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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대책위원회 16차 후속조치 결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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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유희와 음유시인의 노래 같은 식전행사를 마친 후에 예복을 갖춰 입은 마법사가 단상에 올라 인사말을 시작했다.

“레메지아 왕국의 국왕이자 질리 연방의 수장이며 노스보르그 자치령의 군주이자……”

마법사 루하이르는 서른일곱 가지 국왕의 칭호를 일일이 연호했다. 온갖 국가의 군주이며 여러 영토의 공작 혹은 영주이고 잡다한 종족의 추장이면서 수많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며 등등.

“……이신 레티니아 3세 폐하 만세!”

이어서 한 지역에 한 명만 있을 수 있는 현자 여섯 명과 인간에 비등하는 다섯 종족을 대표하는 부족장 혹은 대리 참석자를 일일이 소개하고 인사를 마무리 지은 다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빈 제위께 로스토크 여덟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빈도(貧道)는 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 루하이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사흘 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보고드리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피해대책 후속조치가 성공리에 이루어졌기에 그 세부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루하이르는 한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마법사 뒤편에 쳐놓은 커다란 하얀 장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루하이르가 옆에 대기한 조수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조수는 장식이 화려한 상자에서 거울을 꺼내어 장막 쪽으로 들었다. 이내 마법 거울에서 뿜어나온 빛이 하얀 천 위에 선명한 영상을 비췄다.

한적한 평원에 있는 호수의 경치였다. 멀리 산과 숲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림처럼 보였으나 흘러가는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 지나가는 새의 움직임으로 실제 광경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활동 그림은 우리 위원회 소속 요정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마법 거울에 담은 사흘 전의 모습입니다. 보시는 곳은 우리가 〈용사의 샘〉이라 이름 지은 호수입니다. 우리 위원회는 교대로 이 샘 곁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던 것입니다.”

연극조로 과장된 루하이르의 목소리와 동시에 호수 표면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물거품이 일어나고 호수 전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수면 위로 떠오른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멀어서 뚜렷하게 알아볼 수 없으나 노란색 피부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약간 살찐 체형의 인간이었다.

“어푸, 어푸! 사람 살려……! 씨발, 나 헤엄 못 친다고!”

인간이 아무렇게나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루하이르가 설명했다.

“내빈 제위께서 보시듯 그날 용사가 강림했습니다. 대기하던 요정의 보고를 받은 즉시 근처에 있던 당직 마법사를 급파시켰습니다. 이번에 용사를 담당한 유라간느는 위대하신 현자 고 순드란…… 그분의 영혼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순드란님의 두 번째 제자이며 경력 32년을 자랑하는 우수한 마법사입니다. 특히 언어능력이 출중하여 용사의 세계 중 3개 언어에 능통하고 4개 언어의 번역이 가능한 실력자지요.”

마법사 유라간느가 허겁지겁 호숫가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허우적대는 용사를 보더니 가지고 온 그물을 하늘로 던지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을 외웠다. 그물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흐느적대며 곧장 용사를 향해 날아가 몸을 뒤덮었다.

이어서 유라간느가 허공에서 줄다리기하는 시늉을 하자 용사를 감싼 그물이 호반까지 이동했다. 그물을 풀어주자 용사는 엎드려서 물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켁, 켁……! 씨발, 구조를 이따위로 하면 어떡해요! 물 존나 처먹었네! 아, 씨발!”

용사는 알몸의 10대 황인종 남자로 근육은 거의 없는 뚱뚱한 몸집이었다. 양손으로 주위를 더듬으며 살펴보더니 계속 거친 말투로 투덜댔다. 좌중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아 씨, 옷도 없고 안경도 없어? 씨발, 어쩌라고?”

“시바르? 아하, 당신은 항구그 나라에서 왔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유라간느는 나름 유창한 한국어로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용사는 눈만 살짝 들어 상대를 보더니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웅크려 앉았다.

“저기, 여기 어디예요? 진짜 이세계인가? 나 이세계에 온 거예요? 할아버지 모습 보니까 법사 같은데 판타지예요, 아님 게임?”

“당신은 용사. 여기는 레메지아 왕국입니다.”

“띠링, 띠링~! 소리 나면서 창 안 뜨는 거로 봐서 그냥 판타지네. 에이, 난 겜판이 더 좋은데…….”

“당신은 나와 함께 갑니다. 이것을 가지시오.”

유라간느는 말을 하며 어깨에 멘 가죽가방에서 상하의가 붙은 추레한 옷과 가죽신발을 꺼내고 그물을 다시 집어넣었다. 용사는 옷이 이게 뭐냐고 혼잣말로 투덜대면서도 옷을 입고 순순히 따라갔다.

