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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_기사머리.jpg




십이지신 패자부활전


지난 줄거리
먼 옛날 하느님[上帝]이 뭍짐승들에게 정월 초하루에 하늘문으로 오는 자에게 순서대로 벼슬을 내리겠노라 했다. 이때 꾀 많은 쥐는 부지런한 소가 제일 먼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소의 머리 위에 몰래 붙어 있다가 도착 직전에 뛰어내려 일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고양이는 정월 초이틀에 오라는 쥐의 거짓말에 속아 탈락했고, 이를 안 고양이가 성을 내며 언제 또 벼슬을 주냐고 따지니 하느님은 육십갑자가 지나면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고양이는 기다렸다.



화설, 천지만물이 생겨난 이래 저마다 그 나고 죽는 때와 뜻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으니 이를 명(命)과 운(運)이라 한다. 땅의 뜻을 알고 싶으면 하늘을 보라고 했으니, 예로부터 세상만사의 길이 그려져 있다 하여 하늘을 통해 운의 수(數)를 읽으니 운수라 하였더라.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 규칙을 정하실제 음양과 오행으로 나누었으니 하늘을 천간(天干), 땅을 지지(地支)라 부른다. 지지는 열둘으로 나뉘어 십이지라 했으니 이 땅을 수호하는 열두 신장(神將)이 바로 십이지신이라.
이때가 어느 땐고. 오뉴월 남풍 불고 더운 날씨 이어질제, 고양이란 놈이 산중에 홀로 앉아 별을 한참 들여다보다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는지라. 그 즉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는데 지나가던 꾀꼬리 한 마리가 날아와 웃으며 말하기를,
“고양이야, 네 어디로 가느냐? 사람 사는 동네 저잣거리에서 생선 대가리나 주워먹고 사는 주제에 어디 과거라도 보러 가려는 것이냐?”
“제 잘난 맛에 사는 네가 무얼 알겠느냐. 버들가지 넘나들며 네 이름이나 불러라. 본시 이 몸은 세상을 수호하는 신장이 되실 몸이었느니라. 저 요망하고 괘씸한 쥐란 놈에게 깜빡 속아 허송세월을 보냈으나 이제 다시 때를 만나 수복하러 가는 길이다.”
그렇게 고양이가 산을 넘고 물을 넘어 멀고 길고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한 길을 넘고 넘어 높다란 산 위 구름 위 하늘 위 하느님 계신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입구에 이르렀을제, 날개를 펼치면 수만 리 땅 위에 금빛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루라가 홀연히 나타나 이르니,
“뭍짐승이 어인 일로 하늘문에 왔느냐? 상소는 법제에 따라 올리도록 하라.”
이에 고양이 대답하되,
“약조하셨던 일을 시행해 달라고 청하옵고자 왔나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육십갑자 세월 지나 세상만물이 변하였으니 응당 하늘의 자리도 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가루라가 그럴 법 하다 싶어 안으로 들어가 묻고 또 물어서 알아보니 과연 옛날에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 가루라가 하느님께 말씀 여쭙고 다시 돌아와 하는 말이,
“상제께서 하신 약속이고 정해진 기간이 되었으니 어길 수야 없는 일. 허나 하늘의 장수 자리는 아무에게나 줄 수가 없고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마땅할 터. 따라서 열두 짐승이 와서 그 자리를 요구한다면 정정당당히 대결하여 판가름을 내겠노라 하명하셨느니라.”
“허면 열한 마리 짐승을 더 데려오라는 말씀이오니까?”
따지고도 싶었으나 눈에서 불똥이 튀고 날개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하늘 대문 수문장에게 어찌 감히 덤비리오. 고양이는 하릴없이 땅으로 내려와 그날부로 뜻을 같이 할 동물들을 찾아 다녔더라.

