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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씨앗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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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온다. 흙바닥 위에 놓고 햇볕에 말린 것처럼 건조하고 거친 바람. 어릴 적 자랐던 고향에서 늘 살을 맞대어 헐렁한 옷처럼 익숙해진 그런 바람. 어쩌면 정말 그 땅에서 그리운 기억을 싣고 왔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 아이가 있었다. 아주 작고 어린, 순수하면서도 외골수 기질이 있는 여자애. 메마른 갈색 대지 위에 자리 잡은 조그만 촌락에서 나고 자랐다. 사방을 둘러봐도 잿빛 사막과 울퉁불퉁한 바위와 기괴한 모양으로 입을 벌린 협곡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집을 짓고 사랑을 하며 아이를 낳고 살아갔다. 씨앗을 뿌려도 채 반도 자라나지 않았고, 물을 얻으려면 수맥을 짚는 도구로도 부족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척박한 땅이건만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사정과 자초지종이 담겨있을 테지. 하지만 아이들은 그곳에서의 삶을 그다지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의 모든 어른이 아저씨 아줌마요 모든 아이들이 형제자매인 것처럼 살갑게 대했고, 많지는 않아도 서로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오손도손 살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씨앗눈이 있었다. 마법의 씨앗눈. 선녀가 지상에 뿌리는 곱디고운 생명과 기적의 씨앗.

꽃씨가 하늘에서 눈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이름 붙인 씨앗눈은 몇 년에 한 번씩 내려오곤 했다. 정확한 시기나 일정한 주기를 알아내려는 외지인의 시도는 늘 실패로 끝났다.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어르신들은 아는 눈치였으나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외지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일 년에 비 한 번 오기 힘든 메마르고 황량한 땅의 사람들에게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떨어지는 꽃씨는 큰 선물이요 위안이 되어 주었다. 씨앗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관상용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외지인이 무엇보다 탐낸 부분은 희귀하고 영험한 약효를 지닌 뿌리였다.

꽃을 피웠다는 소식을 전하면 머나먼 도시에서 의사와 부자들이 앞다투어 꽃과 뿌리를 비싸게 구매했다. 마을에 정착하여 씨앗눈을 사들이던 장사꾼도 꽤 있었으나 일확천금의 욕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꽃씨는 아무리 정성스레 키워도 마을 바깥에서 꽃과 뿌리를 맺지 못했다. 마르고 거친 이곳 땅만이 자신에게 걸맞은 삶의 터전이라는 듯이.

덕분에 주민들은 비록 폐쇄적이지만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확보해 나갔다. 내부인이었던 사람 입장에서는 척박한 변경 오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해본다.

보물이 하늘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떨어지는 날은 그대로 마을의 큰 축제가 되었다. 여자애가 어릴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팔기 위한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수집하기보다 씨앗눈 자체를 즐기려는 마음이 더 컸다.

어른들은 술을 담가 꽃씨를 띄워서 마셨고, 옷에 하얀 솜털을 장식으로 달고 모닥불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 아이들은 들뜬 마음에 강아지와 함께 어울려서 종일 들판이며 언덕길을 뛰어다녀도 지칠 줄을 몰랐다. 짙은 구름이 갈라지며 드리우는 햇살의 조명 사이로 내려오는 씨앗눈은 강림하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이었다.

특히 여자애들에겐 씨앗눈이 정말 특별한 의미에서 소중한 존재였다. 무심한 남자애들은 떨어진 씨앗을 주워 새총에 끼워서 날려버리기 일쑤였지만 여자애들은 할머니, 어머니, 누이에게 들은 소중한 전설을 간직하고 대대로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 전설이란 바로 자신만의 씨앗을 하나 정해서 가꾸어주는 일이었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면서 양손을 앞으로 내민다. 손바닥 위에 떨어진 꽃씨를 자신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심고 정성을 다해서 길러주면, 씨앗은 싹을 틔우고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그와 함께 빌었던 소원도 함께 이루어진다는 전설이다.

대신 다음번 씨앗이 떨어지기 전까지 꽃을 피우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영 꽃은 피지 못하고 소원도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오직 여자에게만 통하며, 여자에게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며, 여자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많은 여자애들은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아직 땅바닥에 붙어 다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양, 자신이 남몰래 짝사랑하는 아이와 맺어지길 바라거나 원하는 이상형의 상대가 나타나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씨앗을 심고 가꾸었다.