“내빈 제위께서 보시듯 유라간느가 용사와 성공리에 대면을 마쳤습니다.” 루하이르가 해설을 하듯 영상을 보며 덧붙였다.

“우리의 뛰어난 마법사 유라간느는 용사가 말끝마다 ‘시바르’라는 신의 이름을 외우는 것을 보고 항구그에서 왔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다행히 유라간느는 항구그 언어에 능통하므로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라간느는 호수 인근 산 아래 동굴에 마련한 거처로 용사를 안내했다. 마법사들이 교대로 당직을 서며 언제 올지 모를 용사를 맞이하기 위한 대기장소다.

유라간느는 즉시 전서구를 왕궁에 있는 피해대책 위원회에 보낸 다음 벽난로의 불을 키워 물에 젖은 용사의 몸을 말리게 해주었다.

“아, 씨발! 이제 살겠네……. 히히히, 내가 이세계에서 용사가 되다니. 죽길 잘했어!”

유라간느가 다가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수건입니다. 몸이 마른다, 다음은 음식을 먹으시오.”

“근데 법사 할아버지 NPC예요? 말투가 뭐 그래?”

“엠프시……? 무엇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용사는 좀 설명해보려다가 귀찮은지 금방 포기했다.

“아, 됐어요. 밥이나 주세요. 존나 배고픈데.”

“음식을 줍니다. 당신은 먹으시오.”

“으히히히, 진짜 법사 할배 말투 폰에서 대답하는 음성인식 기계음 같네. 시리야! ‘띠링~!’ 밥 좀 줘. ‘용사님에게 밥을 드립니다.’ 용사는 밥을 먹었다, 체력이 상승했다! 서브퀘 완료. 히히히…….”

용사는 혼자 대답하고 말하면서 웃었다. 당연히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유라간느는 무시하면서 음식을 차렸다.

“여기서 시간을 좀 건너뛰겠습니다.” 루하이르가 덧붙였다.

“따분하고 긴 장면이니까요. 용사가 식사를 할 동안 유라간느는 우리 세계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레메지아 왕국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왕의 침략에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의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용사이니 우리를 위해 싸워달라는 내용입니다.

내빈 제위께서 예상하시듯 용사는 대가를 요구했고 유라간느는 그에 합당한 보답이 있을 것이며 내용은 직접 국왕 폐하를 알현하여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곧 우리가 보낸 마차가 유라간느와 용사를 데리러 도착합니다. 이어서 국왕 알현 장면부터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루하이르가 손짓하자 거울 위에 펜처럼 작은 마법 지팡이로 특수한 마법문자를 그리던 조수가 다시 거울을 들어 장막에 비추었다. 하얀 천에 새로운 그림이 생겨났다.


정면에 왕좌에 앉은 왕이 있고 양옆으로 늘어선 중무장한 근위병이 보였다. 왕보다 낮은 단에 공주와 신하들이 서 있다. 그보다 아래에 용사와 통역을 겸한 유라간느가 나란히 서 있다. 용사는 미리 하인들이 준비한 갑옷과 무구를 갖추어 훨씬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곁에 선 깡마른 마법사 노인보다 머리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키가 작아서 볼품은 없었지만.

국왕이 뭐라 말하자 신하가 이를 받아 큰소리로 복창하며 용사에게 전달했고 유라간느가 이를 번역하여 용사에게 들려주었고, 용사의 대답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반대로 이어졌기에 대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용사는 지루한 데다가 갑옷이 무겁고 더워 짜증이 났다. 특히 등과 엉덩이가 간지러운데 긁을 수 없어 괴로웠다.

“아 씨발, 이런 거 그냥 스킵 안 되나? 쌩판타지는 이게 귀찮단 말이야……. 레벨이나 인벤토리 확인도 안 되고. 존나 불편해!”

“국왕이 말했습니다. 용사여, 마왕을 물리치면 좋은 보답을 합니다.”

유라간느가 여전히 음성변환 소프트 같은 건조한 말투로 통역을 했다.

“국왕이 말했습니다. 용사여, 레메지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합니다. 연방국 중 하나의 영주가 됩니다. 국왕이 죽으면 새 국왕이 됩니다. 용사여, 당신은 이것을 받아들이시오. 이것은 좋다. 내가 추천합니다.”

“예, 공주? 저 앞에 있는 저분 맞아요? 진짜? 레알 결혼?”

