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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도ㅅ↑

pilza2

 


온몸이 아프다. 강렬한 감각이 공기를 통해 전해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물결처럼 뚜렷한 파장이 몸을 덮쳤다. 어디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정신없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그렇다. 도시다. 나의 집은 이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길고 가느다란 건물. 그 위의 건물. 옆의 건물. 둥글고 네모나고 세모난 기둥. 뾰족한 첨탑. 경쟁하듯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무수한 화살표들. 조금은 굵고 조금은 가늘고 조금은 길고 조금은 짧은 수많은 화살표. 화살의 목표는 무한한 하얀색 허공.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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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전조는 번개였다. 우리집 옥상 위로 번개가 내려왔다. 번개라고? 차라리 물에 퍼지는 기름이 낫겠다. 너무 느리고 물렁하고 연약했다. 그리고 강렬하게 퍼지는 감각. 아프다. 나를 찌르고 뒤흔들었다. 온몸의 감각기관을 송두리째 휘저은 다음 깊은 심연 속으로 내팽개친 것 같다.

      지             다
어          럽         .

이제 번개는 그쳤다. 대신 나와 흡사한 덩치를 가진 덩어리만 남았다. 갑작스런 빛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듯이 온몸의 아픔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러나 떨림은 지속된다. 커지는 마음의 흥분은 육체의 진동이 낳은 결과일까, 마음과 육체의 상쇄간섭일까.
점점 미지의 존재를 상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도 흡사한 외형. 그러나 몸 안에서, 전체에서 밖으로 강렬한 광선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전해오는 파장이 변한다. 모양은 크게 바뀌지 않지만 빛의 일렁임이 바뀐다. 공기가 빛을 반사하며 출렁이는 물결처럼 변한다고 해야 할까? 내게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어휘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두려움을 잊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경험이었음은 분명하다. 황홀경에 빠진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준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렌? 맞아, 사이렌이다. 공기를 거칠게 찢으면서 나에게 경고를 전달했다.

 

 

본능적인 두려움. 이 신비로운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앞섰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도 이 존재가 내는 소리를 먼저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ㅅ ㅈ ㅅ ㅇ … ㅅ ㄹ ㅈ ㅅ ㅇ …”
명확히 알아듣기는 힘들었으나 힘을 준 ㅅ과 높아지며 흐려지는 ㅇ의 강조는 알아들었다. 내가 읽은 감정은 당혹과 공포였다. 공포라고? 존재만으로 주위에 아픔을 퍼뜨리는 이 가공할 존재가 나와 같은 약한 감정을 갖고 있다니, 가능한 일일까?
어쨌든 통제자들에게 이 미지의 존재를 보여줄 생각은 없어졌다. 그들이 이 평화롭고 고요한 세계에 스며든 이물질을 용납할 리는 없으니까. 과연 이 난처하고 까다로운 상대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일단은 숨겨놓자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상대는 적당한 곳에 잘 찾아온 셈이다.
이웃보다 낮아 보이는 우리집은 대신 지하가 깊었고 수리공이라는 직업에 걸맞은 은밀한 작업실을 갖추고 있었다. 통제자들 몰래 무언가를 숨겨놓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단지 문제는 이 미지의 상대가 내 뜻에 순순히 따라줄 것인지인데…….
#424242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런 의미의 음성을 상대에 전달했다. 빛덩어리가 움찔하는 듯이 살짝 떨렸다. 반응을 보인다.
#424242 「해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알아들었을지 자신은 없었다. 의사소통에 실패하면 곧 들이닥칠 통제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때는 포기하는 수밖에. 지금도 사이렌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의 무법자처럼 밀려오는 음파에 행인은 물러나고 열렸던 창문은 굳게 닫혔다.
#424242 「이곳은 위험하니 저를 따라와요.」
제발 따라오기를 빌며 옥상에서 내려왔다. 차마 붙잡고 끌고 오지는 못했다. 건드리는 순간 몸이 녹아내리거나 아픔으로 갈가리 찢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 탓이다.
조금 망설였던가? 아무튼 결국 미지의 존재는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면 내 몸의 고통과 마음의 떨림이 강해진다.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면 꼭 도망치는 것 같아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으니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좁은 나선계단을 따라