아무리 철없고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 남자애들도 여자애들의 비밀스러운 화원을 망치는 일만은 하지 않았다. 어른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성스러운 씨앗에 대한 교육 때문이기도 하고, 씨앗이 싹트지 못하면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릴지도 모른다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남자애들은 은근히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자신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씨앗을 심었다고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어느 여자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그 아이에게도 마침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씨앗눈을 만나는 날이 왔다. 사실은 두 번째였으나 처음 보았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어렸기에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이는 뒷산에 올라가 손바닥을 가지런히 펴고 열심히 소원을 빌었다.

드디어 아이도 자신만의 씨앗을 만났다.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던 하얀 솜털 덩이가 아이의 코끝을 스치려는 듯이 다가왔다가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이는 즉시 흙을 파서 조심스레 묻고 돌멩이를 모아 원을 그려 표시해두었다. 이제 이곳은 아이만의 화원이 되었다.

소원을 담은 씨앗을 심은 아이는 기쁜 마음에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집 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어머니의 낡은 앞치마를 찢어져라 잡아당겼고, 눈에 띄게 여윈 어머니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 목을 끌어안고 그 사실을 자랑스레 얘기해주었다. 아이는 기쁨과 소망을 가득 담은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말했다.

“나 있지, 엄마가 빨리 나아서 일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에 입을 맞추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싹이 나서 꽃을 피울 때쯤에는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결국 꽃은 피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뒤 아이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습관처럼 하던 기침과 점차 볼썽사납게 야위어가던 몸, 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가끔 토하던 핏덩어리. 자식의 기억 속에 남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아이는 혼이 달아나고 껍데기만 남은 인형이 되어버린 것처럼 장례식 내내 아버지 손에 힘없이 이끌려 다녔다.

울다 지쳐서 잠들었던 아이는 밤중에 깨어났다. 어른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엿듣는 아이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마을을 위해서 잘 된 일이야.” “이제 씨앗이 내리겠지.” “얼마 이하로는 절대 안 돼.”

가격과 액수 이야기. 아이가 이해하기에 힘든 낱말과 숫자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화장실에 갔던 이모가 깬 아이를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들었니? 어른들끼리 하시는 말씀이야,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

아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이가 거듭 캐묻자 이모는 이불을 덮고 함께 누워 주위의 시선을 막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마을의 비밀을.

“어차피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텐데……” 이모는 주저하면서도 그렇게 말문을 뗐다. 마을에서 여자가 죽으면 씨앗눈이 내린다고 한다. 어른들은 대대로 이어진 경험으로 이를 알았다. 곧바로 내리는 경우도 있고 하루 정도 걸리기도 하지만 분명히 내렸다. 사람들은 씨앗을 모아 외지인에게 비싸게 팔 궁리를 하고 있었다.

죽은 여자가 선녀님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씨앗눈을 뿌린다. 이모는 그렇게 아름다운 전설로 치장하려 애썼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어른들의 추한 욕망이었다.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다음날 새벽 씨앗눈이 내리자 아이는 악착같이 씨앗을 모았다. 사정을 모르는 어른들은 수확량이 예전 같지 않다며 어리둥절했다. 누군가는 병약한 아이의 어머니 탓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애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을에서 가장 많은 씨앗을 모았다. 혼자 남은 집 안마당에서 꽃을 길렀다. 시간이 지나 아이의 집은 무수한 꽃으로 뒤덮였다.

꽃이 폈다는 소식이 퍼지자 외지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아이는 그들을 유심히 보다가 어느 귀부인을 골라 몰래 다가갔다. 아이는 자신이 기른 꽃을 돈 대신 다른 조건으로 팔았다.

“절 마을로 데리고 가서 같이 살게 해줘요.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신세 질게요.”

아이가 가진 보물은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가치를 지녔다. 귀부인은 승낙했고 다음날 아이는 귀부인의 마차를 함께 타고 마을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떠나기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이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이모만이 무사히 잘 지내라며 작별인사를 해주었을 뿐.

귀부인의 하인들이 마차에 꽃과 뿌리를 싣는 사이에 아이는 씨앗눈을 심었던 장소로 갔다. 어머니가 죽기 전날 꽃봉오리는 막 꽃을 틔우려는 듯 터지기 직전의 상태였고,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세상에서 가장 미운 상대를 보듯이, 어머니를 데려간 저승사자라도 만난 것처럼 독기를 품은 눈으로 피기 직전에 굳어버린 꽃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정성껏 길렀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꽃을 피우기만 하면 되는데도 씨앗은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거부했다. 이 씨앗이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처럼 어겨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는 마침내 일어서며 발로 꽃을 짓밟았다. 발로 봉오리를 짓이기고, 줄기를 부러뜨리고, 가느다란 뿌리를 파헤쳐 흩어버렸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금전적 가치로든 설화적 의미에서든 성스럽고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던 꽃을 망가뜨리며 알 수 없는 쾌감마저 느꼈다.