가려워서 몸을 뒤틀던 용사가 돌연 생기를 되찾고 얼른 물었다. 왕좌 아래에는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이 옅은 미소를 품고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라간느가 신하에게 묻자 맞다고 확인해주었다.

“내빈 제위께서 보시듯, 항구그 출신 용사의 취향을 고려하여 흑갈색 머리카락에 키가 큰 공주를 내세웠습니다.” 루하이르가 설명했다.

“예상대로 공주에게 홀딱 반한 용사는 용기백배하여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용사가 국왕의 제안을 승낙한다는 대답이 전달되자 공주가 미소 띤 얼굴로 용사에게 다가왔다. 공주 역시 용사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컸다. 공주는 살짝 무릎을 굽혀 양손을 용사의 어깨에 얹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용사가 반쯤 황홀하고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짓자 공주가 무어라 말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유라간느가 통역해주었다.

“공주가 말했습니다. 용사여,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십시오. 만나면 그다음을 합니다.”

“지지지진짜요? 그다음…… 다음을 하자고? 그거, 그거 얘기 맞죠, 씨발! 결혼할 거니까? 으흐흐, 힘이 막 솟는 게 진짜 용사가 된 것 같아! 마왕 새끼 당장 처바르고 공주랑…… 히히히!”

흥분한 용사는 국왕이 눈앞에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칼을 뽑아들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면서 떠오르는 기술명을 외쳤다.

“열파차아아암! ……에이, 씹에반데? 이거 좀 가벼운 칼 없어요?”

즉시 미늘창을 들고 옆에 있던 근위병이 가까이 다가가 눈을 부라리자 용사는 쫄았는지 금방 얌전해졌다. 이렇게 국왕 알현을 마친 두 사람은 근위병의 감시 같은 호위를 받으며 물러났다.

“다시 시간을 건너뛰겠습니다.” 조수가 거울을 조작하는 사이에 루하이르가 설명했다.

“용사는 왕궁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다음 날 마왕이 사는 마왕성으로 홀로 출발했습니다. 원래 말을 타고 가야 하는데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가 그렇듯 말을 탈 줄 몰라서 떨어질 우려가 있기에 작은 마차를 마련해주었지요. 아시다시피 용사 혼자서 가야 한다는 철칙만은 지켜야 하니까요. 물론 마법 거울을 든 우리 요정이 몰래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용사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용사를 위해 마법의 힘을 담아 만든 전설의 갑옷과 전설의 방패와 전설의 검을 갖추고 있기에 마왕 앞에 이를 때까지 어떤 마물들도 감히 용사에게 덤비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마왕성 정문 바로 앞, 용사는 마차에서 내려 좌석에 둔 물과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 다음 칼과 방패를 들었다.

지키고 있던 시커먼 마물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고 뒤로 물러났다. 커다란 덩치와 흉측한 모습에 용사는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들의 정중한 모습에 이내 자신감을 되찾고 칼을 빼든 채 성안으로 들어갔다.

“씨발, 별거 아니네. 역시 용사님이 나타나니까 몬스터들이 다 쫄아서 튀었어? 마왕 토벌퀘 개꿀, 킥킥.

……근데 마왕성 크긴 존나 크네. 어째 생긴 게 솥뚜껑? 꼭지 달린 돔구장? 여윽씌 이셰궤에도 돔구쟝이 있으야겠다…… 이거그긍요. 으히히히!”

용사는 혼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은 다음 무거운 갑옷 때문에 볼품없이 뒤뚱거리며 마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용사의 지적대로 왕궁은 해자로 둘러싸이고 뾰족한 첨탑을 다수 가진 전형적인 중세 유럽풍의 성이었는데 반해, 마왕성은 벽돌 구조물이지만 외형은 현대 돔경기장에 가까운 납작하고 둥근 외형에 손잡이와 흡사한 꼭지가 달려 있다. 마치 거인이 먹을 밥을 짓는 압력솥 뚜껑처럼 보였다.

또한 마왕성은 산 위에 있고 주위에는 마을은커녕 수풀도 없는 황량한 돌과 바위투성이였다.

마왕성 중심에 이르니 왕좌에 마왕이 앉아서 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 곁은 물론 성안에 다른 마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용사가 올 줄 알고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용사는 마왕이 유라간느보다 더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걸자 놀라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마왕 디에바르조.”

“어우 씨발, 깜짝이야! 마왕 우리말 좀 할 줄 아네?”

마왕은 붉게 수놓은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피부는 회청색이고 머리에 뿔이 두 개 솟았으며 이마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고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은색이었다.