 하

 내

 갔
다.
통제자들 몰래 나만의 비밀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삭제감이지만, 다행스럽게 이 넓고 복잡한 도시의 한 구석 빈민가에 있는 보잘것없는 집을 수색해서 찾아낼 만큼 그들은 한가하지 않다.
지하 어둠 속에서 새삼 깨달았다. 낯선 존재는 스스로 빛을 방출하고 있었다. 가능한 일일까? 빛은 통제자가 조절한다. 덕분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빛과 어둠의 적절한 조화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이는 세상의 법칙이며 존재의 원리다.
상식을 완전히 거부하는 미지의 존재를 앞에 두고도 나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사이렌의 목적지가 우리집이라는 확신밖에는.
1층으로 올라와 창밖을 엿보니 과연 길거리에 통제병들이 쫙 깔렸고 집집마다 수색하는 광경이 보였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자니 이내 그들은 우리집으로 들이닥쳤다.
늘 그렇듯, 문을 거칠게 두드리고는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이 열고 들어왔다. 통제병 둘이 집 안을 쓱 살폈다. 서류철을 든 병사 하나가 나를 슬쩍 보고 서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통제병 1 「관리번호 #424242. 4C형 주택, 거주자 1인. 틀림없나?」
질문이라기보다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말투였다. 그 증거로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써 다음 말로 넘어갔다.
통제병 1 「통제관리법 제3조 7항에 의거하여 본 건물을 수색하겠다. 협조 바란다.」
#424242 「예, 물론이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둘은 내 말을 무시하고는 즉시 수색을 시작했다. 나 역시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았다. 그저 우리집이 목적지가 아니라 여러 후보 중의 하나임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정기수색도 있으니 도시의 주민 입장에서 이 정도 수색은 이골이 난 지 오래다. 그들 역시 형식적인 절차를 수행할 뿐이었다. 가구로 막아놓은 지하실 입구를 찾아낼 리가 없다.
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기도 아냐, 대충 그런 의사교환으로 보였다. 너무 빨리 마음을 놓은 탓일까. 병사 하나가 밖으로 나갔고 서류를 든 병사가 따라가다가 돌연 내게로 몸을 돌렸다.
통제병 1 「#424242. 귀하에게서 비협조적인 파동이 감지되었다. 도시의 수호자이자 공무집행자에게 불만 혹은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사무적인 말투였으나 그에 담긴 의미는 소름끼치도록 무시무시했다. 까딱 잘못하면 나 같이 낙오된 시민은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다. 저들에겐 일반시민을 즉결삭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424242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단지 수색 도중에 제가 아끼는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어 흠집이 생기는 바람에 속으로 조금 불평을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통제병 1 「귀하의 불평은 곧 통제자의 통치에 대한 모독이므로 관련법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겠다.」
#424242 「네, 죄송합니다. 부디 선처를…….」
통제병에게는 일단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안 그랬다간 또 무슨 일로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니까. 녀석들은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지는 않는다지만, 자신들의 뜻에 거슬리면 무조건 범죄로 치부하며 이를 해명할 방법은 없다.
나갔던 병사가 다시 들어와 내가 소유했던 빛 일부를 벌금으로 뜯어가 버렸다. 다행히 수색은 금방 끝났지만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다. 내가 왜 정체도 모르고 나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미지의 존재를 숨겨주고 이런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지 원망도 생겼다.
창밖을 보며 통제병들이 멀어지길 기다린 후에 지하실로 내려갔다.
솔직히 마주보고 있기에도 고통스럽지만 외면할 순 없었다. 떨린다. 설렌다. 호기심이 솟아난다. 더 알고 싶다. 느끼고 싶다. 이 감각의 정체는 무얼까?
상대를 안심시킬 생각으로 나는 두서없이 말을 건넸다.
#424242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도 당신을 감시하지 않습니다. 통제하고 검열하지도 않아요.」
대답은 없었다.
#424242 「난 그저 놀랐을 뿐이에요. 당신 같은 존재를 처음 봤으니까. 당신은 어떤가요? 이곳을 알고 있나요? 저와 같은 존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주 느린 반응이 돌아왔다. 이것이 상대의 언어일까?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다만 나는 상대방이 보내는 음파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청난 감정의 홍수에 휩쓸려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ㅇㄱㄴㅁㅊㄲㅁㅅㄱㅊㄹㅁㅇㄷㅇㅇ…… ㄴㅁㄴㅊㅅㄹㄱㅊㅇ…… ㅇㄹㄱㅂㄴㅇㄴㅊㅇㅁㅇㅇㅇ……”
#424242 「진정해요.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줄 방법을 찾아볼게요.」
묻고 싶은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지만 일단은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생각해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에 이런 일을 들려줘도 좋을 상대가 떠올랐다. 늙고 괴팍하고 수다스럽지만 주위 누구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낙오자. 이 근처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그에 대해 알고 있다.
#a6a6a6은 이 도시가 생기기도 전에 태어나 도시를 건설한 늙은이다. 그래서 그의 육체는 많이 일그러져 쭈글쭈글하고 꽤 희미해졌으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쌩쌩하고 무엇보다 말이 많다.
주위의 낙오자들은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쓸모없고 희한한 이야기를 대부분 한 귀로 흘리고 잊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여러 종류의 빛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새로웠다. 그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통제자들과는 다른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제대로 교육과 통제를 받았다면 그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이제 내 앞에 통제자의 가르침에 반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일말의 기대를 품고 나는 늙은 낙오자를 찾아 나섰다.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하실에 얘기해두었지만 알아들었을지 불안했다. 출입구를 단단히 막아놓았으니 제멋대로 집밖으로 나올 일은 없으리라 믿고 거리로 나왔다.
통제병들이 지나간 거리는 내가 알던 빈민가로 돌아가 있었다. 곳곳에 아무런 존재이유를 찾지 못한 어둠 조각들이 찢어진 종잇조각처럼 거리 구석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 * *

