈이었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놀이를 더는 하지 않게 되었으니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들어가는 몸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래도 나는 천둥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끝까지 그 사람에게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건 대부분이 나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때 잠시 무언가에 홀려서 혼자 옷을 벗고 천둥을 쫓다가 논바닥에서 쓰러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지금 나와 계속해서 공통점을 만들어 나가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견딜 수 없이 외롭다는 두려움에 조금은 덜 휩싸이게 되었다. 나는 언젠가 내가 혹은 그 사람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떠날 때 엄청난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려 퍼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별과 죽음 대신 천둥을 무서워하며 우리는 저 번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조금씩 조금씩 더 믿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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