“여기는 통역이 없어서 내빈 제위께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루하이르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마왕은 용사에게 싸우지 말고 자신과 힘을 합치자고 제안합니다. 지루한 인간 나라의 국왕이 되는 것보다 자신을 도와주면 세상의 절반을 주겠다고 회유합니다.

놀랍게도 용사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고민하지 않고 단박에 거절합니다. 아마도 공주의 유혹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나 싶네요.”

용사가 전설의 검을 들고 마왕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술에 취한 것처럼 휘청대며 간신히 걸어가 검을 치켜들더니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약속된 승리의 거어엄! 엑스으 칼리버어어어!”

용사는 치켜든 검을 휘두르면서 중심을 잃고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검날은 마왕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마왕은 비명을 지르고 박쥐로 변신해 왕좌 뒤 장막을 걷으며 어두운 통로 저편으로 도망쳤다.

“어, 쒸, 마왕놈 도망쳤어? 야! 이 새끼 잡히면 뒤진다!”

기세등등해진 용사는 무거운 투구와 방패를 버린 채 검을 치켜들고 쫓아갔다. 이내 검도 무겁고 거추장스러운지 도로 칼집에 넣고 헐떡대면서 달려갔다.

“내빈 제위께서 보시듯 마왕과 용사의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루하이르가 설명했다.

“마왕을 퇴치했다는 증거로 이마에 박힌 보석을 가져오기로 약속했기에 용사는 열심히 쫓아가야 했습니다.”

박쥐는 결코 용사의 시선에서 사라지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벌리면서 도망쳤다. 이마의 보석에서 나오는 붉은 빛 덕분에 용사는 칠흑처럼 어두운 통로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모퉁이를 몇 번 돌고 낮은 경사와 돌계단을 내려가면서 마왕과 용사는 점점 마왕성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마침내 통로는 벽돌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가까운 동굴로 바뀌었고 어느 순간 널찍하게 트인 공간에 이르렀다.

막다른 정면 바위벽에는 거대하고 묵직한 철문이 우뚝 서 있었다. 두꺼운 빗장을 치고 굵은 쇠사슬로 감겨 있어 도저히 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박쥐로 변한 마왕은 마치 여기로 들어오라는 듯 철문 아래쪽 구석에 있는 작은 보조문으로 향했다. 마치 문에 난 개구멍에 뚜껑을 덮은 듯, 혹은 신문이나 우유 투입구를 만든 듯했다. 그럼에도 문이 워낙 거대해서 이 투입구도 사람 하나가 드나들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보조문은 아주 살짝 열려 있어 박쥐가 된 마왕은 그대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용사에게는 너무 좁은 틈이었다. 용사는 문을 잡고 당겼지만 약간의 쇳소리만 날 뿐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먼 거리를 달려와 지친 용사는 잠시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쉬었다.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뒤에 다시 일어나 양손으로 문을 잡고 힘껏 당겼다.

쇠로 돌을 긁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씩 열렸다. 겨우 몸이 지나갈 만큼 생긴 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우억, 콜록콜록! 씨발…… 뭐야?”

용사는 들어가자마자 재채기를 하며 인상을 썼다. 내부는 석탄을 태우는지 뿌연 연기가 가득하여 앞이 잘 안 보였고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내빈 제위 중에서 이곳을 모르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루하이르가 설명했다.

“하오나 여섯 현자님께서는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이곳을 만들기 위해 이전 일곱 현자의 우두머리이자 대현자로 불리셨던 유일한 분,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자 지혜로운 현자시고 또한 마법학교 세 곳의 명예이사장이셨던 고 플레우르님께서 목숨을 바치셨으니까요. 그분의 영혼에 평화가 깃들기를!”

잠시 다 함께 세상을 떠난 현자를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가진 다음 루하이르가 말을 이었다.

“이곳을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애를 쓰며 협조해주신 데크알브 종족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사는 안에 도사린 ‘그것’과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용사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전설의 검을 빼들었다. 검에서 뿜어나온 광채 덕분에 연기에 가려진 주위 광경이 조금이나마 보였다. 붉은 광선이 어깨너머로 지나가서 돌아보니 박쥐가 재빨리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쫓아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문밖에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마왕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용사가 쫓아가 밀었으나 상대가 더 빨랐고 힘도 셌다.

보조문은 굳게 닫혔고 이어서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용사는 문을 두들기며 수없이 ‘시바르’ 신을 입에 되뇌었다.

“안으로는 우리 요정도 감히 들어갈 수 없으니 대신 거울을 문에 뚫어놓은 작은 구멍에 갖다 댔습니다. 어둠과 연기 때문에 선명하지 못한 점 양해 드립니다. 잘 보시면 가운데에 보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빛이 전설의 검입니다.”