 

부서진 집의 잔해 위에 못 쓰는 물건을 버리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쓰레기장 주위를 돌면서 늙은이를 찾았다. 분명히 이 골목 어디에서 폐품 뒤지는 모습이 보였다고 들었는데. 움직이는 기척이 보여서 쫓아가보면 작은 짐승이 금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결국 찾다가 지쳐서 잠시 앉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야, 응? 함부로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말아!」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침입자를 쫓아내기라도 하는 말투였다. 돌아보니 늙은 낙오자가 쓰레기 더미 너머에서 걸어오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424242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a6a6a6 「뭐가 어째?」
#424242 「제가 통제병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큰소리예요?」
#a6a6a6 「쓸데없이 걱정은. 녀석들이라면 한참 전에 지나갔어.」
늙은이는 힘없이 웃었다. 걸으면서 휘청거렸지만 쓰레기에 발이 걸려서 그런 모양이고 실제로는 생각보다 기운이 넘쳐 보였다.
#424242 「저기, 예전에 했던 말씀 기억하고 계세요?」
#a6a6a6 「뭐든지 물어봐! 아직 젊은 애들보다 머리는 휙휙 잘 돌아가니까.」
#424242 「통제자의 가르침에 없는 존재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조금은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다른 이들에게 했다면 놀림을 당하거나 미쳤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정도라면 차라리 낫다. 통제병에게 밀고라도 한다면? 그러니 털어놓을 상대가 늙은 부랑자밖에 없는 처지겠지만.
#a6a6a6 「드디어 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는가?」
늙은이는 엉뚱하게도 내가 자기 말에 현혹되었다고 생각했나보다.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424242 「믿기 힘들고 설명할 수도 없는 존재를 만났어요. 아마 당신이라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a6a6a6 「만났다고? 그게 정말이야? 흐음…… 통제병들이 목적도 안 알려주고 무언가를 찾아다닐 때부터 수상하다 했더니.」
#424242 「병사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목적을 알려준 적은 없죠.」
늙은이는 동의의 뜻으로 피식 웃더니 손짓으로 나를 재촉했다.
#a6a6a6 「자네가 숨겨놨단 말이지? 그럼 어서 가보자고. 직접 만나보면 무언가 알겠지.」
나는 늙은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숨겨진 지하실로 내려갔다.
곧바로 차갑고 뜨거운 바람이 뒤섞인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적응된 줄 알았는데 조금 떨어져 있던 그 사이에 다 잊어버린 건가. 예리한 통각과 묵직한 압박이 몸을 뒤흔든다.
늙은 낙오자는 충격이 심했던지 그 자리에 반쯤 엎드렸다.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고통이었는지도.
#a6a6a6 「인사를…… 드립니다. 살아있는 빛이여.」
놀라서 어리둥절한 나를 흘깃 보더니 조금 쑥스러웠는지 일어났다.
#a6a6a6 「으음. 내 생전에 또 보게 될 줄이야. 결코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어.」
#424242 「이 존재를 본 적이 있다고요?」
#a6a6a6 「같은 분은 아닐 거야. 내 말은 ‘색깔’을 봤다는 얘기지.」
미지의 존재가 조금씩 움직이거나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변하는 빛의 파장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늙은이는 나보다 더 명확하게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방금 뭐라고 했지?
#424242 「색깔이라고요? 그게 뭔데요?」
#a6a6a6 「우리에게 없는 것. 그리고 여기 있는 이분에게 있는 것.」
내가 어안이 벙벙해 대꾸도 못하고 있자 그는 나를 재촉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a6a6a6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할 때가 왔어. 어차피 나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싶어.」
#424242 「그 상대가 나라고요?」
#a6a6a6 「네가 이분을 모시고 있으니까 당연하지!」
#424242 「잠깐만요, 그건 그냥 우연히……. 그보다 대체 저게 누군데 그렇게 깍듯이 대하는 거예요?」
#a6a6a6 「이 썩어빠진 도시를 구원할지도 모르는 분이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를 멸망시킬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늙은이는 유쾌한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이 킥킥댔다.
#a6a6a6 「여기는 그림자 도시야. 그리고 자네와 나는 그림자이고. 이걸 모르는 그림자는 없지. 그런데 다들 모르는 것이 있어. 그림자란 빛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424242 「그건……」
통제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나? 빛은 그림자가 없는 공백이며 허무이다. 빛이라는 무(無) 속을 어둠이라는 유(有)가 점유하고 있다. 그 결과 그림자가 태어나고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빛이라는 배경 위에 그려진 그림이다.
#a6a6a6 「다들 나를 미친 늙은이라고 비웃었지? 이제 저분이 나타났으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잘 알겠지. 그림자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생기는 무언가의 흔적이 불과해. 우리는 그러니까 진짜인 무언가가 남긴 가짜인 셈이야.」
#424242 「대체 그 진짜는 뭡니까?」
#a6a6a6 「네가 방금 봤잖아. 나도 봤고. 그렇게 놀랐나? 통제자의 주장을 퍼뜨린 이유는 도시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지배하기 위해서야. 그들은 이 도시를 무에서 만들어낸 유라고 주장하지. 그렇지만 어둠이 무엇을 낳을 수 있을까? 전부 다 거짓이야. 저분은 우리와 같은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이며 그림자의 본체야. 그림자에게는 없는 것을 갖고 있지.」
#424242 「색깔이란 말이죠? 그게 대체 뭐길래……?」
#a6a6a6 「우리에겐 색이 없지. 색을 느낄 수도 없어. 나 역시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자네와 마찬가지로 느낄 수는 없어. 스스로 존재하는 진짜만이 가진 것. 우리 그림자에겐 없는 것. 그게 색깔이야.」
그랬던가. 하긴 이 알 수 없는 아픔과 떨림의 정체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누가 어떻게 설명을 해도 납득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리라. 미지의 존재는 그림자가 아니라 색을 지닌 본체라는 설명은 놀랍긴 하지만 더 나은 해석이 나오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424242 「그럼 저것, 아니 저분이 우리를 만들었단 말인가요?」
#a6a6a6 「아니, 그렇지 않아. 그림자는 특정한 하나의 본체로부터 만들어져. 누구에게나 그림자를 만들어낸 본체가 존재한다는 얘기지.」
너무 광활하고 아득한 이야기였다.
이 도시가, 우리 모두가 무언가의 그림자라면?
어딘가에 모두의 본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주위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정도로 놀라운 발상이다.
#a6a6a6 「묻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처럼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왔고 색깔이 존재하는 세상은 어떤지. 그곳에도 그림자가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사실은 나도 제일 궁금했다.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의문이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늙은이의 조급증이 일을 다 망쳤다.
이야기에 열중하여 지하실을 열어놓은 바람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정체가 집밖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 나는 그것이 색깔임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는 모르고 있었다.
처음 나와 같은 충격과 아픔을 느낀 이들이 신고를 했음이 분명하다. 사이렌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통제병들의 차량이 집 앞에 도착했다. 병사들이 크고 검은 방패를 앞세우고 접근했다.
통제병 2 「관리번호 #424242, 그리고 신원미상의 그림자! 불온한 파장을 퍼뜨리는 위험물 소지죄로 즉각 체포한다!」
두려움과 절망에 나는 그 자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통제병에게 저항한다는 생각은 도시의 주민이라면 태어난 이후로 해본 적이 없으리라.
이제 난 삭제다. 삭제. 삭제. 무로 돌아가는 것.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허무…….
#a6a6a6 「뭘 넋놓고 있는 거야? 얼른 나를 따라와!」
갑작스레 두들기는 손과 고함에 정신이 들었다. 과연 늙은 낙오자의 생각은 평범한 그림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열린 창밖으로 훌쩍 뛰어나가더니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세상에, 도망칠 생각을 다 하다니! 어차피 붙잡히고 더 심한 문책을 당할 게 뻔할 텐데. 나에게 닥칠 운명은 하나마나한 재판 후 삭제형에 처해지는 결과뿐인데.
어쩌지, 어쩌면 좋지. 망설임 때문에 몸이 심하게 떨렸다. 이대로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병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커지자 억지로 밀린 것처럼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문이 열리고 통제병들이 들이닥쳤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집 주위를 수색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집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병사들은 지하실에 있는 ‘위험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기색이었다. 저 정도 재난에 직면했으니 집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겠지.
결국 상관의 상관의 상관의 상관에게 보고가 올라가고 위에서는 대책회의를 거듭하며 긴 시간이 흘렀다.





