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곽재식 너 때문이거든

2024.02.03 15:4102.03

 

너 때문이거든

 


김희정은 끔찍한 일을 겪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밤 늦은 길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당한 것이다. 강도는 과일 깎는 칼 정도 되는 칼을 턱 밑에 들이 밀고 돈을 내어 놓으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무시무시한 무기는 아니었지만 잘못 찔리면 위험할 것은 분명했다. 김희정은 갖고 있는 현금을 모두 내어 주었다. 2만 3천 원. 큰 돈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돈의 액수보다는 공포감이 더욱 큰 피해였다.

강도는 뭐가 즐거운 지 낄낄 웃으면서 2만 3천원을 들고 사라졌다. 김희정은 정신을 추스린 후 바로 경찰에 연락했다. 길고 지겨운 질문에 대답하고 나자, 경찰의 심드렁함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바로 다음날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강도를 잡았다고 했다. 감시카메라에 얼굴이 너무 잘 보이는 곳에서 범죄가 벌어졌고, 마침 강도는 얼굴 파악이 쉬운 사람이어서 쉽게 잡혔다고 한다. 듣자 하니 강도라는 사람이 의외로 높은 사람이었다든가, 부자였다든가, 높은 사람과 부자의 자식이었다든가 그런 것 같았다.

하루가 더 지나자 김희정에게 변호사 한 사람이 찾아 왔다.

언제, 어디서든, 얼굴을 모르는 변호사가 찾아 오는 것은 항상 두려워할 만한 일이다.

“김희정 선생님이시죠? 저희 의뢰인에게 고소를 당하셨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변호사의 목소리는 맑고 발음은 분명했다.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 목소리 같이 들렸다. 김희정은 깜짝 놀랐다.

“제가요? 왜요? 누가요?”
“얼마 전에 칼을 든 사람에게 돈을 내신 일이 있으시지요?”
“강도를 당했죠. 피해액수가 2만 3천원이고요. 정신적 피해도 있고요.”

그 말을 듣고 변호사는 풋, 하는 소리까지 내면서 웃었다. 정신적 피해라는 표현을 변호사가 아닌 사람이 변호사를 향해서 사용하면 항상 비웃음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고소를 당하신 겁니다.”
“네? 뭐요? 뭔가 잘못 아셨겠죠. 제가 강도 피해자라니까요. 제가 강도를 당했으니까 제가 누구인가를 고소를 하면 고소를 하는 거겠죠. 제가 어떻게 고소를 당하나요?”
“아니오. 김희정 선생님께서 고소를 당하셨어요. 분명히 법을 위반하셨고 그리고 그 위반 사항 때문에 그때 칼을 들고 계셨던 제 의뢰인이 피해를 입으셨으니까요.”
“무슨 말이에요? 강도가 저를 고소했다고요? 강도를 당한 게 잘못이라는 건가요? 강도가 범죄자잖아요. 저는 그 피해자고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변호사는 일단 설명을 하지 않으면서 잠깐 이상한 태도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김희정이 제발 무슨 소리인지 알려 달라고 안달이 나려 할 때 즈음이 되어 변호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의뢰인이 입은 피해가 상당히 크시고, 또 김히정 선생님께서 법을 위반하시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의뢰인의 법적 대리인으로서 저는 이렇게 하는 게 정당한 조치인 거죠.”
“무슨 말이에요? 그 강도가 칼을 들이 대고 있어서 저는 돈을 빼앗겼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에요? 저는 맞서 싸우지도 않았어요. 정당방위, 뭐 그런 것도 아니라니까요.”
“정당방위하고는 관계가 없죠. 선생님께서는 법적인 정당성을 확보한 상황도 아니시고요.”
“제가 어떻게 해서 무슨 법을 어겼다는 건데요?”