제일 먼저 사슴을 만나 옛날에 하늘문으로 간 적이 있느냐 물었더니 사슴이 주둥이로 가슴을 치고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
“억울토다, 억울토다. 이 내 말 좀 들어보소. 사슴의 빠른 다리 심산유곡을 안방처럼 넘나드니 평지에선 말이 빠르다 하나 산에서는 사슴에 비할꼬. 정월 초하루 새벽부터 길을 나서 말보다도 먼저 가서 벼슬자리 얻어 볼까 흥이 나서 달렸건만 저만치에서 호랑이가 성큼성큼 오는 게 아니겠나. 질겁하여 바위 밑에 한참을 숨어 있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지 뭔가. 정신을 차리고서 죽을힘으로 달렸건만 애저녁에 다 끝나고 문은 굳게 닫혔으니 이 억울함을 어디서 풀꼬?”
이에 고양이는 속으로 반색하여 얼르면서 꾀기를, 자기랑 함께 다시 도전하여 묵은 설움을 풀어보자꾸나 하였더라. 사슴도 기뻐하며 기운을 차리고 함께 길을 나섰는데, 산골짜기 시냇가에 먹이 찾아 어슬렁대는 곰을 만나 또 물어보니,
“그 일랑은 묻지도 마소. 그때 일만 생각하면 속이 쓰려 자다가도 깬다오.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하필이면 정월이니 어찌 갈 수 있었겠소. 삼동설한 지나도록 동굴 밖을 못 나갔네.”
고양이는 그러니 네가 미련곰탱이지, 하고 쏘아주고는 함께 가자고 채근했더라.
이리 하여 여우, 당나귀, 염소, 너구리 등 십이지가 되지 못해 한을 품은 짐승을 찾아서 하나하나 설득하고 힘을 합쳤으나 고양이의 걱정은 외려 커지기만 했더라. 바로 용과 호랑이에 맞설 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때 꾀꼬리가 다시 와 생각에 골몰한 고양이를 불러 이르되,
“고양이야, 무엇을 그렇게 고민하고 있느냐?”
“너희 날짐승들은 고민 걱정이 없으니까 몸과 맘이 가벼워 쉬이 날아다니는 것이다. 어르신 생각 훼방 놓지 말고 썩 꺼지거라.”
“어찌하여 우리보고 문외자라 하느냐? 십이지에 닭이 있지 않느냐? 닭은 높이 날지 못하나 엄연히 우리 친족이니라. 안 그래도 닭만 뭍짐승들 사이에 끼어서 부귀영화를 독차지하니 잡새들의 시샘이 하늘을 찌르던 참이었다. 내가 네 고민을 풀어주랴?”
“아서라. 용과 호랑이에 맞설 짐승이 세상에 어디 있을꼬?”
“어리석은 고양이는 내 말을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한번 날아오르면 구산팔해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이니, 천치일월 내다보는 영물 중의 영물이 우리 새 말고 또 있으리오. 네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수많은 온갖 금수가 내 벗이요 이웃이니라.”
“그러면 네가 아는 가장 강한 이가 누구냐?”
“듣고서 놀라지나 마라. 저 멀리 천축(天竺)에 석가여래를 모시며 등에 태우고 다녔던 분이 살고 있는데 황소 열 마리를 합친 것보다 크고 몸에 칼로도 베이지 않을 철갑을 두르고 있으며 머리에 꼬리가 달려 한번 휘두르면 나무가 꺾이고 바위가 모래알이 되느니라.”
“옳거니! 천하에 그런 영웅호걸이 있다면 호랑이도 문제가 아니겠구나. 곱디고운 꾀꼬리야, 한시 바삐 그분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려무나.”
이리하여 고양이와 그 동료들은 꾀꼬리를 따라 멀고도 먼 여행을 떠났더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막을 지나 키보다 높은 갈대가 무성한 들판에서 마침내 찾던 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고양이 반색하여 한달음에 달려가서 인사올리고 묻기를,
“선생, 과거 여래를 호위하셨다는 고길리 선생이 맞소이까?”
“나를 어찌 아시오?”
“선생의 존명을 듣고 머나먼 동쪽에서 온 고양이라 하옵니다. 천상의 장수가 되어 성신(星辰)을 호령코자 하는 마음이 없으신지요?”
“그리 할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있겠소?”
이에 고양이가 감언이설로 그를 꾀어 동료로 삼으니 그 기쁨은 적토마를 얻은 여포와 같았더라.
꾀꼬리 말하되,
“모두 열하나가 모였으니 일사천리로구나. 하나만 더 찾으면 될 일인데 어찌 얼굴에 시름이 다 가시지 않았는가.”
하니, 고양이 하는 말이,
“아무리 고길리 선생이라 할지언정 용을 이기지는 못할 터. 어디서 그런 영수(靈獸)를 또 찾으리오.”
코끼리 이 말을 듣고 말하길,
“그럴 리가 있겠소? 내 평생 이 몸보다 더 큰 자를 보지 못하였소.”
고양이가 대답하되,
“고선생이 크다 하나 용보다는 크지 않고, 기운이 세다 하나 용보다는 못할 거외다. 용이란 놈은 뱀을 닮았으나 매우 크고 길다 하였소. 구름 위를 노닐다가 비를 부르고 번개를 떨구며 바다로 내려오면 풍랑을 일으켜 어선을 나뭇잎처럼 뒤집는다 하더이다.”
코끼리 그 말 듣고 하는 말이,
“아, 그렇다면 내 아는 몸이 긴 친구가 있으니 만나보시겠소?”
고양이는 반신반의하며 무리를 이끌고 코끼리를 따라 후덥지근한 사막을 건너 풀이 드문한 너른 땅으로 향했으니. 거기엔 나무보다 목이 긴 희한한 짐승이 있더라.
“이 친구는 기린이라 하오. 보기에 버드나무처럼 말랐으나 성질이 급하고 다리 힘이 강인하니 분명히 큰 보탬이 될 것이오.”
그 말에 고양이는 반색하여 말하기를,
“방금 기린이라 하셨소? 풀이 밟지 아니한다는 영물 중의 영물이 여기에 계실 줄이야! 이분이라면 용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을 터.”
고양이는 조심스레 다가가 읍소하듯이 기린에게 자기네 무리에 가담해줄 것을 청하자 기린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대번에 흔쾌히 수락하더라.
드디어 열하나의 동료를 모두 모은 고양이는 용기백배하여 다시 하늘문에 이르니, 하느님께서 열두 신장을 소환하시어 누구에게 더 자격이 있는지 하나씩 대결을 시키겠노라 선언하시더라. 이 소식에 온 세상의 날짐승과 들짐승과 물짐승들이 구경을 하겠다고 몰려들어서 구름 위가 짐승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더라.