결국 꽃은 피지 않았고 어머니는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영원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기고 거짓말쟁이가 되어 딸의 곁을 떠났다.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마을을, 전설을, 심지어 어머니까지 원망하고 미워하는 편을 택했다.

아이가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찻잎과 약재를 판매하는 상인의 집에서 머물며 학교에 다녔다. 졸업하고 성인이 되자 상인은 자신의 수양딸 겸 후계자가 되라고 제안했다. 아이의 명석함과 결단력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리라. 비슷한 처지라면 다들 반색할 제안이었건만 자립하고 싶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집을 나와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하여 홀로살이를 시작했다.

몇 년 후 전쟁이 일어나 사귀던 남자가 징집되면서 헤어졌고 자신도 간호사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그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사라지는 바람에 상인에게로 돌아갔다. 비록 쇠락했어도 가게는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가족도 후계자도 없이 홀로 가게를 지키는 늙은 상인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는지 양녀가 되어 가게를 물려받았다. 모든 삶을 오직 사업에만 쏟아 가게를 예전보다 더 크게 키워냈다. 그렇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더 능청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미움을 품고 마을을 떠나 평생 돌아가지 않은 어느 나이 든 여자의 이야기. 번창한 가게는 양어머니가 그랬듯 양녀에게 물려주고 오늘도 이렇게 창가에서 한가로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도 바람이 부는 날에는 가끔 소금기가 담긴 텁텁한 모래바람이 느껴진다. 초록을 찾기 힘든 황갈색의 산, 언덕 위로 오르면 보이는 기암괴석과 그 너머로 보이는 회색 암염 가득한 사막. 그 적막하고 공허한 풍광을 아름답게 꾸며주던 씨앗눈이 떠오른다.

천사처럼 하얀 솜털 날개를 펼치고 요정처럼 귀엽고 선녀처럼 우아하게 날아와 내 발밑에 떨어지던 씨앗. 그 모든 정경이 바람에 실려 와 망막에 새겨지는 듯 뚜렷했다.

며칠째 내린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물러나자 바람이 불어왔다. 따뜻하고 거친, 짠맛이 느껴지는 고향의 바람. 반쯤 잠이 든 채로 나른히 햇볕을 쬐던 나는 깜짝 놀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커튼처럼 드리워진 빛줄기 사이로 내려오는 작은 요정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씨앗눈이 회색 도시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날개, 작고 단단한 둥근 씨앗을 감싼 솜털 날개를 펼치고서. 때론 바람을 맞아 뱅글뱅글 돌며, 때론 물결을 타듯 유유히 날아 내려오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이토록 낯설고 신비로운 존재를 무시할까, 귀찮아할까, 아니면 두려워할까. 나는 홀로 정원으로 달려나와 어린 날의 여자애처럼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껑충 뛰면서 웃었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은 꿈이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날 리도, 걷거나 달릴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 내 생명은 꺼진 벽난로 재 속을 뒤져서 겨우 찾아내는 잔화(殘火)에 불과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건 어머니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늘나라 선녀님이 된 어머니가 나에게 화해의 선물을 보내고 있는 걸지도. 아니면 그토록 오래전에 떠나고 외면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마을의 여자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증거인 걸까.

어느 쪽이든 좋다. 꿈이든 죽음이든…… 이토록 기쁘고 자유로운 순간이 언제 또 있었던가. 나는 들뜨고 홀가분한 심정으로 춤을 추었다. 세상은 빙글빙글 돌았고, 어느새 나는 정면으로 하늘을 마주보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씨앗눈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내려앉는 씨앗들. 그 하나하나에 나는 소중하고 은밀한 소원을 담아본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질 수 없었던 모든 소망을 포함해서.

살며시 몸 위로 내려앉는 씨앗들의 감촉을 느끼며 마지막 소원을 맡긴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나는 씨앗이 싹을 틔우는 희미한 소리를 들으려 눈을 감는다.

(2003.12.07. / 2018.10.31. 개작)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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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울 18.11.01 23:20 댓글

    담담하고 절제된 증언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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