그 질문을 듣고 변호사는 좀 더 즐거워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선 사건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봅시다. 그리고 그 중에서 더 결정적이고 중요한 부분, 뒷 부분을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2만 3천원을 지불하신 부분이요.”
“그걸 지불이라고 하나요?”
“법적으로는 명백한 지불이죠. 선생님께서 안전을 확보하시는 대가로 타인에게 제공한 금전적인 대가니까요.”
“금전적인 대가라고요?”
“그렇죠. 증거 영상 상으로 보면, 선생님의 턱 밑에 칼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만한 상황이죠. 확실한 건강 상의 어려움을 생각할 수 있을만한 상황인 겁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제 의뢰인에게 대가를 지불하셨고 제 의뢰인은 그 어려움을 제거해 드렸죠.”
“건강 상의 어려움을 제거해 줬다고요? 들이대고 있다는 칼을 치웠다는 뜻이잖아요.”
“표현은 어떻든,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저희 의뢰인이 그 어려움을 제거해 드렸고 그에 따라 선생님이 2만 3천원을 지불하셨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몸에 가시가 박혔는데, 의사가 수술로 그 가시를 제거해 주었다, 그리고 돈을 냈다, 그런 것과 똑같은 거래죠.”
“어떻게 그게 똑같나요? 애초에 그 어려움이라는 거. 칼을 들고 와서 제 턱 밑에 갖다 댄 사람이 그 강도잖아요. 그 부분은 왜 빼고 이야기하죠?”
“그것은 사건의 전반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우선 후반부 상황만 이야기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더 중요하니까요.”
“왜 그게 더 중요하죠?”
“명백하고 계산 가능한 돈 거래가 일어난 순간이니까요. 선생님은 저희 의뢰인이 의도적으로 칼을 들고 와서 선생님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으로 칼을 꺼내서 들이 밀었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계신데, 의도나 생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주관적인 사항 아닙니까? 그런 식의 주관적인 내용은 따지기 어렵죠. 문서로 증빙되지도 않고요. 그래서 일단 그 부분의 내용은 잠시 후에 좀 더 심도 있게 논의하도록 하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복잡해지지 않게 후반부에만 집중해 보자고요.”

김희정은 어리둥절했다. 변호사는 그 표정을 확인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건 후반부만 보면, 선생님께서는 의뢰인에게 2만 3천원을 지불하시고, 그 지불의 대가에 해당하는 의뢰인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관례적이고 관습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이행하신 것이 됩니다.”
“의뢰인의 서비스란 것이 들이 대고 있던 칼을 치우는 것이란 말인가요?”
“그렇죠. 저희 의뢰인은 그 서비스를 충실히 잘 이행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는 2만 3천원을 지불하시고 저희 의뢰인을 통해서 턱 밑의 칼이 제거 되어 건강적, 정신적 효용을 얻으셨죠.”

김희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변호사를 통해 따졌다.

“하여튼 그게 왜 강도가 날 고소하는 이유가 되는데요?”
“일단 큰 것으로는 김희정 선생님께서 관례적 계약을 무시하시고, 분명히 구매하고자 한 서비스를 얻으셨는데도 그것을 무시하시고 제 의뢰인을 범죄자라고 신고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쌍방이 동의한 계약 관계로 거래가 종결 되었는데, 뒤늦게 그 거래에 앙심을 품고 범죄자로 몰아 붙이는 공격을 하신 것이니까요.”
“범죄자로 몰아 붙인 게 아니라, 강도 맞잖아요.”
“정상적으로 서로가 동의한 계약이 이루어지고 지불과 서비스 제공이 즉시 완전하게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2만 3천원을 내시고 목숨을 잃을 어려움에서 벗어 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신고한다는 것은, 뭐랄까요. 이런 표현 죄송합니다만, 도둑놈 심보 아닐까요?”
“뭐요? 강도가 강도 당한 사람에게 도둑놈 심보라는 말을 써도 되나요?”
“선생님에게는 다른 혐의도 있습니다.”
“제가? 혐의라고요?”

김희정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변호사는 그 당황을 잠시 음미해 보라는 듯 또 몇 초 간 기다렸다.