라운두 1(羅雲斗 一). 돼지 vs 곰
첫째 판으로 돼지와 곰이 뽑히자 고양이가 파안대소하며 말하길,
“싸움을 해도 달리기를 해도 곰이 능히 이길 것이요, 먹보로 따지면 곰은 동면을 하기 전에 석달치 음식을 한나절에 집어삼킨다고 했으니 이 승부는 따 놓은 당상이로다.”
허나 한갓 짐승이 하느님의 깊은 뜻을 어찌 알리오. 둘의 앞에 물이 가득 담긴 나무통이 하나씩 옮겨졌으니 이번 시합은 바로 청결함 대결이로다.
“이것 또한 쉬운 승부로구나. 돼지는 냄새 나는 외양간에서 제가 싼 똥을 먹으며 사는 놈이 아닌가? 이번 시합 이기기는 누워서 떡 먹기가 될 것이네.”
고양이 놈 자만하는 꼴 좀 보소. 정작 제 놈이 몰랐던 것은 함부로 누워서 떡을 먹다간 목이 막혀 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 막상 목욕을 마치고 나온 짐승을 딱따구리란 놈이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쪼아보고 상제께 아뢰기를,
“곰이란 놈은 온몸에 털이 많아 털 속속에 흙과 벌레가 숨어 있고, 돼지는 털이 짧아 물에 씻고 나니 한결 깨끗하더이다.”
고양이가 하나 더 몰랐던 것은 돼지란 짐승이 본래는 깨끗함을 좋아하는 천성을 가졌으나 기르는 인간들이 더럽게 다루었을 뿐이라. 하느님은 주저 없이 돼지의 승리를 선언하셨더라.