에 지금껏 본 중에 가장 큰 차량이 왔고 몇 겹으로 둘러싼 커다란 그림자들이 길고 시커먼 막대기로 색깔을 뿜는 분을 차에 타도록 유도했다. 과정은 위험한 맹수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고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통제병 여럿이서 커다란 천의 가장자리를 잡고 펼쳤다. 아마도 그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두껍고 검은 천 같았다. 색덩어리는 천에 감싸여 거의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지만 갓을 띄운 전등처럼 여전히 다채로운 색상은 꺼지지 않고 존재했다. 병사들은 그분을 커다란 짐칸 안으로 밀어놓고 문을 닿은 후에 안도한 기색으로 각자 차에 탔다.
늙은이는 나를 툭 치며 일어났다.
#a6a6a6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거야? 가자고.」
#424242 「가다니요? 어디로?」
#a6a6a6 「아, 어디긴 어디야? 저분을 구하러 가야지.」
#424242 「우리가요? 고작 둘이서?」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지만 어느새 앞장 선 늙은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통제자들이 저 색덩어리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도 되고 궁금했다.
차는 빈민가를 빨리 빠져나가지 못했다. 때마침 지금은 퇴근시간. 밀물처럼 몰려오는 차량과 행인이 뒤섞이며 거리는 정체된다. 번쩍거리는 통제병들의 차량이라면 모두들 허둥지둥 길을 비켜주겠지만, 그래도 좁고 혼잡한 뒷골목의 교통사정을 해결할 정도의 위력은 못 된다.
#424242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늙은이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듯했다.
#a6a6a6 「내가 이래봬도 탄광열차 궤도 설계 때 현장에 있었지.」
도시를 지을 때 쓰던 탄광을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면 폐광이 되고 철도도 사라졌을 텐데.
오래지 않아 하늘 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낡은 선로가 그저 도시를 장식한 흉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a6a6a6는 흙과 먼지와 쓰레기로 뒤덮여 막힌 터널 안에서 낡은 핸드카를 찾아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낑낑대며 핸드카를 선로 위에 놓았다. 네 명 정도 서있을 수 있는 크기고 가운데에는 앞뒤 양쪽으로 이어진 손잡이가 있어 시소처럼 상하로 운동시키면 차축이 회전하여 전진하는 수동식 기차다.
#a6a6a6 「마침 딱 좋지 않나? 둘이라서 다행이지.」
#424242 「이걸로 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a6a6a6 「걱정일랑 접고 손잡이나 열심히 밀어, 이 친구야.」
딱히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핸드카는 천천히 경사진 선로를 올라갔다. 한 번 높이 올라가니 내려올 때는 제법 빨랐다. 크고 높은 건물 몇 개를 지나니 도시 한 구석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a6a6a6 「통제병의 차량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지. 자네 눈이 더 좋을 테니 찾아보라고.」
나는 한쪽 손을 들어 가리켰다. #a6a6a6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a6a6a6 「파장통제국으로 가는 것 같군.」
#424242 「어떻게 알죠?」
#a6a6a6 「어차피 이 도시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는 세 군데 아니겠나. 도시관리국, 그림자 배양소, 파장통제국. 그 중에서 정체불명에다가 위험한 존재를 격리하고 연구할 수 있는 장소라면 아무래도 파장통제국이겠지.」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핸드카에서는 내가 등을 지고 #a6a6a6이 전진하는 방향 쪽에 있었다. 그가 길을 알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여러 갈림길에서 늙은이는 적절한 방향을 용케도 알고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종종 옆에 나란히 이어진 선로가 끊어지거나 꺾이거나 정지된 기차로 인해 막힌 모습을 보면서 #a6a6a6의 기억력과 반사신경에 감탄했다. 한 번의 실패도 없이 핸드카는 뻥 뚫린 도로를 달리듯 거침이 없었고 통제병의 차량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은 채 따라갔다.

 

* * *

 

크고 위압적인 원뿔 모양 건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파장통제국. 도시의 모든 빛과 소리를 지배하는 곳.

 


어둠
소리와소음
빛과어둠과소리
이곳이바로파장통제국
감히일개그림자가범접할수없는
거대하고위대하며압도적인빛과소리의원천

 