“우선 2만 3천원이라는 금액이 너무 작습니다. 경호 및 안전 사업 진흥법이라는 법률을 보면, 사람을 흉기 등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절차에 대한 적당한 대가는 2만 3천원 보다는 훨씬 더 높습니다. 특히 생명이 달린 위험을 해결하는 일이라면,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최소한 250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서비스로 판정 됩니다. 그렇기에 2만 3천원 밖에 지불하지 않으신 것은 지나치게 과소한 액수의 서비스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칼을 들이 댔다가 치운 대가 치고 2만 3천원은 너무 적고 250만원을 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나요? 칼을 제거해 줘서 목숨을 구한 것인데요. 250만원이 적나요?”
“칼을 제거해 준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강도가 나 한테 칼을 들이 댄 거 잖아요.”
“사건의 뒷부분만 해석해 보고 있잖아요. 게다가 최근에 개정된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에 따르면 특정한 몇몇 서비스에 대해 지나치게 적은 금액을 지불한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 엄벌에 처하도록 하는 법률이 적용 되죠. 사람의 목숨이 달린 굉장히 중요한 서비스인데 선생님이 너무 적은 돈을 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너무 잘못된 것이라는 법리에 따른 겁니다. 이 법에 따르면 선생님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
“뭐요? 내가 3년 이하의 징역이라고요? 잠깐만요. 목숨이 달린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는데, 이 사건에서 그 목숨은 제 목숨이라고요.”
“그것은 선생님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인 것이고요. 일단 법리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변호사는 눈웃음을 조금 짓더니 그러면서 동시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위법 행위도 저지르셨어요.”
“무슨 위법이요?”
“사회적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특별법 위반 입니다. 선생님은 이 강도 사건의 결과로 원래 위험에 처해 있던 선생님의 목숨을 구하시는 아주 큰 명백한 수익을 얻으셨어요. 사회적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이때의 범죄 수익은 금전적 수익 뿐만 아니라 기타 금전적 가치가 있거나 생활상, 편의상 효용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유형, 무형의 이익으로 수익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선생님께서 목숨을 구하신 것도 아주 큰 수익이지요. 사회적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그렇게 얻은 수익은 국가에 환원하도록 되어 있죠. 그런데 범죄의 결과로 선생님이 얻은 수익을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모두 차지하셨어요. 이런 것 법률 위반이죠.”
“그 수익이라는 게 강도가 벌어졌는데 목숨을 건졌다는 거 잖아요? 그게 죄인가요?”
“사회적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수익을 함부로 챙긴 이상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시는 죄입니다.”
“아니, 내가 내 목숨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하는데요?”
“민법상 채무 변재의 일반 원칙을 준용하면 환원하는 방법은 선생님께서 알아서 찾아 내야 하는 것이지 피해자인 저희 의뢰인이나 정부가 찾아 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법이라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수익을 환수하는 게 목적이잖아요. 범죄에 피해를 입은 사람의 수익을 환수하는 게 목적일 리가 있나요?”
“김희정 선생님께서는 사회적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특별법 전문을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막연히 확신 하시지요? 법조문에는 그런 구분 규정은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하시면서 무심결에 선생님께서 수익을 얻으셨다고 인정 하셨군요. 그 부분은 제가 기록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이쯤으로 흘러 가자 김희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약한 장난 정도가 아닌 일인 것 같았다. 김희정은 어지러워지는 머리 속을 겨우 진정시키면서 생각의 줄기 하나를 붙잡았다.

“저기, 그, 사회적 범죄 수익 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관계되는 거라면, 이게 강도 범죄라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이게 다 범죄니까, 그냥 다 원천 무효 아니에요.”
“원천 무효는 그런 게 아니죠.”

변호사는 또 변호사들만 지을 수 있는 웃음을 웃었다.

“김희정 선생님께서 이 사건을 강도로 규정하시고 신고를 접수하셔서 입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희정 선생님 입장에서는 강도로 규정된 것입니다. 저희 의뢰인은 범죄 행위를 아직까지 인정하신 적이 없으니까, 저는 거기에 의거해서 법적 대리인으로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고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김희정 선생님이 스스로 판단하신 범죄 규정이 선생님의 상황을 따질 때에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김희정 선생님께 적용되는 범죄 처벌에 관해서는 이 사건의 범죄 성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네? 일사부재리 원칙이 그런 건가요? 그런 게 아니잖아요?”
“대법원 판례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께서는 사건의 후반부 기준으로 세 가지 범죄 혐의가 있고, 그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법률 전문가로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 선생님은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커요.”