라운두 2. 토끼 vs 거북이
둘째 판은 좌중의 예상대로 토끼를 불러 달리기 시합을 하신다는 말씀에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북이를 부르며,
“저기 산 넘어 서쪽에 이색(伊索)이라는 이야기꾼이 있어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달리기 경주에서 이긴다고 했느니라. 이럴 줄 알고 내 직접 거북이를 데려왔지.”
주위에서 모두 말렸으나 고양이는 아랑곳없이 거북이를 토끼의 상대로 내세웠다. 덩치는 작으나 날쌘 다람쥐, 다리가 길어 겅중겅중 잘 뛰는 사슴, 외모가 누추해도 끈기 있게 잘 달리는 당나귀 같은 쟁쟁한 놈들이 서로 달리겠노라 앞 다투어 나섰으나 모두 뿌리치더라.
허나 이쪽에 있는 쥐란 놈도 영특하기가 고양이보다 못할 바가 없었으니. 출발선에 나가기 전에 토끼를 몰래 불러 엉뚱한 이야기로 한눈을 팔게 만들고 그 사이에 무언가 속셈을 꾸미는 게 아닌가.
이리하여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시작했고, 모두의 예상대로 토끼가 멀찌감치 앞서 나가다 시원한 나무 그늘을 보고 잠시 쉬었다 가겠노라 여유를 부리는데, 푹신한 풀밭에 엉덩이를 댄 순간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펄쩍 뛰더라.
이유인즉슨 쥐란 놈이 몰래 토끼의 엉덩이에 거머리를 붙여 놓았으니 피를 쪽쪽 파는 아픔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거라. 토끼란 놈 팔이 짧아 엉덩이에 닿지 않으니 떼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는 결승점에 있는 동료들에게 가는 수밖에 없던지라.
거북이가 엉금엉금 걸어 토끼의 모습이 보인다 싶을 때 토끼는 다시 저만치를 앞서 나갔고, 본디 낮잠을 자다가 승리를 빼앗겼을 토끼가 단숨에 결승점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고양이는 혼비백산 놀라더라.

라운두 3~8. 기타 등등
각설, 너무 빨리 끝난 싱거운 승부도 있었으니 예 읊어본다.
개와 여우의 깨물기 시합은 꾀가 많으나 성질 급한 여우가 진득한 개를 어찌 능히 이기리오. 닭과 너구리가 좁쌀을 그릇에 담는 시합을 벌였는데, 너구리 손가락이 길다 하나 매일같이 쪼아 먹는 닭을 어찌 이기리오. 원숭이와 수달이 예의 시합을 펼치니, 수달은 본디 먹잇감을 잡으면 조상에게 제사부터 지내는 예를 아는 동물이라 했건만, 이 원숭이란 놈 꾀가 보통이 아니라 왜(倭)에서 고구마 물에 씻어 먹는 방법을 배워 왔으니 어찌 이기리오. 수달이 날음식을 그냥 바치고 원숭이가 깨끗이 씻어 바치니 누구의 승리인지는 명약관화더라.
이어서 양과 염소 싸우는 꼴 좀 보소. 이제야 양웅상쟁하는가 싶었더니 구름 위 하늘이 이리 추운 줄 누가 알았을꼬. 염소란 놈 추워서 바들바들 떨 적에 북실북실 털을 기른 양이 기세등등 덤벼드니 줄행랑을 놓더라. 말과 사슴 날쌔기야 호각지세건만은, 사람을 태우고 시합을 하니 사람 보고 질색하는 사슴이 펄쩍 뛰고 기수 엉덩이를 걷어차니 어찌 시합이 이뤄지리오.
그 뒤로 뱀과 다람쥐를 붙여놓으니 무얼 겨루자고 말도 꺼내기 전에 다람쥐가 기겁하여 내빼니 뱀이 괜히 미안하여 혀만 날름거리더라.