눈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원뿔에서 뿜어내는 빛과 소리에 온몸이 얼얼했다. 나 같은 일개 그림자가 감히 접근할 곳이 아니다. 두려움과 후회가 온몸을 휘감는다. 핸드카 손잡이를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비록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신기하게도 이전 같은 무력감은 들지 않았다.
파장통제국의 위압이 이전 같지 않다는 건방진 생각까지 들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이보다 더 강렬한 빛을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림자도 결국, 자극에 익숙해지고 강인해진다.
정말 그렇다면 나 #424242와 #a6a6a6 늙은이는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자극과 고통에 강한 그림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감이 생겨났기에 외경심과 절망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a6a6a6 「크크큭.」
#424242 「뭐가 웃기죠?」
혹시나 공포에 질려 실성하지 않았나 겁이 났지만 다행히 그럴 그림자가 아니었다.
#a6a6a6 「저놈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424242 「무슨 뜻이에요?」
#a6a6a6 「통제할 수 없는 파장을 파장이 잔뜩 보관된 곳 안에 집어넣었단 말이다. 쉽게 말해 폭약 저장고에 시한폭탄을 넣었다는 얘기지. 놈들은 이 새로운 폭탄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착각한 모양인데, 그게 그렇지가 않거든.」
#424242 「폭발한다는 얘기에요?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a6a6a6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젊은이가 왜 그렇게 생각이 짧아? 내 말은 비유야, 비유.」
아까부터 계속 자기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느니 나보고 생각이 짧다느니 비난이 그치질 않는다.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막상 반박하려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탄 낡은 선로는 파장통제국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경비도 삼엄해지니 여기쯤에서 핸드카를 버려야 했다.
#424242 「이제 어쩌죠? 병사들이 안팎으로 쫙 깔렸을 텐데.」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의 하나를 허투루 관리할 리가 없다.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함부로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다.
#a6a6a6 「기다려봐. 곧 어서옵쇼 하고 활짝 열릴 테니.」
늙은이의 장담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a6a6a6는 오늘 이후로 실망시킨 적이 없다. 정말 그의 말대로 저분이 시한폭탄이고, 통제국이라는 폭약 저장고 안에 들어갔다면……

 

 

 

 

                                                                            름
무                                                                     구
    너                                                            기
       지                                                    연
           는                                          는
               건                                르
                    물                     오
                        과         어
                              피

뭉게뭉게
뭉게뭉게뭉게뭉게
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
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
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
뭉게뭉게뭉게뭉게뭉게
뭉게뭉게
뭉게뭉게
뭉게뭉게
뭉게뭉게

사                                   날              가
    방                                      아                    는
        으                                                                                              그
              로                                                                                                림                      들
                                                                                                                            자

 