김희정은 “말도 안돼.” “그런 게 어딨어요” “무슨 그런 얼토당토 않은” 같은 말을 하려다가 말다가를 반복했다. 변호사는 이제 김희정이 확실히 제압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하는 자세와 목소리를 바꾸어 다음 주제를 제시했다.

“이제, 사건의 앞 부분을 살펴 보죠.”
“그래요. 앞부분. 강도가 내 턱 밑에 칼을 들이 댄 부분.”

김희정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때 선생님께서는 안전상의 중대한 과실을 범하셨습니다.”
“강도가 칼을 들이 댔는데, 강도가 아니라 내가 안전 과실을 범했다고요?”
“선생님. 이게 저는 한국 사람들의 참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변호사는 무슨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감정적으로만 일을 대하실 것이 아니라 법을 보세요. 선생님께서는 보행자 안심 보도 설치 진흥법을 위반하셨습니다.”
“네? 보행자 안심 보도 진흥법이요? 그게 뭔데요?”
“보행자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법이라는 거죠. 길을 걷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다니는 데 대한 규정입니다.”
“보행자의 원전을 진흥하는 법이라면 제가 안전하게 다니는 일을 진흥하는 법일 거잖아요. 그런데 길 가다가 칼로 위협 당한 제가 왜 과실을 범한 게 되나요?”
“저도 선생님 상황이 어느 정도는 이해 되기에, 이것은 제가 법적 분쟁 관계를 떠나서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단 대원칙을 하나 이해하셔야 합니다. 모든 법에서 그 법에 ‘진흥법’이라는 말이 들어 가 있으면, 그것은 그 대상을 진흥시키는 법 같지만 사실은 괴롭히는 법입니다. 이 원칙은 경험칙입니다만, 항상 적용된다고 보아도 무방한 원칙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흥법이 무슨 함정인가요?”
“모든 진흥법이 함정은 아니죠. 진흥법 중에 상당수는 그 법에 따라서 정부 기관이나 공공 기관을 세워서 낙하산 정치인들이나 퇴직 공무원들이 건너 갈 높은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정도가 목표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법은 큰 피해는 없지요. 그 기관 행사에 관련 업계 사람들이 자주 찾아 가 주어야 하고, 무슨 보고 자료 만들게 협조해 달라고 하면 굽실굽실하면서 도와 주고 하는 정도의 귀찮은 일은 생길 수 있겠습니다만, 그게 큰 괴로움은 아니니까요.”
“제가 그런 경우에 해당 된 건가요?”
“불행하게도 선생님게 적용된 보행자 안심 보도 진흥법은 그런 괴로움이 크지 않은 사례에 속하지 않습니다. 정말 아주 제대로 된, 심각한 진흥법이죠.”
“뭘 진흥하길래요?”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뭐든 진흥하는 것은 없습니다. 법에 따르면 안심 보도 관리 센터라는 기관이 설립 되어 그 기관에 안심 보도를 신청하면, 그 길이 안심 보도인지 아닌지 정하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날 서 계셨던 그 길은 그 절차에 따라 아직 안심 보도로 승인이 나지 않은 길이었죠. 다시 말해서 선생님은 보행자 안심 보도 진흥법에서 정하는 안심 보도가 아닌 곳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그냥 서 있었던 것 뿐이잖아요?”
“그렇지 않죠. 안심 보도가 아닌 곳에서는 선생님께서는 다른 이동 주체의 이동을 방해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안심 보도가 아닌 곳에서 화물차나 작업용 차량이 지나가는 데 선생님이 길을 막고 서 있으면 불법이라는 거죠.”
“저 한테 온 것은 화물차나 작업용 차량이 아니라 칼 든 강도잖아요.”
“법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저희 의뢰인이 들고 있던 도구는 특별한 흉기나 불법 무기가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과일 깎는 등의 목적을 위한 칼이었죠. 도구의 분류 및 도구 개발 사업 지원에 관한 법률 상에서 작업용 단순 도구로 분류되는 도구예요. 그러므로 저희 의뢰인이 과일 깎는 칼을 들고 선생님 쪽으로 간 것은 작업용 차량이 지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법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 행위를 방해하셨죠. 도로 교통 중 정차, 주차 및 기타 정지 행위에 관한 법률 상의 위법적인 정차 또는 정지 행위를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냥 서 있으셨던 것 뿐이라면 단순 실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상대를 범죄로 규정하시고 금전 거래를 시도하셨고, 심지어 범죄 사실 신고까지 하셨죠. 이런 것은 의도적으로 저희 의뢰인의 행위에 대한 방해 의사를 명백히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행위를 방해하는 의사는 있었겠죠. 강도가 칼을 들이 대니까, 그걸 방해하고 싶잖아요.”
“인정하신 대로, 선생님께서는 저희 의뢰인의 정당한 행위를 의도적으로 방해하셨으므로 단순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범죄의 모든 구성 요건을 갖추게 되므로, 선생님께서는 이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 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될 겁니다.”
“아니, 아니, 그냥 단순한 강도 죄라든가, 그런 것에 의해서 강도가 죄를 지은 게 될 수는 없나요?”
“지금 선생님께서 강도를 저지르셨다고 자백하시는 건가요?”
“아니오. 제가 강도를 당했다고요. 제가 피해자라고요. 뻔히 아시잖아요. 제가 강도를 당한 사람이라니까요.”
“선생님의 법적인 문제는 선생님께서 법적 대리인을 직접 선임하셔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김희정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변호사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긴급한 생계상의 사업 요구와 그 보장에 대한 법률을 위반하셨습니다.”
“그건 또 뭔가요?”
“새로 생긴 법률이죠. 경제 위기, 지속적인 불경기 등으로 도저히 사업에 필요한 제반 비용을 결제할 수 없는 주체는 비용 결제를 나중으로 미루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감도 못잡겠네요.”
“요즘 굉장한 불경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시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긴급한 조치를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남에게 돈을 주거나 서류 처리를 하는 시일이 좀 밀려도 참아 줘야 한다는 법률입니다.”
“그런 법률은 언제 또 생겼는데요?”
“지난 번에 건설회사들 망한다고 난리 났을 때, 급히 통과된 것 모르십니까?”