라운두 9. 용 vs 기린
십이지신 중에서 누가 가장 강한지는 말할 필요 있으랴. 용이 여의주 움켜쥐고 웅장한 몸 으스대며 나타나니 뭇짐승이 숨을 죽이더라.
고양이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길,
“용이 영물이라 자부하지만 기린 역시 용에 버금가는 신령한 짐승. 조금도 위축될 것 없소. 가서 혼쭐을 내고 오시오.”
고양이의 응원에 용기백배한 기린이 앞으로 나섰으나, 하늘을 날고 구름과 비와 바람을 불러내는 용의 모습을 보자 기겁하여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긴 모가지를 땅으로 처박더라.
이 모습 본 쥐란 놈이 놀리며 묻기를,
“기린은 자고로 풀을 밟지 아니 한다 들었는데 어찌 존귀하신 머리를 흙속에 집어넣고 계시오?”
하니, 기린이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말하길,
“이놈은 그저 우연히 이름이 기린일 뿐 영물이고 뭐고 아니오. 외람되게 용님과 감히 맞붙겠다고 나선 패악을 부디 용서하소서.”
“아뿔싸! 이름만 듣고 큰 착각을 했던 거로구나.”
고양이는 이마를 치며 한탄하더라. 기린의 기권으로 용은 비바람만 조금 뿌려대다 입맛을 다시며 물러나며 말하길,
“싱거운 친구 같으니. 영물이 아니라 순 맹물이었구만!”

라운두 10. 소 vs 당나귀
시합은 십이지신의 승리가 되었으나 쥐란 놈 꾀가 여간이 아니어서, 하느님 앞에 나서 이쪽은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상대방이 마음대로 순서를 바꾸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하니, 하느님이 일리가 있다며 이제부턴 제비를 뽑아서 정하겠다 하시더라.
하니, 고양이 놈 거동 보소. 펄쩍 뛰고 손사래 치며 천부당만부당하니 그 결정을 물러달라 화도 내고 청해도 보고 졸라도 보더라. 본시 쥐와 만나 시합을 빙자하고 고래의 원한을 갚기 위해 한 입에 집어삼킬 생각이 틀어졌기 때문인데.
남은 짐승 이쪽은 호랑이, 소, 쥐요 저쪽은 코끼리, 당나귀, 고양이라. 하느님이 제비를 뽑아보니 소와 당나귀가 나오더라.
당나귀 끈기 있는 성정이야 세상이 다 알건마는 하필 상대가 소였음이 유감이라. 밭갈이 시합을 하니 반나절은 버텼으나 더는 못하겠다고 벌렁 드러누워 뻗대니 어찌 이기리오.

라운두 11. 호랑이 vs 고양이
열 판을 전패해버린 절망적인 상황에서 등장하는 자가 누구냐. 산천초목 벌벌 떠는 산중의 왕 산군 호랑일세.
“거 보고만 있자니 좀이 쑤시는구만. 내 상대가 바로 네놈이냐?”
하늘이 무심키도 하지. 뽑힌 상대가 바로 고양이 놈이라. 호랑이가 잇새로 침을 흘리며 등장하니 고양이 심장이 쪼그라들어 말린 대추만 해질 지경이더라. 눈앞이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하며 오한이 든 것처럼 온몸에 땀이 억수같이 쏟아지고 사지가 떨리니 북망산천 눈앞인 듯 훤하다.
남은 희망 한 가닥은 무슨 시합으로 겨루느냐 인데, 재롱부리기라도 아닌 이상 어찌 호랑이를 이기리오. 매정하다 하느님. 둘이 붙어 하나만 설 때까지 싸우라 이르시니 고양이 놈 그 자리에 벌렁 누워 뒹굴고 대성통곡하는 말이.
“애고, 이게 웬일이냐. 꿈이거든 깨고 생시거든 죽여주소.”
“이놈아, 원대로 죽여줄 터이니 속히 일어나 덤비거라.”
“아이구, 형님. 동생 목숨 좀 살려주소.”
“이놈아, 네가 언제 봤다고 내 동생이냐.”
“형님, 모름지기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입각하여 볼작시면 호랑이를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식육목 고양잇과 표범아과 표범속 호랑이종이라 부른다오.”
“어따, 거 다 외우지도 못하겠다. 그게 내 이름이란 말이냐?”
“형님하고 나하고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식육목 고양잇과까지 똑같으니 증조할아버지가 같은 분이시라는 얘기가 된다오. 그러니 이놈이 친척 먼 동생뻘 된다 그 말씀이오.”
범이란 놈 머리도 비상하나 딱 한 가지 흠절이 있었으니 혈연 혈통에 꿈뻑 잘도 넘어가더라. 얕은 잔꾀 누가 넘어가랴 싶었는데 호랑이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동생은 일어나시게. 짐승에도 의(義)와 리(理)가 있는 법. 똥통에 빠진 선비놈을 질타했던 이 아가리로 동생을 물 수야 있나.”
하니, 고양이 일각이 여삼추라 내 언제 누웠냐 싶게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하느님에게 달려가 이르기를,
“호랑이가 나와 다툴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승부로 봄이 옳다고 아뢰오.”