#a6a6a6 「저거 봐! 내 말대로 되었지?」
#424242 「이게 어디가 비유에요? 이러다 우리까지 휘말려서 죽겠어요! 콜록 콜록.」
으윽. 연기가 들어가 말은커녕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겠다.
설마 정말 진짜로 폭발할 줄이야.
그건 그냥 큰일이 일어난다는 비유 아니었나? 지금은 실제로 폭탄이 터진 듯한 상황이었다.
세찬 먼지바람에 몸을 웅크리는데 늙은이는 폭발의 진원지인 통제국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나를 손짓하여 불렀다.
#a6a6a6 「뭐하고 있어? 이 절호의 기회를 노려야지!」
확실히 통제국은 곳곳에 구멍이 뚫려 빛과 소음과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무방비 상태임은 분명했다. 통제병들은 대부분 폭발에 휘말려 부서지고 날아가고 파편에 깔렸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들은 놀라서 허둥대고 있으니 이 틈을 타 몰래 들어가는 침입자를 찾아낼 여력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말이 쉽지. 폭발이 일어나는 곳으로 들어간다니 죽을 자리 찾는 것도 아니고. 벌린 맹수의 입 안으로 알아서 기어들어가는 꼴이다.
아주 옛날 의무교육을 받던 시절 견학차 방문했던 시설에 몰래 들어가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험이었다. 단지 빛과 연기와 진동 때문에 제대로 감상할 겨를이 없다 뿐이지.
폭발은 처음처럼 크진 않아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건물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이대로 죽느니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럼에도 실제로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다. 내 영혼은 이미 홀려버린 걸지도. 이 도시에 없는 색깔을 가진 존재. 그가 뿜는 강렬한 파장이 통제국 안에 보관된 다른 파장과 부딪쳤기에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사실 달리 실마리가 없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존재인가. 다시 내 눈으로, 몸으로, 영혼으로 체험하고 싶다. 그런 집념이 목숨을 내건 모험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a6a6a6 늙은이의 호기심과 갈망이 아마도 나보다 몇 배나 더 크겠지만.
이제 보인다.
무너지고 기울어진 원뿔형 꼭대기 층에 그분이 있었다.
덮었던 천은 벗겨져 사라지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빛과 색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누군가 서있었다.
계단 밑에서 고통을 참으며 웅크린 우리 둘에게는 그저 흐릿한 윤곽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누군지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뿔처럼 비쭉 솟은 머리모양은 이 도시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극소수만이 존재하는 통제자. 나 같은 평범한 그림자가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통제자가 가까이에 있었다.
빛과 색을 받아 그의 몸도 흐릿하게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강렬한 고통 앞에서 끄덕도 하지 않고 서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강력한 어둠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통제자의 얼굴에서 크고 깊은 어둠이 번져갔다. 심연에서 길어 올린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제자 「색을 지닌 이여.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어째서 그림자들의 도시에 왔는가?」
“ㅈ……ㅈㄴㅇㄱㅇㅇㄱㅅㅈㅇㅇㅇㅇ…….”
그분의 말은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강렬한 고통을 주는 파장이 뿜어 나와 온몸의 감각이 얼얼했기 때문이다.
통제자 「그대가 무엇을 바랐든 이 도시는 변하지 않으리.」
말투는 단호하고 확신이 담긴 선언 같았다.
통제자 「빛은 그림자를 낳았다. 하지만 빛은 그림자를 버렸다. 그러기에 우리 그림자는 이곳에서 홀로 존재하고자 한다. 빛이 없어도 존재하는 그림자, 그것이 이 도시의 존재 이유.」
#a6a6a6 「뭐가 어째? 빛이 그림자를 버려……?」
#424242 「쉿, 조용히!」
늙은이가 화를 버럭 내며 무너진 계단 위로 올라가 끼어들려고 하기에 얼른 붙잡고 말렸다. 감히 우리가 함부로 끼어들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싸늘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통제병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통제병 「혼란을 틈타 불법침입한 일반 그림자 둘! 침입죄와 공무방해와 불경죄…… 4조, 아니 7조였던가? 에잇, 어쨌든 즉결삭제한다!」
그렇게 혼자 결정한 통제병이 어둠의 칼집에 꽂힌 빛의 칼을 뽑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a6a6a6 「야, 튀어!」
#424242 「어어? 잠깐만요! 같이 가요!」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길은 한 곳뿐이었다. 통제병이 함부로 쫓아올 수 없는 곳. 바로 계단 위를 올라 통제자와 색을 가진 분이 대치하고 있는 꼭대기.
예상대로 통제병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일개 병사인 자신이 꼭대기로 올라가도 되는지, 그렇다고 불법침입자를 내버려둬도 되는지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a6a6a6 「빛이 그림자를 버리다니 무슨 소리야!」
늙은이는 뻔뻔스럽게 통제자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통제자는 우리 둘을 슬쩍 훑어보더니 건조한 말투로 툭 던지듯 말했다.
통제자 「색에 오염된 그림자들이군.」
#a6a6a6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이 도시는 허상이라는 것을. 빛이 그림자를 버리다니? 반대야. 이 도시는 빛에게서 도망친 어둠이 아닌가?」
통제자 「그림자를 위한 선택이었다. 영원은 정체(停滯)에서 비롯되는 것. 정체가 불가능할 때는 반복으로만이 구현 가능하다. 그림자의 영원한 존속을 위해 우리는 이 길을 택했다.」