김희정은 이제 진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치고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저희 의뢰인께서는 당시 긴급한 사업 상의 요구로 수익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가 얼마나 긴급한 상황이었는 지는 의뢰인의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칼을 빼들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긴급한 상황에서 저희 의뢰인은 정당한 수익의 요구를 할 수 있는 사업상의 법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리를 선생님께서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제지하셨죠.”
“아니 남의 돈을 빼앗을 권리가 어디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보유하신 돈은 현재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결과로 선생님에게 더 많이 지급되어 있는 것 뿐인 것이지 선생님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신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보유 자산에는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자산은 사회적 의미에 따라 법적인 절차에 의해 공적 처분이 가능하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생활인으로서 당연히 아시고 계셔야 하는 상식이지요. 그리고 저희 의뢰인은 바로 그와 같은 법률적 권리의 맥락에서 정당한 사업 수익을 추구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칼로 사람을 공격하고 돈을 빼앗아 가는 게 어떻게 정당한 일인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 의뢰인이 선생님에게 신체적 위해를 입힌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도 그것은 인정하시는 것이죠. 선생님의 주장을 100%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저희 의뢰인은 선생님의 턱 밑에 칼을 가까이 대기만 하신 것이지 1 mm도 흠집을 내지는 않았습니다. 전문의에게 진단서를 발급 받아서 다만 전치2주 짜리라도 피해를 입었다고 입증을 하실 수 있는지요? 아니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받으신 신체적 위해는 없습니다.”
“그래도 칼을 들이 대고 돈을 빼앗았다니까요.”
“신체적 위해에 대해서는 발생한 것이 없으니 0인 것이죠.”
“그러면 저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요?”
“정신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바로 결론을 내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제 모든 사건을 아주 상식적으로 넓은 시각으로 한 번 보죠. 저희 의뢰인은 정당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여 사업자로서 당연히 보장 받을 수 있는 수익을 얻으려고 하신 것 뿐이고, 선생님께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본인의 기준에서만 피해를 입으셨다고 주장하시는 것인데, 심지어 그에 관련해서 여러 가지 범법 행위를 하셨지요. 그렇다면 결국 저희 의뢰인 보다는 선생님께서 긴급한 생계상의 사업 요구와 그 보장에 대한 법률에 의한 권리를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를 저지르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무슨, 그런 게, 그런 게...”