라운두 12. 쥐 vs 코끼리
이리 돌아가니 구경하던 짐승들이 일제히 우우 떠들어대며 아수라장이 되더라. 진정코저 얼른 다음 시합으로 옮기니 남은 상대는 하나씩밖에 없더라.
등장하는 코끼리 거동 보소. 집채만 한 덩치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니 용을 제외한 어떤 짐승도 감히 맞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열두 신장들도 긴장을 하여 침이 마르고 발바닥이 축축해지더라.
조그만 쥐란 놈이 이 위기를 어찌 벗어날꼬. 다들 염려하고 비웃고 놀리고 명복을 비는데 고양이 하는 말이,
“요 괘씸한 쥐야, 네놈 술수에 내가 넘어가 벼슬자리 잃고 무뢰배로 떠돌았으니 구한(舊恨)이 태산처럼 쌓였느니라. 여기 고선생이 대신 복수를 해주실 테니 목이나 씻고 기다려라. 옛정을 생각하여 묏자리는 내가 잡아주마.”
하니, 쥐가 응수하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고양이놈아. 옛말에 이르기를 나무가 크면 부러지며 꼬리가 크면 흔들지 못한다고 했다. 저 꼬리가 머리에 달린 짐승은 어디 무거워서 꼬리를 흔들 수나 있겠느냐?”
그 말을 들은 코끼리 진노하여,
“꼬리가 아니라 코다. 또한 내가 왜 코를 흔들지 못할쏘냐?”
하며 코를 쑥 내미니 쥐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코끼리 콧구멍 속으로 냉큼 들어가는데, 코끼리란 놈이 아무리 코를 흔들고 휘저어 봐도 도통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더라. 숨이 막혀 답답한 데다가 속에서 온통 깨물고 꼬집고 할퀴고 난장판을 벌이니 숨을 쉴 수가 있나. 코끼리 괴로워서 뒹굴다가 끙끙 앓으며 하는 말이,
“아이고, 아이고. 내가 졌소. 서생원 나리, 부디 나와주시오.”
“오냐, 이제 네놈은 내 말이라면 알아 모시거라.”
“여부가 있겠소.”
이후로 코끼리는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나 뭐라나.

각설, 이렇게 열두 판이 모두 끝나고 열한 판을 내리 진 고양이 무리는 더 무어라 따질 것도 없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쫓겨나듯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데, 하느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 흡족하게 웃으시며,
“과연 하늘의 문을 지키는 열두 신장에게는 당해낼 짐승이 없으니 앞으로도 귀공들이 이 역할을 맡도록 하라.”
하시니 십이지신 모두 진충갈력(盡忠竭力)을 맹세하더라.
이것이 오랜 세월 지나도 변함없이 십이지신이 하늘을 지키는 이유이다.
짐승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기 깜냥대로 살아가니 고양이란 놈은 저잣거리에서 밥이나 얻어먹으며 걷고 싶으면 걷고 눕고 싶으면 누우며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칭얼대며 유유자적 살아가더라.
땅의 길이 하늘에 있다 하여도 땅에 붙어사는 한갓 짐승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글로 족하지 않겠소. 천불생 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부장 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일을 가리키는가 하니 그만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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