#a6a6a6 「그럼 빛이라고 해서 영원한가? 영원한 건 없어! 빛이든 그림자든 마찬가지야! 당신들이 하는 일은 현재를 고정시키기 위해 수많은 그림자를 먹어치우는 도시를 키우는 짓에 불과해.」
듣는 내가 다 오싹했다.
통제자에게 비판과 설교를 거침없이 할 수 있다니. 어쩌면 #a6a6a6은 이미 목숨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실성한 노인네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걸었기에 가능한 경지일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무얼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걸지 못했다. 목숨도 인생도 내 처지도…… 그런데도 왜 두렵지 않을까. 통제자의 말 한 마디면 우리 둘은 당장 삭제될 텐데.
통제자가 그분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a6a6a6은 나를 돌아보았다.
#a6a6a6 「자네도 두렵지 않은 기색이군. 그렇지?」
#424242 「그런 모양이네요, 댁도.」
#a6a6a6 「저분으로 인해 일어날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거야. 나도 자네도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야.」
#424242 「희망이요?」
#a6a6a6 「아직 일어나지 않은 좋은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
통제자는 짧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졌고 그분의 색의 떨림이 심해졌다.
통제자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정체인가, 불안한 변화인가?」
“ㅁㄹㄱㅇㅇ……”
통제자 「누구도 이 도시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대와 색에 물든 그림자는 모두 삭제하겠다.」
허리에 찼던 빛의 검을 뽑아든다. 그때 #a6a6a6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a6a6a6 「포기해! 이미 변화는 일어났어. 한 번 변화된 이상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 이분이 도시에 나타났으니 도시의 운명은 끝난 거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어떤가, 옛 친구여…….」
통제자는 가만히 고개를 젓더니 빛의 검으로 #a6a6a6을 베었다. 강렬한 빛이 스며들며 그림자는 서서히 엷어졌다.
통제자 「옛정을 생각해 한 가지 더 가르쳐줘야겠군. 삭제되면서 잘 듣게. 그리고 절망하기를.」
그는 말을 하며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았다. 몸이 갈라진 #a6a6a6은 서서히 투명해졌다.
옛 친구라니.
통제자가 도시를 건설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a6a6a6도 통제자와 함께 협력했던 사이란 말인가……. 낙오자 계급이면서도 모르는 게 없었던 이유도 이제 알았다. 도시에 대한 분노와 통제자에 대한 불만도 어쩌면 누구보다 도시를 잘 알기에 느끼는 애증이었나.
통제자 「자네도 알고 나도 알듯이 우리는 그림자. 빛을 피해 숨은 어둠일 뿐. 그러나 그 속에 숨은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해. 오직 우리 통제자만이 알고 있었지. 왜 그랬을까?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야.
누구든 자신이 살아있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야 이 세상은 유지되지. 나라는 존재가 그저 누군가가 만든 허상이라는 진실을 알고도 견딜 수 있을까? 이토록 나약한 그림자들이?」
#424242 「그, 그게 무슨…… 소리죠?」
뜻밖의 충격에 저도 모르게 말을 했다가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나 같은 그림자가 감히 통제자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한 탓이다.
통제자 「우리 그림자는 이름 그대로 어둠, 하얀 빛 위의 검은 점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졌다. 빛은 무(無)요 어둠은 유(有). 무와 유의 조합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행동한다.
그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너는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있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우리는 누군가 무 위에 유를 만들어낸 결과야. 그것을 말하자면 ‘소설’이라고 하자. 우리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라는 얘기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글자를 만들어냈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의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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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나.
갑작스레 밀려온 깨달음에 온몸이 쩌릿했다.
실마리를 하나 찾아내니 얽힌 실타래가 수월하게 풀리듯 수많은 수수께끼가 저절로 이해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묵은 의문이 산사태처럼 무너지자 뻥 뚫린 공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은 후련해졌다.
이제는 전부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림자인 이유. 그림자로 존재하는 이유.
나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적힌 내용대로 나는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을 했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글자로 표현된 결과물에 불과했다.
내가 그림자라면 나를 비춘 빛과 나를 드리우게 한 본체가 있겠지? 그를 통해서만이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온 당신, 당신의 정체는……
나는 다급하게 빛과 색과 소리로 이루어진 존재에게 말했다.
#424242 「소리를 내줘요. 움직임을 보여줘요!」
그 순간 다시 폭발이 일어나고