김희정은 말을 더듬었다.

“그건 또 처벌이 뭔데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 만원 이하의 벌금입니다.”
“무슨 빌어먹을, 다 처벌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 만원 이하의 벌금이야?”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면서 3천 만원이 적당한 지, 2천 8백만원이 적당한 지, 3천 1백만원이 적당한 지, 누가 귀찮게 따져 보고 계산해 보겠습니까? 숫자 3이 어감도 좋고 좋아 보이니까 어지간한 법은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김희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쳐서 주저 앉은 것 같은 모양으로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그냥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변호사는 명함을 꺼내 놓았다.

“지금 대한민국 법제처의 웹 사이트를 보면 현재 이 나라에는 12만 7천 8백 5십 3개의 법이 각종 법률, 명령, 각종 규칙에 나뉘어져 정해져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 잘못 걸리면 범법자가 되는 거죠. 12만 개의 법의 내용이 뭐고 그걸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는 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있다고 해도 소용은 없습니다. 국회에서 1년만 활동을 하면, 법률은 800개쯤, 다른 명령과 규칙들은 5천 개 쯤 바뀌니까요. 하루에 12개 꼴로 새로운 법이 생기거나 있던 법이 바뀝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이 소송을 잘 할 수 있는 팀을 짜서 누구에게든 작심하고 덤비면 어떻게든 사람을 옭아맬 수 있지요. 소송을 한 번 걸면, 뚝딱 하고 한번 재판정에 갔다 오면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도 몇 번이고 오라 가라, 서류를 내라, 변호사를 선임해라, 돈을 내라, 하면서 사람을 계속 괴롭히는 일을 1년, 2년, 3년이고 질질 끌 수 있지요. 그러면 제대로된 일상 생활을 못하니까 직장에서도 잘리고 사업도 망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3년을 버텨서 재판 결과가 나와도, 그 사이에 바뀐 새로운 법을 뭐든 찾아 새로 소송을 또 걸면 되는 거고요. 그런데 가만 보면, 다들 이런 걸 좋아해요. 국회의원들은 자기들이 새로운 법을 하나 만들 때마다 ‘나 열심히 일했지’라고 생색을 낼 수 있으니까 뭐가 되었든 법을 계속 만들려고 할 수 밖에 없죠. 법률 전문가들이라는 변호사들에게 물어 보면 변호사들 일거리는 법이 많을 수록 많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다들 ‘뭐든 법을 많이 만들면 좋다’고 하지요.”

그리고 변호사는 하나 둘 재판을 앞두고 필요한 좀 더 서류 처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김희정은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변호사에게 문득 물었다.

“저기, 그냥 인간적으로 하나 물어 보죠.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나요?”

그에 대한 변호사의 답변은 오늘의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진솔하게 들렸다.

“변호사를 잘 구하셔야죠.”


- 2024년, 여의도에서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극기4 2022.07.31
곽재식 소설 쓰다 그만두는 이야기3 2022.08.31
곽재식 소원의 정복자2 2022.09.30
곽재식 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2 2022.10.31
곽재식 백투 유령여기 X2 - 자주 묻는 질문(FAQ) 2022.12.01
곽재식 한산북책 2023.01.01
곽재식 치트키 2023.02.01
곽재식 나의 기쁨 2023.02.28
곽재식 셜록GPT 2023.03.21
곽재식 천장의 공포 2023.04.30
곽재식 동부여 2023.06.01
곽재식 일곱 별의 숨결을 흙으로 빚은 몸에 불어 넣어 2023.07.01
곽재식 서하 2023.08.01
곽재식 인공지능 때문에 인류 멸망한 이야기 2023.09.01
곽재식 해탈의 길 2023.10.02
곽재식 심연의 이치 2023.10.31
곽재식 제호 2023.12.02
곽재식 나비 혁명 2024.01.02
곽재식 너 때문이거든 2024.02.03
곽재식 하찮은 묵시록 2024.03.01
Prev 1 ... 4 5 6 7 8 9 10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