문 내부는 몇 미터에 불과한 가장자리를 제외하면 지름 300미터에 이르는 원기둥 모양의 구멍이 뚫린 구조였다. 용사가 검으로 주위를 비추며 다른 출구를 찾고 있을 때 저 끝 모르게 깊은 구멍 아래 어둠에서 거품이 부글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뭔데 어그로를 끌어?! 나와, 씨발! 이 용사님이 확……?”

전설의 검을 무작정 휘두르던 용사는 갑작스러운 광경에 충격을 받아 말을 멈추었다. 모든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땡그렁.

손에서 놓친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뚫린 원기둥 공간을 가득 채우며 거품과 점액에 뒤덮인 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몸에서 꿈틀대는 거품 하나는 3층 건물 정도 크기였고, 비늘 하나가 자동차보다 크며 날름대는 촉수 하나가 전신주보다 굵고 길었다. 그런 촉수가 수백 개, 거품이 수천 개, 비늘이 수만 개 있다고 상상해보라. 또한 거품 덩어리 수십 개 중에 하나꼴로 안에 담긴 눈동자가 꿈틀대고 깜박거리며 오싹한 광채를 뿜었다.

“오오, 저 촉수, 저 비늘! 내빈 제위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렇게 활동 그림에 저놈의 모습을 또렷하게 담아낸 적은 지금껏 없었으니까요.” 루하이르가 상기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용사를 기다리며 도사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저주를 받는다는 가증스러운 이름. 살아있는 혼돈이요 부정형의 소용돌이, 어둡고 냉혹한 우주의 심연의 화신(化身). 저와 같이 훈련된 마법사가 아닌 분은 함부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그렇습니다. 그것의 이름은 슈르브라츄타카파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온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신이자 괴물……!

용사를 알아챈 놈은 즉시 움직였습니다. 아마 우리 인간으로 치면 손가락을 까딱한 정도였을 겁니다. 인간이 개미 한 마리를 눌러 죽이기 위해 얼마나 힘을 쓰겠습니까?

용사는 나름 저항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검을 다시 주워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용사는 촉수에 휘감겨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라 한들 저놈에게는 잠깐의 공복을 달래줄 먹잇감조차 되지 않았겠죠.”

촉수에 감긴 이후 화면에는 어둠과 연기만 비칠 뿐이었다. 가끔 꿈틀대는 시커먼 거품만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 용사의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울이 비친 영상은 사라졌다.

“이번 사건의 기록은 여기서 끝입니다. 비명을 듣는 순간 더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우리 료스알브 전령을 부디 자비로운 폐하께서 용서해주시길! 그는 용사 뒤를 몰래 따라가며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기록해주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수행했지요. 이 자리를 빌어 노고를 치하합니다.”

좌중에서 작게 박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루하이르가 고개를 숙여 대신 감사를 표하고 말을 이었다.

“내빈 제위께서 보시듯 이렇게 제물 공양에 성공함으로써 후속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조기대응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증요법과 같은 상태. 근본적 예방대책 부재 및 부작용 우려에 따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숙제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돌이켜보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자칭 용사라는 젊은 남자들의 행패로 인한 제국(諸國)의 극심한 피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마왕과 협력까지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온갖 대책도 무색하게 차례로 나타난 자칭 용사들 때문에 이 세계 자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지요.

그때 위대하신 대현자 고 플레우르님께서 독을 독으로 제거한다는 비상한 각오로 별과 별 사이의 차가운 공간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에서 슈르브라츄타카파인을 소환했습니다. 우리 세계의 어떤 종족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그 힘 앞에 이세계 용사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잡아먹혔지만, 결국 이 괴물 역시 우리 세계를 위협할 큰 위험요소였기에 대현자께서 목숨을 바쳐 지하에 봉인하셨지요. 놈을 달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제물을 바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우리 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남기신 교훈을 잊지 않고 이세계 용사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그들이 출몰하는 장소와 쓰는 언어,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피해대책 후속조치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국왕과 공주 역할을 한 배우는 물론, 직접 미끼 역할을 하며 전폭적으로 협력해준 마왕 디에바르조님께 이 자리를 빌려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수많은 선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빨리 다른 세계에서 용사들이 강림하는 현상을 막을 근본대책을 찾아내고 슈르브라츄타카파인을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야만 우리 세계에 완전하고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위원회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니, 내빈 제위의 따뜻한 성원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이상으로 피해대책위원회 16차 후속조치 결과보고를 마칩니다.”

 

(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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