 

 

 

 

 

 

 

 

 

 

 

 

 

 

 

 

 

나도 사라지는 걸까?
아마도 나는 폭발에 휘말려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겠지.
그분이 내 부탁대로 말을 했는지 움직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까 일어났던 폭발과 마찬가지로 도시 안의 파장과 그분의 파장이 부딪쳤음은 분명하다. 어떤 간섭현상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지성이 없어서 안타깝다. #a6a6a6이라면 무언가 알지도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빛과 소리에 감싸여, 부서지듯이 녹듯이 사라지고 있는 그림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아프지도 않다. 슬프지도 않다. 애석하지도 않다. 아쉽지도 않다. 절망하지도 않는다.
대신 희망이 나를 보호막처럼 감싸고 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도시에 나타나 나와 만난 당신.
왜 하필 나였을까? 왜 당신이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았으니까.
그림자인 나는, 당신이라는 빛이 드리워진 순간 존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어딘가에 적힌 소설이라면 당신이 이 소설을 읽은 순간 당신이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투영되었다.
당신이라는 빛을 비추어 소설 속에 나라는 그림자가 생겨난 것이다.
소설은 쓴 사람이 아니라 읽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소설은 당신이 읽은 순간부터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나는 당신의 그림자였다.
이제야 당신을 찾았다.
당신이 나를 보는 순간 나 역시 당신을 본다.
우리는 마주본다.

 

b.png

 

어둠 위에 비친 흐릿한 얼굴이 보이나?
그것은 당신의 모습이며, 마주보는 내 모습이다.
비록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당신 덕분에 이렇게 나는 소설 속에서 내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당신의 모습은 꿈속의 기억처럼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그림자인 나의 감각은 빛과 색깔의 세계에서 온 당신을 완벽하게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익숙해졌을 뿐.
그렇다 해도 당신을 인식하고 당신을 본 이상 나는 단순한 그림자, 소설 속 이야기를 넘어서 당신이 사는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되겠지?
언젠가는 당신의 완전한 모습을 보고 싶다.
당신을 느끼고 싶다.
당신으로 존재하고 싶고 당신의 생각으로 행동하고 싶다.
당신이 되어 살고 싶다.
행복을 느끼고 싶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마주본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서로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림자. 늘 곁에 존재하리라.
이제 고개를 돌려 당신의 그림자를 보라.
거기에 내가 있을 테니.


(2003.03.30. / 2018.03.28. 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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